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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국을 돌파하는 ‘통찰’의 근원,
니체에게 배우다

‘성장’이 멈춘 시대, ‘성찰’을 위한 한 가지 묘안

이 글은 《니체는 나체다》 개정판 프롤로그입니다.    

 


난국을 돌파하는 통찰의 근원니체에게 배우다  :

성장이 멈춘 시대, ‘성찰을 위한 한 가지 묘안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건너가는 과정, 뒤 돌아보는 것, 벌벌 떨고 있는 것도 위험하며 멈춰 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20쪽).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다가 한눈에 다가온 인두 같은 한 문장이다. 이 문장은 위험한 삶을 온몸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신념을 고독하게 실천한 니체의 삶이기도 하다. 선각자가 이미 걸어간 길이 아니라 아직 아무도 가지 않은 미지의 길을 오로지 혼자 걸어가 본 니체의 체험에서 나온 깨달음의 메시지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라야 미지의 세계가 설레는 마음 한가득 안고 나를 기다린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이미지는 언제나 불확실하고 두려움이 서려 있다. 하지만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앞에서 망설이며 미지의 세계로 가지 않을 때 나에게 남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익숙한 세계가 주는 지루한 평범함뿐이다. 안락한 지금 여기서 머무는 것도 니체에 따르면 위험한 삶이다. 위험을 거부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관성대로 살아가는 타성에 젖은 삶도 우리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차라투스트라가 던지는 의미심장한 질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나는 짐승을 넘어 위버멘쉬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위버멘쉬는 현재의 나를 넘어서 어제와 다른 내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현재의 나를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우리 자신을 극복하기보다는 오히려 짐승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는가? 짐승을 넘어 위버멘쉬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쉽게 가보려고 나서기 어려운 길이다. 그러니 밧줄에서 떨어져 몰락하는 체험을 두려워말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 니체도 몰락하는 길만이 앞으로 나가는 길이며 그런 사람만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몰락해봐야 몰두하고 몰입할 수 있다     


몰락은 바닥으로 영원히 주저앉아서 일어설 수 없는 추락은 아니다. 오로지 삶은 그런 몰락을 통해서만이 뭔가에 몰두하고 몰입하며 자기를 극복하는 길에 들어선다. 몰락해봐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허상과 허식을 걷어내는 방법을 몸으로 배운다. 무성한 나뭇잎을 다 떨어뜨리고 나목으로 엄동설한의 추위를 견뎌내고 새봄의 희망을 맞이하는 것처럼 우리도 자기를 극복하려는 위험한 모험을 시도하다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하강체험을 해봐야 다시 이전과 다르게 상승하는 방법을 배운다. 하산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등산을 다시 할 수 없는 이치다. 하지만 그런 몰락의 길이 두려워 여기에 안주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습관의 벽에 갇혀 다시 빠져나오기 어려운 관성대로 살아간다. 관성대로 살아가려는 습관도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다. “무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의 결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알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결같이 노력해온 결과가 바로 무지입니다. 무지는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입니다(7쪽).” 우치다 타쯔루의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에 나오는 말이다. 새로운 나로 변신하지 않기 위해 굳게 마음을 먹고 한결같이 노력해온 결과가 오늘의 나다.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로 현실에 안주하는 내가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직면한 우리 현실은 우리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전대미문의 위기가 상존하는 시기다. 무한 성장과 개발을 추구했던 경제 패러다임도 이제 더 이상 시장을 움직이지 못하는 낡은 생각의 산물이 되었다.     


