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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雪) 빛이 나며  눈물 맛이 난다? 소금이다

시 쓰기는 몸 쓰는 감각활동이지 머리 쓰는 사유 활동이 아니다

시 쓰기는 몸 쓰는 감각활동이지 머리 쓰는 사유 활동이 아니다

() 빛이 나며 눈물 맛이 난다? 소금이다


하늘에서 맛보는 앎음다운 시   

  

“언젠가 스칸디나비아 항공을 이용할 때, 소금 봉지 같은 것이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소금이란 말이 없었습니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The Color Of Snow, The Taste Of Tears'<'눈(눈)의 색깔, 눈물의 맛'> 감동이었습니다. 항공사가 달리 보였습니다. 문학과 문화를 생활화하자고 백날 말만 하면 뭐합니까?” 정재찬 교수의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에서 발견한 시적 문장이다. 호기심이 생겨서 진짜 구글 검색을 통해서 스칸디나비아 항공사가 추구하는 경영철학이 담긴 더 온전한 문장을 찾았다. 우선 영어로 된 원문을 소개한다.  


    

        

'The Color Of Snow,

The Taste Of Tears.

The enormity of oceans.'     


If you want salt

on your meal,

don’t cry –

use this package     


Pepper has been called

 "the gift of the East"

though gift means poison in Swedish,

don't let that put off.     


Imagine if the oceans

of the world

contained pepper

instead of salt, well…

maybe not     


As sugar dissolves,

it spreads happiness.    

 

Imagine if it snowed sugar.

It would look like snow,

but a lot more people

would be eating out…  

   


Luggage is like a shadow.

It follows you everywhere.   

  

A poem for the birds.

The best traveling companion is an open mind.     


수직의 태양과 수평의 물이 뜨겁게 사랑하다 소금을 낳았다     


소금과 후추, 그리고 설탕과 여행객이 들고 다니는 수화물은 그림자라고 이야기하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를 위한 시라고 소개한다. 최고의 여행 동반자는 마음이 열린 자라고 화룡점정한다. 우선 원문을 번역해보면 아래와 같다.

    

첫 번째 문장은 소금에 관한 시적 표현이다. “눈의 색, 눈물의 맛. 바다의 광대함.” 겨울에 내리는 하얀 눈 색깔을 닮았고, 슬플 흘리는 눈물의 짠맛과 비슷하며, 광대한 바다의 꿈을 담은 조미료가 바로 소금이라는 것이다. “소금을 원한다면 식사 중에 울지 말고 이 패키지를 사용하십시오.” 눈물은 소금처럼 짠맛이 있지만 그걸로 조미료를 대신할 수는 없는 법, 그러니 슬퍼도 울지 말고 눈물을 머금고 소금이라고 명명되지는 않았지만 눈물의 맛을 내는 소금을 사용해서 음식의 간을 맞추라는 이야기다. 식사 중에 눈물을 흘려서 간을 맞추지 말고 승객들에게 제공한 소금을 사용하라는 센스 있는 멘트다. 갑자기 함민복 시인의 ‘눈물은 왜 짠가’라는 산문시가 생각난다.   

 

  

지난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 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 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운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 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 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국물을 그만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 댔습니다.

그러자 주인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 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 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 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시인의 《눈물은 왜 짠가》는 산문집 제목이기도 하다. 자기도 모르게 흘러내린 눈물이 설렁탕 속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른다. 말없이 아들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만 생각해도 눈물이 절로 나오는 긴 산문시다. 함민복 시인은 개인적으로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1년 선배님이다. 학교 다닐 때는 몰랐지만 사회 나와서 알게 된 정말 가슴 아픈 시인이다. 젊은 시절의 아픔을 시의 원료로 삼아 강화도에서 자연을 벗 삼아 온몸으로 시를 쓴다. 이 산문집에는 또 다른 눈물겨운 표현이 나온다. “현대문명은 부드러운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땅속에서 철이나 시멘트 같은 딱딱한 것을 캐내어 인간의 욕망을 닮은 수직의 건물들을 세워 올린다. 그리고 땅속에서 석탄, 석유 같은 뜨거운 것을 캐내어, 에너지로 삼아 인간의 욕망을 닮은 속도를 생산한다. 세상은 점점 수직의 숲이 되고 뜨거워지고 딱딱해진다. 딱딱해지지 않으면 수직도 속도도 얻을 수 없다. 나는 바닷가에 살면서 수직과 수평의 조화로운 결정체를 만나기도 했다. 달의 힘이 수평으로 끌어준 물을 수직의 태양이 건조해 줄 때 탄생하는 소금이 그 결정체다. 수직과 수평의 조화로움으로 탄생한 소금은, 수직 성향의 철이나 시멘트와 달라 물에 쉽게 녹으며 바로 부드러움이 되고 수평이 된다.” 수직으로 내리쬐는 태양빛이 수평으로 흐르다 만난 바닷물의 합작품이 소금이라는 것이다. 소금은 수직의 하강 기운과 수평의 이동 기운이 만나 만들어진 우주의 합작품이라는 표현은 시인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시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설탕이 온 세상을 덮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이 외식하러 나갈 거야!     


