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몸부림’으로 독자의 ‘울림’을
자극하는 글쓰기의 비밀

‘진저리’ 속에서 글 쓰는 ‘진리’를 깨닫는 정희진 작가를 만나다

몸부림으로 독자의 울림을 자극하는 글쓰기의 비밀

진저리’ 속에서 글 쓰는 진리를 깨닫는 정희진 작가를 만나다


정희진의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와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를 일고     

정희진(2020a).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정희진의 글쓰기 1)》. 서울: 교양인.

정희진(2020b).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정희진의 글쓰기 2)》. 서울: 교양인.     


몸에서 나온 글에는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글쓰기에 관한 수많은 책을 읽고 쓰고 있지만 정희진의 글쓰기는 글쓰기가 아니라 방대한 독서경험과 자기 자리에서 치열하게 고뇌하며 살아가는 체험이 융복합되어 터져 나오는 단어들의 춤이자 문장들의 향연이다. 짧은 문장 안에 깊은 사색의 샘물이 끝을 모르고 솟아 나오며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비수를 심장에 꽂는다. 사람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시선으로 얼었던 계곡의 얼음도 녹이고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성하의 여름날, 그늘에 앉아 마시는 냉수 한 컵처럼 온몸을 파고드는 통렬한 깨우침이다. “천만번의 외로움 끝에 다다를 수 있는 경지”(87쪽)라고 신영복 교수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문장을 감탄한 저자 역시 “언어의 결정(結晶)은 극한 노동의 산물”(166쪽) 임에 틀림없다. 이런 글쓰기는 글쓰기 책에 나오는 수많은 처방전의 관념적 학습의 산물이 아니라 “가르침대로 쓰지 못하고 성질대로 쓰다가 길을 잃는다”(89쪽)는 저자의 고백처럼 무수한 시행착오와 절치부심의 아름다운 성취라고 생각한다. “괴로운 과정에서 ‘최선의 올바름’. 아름다운 문장이 나온다”(16쪽). 우리는 모른다. 저마다의 작가들이 처절했던 자신의 경험을 깨달음의 언어로 바꿔서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얼마나 괴로운 시간을 보냈는지. 다만 짐작하고 추측하며 상상할 뿐이다. 그녀가 쓰는 모든 문장은 “몸이 분(憤)을 이기지 못하는 일들”(131쪽)을 무수히 몸으로 참고 견디면서 몸 안에서 울분(鬱憤)을 삭히다 어느 순간 몸 밖으로 터져 나온 단어들의 아우성이 만든 문장이다. “삶이 어려운 사람은 몸에서 글이 나온다”(171쪽). 그들의 언어는 방금 잡아 올린 활어(活魚)처럼 언어가 싱싱하다. 관념이 파고들어갈 틈이 없다. 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깨달음의 포도가 주렁주렁 열려 있다.      


그래서 그녀의 주장은 거침이 없는 직격탄이지만 폐부를 찌르는 정문일침이 많다. ”주장할 것이 없는 사람, 주장이 없어도 되는 사람은 글을 쓸 필요가 없다. 안주 상태에서는 참된 문학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90쪽).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고 오늘과 내일이 다를 것 같지 않은 사람,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지루하고 밋밋한 삶에서는 살갗을 파고드는 감동적인 글이 나오지 않는다. 올바른 글을 쓰려거든, 다른 사람에게 울림을 주는 글을 쓰려거든 우선 우리들의 삶부터 챙겨봐야 되는 이유다. “그 절망이 불러오는 몰락을 살아낸 기록, 압도적인 시류와 고투 끝에 생긴 상처를 새긴 글”(197쪽). 이 책에 나오는 후지타 쇼조의 《전체주의의 시대 경험》이라는 책의 편집자가 소개한 문구다. 희망의 끈을 붙잡고 기다리며 견디기보다 절망의 나락에서 맨몸으로 그 두려움과 불안감을 살아낸 기록이 글로 남을 때 사람은 반응한다. 글의 소리 없는 외침이 온몸을 파고들면서 깨우침의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글을 읽을수록 빠져들어서 다시 빠져나올 수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지만 그럼에도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다음 문장을 읽어나간다. 진짜 독서는 저자의 세계로 완전히 빠져들어가되 다시 빠져나온다는 전제가 있을 때 가능하다. 그래야 나의 생각과 관점으로 저자의 메시지를 재해석하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언제나 저자들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고의 식민 지대에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저자의 글에 뜨겁게 반응하는 이유는 저자 자신이 주변 세계와 사람, 그리고 책을 또 다른 저자의 문제의식 속으로 깊이 감정을 이입했기 때문이다. “반응하지 않는, 감정 이입이 없는 글쓰기는 불가능하다”(149쪽). 반응한다는 이야기는 내가 대상이나 타인에게 관심을 갖고 지켜보도 있다는 이야기다. 반응하려면 평소에 유심히 잘 살펴봐야 한다. 살펴보지 않으면 보살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반응은 무식의 적 반응을 제외하고 평상시에 관심을 갖고 관찰한 덕분에 나오는 응답이다. 그 응답이 바로 글쓰기다. 글에는 그 사람의 지대한 관심과 애정이 녹아들어 있는 이유다.     



