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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사심(邪心)으로
포착한 사기(詐欺)다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의 읽고

사진은 사심(邪心)으로 포착한 사기(詐欺)다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의 읽고    

  

범람하는 이미지, 시시각각으로 업데이트되는 동영상,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드는 메시지의 혼란 속에서 우리는 온전히 정신을 차리고 집중하기가 점차 어려워진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니콜라스 카가 말하는 ‘방해 기술의 생태계’에 걸려든 현대인은 늘 산만하고 바쁘다. 몰입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도 잠시도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수많은 SNS 기술이 거미줄처럼 엮여 있다. 방해 기술은 집중과 몰입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전달하는 메시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게 막는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 중에서 특히 시각적 이미지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사진은 텍스트 메시지로 전달하는 기술과는 다르게 특정 이미지에 주목하게 함으로써 다르게 생각하기를 막아버리는 미디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특히 재난이나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참혹한 사진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매일 접하는 현대인들이 어떻게 연민과 공감력을 상실해가고 있으며, 느낌의 연대를 통한 상상력의 실패가 사진을 통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성찰한 문명 비평서가 있다. 바로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다.    



사진은 공감과 상상력의 실패를 조장한다   

 

“사진들을 계속 본 나머지 충격에 빠져, 의식이 멍해질 수도 있겠다”(31쪽). 마치 강렬한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감각이 둔해지듯이 웬만큼 충격적인 이미지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너무 자극적인 이미지에 길들여진 현대인을 자극하는 방법은 이전보다 더 자극적인 이미지로 자극하는 것이다. 웬만한 자극을 주어서는 사람들은 그저 먼산의 불구경하듯 관망할 뿐이다. 이런 이미지에 길들여지면 사진으로 전하는 참혹한 타인의 고통도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관망만 할 뿐이다. “충격은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충격은 점점 엷어지는 것이다……사람들은 실제 생활에서의 공포에 익숙해질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이미지가 건네주는 공포에도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다”(126쪽). 충격적인 사진을 봐도 그런 사진을 너무 많이 현대인은 사진 속의 실상에 대해 연민의 정도 느끼지 않는다. 또 몇 사람이나 죽었다고 통계적인 숫자에 잠시 주목할 뿐이다. 사진은 연민의 정을 희석시킬 뿐만 아니라 발 벗고 나서려는 공감과 긍휼감도 무력하게 만드는 장본인으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뉴스가 소위 전 세계라는 어법으로 말하는 세게는 지리적으로나 관심 여부로나 아주 국한된 장소일 뿐이며, 뭔가 알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도 매우 짧고 굵게만 방송되는 것이 고작일 뿐이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벌어진 전쟁들 중에서도 고작 몇 개만이 추려내질 뿐이니 그처럼 선택된 전쟁들 속에서 모아놓은 고통을 의식한다고 한들 그것은 억지 의식일 뿐이다. 게다가 카메라에 찍힌 형태인 한, 그 의식은 금방 불타올랐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된 뒤 곧장 우리의 생각에서 사라질 것이다”(41쪽). 사건이 발생한 장면을 찍어낸 사진은 사건의 전모를 다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특정 장면 몇 개만 추려서 보여줄 뿐이다. 거기서 보여주는 충격적인 사진도 충격적인 사진에 노출이 될수록 기억되지 않고 추억 속으로 사라진다.     


“어떤 고통을 전 세계적인 것으로 다룸으로써 실제보다 과장되게 만들 경우, 사람들은 자신들이 훨씬 더 많이 보호받아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어떤 문제가 이 정도의 규모로 인식되어 버리면, 고작 연민의 늪에 빠져 허우적 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해당 문제를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렇지만 모든 역사와 마찬가지로 모든 정치는 구체적인 것이다”(122쪽). 한 사람의 죽음에는 오열하면서도 수백 명을 넘어 수천 명의 죽음은 그냥 무덤덤한 반응을 보인다. 구체적으로 와 닿지 않고 죽음이 추상화된 이미지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진은 상상력보다 우월한 권위를 지니게 됐다. 그래서 인쇄된 단어는 어제의 것이 됐으며, 말로 내뱉는 단어는 훨씬 더 옛것이 됐다. 사진은 완전히 현실이 된 듯하다”(47쪽). 현실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담아내는 사진이 아니라 사진으로 찍힌 현실이 진짜 현실로 둔갑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사진을 통해 과장된 이미지를 받은 사람은 사진이 말하고 싶은 진정한 의도와 의미를 왜곡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사진의 이미지가 품고 있는 상상력이 그것으로 공감받는 사람의 상상력과 맞닿아 감정의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녀(울프)는 말한다. 우리는 괴물이 아니라 교육받은 계급의 일원이라고. 우리가 겪은 실패는 상상력의 실패, 공감의 실패라고. 우리는 이런 현실을 마음 깊숙이 담아 두는 데 실패해 왔다고”(25쪽). 점차 사진은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거나 상황적 맥락성을 대변하지 않고 현실보다 더 강력한 현실로 부각된다.     



