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과 보험: 모험이 부족한 사람은 좋은 어른이 될 수 없다!
당신은 안전지대에서 안락하게 지냅니까?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감행합니까?
"인생에서 가장 큰 결실과 가장 큰 즐거움을 거둘 수 있는 비결은 위험하게 사는 것이다."
- 니체 -
진짜 생각은 몸으로 실천하면서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다
“영어로 ‘경험’을 뜻하는 ‘experience’는 라틴어로 ‘실험을 뜻하는 ’experimentia‘에서 유래했으며 라틴어로 ‘위험’을 뜻하는 ‘periculum’과도 연관이 있다(p.350).” 로먼 크르즈나릭의 《인생을 짧다 카르페 디엠》 에 나오는 말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지혜는 몸으로 체득할 수 없다. 일본 철도(JR: Japan Railroad) 카피 중에 “모험이 부족하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없어”라는 말이 나온다. 책상에 앉아서 인생의 참맛을 느낄 수 없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할 수 없다는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보험은 위험함을 무릅쓰고 모험을 거듭하면서 축적한 체험이다.” 유영만의 《나는 배웠다》에 나오는 말이다. 체험은 머리로 배우기보다 몸으로 익히는 과정이다. 머리로 배우기만 하고 몸으로 익히는 활동을 하지 않으면 머릿속에 야적된 지식은 모래알처럼 파편화된다.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는 않으면 위태롭다. 《논어》 '위정(爲正)' 편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생각은 머리로 생각하는 걸 넘어선다. 진짜 생각은 몸이 하는 것이다. “사(思)는 생각이나 사색의 의미가 아니라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리라고 한다면 경험적 사고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자의 구성도 전(田)+심(心)입니다. 밭의 마음입니다. 밭의 마음이 곧 사(思)입니다. 밭이란 노동하는 곳입니다. 실천의 현장입니다”(179쪽). 신영복의 《강의》에 나오는 말이다. 노동하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의 생각이 생긴다. 책상에 앉아서 고민하면서 생기는 생각은 노동을 통해 몸에 각인되는 생각보다 건강하지 못하다.
신영복 교수님은 더 나아가 학을 보편적 사고라고 하고 사를 구체적인 상황에서 일어나는 주관적인 경험이라고 말한다. “경험과 실천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현장성(現場性)입니다. 그리고 모든 현장은 구체적이고 조건적이며 우연적입니다. 한 마디로 특수한 것입니다. 따라서 경험지(經驗知)는 보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학(學)이 보편적인 것(generalism)임에 비하여 사(思)는 특수한 것(specialism)입니다. 따라서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의 의미는 현실적 조건이 사상(捨象)된 보편주의적 이론은 현실에 어둡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는 특수한 경험적 지식을 보편화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뜻이 됩니다”(181쪽). 지금 우리 교육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학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구체적인 현장이나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경험적 사고를 간과하거나 무시한다는 데에 있다. 현장의 특수성이나 구체성을 일반화시켜 이론적인 앎을 현장과 격리시켜 배우고 가르치는 지금의 교육 패러다임은 전면적인 해체 위기에 처해있다. 그리고 생각하는 ‘사(思)’를 책상에서 잔머리 굴려가면서 현장과 무관하거나 독립적으로 일어나는 순수한 생각이라고 오해하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놓여 있다. 진짜 생각(思)은 머리(田)와 가슴(心)이 하나가 되어 몸으로 체험하면서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하지만 우리 교육은 실천이 실종된 머리로 이해하는 교육에 집중되어 있다.
“우리 섬의 어른들은, 비록 오늬 죽의 맛에 날카롭지는 못했어도, 소금 그 자체의 맛에는 너나없이 귀신들이었다. 소금 한 알갱이를 입에 넣으면, 섬의 동쪽 염전 소금인지 서쪽 염전 소금인지, 초여름 소금인지 늦가을 소금인지, 어김없이 알아맞혔다”(251쪽).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에 나오는 말이다. 소금 맛을 보고 소금의 원산지를 정확하게 맞출 수 있는 능력은 이론적으로 가르칠 수 없다. 원산지별 소금 맛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금 맛을 감별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다양한 시도 끝에 몸으로 그 미묘한 맛의 차이를 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경험하지 않고서는 배울 수 없는 체험적 지혜는 오로지 몸으로 익히고 몸으로 체험하며 깨닫는 수밖에 없다. “사랑에 관해 물으면 한 수 시까지 읊겠지만. 한 여인에게 완전한 포로가 되어본 적은 없을 걸? 눈빛에 완전히 매료되어 신께서 너만을 위해 보내주신 천사로 착각하게 되지. 절망의 늪에서 널 구하라고 보내신 천사! 또한 한 여인의 천사가 되어 사랑을 지키는 것이 어떤 건지 넌 몰라. 그 사랑은 어떤 역경도... 암조차 이겨내지. 죽어가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두 달이나 병상을 지킬 땐 더 이상 환자 면회 시간 따위는 의미가 없어져. 진정한 상실감이 어떤 건지 넌 몰라. 타인을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할 때 느낄 수 있는 거니까. 누굴 그렇게 사랑한 적 없을 거야?” 영화 굿윌 헌팅에 나오는 대사다. 사랑학 개론 책을 아무리 읽어도, 사랑에 관한 이론적 진리를 아무리 읽고 이해해도 내가 꿈에 그리던 사람이 나타났을 때의 느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과 이별하는 순간이 다가왔을 때 느끼는 상실감과 당혹감은 겪어보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감정이다.