세 번째 문장부터 후추 이야기가 나온다. “후추는  "동방의 선물"이라고 불렸다. 스웨덴에서는 ‘선물’이 ‘독’을 의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추를 뿌려서 음식 맛을 내는 것을 미루지 마라,” 동방의 선물이자 독약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 후추, 과연 선물을 선택할 것인지 독약을 선택할 것인지의 문제는 승객의 선택에 달려 있다. 독약이지만 먹어도 죽지 않는 향신료니 음식 맛을 내려면 머뭇거리지 말고 뿌려서 최고의 음식 맛을 내라고 재촉한다. “만약 이 세상의 모든 바다가 소금 대신에 후추를 품고 있다면 그건 아마 실현될 수 없는 불가능한 꿈일 것이다.” 바닷물은 소금물이다. 소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미약하지만 바닷물의 본질적 속성을 결정하는 것은 극히 미량의 소금이다. 그런데 소금이 아니라 후추로 바닷물이 구성되어 있다는 상상을 한다면 바닷물은 도대체 어떻게 바뀔 것인가? 생각하지 말고 상상해보라. 논리적으로 분석하지 말고 상상할 때 후추로 구성된 바닷물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을까? 소금의 자리를 후추가 꿰찰 때 바닷물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을까? 우선 짠물이 없어지고 후추의 향기에 따라 각양각색의 향기가 진동하는 바닷물로 바뀔 수 있을까? 대서양과 태평양, 그리고 동남해안에 흐르는 해류의 방향과 각 대양별 남극과 북극을 오고 가는 시점에 만나는 온도 변화에 따라 바닷물은 다종 다양한 향기를 머금은 후추 바다로 바뀔 수 있을까?     



다섯 번째 문장부터 설탕이 나온다. “설탕이 녹으면서 행복을 전합니다.” 행복은 달콤하다는 언어적 점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설탕’하면 바로 떠오르는 다음 단어는 ‘달콤하다 ‘이다. 행복한 사람 역시 달콤한 삶을 살아간다. 설탕 같은 인생, 바로 행복한 인생이라는 점에 착안해서 설탕을 녹여서 음료로 마시면 설탕이 녹아 없어지면 달콤한 인생이 시작된다고 승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설탕이 내렸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눈처럼 보일 거예요.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달콤한 행복을 느끼기 위해 외식하러 나가겠지…” 눈 대신 겨울에 설탕이 온 세상을 덮는다는 상상을 해보자. 눈 녹듯이 설탕도 녹을 것이다. 설탕이 녹으면서 행복을 전하듯, 한 겨울에 눈 대신 설탕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을 때 그리고 때가 되면 설창이 녹아내릴 때, 우리 인생의 고달픔도 설탕 녹아내리듯 다 녹아서 어디론가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상상력 속에 녹여낸 감각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달콤한 행복을 방구석에서만 보내기 어렵다. 눈이 오면 멀쩡했던 기분도 심장이 뛰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하고 가까운 친구들에게 문자로 소식을 알린다.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인 설탕이 녹기 시작하면서 세상은 달콤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니 집에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 멋진 만남 속에서 맛난 음식을 먹는 게 어떻겠느냐는 권유다. 설탕과 눈, 행복과 외식을 연상시켜 승객으로 하여금 이륙하자마자 멋진 레스토랑으로 유인해서 맛난 음식을 먹게 유혹하는 멘트가 아닐 수 없다.     