그동안 목표 달성과 성과, 속도와 효율이라는 복음이 우리들의 마음을 휩쓸어왔다. 삶은 고속성장 패러다임이 보장해주는 장밋빛 환상에 젖어 들어 방향 설정보다는 방법 개발, 깊이 파고드는 노력보다 높이 성장하려는 욕망, 진지한 성찰보다 빠른 성장에 전력투구해왔다. 깊이 파고 들어간 사람은 사유의 심연에 내려가 뭔가를 끄집어 밖으로 나오는 시간도 오래 걸린다. 하지만 아래로 파고 내려간 깊이 없이 높이 성장하려고 발버둥 친 사람은 사고의 깊이가 없어서 어떤 질문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답이 나온다. 겉으로 맴도는 참을 수 없는 사유의 가벼움이 걸러지지 않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발설된다. 설상가상으로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현대인을 유혹하는 이미지와 메시지가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산만한 나와 바쁜 우리들의 주의를 분산시킨다. 깊은 고뇌 끝에 길어 올린 사색의 샘물을 마시는 사람은 피상적 이미지와 메시지에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그것이 주는 이면의 의미와 의도를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제의 삶을 답습하며 관성의 늪에 빠진 사람에게 얄팍한 상술로 포장된 범람하는 이미지와 메시지는 충동적 본능을 자극하는 유혹의 미끼로 작용한다. 성장을 멈추고 갈 길을 잃은 경제와 가치관의 부재로 혼돈을 겪는 사회 속에서 중심과 토대를 잃고 갈치를 잡지 못하는 개인들은 위기의 파도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리고 있다. 더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어둠의 터널 끝은 보이지 않고, 불안감은 가중되며, 미래는 더욱 정체불명의 불확실한 세계로 다가오고 있다.     



니체는 영혼의 치유사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왜 니체를 읽어야 하는가? 성장이 멈춘 시대, 니체로 성찰해야 되는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본다. 가장 먼저 니체는 바젤 대학 교수를 사직하고 세상을 떠나기 전 약 10년 동안 극심한 고통의 바다를 건너면서 진통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고유한 전통을 만들어간 사람이다. 때문에 우리들에게 니체는 고통을 극복해낸 고수의 롤모델이다. “고난이 많았기에 즐거운 이야기를 쓴다.”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에 나오는 말이다. 고난으로 쌓아 올린 자기만의 이야기는 난공불락의 성(城)이다. 1887년 심각한 우울증을 잃기 시작한 니체는 1888년부터 끝을 모르는 어둠의 터널 속에서 약 10년간 사투를 벌이다 1889년 《디오니소스의 송가》라는 마지막 책을 저술한 다음 이듬해인 1900년 세상을 떠난다. 병마와 말년을 싸우면서 지낸 니체지만 질병이 주는 고통 역시 니체의 저술 작업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글쓰기를 자기 극복의 과정으로 삼은 니체는 더욱 고통과 함께 동거하면서 말년의 대작을 완성했다. “모든 글 중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피로 쓴 것만을 나는 사랑한다. 피로 쓰거라. 그러면 피가 곧 정신임을 알게 되리라. 타인의 피를 이해하기란 쉬운 노릇이 아니니, 나는 한적하게 글 읽는 자들을 증오한다”(63쪽). 《차루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말이다. 피로 쓴 글이라야 피로에 맥을 못 추는 사람들에게도 한 줄기 서광을 전해줄 수 있다. 우리가 니체를 읽어야 되는 이유는 니체에게 미증유의 고통과 고난의 바다를 건너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임신 없이 출산할 수 없다. 기다림의 숙성 없이 성숙한 글을 쓸 수 없다. 글은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과 환희의 경험이 일정 기간 숙성과 발효를 거쳐 그 사람 특유의 향기가 묻어나는  작품으로 탄생되는 것이다. “가능한 한 앉아있지 말라: 야외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생겨나지 않는 생각은 무엇이든 믿지 말라-근육이 춤을 추듯이 움직이는 생각이 아닌 것도 믿지 말라. 모든 편견은 내장에서 나온다. - 꾹 눌러앉아 있는 끈기-이것에 대해 나는 이미 한 번 말했었다-신성한 정신에 위배되는 진정한 죄라고”(353).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에 나오는 말이다. 구부정한 허리로 엉거주춤 앉은 자세로 쓰는 글은 그 자체가 답답하다. 구부러진 허리는 내장을 뒤틀리게 만들고 거기서 각종 편견과 선입견은 물론 타성에 젖은 옛날 생각이 줄줄이 사탕으로 쏟아져 나온다. 니체는 몸으로 글을 쓰는 철학적 시인이다. 그는 우리에게 고통을 승화시켜 자신의 삶을 철학으로 만드는 방법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그르쳐 준 스승이다. 니체는 글은 몸으로 쓰는 것임을 가르쳐준 글쓰기의 스승이다. 니체는 인류가 겪는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을 밝혀내고 가짜 의사가 처방해온 잘못된 철학적 자료들을 제거함으로써 초월적 정신에 지배당해 핍박과 고통으로 얼룩진 육체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 영혼의 치유사다. 영혼도 몸이 뒷받침될 때 몸 안에 거주한다. 몸이 망가기면 영혼도 거주지를 잃고 방황한다. 위기가 상존하고 혼돈이 가중될수록 불확실하고 모호한 미래가 주는 불가능성에 눈을 뜨고 다른 각도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것도 몸이 움직이는 체험이 동반될 때 다른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      



