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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제를 해결하는 해답은 없어도
해법은 탐색할 수 있다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북토크 콘서트를 다녀와서

전대미문의 난제를 ‘해결’하는 ‘해답’은 없어도 ‘해법’은 탐색할 수 있다


코로나 19가 던져준 충격과 여파는 예측불허다. 어떤 변화가 우리를 급습할지 불확실하기에 불안하고 참을 수 없는 불편함이 일상을 짓누른다. 그런데 누군가가 코로나 이후 세상은 이렇게 바뀔 것이라고 해답을 내놓는다. 분야별 전문가가 저마다의 식견과 안목으로 미래 사회의 변화하는 모습을 제시한다. 누구도 걸어가지 않은 길,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래를 위해 단정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그렇게 준비하지 않으면 더 심각한 위기가 반복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해는 가지만 그런 대안과 해답이 과연 다가오는 미래를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할 최선의 방책인지는 의문스럽다. 참고는 하되 확신은 금물이다. 다양한 가능성의 문을 열어놓고 머리를 맞대고 고뇌하며 다양한 시나리오에 따라 몸으로 부딪히며 하나의 해답보다 다양한 해법을 탐색해보는 자세가 중요하다. 개연성은 높지만 확실성은 부실할 수밖에 없다. 복잡한 사회변화 모습을 한 사람의 전문성으로 예단하기에는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난국일수록 사이비 전문가가 들끓는다. 우리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위기는 눈앞으로 위기가 아니라 이런 위기를 저마다의 기회로 해석하는 사이비 전문가의 시각이 될 수도 있다.



오랜만에 참석한 북 토크에서 논의했던 핵심 이슈 중의 하나다. 코로나 19로 인해 사회적 거리 두기 때문에 망설여졌던 북 토크 콘서트에 가서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생각과 깨우침을 통해 숙고하며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은 말과 글이 삶과 한 박자로 돌아가는 사람이다. 잘하는 말을 글로 녹여내기도 어렵고 깊은 울림의 글을 그대로 말로 전달하기도 쉽지 않다. 더욱더 말과 글과 삶이 한 박자로 맞물려 돌아가는 사람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올바른 말을 하면서 올바르지 못한 삶을 살아가거나 깨달음을 주는 글을 쓰면서도 실제 말은 전혀 딴판인 사람도 많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말과 글대로 살아가지 않는, 즉 앎과 함과 삶이 따로 노는 사람이다. 책을 쓰지 않았지만 늘 좋은 삶을 살아가면서 그 삶을 고스란히 말로 전하려는 진정성있는 사람이 내 주변에 많다. 말한대로 살아가거나 산대로 말하는 사람이다. 고군분투했던 삶을 녹여 글로 표현하고 그대로 다시 살아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도 만나면 기쁨을 주고받는 사람이다. 살아온대로 글을 쓰고 쓴 대로 살아가려고 애간장을 녹이는 사람의 진심어린 자세가 몸에 배여 있다. 굳이 말을 들어보지 않아도 몸으로 아우라가 느껴지거나 진솔한 삶의 무늬가 얼룩 속에서 드러나보인다. 오늘은 책으로 먼저 만났던 그런 두 사람을 북토크 콘서트에서 만나 행복했던 하루였다.


《어머니와 나》와 《단단한 영어공부》를 김성우 작가님과 《공부 공부》와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책을 쓴 엄기호 저자가 함께 쓴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를 토대로 말과 앎과 삶과 리터러시를 주제로 깊이 있는 발표와 토론을 들어본 소중한 시간이었다. 말이 삶과 분리되면서 소통을 위한 도구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성찰하는 기능을 상실하고 말을 통해 인식과 관심을 같이하는 사람과의 연대성을 상실해가는 위기가 바로 리터러시의 위기라고 생각하는 김성우 작가의 모두 발표로 시작되었다. 지금 우리 시대의 위기는 기쁨의 위기다. 공저자인 엄기호 작가님은 엄기호의 《공부 공부》에서 이렇게 덧붙인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서로 기쁜 일이어야 한다. 기쁨을 주고받는 과정이어야 하며, 서로의 성장을 고양하며 기뻐하는 행위여야 한다. 내가 가르치는 이의 성장을 보는 것만큼 기쁜 일이 있을까? 가르치는 이에게 나의 성장을 보여주는 것만큼 기쁜 일이 또 있을까? 이런 기쁨을 주고받는 게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 사랑이겠는가!”(22-23쪽), 우리가 공부를 하는 목적은 깨달음의 기쁨을 만끽하며 내가 성장한다는 경이로운 사실을 몸으로 느끼는 데 있다. 말을 통해 소통하고 서로의 깨달음을 공유하며 소통하는 기쁨이 사라졌다. 세대 간 단절은 물론 가까이 있는 사람조차 말이 통하지 않으니 소통을 통한 연대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이어 엄기호 작가는 공동체 내부에서 구전되는 근거를 참고하는 말의 자식과 경계를 넘어 타자의 세계까지도 근거로 삼는 글의 자식 간에 존재하는 삶의 리터러시는 현격하다고 한다. 이미 할 말을 다 한 사람에게 글로 쓰라는 요구는 엄청난 폭력일 수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말과 글보다 이미지나 영상을 근간으로 자신의 생각을 편집하고 전달하는 세대에게 말과 글로 소통하는 문제는 또 다른 리터러시의 장벽이 될 수 있다. 리터러시는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를 이해하고 내가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방식인데 타자를 나의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재단할 경우 리터러시 격차는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진정한 리터러시는 사람의 얼룩과 무늬를 읽어내고 반응하는 능력이다. “나는 리터러시란 응답할 줄 아는 역량이라고 생각한다...응답과 응답이 끊이지 않고 순환함으로써 서로 배움을 부추기고 발생하게 하는 것, 이게 새로운 배움의 방법론이자 조사연구의 방법론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292쪽). 김성우와 엄기호의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에 나오는 말이다. 응답(response)하는 능력(ability)이 곧 책임(responsibility) 지는 능력이다.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에 응답한다는 것은 부담감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고 반응하는 책임감의 문제다.



