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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마침표'가
나에게는 '물음표'입니다

마침표가 잠자는 사이 물음표가 질문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당신의 '마침표'가 나에게는 '물음표'입니다


글은 길이다


“내가 쓴 글은 내 글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정확히 나의 글이다. 왜냐하면 내 글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123쪽). 이성복 시인의 《무한화서》에 나오는 말이다.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이 보이는 이유다. 글은 그 사람의 삶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삶과 무관하게 글을 쓸 수 있고, 삶과 다르게 글을 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글은 독자와 공감하기 어렵고 감동을 주기도 어렵다. 글과 삶은 하나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 삶이 바뀌지 않고서는 글도 바뀌지 않는다.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 자기 다운 색깔이 드러나는 글, 살아온 삶을 담아내는 글쓰기가 진짜 글이고 글쓰기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뇌리를 떠나지 않는 명대사가 있다.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 분)이 남긴 말이다. “신의 문서는 ‘글’이 아니라 ‘길’이옵니다. 전하께서 밟고 걸어가셔야 할 길이옵니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사옵니다”라는 충언을 전하면서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하겠다는 치욕을 견디면 살 수 있다는 명분을 담은 글이다. 하지만 글은 글로서 끝나지 않고 길로 연결된다. 나에게 글은 역시 길이다. 나의 글에는 내가 살아온 길이 있고, 살아갈 길도 있으며, 살아가야만 하는 길도 있다. 글은 내가 살아가는 삶이자 길이다. 글과 길, 그리고 삶은 하나다. 내가 살아가는 삶대로 글을 쓰고 쓴 글대로 길을 만들어 걸어간다. 그래서 그 사람의 글을 보면 그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 보이고 삶이 보인다. 글과 길과 삶은 따로 노는 객체가 아니라 함께 어울려 돌아가는 삼위일체다.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지 않고 글 쓰는 기법을 가르치는 글쓰기 과정은 어떤 면에서 무의미하다. 삶을 바꾸지 않고 글쓰기는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노력이 그 사람의 글이 된다. 글쓰기는 그래서 애쓰기다. 



“글이든 그림이든 노래든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의 생각은 결국 자기가 겪은 삶의 결론이라고 믿습니다.” 신영복의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에 나오는 말이다. 글은 테크닉을 연마해서 쓴 산물이 아니다. 글쓰기는 내 생각을 녹여내는 사고의 과정이다. 내 생각은 내가 살아온 삶의 결론이다. 글을 바꾸려면 생각을 바꾸어야 하고 생각을 바꾸려면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삶을 바꾸지 않으면 글도 바뀌지 않는다. 삶을 바꾸지 않고 글쓰기 테크닉을 배우는 과정만큼 무의미한 글쓰기 공부도 없다. “더 훌륭하게 글을 쓰는 것은 더 훌륭하게 사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286쪽).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 II》에 나오는 말이다. 더 훌륭한 글을 쓰기 위해서는 더 훌륭한 삶을 살아가면서 삶에서 사색의 샘물을 길어 올려야 한다. 삶이 훌륭하지 않으면 거기서 나오는 글 역시 훌륭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글은 삶에 대한 사색과 해석의 산물이다. 누구나 다 저마다의 삶을 살아간다. 아침에 일어나 낮에 활동하고 저녁에는 집에 들어가 밤을 보내고 새벽을 맞이한다. 동일한 24시간을 보내지만 그 시간에 누구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는 다 다르다. 생각지도 못한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작심하고 사건을 일으키기도 한다.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하고 기대와는 정반대로 대책 없이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내가 겪은 체험에 의미를 부여해서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경험으로 부각된다. 책은 나의 생각과 내 이야기를 써야 되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이 지니는 교훈을 해석해내기 위해서는 경험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사람이 메시지다


