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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려면
언어유희로 의미를 변주하라

언어유희로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6가지 방법

언어유희는 삶의 유희다


https://youtu.be/72TEbG-GC7U


언어유희를 통해 글을 쓰면 사람들은 말장난이라고 치부하거나 폄하한다. 언어유희는 단순히 말꼬리를 잡거나 말장난을 일삼는 게 아니다. 그런데 모든 창조는 난동을 일으키는 ‘작란(作亂)’, 즉 ‘장난’에서 유래된다는 사실을 과연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창조는 장난치면서 재미있게 노는 가운데 색다른 창조의 가능성이 우연히 충돌하거나 언어유희를 통해 만나는 무한한 조합놀이 속에서 색다른 창조의 신천지가 열린다. “창의성은 엄격한 지성에서 나오지 않고 재미있는 놀이 충동에서 나온다.” 심리학자 칼 융의 말이다. 언어유희는 우선 언어가 담고 있는 의미를 언어 조합이나 변형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반전의 매력을 던져주는 고차원의 개념 놀음이다. 언어유희로 사람들로 하여금 웃음을 터뜨리게 하거나 무릎을 치는 발상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기 위해서는 알고 있지만 무심코 지나쳤던 단어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반전의 묘미를 던져주어야 한다. 나아가 언어유희는 똑같은 표현이지만 운율을 맞추거나 배치나 조합을 다르게 함으로써 익숙했던 단어라고 할지라도 전혀 다르게 느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삶의 활력소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언어유희는 전체 맥락 속에서 한 개체가 지칭하는 상징적 의미를 포착, 촌철살인으로 발상의 전환을 유도하거나 아포리즘 형태의 압축과 절제미로 단순하지만 심오한 의미를 담아내는 고도의 창작 놀음이다. 언어유희의 진정한 매력은 생각지도 못한 허를 찔러 고개를 끄덕이게 하거나 언어적 의미 속에서 통쾌한 재미를 주는 데 있다. 언어유희는 삶의 유희다. 삶의 유희는 전쟁 같은 삶 속에서 치열한 사투 끝에 건져 올린 개념의 산물이다.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의 유희》는 서로 용납될 수 없는 두 원칙의 투쟁으로부터 승화되어 하나의 협주곡을 이루는 놀이를 넘어 영혼의 엑스타시를 건드리는 유희가 된다. 마찬가지로 일상의 숱한 난제에 직면해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언어유희도 참을 수 없는 놀이의 가벼움으로 인식되지 않고 견딜 수 없는 재미와 의미의 향연이 되기를 기대한다. 언어유희를 통해서 부각된 단어의 숨은 의미가 결국에는 심장에 꽂혀 의미심장하고 통렬한 깨달음의 비수로 부각될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의 유희》가 바둑의 검은 돌과 흰 돌만으로도 무궁무진한 게임으로 나타날 수 있는 승부의 유희를 즐기듯 유리알이 없이도 유희가 주는 천진난만한 즐거움에 빠질 수 있다. 경계를 넘나들며 재미있게 유희를 즐기듯 언어의 한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개념을 융합, 장난을 치면서 새로운 생각을 잉태하는 언어유희도 훌륭한 글쓰기의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다. 책을 읽으며 문득(聞得) 뇌리를 때린 깨달음의 망치를 만나듯 언어유희도 생각지도 못한 생각 고치를 깨뜨리는 생각의 망치가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문득(聞得)은 문(門) 앞에서 득도(得道)의 경지에 이르는 깨달음을 만난다는 뜻이. 언어유희를 보고 문득 깨닫는 계기가 많을수록 생각 근육도 단련되고 익숙한 듯 보이지만 재미와 의미가 동시에 전해지는 낯선 깨달음으로 다가올 것이다. 망치는 생각을 망치는 도구가 아니라 생각의 고치를 깨뜨리고 새로운 생각을 잉태하는 생각의 망치다. 언어유희는 생각의 고치 속에 갇혀 있던 언어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한계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일종의 생각 망치다.



강신주의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를 읽다가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블랑쇼가 말하는 “죽음으로 존재에 이른다”는 표현을 만났다. 강신주 박사에 따르면 이 말은 인간이 가진 모든 의미는 사진 속 꽃과도 같다는 싸늘한 통찰이라고 한다. 들판의 하늘거리는 꽃을 사진으로 찍는 순간 사진에 찍힌 꽃은 들판의 꽃과 다르다. 즉 사진에 찍힌 꽃은 실제 들판의 꽃이 죽어서 생긴 또 다른 존재다. 그런데 사진 속의 죽은 존재는 들판의 하늘거리는 꽃이 죽은 뒤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들판의 꽃을 죽임으로써 탄생한 사진 속의 꽃이 실제 들판의 꽃이 죽은 후에도 들판에 존재했던 꽃을 보존하고 있다. 사진이 실물이나 현상의 존재를 찍음으로써 존재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사진으로 존재를 죽이지만 실제 존재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살아남아 있으면서 본래 존재를 증명한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꽃이라는 언어를 통해 실제 들판에 존재하는 꽃을 묘사하지만 꽃을 언어로 묘사하는 순간 들판의 꽃은 살해된다. 어떤 언어를 사용해도 들판의 꽃을 드러내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꽃이 죽은 후에도 남는 것은 살아 있을 때 꽃을 묘사했던 언어다. 언어가 살아있는 꽃을 죽였지만 실제 꽃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꽃을 묘사한 언어는 살아 있다. “언어를 통해 우리는 존재를 살해하지만 그것을 통해 존재를 보존한다 “는 언어유희적 표현은 강렬한 깨달음으로 온몸을 전율케 하고도 남음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는 말로 받은 지적 충격으로 며칠 밤을 지새운 적이 있다. 세계의 한계를 규정하던 언어가 오히려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을 바깥에서 규정하는 순간 존재를 죽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통해 존재를 보존한다는 깨달음의 전율이 온몸을 파고들며 또 다른 지적 텃밭을 갈아엎어주고 있다.