내가 살아온 삶만큼 읽고 쓸 수 있다     


물론 저자의 모든 글을 100%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워낙 저자의 독서량이 방대하고  상처와 고통에 대한 깊은 사색에 근거를 둔 사유체계라서 범접할 수 없는 경지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은 내가 살아온 삶과 내가 읽은 책의 수준에 비례한다. “독자의 삶만큼 읽을 수 있다”(163쪽). 내가 살아온 삶만큼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내 경험을 능가하는 저자의 책은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다. 내가 살아온 삶만큼 읽고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삶을 능가하는 글을 읽거나 쓸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그 사람의 언어에는 그 사람의 삶을 농축시킨 생각의 정수가 들어있다. “내가 쓴 글이 (그 글을 쓴 당시의) 나다”(정희진의 글쓰기 2권, 11쪽). “글쓴이와 글은 일치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 글’과 ‘그 글쓴이’는 일치한다(정희진의 글쓰기 2권, 13쪽). 나를 감추고 나의 감정을 속이고 나를 드러내는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삶과 분리될 수 없다”(정희진의 글쓰기 2권, 178쪽). 저마다의 낱말 창고에 들어가 당시의 상황에서 몸으로 느낀 감정에 적확한 단어를 찾아 조합해본다. 단어와 내가 벌인 육탄전만큼 단어는 문장 속에 들어가 자기 위치를 차지한다. 그렇게 완성된 문장에는 곤란했던 삶의 한 층위가 겹겹이 쌓여있다. 삶이 어렵고 힘든 만큼 고뇌하는 독자들의 심장에 꽂히는 언어와 문장이 나오는 법이다. 좌절하고 절망했던 만큼 밑바닥에서 절치부심했던 고노의 흔적이 몸에 축적되어 있을 것이다.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전을 일으킨다는 물극필반(物極必反)의 원리처럼 많이 힘들어야 힘든 만큼 글은 몸에서 쏟아진다. 윤동주의 ‘쉽게 써진 시’에 보면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써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얼마나 살기 어려운 경험을 했으면 시가 쉽게 쓰일까를 상상해본다.      


“왜 쓰는가와 왜 사는가는 같은 표현이다”(10쪽). 왜 사는가를 묻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저마의 목적의식을 갖고 매일 일정한 행위를 한다. 행위자의 살아가는 이유는 행위의 의미를 보면 알 수 있다. 행위자가 행위의 의미를 반추하고 성찰하며 깨달은 기록이 바로 글이다. 결국 쓰는 이유와 살아가는 이유는 맞닿아있다. “모든 표현은 자기만의 사유(특정한 렌즈)를 거치므로 각자의 몸을 통과해 ‘걸러진’ 재현(再現, re-presentation)이다. 표현이 아니라 재현이 맞는 말이다”(10쪽). 동일한 장소에서 저녁에 술을 마셨지만 술을 마신 행위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다르다. 각자의 렌즈를 끼고 당사자의 행위를 의도에 비추어 의미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글은 그런 의미 해석의 결과물이다. “문제는 쓴다는 행위에 따른 성실성과 노동, 그리고 윤리다”(249쪽). 성실하게 살아가려고 안간힘을 쓸 때 자신이 밥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노동 조차도 의미심장한 삶으로 다가온다. 그 속에서 깨닫는 앎 역시 올바름을 지향하는 윤리적 의식을 갖게 된다. 글을 쓰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살아가는 이유도 다르기 때문이다. 저자는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약자에게는 폭력이라는 자원이 없다. 이란 세상에서 나의 무기는 나에게 ‘있되’, ‘적’에겐 없는 것. 바로 글쓰기다. ‘적들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사고방식. 사회적 약자만 접근 가능한 대안적 사고, 새로운 글쓰기 방식, 자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내게는 보이는 세계를 드러내는 것, 내가 비록 능력이 부족하고 소심해서 주어진 지면조차 감당 못하는 일이 다반사지만, 내 억울함을 한 번도 더 생각하고 나보다 더 억울한 이들의 목소를 듣고, 그러면서 세상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품위 있게’ 싸우는 방법, 글쓰기다”(14쪽). 사회적 약자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에서만 보이는 고유한 시각이라야 배부른 사람이 가질 수 없는 사고방식의 한계를 공략할 수 있는 글이 나온다. 아무나 쓸 수 없는 글, 밑바닥 인생을 살아봐야 쓸 수 있는 글로 우리를 소외시키고 핍박을 주는 나쁜 사람들에 경종을 울리는 글을 쓰겠다는 저자의 글쓰기 이유에서 글을 쓰는 사람의 또 다른 사유를 배운다.  

   


