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신체성, 그리고 행복의 관계와 의미
연골이 없으면 골골해진다:
여행과 신체성, 그리고 행복의 관계와 의미
세상에는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문(指紋)이고 다른 하나는 두 발로 걸어 다니면서 남긴 족적(足跡)이다. 운동을 하면서 생긴 손바닥 뚝살과 발바닥에 생긴 굳은살 역시 어떤 기술로도 대체할 수 없는 느림의 미학이 탄생시킨 산물이다. 손으로 만지며 만든 작품에 담겨 있는 지문의 흔적과 여행을 하든 새로운 도전을 하든 내 두 발의 족적이 담긴 역사가 바로 내 삶의 무늬이자 얼룩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사물과 접촉하면서 생긴 애틋한 사연과 사랑이 그 사람의 사물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드러낸다. 세월이 흘러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과거의 추억은 모두 몸이 반응해서 생긴 감정적 흔적의 깊이와 넓이가 좌우한다. 호숫가에 작은 돌멩이를 던지면 파장이 작게 일어나지만 큰 돌멩이를 던지면 크기와 무게만큼 물결에 미치는 파장도 그만큼 커진다. 마찬가지로 내 몸에 각인된 감정적 파장이 큰 경험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몸이 그 순간을 기억한다. 하지만 지난날을 돌이켜 생각해봐도 별로 기억나는 게 없다면 그만큼 내 몸이 감정적 흥분을 느끼지 못하고 밋밋한 경험을 했다는 반증이다. 나아가 삶이 각별해지는 순간은 스쳐 지나가는 매 순간을 내가 각별하다고 생각하며 의미를 부여할 때다. 어떤 사람에게는 매 순간이 각별한 순간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각별한 순간도 그냥 스쳐 지나가는 그저 한 순간의 연속일 뿐이다.
추상적인 행복보다 지금 여기서 느끼는 구체적인 일상, 그 일상의 사소한 즐거움이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행복이다. 오래전 크로아티아를 여행하면서 받은 강렬한 풍광과 온몸을 관통하는 듯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햇볕은 지금도 내 몸이 기억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보고 듣고 만지며 느끼는 지중해의 쪽빛 칼라와 파도와 함께 다가오는 바람, 그리고 하늘과 바다와 만나는 저 수평선의 끝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포옹을 내 몸으로 느끼는 순간이 행복한 순간이다. 지금 내 눈썹을 휘날리게 하며 귓전을 스쳐 지나가는 가고 머리를 흔들어 깨우며 몸과 맘을 환기시키는 아드리해의 바닷바람은 지금 내 신체가 여기 있기에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선물이다. 톨스토이가 던진 세 가지 질문을 보자.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바로 지금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 대답은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바로 그 일, 특히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그 사람을 위하여 베푸는 사랑의 수고다. 흘러가는 한 순간, 지금 내가 보내는 이 순간은 영원히 잡을 수 없는 순간이다. 지금 내 앞에서 아른거리는 이 순간이 나에게 각별해지고 특별한 추억으로 재생되기 위해서는 매 순간마다 내가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사연을 만들어야 한다.
행복은 온몸을 파고드는 육감적인 반응이다
톨스토이가 던진 질문과 대답처럼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 이 순간 지중해를 바라보며 마시는 맥주 한 모금이 입안을 감싸고돌면서 적당한 취기를 느끼게 만드는 순간이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나와 같이 일몰 직전의 지중해를 바라보며 인생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나와 같이 여행을 떠난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를 만들어 더불어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는 일이다. 지금 당장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으면 언에 이 느낌을 다시 향유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행복은 언제나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현재 진행형이다. 과거에 행복했다는 말은 지금도 행복하다는 말이 아니며, 앞으로 행복할 것이라는 말 역시 지금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행복은 두 발로 가보고 싶은 곳을 가보며 두 손으로 만져보고 두 눈으로 확인하고 귀로 들으며 온몸으로 느끼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지금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으면 미래의 언젠가에도 여전히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 추상도 일상에서 비롯되지만 추상화된 명사가 다시 일상으로 내려와 보통사람들의 신념이나 가치관에 버무려지고 그들의 삶과 뒤섞이지 않는다면 일상에서 잉태된 추상일지라도 일상과 가까이할 수 없는, 일상에서 점점 멀어지는, 그래서 현실에서 붕 떠 있는 관념의 파편으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다.