“소금이 설탕에게

바다도 모르는 놈.

애들 이빨이나 썩게 만드는 놈

비만과 당뇨의 앞잡이


설탕이 소금에게

우쒸, 너 개미 모아본 적 있어?“     

이외수의 《글쓰기의 공중부양》에 나오는 소금과 설탕의 맞대결 장면이다. 코너에 몰렸던 설탕이 소금에게 일격을 가한다. 개미 모아 본적이 있냐고. 달콤한 유혹으로 순식간에 개미를 모을 수 있는 능력은 소금이 해낼 수 없는 설탕만이 지닌 고유한 능력임을 간증하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 으르면 소금과 후추로 음식 맛을 즐기고 설탕으로 달콤한 음료의 행복을 즐긴 승객은 이제 목적지에 도착해서 수하물을 찾는 장면을 상상한다. “수하물은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것은 어디에서나 당신을 따릅니다.” 수하물을 그림자에 비유한 탁월한 은유다. 수하물이 주인을 앞서가는 경우는 없다. 언제나 주인 뒤를 따라간다는 수하물의 속성을 그림자에 비유한 시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나를 따라오는 수하물을 끌고 고단한 몸을 쉬러 목적지로 향한다. 피곤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따라오는 수하물을 이끌고 시내 어느 호텔이나 그리운 집으로 향한다. 긴 여행을 마치고 포근한 휴식을 취하고 다음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서다. 이 광고 문안의 대미를 장식하는 한 문장은 이렇게 화룡점정한다. “새를 위한 시. 최고의 여행 동반자는 열린 마음입니다.” 여기서 새는 비행기를 지칭하거나 비행기를 타고 날아다니는 승객을 의미하는 은유적 표현이 아닐까. 날아가는 새를 위해 소금과 후추와 설탕을 받치지는 않았을 테니까. 소금으로 인생의 눈물 맛을 보고, 후추로 인생의 향기를 품으며, 설탕으로 달달한 꿈을 꾸며 행복의 목적지로 새처럼 날아가는 모든 승객에게 받치는 헌사가 아닐 수 없다.      


시 쓰기는 몸 쓰기다    

 

