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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여자의 공통점

한 번 빠져들면 빠져나오기 어렵다

책과 여자의 공통점: 한 번 빠져들면 빠져나오기 어렵다



책아일체(冊我一體)와 여아일체(女我一體)는 물아일체(物我一體)보다 강렬하다   

  

발터 벤야민의 사유집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의 소제목 `13 번지`는 책과 창녀의 공통점에 대해 무려 13가지를 언급한다. 한 마디로 그에 따르면 “책과 창녀는 무척 젊게 만들어준다”는 데에 공통점을 찾는다. 그중에 몇 가지만 열거해보면 이런 점들이다. 책과 창녀는 둘 다 침대로 데려갈 수 있다. 책과 창녀에게는 일분일초가 귀중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과 좀 더 가까워질 때에야 그들에게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그들 안에 잠겨 드는 동안 그들은 시간을 재고 있다. 책과 창녀는 공공건물에서 산다 - 특히 대학생에게 그렇다. 참으로 벤야민다운 발상이다. 벤야민이 말하는 책은 종이책이다. 전자책이라면 동일한 유혹의 효과가 나오기 어렵다. 종이책이 지니는 물성(物性)과 만나는 사람의 촉감(觸感) 때문이다. 전자책은 책의 저자나 내용과 출판사에 따라 별다른 차이가 없지만 종이책은 천차만별이다. 우선 커버가 하드커버냐 소프트커버냐에 따라 안에 담고 있는 내용을 어느 정도 암시한다. 하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책이 주는 묵직한 중량감의 차이가 메시지의 무게로 느껴지기도 한다. 겉표지 디자인에 배치된 이미지와 제목, 글자체는 주는 시각, 그리고 표지의 종이의 질감에 따라 책 내용을 어느 정도 감잡을 수 있다. 종이책의 마력은 겉표지를 만지고 다음 장을 넘길 때의 감촉과 소리는 청각적인 자극으로 독자를 유혹한다. 그리고 목차의 구조와 메지지 배열에서 저자의 목소리가 청각적으로 들리면서 우선 독자를 압도한다. 거기다 독자를 최대한 자기편으로 끌어당기는 서문의 감동적인 유혹은 책을 읽지 않으면 못 배기게 만들어버린다.  

   


벤야민의 아이디어를 근간으로 책과 여자의 공통점을 보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보았다. (읽고 싶은) 책은 (영원히 만나고 싶은) 여인이다(남자에게). 책아일체(冊我一體)와 여아일체(女我一體)는 물아일체(物我一體)보다 강렬하다. 책에 빠져드는 순간 책과 나는 완전히 한 몸이 된다. 우연히 집어 든 한 권의 책은 나를 빨아들이는 가장 강력한 책, 속수무책(束手無策)이다. 책이 내 몸을 관통하면서 인두 같은 문장을 만나 상처를 남긴다. 그 상처 위에 아름다운 꽃이 핀다. 통렬한 깨달음의 얼룩과 무늬로 점철된 꽃이다. 특히 우연히 만난 책 한 권이 한 사람을 완전히 다른 길로 빠지게 만드는 불광불급(不狂不及) 의 촉매제다. 책은 그렇게 한 사람을 유혹하는 강력한 매개체다. 책과 여자는 이런 점에서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      



상대방을 주로 누워서 유혹을 한다     


신간 매대에는 저마다의 책들이 누워서 사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책은 누워있을 때 독자의 눈에 더 잘 띈다. 매대에 누워있지 않고 뒤편의 서가에 꽂히는 순간 책의 생명성은 급격히 짧아진다. 책은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매대에 자빠져 있어야 한다. 가급적 매혹적인 자태로 누워있어야 독자에게 간택된다. 책은 한순간, 한 눈 팔지 못하게 만드는, 첫눈에 반하는 끌림의 매력이 있어야 살아남는다.     



겉모습을 드러내는 표지가 멋지면 속내용의 부실함은 잠시 유보될 수 있다   

  

