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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어도 글을 못 쓰는 이유는?

읽으면서 쓰고 쓰면서 읽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의 작독법(作讀法)

읽기의 완성은 쓰기다

읽으면서 쓰고 쓰면서 읽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의 작독법(作讀法)


문장을 축적하면 글쓰기도 일취월장한다


나는 책을 읽을 때 우선 저자가 어떤 문제의식으로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 살펴본다. 우선 저자의 약력을 읽어보고 제목이나 부제목의 색다름에 주목한 다음, 목차를 훑어보고 전체적인 윤곽을 잡아본다. 이어서 바로 서문을 읽어본다. 서문은 독자를 유혹하는 미끼가 들어있을 뿐만 아니라 저자가 독자에게 처음으로 자신이 왜 책을 쓰게 되었는지를 고백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서문에서 책이 독자에게 사랑받을지의 여부가 결정된다. 물론 제목이 절반 이상을 좌우한다. 서문을 읽으면서도 눈길이 가는 저자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문장에 밑줄을 긋고 해당 페이지에 포스트잇을 붙여 놓는다. 이제 서문이 나를 유혹하는 데 성공했으면 본격적으로 본문을 읽기 시작한다. 서문이 이미 나의 마음을 빼앗았다면 본문 속으로 파고들어가 의미의 껍질 속에 숨겨 놓은 메시지의 핵심이나 정수를 곱씹어본다. 피부를 파고드는 깨달음이나 폐부를 찌르는 통찰이 담긴 인두 같은 한 문장을 만나면 당연히 밑줄을 긋고 형광펜으로 다시 색으로 옷을 입혀 놓는다. 눈에 잘 띄게 하기 위해서다. 밑줄을 친 문장 중에서 어딘가에 꼭 써먹고 싶거나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문장은 나만의 비밀 문장 노트에 별도로 손 글씨로 적어놓는다. 진짜 부자는 문장 부자라고 생각한다. 문장 부자는 생각도 부자다. 절묘한 느낌을 해상도 높은 글로 써내는 사람은 군더더기 없는 촌철살인의 문장을 사용한다. 그런 문장은 평생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할 것 같은 문장을 꾸준히 축적해온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또 다른 문장을 만들어낸다. 


하늘에서 갑자기 문장이 떨어지지 않는다. 모든 문장은 한 사람이 우여곡절의 체험을 쌓으면서 만들어진 생각과 느낌을 적확한 단어로 지은 집이나 마찬가지다. 체험은 했지만 개념이 부족하거나 개념은 있지만 체험이 없다면 둘 다 촌철살인의 문장을 지을 수 없다. 문장은 글 쓰는 사람이 단어와 단어를 수없이 반복해서 조합하면서 생각하고 느끼는 온갖 감정을 담아낸 고뇌의 산물이다. 인두 같은 문장을 만나면 그 문장을 쓰기 위해서 작가는 얼마나 많은 침묵과 고독, 그리고 고뇌의 시간을 보냈을까를 거꾸로 생각해본다. 인두 같은 문장을 손으로 꾹꾹 눌러쓰는 동안 다시 저자의 고뇌의 숲으로 방문해서 함께 숨결을 따라가 본다. 인두 같은 문장은 주로 내가 알고 있는 통념을 거부하고 색다른 깨우침을 전해주는 문장이거나 알고는 있었지만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했던 느낌을 절묘하게 담아내는 문장이다. 그런 문장을 만나면 밑줄을 긋고 잠시 읽기를 멈춘다. 비밀 문장 노트에 옮겨 쓴 다음 그 문장에 품고 있는 속뜻을 깊이 생각해본다. 옮겨 쓰는 동안 다른 이미 읽은 문장이 연상되거나 다른 책의 비슷한 문장과 다른 뜻으로 다가올 경우 바로 노트북을 열고 연상되는 생각을 가감 없이 글로 옮겨 쓴다. 읽다가 갑자기 쓰고 쓰다가 막히면 다시 읽는다. 다 읽은 다음에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지금 책 쓰기에 관한 책을 쓰고 있는데 그 책의 특정 부분과 관련성이 있는 문장을 만나면 바로 해당 폴더로 들어가 파일을 열고 적절한 장소에 문장을 집어넣고 내 생각을 추가로 쓴다. 글쓰기는 발상이 아니라 연상이기 때문에 연상되는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잡아놓는 게 중요하다. 