척박한 땅에서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몇 송이밖에 열리지 않은 포도를 따서 숙성시킨 크로아티아산 명품 와인 딘가츠(DINGAC), 뽀스트업(POSTUP), 뽀쉽(POSIP)도 그 맛이 특별하게 다가온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자라는 환경이 혹독할수록 쉽게 자랄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성장통을 경험하며 자란다. 특히 와인은 혹독한 환경에서 자란 포도일수록 숙성시킨 와인일수록 그 향이 짙고 그윽하며 형언할 수 없는 잔향이 남는다. 그 와인이 지금 지중해 해변의 어느 카페에서 내 입안으로 들어와 혀끝을 자극할 때, 입안에 감기는 와인의 맛과 풍미는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을 던져준다. 2007년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고 힘겹게 이겨내고 거의 몸이 정상의 컨디션을 회복했을 때 혀끝이 느낀 와인 맛은 차라리 전율하는 순간적 오르가슴이었다. 입안해서 충분히 혀를 애무한 와인 한 모금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면서 위장에 닿았을 때 이미 와인의 기운은 온몸을 타고 흐르면서 몸의 구석구석으로 파고들었다. 와인 맛을 머리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전율하며 받아들인 것이다. 몸이라는 신체성이 없다면 느낄 수 없는 와인의 행복감이다. 행복은 정신으로 판단하는 이성적 사유의 산물이라기보다 내 신체가 감각적으로 반응하면서 온몸을 파고드는 육감적 반응이다. 지금 내 신체가 와인이 던지는 풍미와 깊은 맛의 향연을 즐 길 수 없다면 행복도 욕망도 없다. 신체 없는 욕망 과 욕망 없는 행복도 없다. 몸으로 느낄 수 없는, 느끼지 않는, 행복은 관념의 부산물이며, 현실로 다가올 수 없는 환상일 뿐이다.
고생 끝에 달콤한 미래는 오지 않는다
인간적 성숙의 조건은 동일한 것, 익숙한 것을 보고도 이전과 다르게 그리고 낯설게 보고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마르크스 역시 역사적 발전과정을 통해서 인간이 해온 것은 결국 감성의 생산, 이전과 다른 오감의 형성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여행은 익숙한 세계를 떠나 낯선 세계와의 신체적 접촉을 통해 오감을 자극하는 과정이다. 여행은 또한 익숙한 세계에서 늘 봤던 익숙한 것을 이전과 다르게 보며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는 과정이기도 하다. 여행이 특별하고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사소한 것이 더 이상 사소해 보이지 않으며 익숙한 것이 더 이상 당연하고 원래 있었던 이숙한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소한 것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중요하다.” 니체의 말이다. 니체에 따르면 우리는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잘 못 인식해왔다는 것이다. 니체는 값비싸고 위대한 것만이 중요한 것이고 늘 만나는 익숙한 것, 무관심하고 간과했던 사소한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난센스라고 얘기한다. 여행이 더욱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사소한 것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소중하게 다가오는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은 나에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소중한 체험적 사유의 과정이다. 사소한 것을 더 이상 사소한 것으로 보지 않고 거기서 이전과 다르게 사유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과정이 다름 아닌 배움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루 여행을 통해 무엇을 먹고 어디를 거닐었으며, 거기서 나의 신체가 어떤 반응을 보이고 감각적으로 느꼈는지, 그리고 어디서 잠을 잤으며 아침에 일어나 무엇을 느꼈는지 이런 사소한 하루 일과의 연속에서 내 오감을 열어놓고 신체가 반응하는 과정을 관조적으로 살펴보면 니체가 얘기하는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구체적인 차이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중요한 것은 남의 가치 판단기준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고 나도 어쩔 수 없이 남의 그 중요한 기준으로 삶의 기준으로 살아가다 보면 내 삶과 나의 이야기는 실종되고 남의 이야기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남의 이야기를 하면서 하루 종일 소비하는 삶을 소비한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 중요한 것보다 정말 소중한 것은 신체가 존재하는 동안 신체와 더불어 일어나는 내 삶의 일상이다. 