경험이 의미를 가지려면 경험을 해석하는 나만의 관점이나 신념이 필요하다. 관점이나 신념은 경험한다고 생기지 않는다. 경험을 해석하는 이론적 틀이나 사고방식의 근거가 되는 독특한 세계관은 경험의 산물이 아니라 이성적 탐구의 결과다. 똑같은 경험을 했지만 거기서 배우는 교훈이 다른 이유는 경험을 해석하는 독창적인 이론 체계나 패러다임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똑같이 어떤 일에 도전하다가 실패했지만 실패 경험을 해석하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거기서 배우는 교훈도 다르다. 누군가는 실패를 해서는 안 될 금기 사항이라서 가급적 실패 흔적을 지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에게는 실패 경험은 인생에서 더 이상 드러내지 말아야 할 슬픈 과거이자 덮어두어야 할 얼룩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에게 실패는 새로운 실력을 쌓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색다른 실패야말로 색다른 실력을 낳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실페체험은 드러내지 말아야 할 아픈 과거가 아니다, 오히려 실패를 왜 했는지, 거기서 배운 교훈은 무엇인지를 공론화시켜 다른 사람에게도 비숫한 실패가 반복되지 않도록 정문일침의 깨우침을 주는 복차지계(覆車之戒)의 교훈을 던져준다. 경험은 글감이 되지만 그 경험을 어떻게 해석해서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글로 거듭난다. 경험에서 배우려면 그걸 개인적 체험 틀에 걸러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거나 특정한 이론적 관점으로 재해석해야 한다. 나아가 사회구조적 관점에서 한 개인의 체험적 깨달음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를 성찰해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 삶이 곧 나의 메시지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다. 그 사람이 말하는 메시지는 그 사람의 삶이 농축된 결정체다. 삶을 담은 메시지를 긁으면 글이 되고 그리면 그림이 되며, 목소리로 담아내면 노래가 된다. 어떻게 살아가는 게 진짜 나다운 삶인지를 시행착오를 경험하며 겪은 스토리가 바로 창작의 원료가 된다. 모든 예술가는 자기 삶을 재료로 예술적 창작을 한다. 그들에게 삶은 예술이고 예술이 곧 삶이 된다. 창작의 기본은 기법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창작하는 사람의 삶이 만들어 간다. ‘미디어는 메시지다’가 아니라 ‘사람이 메시지’다. 유영만이 전하는 메시지와 톨스토이가 전하는 메시지는 다르다. 맥루한이 말한 ‘미디어는 메시지’는 이제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똑같은 말도 누가 전달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메시지로 다가온다. 간디가 한 말, “내 삶이  곧 나의 메시지다”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사람이 곧 메시지인 이유는 미디어가 다르면 똑같은 메시지도 다른 의미로 전달되듯이 사람이 다르면 살아온 삶이 다르고 삶이 다르면 삶이 품고 있는 의미도 다르기 때문이다. 똑같은 열정이라는 단어도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이 전하는 메시지와 간디가 전하는 메시지는 다르다.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 곧 미디어인 셈이다. 간디라는 미디어와 유영만이라는 미디어는 다르다. 라디오로 전하는 메시지와 TV로 전하는 메시지는 같은 메시지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다르게 받아들인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삶을 녹여서 쓰는 글이 곧 길이 되는 이유는 그 길은 그 사람만이 걸어온, 걸어가는, 걸어갈 길이기 때문이다. 삶이 곧 메시지인 이유는 그 삶을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로 녹여내기 때문이다. 간디가 사용하는 비폭력과 체 게바라가 사용하는 혁명이라는 단어에는 그 사람의 삶이 녹아 있다. “모든 단어에는 자신의 냄새가 있다”(301쪽).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에 나오는 말이다. 단어에는 그 사람의 열정과 혼, 인격과 철학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삶은 수동태가 아니라 능동태다