언어유희는 기존 언어의 식상함을 죽이면서도 숨어있던 색다른 의미를 다시 부각하거나 창조한다. 첩경(捷徑)보다 역경(逆境)이 빠르다는 언어유희를 통해 첩경이 갖고 있는 부정적 의미를 새롭게 부각해 삶에 임하는 자세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언어유희는 그래서 삶의 유희다. 기존에 사용하는 언어를 어떤 방법으로 다르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내 생각과 행동을 반성해보고 이전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첩경으로 가려다 곤경(困境)에 처할 수도 있다. 역경을 극복하면 시간은 걸리지만 마침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경지(境地)에 이를 수 있다. 역경을 극복하는 순간도 가까이서 보면 곤경(困境)이지만 멀리서 보면 모두가 아름다운 풍경(風景)으로 다가온다. 첩경을 동경(憧憬)하거나 구경하는 사람보다 역경을 극복한 사람이 존경(尊敬) 받는다. 세상의 모든 절경(絶景)은 첩경으로 달려간 사람이 보여주는 풍경이 아니라 사경(死境)을 헤매다 마침내 역경을 뒤집어 경력으로 만든 사람이 보여주는 자기만의 독특한 정경(情景)이다. 언어유희는 언어를 바라보는 남다른 감각과 해당 언어와 관련된 체험적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합작품이다. 체험적 상상력이 부족할수록 언어는 형용사의 거품 속에서 안주하고 관념의 거품 속에서 부유한다. 언어유희는 삶과 언어의 일체화를 추구하면서 하찮은 일상 속에서도 철학적 사유를 통해 걸러진 진국 같은 진심이 담긴 말의 향연이다.

언어유희는 단어를 조합하고 의미를 어떤 방식으로 만드느냐에 따라 여섯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 단어를 뒤집어 생각의 물구나무를 서보는 방법이다. 역경을 뒤집으면 경력이 되거나 금지라는 말은 지금 하면 된다는 말과 같은 언어유희가 여기에 해당된다. 둘째, 시작 또는 끝나는 말이 같은 단어로 언어를 조합해서 리듬을 타고 읽으면서 의미도 기억하기 쉽게 만드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뒷길이나 옆길로 빠져 헤맬 때도 있었고 갓길이나 샛길로 가끔 샐 때도 있었네. 살길을 찾다 숨길조차 막히고 발길 닿는 데로 하염없이 걸었었지라는 말처럼 길이라는 말로 운율을 맞추면서도 새로운 의미가 다가올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이 두 번째 해당하는 언어유희다. 세 번째 언어유희는 단순히 단어의 물리적 운율을 맞추는 두 번째 방법과는 다르게 의미론적 운율, 라임을 맞추어 언어적 운율을 띠게 만드는 언어유희다. 예를 들면 스치면 인연이요 스미면 연인이 된다는 말이 라임을 맞춘, 의미론적 운율을 띠는 언어유희다. 체험 없는 개념은 관념이고, 개념 없는 체험은 위험하다는 말이나 지성 없는 야성은 야만이고, 야성 없는 지성은 지루하다는 말도 의미론적 운율을 맞춘 세 번째 언어유희에 해당된다.


네 번째 언어유희는 동음이의어, 즉 같은 한글이지만 다른 한자로 색다른 의미를 찾아보는 언어유희다. 예를 들면 ‘사고(事故)’쳐야 이전과 다른 ‘사고(思考)’가 생긴다는 말이나 꿈꾸는 ‘동안’은 ‘동안(童顔)’이다 같은 말이 여기에 해당된다. 다섯 번째 언어유희는 단어를 일정한 의미단위로 분할시켜 본래 단어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거나 색다른 의미를 부여해서 전혀 다른 느낌을 갖게 만드는 언어유희다. 예를 들면 ‘끄트머리’라는 말은 ‘끝’과 ‘머리’의 합성어라고 생각하거나 ‘의미심장’은 ‘의미’가 ‘심장’에 꽂힌다고 해석하는 경우다. 마지막은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개발한 데페이즈망 기법을 차용한 것이다. 데페이즈망은 익숙한 이미지의 낯선 조합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익숙한 ‘얼룩말’과 ‘사자’를 합성하면 낯선 ‘얼룩말’ 사자가 탄생하는 경우다. 익숙한 이미지의 낯선 조합처럼 익숙한 개념의 낯선 조합도 같은 효과를 가져온다. 예를 들면 우리가 익숙한 ‘지식’과 ‘산부인과의사’를 조합하면 낯선 ‘지식산부인과의사’가 탄생하는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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