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體仁智)》로 나와 세상을 체인지(change)하는 비밀 노하우
신체성을 상실하면 정체성도 부실해진다
《체인지(體仁智)》로 나와 세상을 체인지(change)하는 비밀 노하우
‘몸’은 수직(ㅗ)이고 ‘맘’은 수평(ㅏ)이다. ‘몸’은 수직으로 서 있어야 건강하고 ‘맘’은 수평으로 누워 있어야 편안하다. ‘몸’이 누워 있을 때 움직이지 않고 쉬는 자세고 ‘맘’은 서 있을 때는 편안하지 않아서 곤두서 있을 때다. ‘몸’은 상하로 세워야 건강하고 ‘맘’은 좌우로 균형을 잡아야 건강하다. 몸을 바르게 세워 건강한 몸을 만들고 바르게 세운 몸과 연결된 맘이 수평으로 균형을 잡을 때 몸은 자연스럽게 맘과 연결되며 같은 길을 걸어간다. 몸의 욕망이 가고자 하는 길과 맘이 끌리는 곳이 다르면 몸과 맘은 전쟁을 시작한다. 몸이 움직여 뭔가를 성취해도 맘은 다른 곳에서 다른 꿈을 꾼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 아니라 체감이몽(體感異夢)이다. 과학적으로 측정한 온도와 몸으로 느끼는 체감(體感) 온도가 다르듯 몸이 추구하고 싶은 욕망(慾望)이 충족되지 않으면 감정은 거르지 않고 욕설(辱說)을 쏟아낸다. 욕(慾)이 충족되지 않으면 욕(辱)이 나온다. 욕(辱)의 원인은 욕(慾)인 셈이다. 몸으로 하는 행동은 주로 손발이 움직여 실천으로 연결한다. 손발이 움직여 실천하면 가슴으로 느낌이 온다. 원하는 대로 손발이 조화를 이루어 행동하고 있을 때, 즉 욕망의 수레바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굴러갈 때, 욕설이 나올 근거는 없고 느낀바대로 머리로 올러가 체험적 깨달음을 분석하고 정리하는 움직임이 바쁘게 전개된다. 즉 손발이 움직여 실천하는 동안 가슴으로 전달되는 느낌의 강도는 강렬해지고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며 가슴에서 느낀 감정이나 감각이 머리로 올라가 정리되는 시간과 거리가 짧아진다. 한 마디로 손발(Hand)-가슴(Heart)-머리(Head) 사이에는 점차 거리가 짧아지면서 자주 3자가 모여서 긴밀한 대화를 나눌수록 우리 몸은 건강해지고 감정은 맑아지고 머리는 명쾌해진다. 손발과 가슴과 머리 사이에 거리를 좁혀 이들 사이를 좋게 만드는 선순환의 수레바퀴를 돌리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우선 몸을 움직여 땀을 흘리는 일이 급선무다.
성공하는 사람은 몸을 움직여 땀을 흘린다
한의학에서는 피가 제대로 흐르지 않고 기가 통하지 않으면 불통되어 통증이 발생한다고 한다. 통증 해소를 위한 최고의 처방은 침(針)이다. 혈류가 막힌 곳에 침을 놓아 피가 잘 통하도록 하는 방법이 침을 놓는 일이다. 이처럼 침은 정문일침(頂門一鍼)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정수리에 침 하나를 꽂는다는 뜻으로, 상대방의 급소를 찌르는 따끔한 충고나 교훈을 이르는 말이다. 한의학에서 사용하는 아픈 곳을 치유하기 위한 침이나 정신 못 차리는 사람을 위해 따끔한 충고를 주는 침이나 모두 순간적으로 아프지만 그 아픔을 참고 견뎌내면 침통(沈痛)한 표정도 밝아지고 정신도 맑아진다. 그런데 또 다른 침이 있다. 맛있는 음식을 보고 흘리거나 성공한 사람을 보고 시샘하거나 질투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흘리는 침이다. 이 침은 입에서 나오는 타액(唾液)을 말한다. 성공하는 사람은 침 흘리지 않고 땀을 흘린다. 성공하는 사람은 성공하기까지 분투노력한 과정을 보고 교훈을 배우는 데 시간을 투자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성공한 사람의 결과만 보고 침을 흘린다.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에 따라 성공한 사람의 성취감도 다르다. “오늘의 당신은, 그동안 흘린 땀의 양에 비례한다(You are the sum of all your training).” 최초의 흑인 발레리나 '미스티 코플랜드(Misty Copeland)의 말이다. 땀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땀은 몸을 움직인 만큼 흐르는 정직한 노력의 증표다.