작가가 살아가는 힘무릎 꿇은 사람이 당한 아픔을 생각하는 상상력이다     


“선한 마음이 낳은 상상력이다. 대개 상상력은 머리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70쪽). ‘사유’는 주로 사건이 발생했거나 사고가 터진 이후에 시작되지만 상상력은 어떤 일이 벌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리 그 사람이 놓여있는 상황으로 들어가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따뜻한 마음에서 출발한다. 상상력은 역지사지로 타자의 아픔을 가슴으로 생각하는 측은지심이다. 생각은 따뜻한 가슴으로 타자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마음이다. 상상력은 철저한 현장성을 기반으로 싹이 튼다. 상상력은 허공에서 노니는 공상이나 망상이 아니다. 상상력은 구체적인 현장에 내려가서 직접 몸으로 겪어봐야 생기는 사고력이다. 사고(思考)는 실천을 전제로 발휘될 때 사고(事故)가 나지 않는다. 사고가 실천을 전제로 하지 않고 관념적으로 흐를 때 사고는 죽은 생각, 사고(死考)다. 상상력은 “상상력은 지구 밖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보이지 않았던 곳을 생각하려는 마음이다”(72쪽). 상상력은 단순한 동감이나 공감(sympathy)을 넘어 감정이입(empathy)이 될 때 비로소 나는 타인의 아픈 현실 속으로 잠 일해 들어갈 수 있다. “감정 이입이란 자신의 테두리 밖으로 나와서 여행하는 과정, 자신의 범위를 확장하는 일이다. 감정 이입을 두려워한다면 성장할 수 없다”(148쪽). 고통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작가는 방관자일 뿐이다. 멀리서 관망하고 머리로 생각해서 써내는 주장에는 이해는 될지 몰라도 심장을 뒤흔드는 감동은 없을 것이다. 아픈 경험을 견디며 버텨왔을 타인의 느낌 역시 언어로 매개될 수 없는 지극히 자기중심적 일회성의 경험이다. 어둠 속에서 언제 벗어날지 모르는 막막함을 그저 인내하는 시간으로 버티는 사람들을 조금이라고 이해하려면 내가 직접 어둠 속에 뛰어들어 그들이 놓인 상황을 온몸으로 느껴봐야 비로소 적은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 상상력은 이 순간 타인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작은 연상을 시작하며 발동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이 겪는 고통은 저마다 겪어내는 고유한 구체성의 경험이기에 공유하거나 공감할 수 없다. 고통에 관한 정보는 공유할 수 있지만 고통을 그 자체로 공감할 수 없다.     


상상력은 평상시의 정상적인 생각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상대의 입장에서 빙의했을 때 비로소 보이는 현상에 눈앞으로 다가올 때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움직이는 마음이다. 나보다 어려운 처지에서 힘든 노동으로 하루를 버텨나가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봤을 때 내가 조금 마음을 바꿔 먹으면 그들에게는 큰 힘으로 작용할만한 작고 사소한 일을 생각해보는 안타까움이다. "남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어떤 경험일까. 함께 느끼고 상대를 위해 느낀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감정 이입(em/pathy)하는 경청은 나도 당사자가 되는 ‘엄청난’ 일이다. 감정 이입이란 자신의 테두리 밖으로 나와서 여행하는 과정, 자신의 범위를 확장하는 일이다. 감정 이입을 두려워한다면 성장할 수 없다. 타인의 속으로 들어가야 타인의 현실을 알 수 있다"(148쪽). 택배 배달하는 사람의 아픔에 감정 이입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고단한 삶을 이해할 수 없다. 고된 배달의 현실 속에 몸을 던져봐야 그들의 힘든 노동이 던져주는 삶을 가슴으로 공감하고 감정 이입할 수 있다. 대리 기사가 한겨울 밖에서 다른 사람의 콜을 기다리는 괴로움에 감정 이입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삶은 그저 다른 한 사람의 힘든 삶의 분투기일 뿐이다. 힘들게 집에 데려다준 손님이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 등 폭언과 욕설을 일삼는 장면에서 밑바닥 인생의 서러움을 몸으로 느껴보지 않고서는 대리 기사의 대리적 삶의 고달픔을 알아들을 수 없다. 상상력의 차이는 아픔의 차이를 감지하는 능력의 차이다. 사람의 차이는 그가 고통과 싸우면서 짊어지고 가는 짐의 무게 차이다. 짐에는 아픔과 슬픔 등 견디기 어려운 삶의 무게다. “아픔의 차이가 사람의 차이다”(164쪽). 똑같은 질병을 앓고 있어도 그것에 대해 당사자가 느끼는 아픔의 주관적 차이는 천차만별이다. “몸의 개별성으로 인해 고통은 ‘절대로’ 타인과 공유될 수 없다. 인간은 서로 도울 수 있지만 공감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외로움이다”(227쪽). 고통을 언어화시켜 말할 수 없다. 다만 고통에 관한 고통만이 언어화시켜 전달할 수 있다. 그것이 전달된다고 해도 여전히 고통 자체의 경험은 지극히 개별적인 고유한 경험이라서 반복해서 재생될 수 없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사람은 외로운 거다.     



은 상처를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터져 나오는 육체적 탄식이다     


“고통을 공감하는 최선의 방법은 똑같이 경험하는 것이다”(227쪽). 하지만 현실적으로 고통을 경험한 사람과 똑같이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그 사람 곁에서 같이 아파해줄 뿐이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244쪽).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깨달음의 메시지다. 똑같은 고통이나 아픔도 언어로 객관화시킬 수 없는 심리적이고 주관적인 요인이 있다. 아서 프랭크가 《아픈 몸을 살다》에서 구분한 질환(disease)과 질병(illness)은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차이를 갖고 있다. 질환은 체온, 혈압, 혈당 수치나 피부 상태를 생리학적으로 환원하여 제시하는 의학적인 용어라서 주로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수치로 환산된다. 반면에 질병은 질환을 앓아가면서 환자가 느끼는 공포와 절망, 희망과 낙담, 기쁨과 슬픔처럼 느끼는 주관적 감정이다. 똑같은 질환을 앓고 있어도 그것에 대해 환자가 느끼는 주관적 감정은 천차만별이다. 문제는 의사가 환자를 진료할 때 질환으로 구분되는 몇 가지 범주로 나눈 다음 다른 환자도 그 범주에 집어넣어 일반화시켜 효율적으로 관리하려는 데 있다. 하지만 똑같은 병명으로 판정되어 비록 같은 질환의 범주에 포함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환자가 느끼는 주관적 질병은 같지 않기 때문에 질환의 범주별 일반화는 치료에는 유용하지만 돌봄에는 방해가 된다. 환자가 동일한 질환에 대해서 느끼는 공포나 두려움, 걱정과 불안감은 다른 환자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해당 환자가 주어진 환경에서 느끼는 특수한 경험이다. 이런 경험을 같은 범주로 일반화시켜 같은 환자로 취급하는 것은 의학적 치료의 효율성과 관리의 편리함을 제고시킬 수 있지만 환자를 돌보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픈 사람의 경험에서 고유함을 목격하고 차이를 전부 인식하는 것, 이것이 바로 돌봄이다”(82쪽). 아픔의 차이를 무시하고 의학적 처방을 내릴 때 육체적 통증은 가실지 몰라도 심미적 아픔은 더욱 가중될 수 있다. 

