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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과 맥락을 구분하지 못하면
'맥'을 추지 못한다!

‘깊이’ 읽어도 저자의 ‘깊이’가 오히려 ‘기피’ 대상이 되는 경우

상황과 맥락을 구분하지 못하면 맥을 추지 못한다!

깊이’ 읽어도 저자의 깊이가 오히려 기피’ 대상이 되는 경우



대학원 수업 참고 교재로 두 분의 교수님이 쓰신 책을 주말에 읽다가 한국말도 이렇게 어렵게 쓸 수 있구나 하고 개탄을 금지 못했다. 어렵게 썼다기보다 이해하기 못하게 혼돈스럽게 썼다. 한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가 상황과 맥락, 그리고 경험과 학습을 통해 지식을 창조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전문가도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 전후 관계없이 갑자기 등장하는가 하면 철학자가 뜬금없이 주장한 난해한 개념이 부각되기도 한다. 다시 읽어봐도 여전히 번역체 문장과 개념어가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빙빙 돌다 산산이 흩어진다. 분명 우리말이지만 우리말 같지 않고 힌디어나 아랍어, 그리스어나 독일어 같기도 하다. 역시 대학교수의 정의가 “쉬운 이야기를 어렵게 하는 사람”이라는 정의와 정확히 일치하는 책 내용이다. 어떤 문장은 탁월한 통찰을 촌철살인의 메시지로 녹여내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지만 그런 문장은 눈을 씻고 찾아야 비로소 한두 가지 건질 정도다. 나머지 글은 챕터별로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대강 짐작은 가지만 끝까지 읽고 나면 무슨 내용을 전하려고 하는지 심히 의심스러울 정도다. 이력을 보니 해당 분야의 연구논문도 몇 편 발표했다. 학술적 이력도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글은 너무 학술적이어서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이 몇 개 되지 않는다. 언어와 생각이 따로 논다. 생각한 대로 언어가 적확하게 자리를 잡고 논리를 풀어가지 못하고 변방을 돌고 돌아서 목적지와 전혀 다른 곳으로 빠져버린다.



대학교수가 쓴 책의 서문에 보면 “자료 정리에 도움을 준 조교 A양에게 감사한다”는 말이 자 주 등장한다. 그 말의 진의는 조교 A양이 책을 다 썼다는 의미라고 한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조교들과 책을 같이 쓰면 무조건 공동저자로 표지에 표기해준다. 아마 이 책은 조교가 쓴 책이 아닐까 할 정도로 의심스러울 정도로 난해한 문장 투성이다. 번역을 해서 그대로 옮긴 문구도 아닌데 왜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울까?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한 내용을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설명하면 횡설수설하거나 복잡하게 전해진다.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한 일이나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복잡한 일이다. 그래서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평범한 일이나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은 비범한 일이다. 단순함은 치열함의 결과이고, 복잡함은 나태함의 산물이다. 이론이나 현상을 분명하게 이해한 사람은 비전문가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한다, 아니 의미를 심장에 꽂아 의미심장하게 설득한다. 이해가 부족한 사람은 해당 분야의 이론적 지식도 천박할 뿐만 아니라 해당 분야를 직접 해본 경험이 미천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설명해낼 재간이 없다. 언어가 삶과 따로 논다. 그러니 남의 언어로 내 삶을 설명하자니 황설수설하고 납득이 가지 않는다. 아니면 내 삶의 특이성을 포착할 언어를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들의 시종일관 펼치는 논리적 주장에 담긴 메시지나 언어를 보면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게 맞다. 이들은 책의 주장대로 살아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삶을 나만의 철학과 열정과 혼이 스며든 언어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개론서를 넘어서 전문서다. 개론서는 한 분야의 전공 전반을 초보자에게 이해하기 쉽게 소개하는 전공서적이다. 하지만 개론서야말로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책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해당 분야의 전공을 나눠서 공부한 한 사람이 그 분야 전반을 꿰뚫은 통찰력을 갖고 전공분야를 관통하는 일관된 설명 체계를 자기 나름의 사유체계로 녹여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문서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읽는 책이다. 문제는 전문가가 읽어도 지나치게 소수의 학자들만 사용하는 전문적인 용어를 써서 전문적 깊이에 이르지는 못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데 있다. 전문용어는 전문서를 구성하는 핵심 개념이다. 그런 개념 없이 해당 분야의 전문성을 설명해내기는 어렵다. 다만 그런 개념어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실례를 들거나 본인의 경험적 깨우침이나 에피소드를 활용해서 설득하면 훨씬 더 와 닿을 수도 있다. 난해한 전문용어를 설명하는데 더 난해한 전문용어가 개념적으로 뒤엉킨다. 다른 사람이 사용한 개념에 나의 신념으로 녹여내지 않으면 관념의 파편으로 전락한다. 수많은 전문용어가 적절한 설명과 이해를 촉진하는 시도 없이 계속 반복되는 글을 읽으면 저자의 전문성이 지닌 깊이를 존경하지 않고 기피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한다. 깊이 읽지 않으면 기피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자기만 아는 깊이로 파고들어 다른 전문분야와 소통이 단절되어도 기피 대상이 된다.



