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남’이 없는 ‘만남’은 ‘남남’이다

온라인 수업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

‘맛남’이 없는 ‘만남’은 ‘남남’이다

만나지 않고 가르치고 배우는 맛을 느낄 수 있을까?

온라인 수업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


언컨택트(untact) 시대, 컨택(contact)할 수 없는 교육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컨택할 수 없으면 배우고 가르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맥락성, 즉 콘텍스트(context)가 실종되면 콘텐츠(content)는 본래 의도대로 잘 전달될 수 있을까? 콘텍스트(context) 없는 텍스트(text)는 관객 없이 진행되는 콘서트와 뭐가 다를까? 이런 의문을 품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온라인 강의를 당분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앞으로 어떤 교육을 지향하고 반대로 최소한 이런 교육은 지양해야 되는지 고민하고 싶은 생각에 짧은 글을 쓰게 되었다. 해가 넘어가는 저녁노을을 검색해서 아무리 바라본 들 직접 눈앞에서 그 광경을 목격하며 전율하는 감동을 고스란히 느낄 수 없다. 2012년 사하라 사막 울트라 마라톤에 도전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경이로운 체험은 일몰 장면이다. 사막에 어둠이 어슴푸레하게 깔리면서 서산에 걸쳐서 서서히 자신을 숨겨가는 일몰 장면은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자연의 선물이었다. 더욱 경이로운 기적의 감동은 일몰과 동시에 월출이 이루어지면서 그 사이에 내가 있을 때 느끼는 자연의 위대한 경관은 콘텍스트 없이 텍스트만으로 체험하지 못하는 감동적인 추억이다. TV나 다른 디지털 매체를 매개로 그 광경을 지켜봐도 여전히 감동적이지만 사하라 사막이라는 콘텍스트에 내 몸이 직접 컨택하지 않고는 전율한 감동을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없다. 사하라 사막 관련 책을 아무리 읽거나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를 아무리 눈으로 봐도 진정한 감동은 콘텍스트 속에 내가 직접 빠져들어 온몸이 감각하는 체험적 자극을 능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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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을 파악하지 못하면 맥을 추지 못한다