땀은 몸을 움직여 노동한 수고의 대가로 나오는 노력의 증표지만, 침은 힘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나오는 시샘과 질투의 증표다. 땀은 몸을 아끼지 않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보람과 성취의 직접적 결과지만, 침은 몸은 움직이지 않고 잔꾀를 부리면서 머리로 생각만 하는 사람들이 흘리는 부수적 결과물이다. 땀은 온몸을 던져 노력한 이후 일정 시간이 흘러야 나오지만, 침은 생각만 해도 순식간에 저절로 나온다. 땀은 밖으로 흘려야 몸의 순환을 도와주고, 침은 안으로 흘려야 몸의 순환을 도와준다. 땀이 안에서 고이면 찌든 때가 되고, 침이 밖을 향하면 추한 몰골이 된다. 땀과 침이 각각 제 기능을 발휘하면 아름답지만 그렇지 못하면 건강에도 좋지 않고 해롭다. 정철의 《내 머리 사용법》에 보면 ‘땀’과 ‘침’의 차이가 나온다. 땀에는 소금기가 있아서 썩지 않는다. 땀을 흘리는 사람은 썩지 않는다. 성공한 사람을 보고 시샘하고 질투하며 시기하는 사람은 침을 흘린다. 침에는 소금기가 없어서 썩는다. 땀 흘리는 사람은 썩지 않고 오래가지만, 침 흘리는 사람은 한 평생을 시기와 질투로 살아간다. 남을 대신해서 땀을 흘리면 아름답지만, 남을 대신해서 침을 흘리면 추하다. 세상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본분을 지키고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면서 땀 흘리는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이 만들어 간다.
열정의 부산물로 땀이 흐르고 열광의 부산물로 침이 나온다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교수의 생각사전》에 땀과 침의 차이에 근거해서 열정과 열광의 차이를 설명한다. 김연아가 얼음판을 박차고 날아올라 상승기류처럼 허공을 가르며 회전하는 모습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탁월한 경지에 오른 베스트 플레이어들이 불꽃처럼 피워 올리는 최고의 순간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답고 황홀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메달을 목에 거는 순간, 우리는 열광의 도가니에 빠지고 감동과 환희의 순간을 교감한다. 그러나 우리가 관람하는 가장 화려하고 극적인 드라마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들이 연출하는 몇 초, 혹은 몇 분간의 무대가 수없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한 좌절과 열정과 도약의 시간을 지나온 결과물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무대의 주연이 되어 열정을 다하는 사람과 관람석에 앉아 그 열정에 열광하는 사람이다. 열정이라는 에너지를 불태우는 사람은 확고한 목적의식과 가슴 뛰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광만 할 뿐 자신의 열망을 위해 열정을 연소시키지 않는다. 처음에 그들도 우리와 같은 지점에서 출발했다. 처음에 그들도 우리처럼 평범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지배할 만큼 비범해졌고, 우리는 여전히 평범함에 머물러 있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확연하게 갈랐는가. 위대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은 모두 경쟁자를 통해서 경쟁력을 부단히 향상한다. 그렇다고 오늘의 경쟁력이 내일의 경쟁자를 이길 수 있는 경쟁우위로 유지되지는 않는다. 결국 새로운 경쟁자를 이기기 위해서는 어제와 다른 방법으로 창조적인 도약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아마추어의 경쟁은 경쟁자와의 경쟁이지만 더 높은 경지에 오를수록 자기 자신과 경쟁해야 한다. 위대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은 한결 같이 타인이 아니라 이전의 나를 극복해야만 진정한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은 사람들이다. 열광하는 청중이 있어야 경기를 펼치는 선수들은 더욱 몰입하고 열정을 불사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열광(熱狂)을 보여주면서 발광(發狂)했던 청중이 다시 삶의 주인으로 돌아갔을 때 열광적인 응원을 했던 그 순간처럼 자신의 일에도 열정적으로 몰입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아이돌 가수의 공연 스타일에 열광하고 발광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자신의 스타일을 개발하기 위해 열정을 불사르지 않는다. 열광하지만 열정을 불사르지 않을 경우 열광했던 순간의 열기는 순식간에 식어버리고 참을 수 없는 허무감만이 남을 뿐이다. 반면에 열정을 불살라 전대미문의 새로운 위업을 달성한 사람은 참을 수 없는 성취감을 느낀다.
