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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하면서 필사적으로 읽으면
사유도 깊어진다

번역의 한계(문제)와 해석의 오류(오해)

번역의 한계(문제)와 해석의 오류(오해)

필사하면서 필사적으로 읽으면 사유도 깊어진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나라 말로 된 책이 아닌 원서는 번역서로 저자의 내용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물론 전문적인 연구자나 소수의 몇몇 사람은 원서를 모국어 읽듯이 읽으면서 지식을 축적하는 사람도 있다. 번역서는 분야별로 다양한 번역사들이 힘겨운 사투 끝에 탄생한다. 밤잠을 설쳐가면서 마감 시간에 쫒기 듯 번역하면서도 원서의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 우리가 모르는 숱한 고뇌의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난해한 철학책이나 한 분야를 깊이 다루는 전공 서적, 또는 문학적 수사나 은유법 등 문화적 고유함이 담긴 문학이나 예술서적의 경우 번역하는 사람도 남다른 고생이 따른다. 단순한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에 담긴 문화적 의미나 맥락적 특수성을 저자의 저술 의도에 비추어 번역을 넘어 해석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문장에 들어 있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대로 그대로 번역해놓으면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길이 없는 문장이 나온다.


오래전에 사 두고 부분적으로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읽다가 최근 대학원생들과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원서와 함께 비교-대조하면서 읽기로 하고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는 책이 있다. 마이클 폴라니의 《개인적 지식》이다. 번역하신 분들에게는 정말 죄송한 언급이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우리말 문장으로 가득하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을 보자. “그의 감정적 격발은 과학적 방법과 자연과학의 본질에 대한 참된 이념을 담고 있다. 그 이념은 객관성이라는 잘 못된 이상을 가정해서 그것을 개조하려는 계속된 시도를 통해 손상되어 왔다”(p.28). 이 말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His robust conveys a true idea of the scientific method and of the nature of science: an ideal which has since been disfigured by the sustained attempt to remodel it in the likeness of a mistaken ideal of objectivity”(p.7). 번역된 문장은 마이클 폴라니의 영어 문장을 그대로 단어의 사전적 의미대로 번역해놓았다. 번역의 핵심은 원문을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는 게 아니라 말이 되게 옮기는 데 있다. 우리말로 옮겼는데 어딘가 모르게 이상하거나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번역은 다시 원문을 보고 어떻게 우리말로 옮겨야 저자의 원문에서 의도하는 바를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 한다.



내가 생각해보기에 이 말은 이런 의미가 아닐까. “인간의 감정적 흥분을 반영하지 않고서는 과학적 방법과 자연과학의 본질이 추구하는 참된 이념을 구현할 수 없다(과학적 방법과 자연과학에도 과학자의 감정적 흥분을 거세하고서는 학문적 본질에 접근할 수 없다). 과학적 방법과 자연과학이 추구하는 이상이나 이념은 객관성이라는 개념을 잘 못된 방향으로 설정해놓고 그것을 개조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반복해오면서 오히려 객관성 개념의 본질을 손상시켜왔다.” 물로 내가 번역한 문장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저자가 이 문장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생각해본 다음 영어로 된 문장을 독자 입장에서 재해석해내지 않고 문장만 그대로 번역하면 우리말이지만 도무지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으로 두꺼운 번역서가 탄생했다. 지금은 절판되어서 구입할 수 없는 게 다행인 듯하다.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으로 된 두꺼운 책을 별다른 고민 없이 읽는다고 읽는 게 아니다. 진짜 독서는 문장이 전하려는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파고들어가 저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다음 다시 책 밖으로 빠져나와서 생각해볼 때 일어난다. 저자는 왜 그런 주장을 했는지, 그런 주장이 지금 여기서 무슨 의미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는지를 성찰하면서 나의 생각으로 다시 바꾸는 노력을 하는 와중에 독서는 깊이 있는 사유를 촉발시키는 수단으로 다가온다.