해보지 않고서는 공감할 수 없다
내가 직접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타자의 아픔에 공감할 수 없다. 공감능력은 책상에서 배울 수 없다. 오로지 몸으로 체험해봐야 비로소 생기는 능력이 바로 공감 능력이다.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실제로 걸어 다녀보는 것은 중요하다. 배우자, 동료, 유권자 등 중요한 파트너를 대상으로 그렇게 역할 교체를 해보라. 역할 교체는 사로에 대한 이해를 도모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고, 저렴한 방법이다”(279-280쪽). 롤프 도벨리의 《불행 피하기 기술》에 나오는 말이다. 흔히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책상에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통경찰이 열십(十) 자를 보고 사거리라고 생각하지만 산부인과 의사는 배꼽으로 생각한다. 약사는 녹십자라고 생각하고 목사는 십자가라고 생각한다. 저마다 체험해본 범주 내에서 사물이나 현상을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산부인과 의사가 열십자를 보고 교통경찰처럼 사거리로 생각할 수 있을까? 그 반대의 경우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역지사지가 말처럼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한 사람의 경험 속에는 이해할 수 없고 가 닿을 수 없는 익명인 채로 남아있는 감정이 때때로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 그 순간에 어떤 느낌인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모릅니다”(72쪽)." 데이비드 리코의 《나는 왜 이 사랑을 하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직접 해보지 않고서는 저마다의 상황에서 몸으로 느끼는 감정은 일반화시킬 수 없다. 모두가 주관적인 체험이고 상황에 따라 고유함을 드러내는 특수한 자각이다. 그래서 신영복 교수님도 생각사(思)가 일반화시킬 수 없는 특수한 주관적인 경험이라고 한 것이다. 한 사람이 겪은 고통은 언어로 말할 수 없다. 다만 고통에 대해 고통의 당사자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고통은 말할 수 없지만, 고통에 대해 여전히 우리는 말할 수 있는 존재다”(261쪽).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자아를 규정하는 것은 고통과 감각이다. 당신이 느낄 수 없는 것은 당신이 아니다. 느껴지지 않는 것은 선뜻 돌봐 줄 수가 없다. 당신의 손발이 당신에게서 잊힌다. 반면에 고통은 지켜준다. 눈에 뭔가가 들어가면 즉시 그에 대해 대처하기 마련이다”(153족).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에 나오는 말이다. 고통을 통해 느껴지지 않으면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통으로 느낌이 와야 비로소 나는 그 아픔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하물며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도 직접 몸으로 느껴지지 않으면 신경 쓰지 않는데 타자의 고통은 어떨까. 고통 체험을 해보지 않고서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고뇌와 아픔에 대해서 공감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기 어렵다. 교육의 핵심은 타자의 아픔을 사랑하는 능력, 그 아픔이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육성하는 데 있다. 하지만 우리 교육은 지나치게 책상 공부를 통해 지능을 연마하고 지식을 축적하는데 많은 관심을 쏟아부어왔다. 책상에서 이론적 지식을 가르치고 그걸 기반으로 일상에서 실천을 촉구하는 교육 패러다임은 앎과 삶이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었다. 진짜 공부는 앎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진짜 공부는 사유가 먼저 있고 나중에 행동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사유가 먼저 있고, 그 도달한 사유에 맞춰 거꾸로 체험을 구성할 경우 작품은 파탄을 면치 못한다. 사유로부터 경험이 도출되는 것은 마치 몸에 옷을 맞추지 않고 옷에 몸을 맞춘 것처럼 어색하다. 몸에 옷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규범이듯, 경험에 사유가 뒤쫓아 가 그 경험을 완전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예술적 창조의 원리다”(228쪽). 김상욱의 《다시 쓰는 문학 에세이》에 나오는 말이다.