개념을 연결해서 쓰면 신념도 생긴다


필요에 따라서는 처음 본 개념이나 익숙한 개념이지만 다르게 정의해서 사용하는 단어는 해당 페이지 공란에 적어 놓는다. 예를 들면 우치다 타츠루의 《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에 는 ‘논리성’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논리성과는 다른 정의다. “자신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타인의 사고방식’에 상상으로 동조할 수 있는 능력, 이를 ‘논리성’이라 부른다”(113쪽).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내 생각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한계를 알면 빠를 시간 안에 다른 사람의 생각을 끌어와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문제와 끝까지 씨름하다가 결국은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생각만으로 주어진 위기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빌려와서 다른 방도를 추구하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악화되기가 일쑤다. 여기에 쓰인 논리성이라는 개념은 “논리에 맞는 성질”이라고 정의하는 기존 교과서적 개념과는 다른 개념으로 정의되어 있다. 책 읽기는 이렇게 낯선 개념과의 부단한 접속과 내면화다. 특히 철학자들의 저서에는 자신이 창조한 독특한 개념의 향연이 펼쳐진다. 그런 개념을 익히고 배우면서 개념을 사용하여 사유를 넓혀나가는 활동이 책을 읽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다. 책을 다 읽고 나면 공란에 메모해놓은 주목할 만한 개념을 모조리 워드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훑어보면서 타이핑한다. 그리고 그걸 이면지에 순서대로 적은 다음 개념들 간의 논리적 관계를 생각해본다. 


예를 들면 구글 범프(google bump), 사르트르의 우발적 마주침, 들뢰즈의 기호, 우연한 상호 행위(Serendipitous Interactions)와 같은 개념을 책이나 신문, 또는 잡지를 읽다가 무작위로 만났다면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래알 같은 단어지만 문제의식을 갖고 이들 개념을 논리적으로 엮어서 한 편의 글을 써보면 개념을 만든 사람이나 문제의식은 다르지만 여러 군데서 접했던 다양한 개념의 논리적 관계를 정리하는 과정을 통해 개별 개념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게 된다. 구글 범프는 구글 회사에서 식당의 의자와 의자 간격을 좁게 만들어서 식판을 들고 자리에 않기 위해서는 옆사람과 부딪힐 수밖에 없도록 의도적으로 설계한 마주침의 철학적 산물이다. 사르트르는 사람이 변하려면 우발적 마주침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우발적 마주침 없이는 깨우침도 없다. 같은 맥락에서 들뢰즈의 기호라는 개념도 그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해석하게 만드는 모든 사건을 말한다. 익숙한 현상이 반복되면 기호가 아니다. 사무실에 뱀이 들어온 사건은 기호다. 늘 집에 계시던 집사람이 아무런 소식 없이 귀가가 늦어지는 현상도 남편에게는 낯선 기호다. 기호가 나에게 다가오는 순간 그 의미를 해석하며 이전과 다르게 생각하는 시간이 전개된다. 기호 역시 마주침의 철학적 신념이 반영된 개념이다. 마지막으로 완전한 우연으로부터 중대한 발견이나 발명이 이루어지는 우연의 놀라운 기적을 말하는 세렌디피티(serendipity)에서 유래된 우연한 상호 행위 역시 우발적 마주침의 산물이다. 이처럼 저마다의 개념이 문제의식을 갖고 탄생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만나는 모래알 같은 개별적 개념을 주기적으로 강제로 엮어서 그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따져보고 의미를 부여서 논리적 글쓰기를 하지 않으면 어디서 언제 봤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읽고 쓰는 게 구분되지 않는 독작법(讀作法)이 탄생한다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나면 밑줄 친 문장마다 포스트잇을 붙여 놓고 다시 읽을 때는 그 부분만 집중적으로 다시 본다. 다시 보면서 밑줄 친 문장을 독서노트 폴더에 처음부터 끝까지 타이핑해서 저장해놓는다. 타이핑하는 동안 문장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도 되고 독서노트로 저장해놓은 파일이 쌓일수록 인용할 글도 풍부해진다는 의미다. 참조 없이 창조 없다. 모든 창조는 다 참고해서 이루어진다. 참고문헌(references)이 두꺼운 사람일수록 교양도 두껍다. 참고문헌이 두꺼운 사람은 참고할 자료가 그만큼 풍부하니까 글이나 책을 쓸 때도 자기주장을 지원해줄 필요가 있거나 새로운 주장을 펼치기 위해 물꼬를 틀 때도 그만큼 수월해진다.  연상 재료가 풍부한 사람일수록 글도 그만큼 다양한 관점으로 뻗어나갈 가능성도 높아진다.  글이나 책은 참고문헌을 인용하면서 쓰는 것이다. 특히 책은 참고문헌 없이 자기주장만으로 한 권을 완성하기는 쉽지 않다. 밑줄 친 문장과 비슷한 주장을 한 다른 저자의 책에 나오는 주장이나 상반된 의견을 펼치는 반론도 연상되는 대로 중간중간에 기입해놓는다. 예를 들면 인간관계에 관한 책을 쓰는 도중에 동일한 개념이지만 비슷하면서도 색다른 통찰력을 주는 문장을 만나는 경우가 많다. "특별한 존재와 평범한 존재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존재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관계다. 남에게는 평범한 존재가 내게는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존재가 나와 맺고 있는 관계 때문이다. 평범한 존재는 나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특별해진다. 따라서 평범한 존재는 무가치하며 어서 빨리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할 자격 따위는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360쪽). 