화장을 잘하면 속 마음도 위장할 수 있다. 표지는 내용을 지배한다. 형식이 내용을 규제하는 것처럼 독자의 구매 결정은 표지와 제목이다. 표지 디자인에서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다음 제목으로 독자의 손길이 뻗치게 만들어야 책은 비로소 독자의 품으로 안긴다. ‘제 목’을 걸고 ‘제목’을 정해야 ‘제 몫’을 할 수 있다. 포장을 잘하거나 분장으로 본색을 감추면 일시적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위장된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때와 장소에 따라서 동일한 모습도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같은 책이어도 어떤 서점에서 만났는지, 누군가의 특별한 소개로 만났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우연히 만났던 책인데 누군가 강력하게 추천해주면 달라 보인다. 책은 이렇게 변덕스러운 마음이 물결을 치며, 그때그때 나를 끌어당기는 다른 마력(魔力)으로 다가온다. 사랑하는 사람도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만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다가온다. 만남으로 다가오는 매력은 언제나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고 수시로 마법의 춤을 춘다.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알 것 같은데 모르겠고, 모를 것 같은데 알 것 같기도 하다. 책과 사람도 마찬가지다. 난해하게 다가와서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더니 비로소 저자의 의도와 의미를 알 것 같기도 하다가 다른 문맥으로 읽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쉽게 읽었지만 다른 사람과 토론해보면 전혀 다른 의미의 껍질로 포장된 경우가 생긴다. 한두 번에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잠재되어 있는 곳이 바로 책이나 사람이다.  

   


한 번 빠지면 빠질 수 없다.     


무아지경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요지경(瑤池鏡)’이라는 생각이 들 때뿐이다. 책이든 여인이든 마음에 들면 상대의 마음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빠지면 다시 빠질 수 없다. 빠져들어갈수록 다시 나올 길은 요원하다. 책 중에 가장 강력한 책은 속수무책(束手無策)이다. 책을 다 읽어도 그 감흥에서 벗어날 길이 막막한 경우가 많듯이 한 사람과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세상은 다 배경으로 보일 뿐이다. 오로지 나와 상대만이 주연으로 연기하는 무대만 보일 뿐이다.   

  


()은 바라지만 중후한 원숙미는 깊어진다     


비록 겉모습은 바라지만 같은 내용도 다르게 태어난다. 오래전에 읽은 책은 주로 책꽂이에 꽂혀 있거나 어딘가에 쌓여 있다. 세월과 함께 책도 점차 나이를 먹어간다. 겉표지와 내지가 노랗게 변색되고 메모했던 흔적도 흐릿해지거나 퍼진다. 하지만 거기에 담긴 나의 메모 흔적과 우연한 마주침으로 얻은 깨우침은 색다른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숙성 미가 성숙미를 낳는다. 오래된 고전에서 미래를 읽어내고 중후한 원숙미에서 인생의 지혜를 배운다.     



추천(소개)해준다고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가치판단 기준은 저마다 다르다. 마음속의 위기의식이 없는 사람에게 추천도서는 아무리 좋은 책이어도 그냥 종이에 쓰인 글자 모음집일 뿐이다. 상대가 아무리 좋다고 생각해도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 게 있다. 책 역시 마찬가지다. 마음속에 문제의식이 있는 사람에게 세상의 모든 책은 스펀지처럼 빨려 든다. 나쁜 책은 없다. 다만 책을 읽는 사람의 마음이 나쁠 뿐이다. 세상의 모든 책은 저마다의 문제의식을 잉태하고 있다.     



침대에서 같이 잠드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하지만 책은 주로 머리‘맡’에 팽개쳐져서 자고, 여인은 주로 ‘곁’에서 품고 잔다. 책을 읽다가 마저 읽어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침대로 가져간다. 조금 읽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이 감기고 책은 어딘가에 던져진다. 침대에서 누워서 책을 읽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책은 앉아서 책상에서 읽어야 제대로 읽힌다. 침대로 데려가고 싶은 유혹이 있어도 책은 책상에 놓고 읽자.     



남에게 빌려주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소유 욕망이 강해지고 공유 욕구는 줄어든다. 책을 빌려서 읽으면 빌붙어서 살아간다. 커피 한두 잔 안 마시고 책을 사면 내 맘대로 부려먹을 수 있다. 아무 데나 데리고 다닐 수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딘가에 처박아 놓고 한 동안 안 볼 수도 있다. 마음대로 밑줄을 긋고 중간에 한 페이지를 접어 놓고 거기에 메모를 해놓을 수도 있다. 마음대로 부려먹으려면 빌리지 말고 사자. 책을 소유하고 마음대로 읽어야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소산으로 남는다.   

  


만나고 나면 진한 여운이 남아서 또 만나고 싶은 욕망이 들끓는 경우가 있다.


낮이나 밤이나 봐도 또 보고 싶다. 읽는 동안은 무아지경이 책아지경으로 바뀌지만 읽고 나서 책장을 덮은 순간 진한 여운과 잔향이 오랫동안 온몸을 휘감는다.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이 컸다. 빠져든 매력의 바다는 한 동안 나를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또 만나고 싶은 충동이 끊이지 않는다. 어제와 다른 모습으로 같은 책을 읽고 싶기도 하고 어제와 다른 모습을 띠고 서점에서 잠자는 책을 흔들어 깨워 만나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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