황지우 시인은 “시인은 직업이 아니라 상태”라고 한다. 직업으로서의 시인은 한 동안 시를 쓰다가 안 써도 여전히 시인이다. 하지만 상태로서의 시인은 시를 쓰지 않는 순간에는 시인이 아니다. 치열하게 시를 쓰는 순간만 시인이라는 이야기다. 김경주 시인도 자신을 시인이라고 소개하지 않고 시 쓰는 김경주라고 소개한다. 나 역시 글 쓰는 작가나 책 쓰는 저자라기보다 언제나 글을 쓰고 그걸 일정한 논리체계와 구조로 만들어 책을 끊임없이 쓰는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이다. 글 쓰는 일이 직업이 아니라 상태인 사람은 매 순간을 글감으로 포착, 그걸 어떻게 해석해서 하나의 글로 완성할지 늘 치열하게 고민한다. 아침에 출근하는 길에도 졸거나 자지 않고 하루 일과를 구상하며 주변을 유심히 관찰한다. 일상은 글감의 텃밭이다. 다만 텃밭에서 자라는 글감을 영감으로 포착하려는 남다른 관심과 집요한 관찰 여부에 따라 창조적 영감으로 연결되는지를 결정한다. 삶에서 글감을 찾아내는 사람은 삶과 글과 책이 따로 놀지 않는다. 그들은 일상이 글쓰기이고 글쓰기가 한 권의 책으로 연결되는 삶의 작가이자 저자다. 작가와 저자는 공식적으로 글을 쓰거나 책을 낸 사람만 해당되지 않는다. 남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되 매일 반복되는 삶 속에서도 뭔가 다른 의미를 찾아내고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 끊임없이 반성하고 성찰하며 기록을 남기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은 주관적 관심을 갖고 주체적으로 살아가지 않고 누군가 정해놓은 기준과 원칙을 따르는 수동적인 삶을 살아간다. “이 사회에 태어나 살아간다는 것은 곧 수동태 문장으로 된 자서전을 쓰는 일이다.” 시인 신해욱의 고백이다. 시인을 비롯해서 모든 작가는 직업이 아니라 상태다. 그 상태도 남이 내 인생을 규정한 대로 따라가는 수동태 인생이 아니라 내가 내 인생을 적극적으로 구성해가는 능동태 인생이다.



책 쓰기는 수동태 자서전을 능동태 자서전으로 바꾸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살아가면서 해야 될 모든 일을 능동태로 만들 수 없다. 사전에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계획대로 이행하기 위한 다양한 실천 전략을 수립하지만 사실은 계획과 전략대로 순조롭게 풀리지 않는 일이 더 많다. 능동태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똑같은 삶을 살아도 누군가는 거기서 영감을 받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영감을 느끼지 못하고 무료한 삶을 반복한다. 남이 정해놓은 규칙과 관습에 따라 습관적으로 반복해 관습을 만들어간다. 관습에 얷매인 사람은 새로운 발상 자체가 어렵다. 틀에 박힌 타성에 젖어 산다. 언어도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한정되어 있다. 비슷한 표현을 반복하니 생각도 점차 틀에 박힌다. 그런 사람이 쓰는 글은 역시 타성에 젖은 관습의 언어로 구축된 익숙한 문장이 줄이 이어 나온다. 수동태 인생을 사는 사람은 누군가 이미 설계한 플랫폼과 프레임 안에서 안주한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질문보다 감탄사를 연발하게 이미 누군가 정의한 세계 속에 빨려 들어간다. 온통 감탄사 천국인 각종 먹방 방송이나 동영상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지만 누군가는 고독한 시간을 보내면서 질문을 던진다. 싸늘하게 식은 호기심은 일상에서 떠나고 마침표로 무장된 지루한 삶이 반복될 때, 어제와 다른 물음을 제기하며 깨달음을 축적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의 아이러니는 우리가 축적한 많은 체험적 지혜는 수동적으로 겪으면서 능동적으로 재해석한 사유의 산물이다. “수동적으로 겪지 않으면(事故) 능동적으로 사고(思考)할 수 없다.” 생각지도 못한 사고(事故)가 생각지도 못한 사고(思考)를 불러온다. 사고당하지 않으면 사고도 바뀌지 않는 법이다. 