대학원 다닐 때 영어로 된 논문을 눈으로 읽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문장을 완역을 해보았다. 그렇게 약 30개의 영어 논문을 손으로 노트에 써가면서 번역을 해보면서 문장에 들어 있는 단어의 의미, 특정 개념이 다른 개념과 다르게 쓰이는 문맥, 우리말로 직역했을 때 이해되지 않는 말은 저자가 이 문장을 통해서 전하고 싶은 진정한 의미와 의도가 무엇인지를 오랫동안 그 문장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파고들어가 보았다. 눈으로 읽으면 읽은 것 같지만 읽고 나면 머릿속에 남는 게 없다. 눈으로 읽으면 애매한 문장이나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그냥 지나간다. 모르는 단어가 그 문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단어의 의미를 모르고서는 저자의 핵심 주장을 놓칠 수도 있다. 애매한 문장이라고 그냥 지나치면 다음 문장과의 연결 관계를 통해 저자가 주장하려는 의미를 잃고 피상적인 이해에 그치기도 한다. 이런 걸 방지하는 가장 강력한 읽기 방법은 눈으로 읽은 문장의 의미를 다시 손으로 옮겨 쓰면서 우리말로 번역해보고 그 의미가 와 닿지 않으면 다시 해당 문장의 패러그래프 첫 문장으로 돌아가 다시 의미를 추적해가면서 읽어야 한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해서 왔다 갔다 하면서 문장을 썼다가 지웠다가 고치면서 비로소 한 문장을 완성하고 나면 단어와 단어로 연결되는 문장에서 숨어 있던 의미가 겉으로 떠오른다. 약 30개의 논문을 통째로 번역하면서 영어 단어와 문장이 우리말의 구조와 어떻게 접속될 때 가장 잘 전달되는지를 몸으로 익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영어 논문을 깊이 읽는 훈련을 스스로 하지 않았다면 아마 여전히 영어 논문을 눈으로만 읽고 의미를 파악하려는 수준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실재는 우연적으로 보이는, 다시 말해 단순히 일례로 보이는 세계의 사건들로 요약되었다” (p.30). 이 말의 원문은 “Reality was summed up in the events of the world which were seen as contingent-that is, merely such as happened to be the case”(p.3). 실재가 사건으로 요약되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실재는 곧 사건이라는 말인가. 무슨 의미인지 알 길이 없다. 원문을 들여다보고 꼼꼼히 의미를 따져보니까 이런 말이다. “우리가 매일 직면하는 실재는 매 순간 일어나는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로 구성된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들은 상화에 따라 고유한 의미를 지니며 우발적으로 일어난다. 우발적 사건들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수많은 사례들이다.” 원문에서 핵심 단어는 contingent라는 단어다. 이 말은 상황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다는 의미다. 미리 어떤 의미인지를 결정할 수 없다. 보편적 법칙으로 일반화시킬 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경험으로 시험해볼 수 없는 어떤 것을 확인함으로써 경험을 넘어서는 안 된다. 결국 과학자도 관찰이 이론과 충돌하는 것으로 판명되는 순간, 바로 이론을 버릴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이론이 경험에 의해 검증될 수 없는 한, 그렇게 시험할 수도 없어 보이는 한, 이론은 그것의 예측을 관찰 가능한 범위에 한정시키기 위해 수정되어야 한다”(p.30). 이 번역 문장 역시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그대로 번역해놔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길이 없다. 이 번역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It must not go beyond experience by affirming anything that cannot be tested by experience; and above all, scientists must be prepared immediately to drop a theory the moment an observation turns up which conflicts with it. In so far as a theory cannot be tested by experience-or appears not capable of being so tested-it ought to be revised so that its predictions are restricted to observable magnitudes”(p.9). 주어가 ‘그것은’으로 시작하니 모호하다. 그것이 무엇인가? 앞 문장에 돌아가서 생각해보니 과학적 이론이다. 경험할 수 있은 것을 경험적으로 검증해서 과학적 이론이 탄생한다. 경험할 수 없는 영역은 과학적 이론으로 구성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저자의 핵심 논점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렵게 번역되어 있다.