체험적(體) 느낌(仁)으로 정리된 지혜(智),
체인지(體仁智)라야 세상을 체인지(change)할 수 있다
《체인지體仁智》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영어의 변화를 의미하는 change와 발음이 체인지와 똑같다는 발상에서 사람의 진정한 변화는 언제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에 궁금증이 생겨서 만들어본 조어다. 《이제 몸을 챙깁니다》의 저자 문요한 정신과 의사에 따르면 인간의 뇌가 발달하는 순서대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면 후엽-중엽-전엽이라고 한다. 후엽은 감각, 중엽은 감정, 전엽은 이성 기능을 담당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너무 이성 중심의 교과목 공부에 몰두한 나머지 몸으로 체험하며 느끼는 감각기능을 발달시키는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후엽은 몸이 느끼는 감각, 중엽은 가슴으로 느끼는 감정, 전엽은 머리로 생각하는 이성에 해당된다. 즉 후엽은 몸(體, Hand)을 움직여 감각으로 발달하고, 중엽은 따뜻한 가슴이 있어야 측은지심(仁, Heart)인으로 만들어지며, 전엽은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과정에서 생기는 깨달음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머리(智, Hed)가 담당한다. 체인지(體仁智) 순서대로 어린 시절부터 뇌기능을 발달시켜야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도 몸으로 감각하고 가슴으로 감정을 통제하고 머리로 논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 그래야 나 역시 어제와 다른 나로 거듭나는 것이며 부단한 변신을 통해 삶이 체인지(chnger)된다. 그런데 너무 어린 시절부터 몸을 움직여 감각적으로 느껴야 하는데 책상머리에 앉아서 잔머리를 굴리며 지성을 개발하는데 몰두한다.
체인지(體仁智)의 체(體)는 연습이자 단련이며, 체험이자 습관이다. 체(體)는 그냥 몸이 아니라 머리로 생각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몸을 움직여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는 행위다. 체(體)는 진정한 의미의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몸으로 실천해보고 상대의 처지에서 그 사람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구체적이고 특이한 이유를 내 몸으로 겪어보는 것이다. 체(體)는 자신의 몸을 통해 인간의 아픔이 잠재되어 있는 실존적 현실을 역지사지의 처지가 되어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는 실천적 행위다. 체인지(體仁智)의 (仁)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고 같이 아파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체인지(體仁知)의 인(仁)을 통해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다. 공자가 말하는 인(仁)의 핵심은 아픈 사람의 마음을 가슴으로 느끼고 나의 아픔처럼 공감하는 심미적 능력이다. 아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슴으로 느껴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인(仁)의 핵심은 살신성인(殺身成仁), 자신(自身)의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룬다는 뜻이다. 자기(自己)의 몸을 희생(犧牲)하여 옳은 도리(道理)를 행(行)한다는 말이다. '행유여력 즉이학문(行有餘力 卽以學文)' 인(仁)을 실천하지 않고 책상에 앉아서 지식만 축적하면서 교언영색(巧言令色)하는 지식인의 학문적 자세와 태도를 꾸짖는 말이다. 체험(體)하지 않고 가슴으로 느낄(仁) 수 없다. 체험하지 않고 머리로 배울 수는 있다. 인(仁)은 체(體)와 지를(智) 연결하는 다리다. 몸(體, hand)이 먼저 움직여야 가슴으로 느낌(仁, heart)이 오고 그 느낌이 깨달음으로 정리될 때 체험적 지혜(智, head)가 탄생된다.