    

글짓기는 고단한 자기 삶을 안으로 삭히지 않고 겉으로 드러내며 고뇌하는 자기와의 싸움이다. 비루한 삶의 한 단면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울분과 분노로 밤잠을 설쳤던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이 글짓기다. 글쓰기 책이 가르쳐주는 수많은 처방전은 그 사람이 겪어보고 나서 깨달은 육체적 탄식이다. 나의 몸으로 흘러들어와 다시 나의 육체 밖으로 나가는 체험을 거치지 않은 그 어떤 깨달음도 나를 비롯 헤서 다른 사람에게 감동으로 다가가지 못한다. 글짓기는 누군가 일러주는 가르침대로 쓰는 게 아니라 내 삶의 아픈 부위를 어루만져가면서 당시에 겪었던 아픈 추억을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이다. 괴로운 삶만큼 다른 사람의 괴로운 상황을 반추해보게 만드는 글이 나온다. 편안한 사람, 배부르고 등따신 사람은 글을 통해 주장할 주제가 없다. 주제 파악이 안 되는 이유는 글을 쓸 주제가 없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목적은 결과에 있지 않다. 과정이 선하고 치열하면 결과도 그러하다. 글쓰기는 다른 삶을 지어내는 노동이다“(91쪽). 글쓰기는 다른 사람의 주장을 적당히 편집해서 나의 논리적 주장을 만들어가는 정신노동이 아니다. 내가 살아온 대로 삶의 궤적을 다른 렌즈로 바라보면서 어제와 다른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고 가치를 부여하는 치열한 육체노동이다. 글쓰기가 글짓기인 이유는 삶을 그냥 쓰는 게 아니라 지어내는 고통스러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지어내려면  없는 것을 만들어내지 않고 내가 겪어본 삶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해서 하나씩 불러내 일정한 논리적 구조에 맞게 건축해야 한다. 글짓기는 있는 것을 이전과 다르게 편집하고 조작하는 과정이 아니라 해본 경험이라도 이전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의미를 산출해서 다르게 살아가려는 분투노력이다.      



몸은 살아있는 앎의 보고(寶庫)     


글쓰기는 상상력의 힘으로 타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고통스럽지만 경이로운 기적을 일으키는 과정이다. 상상력은 타자의 아픔을 가슴으로 생각하는 감수성에서 비롯된다. 상상력이 넘치는 글은 모두 밑바닥 현장에서 몸으로 뒹굴어 본 사람이 펼치는 필사적인 사투의 산물이다. “살아있는 인간은 타인에게 감각을 준다”(78쪽). 살아있다는 말은 살아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행위를 살아있는 동안 영원히 반복한다는 의미다. 그런 사람은 곁에만 가도 살아가려는 의지와 살아내려는 열정이 몸으로 느껴진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몸으로 증명되는 사람이다. 자기 삶을 자기 몸으로 살아내는 사람에게는 몸과 맘이 따로 놀지 않는다. “상처는 재해석될지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너는 아프니? 나는 안 아픈데. 마음을 비우면 되거든.” 시장에 넘치는 힐링서 중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문제를 피해자의 마음 탓으로 돌리는 책들이 많다. 어디를 비우라고? 마음은 몸인데 비우면 죽지 않을까?(남에게 비우라고 말하기 전에 ‘멘토’들은 자기 마음, 아니 통장부터 비우기 바란다)“(192쪽). 나는 이렇게 성공했으니 너희들도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고 나처럼 해보라고 강권한다. 생각을 바꿔야 행동이 바뀐다고 반복해서 주장한다. 과연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뀔까. 우리 “몸은 살아있는 앎의 보고”(135쪽)다. 몸에 밴 앎, 즉 행동 지식이 행동을 바꾼다. 행동을 바꿔야 생각이 바뀌고 거기서 깨달음이 일어나 지식이 생기고 지혜가 축적된다. “사람들이 가장 오해하는 말, “사는 대로 생각하지 말고 생각하는 대로 살자.”는 최악의 구호다. 인간은 평생 자기 생각에 다다르지 못한다. 생각은 몸의 배신자. 늘 타이의 시선과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머리(희망사항만)만 ‘앞서’ 간다. 오히려 사는 대로 생각해야 한다”(135쪽). 생각은 삶의 결론으로 생긴 산물이다. 삶을 바꾸지 않으면 생각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몸과 정신의 이원론을 창시한 데카르트 할아버지의 오류가 사상과 사고를 죽게 만든 원흉이다. “생각한 다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사유를 만든다.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이 말처럼 ‘틀린’ 말이 ‘좋은’ 말로 회자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몸과 정신의 이분법에다 근대의 쌍생아인 생산주의와 ‘상록수’ 정신으로 우리를 들볶는 논리다. 삶은 사유의 실현이 아니라 근거다”(205쪽). 행동을 바꾸지 않으면 삶이 바뀌지 않고 삶이 바뀌지 않으면 생각도 바뀌지 않는다. 삶이 곧 글이기에 다른 글을 쓰려면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삶을 바꾸지 않고 어제와 다른 글을 쓰려는 발상은 잘못된 망상이다.     


