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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않으면 밑진다!

당신만 모르는 믿음이 만들어가는 세 가지 위력

믿지 않으면 밑진다!

당신만 모르는 믿음이 만들어가는 세 가지 위력


알고 믿는 게 아니라 믿으면 알 수 있다. 알고 나면 저절로 믿음이 생긴다. 알고 나면 굳이 믿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알고 나면 저절로 앎으로 믿음이 생긴다. 하지만 모든 걸 다 알고 나서 믿을 수 없다. 알기 전에 믿지 않으면 앎이 시작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부모님의 자식이라는 걸 처음부터 알았는가. 내가 태어나는 과정을 나는 모두 다 알고 나서 나의 부모님을 믿지 않는다. 나는 부모님의 자식이라는 믿고 살다 보면 내가 부모님의 자식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의 대상으로 삼고 철학적 사유를 시작한 사람이 있다. 확실한 지식을 창조하기 위해 모든 것을 철저하게 의심한 사람이 바로 합리론의 창시자, 르네 데카르트다. 그가 모든 걸 의심하는 과정을 통해 진리에 이르는 방법으로 창안한 것이 바로 방법적 회의다. 즉 그는 절대적인 진실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믿음을 의심한 것이다. 의심이야말로 확실한 진리로 이끄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의 목적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아내서 그걸 근간으로 진리를 찾아보려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데 있다. 끊임없이 의심을 반복했지만 데카르트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의심하는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의심 자체도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분명한 것은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를 제외한 모든 걸 의심하는 행위는 의심하는 대상을 내가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탄생한 말이 바로 데카르트의 명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이다. 그런데 과연 모든 걸 의심하는 생각의 끝에는 무엇이 남을까?


의심의 연속은 사람을 심각한 인식의 혼란으로 빠뜨릴 뿐이다. 의심은 의문으로 발전할 수 있지만 그런 의문은 새로운 관문을 열어가는 질문으로 연결되지 못한다. 앎은 믿음이 사투 끝에 만들어낸 몸부림의 산물이다. 믿음을 갖고 있어야 알고 싶은 열정도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믿지 않고 모든 걸 의심하는데 앎을 향한 열정이 과연 불타오를까. 하지만 믿음에도 부정적인 역기능이 존재한다. 덮어 놓고 무조건 정도를 넘어서서 믿는 맹신(盲信)은 “묻지 마 믿음”이다. 묻지 않고 믿는 건 장단점이 있다. 묻지 않고 믿을 때는 나름의 체험적 확신이 설 때다. 그렇지 않고 자기주장이나 의견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믿음을 부채질하면 맹신의 덫에 걸린다. 두 번째 조심해야 될 믿음이 미신(迷信), 즉 미로에 빠지게 만드는 잘못된 믿음이다. 어디서부터 나의 믿음의 근거가 왔는지 모르지만 한 번 믿으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미혹(迷惑)이 낳은 믿음이다. 세 번째 잘 못된 믿음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 정도로 정신을 잃게 만드는 광신(狂信)이다. 미신이 미혹으로 빠지게 만든다면 광신은 어디로 뛸지 모를 정도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위험한 믿음이다. 마지막으로 뭐든지 그냥 믿지 않는 불신(不信)은 믿음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는 병적인 믿음이다. 나의 믿음이 맹신과 미신, 광신과 불신은 아닌지를 알아보는 확실한 방법은 없다. 끊임없이 나의 믿음을 돌이켜 생각해보는 수밖에 없다. 믿음의 근거를 객관적으로 판단해주는 또 다른 믿음의 기준은 없다. 나의 믿음으로 연결된 관계가 믿음의 연대로 유지되면서 관계가 더욱 튼실해지는 지를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믿음은 언제나 ~에 관한 믿음이기에 믿음의 대상이나 사람이 없는 믿음은 실체 없는 망신(妄信)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의 믿음은 새로운 앎을 열어주는 뿌리가 될 뿐만 아니라 과감한 행동을 촉발하는 원천이자 행복한 삶을 열어가는 기반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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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있어야 용솟음치는 깨달음도 있다:

믿지 않으면 알 수 없다(nisi credideritis, non intelligitis)