집(house)이 건축적인 요소가 강해서 물리적 공간을 강조하는 데 비해 가정(home)은 가족 구성원 간 오고 가는 끈끈한 인간적 정감의 터전을 강조한다. 집은 많지만 가정이 많지 않은 이유를 두 가 개념적 차이점에 비추어 생각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집은 물리적 공간으로서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지만 그 속에서 사람과 사람이 사랑을 만나 따뜻한 삶의 꽃을 피우는 가정은 드물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공간(space)에 장소(place)의 차이점도 생각해볼 수 있다. 공간은 일정한 위치에서 물리적으로 차지하고 있어서 가시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일정한 위치를 말하는 데 반해 장소는 그 공간에서 신체적 접촉을 전제하면서 보다 인간적인 감정이 오고 가는 장터와 같은 곳이다. 장소는 거기서 사람이 주고받은 기억이나 경험, 가치관이나 추억이 생각나는 곳이다. 이런 점에서 디지털 접속으로 생기는 사이버 공간(cyber space)은 오프라인 공간이 온라인으로 옮겨졌을 뿐 기본적인 개념적 의미는 그대로 갖고 있다. 사이버 공간에 토론방을 개설하고 거기에 과제를 출제하면 학생들이 주어진 기간 내에 토론 자료나 과제물을 올려놓고, 토론 이슈에 대해 학생들이 개별적인 댓글을 달면서 토론을 이어간다. 텍스트로 표현된 문장에 그 글을 쓰기가 고민했던 흔적이나 글을 쓰면서 고뇌하는 몸부림은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없다. 다만 짐작할 뿐이다. 반면에 오프라인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은 말하는 본인은 물론 토론 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과 몸짓, 자세와 태도를 관찰하면서 내가 무엇을 말할지를 깊이 생각하면서 논리를 가다듬는다. 말하는 입보다 말하고 있는 그 사람의 몸이 말의 진실과 진정성을 드러내 준다. 대면적 접촉을 말할 수 없는 촉감과 감촉을 드높여 준다. 사이버 공간에서 바라보는 것과 오프라인 공간에 직접 가서 몸으로 참가하는 것 사이에는 좁히기 어려운 차이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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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컨택트(uncontact) 수업은 보면서 배우는 게 어렵다. 교육은 스승의 직접 전수를 통해서 깨닫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가르치는 모습과 장면에서 스승이 보여주는 모든 것을 통해서 함께 느끼고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온라인 수업은 스승의 가르치는 일면을 보여줄 뿐 스승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모두 관찰할 수 없다. 스승뿐만 아니라 발표하는 사람의 표정과 자세, 발표하면서 보여주는 몸짓과 다른 학생과 상호작용하는 장면에 반응하는 동작을 함께 지켜볼 수 없다. 오로지 발표 장면만 화상으로 비춰 보일 뿐이다. 보고 있지만 눈으로 볼뿐 머리로 깊이 생각하거나 물음을 품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질문을 던지기 어려운 국면이 연속해서 지나간다. 타자의 모습이 몸의 움직임으로 보이지 않고 하나의 이미지로 나에게 보일 뿐이다. 이미지는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미지의 세계를 상상력으로 자극할 때도 있다. 하지만 보이는 이미지만으로 학습자의 상상력을 촉발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 무언의 행동이지만 그 행동도 다른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한 예비 동작이거나 바탕에 깔린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의미 있는 동작일 수 있기 때문이다. 행동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모든 움직임이 바로 동작이다. 가르치는 사람이든 배우는 사람이든 모든 사람이 보여주는 무언의 동작을 특정 콘텍스트에 읽어내는 능력이 바로 문맥을 파악하는 능력이다. 문맥을 읽어내지 못하면 맥을 못 추고 문맥을 잘 읽어내면 맥을 짚어낼 수 있다. 진짜 가르침은 가르치지 않고 가르치는 데 있다. 수업이 일어나는 오프라인 장소에서 직접 가서 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장면의 전체적인 맥락과 느낌이 몸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걸 사이버 공간에서 바라보면 모든 장면을 한꺼번에 동시에 다 비춰줄 수 없기 때문에 포착된 장면으로 전체 수업이 진행되는 상황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가서 보면 쉽게 와 닿는 내용도 온라인 화상이나 영상으로 보면 몸으로 와 닿지 않는 이유는 맥락성이 없어지고 텍스트나 콘텐츠가 이미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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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은 효율적이어야 하지만 사색은 비효율적이어야 한다