사진은 타자의 아픔에 대해 위장된 연민을 부채질한다    


“아 끔찍한 일이군. 그리고는 채널을 돌렸습니다……‘아 끔찍한 일이군’이라고 한 마디 하고는 딴 프로그램을 본다고 해서 화를 낼 수는 없지 않겠어요? 늘 그런 식이죠. 사람이란 그런 존재입니다.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고 느끼는 한, 사람들은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151쪽). 지구촌 어딘가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수백 명 많게는 수천 명이 죽어가는 장면을 봐도 개개인의 겪는 고통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죽어가는 사진 한 장으로 본다. 그리고 몇 명이 죽었다는 통계로 받아들이고 금방 무덤덤해진다. 저 사고는 나와 관계없는 지구촌 어딘가에서 일어난 사고라고 생각한다. 무관심의 관성이 생긴 것이다. “연민은 변하기 쉬운 감정이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감정은 곧 시들해지는 법이다”(153쪽). 너무나 자주 어제보다 더 끔찍한 사진을 보면서 연민의 감정이 순간적으로 일어나지만 이내 자신이 뭔가 조치를 취하거나 행동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연민은 뿔뿔이 사라진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154쪽). 연민은 타자의 고통에 감정을 이입해서 같이 아파하는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연민은 타자가 겪는 고통스러운 상황으로부터 나는 벗어나 있다는 일종의 안도감이나 만족감의 표현이다.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현대인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은 나로 인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생각하며 발을 빼려는 뻔뻔한 감정이라는 데 있다. 연민은 타자의 고통에 나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무죄증명의 표식일 뿐이다.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사건과 사고의 참혹함이 날이 갈수록 더해져도 나는 그런 사건과 사고를 일으킨 원인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타인이 겪는 고통에 대해 보여주는 우리의 연민은 이미 가장된 연민이고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보여주는 타성에 젖은 위장된 연민이다. 세계의 비참함을 찍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진작가,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사진은 “이런 단일한 방향 아래에서 그 이주민들이 겪고 있는 상이한 고난과 그 고난을 불러온 상이한 원인을 한데 뭉그러뜨려버린다. 어떤 고통을 전 세계적인 것으로 다룸으로써 실제보다 과장되게 만들 경우 사람들은 자신들이 훨씬 더 많이 보호받아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게다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고통이나 불행은 너무나 엄청날 뿐만 아니라 도저히 되돌릴 수도 없고 정치적으로 개입을 하더라도 그다지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들어버린다. 어떤 문제가 이 정도의 규모로 인식되어 버리면 고작 연민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122쪽). 비참한 장면과 처절한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재난과 전쟁 상황을 찍은 사진은 실제보다 부풀려진다. 사진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대책을 강구해도 고통은 그치지 못할 것이라는 좌절감과 무력감을 심어준다. 나아가 연민을 느끼지만 마술에 걸린 연민처럼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연민의 관성에 젖어버린다. 타자의 고통은 겪어보지 않으면 공감할 수 없다. 더구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적 사진에 익숙해진 현실에서 위장된 연민이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공감과 상상력의 실패를 반복하게 만드는 사진의 이미지를 통해 우리가 정말 배워야 할 점은 사진에 나타난 타자의 고통은 영원히 공감할 수 없다는 각성이다. 그러니 참혹한 사진 속에 드러난  타자의 불행을 소비하듯 감상하며 위장된 연민이 정을 품는 우리들의 자세부터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사진은 편파적 사견(邪見)의 산물이다    