“과학적 이론은 경험할 수 없는 영역을 넘어서까지 설명력을 지닐 수 없다. 왜냐하면 경험할 수 없는 영역은 경험으로 검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과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론은 검증 가능한 경험으로 구성된다). 결국 과학자는 자신이 관찰한 결과가 기존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영역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이 신봉하는 이론을 버려야 한다(그 이론은 더 이상 우리의 경험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이론을 경험으로 검증할 수 없거나 검증하지 못할 것으로 판명될 경우, 이론으로 예측하려는 시도를 관찰 가능한 범위에만 한정시켜야 하기 때문에 관찰 가능한 경험 영역까지만 포괄하는 이론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기존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자주 등장하면 신줏단지 모시듯 신봉하는 이론도 버리라는 이야기다. 색다른 경험은 다른 이론으로 만들어 그걸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이론으로 다시 만들으라는 이야기다. 저자의 주장이 품고 있는 의도를 파악하지 않고 문장으로 그대로 번역하면 난해한 문장이 나온다.


“그러나 주관성과 객관성의 분리에 기초한 과학에 대한 주요 개념은 그러한 이론에 대한 열정적이고 개인적인 인간의 평가를 과학에서 제거하려 하거나 적어도 무시해도 될 만한 부수적인 역할로 그 기능을 최소화하려고 한다”(p.30). 이 문장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무슨 말인지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나 문장의 의미는 여전히 어색하다. 우리가 쓰지 않는 말로 문장이 짜여 있으니 읽어도 한눈에 와 닿지 않는다. 우리말인데 우리말로 다시 해석해봐야 비로소 의미가 다가오는 문장이다. 이 문장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Yet the prevailing conception of science, based on disjunction of subjectivity and objectivity, seeks-and must seek at all costs-to eliminate from science such passionate, personal, human appraisals of theories, or at least to minimize their function to that of a negligible by-play”(pp.16-17). 주객을 분리시키려는 과학의 끈질긴 노력이 무모하다는 주장이다. 과학적 탐구도 사람이 한다.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에 몰입해서 열정적으로 몰입해서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왜 인간의 열정과 개인적인 주관을 과학적 탐구과정에서 배제시키려고 하는가? 그런 노력 자체가 과학적 지식의 본질을 왜곡함으로써 잘못된 방향으로 과학적 탐구를 유도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저자의 의도를 반영해서 문장을 고쳐봤다. “주관성과 객관성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전통적인 과학관은 과학적 탐구과정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개인적인 의견을 반영하여, 특정한 이론적 입장을 평가하려는 인간의 의도적인 노력을 제거하거나 무시해도 될 만한 부수적인 역할로 그 기능을 최소화시키려고 한다.”