신체가 갈망하고 욕망하는 일상적 삶에서 신체와 더불어 부딪히는 모든 체험적 일상이 내 삶의 일상이고 내 행복의 원천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체가 건강하고 사지가 멀쩡할 때 미래의 언젠가 향유할 행복을 담보로 가정법 인생을 산다. 그렇게 고생 끝에 달콤한 미래가 온다는 고진감래(苦盡甘來)를 믿고 전력투구 했지만 마지막으로 내 신체에 남는 것은 신경통과 관절염, 연골파괴와 디스크 등 온몸에 남기는 병뿐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는 고진통래(苦盡痛來)로 바뀌어야 한다, 고생 끝에 달콤한 미래는 오지 않고 통증으로 가득 찬 아픈 미래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여행은 관망이 아니라 관능이다
나이 들어서 필요한 것이 참으로 많다. 돈도 필요하고 시간도 필요하다. 나이 들어서 더욱 소중하게 필요한 건 건강이다. 건강이라는 추상명사는 그렇게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면 나이 들어서 가장 필요한 건 연골이다. 연골은 연로해지면서 평소에 근육운동으로 보완해놓지 않으면 사람이 누려야 할 행복의 강도과 밀도를 한 없이 떨어뜨리는 주범이다. 보고 싶고 먹고 싶은 걸 내 두 다리로 걸어가서 직접 피부로 느끼고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연골이 필요하다. 연골 없는 신체는 이미 신체가 아니며 신체 없는 욕망과 행복은 이미 헛된 망상이자 몸으로 느낄 수 없는 관념적 허구다. 신체를 경멸하고 영혼을 돌보는 일이 철학의 핵심 임무라고 생각했던 플라톤 철학의 전통 때문에 신체의 욕망과 감정을 통제하는 이성 우위의 철학을 시종일관 강조해온 서구 철학은 절름발이 철학이다. 니체는 망치 철학자답게 신체를 커다란 이성으로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이성을 작은 이성으로 전복시켜 신체의 욕망을 이성 우위에 두는 디오니소스적 철학을 펼친 것이다. 신체 없는 영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신체가 건강하지 못한 삶과 신체적 감각으로 세상의 경이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 행복하지 않은 삶이며 지금 여기서 행복하지 않은 삶은 미래의 언젠가가 되어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사상은 내 두발로 건져 올린 체험적 소산이자 치열한 몸부림의 산물이다. 세상의 옳은 말에 더 이상 심취해있지 말고 세상의 바깥, 지금 여기를 벗어나 미지의 세계로 내 몸을 던져 경계 밖으로 뛰쳐나가 온몸으로 사유해보자. 거기서 건져 올린 한 마디가 내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여행은 그런 면에서 너무나 경이로운 신천지의 체험을 내 신체로 온전히 겪어보는 감동의 연속이다.
여행에 관한 빅지원의 열하일기, 괴테와 알렝드 보통의 여행에 관한 책을 아무리 읽은 들 무슨 소용이랴. 내 두 발로 걸어가서 내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내 신체로 직접 느끼지 못한다면 세상의 유명한 여행 관련 책이나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이다. 여행 책에 나오는 더없이 좋은 명언도 내 몸으로 직접 체험하며 내 신체에 각인시키거나 육화 되지 않는다면 부표처럼 떠 다니는 관념의 파편이나 허구적 담론에 불과하다. 세상의 여러 좋은 말보다 내 육신의 고통스러운 체험으로 뼈 속에 각인된 한 마디가 내 인생의 시금석이 되고 디딤돌이 된다. 걸림돌에 넘어져 내 몸에 새겨진 상처 속에서 내 삶에 도움이 되는 한 마디가 나온다. 비록 그 한 마디가 어설프고 설 익었을 지라도 세상의 명사들이 벌이는 말씀과 명언의 향연보다 훨씬 내 삶에 피가 되고 살이 된다. 내 몸에 상처를 준 체험적 깨달음이 걸러낸 한 마디가 더 절실하게 다가오고 감동적인 느낌으로 온몸을 파고든다. 베스트셀러를 수없이 읽어도 내 인생이 조금도 바뀌지 않는 이유는 읽고 위로받으며 감성적으로 만족하고 감동받을 뿐, 손발이 움직여 직접 실천해보고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감동받고 위로받지만 그럴수록 내 신체는 더욱 무기력해지고 내 마음은 더욱 무료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관능적인’ 사람이 예술적 ‘재능’도 뛰어나고 세상을 ‘관통’하는 마력도 지니고 있다. 여행은 ‘관망’이 아니라 ‘관능’이다. 내 몸을 움직여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낯선 곳에서 내 몸이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만큼 내 몸에 각인된다. 관능적인 감각은 관념적으로 느낄 수 없다. 오로지 신체성이 전제될 때 몸이 느끼는 재능이 바로 관능이다.