글쓰기는 난관을 통과한 사람이 남기는 사투의 흔적이다


‘글 쓰다’를 의미하는 독일어 ‘schreiben’은 ‘~에 틈(금)을 내다’는 라틴어 ‘scribere’에서 유래되었고 그리스어로 쓰다는 ‘graphein’인데 이는 ‘새기다’라는 의미다(박민영, 2019). 글쓰기는 살아가면서 생기는 틈새를 포착, 나만의 언어로 그 사이에 그리움이나 간절함을 새기는 과정이다. 틈새는 갈망하는 욕망과 현재의 불만이나 불평 사이에 생긴다. 글쓰기는 지금 여기서 느끼는 현실의 난관을 건너 미지의 세계로 건너가려는 안간힘이다. 그래서 모든 쓰기는 애쓰기다. 글은 지금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지금과 다른 미지의 세계를 꿈꾸면서 욕망의 날개를 펼칠 때 시작된다. 책 쓰기는 기지(旣知)를 내 생각으로 다시 정리하는 공부의 과정이자 질문을 던져 미지의 세계로 입문하는 부단한 깨달음의 과정이다. 미지의 세계는 이미지로 상상할 때 현실로 다가온다. 글쓰기는 지금 여기서 느끼는 문제의식이나 위기의식을 해소하기 위해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도달하고 싶은 곳으로 떠나는 지적 여행이다. 내가 도달하고 싶은 꿈의 목적지에 대한 이미지(image, 理美智)는 알 수 없는 미지(未知)의 세계다. 이미지(image, 理美智)는 이상(理想)과 미덕(美德)과 지혜(智慧)의 합작품. 이상(理想)을 추구하는 나의 비전과 미덕(美德)을 갖추려는 나의 품격, 그리고 지혜(智慧)를 쌓아 나가면서 생기는 나의 자질이 만든 합작품이다. 글은 글을 다 쓰고 나서 독자에게 어떤 이미지로 다가갈 수 있을지를 미리 구상하고 나서 쓸 때 더욱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쓰고 있는 그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은지, 그 메시지의 핵심 의미와 의도, 그리고 이미지를 어떻게 구상하는지에 따라 글의 구도가 달라지고 의도도 달라진다.



“나는 죽음의 공포에 삶의 욕구로 반응했습니다. 삶의 욕구는 낱말의 욕구였습니다. 오직 낱말의 소용돌이만이 내 상태를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낱말의 소용돌이는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을 글로 표현해냈습니다.” 《숨그네》를 쓴 헤르타 뮐러의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이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욕구나 욕망은 사람마다 다르다. 문제는 그 욕구나 욕망을 어떤 단어로 포착해서 표현할 것인지에 따라 지금 느끼는 감정을 적확하게 표현한다. 내가 늘 들고 다니는 낱말 상자만으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상황에 자주 직면할수록 언어적 틈새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글쓰기는 여기와 저기 사이에 존재하는 욕망의 간극을 기존의 언어로 메꾸려는 노력이다. 문제는 기존의 언어로 간극을 좁힐 수 없다. 여기서 내가 배운 언어와 배우지 못한 언어 사이에 언어의 틈새가 존재한다.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모습을 적확한 언어를 동원해서 표현해야 되는데 배운 언어로만으로 턱없이 부족하다. 절절하게 느끼고 있지만 그걸 묘사하기에는 기존 언어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여기서 언어의 틈새가 존재한다. “작문 선생님은 그렇게 불렀다. 감정이나 대상 세계가 충분히 분화되기 이전에 미리 완성되어 버린 언어들로는 표현할 수 없는, 우리와 언제나 함께 있으나 ‘배운 언어’에 의해 정복되지 않은, 그런 세상이다. 그곳의 언어는 우리가 아직 배우지 못한 언어이다. 그 배우지 못한 언어로 향해 나가는 유일한 수단이 ‘배운 언어’라는 사실은 글 쓰는 자로서 나를 여러 번 좌절시켰다. 글을 쓰는 자의 임무 중의 하나는 언어와 사물이 그대로 등가가 되는 세상, 즉 자신의 언어로 배운 세상이자 기존의 표상으로 완성된 세계에 대한 영원한 투쟁이다… 언어의 틈새란 다르게 표현하자면 기존의 사물 자체의 이름으로서만 존재하는 언어 혹은 이미 알고 있는 언어에 의해서만 형성되는 생각과 그 생각이나 느낌이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면서 창조되는 언어와의 차이일지도 모른다”(175-176쪽). 배수아의 《당나귀들》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한 때 언어의 거미줄에 걸린 나방이었다