자기 삶이 없는 사람은 자기 생각으로 정리된 게 없는 사람이다. 책을 읽어도 자기 생각으로 읽지 않고 저자 생각 속으로 빨려 들어가 헤어 나오지 못한다. 남의 생각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셋방살이 신세다. 그런 사람이 글을 쓰면 주관이 없기 때문에 손님의 관점, 객관적(客觀的)인 글이 나온다.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글은 자기 시각은 없으니 자기 뜻대로 쓰는 ‘객관적인’ 것들이다”(116쪽). 객관적인 글은 한 마디로 내 주관으로 쓴 게 아니라 남의 생각과 관점에 기생해서 탄생한 졸작이다. 자기 삶이 없는 사람은 비유도 함부로 사용하는 사유를 한다. 체험적 각성에 기반하지 않는 비유는 다른 사람의 비위를 건드릴 수 있다. “사는 길(‘살 길이 아니다’)이 없는, 길이 막힌 사람에게 길은 비유가 될 수 없다. 이동의 자유를 박탈당하면 길에 나서는 것 자체가 삶의 목표가 된다. 길은 수단, 방법, 도구를 뜻하기도 하지만 목적이 다른 이에게는 더욱 비현실적인 비유다. 비유는 종종 비윤리적이다”(128쪽). 장애인의 삶을 살아보지 않은 나에게 책은 길이다라는 비유를 사용하는 순간, 사는 길이 막힌 그들에게는 심각한 언어적 폭력으로 작용한다. 나에게 어떤 일을 상상하기 조차 힘든 일을 누군가는 삶의 현장에서 지금 그런 삶을 살고 있다. 나는 그런 현실에서 진실을 가려낼 자신이 없다. 울분과 분노와 적개심으로 진저리를 치는 삶이 일상일 때 나는 그들이 온몸으로 지어낸 글과 책을 읽고 역지사지라는 아름다운 사자성어의 시각으로 그들의 삶을 관망하고 관조할 뿐이다. 나의 부주의한 관심으로 함부로 사용하는 비유가 언어적 폭력을 넘어 삶을 어둡게 만드는 장본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내가 토해내는 모든 언어가 그들에게는 찬란한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과 접촉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삶을 몸으로 느끼는 감촉도 없다. 접촉 없는 감촉이 반복되면 공감은 물 건너가며 감동은 언젠가 도달해야 될 낯선 종착역이다.      



현실은 물질이고 희망은 생각이다     


글쓰기는 절망을 밥먹듯이 먹고 산다. 아무리 써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쓴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쓸 데 없는 글만 대량 양산한다는 절망이 앞을 가린다. ”절망은 바라는 것을 끊은 상태, 희망은 뭔가 바라는 상태, 어느 쪽이 더 희망적인가?“(93쪽) 아 놀라운 통찰이다. 글쓰기를 통해 내 삶을 조금이라고 바꿔볼 희망을 버리는 순간, 절망도 같이 없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냥 매일 몸으로 쓰다 보면 쓰임을 받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불확실한 가능성을 믿어서일까. ”바라지 말고 바라는 현실을 살면 된다. 희망은 필요 없다. 대중에게 희망을 제시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바쁜 이들은 주로 정치인과 종교인이다. 요즘은 지식인이나 사화 운동가도 힐링이라는 이름의 희망을 말하는데 이건 진짜 절망적인 현상이다. 그들의 임무는 고통을 드러내고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들이 대중이 원하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불길한 징조다“(93쪽). 글 잘 쓰기를 바라지 말고 글 잘 쓸 때까지 쓰면 된다. 글쓰기가 자기를 치유한다는 처방전보다 글쓰기의 고통을 온몸으로 보여주며 글쓰기가 왜 삶과 분리되어 하나의 기법이나 기교로 부각하는지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 글 쓰는 사람의 사명이자 임무다. 글쓰기만큼 쉽다고 호도하거나 책 쓰기가 이처럼 쉽다고 책을 통해 자기 변신을 할 수 별도의 특별한 길이 있다는 상업적으로 유혹하는 사람에게 경종을 날리는 것이 글 짓고 책 쓰는 사람이 해야 될 도리가 아닐까. 글이든 책이든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전쟁을 치러본 사람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벌이는 사투의 흔적이다. 현장과 현실에서 진실과 진리를 증명해내야 한다. ”대중은 ‘착해 보이는 말’, 희망으로 대응한다. 현실은 물질이고 희망은 생각이다.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94쪽). 물질인 현실은 몸으로 바꿀 수 있다. 마음가짐을 바꾸어도 현실은 언제나 녹록지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금 여기서 주어진 현실을 끌어안고 꾸준히 꾸역꾸역 살아가는 길 뿐이다. 그 길 위에서 내가 벌인 사투의 흔적을 글로 담아내는 것이다. 그게 내 삶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길이다.     