다리가 떨리기 전에 행복으로 가는 다리를 건너자
“몸’이 스승이고 ‘마음’이 제자다. 몸을 보고 마음이 배운다. 그러나 마음이 어느 때고 몸을 들여다보는 것은 아니다. 못된 제자는 제 삶이 안달이 날 때에만 스승에게 손을 내민다”(363쪽).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에 나오는 말이다. 스승이 몸의 말을 제자인 마음이 잘 듣지 않는다. 스승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자인 마음이 나타나 스승인 몸을 통제하는 방식을 배워가는 사람도 많은 실정이다. 몸이 진짜 스승이라는 느낌은 몸이 한계나 위기 상황에 처할 때 확연히 드러난다. 더 이상 내 몸이 어찌할 수 없을 때 마음이 아무리 명령을 해서 몸을 통제하려고 해도 몸은 말을 듣지 않는다. 맘도 몸이 건강할 때 살아있다. 몸이 망가지면 마음도 자신이 거주 할 집을 잃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머리를 쓰지 않으면 몸이 고생한다고요?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몸을 쓰지 않으면 머리가 고생하는 거지요.” 존 레이티 하버드 의대 교수의 말이다. 머리에 열이 나는 이유는 몸을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몸이 바빠지면 정신은 할 일이 없어진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걱정에 걱정을 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반복한다. 몸이 편안해지면 반대로 머리는 복잡한 생각에 휩싸인다. 머리를 한가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몸을 움직여 땀을 흘려야 한다. 몸에 땀이 나기 시작하면 상쾌해지고 마음은 유쾌해지고 머리는 명쾌해진다. 상쾌해진 몸이 유쾌한 마음과 명쾌한 머리를 부르고 통쾌한 영혼을 낳는다. 상쾌한 몸이라야 누군가의 어려운 부탁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다.
“몸에 기쁨이 찾아오는 경우에 우리는 정신에서도 반드시 기쁨을 느끼지만, 반대로 정신의 기쁨이 필연적으로 몸의 기쁨을 초래하지는 않는다…우리의 몸은 항상 옳지만, 정신은 그릇 될 수 있다”(478쪽).” 강신주의 《감정수업》에 나오는 말이다. 몸이 기뻐야 정신도 기쁨을 누린다. 기쁜 몸은 세상의 흐름을 오감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감각적인 몸이며 동물적 촉수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끼는 관능적인 몸이다. 몸을 기쁘게 만들어주려면 몸이 원하는 소리를 귀담아 들어줘야 한다. 몸이 지금 나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무엇인지를 들어주지 않으면 머리가 몸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몸이 견디기 어려운 인내심을 요구한다. 움직이고 싶은 몸의 본능을 머리가 통제하고 마음이 지배하기 시작하면 몸의 관능적 감각은 관성에 사로잡혀 타성에 빠지기 시작한다. 육체는 가만히 앉아있고 정신만 치열한 싸움을 거듭한다. 몸은 부실해지고 머리는 열이 난다. “정신의 싸움은 육체를 쑥밭으로 만들지만, 육체의 싸움은 정신을 투명하게 만든다”(92쪽). 이성복의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에 나오는 말이다. 육체의 싸움을 통해 정신을 맑게 하는 전략만이 몸도 맘도 건강하게 만드는 비결이다. 육체가 싸우면서 느끼는 감각적 깨달음이라야 느낌이 동반되는 체험적 지혜로 각인된다. 몸이 기뻐하는 감각적 체험을 멀리하고 정신으로 고민을 거듭할수록 심장은 답답해지고 다리는 떨리기 시작한다. 몸이 기뻐하는 일을 하면 다리가 떨리지 않고 심장이 떨린다. 심장의 떨림은 몸이 끌리는 일을 할 때 나타나는 설렘이다. 감각과 사유의 중심에 머리에서 몸으로 옮겨져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설렘이 심장의 떨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