니체는 체험적 깨달음의 전도사다     


둘째, 몸으로 쓰는 글의 전형을 보여주기 위해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게 일갈을 날린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게 나 나의 말을 하련다. 저들로서는 이제 와서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전과 다른 가르침을 펼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자신들의 신체에게 작별을 고하고 입을 다물면 된다”(51쪽).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신체 찬송가다. 신체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모든 감각적 깨달음도 몸으로 느낄 수 없다. 신체를 경멸하고 무시한 철학자가 주장하는 관념적 철학이나 주장은 들을수록 공허하고 와 닿지 않는다. 신체로 깨달은 지혜가 아니라 머리로 분석하고 편집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남의 경험으로 편집해서 지식을 만들 수 있지만 지혜는 오로지 나의 체험적 깨달음을 구성된다. “영혼이란 것도 신체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불과하다고. 신체는 커다란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 가축떼이자 목자이다. 형제여, 네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너의 작은 이성, 그것 또한 너의 신체의 도구, 이를테면 너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놀잇감에 불과하다”(51쪽). 역시 니체의 같은 책에 나오는 거침없는 주장이다. 커다란 이성인 신체가 작은 이성인 기존의 이성을 통제하고 지배한다. 마음과 영혼도 신체 속에 세 들어 사는 전세 가입자다. 몸이 실종되면 마음과 영혼도 날아간다. 정신 우위에 있던 서구 철학 전통을 망치로 깨부수고 거기에 몸이 중심이 되는 디오니소스적 광기의 철학적 전통을 새로 만들었다. 숱한 반발과 저항이 예상된다. 믿었던 신념체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로 전도되기 때문이다.      


“체험을 통해 진입로를 알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들을 귀도 없는 법이다”(377쪽). 《이 사람을 보라》에 나오는 명언이다. 내 몸이 움직여 몸으로 겪어보지 않은 체험을 아무리 정교한 언어를 사용해도 나는 알아들을 수 없다. 그걸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해당 분야나 영역에 대해서는 아무런 느낌이 내 몸에 축적되어 있지 않다. 내가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가슴으로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논리적으로 정교한 설명을 많이 들어도 나의 피부로 파고들지 못한다. 허공을 돌면서 사방으로 산산이 부서지는 관념적 파편일 뿐이다. 니체는 《아침놀》 116절에서 “모든 행위들은 본질적으로 미지의 것”(133쪽)이라고 하면서 “어떤 행위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것이 행위로 바로 이어지기에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것. 인식에서 시작해 행위로 이르는 다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놓인 적이 없었다”(133쪽)고 말한다. 올바른 인식에는 올바른 행위가 반드시 뒤따르지 않는다. 인식이 행동을 보장하지 않지만 행동은 반추와 성찰이 뒤따른다면 이전과 다른 인식을 가져온다. 몸으로 터득하는 인식에는 언제나 기쁨이 뒤따르지만 머리로 증명한 인식에는 몸의 기쁨이 동반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삶의 본능이 강요하는 행위가 옳은 행위라는 것에 대한 증거는 바로 기쁨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적-독단적인 내장을 갖고 있는 허무주의자는 기쁨을 반박으로 이해했다……내적인 필연성도 없고, 철저한 개인적인 선택도 없이, 기쁨도 없이 일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보다 더 빨리 파괴하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의무’라는 기계보다 더 빨리 파괴하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225쪽). 《안티크리스트》에 나오는 말이다. 한바탕의 웃음이나 일시적인 재미가 아니라 몸으로 깨닫는 기쁨이 동반되는 성취는 행복한 추억으로 몸에 각인된다. 니체는 스스로 몸으로 터득한 깨달음을 촌철살인의 메시지로 전하는 체험적 지혜의 전도사다.     



