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는
미지의 세계로 인도하는 청사진이다

이미지와 미지: 이미지는 미지의 세계로 인도하는 청사진이다

당신은 지금 이미 아는 기지(旣知)에 머물러 있습니까, 이미지(理美智)로 미지(未知)의 세계를 추구합니까?


전문가는 기지(旣知)와 미지(味知) 중에서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는지에 따라 기존 세계에 안주하느냐 새로운 세계를 향한 호기심으로 끊임없이 공부하느냐를 결정한다. 기존 지식에 머무를수록 타성에 젖어들고 관습에 얷매여 살아가지만 미지의 세계로 도전하는 전문가는 새로운 지식과 지혜로 자신의 전문성을 부단히 개발한다. 미지의 세계는 이미지(image)가 결정한다. 내가 꿈꾸는 미래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갖고 상상하는지에 따라 미래가 현실로 다가와 구현되는 가능성도 달라진다. 이미지는 이미지(image, 理美智)다. 이미지는 이상(理想)을 추구하는 나의 비전, 미덕(美德)을 갖추는 나의 품격, 지혜(智慧)를 쌓는 나의 자질의 합작품이다. 전문가의 이상과 비전, 미덕과 품격, 지혜와 자질은 전문성의 본질이자 핵심이다. 전문가는 자기 분야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원대한 이상을 품어야 한다. 전문가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타인의 아픔까지도 사랑하는 미덕을 지닐 때 더욱 빛난다. 마지막으로 전문가는 단순한 지식과 기술로 무장하는 기능인을 넘어 비판적 안목과 식견을 갖고 세상을 이끌어가는 지혜를 쌓아나갈 때 전문가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진다. 여기서는 이미지의 ‘배반’으로 상상력의 ‘반전’을 꿈꾸는 르네 마그리트에게 전문가의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는 상상력을 배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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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과 복제본, 어느 것이 진짜 창조의 근본인가


이미지가 현실을 재현하는 수단을 넘어서서 현실과 이미지 사이에 어떤 것이 진짜 실재(reality)를 반영 또는 복제하고 있는 것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이미지의 복제가 거듭될수록 원본과 복제본은 구분이 불가능해지고, 복제본은 원본과 유사성을 띠어야만 된다는 암묵적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내가 창조했다고 생각하는 지식은 이미 누군가 창조한 지식을 편집하면서 탄생한 편집된 지식이다. 내가 편집한 지식을 누군가는 자신의 목적과 의도대로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른 방법으로 편집해 새로운 지식을 창조한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내가 창조한 지식의 독창성도 사실은 누군가의 독창성을 기반으로 새롭게 복제된 독창성이다. 이처럼 원본과 복제본을 구분하기 어려운 세계에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이 살고 있다. 본래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은 프랑스어로 시늉, 흉내, 모의(模擬) 등의 뜻을 갖고 있으며, 가상, 거짓 그림 등의 뜻을 가진 라틴어 시뮬라크룸(simulacrum)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라틴어 단어는 영어 안에도 그대로 흡수되어서 모조품, 가짜 물건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요컨대 시뮬라크르는 원본의 성격을 부여받지 못한 복제물을 뜻하는 개념이다. 시뮬라크르를 정의할 때, 최초의 한 모델에서 시작된 복제가 자꾸 거듭되어 나중에는 최초의 모델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뒤바뀐 복사물을 의미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사실 내 생각도 누군가의 생각을 복제하는 가운데 탄생한 시뮬라크르이며, 그런 생각으로 편집된 말고 지식도 그 기원을 따지다 보면 누가 오리지널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시뮬라크르는 영원히 원본과 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이유로 플라톤에 의해 천대받았던 개념이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에 의해 그 개념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들뢰즈의 시뮬라크르는 모델과 같아지려는 것이 아니라, 모델을 뛰어넘어 새로운 자신의 공간을 창조해 가는 역동성과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한 흉내나 가짜(복제물)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또 하나의 독창성을 띠고 있는 창조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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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을 능가하는 새로운 이미지의 편집, 데페이즈망