타자의 아픔에 반응하려면 평상시에 가까운 거리에서 잘 살펴봐야 한다. 살펴봐야 타자가 겪고 있는 아픔을 사랑할 수 있다. 살피지 않으면 보살필 수 없다. 보살핌은 내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미리 그 아픔을 경험해보고 연상해보는 것이다. 그 사람이 토해내는 무수한 말을 주어진 맥락에서 어떤 이미지를 지니는지를 헤아려보고 되짚어보면서 체중을 실어 반응해야 비로소 타자의 아우성을 들을 수 있다. 리터러시 문제는 기술과 테크닉의 문제가 아니라 자세와 태도의 문제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향해 마음의 문을 열고 내 생각도 틀릴 수 있다는 전제하에 타자의 목소리를 그 사람 입장이 되어 들어봐야 한다. “내가 외롭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은 소리를 지르는 것을 넘어서 비로소 말을 하게 된다. 내 ‘소리’를 말로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있을 때 사람은 ‘그’에게 말을 한다. 그가 내 말을 들어줄 것이라는 ‘기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기대가 있을 때 말하는 사람은 그가 ‘응답’할 수 있는 말을 하려고 한다. 응답을 요청하기에 응답 가능한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응답을 요청한다는 것은 응답하려는 상대를 인식하는 것이다”(126쪽).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소리를 말로 들을 수 있는 상태가 비로소 응답하는 상태다. 고통이 극에 달해 의미 없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그 사람의 진심 어린 말로 알아들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고 판단될 때 비로소 타자는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신의 고통을 들어줄 상대에게 기대를 갖고 기대기 시작한다. 


리터러시 문제는 다른 세계를 경험한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아갈 때 발생한다. 말과 글, 그리고 이미지나 영상을 보고 소통하면서 스스로를 성찰하는 연대가 구축될 때 리터러시 격차는 점차 좁혀질 수 있다. 문제는 같은 연대 안에서도 살아가는 경험의 무대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소통은 언제나 불통 장벽과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더 나은 대안을 찾아 나선다. 너와 나의 다름은 다양한 차이로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 경험의 차이로 발생하는 인식과 관심의 차이, 세대 차이로 발생하는 가치관과 직업관의 다름, 동일한 단어에 부여된 의미상의 차이와 그것을 경험한 맥락적 차이로 인해 소통은 장애물에 부딪혀 불통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삶의 리터러시, 삶을 위한 리터러시란 좋은 삶을 위한 리터러시입니다. ‘옳음’이라는 이름으로 타자의 삶을 억압하는 리터러시가 아니에요. ‘좋은 삶’을 생각하도록 모두를 초대하는 것이 삶의 리터러시입니다”(277쪽). 김성우와 엄기호의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에 나오는 말이다. 끼리끼리만 통하는 리터러시 언어와 문맥으로 폐쇄적 공동체를 만드는 게 아니라 다른 경험과 배경을 갖고 있어도 다름을 다양성의 언어로 재해석해냄으로써 함께 만들어가는 창조의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나와 다른 세계에 살지만 내가 가질 수 없는 또 다른 가능성을 품고 있을 때 나에게는 소통의 적이 아니라 나를 다른 세계로 이끌어주는 소통의 리더로 변신할 수 있다. 다름으로 긴장하고 충돌할 수 있지만 오히려 그것이 창조적 융합의 꽃을 피우는 원동력으로 작용할 때 더불어 기쁨을 나누며 좋은 삶을 살아가는 희망의 연대로 함께 결속될 수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깨달음의 즐거움과 기쁨을 나누며 지금보다 좋은 삶을 함께 만들어가는 리터러시 개척자들이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존재에 대해 고마워한다. 나를 기쁘게 해 줬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고마워하고, 그 고마움이 그를 또 기쁘게 한다. 이에 반해 재미는 나를 재밌게 하는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우리는 흔히 나를 재밌게 하는 사람에게 “더 없냐?”며 더 재밌는 것을 요구한다. 기쁨이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이라면 재미는 관계를 소비한다“(180-181쪽).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관계를 지속시키는 기쁨을 주고받으려면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공부하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 공부를 멈추는 순간 세상은 마침표의 사막으로 변신한다. 어떤 미래가 다가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과거의 경험으로 미래를 예단하기에 앞서 부단히 갈고닦은 체험적 각성으로 스스로를 반성하고 성찰함은 물론 함께 공부하며 깨닫는 기쁨을 즐겨야 한다. 그것만이 리터러시 격차를 줄이고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배움과 익힘의 연대망을 구축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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