몸으로 배운 앎이라야 행동을 바꿀 수 있다
수영을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에서 배우지 못할망정 잔잔한 호숫가에서라도 몸을 던져 직접 배워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수영을 이론적으로 먼저 배우며 수영에 관한 지식과 기술을 머리로 배운다. 그리고 물속으로 뛰어들면 백전백패다. 몸은 머리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 머리가 판단하기 이전에 몸은 물의 흐름과 깊이와 주변 환경을 직감적으로 파악한다. 물살이 세거나 수심이 깊을수록 몸은 그 위험을 감지하고 책상에 배운 수영 지식과 기술대로 수영하는 방법을 그대로 현장에서 구현할 수 없음을 안다. 수영은 수영을 실제 하는 물속에서 직접 몸(體)으로 배워야 물과 몸이 만나면서 다가오는 느낌(仁)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점차 수영하는 방법에 관해 상황에 따라 내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되는지를 알게 된다. 그것이 바로 체험적 지혜(智)다. 수영은 머리로 배우는 게 아니라 몸으로 배우는 것이다. 등산을 예로 들어보자. 몸(體)을 움직여 산을 오르는 동안 점차 몸이 풀리고 땀이 흐르면서 가슴 뿌듯함을 느낀다(仁). 정상에 오른 후 성취감을 맛본 후 하사하면서 등산을 통해 깨달은 교훈이 머릿속으로 정리(智)가 된다. 몸을 움직이니 상쾌해지고 가슴은 유쾌해지며 머리는 명쾌해진다. 자전거 타는 방법을 아무리 이론적으로 강의를 듣거나 책을 봐도 실제로 자전거를 잘 탈 수 없다. 자전거는 넘어진 만큼 혼자서 타는 기구다. 넘어져봐야 이렇게 하면 넘어지는구나를 몸으로 알게 된다. 다음 도전할 때는 조심하지만 또 넘어진다. 반복해서 넘어지는 가운데 몸은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넘어지지 않는 방법을 고투 끝에 개발해서 결국 자전거 위에 몸을 싣고 타기 시작한다.
지덕체(智德體)를 보더라도 지성 개발에 몰두한 나머지 따뜻한 미덕은 실종되고 몸은 망가져 간다. 지덕체의 조화가 몸과 마음과 머리가 조화를 이루는 원동력인 셈인데 너무 어린 시절부터 이 조화가 깨지는 책상 공부를 너무 강조해오고 있다. 지덕체가 뒤집어져 체덕지가 돼야 지혜가 탄생한다. 체덕지를 통해서 구현하고 싶은 이상적인 변화(change) 이미지가 바로 체인지(體仁智)다. 생각만 해본 사람은 당해본 사람을 못 당한다. 많이 당해본 사람만이 갖는 생각지도 못한 생각은 생각만으로는 절대 따라갈 수 없는 이유다. 생각지도 못한 생각 역시 뇌가 해내는 화학적 반응이라기보다 체험적 도전 과정에서 따뜻한 가슴으로 느끼는 감정적 반응이다. “생각은 잊지 못하는 마음이자 가슴 두근거리는 용기다(p.20).” 고 신영복 교수님의 《담론》에 나오는 말다. 모든 변화는 몸에서 시작해서 몸으로 끝난다. 몸으로 앎을 만들어갈 때 그 앎은 곧 함이자 삶이다. 여기에는 지행일치(知行一致)보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철학이 맞아떨어진다. 지행일치는 선지후행(先知後行)의 철학이다. 즉 먼저 책상에서 앎을 축적한 다음 나가서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앎이 곧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수영하기와 자전거 타기 사례를 이를 말해준다. 착하게 살겠다고 마음을 먹고 그런 방법에 관한 지식도 풍부한 사람이 실제로는 착하게 살지 않는다. 착하게 사는 덕이 축적되어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몸이 움직여야 착하게 살 수 있다. 착하게 살겠다느 생각이나 지식이 착하게 사는 행동을 유발하지 못한다. 지행일치는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꿈인 경우가 많다.