이해가 가지 않아서 깊이 읽기를 반복해보았다. “읽기야말로 정신의 관절인 것이다”(33쪽).  강민혁의 《자기배려의 책 읽기》 중에 나오는 말을 실감했다. 난해한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읽다 보면 비로소 저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어렴풋하게나마 감히 잡힌다. 이런 사투 끝에 의미를 포착하는 과정에서 정신의 관절도 더욱 튼튼해진다는 말이다. 한번 읽고 쉽게 이해가 간다면 정신의 관절은 이전과 비교해서 더 튼튼해지지 않는다. 저자들의 의도가 독자들을 배려해서 쉬운 이야기도 어렵게 쓰려는 숨은 의도가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단순히 어려운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점도 한두 군데가 아니다. 두 가지 다른 개념을 비교하고 설명하지만 그 설명을 읽을수록 더욱 비참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도무지 두 개념 간 차이점은 좁혀지지 않고 더욱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으로 거리가 멀어진다. 무수히 많은 소제목이 등장하지만 소제목을 기대하고 이어지는 내용의 논리적 전개를 따라 가봐도 소제목을 압축된 핵심 메시지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앞의 내용과 중복되는 내용이 반복해서 등장하지만 그걸 풀어내는 논리적 주장은 상이하다, 같은 내용인데 다른 곳에서는 다른 주장을 반복하는 경우도 많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어떤 개념을 설명한다고 하면서 문장을 따라 가보면 동어반복인 경우가 많다. 상황을 설명하면서 “상황은 상황이다”로 끝을 맺거나 “상황은 맥락이다”로 정의하면서 상황과 맥락을 구분하지 못하고 맥을 못 추는 경우가 자주 발견된다.



책의 전반을 흐르는 핵심 메시지 중의 하나는 상황(situation)과 맥락(context)의 구분이다. 하지만 이 책은 두 가지 개념을 구분하지 못하고 맥을 추지 못한다. 상황과 맥락의 차이점을 아무리 이해하려고 눈을 부릅뜨고 찾아봐도 그 어디에도 없다. 개념적 차이점을 발견하는 곳을 힘겹게 찾아서 읽어보면 상황은 맥락이고 맥락은 상황이라고 정의한다. 저자 역시 문맥을 읽어내지 못하고 맥을 못 추고 있음이 틀림없다. 진맥(診脈)을 잘 못한 것이 역력하다. 상황은 누구에게나 똑 같이 보이는 환경(environment)이나 배경(surroundings)이다. 상황은 주변에 널려 있다. 똑같은 상황에 있어도 누군가에게는 그곳이 남다르게 와 닿거나 특이하게 기억된다. 그 상황에 나의 특별한 의미나 의도를 갖고 바라보기 때문이다. 아니면 말 못 할 사연이 그 상황에 숨어 있어서 특별한 애정의 눈길로 바라보기 때문에 상황은 그냥 저쪽에 나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상태가 아니라 깊은 관심과 해석의 대상으로 부각되는 정황(情況)이다. 상황은 화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이전에 도처에서 발견되는 무수한 광경(光景) 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맥락은 무수히 많은 상황 중에서 나의 주관적 관심과 애정의 손길로 포착되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정경(情景)이다. 상황은 나와 무관하게 저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관조와 관망의 대상이지만 맥락은 나와 깊은 관계가 있어서 관심과 관찰의 대상이다. 상황은 도처에 널려 있지만 맥락은 담벼락 너머에 존재하는 상황이어도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벼락처럼 달려오는 특별한 장소다. 똑같은 상황에 똑같은 시간에 머물렀지만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한 공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깊은 의미로 다가오는 색다른 장소다.