“현실은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현실적’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115-116쪽). 내가 겪고 있는 현실도 내 경험적 렌즈로 필터링된 현실적인 현실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 주인의 관점으로 오염되지 않는 객관적인 현실은 없다. 오로지 현실을 바라보는 주관적인 시선으러 걸러진 오염된 현실만 존재할 뿐이다. 작가적 상상력을 아무리 발휘한다고 해도 당사자가 겪은 처참한 현실을 당사자처럼 처절하게 겪어내기 어렵다. 어렴풋한 추측과 상상 속에서만 그 아픔의 강도와 수준을 짐작할 뿐이다. 특히 삶의 끝과 밑바닥에서 마지막이라는 결단으로 버텨냈단 사람의 아픔이나 더 이상 갈 곳 없는 막장에까지 추락해본 사람의 몸에 각인된 고통은 언어화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겪어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저 다른 세상에서 펼쳐지는 공상영화나 다름없다. “고통이 없다면 위험에 처하게 된다. 느낄 수 없는 것은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151쪽). 리베카 솔릿의 《멀고도 가까운》에 나오는 말이다. 고통이 와야 비로소 몸이 반응한다. 그때 비로소 몸을 돌보는 행동이 시작된다. 고통의 강도와 수준도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서 겪는 경험의 깊이와 넓이에 따라 다르다. “독자의 상황(콘텍스트)이 책(텍스트)의 의미를 결정한다”(103쪽). 입장이 처지를 결정하지 않고 처지가 입장을 결정한다. 내가 불리한 입장에 처했을 때 나에게 유리한 도움을 제공하는 사람의 시각이나 접근으로 세상이 보인다. 절박한 위기가 서려 있는 문제 상황에는 그 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는 시각과 관점만이 수용된다. 아무리 유용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라도 그 책을 읽는 독자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에 따라 그 책은 다르게 읽힌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 골몰하는 한 사람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해결책이 들어 있는 책은 그에게 은인으로 다가간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 책은 그저 수많은 처방전을 담고 있는 책의 한 권일뿐이다. 텍스트에 담긴 메시지가 콘텍스트로 침투하는 게 아니라 콘텍스트가 품고 있는 문제의식에 따라 텍스트가 다르게 읽히는 것이다.     



내 심장을 뛰게 만드는 원동력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설렘이다     


“빗소리는 비의 지문”(206쪽)이듯 글은 그 사람의 지문이다. 글에서 울려 퍼지는 잔향은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따라 다르게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 우렁 한 행진곡이 들릴 수도 있고 비탄에 빠진 세레나데가 들리 수도 있다. “빗소리가 소음 일지 실로폰 소리가 될지는 비가 닿는 곳이 결정한다. 양철 지붕, 널어놓은 옷, 물의 표면, 황톳길, 무성한 나뭇잎, 창문, 한적한 도로, 복잡한 거리에 따라 다르다”(206쪽). 똑같은 솔방울 씨앗도 비옥한 땅에 떨어지면 목재로 자라다 목수에 목숨을 바치지만 척박한 바위틈에 떨어지면 사투를 벌이며 자라다 분재 채집가에 발견되어 평생 양지바른 곳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백년해로한다. 나의 선택과 관계없이 세상으로 내던져진 모든 존재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장소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내듯, 일한 장소 또는 공간과 거기서 누구와 만나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소리를 낸다. 여기서 한 사람이 내는 소리는 그 사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분재의 고통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다. 운 좋은 사람은 목재로 고생하지 않고 자랄 수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확실성 속에서 지금 여기서의 안위를 누릴 뿐이다. “고통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가능성뿐이다. 생사의 갈등으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이들에게 제시되어야 할 것은 미지라는 기대가 있는 사회다”(24쪽).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는 실낱같은 가능성을 가슴에 품고 지금 여기서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버티는 것이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알 수 없다는 불안과 설렘이지 당위로서의 생명이 아니다(23쪽). 불안하기 때문 더 치열하게 살아가고 설렘이 있기 때문에 고달픔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불안하지 않은 삶, 모든 게 확실한 삶은 살아갈 재미가 없어진다. 긴장되지만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을 때, 사람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니체가 죽기 전 약 10년을 극심한 고통을 벗 삼아 고통이 말하는 인생의 소리를 받아 적어 대작을 만들었듯이, 사람도 고통이 글감이다.      


미지의 세계를 기대하면서 죽고 싶지만 죽지 않고 버티는 힘 역시 언제 나에게 열릴지 모르는 가능성의 문이다. “삶과 죽음의 가장 큰 차이는 가능성이다. 행이든 불행이든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를 가능성. 인간은 행복이 아니라 가능성을 추구하는 존재다. 그래서 너무 일찍 죽으면 안 되는 것이다”(201쪽). 가능성은 늘 불확실한 먹구름 속에 가려져 있다. 보이지 않는다. 가능성은 불안감과 함께 살아간다. 지독한 기다림을 안주 삼아 그냥 기다리지 않고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 아등바등 살아가면서 우여곡절도 경험하고 시행착오 속에서 판단 착오를 줄여나가는 과정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면서 변화되어가는 나의 미래를 기대해보고 기다려보는 것이다. “인간이 변하는 경우는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상대방이 저항할 때이고, 나머지는 자신이 고통받을 때다”(81쪽). 나의 주장에 대해서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때 나의 의견(意見)은 의심(疑心)해볼 만한 의견(疑見)이다. 누군가 반대할 때 내 생각은 반론을 구상하며 발전한다. “사유는 비자발적인 한에서만 사유일 수 있고 사유 안에서 강제적으로 야기되는 한에서만 사유일 수 있다. 사유는 이 세계 속에서 불법침입에 의해 우연히 태어날수록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된다. 사유 속에서 일차적인 것은 불법침입, 폭력, 적이다”(310-311쪽).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나오는 말이다. 내 사유에 누군가가 갑자기 불법으로 침임 해 들어오지 않는 이상 나는 기존의 상식과 통념에 머물러 습관적으로 살아갈 뿐이다. “무릎 꿇을 때, 내려놓을 때, 눈물 흘릴 때, 누군가는 완성된다.” 영화, 에릭 클랩튼: 기타의 신에 나오는 대사다. 누군가 무릎 꿇고 울고 있을 때, 가만히 곁에서 힘이 되어주자. 누군가 그동안 가졌던 지위와 명예, 그리고 통념과 오만을 내려놓을 때 멀리서 힘차게 박수를 쳐주자. 그리고 혼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릴 때 조용히 함께 울어주자. 그 순간 한 사람은 이전과 다른 사람으로 거듭날 것이다.      