존재는 개별적 의미와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다른 존재와의 관계 맺음 방식과 유형에 따라 달라진다. 존재는 관계가 의미와 가치를 결정한다는 장유승의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을 읽으면 바로 신영복 교수의 다양한 책에서 주장하는 관계를 연상시킨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대단히 철학적인 가사입니다. 잘 알기 위해서는 서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 관계가 없다면 애초부터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관계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관계가 애정의 수준일 때 비로소 최고의 인식이 가능해집니다. 애정은 인식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하지만 그러한 생각이 바로 저널리즘이 양산하고 있는 위장된 객관성입니다. 애정이 없으면 아예 인식 자체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애정이야 말로 인식을 심화하고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279쪽). 신영복의 《담론》을 읽다가 만난 관계에 대한 문장이다. 객관적인 과학은 관심과 애정을 배제하거나 거세하라고 주장한다. 그것만이 가장 과학적인 앎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알고 싶은 상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식었거나 없어졌는데 얼마나 적극적으로 알려고 노력할까. 내가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데 알고 싶은 욕망이 생길까. 피상적인 이해 수준에 머무르고 더 이상 알기를 포기한다. 관계를 화두로 글을 쓴 두 명의 작가를 읽고 책을 덮는 순간 읽은 기억은 어렴풋한 추억의 파편으로 사라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관계에 대한 입장의 차이를 비교해보고 분석해서 내가 생각하는 인간관계로 녹여내면 읽기는 지식창조 독서법으로 승화된다. 글 쓰는 작가와 읽는 독자가 따로 구분되지 않고 읽기와 쓰기가 맞물려 돌아가는 독작가(讀作家)나 작독법(作讀法)이 탄생한다.