세상에서 읽어야 될 단 한 권의 책은 ‘삶글책’이다. ‘삶’을 ‘글’로 녹여내고 그 글을 논리체계와 구조에 따라 엮은 결과가 ‘책’이다. ‘삶글책’은 ‘삶’에서 건져 올린 깨달음으로 삶을 반추하고 성찰해서 탄생한 글로 집 짓기를 해서 탄생한 ‘책’이다. 책은 한 사람의 인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자기 인생의 첫 번째 기록물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한 권의 책이다. 한 사람의 삶은 여러 권의 책으로 정리되기도 하지만 그 누구의 책으로 환원할 수 없는 고유한 삶을 지닌다. 글이 심금을 울리는 이유는 삶에서 건져 올린 체험적 기록이기 때문이다. 실제 삶에서 건져 올리지 않은 수많은 글이나 책을 읽어보면 맞는 말이긴 하지만 살갗을 파고드는 감동이나 통렬한 깨달음은 없다. 책상에서 배운 앎은 글과 책의 원료로 사용되지만 그것으로 끝나면 빌려온 글에 멈춘다. 어떤 글이라도 나의 체험적 각성으로 녹여내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다 우연히 부닥친 우연한 경험일 뿐이다. 그런 경험은 얼마가 유지되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살아오면서 겪은 각성 사건,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이지만 내 삶의 전환점이 되어서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준 역사적 사건이다. 예를 들면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다니면서 후배 구타로 받은 무기정학 사건은 나에게 음주와 흡연을 가르쳐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오도 가도 못 할 나의 고교시절을 밑바닥부터 다시 생각하고 미래를 전망해보았던 전환점이 되었다. 극심한 방황에 종지부를 찍지 않고 그때부터 방향을 찾기 위해 물음표를 던졌다. 하지만 물음표는 정처 없이 떠돌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처음에는 내가 경험했던 회색빛 청춘을 적어 내려갈 적당한 언어를 찾지 못했다. 수렵과 어로, 농경과 채취 생활을 하며 야생에서 기른 야성은 지성의 언어를 만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기도 하다. 너무 일찍 중심의 언어, 표준의 언어를 배웠더라면 그때의 경험도 누군가 사용하는 언어로 그 시절의 삶을 틀에 박힌 방식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홀로 지내며 결정했던 사안의 뒤안길에 숨어 있는 사연을 드러낼 적확한 언어 역시 없었다. 그리고 드러낼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침묵과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에 들어와 고시공부를 포기하고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뒤척이며 어설픈 전문용어를 익히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생각은 좁은 시야를 벗어나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세상의 움직임을 내다보는 시각을 조금씩 다른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는 모방의 글쓰기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따로 글쓰기 수업을 배우거나 관련된 책을 읽어본 적 없이 그냥 혼자서 좋은 글을 베껴가며 조금씩 몸에 익히기 시작했다. 남들이 이미 쳐놓은 언어의 거미줄에 걸려 헤어 나오지 못하는 한 마리의 나방에 불과했다. 나도 모르게 내 몸에 설치된 언어의 리모컨에 따라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관습의 언어가 내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김수영 시인의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글에 나오는 문구다. 이렇게 머리로 생각하고 심장으로 느끼기 전에 그냥 생각나는 대로 손으로 썼다. 아니 그냥 써버렸다. 써서 버렸지만 버린 글들은 없어지지 않고 내 곁에서 나를 다시 기다렸다. 나의 언어로 다시 채색될 때까지 기다린 글들은 내 삶과 함께 다시 태어나기도 했다.