위험하지 않으면 위대한 결실도 없다
관념적 사유를 강조하는 교육은 관념적 지식인을 양성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장체험을 통해 몸으로 느끼지 못하는 교육으로는 난공불락의 딜레마 상황이 펼쳐지는 불확실한 환경에서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낼 수 없다.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 보유하고 있는 지식은 무수한 시행착오와 우여곡절 끝에 온몸으로 깨달은 체험적 지혜다. 책상에 앉아서 머리로만 공부하는 사람들이 쌓은 지식에는 그 사람 특유의 신념과 열정과 용기가 없다”(47쪽). 유영만의 《공부는 망치다》에 나오는 말이다. 사투 끝에 건져 올린 체험적 지혜에는 그 사람이 고뇌하는 문제의식과 위기의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머리보다는 발바닥으로 세상의 곳곳을 직접 내가 가볼 때 몸으로 느끼는 감각적 체험은 가보지 않고 책상에서 그냥 보는 경험과는 천지차이다. 가보는 것과 보는 것은 한 글자 차이지만 그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인식과 통찰의 물이 흐르고 있다, “머리는 너무 빨리 돌아가고/생각은 너무 쉽게 뒤바뀌고/마음은 날씨보다 변덕스럽다/사람은 자신의 발이 그리로 가면/머리도 가슴도 함께 따라가지 않을 수 없으니/발바닥이 가는 대로 생각하게 되고/발바닥이 이어주는 대로 만나게 되고/그 인연에 따라 삶 또한 달라지리니.” 박노해 시인의 발바닥 사랑이라는 시다. 발바닥이 움직이는 바로 그곳에서 몸으로 반응한 감각적 느낌을 가급적 정리해보려고 한다. 물론 언어의 한계가 넘을 수 없는 벽으로 가로막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투를 벌여가며 감각적 체험과 교훈을 체중이 실린 언어로 번역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머리로 결정하지 않고 발바닥이 향하는 곳으로 과감히 떠나는 것이다. 머리로 계산할수록 의사결정은 어려워지고 대안 모색은 지체되기 쉽다. 운명과 문명, 그리고 혁명을 불러오고 싶다면 위험한 결단과 과감한 실천만이 살길이다. 위험하지 않으면 위인도 위대한 결실도 없다. 위험하지 않으면 위인도 위대한 결실도 없다. "그대는 위대함으로 통하는 그대의 길을 간다. 몰래 그대의 뒤를 따르는 자는 그 누구도 없어야 한다. 그대의 발로써 그대가 걸어온 길을 지워버렸고, 그 길 위에는 불가능이라고 쓰여 있다." "위험하게 살아라" 외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교육은 우리 아이들을 너무 안전한 곳에서 현실과 유리된 창백한 교실에서 양육해왔다. 학부모는 아이들을 극진한 보호막 속에서 지나치게 간섭하고 지시하며 통제해왔다. “편안함이 끝나고 궁핍이 시작될 때 인생의 가르침이 시작된다.” 헤르만 헤세의 말이다. “위험이 없는 길로는 약한 사람만 보낸다.” 헤르만 헤세가 《유리알의 유희》에서 한 말이다. 스스로 추진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어진 아이들에게 교육은 독립적 사유를 길러주는 각성제가 아니라 의지(依支)할 수 있는 능력을 심화시켜 한 순간의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게 만들어주는 진통제에 불과하다. 체험적 지혜는 지식의 축적으로 생기지 않는다. 위험한 도전을 감행하고 시행착오 끝에 판단 착오를 줄일 수 있는 혜안을 몸으로 깨달을 때 복잡한 상황을 해석할 수 있는 혜안과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생긴다. “몸으로 체득했기에 그것이 밑바닥 진실이며 마지막 진실이다. 어떤 경우에나 세상의 변화를 꾀하게 하는 힘은 마지막 진실에서 온다”(200쪽).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에 나오는 말이다.
밑바닥 진실이자 마지막 진실은 몸으로 체득하는 수밖에 없다. 몸이 동반되지 않는 관념적 공부는 진심을 담아낼 수 없다. 진심과 진정성은 그 사람의 몸이 동반될 때 비로소 느껴지는 신체적 진실성이다. 체중이 실리지 않는 말과 언어는 참을 수 없는 인식의 가벼움이다. 직접 내 육체로 체험하지 않은 사실은 밑바닥 진실이자 마지막 진실처럼 힘과 에너지를 실어 전달할 수 없다, 밑바닥 진실을 온몸으로 겪어낸 사람이 건져 올린 언어에는 치열한 사투 끝에 피워낸 사유의 결정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언어를 보면 심장이 뛰고 숨이 막히고 뇌가 번개를 맞은 듯 잠시 생각을 멈추고 충격을 받기도 한다. 관념의 거품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생생한 체험적 얼룩이 아픈 흔적으로 남아 있기도 하고, 경이로운 깨달음의 즐거움이 아름다운 무늬로 채색되어 있기도 하다. 체험적 깨달음의 여정은 멈추는 순간 이전의 체험적 교훈과 지혜는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는 향수에 불과하거나 경험이 미천한 후배들에게 설명하는 고리타분한 강제적 지침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부단한 경험의 업데이트만이 경험의 덫에 걸리지 않는 비결이다. “40대가 넘으면 ‘경험의 직업인’들은 작은 집착이나 몇몇 속담을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들은 자동판매기가 되기 시작한다. 왼쪽 주입기에 동전 몇 개를 넣으면 은종이에 싸인 일화가 나온다. 오른쪽 주입기에 동전을 넣으면 물렁물렁한 캐러멜처럼 귀중한 충고가 나온다”(131쪽). 사르트르의 《구토》에 나오는 말이다. 자신도 모르게 은종이 일화를 포장해서 전달해주는 꼰대가 되어 있고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충고를 캐러멜에 담아서 전해주는 권위적인 멘토가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