상황과 맥락의 차이는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에 나오는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이라는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스투디움은 작품을 보는 사람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공유되는 길들여진 감정이다. 이에 반해 푼크툼은 ‘작은 구멍’ 혹은 뾰족한 물체에 찔려 입은 부상‘이란 뜻으로,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끼는 감정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화살같이 날아와 폐부를 찌르는 낯선 자극이자 상처다. 익숙한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스투디움의 세계로 보인다. 달리 보이는 것 없이 늘 세상과 일상은 정상적으로 보이고 다가온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익숙했던 현상이 낯설게 느껴지고 당연했던 세계가 다르게 보이면서 불편한 문제의식을 잉태한다. 푼크툼의 세계로 보이게 만든 낯선 개념을 습득해서 그저 그렇게 보였던 세계가 다른 자극으로 나에게 각인되면서 깊은 앎의 상처가 만들어진다. 상황은 스투디움처럼 틀에 박힌 방식으로 바라보니 고리타분하게 다가온다. 길들여진 눈으로 바라보니 여기저기 상황이 널려 있지만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끌지 못한다. 반면에 맥락은 푼크툼처럼 동일한 상황이 나에게는 낯설게 다가온다. 이전과 다르게 보이면서 색다르게 나를 자극한다. 그 속에는 어제의 나와 다른 또 다른 자아가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나에게 깊은 상처를 준 다른 사람이 맥락 속에서 어제와 다른 해석을 기다리고 있다. 스투디움으로서의 상황이 푼크툼으로서 맥락으로 변신할 때 세상은 의미의 천국이자 배움의 텃밭으로 변신한다.



우리가 하는 공부는 결국 익숙한 스투디움으로서의 상황을 푼크툼으로서의 낯선 맥락으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이다. 학습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의미로 작용했던 객관적 배경으로서의 상황을 의미심장한 사랑과 의도성을 반영한 정경으로서의 맥락으로 바꾸는 과정이다. 도처에 산재하는 상황을 남다른 관심과 애정으로 눈길을 보내주고 손길을 내밀면 상황은 맥락으로 탈바꿈을 시도하면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모든 학습은 특정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맥락적 의미 창조를 일으키는 경험이다. 누구나 상황에서 저마다의 경험을 하지만 그런 경험이 모두 나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학습경험으로 바뀌지 않는다. 똑같은 경험을 똑같은 상황에서 했어도 그 경험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로 재해석되기 때문이다. 삶은 예측 불허의 상황에서 생각지도 못한 문제를 만나 특이한 경험을 어제와 다른 차이를 반복하면서 뜻밖의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다. 평온했던 환경이 갑작스러운 변수로 인해 예측 불허의 상황으로 돌변할 때 내가 거기서 어떤 반응을 보여주면서 대처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학습이 일어날 수 있다. 상황을 맥락으로 바꿔 경험하는 삶이야말로 관심과 애정으로 세상을 나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경이로운 기적의 연속이다. 오늘도 숱한 상황에 직면하면서도 거기서 얻은 체험적 통찰력으로 맥락을 재구성하는 탐색과 모험의 과정을 계속해야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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