오프라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교육 장면은 저마 마의 이유와 사연과 배경을 숨기고 있다. 그것의 진정성은 그 상황에 직접 가담한 사람이 몸으로 느낄 뿐이다. 온라인으로 그걸 모두 포착해서 실시간으로 보여주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냥 거기에서 웃는 학생은 없고 갑자기 말하던 동작을 멈추고 침묵을 유도하는 교수도 그냥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앞뒤 맥락을 파악해보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다 있다. 쓸모없는 데 쓸모 있다는 장자(莊子) 인간세편(人間世篇)에 나오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의 원리와 비슷하다. 온라인 수업은 가르치지 않고 가르칠 수 없다. 잠시라도 침묵이 흐르면 참지 못한다. 존 케이지가 4분 33초라는 악보 없는 악보를 세계 최초로 작곡하고 4분 33초 동안 아무 연주도 안 하는 사이, 침묵 속을 가르는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들어보라는 시도가 과연 온라인 수업에서 먹힐 수 있을까. 언컨택트(uncontact)를 전제로 접속되어 만나는 디지털 만남일수록 침묵의 시간이 흐를수록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말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 수업이 전개되는 상황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그때마다 들리는 소음도 다 다를 것이다. 주목하지 않으면 관심 밖의 모든 소리는 소음이다. 하지만 소음도 관심을 갖고 들으면 한 편의 멋진 악보와 함께 들리는 음악이 될 수 있다.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지만 모두가 저마다의 음악을 듣고 다른 감상을 하며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온라인 공간에서 보여주는 장면은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변주될 수 없다. 하나의 표준안이 제시되고 그걸 해석하는 방식상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온라인상의 침묵은 기술적 문제나 사람의 실수로 인정된다. 가르치는 행위는 가르치는 행위를 통해서 증명될 뿐이다. 제한된 시간과 한정된 공간, 그리고 주제 영역을 정해진 학습자가 통달하지 않으면 온라인 수업은 비효율적으로 취급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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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 효율은 높지만 효과가 의심스러울 경우 무엇을 위한 효율인지 의문의 화살을 던져 낱낱이 파헤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효율이나 능률 복음이 속도 담론과 쌍을 이루고 교육의 진정한 방향성과 본질을 훼손하는 장본인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효율적인 정보검색도 필요하지만 비효율적인 사색의 시간도 필요하다. 검색은 효율을 추구해야 되지만 검색된 정보의 의미를 파악하고 정리하는 사색은 효율과 무관해야 검색된 정보가 다양한 검증과정을 거쳐 나만의 독특한 사유체계로 정립된다. 코로나 이후(AC: After Corona) 비대면 수업은 생존의 필수요건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온라인 수업을 계속할 경우 사이버대학과 차별화되지 않는다면 등록금이 비싼 오프라인 대학의 존재 이유는 없어질 위기에 처할 것이다. 대학에서 배움을 매개로 만나는 의미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학습의 효율성을 쫓다가 깨달음의 즐거움으로 연대하는 학습공동체는 꿈으로 끝날 수 있다. 배우고 익히는 과정은 주제와 상황, 그리고 학습 주체의 문제의식과 열정에 따라서 시시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 수영을 배우는 온라인 클래스에서는 표준화된 수업계획안 하나와 진행자가 정형화된 방식으로 충족될 수 있다. 하지만 파도가 몰아치는 바닷가에서 수영을 배운다면 시시각각 다가오는 파도의 높이와 세기, 바다의 지형과 육지가 만나는 접점에서 일으키는 지정학적 차이, 거기에 뛰어드는 사람의 심리적 안정 상태와 자세에 따라 천차만별의 다양한 수영 전개 방식이 필요하다. 콘텍스트에 따라서 동일한 콘텐츠도 전혀 다른 텍스트로 재탄생시키지 않으면 무의미하고 무용지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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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못하지만 보려면 세심한 배려와 깊은 공감이 필요하다


연세대학교 김진영 교수는 '보고 배울 수 없는 시대'의 교수라는 칼럼에서 '보는데 보지 못하는' 시대에 '보지 못해도 보는' 강의가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실존적인 질문을 던져 놓고 치열한 고뇌를 한다고 했다. ‘보는데 보지 못하는’ 것은 온라인으로 강의를 보는데 강의를 하는 가르치는 사람의 강연 준비과정에서 겪는 고뇌나, 강의를 하면서 보여주는 스승의 미묘한 심경변화와 작은 몸짓과 동작에 담긴 안타까운 심정이나 진한 아쉬움 또는 대단한 만족감이나 희열감을 일일이 다 볼 수 없다는 의미다. 한 마디로 맥락은 보지 못하고 맥락 속에서 드러난 콘텐츠나 텍스트만 본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보지 못해도 보는’ 것은 언컨택트 상황이라 직접 볼 수는 없지만 머리서나마 서로의 고대하나는 심정을 헤아려 보는 것이다. 과제를 하면서 겪었을 힘든 상황이나 말 못 할 사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제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밤을 낮 삼아 해내는 학생들의 아픔을 공감해보는 것이다. ‘보지 못해도 보기’ 위해서는 상대 어떤 콘텍스트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지를 미루어 짐작해보고 내가 그 상황이라면 어떻게 극복했을지를 상상해보아야 한다. 강의를 하는 사람은 강의를 듣는 사람의 힘들고 어려운 점을 눈여겨봐야 어떤 시점에서 보살펴주면 마음에 쌓여 있는 고뇌를 조금이나마 해소해줄 수 있다.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를 일일이 피드백을 주면서 그 글 속에 담긴 학생들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결코 쉽지 않은 상황에서 자기 방식으로 처절하게 고민했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그렇지 마지못해 해내는 과제 역시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그 속에도 그 과제를 했던 학생은 보지 못해도 학생의 마음은 읽을 수 있다. 역으로 강의를 듣는 사람은 강의를 준비하는 사람이 다양한 준비를 하면서 겪었을 고충에 대해 상상력을 동원해서 공감하는 자세와 노력이 가르치는 사람에게 전달될 때 ‘보지 못해도 보는’ 놀라운 감동이 교감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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