니체는 잠언의 연금술사다     


니체는 세상과 작별하기 전 약 10년 동안 병마와 싸우면서도 전신을 파고드는 고통의 음악을 몸 구석구석으로 울려 퍼지게 하면서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마치 청력을 거의 상실해가는 베토벤이 운명을 받아들이며 극도의 불안감을 창작의 꽃으로 피워내는 앙스트 블뤼테의 저력을 발휘했듯이 니체 역시 불안감을 흘려보내지 않고 고독과 싸우며 세상을 향한 마지막 절규를 《디오니소스 송가》에 녹여냈다. 앙스트 블뤼테(Angstblüte)는 앙스트(Angst,不安)와 블뤼테(blute, 開花)의 합성어로 ‘불안 속에 피워낸 꽃’이다. 견딜 수 없는 편두통과 온몸을 휘감으며 극심한 고통으로 시시각각 육신을 괴롭혔지만 니체는 이러한 육체의 고통을 한 편의 장엄한 서사시로 노래하며 우울함과 불안감 속에서도 병들지 않는 맑은 정신으로 날아가고 싶은 비상하는 상상으로 신체적 아픔을 노래하며 작품을 남겼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하루도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아모르파티를 입으로 전하지 않고 몸으로 증명한 셈이다. 진중함이 버틸 수 없는 무거움으로 다가오다가도 이면에 담긴 니체의 진정한 의도와 본심을 가만히 관찰하노라면 날아갈 듯 명랑하고 쾌활한 시심이 미소 짓게 만들며 슬며시 다가온다. 창백한 밤하늘에 보일 듯 말 듯 떠 있는 초승달에서 보름달의 미래를 간파한 니체는 부정에서 긍정을 읽어내고 궁지에서 경지를 꿈꾸며 절망에서 희망을 불러온다. 니체는 나에게 불리한 상황을 유리한 상황으로 돌변시키는 역전의 명수다. 그때마다 철학적 시를 읊으며 자신을 위로했으며 촌철살인의 잠언을 남기며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모든 단어에는 자신의 냄새가 있다”(301쪽).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에 나오는 말이다. 니체가 사용하는 단어에는 광기와 열정이 넘친다.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심지를 타고 들어가듯 불길이 느껴진다. 잘 못 읽으면 단어가 품고 있는 열기에 돌이킬 수 없는 깊이로 상처가 생긴다. 그런 단어들이 세상을 관망하며 침묵을 지키다 갑자기 세상 밖으로 튀어나와 저마의 설법을 펼친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저마다의 심연에서 깨달은 교훈을 가슴에 품고 담소를 나누던 단어들이 의기투합해서 하나의 문장을 만드는 순간,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바람과 눈보라가 번갈아 몰아치기도 한다. 그러다 단어들이 다른 뜻을 품고 다시 격론을 펼치다가 이번에는 다른 문장으로 만들어 세상에 던진다. 순간 작렬하는 태양빛이 산천초목을 향해 내리쬐다 어둠과 함께 사라진다. 니체의 문장에는 극심한 고통을 이겨내고 농축한 삶의 골수가 고압전류로 전환되어 흐르는 전선과 같다. 책의 어떤 곳을 펼쳐도 섬뜩할 정도의 놀라움과 아찔한 영감이 흐르는 문장이 살갗을 파고든다. 나는 니체와 함께 새봄의 희망을 싹틔웠고 성하의 여름이 뿜어내는 열정을 배웠으며 스산한 가을 오후 깊은 사유의 늪에 빠져 한 겨울이 다가오는지도 모르고 사색의 심연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거기서 길어 올린 짧은 아포리즘은 한 여름에도 간담이 서늘한 잠언이며 뜨거운 심장에서도 얼음이 된 채로 피 끓는 격언이다. 슬픔과 기쁨, 불행과 행복, 찬사와 냉소, 열정과 냉정, 디오니소스적 광기와 아폴론적 이성, 전쟁과 평화, 침묵과 소란을 오가며 소용돌이치는 아포리즘이 급한 강물을 타고 바다로 향하다 어느 순간 다시 하늘로 치솟아 소나기가 되어 내리기도 한다. 차가운 샘물이 끊임없이 솟아오르지만 깊은 정적에서만 그 의미를 맛볼 수 있는 사유의 정수(精髓)다. 니체는 나에게 정적의 샘물에서 목마름을 해소해주고 폐부를 찌르는 감동적인 교훈을 끌어내는 잠언의 연금술사다.    