깊이 읽어야 사고의 깊이도 깊어진다


책은 눈으로 읽고 덮어두면 덮는 순간 읽은 내용은 점차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내가 언제 읽었는지조차 모르고 다시 그 책을 사는 경우도 있다. 진짜 책을 읽는 행위는 공감이 가거나 기존 내 생각과 다른 주장을 만나 불편한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문장이 품고 있는 저자의 주장을 더 읽기를 멈추고 깊이 생각해보며 의미를 곱씹어보는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 것은 무언가가 말해질 필요가 있다는 직감이었다. 말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아예 말해지지 않을 위험이 있는 것들. 나는 스스로 중요한, 혹은 전문적인 작가라기보다는 그저 빈 곳을 메우는 사람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다”(10쪽). 존 버거의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를 읽다가 만난 문장이다. 작가의 존재 이유가 누구도 말하고 싶지 않아서 숨겨 놓은 것을 꺼내 위험을 무릅쓰고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세상에 알리는 데 있으며, 남겨두면 영원히 빈 공간으로 남아 있을 곳에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그곳을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사람이라는 주장에 저절로 숙연해진다. 거창한 꿈과 원대한 비전을 품고 있는 작가나 작품을 상품으로 만들어 한 순간 돈을 벌어보겠다는 상업적 작가상과는 차원이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문장을 만났다. 이런 문장은 하루 종일 그 의미를 반추하며 내가 저런 작가가 되려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되는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볼 것이다. 독서는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훑고 지나가는 요식행위가 아니다. 깊이 생각할 화두를 만나면 더 이상 책장을 넘기지 말고 잠시 멈춰서 저자가 던져주고 싶은 의미가 무엇인지를 깊이 사색하며 독자에게 던져진 화두의 본질을 붙잡고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다. 


깊이 읽지 않고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에 초점을 둘 수록 무의미한 자기 과시형 독서에 지나지 않는다. 깊이 읽지 않으면 기피 대상이 된다. 깊이 읽는 방법 중에 하나가 밑줄 친 문장을 연결해서 리뷰를 쓰는 것이다. 독서 노트에 메모된 인두 같은 한 문장을 순서대로 늘어놓고 이 책의 이미지를 생각해본다. 저자가 주장이 담긴 수많은 문장이 있지만 이 책을 쓰게 된 문제의식과 특별한 사연이나 배경을 화두로 리뷰를 시작한다. 폐부를 찌르는 수많은 문장을 배경에 두고 시작하는 글쓰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물론 내가 읽은 책을 이미 리뷰한 다른 독자들의 감상평도 참고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내가 이 책을 읽고 배운 가장 강력한 교훈이나 통찰 또는 다른 책에서는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느낌을 문장으로 써 보면 어떨지를 부단히 고민하면서 독서노트에 기록한 문장을 놓고 리뷰를 시작한다. 백지를 놓고 고민하면 머리도 백지가 되지만 백지 위에 흔적이 있으면 흔적을 배경으로 다른 흔적을 남기기 시작한다. 한 문장을 기존 책에서 얻은 문장을 배경을 쓰기 시작하면 다른 문장이 꼬리를 물고 등장한다. 놀라운 연상의 시작이다. 그렇게 쓴 문장과 문장이 연결되면 한 패러그래프를 형성한다. 내가 쓰는 모든 글은 다른 사람의 글을 기반으로 생긴 상처 위에 핀 꽃이다. 낯선 생각과의 부단한 접속을 통해 내 생각도 아프면서 성장한다. 생각은 불편할 때만 다른 생각을 한다. 지금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일부러 낯선 생각과 접속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책을 읽고 쓰겠다는 생각은 내 생각만으로는 어리석은 판단과 사고의 관성에 젖어 살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다. 이렇게 생각이 꼬리를 물고 보통 두세 개의 패러그래프를 쓰면 지금까지 쓴 글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어떤 소제목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소제목이 중간중간에 제시되면 독자는 그때마다 한 숨을 돌리고 이어지는 글이 어떤 내용으로 이어질지를 연상한다.



오늘부터 그냥 읽지만 말고 읽으면서 종종 깊이 생각해보고, 그 문장이나 주장이 탄생한 사연이나 특별한 배경도 추축해보면 사유도 깊어진다. 사유한 결과를 메모해놨다가 밑줄친 문장을 연결하면서 내 생각을 추가하면 한 편의 멋진 글이 탄생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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