누군가의 마침표에서 작가는 물음표로 시작한다


대학원까지 선각자들이 쳐놓은 언어의 그물에 걸려 허우적거리다 스승님의 은혜 덕분에 모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수업하고 말하고 쓰는 고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모국어와 다른 영어로 읽고 말하고 쓰는 과정에서 나의 언어를 개발하기에는 역부족이고 절대 시간 부족이었다. 모국어로 번역한 다음 말하고 쓰는 과정은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 달리 나의 공부 여정을 나만의 언어로 남기겠다는 뜻은 전혀 없었다. “어느 날 길에 모인 명사(名詞)들. 형용사 하나가 지나간다. 짙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인. 명사는 충격과 감동으로 변화를 겪는다. 이튿날, 동사가 이들을 몰아 문장을 창조한다”(65쪽). 스탠리 피시의 《문장의 일》에 나오는 문장이다. 낯선 추상명사가 전문용어로 변신해서 나의 개념으로 끊임없이 장착되고 한정된 형용사를 모아 아름답게 꾸며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가끔씩 생각나는 동사 몇 개로 문장을 조합하는 영어 글쓰기로 박사논문을 받았다. 나의 언어로 나의 깨달음을 기록하는 논문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글쓰기 프레임과 규칙에 맞게 기존 언어를 조립하는 수준이었다. 형식에 지배당한 내 생각은 언어를 잃어버리고 기성 세계가 원하는 형식 중심의 글쓰기로 단어를 조립하는 방법을 깨우쳤을 뿐이다. “말들은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여기에 묶어내는 몇 줄이 영세한 문장들은 말을 듣지 않은 말들의 투정의 기록이다”(5쪽). 김훈의 《풍경과 상처》에 나오는 말이다. 나의 박사 학위 논문 역시 말을 듣지 않는 말들을 불러다 위치를 정해서 집어넣고 결정된 결론을 향해 움직이는 단어들이 힘을 합쳐 이룩해낸 어설픈 문장의 합작품이다. 나에게 다가오고 싶지 않은 어색한 단어들의 어설픈 조합으로 간신히 박사논문을 끝내는 순간 머릿속은 텅 비어있는 것 같았고 허망함은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책상에서 배운 관념적 지식으로 구성된 화려한 주장 끝에는 언제나 그 분야의 일가견을 갖고 있는 학자들의 마침표가 찍혀있다. 무수한 고뇌와 연구 끝에 내려진 결론이자 어떤 비판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난공불락의 신념이다. 내가 배운 교육공학이라는 학문에도 교육의 효율성과 효과성을 높이는 무수한 주장이 법칙과 원리, 명제와 이론으로 튼실하게 묶여서 책과 논문에서 저마다의 색깔로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유학을 마치고 삼성 인력개발원에서 5년간 쌓은 현장 체험은 나에게 다시 지성으로 지루해진 언어를 야성으로 날 서게 만들어주었다. 책상머리에서 머리로 조립한 지식이 체험적 지혜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져 내렸다. 지식으로 지시하는 주장보다 현장에서 몸으로 깨달은 체험적 지혜로 지휘하는 삶을 사랑하게 되었다. 마침표로 끝나는 수많은 주장대로 실천되고 현장도 바뀌는 줄 알았다. 이론적 주장을 현장에 적용하면서 만나는 괴리는 갈수록 거리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확실한 관념적 앎으로 불확실한 삶을 평가하고 재단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무기력했는지를 몸소 알게 되었다. 다양한 사실이 진실로 판명되기 전에 사견이나 사심으로 무장한 편리가 복잡한 현실에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몸을 던져 그들과 싸우며 눈물과 땀으로 엮어낸 개인적인 주장이 사람을 울리는 감동으로 전해질 때 더 이상 한 개인의 사견에 머무르지 않고 어느 정도의 동의와 공감을 얻어낸다. 피부를 파고들고 폐부를 찌르는 주장은 수많은 마침표로 끝나는 문장에 물음표를 던져 몸으로 건져 올린 절박한 신념의 산물이다. 글쓰기는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사회적 의미를 물어보고 따져보며 해석할 때 태어나는 각성의 기록이다. 삶으로 앎을 만들어가는 사람의 글이 소중한 이유다. 삶의 언저리에서 진저리 치며 안간힘을 쓰며 쓰는 글을 사랑한다. 



인생의 해답은 앞문보다 옆문과 뒷문에 많다

     