볼펜을 들고 문득 떠오른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도망가기 전에 붙잡아서 메모하려는 순간, 이런 의심이 들었다. 과연 볼펜은 내 생각을 그대로 받아 적을 수 있을 정도로 가능한 상태일까?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고 그걸 증명하려고 노력하다.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매일 아침 청담대교를 건너 학교에 간다. 어느 날 아침 이런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과연 청담대교는 이 많은 차를 버틸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다리일까? 혹시 건설업자가 함량 미달의 철근을 사용해서 내가 다리를 건너가는 순간 무너지지나 않을까라는 의심이 들 때 갑자기 청담대교를 건너 한강을 건너는 일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청담대교가 안전하다는 걸 어떤 방법으로 증명하기 전까지는 나는 다리를 통과하면서 한강을 영원히 건널 수 없다. 다리가 안전하다고 설혹 판명되었다고 할지라도 이번에는 다리 안전 검사를 한 사람과 그 사람이 사용한 각종 측정 도구는 과연 믿을만한 장비였을 지를 의심한다면 믿음은 영원히 생기지 않고 나는 영원히 청담대교를 건너 마음 편히 출근하지 못할 것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마지막 보루인 내가 뭔가를 믿지 않고서는 어떤 인식도 불가능함을 직감할 수 있다. 청담대교의 안전성은 그 안정성 여부를 판정하는 측정 도구나 장비의 안전성이 보장해준다. 하지만 안정성을 검증하는 도구나 장비의 안정성은 또 다른 도구나 장비의 안정성으로 검토를 해봐야 알 수 있다. 이런 검토에 검토를 거듭하다 검토를 마치는 확실한 길은 없다. 그냥 믿어야 한다. 믿지 않으면 어떤 앎도 생기지 않는다.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고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지식만 지식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지식을 지식으로 드러나게 해주는 다른 지식이 있다는 믿음은 허구이자 낭설에 불과하다. 그러나 폴라니의 《개인적 지식》에 나오는 “우리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알 수 있다(We can know more than we can tell)”(4쪽)고 믿는다면 비록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서 말은 못 하지만 나는 말 못 하는 뭔가를 알고 있다. 보이지 않지만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는 지식을 움직이는 관찰할 수 없는 앎이 우리 몸에 체화되어 있다고 믿지 않으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내가 비교적 다른 사람에 비해서 책을 빠른 속도로 쓰는 노하우를 책으로 써 달라는 출판사 요청을 받고 책 쓰기에 관한 책을 쓴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언어를 매개로 책 쓰는 노하우를 밝힐 수 있는 지식은 내가 책을 쓰는 데 동원하는 다양한 지식의 극히 일부분밖에는 되지 않는다. 알고 있지만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지만 말할 수 있는 지식을 뿌리에서 조정하고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지식이 존재한다. 그런 지식은 오로지 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과 장기간 합숙훈련을 하면서 관찰하고 모방하며 시행착오를 경험하는 가운데 몸으로 배울 수밖에 없다. 모든 앎을 다 가르칠 수 없다. 가르칠 수 없지만 배울 수 있는 앎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갖고 배움의 여정에 자신의 몸을 내맡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배움에 대한 자세와 태도는 천지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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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만 진리라고 믿는 사람은 눈앞에 현실에 민감하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오로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시적 성과나 성취에 몰두한다. 반면에 보이지 않는 암묵적 노하우가 보이는 명시적 지식을 창조한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이런 사람의 진면목은 지금 당장 언어적 표현으로 말할 수 없지만 무수한 시행착오와 지루한 반복을 통해서 자기만의 고유한 색깔과 철학, 열정과 혼이 담긴 독창적인 노하우에서 드러난다. 보이지 않는 것이 진짜 세상을 움직인다고 믿는 사람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적 학습활동을 전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한 분야의 경지에 이르는 험난한 길을 선택, 묵묵히 어제의 나보다 나은 나로 변신하기 위해 어제와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열정을 불태울 뿐이다. 이들은 논어에 나오는 두 가지 공부 중에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위인지학(爲人之學)의 공부를 하지 않고 오로지 과정에 충실하면서 자신이 하면 재미있고 즐거운 위기지학(爲己之學)의 공부에 몸을 내맡긴다. 열정적 참여와 헌신의 원동력은 발견에 기쁨에 있지 누가 나를 인정해주는 평가나 평판에 있지 않다. “우리는 이제 또다시 믿음을 모든 지식의 원천으로 인정해야 한다. 암묵적 승인과 지적 열정, 관용구와 문화유산의 공유, 같은 생각을 하는 공동체에의 귀속, 이와 같은 것들은 우리가 사물을 지배할 때 의존하는 사물의 본성에 관한 우리의 관점을 형성하는 힘들이다. 어떤 지성도 아무리 비판적이고 독창적이라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믿음의 틀을 떠나 작동할 수 없다”(266쪽). 다시 폴라니의 《개인적 지식》에 나오는 말이다.