로베르 두아노가 1950년에 라이프를 통해 게재한 ‘시청 앞에서의 입맞춤’이라는 사진, 젊은 남녀 한 쌍이 파리 시청 근처의 보도에서 입 맞추고 있는 사진은 먼 훗날 일당을 받고 고용된 한 쌍의 남녀가 두아노의 지휘 아래 입을 맞추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진에 대한 사실이 밝혀지기 전에 많은 사람은 두아노의 사진을 보고 고이 간직해야 할 낭만적인 사랑과 낭만이 넘치는 파리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진은 사기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연출됐던 그토록 많은 사진들이 순수하지 못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증거가 되어버렸다. 대부분의 역사적 증거들이 그렇듯이 말이다”(90쪽). 일단 찍은 사진은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어딘가에 기록으로 남는다. 사진을 찍은 사람의 진정성과 관계없이 사진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간주된다. 그 사진에 담긴 사연이나 배경을 알지 못하면 사진은 영원히 사실적 이미지를 전달하는 매체로 남는다. “이 사진이 찍힌 지 수십 년이 흘렀어도 관찰자들, 즉 이 사진을 본 사람들은 이 사진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푼다거나, 이 사진이 보여준 추악함을 없앤다거나, 자신들도 공동의 방관자라는 사실을 깨우치지 못한 채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 사진에 찍힌 것 같은) 표정을 보게 될 것이었다”(95쪽). 누군가 대단한 지적 호기심을 발휘하지 않는 이상, 또는 역사적 문제의식을 갖고 사진의 이면을 파고들지 않는 이상 사진 속에 담긴 이미지는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을 것이다. “사진은 대상화한다. 사진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변형시켜 버린다. 그리고 사진은 일종의 연금술로서, 현실을 투명하게 보여준다고 높이 평가받는다”(125쪽). 과연 사진은 현실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이미지일까? 여기에는 많은 의문이 따른다. 오히려 사진은 작가의 의도와 카메라 구도를 맞춰 보여주고 싶은 특정 장면을 부각하거나 희석시켜 본래의 실상과 다른 대상으로 변형시켜버린다.  

   


“현대성의 시민들,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폭력의 소비자들, 전쟁터에 직접 가보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도 그 참상을 세세하게 말하는 데 정통한 사람들은 진실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비웃도록 단련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좀체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도록 온갖 일을 다하는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다. 위험에서 멀리 떨어져 의자에 앉은 채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164쪽). 이제 현장에 가서 참혹한 실상을 직접 겪어보지 않고도 마치 직접 체험한 사람처럼 진실을 비웃을 수 있는 가능성은 사진에서 찾는다. 참혹한 실상을 보여주는 사진을 보고 사진에 담긴 작가의 사심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도 말하는 연기자가 점차 늘고 있다. 조작된 현실을 진짜 현실이라고 우겨대는 사람들 사이에 진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오히려 사실을 왜곡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힐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사람들이 사진을 통해서 뭔가를 기억한다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사진만을 기억한다는 데에 있다. 이렇듯 사진만을 통해서 기억하게 되면 다른 형태의 이해와 기억이 퇴색된다”(135쪽). 작가가 강조점을 두고 드러내기 위해 특정 이미지를 부각하면 그 이미지가 전하는 메시지만 기억한다. 메시지는 사진의 이미지와 결부되어 다른 기억을 희석시키거나 망각하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사진은 기억을 조작하는 기능도 함께 지닌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진을 불러낼 수 있다는 것이 되어버렸다”(135쪽). 사건과 사고가 갖는 의미심장한 스토리, 그 스토리가 발생한 콘텍스트, 콘텍스트가 품고 있는 사연과 문제의식은 기억나지 않고 상황의 특정 장면을 부각한 사진작가의 이미지가 마치 그 상황 전체를 대변하는 것처럼 기억되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화해한다는 것은 잊는 것이다. 즉, 화해하려면 기억이 불완전하고 한정되어 있어야만 한다”(168쪽). 이야기는 잊어버리고 이야기에 나오는 특정 장면의 이미지만 떠오른다.  

   

“사진 이미지도 누군가가 골라낸 이미지일 뿐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구도(構圖)를 잡는다는 것이며, 구도를 잡는다는 것은 뭔가를 배제한다는 것이다”(74쪽). 한 장의 사진에 모든 것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 작가는 사진을 찍기 전에 어디에 초점을 두고 찍을지 구상한다. 작가의 구상은 사진을 찍기 전에 구도로 그려진다. 어떤 장면을 중심으로 찍고 다른 장면은 배경으로 처리한다든지 선택과 포기가 순간적으로 일어나면서 한 장의 사진이 찍힌다. 사진은 작가의 선택과 포기, 참여와 배제의 치열한 각축전이 낳은 산물이다. 작가는 초점을 바꿔 초점을 흐리게 만드는 마술도 부린다.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진들의 초점, 모든 것을 그들의 무능함으로 환원하는 그 초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120쪽). 뭔가 갈급하거나 간절한 희망이 있어서 바라보는 눈동자를 사진작가의 구도로 무능하게 쳐다보는 눈으로 바꿔버린다. 그래서 사진 속의 주인공이 겪는 문제를 자신의 무능함으로 생긴 것이라고 세상 사람에게 알려버린다. 사실은 사연과 배경이 숨어있는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그 무엇이 됐든지 간에 피사체를 변형시키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어떤 이미지를 아름답게(혹은 끔찍하거나 견딜 수 없을 만한 것으로 그도 아니면 꽤 견뎌낼 만한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116쪽). 사진은 결론적으로 사심(邪心) 가득한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사기(詐欺)다.     