이런 시뮬라크르에 비추어 보면 이미지의 복제는 원본 이미지를 얼마나 동일하게 닮아가는지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원본 이미지의 본질과 속성을 뛰어넘은 또 다른 제3의 이미지로 변신하는지의 여부가 중요하다. 이런 이미지의 편집을 통해 새로운 미술의 세계를 개척한 사람이 바로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가 추구하는 데페이즈망(depaysement) 기법이다. 본래 데페이즈망이란 개념은 ‘사람을 타향에 보내는 것’ 또는 ‘다른 생활환경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즉 어떤 물체를 본래 있던 곳에서 떼어내어 엉뚱한 곳에 배치함으로써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방법을 의미한다. 어떤 물건을 일상적인 환경에서 이질적인 환경으로 옮겨 그 물건으로부터 실용적인 성격을 배제하여 사물이나 이미지의 낯선 만남을 연출하는 기법이다. 데페이즈망 방법은 익숙한 이미지만 낯선 방식으로 이미지를 중첩시킴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각적 충격 효과를 노리는 방법이다. 이는 사물이나 이미지를 그것의 본래 기능이나 의미로부터 이탈시켜 놓는 일종의 위치 전위법이다. 데페이즈망은 이질적 메시지는 물론 이미지, 오디오, 영상을 낯선 방식으로 조합하는 일종의 색다른 지식 편집(Knowledge Mash up) 방식이다. 다시 말해서 데페이즈망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모순 또는 대립적 요소들을 하나의 화폭에서 낯선 방식으로 결합시키거나 어떤 오브제를 전혀 엉뚱한 위치에 배치시켜 시각적 충격과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기법이다. 또한 데페이즈망은 낯익은 물체를 낯선 장소에 놓음으로써 사람들의 기대를 망가뜨리는 방식으로 심리적 충격뿐 아니라 보는 사람의 잠재적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키는 역할을 한다. 한 마디로 늘 익숙하게 접했던 것을 낯설게 조합하거나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결함함으로써 당혹감과 충격, 놀라움과 신비감을 주는 초현실주의적 화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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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리트의 〈집단의 발견〉이라는 그림을 보자. 우리가 생각하는 인어공주는 상체가 사람의 모습이고 하체가 어류의 모습을 띠고 있다. 이 그림을 보면 인어공주가 연상되지만 상체는 물고기의 모습이고 하체는 사람의 형상으로 표시함으로써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인어공주와는 정반대의 형상을 띠고 있다. 익숙한 물고기와 사람의 형상을 〈붉은 모델〉이라는 작품도 마찬가지다. 이 그림을 보고 우리는 무엇을 연상할까. 사람의 발일까 아니면 신발일까. 익숙한 사람의 발과 신발 이미지를 하나의 이미지로 중첩시킴으로써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낯선 상상력으로 들어가는 색다른 문을 열어놓고 있다. 발바닥과 신발이라는 익숙한 두 가지 이미지를 하나로 합성시킨 <붉은 모델>을 보면 벗은 두 발이 신발이기도 하고 발이기도 하다. 마그리트 이 그림을 통해서 의도하는 바는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한’ 애매성 속에서 관객의 상상력에 자유로운 날개를 달아줌으로써 신발이나 발기 갖고 있는 상투성을 부정하는 데 있다. 마그리트의 데페이즈망 기법은 익숙한 이미지의 낯선 합성 및 전치를 통해 보이는 세계의 이면이나 그 너머의 이미지가 품고 있는 수수께끼를 낯선 생각으로 상상해보게 한다. 이미지들의 배반을 통한 상상력의 반전을 꿈꾸는 방법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이미지를 간직하면서 보여주되 이상한 조합과 중첩으로 애매모호한 이미지를 탄생시켜 평범한 사람들의 상상력에 불을 지르는 방법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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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페이즈망, 색다른 상상력을 잉태하는 이미지의 중첩


마그리트의 작품 중에 <잘못된 거울이라는 그림이 있다. 클로즈업된 한쪽 눈과 각막 위로 구름이 떠 있는 하늘 이미지가 투시된 <잘못된 거울>은 우리가 바라보는 하늘이 과연 하늘의 진면목인지를 의심케 한다. 마그리트가 이 그림을 통해서 폭로하고 싶은 의도는 실재 세계의 애매성이다. “내가 보고 있는 푸른 하늘은 실재 자체인가, 아니면 내 눈에 비친 하늘인가?” 실제 세계의 하늘은 나의 망막을 통과하면서 내가 갖고 있는 편견과 선입견으로 오염되거나 오해되어 투영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걸 진짜 하늘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눈은 내가 경험한 대로 보인다. 열십자(十)를 보여주고 교통경찰에게 물어보면 사거리라고 대답하고 산부인과 의사에게 물어보면 배꼽이라고 대답한다. 의사에게 물어보면 목사에게 물어보면 십자가라고 생각하고 수학자에게 물어보면 더하기 기호라고 생각한다. 저마다의 직접적 경험과 인식의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동일한 상징 기호도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눈은 내가 경험한 대로 보일 뿐만 아니라 보고 싶은 방식대로 볼뿐이다. 그래서 눈은 잘못된 거울이다. 본래의 이미지를 형상대로 보여주지 않고 눈에 투영되는 순간 내가 경험한 방식 중에서 내가 보고 싶은 방식대로만 보일 뿐이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고, 우리는 늘 우리가 보는 것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궁금해한다(Everything we see hides another thing, we always want to see what is hidden by what we see).” 르네 마그리트가 한 말이다. 숨기고 있는 무엇인가를 겉으로 드러내서 보기 위해서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제 봤던 방식대로 오늘도 세상을 보거나 지금까지의 나의 경험과 인식의 틀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마그리트에게 눈은 언제나 〈잘못된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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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리트의 대표작 〈이미지의 배반〉은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단서나 열쇠를 제공해준다. 이 작품에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파이프가 그려져 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다. 정상적인 사람의 눈으로 보면 그림 속의 파이프는 파이프가 맞다. 마그리트가 이 그림을 통해서 의도한 것은 관습적 사고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고정관념을 파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림과 문장을 모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분명 그림 속의 실체는 파이프가 맞다. 하지만, 파이프가 아니라는 제목으로 인해 관객은 이전과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파이프가 아니면 무엇일까. 그림 속의 실체를 의심해보면서 당연하고 원래 그런 세계에 의문의 물음표를 던져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들려는 마그리트의 의도가 숨겨져 있다. 마그리트의 대표작 ‘이미지의 배반(the betrayal of images)을 통해 상상력을 기반으로 일상의 사물,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언어, 믿어 왔던 상식이나 고정관념 등을 뒤흔들어 놓는다.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함으로써 이성에 의해 속박되지 않는 상상력의 세계를 회복시키고 인간 정신을 해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초현실주의적 상상력은 21세기적 하이브리드 문화로 새롭게 계승․발전되고 있다. 흔히 접했던 것을 색다른 방법으로 결합함으로써 뜻밖의 충격과 효과를 줄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함으로써 놀라움과 경이의 체험을 제공하는 데페이즈망 방법은 초현실주의 화가가 사용하는 방법을 넘어서서 일상에서 창조적 융복합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방법으로 얼마든지 전환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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