공부는 독방에서 외롭게 터득하는 독립적인 활동이 아니다. 나와 인식과 관심을 같이하는 학문공동체의 전통이 전해주는 오래된 신념체계가 녹아든 사고 양식을 함께 공부하고 고뇌를 거듭하며 서로 다른 의견을 나누는 공진화적 과정이다. 낯선 분야에 처음 진입해서 공부를 하려면 이미 정당화된 믿음으로 해당 학문 공동체의 암묵적 신념체계로 작동하는 공유된 문화나 사고체계, 이론과 방법론에 대해서는 무조건 믿어야 앎이 시작된다. 예를 들면 제가 제자들과 지금까지 공유했던 지식생태학적 문제의식이나 지적 산물은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비판적 논의의 결과이자 사회적 관계가 함께 만들어온 역사적 합작품이다. 지식생태학적 전통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통으로 간주되는 지식을 믿고 나와의 인식격차를 줄이기 위해 심열성복(心悅誠服)하면서 열정적으로 몰입하고 헌신적으로 참여하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심열성복 하는 공부는 전통적 지식격차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성심을 다하여 선진이 이끄는 공부방향을 몸을 던져 순종하는 공부다. 심혈 성복 하는 제자는 바로 믿음과 신뢰, 자세와 실력을 겸비한 심복이 된다. 심복은 마음을 터놓고 비밀이나 계획을 의논할 수 있는 아주 믿음직스럽고 충성스러운 제자다. 무조건적 믿음으로 절대복종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해당 학문 공동체가 축적하고 주창해온 선진들의 지식체계를 어느 정도 심취해서 공부하다 보면 나의 믿음이 잘못된 맹신에 근거하고 있음을 뒤늦게 알 수도 있고 너무 지나치게 과장해서 믿은 과신이었음을 알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알기도 전에 모든 걸 데카르트처럼 의심을 거듭하다 그 어떤 앎의 영역과 경지에 접근조차 하지도 못하고 깊은 회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뭔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믿어야 한다. 믿지 않으면 지식도 인식도 생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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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있어야 ‘다음’ 행동도 할 수 있다:

믿지 않으면 할 수 없다.


나는 공부를 통해 깨닫는 즐거움이 내 삶의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비록 미천한 경험이지만 체험적 통찰을 다양한 사례나 에피소드가 나만의 독창적 사유를 낳아준 생각의 텃밭이라고 믿는다. 무엇보다도 나의 보잘것없는 깨달음의 얼룩과 무늬로 쓴 글이나 책이 비슷한 고민을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독자가 내 책을 읽고 감동받을 수 있으며, 그런 감동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감동적 체험을 몸으로 전달함으로써 우리는 공통의 인식과 관심 공동체라는 연대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과 믿음의 근거에는 수많은 다른 사람의 생각과 이론, 나 자신의 경험과 독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생긴 산물이다. 이런 믿음의 근거를 대라고 하면 나는 일일이 설명할 수 없다. 그렇게 믿는 이유를 물어보면 그런 믿음이 내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있다고 믿는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나는 나의 제자들이 공부를 통해 깨닫는 각성과 통찰이 우리 삶을 더 아름답고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는다. “선생이 하는 것을 보고 그의 모범을 따라 그가 한 노력을 따라 함으로써 그 밑에서 배우는 학생은 선생 자신조차도 명시적으로 알고 있지 않은 규칙을 포함해서 그 기술의 규칙들을 배우게 된다. 감추어진 규칙들을 타인을 무비판적으로 모방할 정도로 자신을 던지는 사람만이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53쪽). 폴라니의 《개인적 지식》에 나오는 말이다. 믿지 않고서는 제자는 스승이 걸어간 학문적 여정에 몸을 던지지 않는다. 온몸을 던져 열정적으로 배우고 헌신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뭔가를 배우겠다는 의지는 믿음이 만들어낸 불씨다. 스승의 가르침을 다 알아서 믿는 게 아니라 모름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이미 걸어간 스승의 삶을 믿고 내 몸을 내맡기고 던지는 것이다.