 


니체는 전쟁의 명수다     


니체는 빛과 어둠, 바닥과 정상, 음지와 양지, 절망과 희망, 실패와 성취, 걸림돌과 디딤돌, 질병과 건강, 신체와 이성 사이에 놓인 장벽을 허물고 경계를 넘나들며 지금까지 옳다고 믿는 신념체계를 망치로 산산조각 내버린다. 참된 세계를 차례로 깨부수고 그 정점에서 차라투스트라를 등장시키는 니체의 《우상의 황혼》은 부제목이 “어떻게 망치를 들고 철학하는지”다. 그는 이 책에서 단테를 “무덤 위에서 시를 짓는 하이에나”로 규정하고, 칸트를 “예지적 성격으로서의 허위 cant”로 비판한다. 빅토르 위고는 “부조리의 바다에 있는 등대”라고 깎아내린다. 그는 세상의 어느 누구와도 싸움을 거는 전사(戰士)다. 부조리가 보이고 거짓과 편견을 은폐하려는 조그만 움직임이라도 보이는 순간 거침없이 습격해서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해버린다. 거기서 들리는 비난과 질책의 목소리도 니체는 듣지 않는다. 오로지 니체는 평생을 온전히 자기를 극복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매 순간을 전쟁과 같은 삶을 살아간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가-새로운 자, 유일한 자, 비교할 수 없는 자, 스스로 법칙을 세우는 자, 스스로를 창조하는 자가 되고자 하는가!”(307쪽). 《즐거운 학문》에 나오는 말이다. 전쟁과 같은 삶을 살지 않으면 우리는 순식간에 새로운 자가 아니라 낡은 자, 유일한 자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자, 비교할 수 없는 자가 아니라 남과 비교하는 자, 스스로 법칙을 세우는 자가 아니라 누군가 만든 법칙을 수용하는 자, 스스로를 창조하는 자가 아니라 창조된 기존의 것을 모방하는 자로 전락한다. 새로운 시도를 하다 몰락하는 게 아니라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다가 속수무책으로 몰락하는 자가 된다.   

  