“요구된 단순성은 필연적으로 명백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참된 것에서 내적 단순성을 인지하도록 자연스레 훈련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과학에서 단순성이 합리성과 동등할 수 있을 때는 〈단순성>이 단지 과학자들만 알고 있는 특수한 의미로 사용될 때뿐이다. 우리는 <단순한>이란 용어의 의미를, 그 단어가 대치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 <합리적>이나 <합당한>이나 <우리가 동의해야 하는 것>이란 용어의 의미를 상기함으로써 이해한다. 그때 <단순성>이란 용어는 그 자체의 의미와는 다른 것을 위해 위장된 채 기능할 뿐이다. 그것은 과학이론에 관한 우리의 평가에 어떤 본질적 성질을 끼워 넣기 위해 사용된다. 이로써 우리는 잘못된 객관성의 개념을 공개적으로 인정할 수 없게 된다”(41쪽). 첫 문장부터 부딪힌다. 단순성이 무엇을 요구하는가? 단순성이 명백하지 않다는 주장은 무슨 의미인가. 과학적 이론이 요구하는 단순성은 비록 단순하지만 쉽게 이해될 정도로 분명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문장 전체를 과학과 단순성의 관계를 통해 저자가 주장하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번역하면 이렇게 말이 되지 않는 문장으로 번역된다. 이런 번역 문장을 보고 쉽게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의심이 들어 원문을 확인해보았다. “'the required simplicity is not necessarily the obvious one but we must let nature train us to recognize the true inner simplicity. In other words, simplicity in science can be made equivalent to rationality only if 'simplicity' is used in a special sense known solely by scientists. We understand the meaning of the term 'simple' only by recalling the meaning of the term 'rational or reasonable' or 'such that we ought to assent to it’, which the term 'simple' was supposed to replace”(p.16).


전후좌우 맥락을 파악한 다음 위 문장을 아래와 같이 번역해보았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상대성 이론의 E=mc2 공식처럼) 과학적 이론이 요구하는 단순성은 누군가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이해될 만큼 분명하게 와 닿지는 않는다. 사실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심오한 진리를 품고 있어서 그 자체만으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사물이나 현상이 본래 지니고 있는 내재적 단순성을 파악할 수 있도록 우리들의 안목을 꾸준히 단련시켜야 한다. 다시 말해서 과학자들이 말하는 단순성이라는 개념은 그들만이 알고 있는 특수한 학문적 의미를 담고 있다. 단순성 개념의 의미를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단어로 대치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되는 ‘합리적인 rational’, ‘합당한 reasonable’, 또는 ‘단순성 개념의 의미에 동의해야 하는 다른 것’이란 용어의 의미를 다시 되짚어봐야 한다(그렇지 않고 단순성이라는 개념을 일반인들이 사용한 일상 언어와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면 심각한 오해가 발생한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단순성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단순하다는 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을 파고들어가 보면 단순한 구조와 핵심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 그걸 단순한 과학적 법칙이나 이론으로 표현하려는 과학자들의 노력은 합리성과 논리적 정당성에 기반을 둔다. 단순한 과학적 법칙이나 원리는 엄밀히 말해서 복잡한 자연현상이나 인간관계의 의미를 피눈물 나는 노력을 통해 단순화시킨 과학적 고뇌의 산물이다. 단순함은 그래서 치열함의 산물이고 복잡함은 나태함의 산물이다.



번역은 원문 속으로 파고들어가 진지를 구축한 다음 한 참을 거기서 파묻혀 의미를 캐다가 다시 밖으로 나와 우리말과 연결시켜 고뇌한 다음 가장 적확한 단어로 문장을 건축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자기 글을 창작하는 일보다 고단하고 힘든 여정의 반복이다. 어려운 문장을 만나 좌절감도 느끼고 번역을 했지만 여전히 우리말의 뉘앙스와 맞지 않는다. 문화적 차이로 그대로 번역되지 않는 단어나 문장을 만나면 더 높은 벽을 만나 넘을 수 없는 경계 앞에서 한 참을 고민한다. 그렇게 꾸역꾸역 첫 문장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페이지의 문장까지 완역을 하는 일은 대단한 끈기를 갖지 않고서는 쉽게 해낼 수 없는 울트라 마라톤이다. 그렇게 힘든 일에 뛰어든 이상 한 문장이라도 오역을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실수로 오역은 나온다. 오역이라기보다 번역하다 중간에 그만둔 문장이 더 문제다. 정확히 오역은 아니지만 우리말로는 말이 되지 않는 불완전한 문장이 많을 경우 번역은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 하지만 번역자의 나태함으로 불완전한 문장이나 오역이 지천에 널려 있는 책을 보노라면 화가 나고 책을 읽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번역서 읽기를 포기하고 원서를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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