욕파불능(欲罷不能)이란 말이 있다. 어떤 일에 빠져들면 누군가 말려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본인이 그 길을 가는 것이 가장 행복한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스승인 공자를 닮아가는 일을 멈추고 싶지만 이미 늦었다. 갖은 노력을 해도 스승이 걸어가는 길에서 포기할 수 없었다는 공자의 제자 안연의 말이다. 믿음이 있어야 심열성복하고 욕 파불 능한다. 믿음이 강할수록 배우겠다는 열망은 하늘을 찌르고 열정의 불길은 더욱 거세지면서 목숨을 걸고 험난한 발견의 길을 걸어간다. 그 속에서 지식은 한 사람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인격적 지식이 되는 것이다. 인격이 실종된 지식에는 그 지식을 창조한 사람의 열정과 철학이 보이지 않는다. 가장 인격적인 지식이라야 머리보다 심장을 움직이고 이해보다 설득을 통해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삶도 움직일 수 있다. 내가 창조한 지식에는 내가 살아가면서 고뇌했던 문제의식과 위기의식, 사생결단으로 파고들어간 간절한 희망,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난관을 돌파하고 역경을 극복했던 역동적인 드라마의 숨결이 살아 숨 쉰다. 몸으로 터득한 깨달음이라야 다른 사람의 살갗을 파고드는 감동을 전할 수 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엘리베이터를 믿고 있기에 내 몸을 엘리베이터에 믿고 맡긴다. 그럼 엘리베이터가 내가 원하는 목적지에 데려다준다. 만약 엘리베이터가 나를 태우는 순간 기계적 오작동이 일어나 갑자기 추락할 수 있다는 불신감에 사로잡히면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고 걸어서 계단을 내려가거나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밟고 지나가는 계단이 발을 딛는 순간 힘에 못 이겨 밑으로 주저앉는다고 생각하면 계단 조차도 이용하지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 걱정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은 내 생각을 노트북 키보드로 입력해서 컴퓨터 하드 디스크 안에 저장 장치에 입력하고 있다. 갑자기 이렇게 쓴 글이 어딘가에 저장되지 않고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의심이 드는 순간 힘들게 쓴 글이 들어 있는 파일을 찾을 수 없거나 열리지 않을 수 있다는 불신감이 생길 것이다. 내 생각을 정리한 이 글이 안전하게 컴퓨터 저장 장치에 안전하게 잘 입력되어 정리되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앞서지 않는 이상 나는 글을 쓰는 행위를 하지 못할 것이다. 한 문장을 쓴 다음 그 문장에 제대로 저장되어 있는지를 확인해보는 절차를 거치지 않는 이상 다음 문장을 마음 편하게 쓰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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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있어야 ‘발걸음’이 달라진다:

믿지 않으면 삶의 에너지도 안 생긴다.