“시는 이미지들의 융해이지 개념의 교환이 아니다. 생각에 빠져드는 것은 시 쓰기와 무관하다. 시 쓰기는 감각 활동이지 사유 활동이 아니다”(176쪽). 김인환의 《타인의 자유》에 나오는 말이다. 시 쓰기는 몸 쓰기다. 몸을 쓰지 않고 탄생된 시는 이 세상에 없는 시다. 관념과 허구가 낳은 가공(架空)의 시다. 소금과 후추와 설탕을 개념적으로 사유할수록 틀에 박힌 사유의 관성에 박혀버린다. 소금과 후추와 설탕이라는 개념에 붙박인 언어적 점성(粘性)에 붙들려 꼼짝달싹 못한다. 개념에 대한 사유에 집착할수록 관념적 틀에 갇혀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소금은 짜고, 후추는 형언할 수 없는 향기가 묻어나며, 설탕은 달다는 개념적 점성에 달라붙어 소금과 후추와 설탕을 달리 상상할 길이 없다. 소금을 낳은 바다를 상상하고 후추를 낳은 동양을 상상할 때 소금과 후추는 다른 상상력의 날개를 달고 비상하기 시작한다. 설탕이 너무 달아서 건강에 좋지 않은 관념적 사유에서 벗어나 달콤한 행복을 상상하는 세계로 전이될 때 설탕에 묶인 틀에 박힌 생각을 털어낼 수 있다. 상상은 언제나 생각하는 세계 그 이상의 비상(飛上)이다. 소금과 후추와 설탕을 상상하는 이미지의 끝에서 또 다른 끝으로 날아다니기를 반복할 때 상상은 날개를 달고 끝으로 비상하기 시작한다. 상상은 체험적 각성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비상하다 공상이나 허상, 망상이나 몽상으로 전락한다. 상상(想像)은 말 그대로 이미지(像)를 생각(想)하며 깨달음에 이르려는 안간힘이다. 깨달음은 앉아서 저절로 다가오지 않는다. “깨달음은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 상처를 견디면서 상처의 한 복판을 뚫고 넘어서”(65쪽, 참고: 김인환, 2020, 같은 책)려는 몸부림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개념으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이미지로 상상을 시작할 때 생각 너머의 세계를 구상할 수 있다. 진부한 개념의 감옥에 갇혀 사유를 거듭할수록 생각은 개념의 식민지로 포섭된다. 하지만 소금을 낳은 바다를 상상하고, 후추를 낳은 동양과 독약의 이미지를 상상하며, 설탕이 풍기는 이미지의 바다에 빠질수록 기존 개념이 범접할 수 없는 이미지의 바다에 빠져버린다. “난 바다로 나가게 되면 세계가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더는 고집할 수 없다. 그가 만나게 되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바닷물이며 언제라도 배를 뒤집을 수 있는 거대한 물너울이며 물속에 숨어있는 암초이며 예고 없이 불어오는 돌풍이다”(127쪽). 황현산의 《우물에서 하늘보기》에 나오는 말이다. 바다를 생각하지 말고 바다의 이미지를 상상할 때 바다는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느끼는 대상이다. 파도 소리가 몰아치고 바람과 함께 갑자기 돌품이 몰아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온몸이 오싹할 정도로 파도의 세력은 바다 건너 집을 집어삼킬 정도의 위력으로 몰려오고 있음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언제나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 느낀 점을 적확하게 표현하고 싶지만 그 느낌의 언저리에서 표현하지 못하는 고통을 진저리 칠 뿐이다. 언저리를 맴돌다 언어의 부실함을 깨달으면 다행이다. 언어는 언제나 상상의 주변을 맴돌다 그중의 일부 이미지 속성만 낚아챌 뿐이다. 이미지 속에는 언어화시킬 수 없는 무한한 상상의 바다가 출렁인다.   

  


시를 쓰는 사람을 넘어 시를 살고 싶다     


“시민의 언어는 지껄임이고 시인의 언어는 얼말이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고 스님은 시를 사는 사람이고 평론가는 시인과 스님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사람이다”(68쪽). 다시 김인환의 《타인의 자유》에 나오는 말이다. 시인(詩人)이 되기도 어려움을 시인(是認)했는데 시처럼 살아가는 수준이 아니라 바로 시를 사는 사람은 나에게 난공불락의 벽이다. 시인은 지식이나 관념을 시를 쓰지 않는다. 살아온 삶과 살아가는 삶으로 밀어붙이며 시를 몸으로 쓴다. 그러니 삶이 엉망인 사람은 엉망인 시를 쓸 수밖에 없다. 시를 쓰는 사람은 쓰 시대로 살아간다는 게 그나마 희망이다. 살아온 삶만큼 쓸 수 있지만 사실 쓰는 만큼 다시 살아간다. 사는 대로 쓰는 수준을 넘어 쓰는 대로 살기 때문이다. 시인처럼 생각하고 시처럼 살아가다 살아가는 삶을 시로 쓰다 쓴 대로 시를 살아가는 역행(逆行)이 내 삶의 역린(逆鱗)으로 남는다. 불편하고 거슬리는 역린이 결국 내 삶을 역전(逆轉)시킨다는 가능성을 믿고 싶다. “(연탄 보일러에서 끓고 있는) 물은 불에 저항한 만큼 따뜻하다“(103쪽). 함민복 시인의 《눈물은 왜 짠가》에 나오는 말이다. 불에 저항하지 않은 물은 저항을 포기하고 지금 이 상태에 안주하려는 물이다. 그런 물은 물 먹은 물이다. 지금보다 나아지기를 포기한 물이다. ”원천(源泉)에 가 닿기 위해서는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흐름을 타고 내려가는 것은 쓰레기뿐이다.” 폴란드 시인,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의 말이다. 물고기는 죽으면 뜬다. 죽은 물고기가 떠내려가는 이유다. 강풍에 휩쓸리는 새도 신체가 박약하거나 곧 죽음을 앞둔 새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는 흐름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래야 흐름을 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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