언저리는 진저리’ 주변을 배회하면서 진리를 찾는 길을 배운다     


“해석과 변혁은 분리되지 않으며, 다르게 해석하는 행위가 곧 변혁이라는 것이다”(87쪽). 내 삶의 의미를 해석한 대로 나는 쓰고 쓴 대로 살아간다. 살아간 족적을 더듬어 쓰기도 하지만 쓴 대로 살아간다. 그게 내 삶의 혁명이다. 그런데 쓰는 게 만만치 않다. 쓰기는 정말 쓰다. 쓰디쓴 사람이 쓴 글이 독자에게 심금을 울리는 감동으로 전해진다. “… 삶은 견딜 수 없이 절망적이고 무의미하다는 현실의 운명과, 이 무의미한 삶을 무의미한 채로 방치할 수 없는 생명의 운명이 원고지 위에서 마주 부딪치고 있습니다.” 김훈이 2001년도 《칼의 노래》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하면 했던 소감문이다. 절망적인 현실의 운명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생존을 보장하는 생명의 운명 앞으로 안간힘을 쓰며 다가가려는 작가의 사투가 원고지에 담긴다. 하지만 언제나 작가의 생명의 운명은 한 시라도 긴장의 끈을 놓으면 현실의 운명 앞으로 끌려가 맥을 못 추는 한시적인 운명이나 다름없다. “…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막막하고 아득합니다. 이 막막함과 아득함 위에 하나의 형태, 하나의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가혹한 고통이며 동시에 한없는 위안입니다. 고통이 위안이 된다는 것. 이 이상한 열정이야말로 제가 세상을 향해 유일하게 드러내는 운명의 모습입니다”(정찬, 1992). 작가는 고통으로 열정에 불을 지른다. 그게 또한 작가의 운명이라고 고백한다. 작가는 언제나 삶의 끝자락에서 막막하지만 적막한 저녁을 벗 삼아 가끔은 주막에 앉아 여유를 즐긴다는 핑계로 막걸리 한 잔에 지친 몸을 보듬 어보는 사람이다. 그리고 다시 막막한 사막 위에서나마 서막을 열어갈 수밖에 없다. “끝을 보고야 마는 것은 최고의 저항이다. 자신을 해명하기 위해 끝을 보려는 이들은 비교나 절충하는 방식으로 살지 않는다. 끝을 보고야 만 사람의 씁쓸함. 진실은 달콤하지 않다”(40쪽). 끝을 보고 만 작가는 씁쓸하지만 밝혀내야 할 진실을 부둥켜안고 독자의 세계로 잠입한다. 거기서 진실은 세상을 향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며, 독자는 작가의 진실 해명 노력에 전율하는 감동을 느끼는 것이다.     


작가는 상처의 출처를 찾아 아픔의 근원을 파고드는 사람이다. 그것이 개인은 물론 우리 사회에 던져주는 의미와 시사점이 무엇인지를 끈질게 물고 늘어지면서 질문하는 사람이다. 작가는 상처에서 깨달음을 찾아내고 의미를 부여하는 부처다. “작가는(학자도 마찬가지다) 죽을 때까지 ‘팔아먹을 수 있는’ 덮어도 덮어도 솟아오르는 상처가 있어야 한다.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경험을 쓰는 것이 아니다. 경험에 대한 해석, 생각과 고통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 자체로 쉽지 않은 일이고, 그것을 표현한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산을 넘는 것이다”(246-247쪽). 작가는 누구나 경험하지만 그 경험이 저마다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인정하고 해석하면서 동시대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을 남다른 시각으로 사유하는 사람이다. 작가는  몸으로 느끼는 통증보다 통증을 일으킨 사회구조적 원인을 개인과 연관시켜 깊이 사유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과정에서 작가는 깨달음의 깊이에 감당할 수 없을 때, 진저리는 치면서도 거기서 진리를 찾아내려는 사람이다. “진저리는 몸이 해체되기 시작할 때 뼈와 근육 간의 연결이 이탈(disarticulation) 되기 전 단계의 몸이다. 진저리의 최후는 몸과 영혼의 분리, 죽음이다. 진저리 치는 글을 쓰는 작가는 여러 번 죽었다 깨어난다. “작가 자신이 유일한 독자”인 시간은 자기 몸과 싸움 중인 유사 죽음의 상태다. 그렇게 만들어진 독창(獨唱)이 어찌 편안히 들리겠는가“(59쪽). 진저리가 몸으로 느껴지는 독창(獨唱)에서 작가의 독창적(獨創的)인 사유를 발견한다. 진저리는 그걸 경험해본 사람의 몸에 존재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몸서리다. 그걸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에 진저리는 언저리에서 이리저리 헤맨 한 개인의 주관적인 주저리주저리로 들릴 수 있다.     