글쓰기는 마침표로 끝나는 문장 속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르게 생각하는 방안을 찾아내기 위해 물음표를 던지면서 시작된다. 작가에게 마침표는 또 다른 시작이다. 끝에서 머리를 들고 시작하는 ‘끄트머리’처럼 누군가의 마침표는 작가에게 물음표다. 당연함을 부정하고 원래 그런 세계, 물론 그렇다고 주장하는 관성에 물음표를 던져 느낌표를 찾아내는 고단한 여정이 글쓰기다. 막힌 문장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아내기 위해 내가 직접 해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깨달음으로 직조된 다른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본다. 어떻게 살아가는 게 정답인지 단언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어떻게 글을 쓰는 길이 올바른 길인지 알 수 없다. 저마다의 삶이 있듯이 저마다의 삶을 담아내는 고유한 글이 다양하게 존재할 뿐이다.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처럼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써줄 수 없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보지 않고 들어 보고 쓰는 대필 작가가 있긴 하다. 내가 살아본 삶이 아니라 다른 삶을 쓰는 대필은 치열한 사유와 고뇌가 거세되어 있다. 감정이입을 해도 겉도는 문장이 양산될 뿐이다. 어눌한 말투라도 내가 전하는 말에서 진심이 느껴지듯 어설픈 글이라도 내가 겪은 삶을 나의 언어로 써 내려갈 때 감동의 파도가 잔잔하게 밀려온다. 말문이 막힐 정도 벌어지는 갑작스러운 일에 앞은 보이지 않고 절벽과 절망만이 나를 휘감을 때일수록 앞문만 바라보지 말고 옆문과 뒷문도 있음을 명심하자. 인생의 묘안은 아주 자주 옆길로 샐 때 불현듯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앞문이 갑자기 막힌 상황에서 방법을 찾기 위해 옆문에게 물어보았다. 옆문이 말했다. “가끔은 옆길로 새면 생각지도 못한 샛길도 있고 돌아가는 길이 빠른 길이라고.” 인생의 많은 길은 앞문을 열고 나가서 순조롭게 찾은 길이 아니라 앞문이 막혀서 옆문으로 샜다가 만난 뜻밖의 길에서 찾은 가능성이다. 옆문은 한 마디 더 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위기는 없다고. 앞으로도 못 가고 뒤로도 못 가면  옆으로 가면 된다고,“ 사실 옆길로 새다가 우연히 만난 길에서 내가 걸어갈 길을 찾는 경우가 많다. 앞문이 막혀서 어쩔 도리가 없어서 뒷문에게 물어보았다. 뒷문이 인생의 또 다른 지혜를 알려주었다. “일보 후퇴(一步後退)하는 길이 이 보전진(二步前進)하는 길이라고.” “앞으로 가는 것만이 능사(能事)가 아니라 가끔은 마음을 비우고 뒤로 물러나는 길이 내 앞의 난적을 물리치는 길이라고.” 



글 쓰는 사람의 영원한 숙제(宿題)이자 일생일대의 과제(課題)는 정제(精製)와 절제(節制)다. 문맥에 맞는 말을 신중하게 선택, 정성을 들여 치밀하게 글을 쓰는 정제(精製)와 중언부언(重言復言) 하지 않고 핵심을 포착해서 혈도를 찌르며 긴장과 압축으로 단순 명쾌하면서도 울림이 오래갈 수 있도록 언어를 구사하는 절제(節制)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룰 때 글은 글을 읽는 사람의 그리움을 자극하고도 남음이 충분하다. 정제된 언어와 절제된 표현의 어울림이 가장 아름다운 글이다. 거기에 현장 체험을 통해 깨달은 작가의 개인적인 신념이 뜨거운 열정과 대담한 용기로 포장되어 있을 때 아우라가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도 불확실함으로 물든 격렬한 삶의 현장에서 확실함을 잠시라도 전해주는 일리 있는 한 문장을 오랜 정제 끝에 건져 올린다. 문장 끝에 문을 닫고 서 있는 마침표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반문도 해본다. 이 문장에 담긴 내 생각과 느낌 역시 편견이 산물은 아닌지, 내가 미리 정한 생각으로 편집한 선입견의 표현은 아닌지, 감정은 절제되지 않고 과장되어 있지는 않은지 물음에 물음표를 다시 던져놓고 내 경험을 다각적으로 해석해본다. 나도 모르게 내 생각 속으로 들어와 굳어져가는 타성과 통념에 물음표가 던져지지 않는 순간, 내 글은 다시 언어의 거미줄에 걸려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나방처럼 죽어가는 문장의 나열이 될 것이다. 오늘도 수많은 마침표에게 물음표를 던져놓고 새로운 날 선 사유를 시작하며 꾸역꾸역 쓰고 또 쓴다. 마침표를 찍어놓고 잠을 자는 사이 물음표가 먼저 일어나 글을 쓰기 시작한다. 하루는 언제나 물음표로 시작한다. 내가 없고 내 몸이 견디는 삶의 현장이 없는 글에는 물음표도 사망한 지 오래되었고 사람도 살아가지 못한다. 오로지 내가 견뎌내고 있는 삶의 현장이라는 무대 위에서 사투를 벌이며 토해내는 대사가 글이 되고 책이 되는 그날을 위해 연기하는 배우의 각오로 오늘도 글 쓰는 무대 위에 오른다. 그렇게 살아내는 스토리가 글이 되고 책으로 엮인다. 사람은 다 한 권의 책이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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