모든 편견은 내장에서 나온다
지행의 격차는 언제나 존재한다. 진짜 착하게 살아가려면 착하게 사는 방식을 몸에 배게 만들어야 한다. 실제 행동은 몸에 밴 행동 지식이 바꾼다. 니체는 《아침놀》 116절에서 “모든 행위들은 본질적으로 미지의 것”(133쪽)이라고 하면서 “어떤 행위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것이 행위로 바로 이어지기에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것. 인식에서 시작해 행위로 이르는 다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놓인 적이 없었다”(133쪽)고 말한다. 올바른 인식에는 올바른 행위가 반드시 뒤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식이 행동을 보장하지 않지만 행동은 반추와 성찰이 뒤따른다면 이전과 다른 인식을 가져온다. “사람들은 많은 것이 정신의 결단에 달려 있다고 말하지만, 경험은 반대로 신체가 활발하지 못할 때 정신이 적합한 사유를 하지 못함을 보여주지 않는가? 신체의 능력에 대해 알지 못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술주정뱅이가 자유의지로 떠들고, 겁쟁이가 자유의지로 도망치며, 젖먹이가 자유의지로 젖을 원한다고 말할 것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나오는 말이다. 몸으로 터득하는 인식에는 언제나 기쁨이 뒤따르지만 머리로 증명한 인식에는 몸의 기쁨이 동반되지 않는다. 몸으로 깨달은 앎이라야 머릿속의 기억이 사라져도 몸에 각인된 기억으로 시간이 지나도 다시 되살려낸다. 몸으로 깨달은 앎에는 당시 상황에 대한 풍부한 느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앎이 느낌과 결부될 때 느낌에서 느낌으로 공감되는 깨달음을 전해준다. 신체성으로 깨달은 앎이라야 행위로 이어질 가능성도 높아진다. 그런 앎은 삶이라는 구체적인 맥락성을 띠고 탄생한 깨달음이기 때문에 다시 삶으로 연결되는 앎이다. 즉 앎이 삶에서 이루어지는 함과 삼위일체를 이루는 앎이다. “앎이란 우리의 인식 행동방식, 곧 행동 지식이다. 행동 지식이 곧 앎이며, 앎은 곧 행동 지식이다”(340쪽). 김광식의 《김광석과 철학하기》에 나오는 말이다.
지행합일은 인지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가 《앎의 나무》에서 주장했던 철학과 일맥상통한다.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34쪽). 행동하지 않고 머리로 이해하는 앎은 다시 효과적인 행위로 연결되지 못하고 결국 삶과 분리된 관념적 앎으로 전락한다. “가능한 한 앉아있지 말라: 야외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생겨나지 않는 생각은 무엇이든 믿지 말라-근육이 춤을 추듯이 움직이는 생각이 아닌 것도 믿지 말라. 모든 편견은 내장에서 나온다. -꾹 눌러앉아 있는 끈기-이것에 대해 나는 이미 한 번 말했었다-신성한 정신에 위배되는 진정한 죄라고”(353). 니체의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 크리스트.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송가. 니체 대 바그너(1888~1889)》의 ‘이 사람을 보라’에 나오는 말이다. 놀라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움직이지 않고 책상에 앉아서 생각을 반복하니 거기서 생각의 부산물로 편견이 양산된다는 이야기다. 나가서 해보면 내 생각이 얼마나 편협한 의견이었는지를 몸소 깨달을 수 있었는데 너무 오랫동안 생각만 거듭하니 편견만 나온다. 신체를 무시하고 모든 걸 머리를 써서 해결하는 공부를 습관적으로 반복하니 이제 우리 몸은 머리가 명령을 내려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편안한 관성에 길들여져 움직이는 것 자체를 귀찮아한다. 몸이 움직여 뭔가를 시도하려고 준비를 하면 머리는 기존 지식이나 자신의 신념으로 안 되거나 해도 잘 되지 않는다는 핑계나 합리화를 시작한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니 더불어 가슴으로 다가오는 감각적 깨달음도 모두 줄달음치고 도망가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관념적으로 사유하는 머리의 고민과 걱정이다. 신체는 체념을 거듭하는 머리에 종속된 몸뚱이로 전락한 지 오래다.