진저리의 깊이와 폭만큼 작가의 상상력의 깊이와 넓이도 심화되고 확산된다  

   

“인간의 변화는 진저리를 동반한다. 독서에는 반드시 몸의 반응이 따른다. 가벼운 바람도 있고 통곡할 때도 있다. 어쨌거나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59쪽). 나 역시 이 책을 읽고 읽기 전의 돌아갈 수 없는 진저리를 쳤다. 내가 살면서 친 몸서리를 여기서 다시 쳤다. ”진저리의 폭만큼 세계는 넓고 깊어진다. 초라하다. 이 깨달음을 표현할 나의 말이 더욱 초라하다”(59쪽). “진저리의 폭만큼 세계는 넓고 깊어진다.” 이 말 이상으로 체험적 깨달음으로 각성의 소중함을 전할 말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만 틈 몸으로 강렬한 깨달음의 울림만큼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울트라 시력(視力)은 없다. 시력(視力)은 내가 본 것이 역사적으로 축적되어 어느 순간 발현되는 시력(視歷)이다. “자기 시력(視歷) 수준에서밖에 볼 수 없다”(23쪽). 내가 사물이나 현상, 인간관계나 세계를 보면서 생긴 역사적 시력(視力), 시력(視歷)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상상력은 지금 여기를 육안이나 뇌 안으로 바라보는 육체적이고 과학적인 눈에서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상상력은 타인의 아픔에 밤잠을 못 이루는 측은지심과 현상 세계를 뛰어넘어 전체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과 과제를 생각하는 능력이다. “인간이 자기 모습을 직시할 수 있는 통로는 거울이 아니라 상상력이다”(179쪽). 거울을 보고 외모를 판단하고 고칠 수 있지만 내가 직간접적으로 관여된 역사적 사건과 사고의 뒤안길을 비춰줄 수는 없다. 사건과 사고의 뒤안길을 비출 수 있는 유일한 거울은 상상력이다. 거울로는 볼 수 없어도 상상력으로는 보이지 않는 부분도 겉으로 끌어내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알고 싶은 사람이나 대상은 남다르게 끌린다. 호기심의 물음표가 드나들고 감동의 느낌표가 수시로 출몰하는 지역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대상이다. 알면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면 알고 싶어서 잠이 안 온다. “가장 중요한 사랑의 조건은 너를 알고 싶다 혹은 그것을 알고 싶다는, 대상에 대한 앎의 의지다. (사랑의 상대가 사람이 아닌 경우도 있다) 알고 싶은 마음. 권태는 더는 알고 싶은 것이 없는 상태고. ‘밀당’은 ‘안 알려주겠다는 시간 낭’ 비고, 사랑의 끝은 질문이 없어진 상태다”(143쪽). 질문의 방향과 성격이 내가 나아갈 수 있는 관문의 성격과 방향을 결정한다, 사랑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궁금증의 중증 상태로 돌변한다. 내가 던진 질문으로 답이 나에게 찾아오지만 여전히 만족할 수 없다. 또 궁금해지고 물음표가 음표처럼 눈앞을 하루 종일 아른거리며 춤을 춘다. 그것이 학문적 관심으로 발전하면 걷잡을 수 없는 문제의식이 온몸을 휘감는다. “문제의식은 왜 이런 글을 썼는가에 대한 저자의 주장, 독자의 읽기 과정, 사회적 합의라는 세 가지 아름다움의 일치다. 문제의식은 ‘새로운 소재 발굴’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없던 생각이다. 그래서 문제의식은 글쓴이의 지식, 생각(이론)의 틀, 정치적 입장, 사회에 대한 애정 등 인간의 지적 능력을 집약한다”(107쪽). 진정한 공부는 문제의식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미 밝혀진 답, 선각자들이 찾아놓은 답의 밥상에는 식상함이 넘쳐나고 상식을 뒤집는 몰상식한 발상은 숨을 거둔 지 오래다.  

    


내가 먼저 답이 없는 길을 걸어가면서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세계로 뛰어들고 그들의 책 속으로 몸을 던져 파고들어간다. 나 혼자 세상의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기에 책은 내 몸이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대신 경험해준 스토리를 들려준다. “독서는 타인의 삶을 사는 행위다. 자기만의 사고와 태도, 시각은 과정에서만 얻을 수 있다”(121쪽). 타인의 삶을 많이 살아본 사람만이 타인의 삶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저마다 다른 세계에서 타인의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내가 살아가는 자리에서 필요한 전문성을 현장성에 비추어 점검하면서 어제와 다른 전문가로 거듭나기 위한 치열한 독서와 처절한 체험의 융합을 오늘도 멈추지 않고 시도해본다. “전문성 없는 실무자와 현장 능력이 없는 전문가는 걸어 다니는 재앙이다. 이들의 결과가 세월호다”(105쪽). 책을 읽으면서 글 짓고 책 쓰는 사람의 전문성이 뭘까 생각해보았다. 글쓰기의 전문성은 글을 쓰는 삶이 현장에서 생긴다. 현장 능력 역시 현장에서 몸으로 뒹굴며 땀과 눈문을 흘려야 몸으로 각인되는 체험적 깨달음이다. 나 역시 전문성 없는 실무자나 현장 능력이 없는 전문가가 되지 않기 위해 더 처절하게 살고 치열하게 고뇌하는 삶이 열리는 가능성을 꿈꿔본다. 이 책을 읽고 읽고 싶어서 미치겠다고 생각되는 책 30여 권을 주문하는 즐거운 부작용(副作用)(?)이 발생했다. 다시 책을 기다린다. 어떤 저자와 만나 또 삼매경에 빠질지 예상할 수 없는 불확실함이 확실함이 가져다주는 안락함보다 몇 배나 더 행복한 이유는 무엇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난국을 돌파하는 ‘통찰’의 근원, 니체에게 배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