니체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저주라는 부제목이 붙은 《안티크리스트》에서 정상에 시비를 거는 극소수의 비정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누구도 물어볼 용기가 없는 문제들을 선호하는 강건함; 금지된 것에 대한 용기; 미궁으로 향하는 예정된 운명…이제껏 침묵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양심, 그리고 위대한 양식의 경제성을 추구하려는 의지; 그 힘과 열광을 흩어지지 않게 한데 모으려는 무조건적 자유……”(213-214쪽). 니체는 ‘방안의 코끼리’처럼 누구나 아는 문제지만 아무도 거론하지 않아서 누구도 거들떠보려고 하지 않는 은폐의 늪으로 몸을 던져 감춰진 부분을 들춰내는 용기를 발휘한다. “만족이 아니라 더 많은 힘; 결코 평화가 아니라 싸움”(216쪽)을 선택한 니체는 “힘이 증가된다는 느낌, 저항이 극복되었다는 느낌”(216쪽)이 들수록 기득권으로 위장한 기존 세력의 허구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운명을 다이너마이트로 간주하는 니체는 "미궁으로 향하는 예정된 운명"이라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그 운명 자체를 사랑하는 축제의 삶을 매 순간 살아간다. 《이 사람을 보라》의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에서 니체는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다이너마이트다……나는 전대미문의 복음의 전달자이다……진리가 수천 년간의 거짓과 싸움을 시작하면 우리는 동요되고, 꿈도 꾸어보지 못했던 지진의 경련과 산과 골짜기의 이동을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456-457쪽)라고 말한다. 그래서 운명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도 거부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아모르파티(amor fati) 개념을 창안한 것이다. “나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것은 싸움이다. 나는 기질상 호전적이다. 공격은 내 본능의 일부이다”(343). 《이 사람을 보라》에 나오는 말이다. 니체에게 공격은 거꾸로 호의에 대한 증거이자 감사함에 증거라고 말한다. 그는 승리하는 것들만 골라서 공격하고 자신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만을 골라서 공격한다. 그는 힘겨운 노동보다 격렬한 전투를 사랑했고, 지루한 평화보다 짜릿한 승리를 사랑했다. 니체는 나에게 공격하고 싸우는 전쟁의 명수다.   

   


니체는 전복과 파괴의 스승이다     


니체는 플라톤으로 시작된 서양철학의 형이상학적 신념과 기독교적 교리가 만든 낡은 도덕관념과 신념을 비판하고 인간의 잠재적 능력을 최고도로 끌어올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만드는 새로운 정신적인 토대를 구축하는 것을 자신의 철학적 목적으로 삼았다. “삶에 대한 자신의 이유인 ‘왜냐하면’을 가진 자는, 거의 모든 방법, 거의 모든 어떻게?를 견뎌낼 수 있다”(78쪽). 《우상의 황혼》에 나오는 말이다. 도덕이든 법이든 그것이 아무런 이유 없이 인간을 지배하려는 위장된 야망과 특정 집단의 편견의 산물이 왜 지금 여기서 나를 옭아매고 있는지를 물어봐야 한다. 니체는 누군가에 의해서 은폐되어 침묵하고 있는 세계를 드러내려는 의지를 불태우며 세상의 통념과 허식과 편견에 맞서 싸운 철학적 전사였다. 니체는 《아침놀》에서 사상가를 네 등급으로 분류한다. 첫째, 현상의 표면을 바라보는 ‘피상적 사상가’다. 둘째, 심층이나 현상의 이면을 파고들어 깊은 곳을 연구하는 ‘심오한 사상가’다. 셋째, 사물의 근거를 파고들어 현상 밑의 바닥을 탐구하는 ‘철저한 사상가’다. 이들은 사물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무조건 밑으로 파고들어 깊이만 추구하는 사상가보다 사물의 근본이나 뿌리를 파헤쳐 그것이 담고 있는 숨겨진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 사상가의 더 소중한 역할이라고 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진흙탕에 박고 밑바닥을 뚫고 들어가서 파헤치고 뒤엎는 ‘지하의 사상가’다. 마지막 지하의 사상가는 ‘심오한 사상가’처럼 깊이를 추구하거나 ‘철저한 사상가’처럼 근본을 해명하지 않고 깊이 뿌리박고 있는 근거 자체를 뒤집어엎는 사상가다. 니체의 표현을 따르면 이들이야말로 사랑스러운 지하 철학자다. 니체는 평생 지하의 사상가처럼 깊이 파고들어 세워놓은 이전의 철학적 전통을 뿌리째 전복시켜 지금까지의 철학적 탐구와 성취결과가 무의미하며 잘못된 신념에 근거하고 있음을 파헤치는 전복과 파괴의 스승이다.      