믿지 않고 사람은 하루라도 살 수 없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고층 아파트가 꽤 오랫동안 무너지지 않고 버텨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난 한 순간도 편안하게 생활할 수 없다. 보이는 대로 믿지 않고 믿는 대로 보인다. 내가 옳다고 믿는 신념체계에 따라 세상은 나에게 다가와 믿음의 끈으로 연결된다. 내가 옳다고 믿는 신념체계를 뒷받침해주는 키워드대로 믿고 행동하면 그런 삶이 펼쳐진다. 모든 믿음을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 믿음은 드러낼 수 없는 암묵적 신념체계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왜 그렇게 좋으냐고 물어봐도 뾰족한 대답을 들을 수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이나 칼라를 지닌 사람에게는 한눈에 반한다. 그 감정은 자신이 옮다고 믿는 신념을 그대로 몸으로 지니고 있다는 느낌이 와서다. 믿음을 증명하는 방법은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행동하기 위해서 믿는 게 아니라 믿는 대로 행동한다. 대장금 드라마에 장금이가 소고기 뭇국을 먹어보고 소고기 맛이 난다고 하자, 어떻게 그런 맛을 아냐고 물어봤다. 장금이 대답은 소고기 맛이 나서 소고기 국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소고기 국임을 오랜 미각체험을 통해 혀가 알아챘을 뿐이다. 감각적으로 받아들인 앎은 설명 대상이 아니다. 그저 믿음으로 확신을 가질 뿐이다. 나는 내가 믿는 대로 행동한다. 믿음을 증명하는 방법은 설명이 아니라 행동이다. 믿지 않으면 행동이나 실천으로 연결되는 고리도 그만큼 약해진다. 믿음의 강도가 행동으로 옮겨지는 연결고리의 강도를 결정한다.


믿음은 행동으로 연결되지만 거꾸로 그렇게 행동하면 믿음이 강화된다. 행동을 촉진하는 믿음이 거꾸로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만드는 선순환 작용을 부른다.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묻는 사람에게 행동하는 사람은 입이 아니라 몸으로 대답해줄 수 있을 뿐이다. 언어적 설명은 믿음의 일면을 드러낼 뿐이다. 운동이 몸에 좋다는 믿음을 아무리 설명해도 믿지 않는다. 운동으로 몸이 달라진 변화를 몸으로 보여줄 때 운동이 좋다는 믿음은 자연스럽게 설득된다. 내 삶의 에너지는 원천은 열정이다.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열정적으로 행동할 뿐이다. 열정이 식으면 삶도 지루해진다고 믿는다. 혁신은 타성과 통념에 시비를 걸고 당연함을 문제 삼아 어제와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삶의 활력소라고 믿는다. 혁신적인 생각과 행동은 대단한 일상의 일탈이 아니라 진부함을 거부하고 익숙한 곳을 벗어나 낯선 마주침을 즐기는 일상적 삶의 한 가지 방법이다. 도전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나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확장-심화시켜주는 각성제다. 내 능력의 한계를 아는 방법은 몸으로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면 몸이 한계에 도전해보니까 체험적으로 깨닫게 된 나의 신념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신뢰는 내가 생각하는 인간관계를 튼실하게 만들어주는 믿음의 접착제라고 믿는다. 신뢰가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진다. 그것도 순식간에 추락하고 나락으로 빠져들어 다시 일어서 회복하기 어렵다. 그동안의 인간관계를 통해서 깨달은 체험적 각성이 신뢰의 중요성을 믿게 만든다. 실례로 인간관계를 망가뜨리기보다 신뢰로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믿음의 끈을 더욱 탄탄하게 만들어 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성공한 사람이 행복하기보다 행복한 사람이 성공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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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과 혁신, 도전과 신뢰, 이런 내 삶의 핵심가치는 궁극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나만의 가치관이자 행동규범이다. 거창한 꿈과 원대한 비전을 설정하고 추구하는 것도 나름 의미 있는 삶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의 현재만이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감각적 순간이다. 지금 이곳에서 지금 이 순간을 가장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가는 소중한 순간으로 만들어가는 열정과 혁신, 도전과 신뢰, 그리고 행복이라는 키워드가 내 삶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내가 남과 다른 삶을 살아가면서 나다움을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믿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키워드대로 믿고 행동한다. 믿고 행동하는 대로 내 삶도 바뀐다. 내가 옳다고 믿는 열정과 혁신 스토리가 생기고, 도전과 신뢰 스토리를 매개로 내 삶을 반추해보고, 행복하게 산 스토리로 내 삶을 만들어갈 때 삶은 나만의 특유한 색깔과 스타일이 생기기 시작한다. 믿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니까 삶도 더불어서 바뀐다. 믿지 않으면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가려는 의지도 실종되고 삶을 뜨겁게 불태울 에너지도 고갈된다. 나를 사랑하고 믿으며 생기는 자신감이 어제와 다른 나로 거듭나게 만드는 헌신적 참여의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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