참혹한 이미지의 공포가 연민을 희석시킨다    


타자는 고통을 온몸으로 겪고 있지만 내가 사는 곳에서 일어나지 않는 먼 나라의 이야기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지금 여기는 전쟁터가 아니고 평온한 삶의 터전이다. 전쟁터는 나와 거리가 먼 타국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느끼는 안도감과 연민은 나의 무관심과 더불어 무책임한 자세를 드러내는 어리석음의 극치다. 나도 어쩔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내가 노력해봐야 되지 않는 일이라고 자위를 한다고 타자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늘날 전쟁 소식이 전 세계로 퍼진다고 해서 멀리 떨어져 있는 타인들의 괴로움을 생각해볼 수 있는 사람들의 능력이 두드러질 만큼 더 커졌다는 말은 아니다. 사람들의 눈길을 뺏을 만한 것들이 너무나 많이 존재하는 현대의 삶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할 뿐인 이미지들을 외면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듯하다”(169쪽).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살아간다는 사람이 갑자기 마주친 참혹한 사진은 나와 무관한 먼 나라 이야기다. 그런 이미지는 보고 싶지 않기도 하지만 본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없다고 생각하고 바로 외면해버린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참혹한 사진 속에 펼쳐지는 이미지의 향연을 예술 작품으로 감상하는 일이다. “사진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는 것은 무정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러나 참화의 풍경도 풍경은 풍경이다. 황폐함 속에는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공격을 당한 뒤 몇 달간 폐허로 남아 있던 세계무역센터의 사진들이 아름답다고 말한다면 천박해 보이거나 죄받을 일을 저지른 듯 보일지 모르겠다. 감히 그렇게 말하는 대담무쌍한 사람들은 대개 그 사진들이 ‘초현실적’이라고 말하곤 한다”(116쪽).     


타인의 고통이 담긴 사진은 잠시나마 내 기분을 울적하게 만들고 윤리적 책임감을 불러오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가슴을 파고드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심각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한다. 당연히 사진 속의 특정 불행은 나로 하여금 도덕적 분노와 적개심을 일으켜 결연한 행동으로 이어지게 만들지는 못한다. “부당한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품게 될 감정이 연민이라면 연민은 도덕적 판단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비록 비극적인 불행을 그린 드라마에서는 원래부터 공포와 연민이 쌍둥이 일지는 모르나, 흔히 공포가 연민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는 한 공포는 연민을 희석(산란)시키는 듯하다”(115쪽). 희석된 연민은 공포와 참혹함이 강해질수록 더 무력해진다. “뭔가를 미화하는 것은 카메라의 전통적인 기능으로서, 이런 기능은 보인 것에 대한 사람들의 도덕적 반응을 하얗게 표백해버린다. 뭔가를 최악의 상태로 보여줘 그것을 추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좀 더 근래에 등장한 기능이다”(125쪽).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기대했지만 그것마저도 사진 속의 이미지는 인간의 마지막 양심마저 저버리게 만든다. 불쾌한 감정이 들게 만들고 혐오증을 유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여주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도덕적 반응조차 사진의 이미지는 하얗게 표백해버린다.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져 버렸다. 과연 우리는 영원히 타자의 고통을 나의 아픔으로 수용하는 공감능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일까.    