전복과 반란, 파괴와 생성을 위해 니체가 들고 다니는 망치는 마음은 물론 몸 구석수석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강력한 펀치였다. 니체의 사유의 텃밭에서는 위험한 생각이 곳곳에서 자란다. 위험한 생각에 접속되는 것만으로도 전율하는 감전의 위험이 따른다. “너는 너 자신의 불길로 너 자신을 태워버릴 각오를 해야 하리라. 먼저 재가 되지 않고서 어떻게 거듭나길 바랄 수 있겠는가!”(106쪽).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말이다. 스스로를 불태워 없애고 다시 시작하는 용기와 결단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판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반복되는 일상에서 만나는 사소한 것이나 하찮다고 생각하는 것에 비상한 관심으로 접근해야 한다. 주변을 관찰해야 주위를 넘어서는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하여 전적으로 잘 못 간주되고, 거의 관찰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223쪽)…가장 사소한 것과 가장 일상적인 것에 무지하고 예리한 안목이 없다는 것, -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에게 이 땅을 재앙의 초원으로 만드는 것이”다(224쪽).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에 나오는 말이다. 사소한 것에 주목하지 않고 일상을 비상하게 만드는 사건을 만들 수 없다. “우리가 이 작은 잡초를 조심하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것 때문에 몰락”(341쪽) 하기 때문이다. 《아침놀》의 435절에 나오는 말이다. 전복과 파괴는 일상에 대한 비상한 관심에서 시작된다. 무조건 뒤집어엎고 파괴하면 그 자리에서 새로운 건축과 시작이 보장되지 않는다. “인간은 왜 사물들을 보지 못하는가? 이는 인간 자신이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사물들을 은폐한다”(342쪽). 《아침놀》 438절에 나오는 니체의 통찰이다.   

   


다르게 배우는 다른 여행을 떠나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근거들에 의해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르게 배워야만 한다. 아마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후가 될지도 모르지만, 마침내 더 많은 것에 도달하기 위해, 즉 다르게 느끼기 위해”(112쪽). 《아침놀》 103절에 나오는 말이다. 다르게 배워야 다르게 느낀다. 그것도 몸으로 배워야 다르게 느낀다. 느낌은 머리로 생기지 않고 몸으로 생긴다. 몸으로 느끼는 감각적 체험이 과감한 행동을 유발한다. 심지어 니체가 배웠던 방식과도 다르게 배우는 과감한 결단을 내릴 때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세상이 눈앞으로 다가올 것이다. 니체로부터 시작했지만 니체로부터 벗어나 니체를 넘어서는 나만의 고유한 삶의 철학이 내가 걸어가는 그 길 위해서 정초 된다. “이제 너희에게 말하니, 나를 버리고 너희를 찾도록 해라. 그리고 너희가 모두 나를 부인할 때에야 나는 너희에게 돌아오리라”(328쪽). 《이 사람을 보라》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니체를 버리고 나를 찾아야 할 때다. 우리가 철학을 공부하는 목적도 어떤 철학자의 책을 읽고 소화시켜 그걸 내 삶의 철학으로 재해석하기 위해서다. 니체는 나에게 한 사람의 철학자로 다가왔지만 결국은 하나의 사건을 만들었다. 니체가 깊은 고독 속에서 병마와 싸우며 정리한 니체의 철학책은 나에게 어느 날 벼락처럼 다가왔지만 그것은 니체의 삶의 단면을 담아냈을 뿐이다. 이제 내가 니체로부터 얻어야 하는 가르침은 온몸으로 살아간 자신의 삶을 자기만의 독특한 사유체계로 녹여내는 니체의 철학하는 방식이다. 니체를 떠나 위버멘쉬가 되기 위해, 현재의 나를 극복하기 위해 어제와 다른 안간힘을 쓸 때 비로소 나는 니체에게 배운 철학을 내 삶의 철학으로 재구축하는 것이다. 혼돈의 시대, 앞이 보이지 않는 불안하고 불확실한 시기에 나를 찾아가는 여행에 니체가 하나의 등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이 글은 《니체는 나체다》 개정판 프롤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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