신체성을 경멸하니 주체성도 없어졌다
신체는 그냥 몸의 크기를 좌우하는 신장이 아니라 자기만의 신념으로 무장된 체격이다. 그런 체격이 전하는 인격과 인품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신뢰를 받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하지만 신체가 침체되는 순간 인간은 몸과 맘과 머리의 조화로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체인지(體仁智)의 지혜는 무너진다. ‘신체성(身體性)’을 경멸하거나 무시하니 신체로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주체성(主體性)도 없어진다. ‘주체성’은 신체가 주인일 때 비로소 드러나는 한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正體性)’이다. 그래서 신체성의 상실은 주체성은 물론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증명하는 정체성도 지워버리고 인간을 몸뚱이로 움직이는 하나의 개체성이나 객체성으로 파악한다. 주체 없는 개체나 정체 없는 객체는 모두 있으나마나한 존재다. 모든 존재는 신체성을 담보로 자기중심을 갖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며 자기 특유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신체가 마음이나 정신과 분리되어 물건처럼 취급되는 개체나 객체로 전락할 때 정신은 더욱 극성을 부려 신체를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야망을 꿈꾼다. 서구 철학의 역사가 이를 반증해준다. 변덕스러운 신체를 무시하고 논리 정연한 이성을 중심에 세운 철학의 역사를 뒤집은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니체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게 나 나의 말을 하련다. 저들로서는 이제 와서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전과 다른 가르침을 펼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자신들의 신체에게 작별을 고하고 입을 다물면 된다”(51쪽).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말이다. 신체가 동반되지 않는 앎은 우선 신뢰가 생기지 않는다. 누구의 지식을 어떤 방식으로 편집했는지 알 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신념이 거세된 상황에서 관념으로 만든 지식이기 때문이다.
내 몸을 투자해서 만들어낸 지식은 지식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직접 보고 느끼고 깨달은 바라 많다. 구체적인 사례나 증거로 당시에 겪었던 아픔이나 어려움을 내 몸이 직접 겪었기 때문에 강력한 주관을 갖고 열변을 토해낼 수 있다. 니체는 같은 책에 이어서 신체를 커다란 이성으로 부각한다. “영혼이란 것도 신체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불과하다고. 신체는 커다란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 가축떼이자 목자이다. 형제여, 네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너의 작은 이성, 그것 또한 너의 신체의 도구, 이를테면 너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놀잇감에 불과하다”(51쪽). 사하라 사막 마라톤에 도전했던 2013년,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4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을 뚫고 하루 40Km 강행군을 하다 보면 힘들고 지치기도 하지만 무거운 배낭이 짓누르는 무게는 더욱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잠시 쉬면서 배낭을 살짝 두 팔로 깍지를 끼고 들어 올리면 배낭의 어깨끈이 어깨에서 살짝 들리면서 그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사막 레이스는 사투 끝에 스며드는 오르가슴이다. 혹독한 폭염, 달아오른 사막의 모래, 흘러내리는 땀방울,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 그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 덕분에 느끼는 시원함, 뼈와 살을 저미는 사막 레이스의 쾌감을 무슨 수로 설명하고 무슨 수로 맛보게 하랴! 신체성을 거세하고 사막 마라톤에서 느낀 나의 감정과 주관을 객관성이라는 칼로 거세한다면 사막 마라톤의 고통과 희열은 몸으로 와 닿지 않고 허공으로 산산이 부서진다. 사막 마라톤의 결과는 그저 사막에서 달리면서 체지방 몇 %가 연소될 것이고 체중은 어느 정도 감량되어 몸의 신체조건은 놀라울 정도로 좋아질 것이라는 과학적 진술로 둔갑해버린다. 사유와 낭만의 모래 바다인 사막에서 몸으로 느낀 신체성을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전환하면서 모든 감정을 거세할 때 남는 것은 건조한 이성들의 지루한 담론이다. 몸으로 터득하면서 깨달은 지혜는 몸으로 쓰고 몸으로 느낄 때 그 지혜가 담고 있는 본래의 의미와 가치가 되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