우리가 누리는 특권은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 올 수 있는지, 그 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라지게 만들 수 있는지까지 대답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던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167쪽). 우리는 아직도 희망을 가져야 한다. 타자의 아픔에 위장된 연민을 보이고 윤리적으로 무책임한 상태에서도 인간적 실존과 연대는 우리에게 희망의 서광을 비춰준다. 사진을 바라보며 우리가 가져야 할 윤리적 역할은 비록 사는 곳은 다르지만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죄책감과 함께 사진을 바라보는 틀에 박힌 방식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롤랑 바르트가 《밝은 방》에서 말하는 것처럼 틀에 박힌 스투디움(studium) 방식의 사진이 아니라 사진 속의 특정 이미지가 느닷없이 나에게 달려와 깊은 상처를 남기는 푼크툼(punctum)처럼 말이다. 스투디움은 작품을 보는 사람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공유되는 길들여진 감정이다. 이에 반해 푼크툼은 ‘작은 구멍’ 혹은 뾰족한 물체에 찔려 입은 부상‘이란 뜻으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화살같이 날아와 폐부를 찌르는 낯선 자극이자 상처다. 익숙한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푼크툼의 세계로 보인다. 이제까지 사진을 바라봤던 스투디움의 세계에서 낯선 시선으로 이전과 다르게 사진을 바라보는 푼크툼의 세계로 진입하려는 안간힘이 타자의 고통이 담긴 사진을 윤리적 책임으로 바라보는 시도다. 내가 누리는 편안함은 누군가의 불편함 덕분이고 내가 즐기는 단순함은 누군가 내 대신 겪는 복잡함 덕분이다. 사진 속의 누군가 겪는 고통이 지금 내가 누리는 특권과 무관하지 않다는 각성은 표백 처리된 도덕적 책임을 부활시키는 원동력이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154쪽).    



마지막 희망의 등불, 눈물 흘리게 만드는 문학에서 찾다    


“문학의 임무 중 하나는 문제를 명확히 제기하고 널리 만연된 경건함을 반박하는 겁니다. 그리고 뭔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때조차도 예술은 자연스럽게 반대쪽으로 나아갑니다. 문학은 대화이자 응답입니다. 문화가 발달하고 각 문화가 상호 작용함에 따라서 살아가고 있는 것과 죽어 가는 것을 향해 인간이 보여준 반응의 역사가 곧 문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207쪽). 이성복 시인의 아포리즘,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에 보면 일상과 반대로 가는 예술적 전복적 사고를 말한다. 일상적 삶이 `느낌'에서 `사실'로, `위험'에서 `안전'으로의 끊임없는 이행이라면 예술은 일상적 삶과는 반대방향. 즉 `사실'에서 `느낌'으로, `안전'에서 `위험'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평범한 일상을 움직이는 관성대로 살아가지 않고 문제를 제기하고 시비를 걸어 낯선 세계를 지향하는 힘이 문학의 힘이고 예술의 힘이다. 안전지대에 안주하지 않고 오히려 위험한 곳으로 떠나는 모험을 즐기는 체험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힘 역시 문학과 예술적 창작의 힘이다. “작가는 이 세계에 눈길을 주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어떤 사악함을 저지를 수 있는지 이해하고 살펴보며 연상해보려고 노력하는 존재. 그렇지만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냉소적이 되거나 천박해지거나 타락하지는 않는 존재라는 말입니다(207쪽). 위장된 연민으로 타자의 고통에 눈감았던 인간의 무책임에서 벗어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내가 저지른 사악함을 반성하고 성찰할 때 무관심했던 타자의 고통을 한탄 사진 속의 이미지로 번역하지 않는다.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그와 동시에 누군가를 때릴 수 없는 노릇이다”(172쪽).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가난과 기근, 전쟁과 재난을 한 두장의 사진 속 이미지로 환원시켜 생각하는 단순한 환원의 오류와 폐해를 심각하게 반성하고 숙고할 때 우리는 더 이상 타자의 고통을 이미지로 소비하며 무감각해지는 성향으로 내 달리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은 나와 관계없이 돌아가는 독립적인 세계가 아니다. 나와 관계없는 존재나 객체는 관념적 이상일뿐이다. 모든 존재는 관계가 만든다. 세상의 누군가가 겪는 아픔과 슬픔도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각성이야말로 인간적 성숙의 잣대이자 표준이다. “문학은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의 문제 아닌 다른 문제들을 위해서 눈물 흘릴 줄 아는 능력을 길러주고 발휘하도록 해줄 수 있습니다”(208쪽). 나를 넘어서 관계, 관계 속의 우리라는 공동체와 연대감 속에서 타자가 겪는 고통은 숙고하고 성찰할 때 나와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윤리적 결단의 방향도 정해진다. 사진의 이미지가 전하는 특정 메시지를 습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스투디움에서 벗어나 숨겨진 특정 이미지에 담긴 보이지 않은 사연을 푼쿠툼으로 바라볼 때 사진은 사심(邪心)이 담긴 사기(詐欺)가 아니라 온기품을 사기(士氣) 진작 매개체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손택은 우리에게 부탁하고 동참을 촉구한다. “부디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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