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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다른 사람은
사용하는 언어부터 남다르다

당신의 미래를 바꾸고 싶으면 바꿔야 할 단 한 가지, 언어 사용 습관 

당신의 미래를 바꾸고 싶으면 바꿔야 할 단 한 가지, 언어 사용 습관을 바꿔라 


문자 - 김경후(1971~ )


다음 생애

있어도

없어도

지금 다 지워져도


나는

너의 문자

너의 모국어로 태어날 것이다


https://youtu.be/SfQ0-hnQF68


뭔가 다른 사람은 사용하는 언어부터 남다르다


언어를 정복하는 사람이 세상을 정복한다. 언제나 언어가 문제다. 언뜻 생각해보아도 언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사고는 거기서 멈추고 소통은 단절되며 공동체 의식도 형성되지 않는다. 아이디어가 아무리 많아도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해서 표현할 적확한 단어가 없으면 아이디어는 사장된다. 아이디어 현실로 구현시키려면 우선 단어부터 바꿔야 한다. 타이어는 갈아 끼우면서 언어는 왜 새로운 단어로 바꾸지 않는가. 단어가 없으면 그 순간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단절되고 자기 입장에서 쉽게 단정해버린다. 달리 표현할 단어가 부족하기 때문에 아마추어는 언어 동원력에서도 초보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도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언어의 차이다. 아마추어는 언어가 빈약하다. 언어가 빈약하니 생각도 미천하고 생각도 미천하니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의 폭도 좁다. 프로는 똑같은 문제에 직면해도 기존 생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빠른 판단과 더불어 다른 사람의 생각과 언어로 주어진 문제를 다르게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아마추어는 기존 생각과 언어로 주어진 문제 상황을 묘사해보고 마땅한 대안을 모색하지만 틀에 박힌 테두리를 벗어나기 어렵다. 아마추어는 지금 갖고 있는 생각과 언어로 주어진 상황을 묘사하고 대안이 무엇인지를 기술해보려고 노력한다. 프로는 지금의 생각과 언어만으로는 주어진 문제 상황을 묘사하고 대안의 이미지를 구상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간파한다. 그래서 바로 다르게 생각하기 위해 그 분야의 대가를 찾아가거나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다른 생각과의 부단한 접속을 시도한다. “성공이란 절묘한 언어 표현력에 달려있다. 그것은 종종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영감에서 나올 수도 있지만 대개는 적확한 말, 그러니까 한 단어도 바꿀 수 없는 문장, 즉 소리와 개념의 가장 효과적인 결혼으로 얻어진……간결하면서도 집중된, 잊을 수 없는 문장을 찾는 참을성 있는 탐구 끝에 얻어 진다”(132-133쪽). 매리언 울프의 《다시, 책으로》에 나오는 말이다. 자기만의 경험으로 깨달은 깨우침을 적확한 언어를 동원하여 촌철살인의 지혜로 표현할 때 평범한 사람과 구분되는 색다른 사람으로 부각된다.



정해진 길을 걸어가며 조화와 안정을 추구하는 평범한 사람은 선생님이 가르치는 말을 잘 듣고 그대로 생활에 옮기는 탁월한 재주를 갖고 있는 모범생이 많다. 하지만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어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데 에는 두렵고 능력도 없다. 반면에 뭔가 다른 생각으로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은 남들이 이미 걸어간 길을 뒤쫓아 가는 삶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아무도 걸어가지 않는 낯선 길을 가장 먼저 걸어가면서 불확실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탐험을 거듭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모험생의 길에 남다른 재미를 느끼고 의미를 발견한다. 이들은 이미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를 주로 구사하지 않는다. 이미 대가들이 정의한 개념을 나의 방식으로 재정의하면서 이전과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성공하는 사람은 생각도 파격적이고 혁신적일 뿐만 아니라 언어 사용도 창의적이다. 그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개념을 새롭게 창조하기도 하고 기존 개념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개념화 또는 재정의해서 자기 방식으로 정의하는데 재미와 의미를 느낀다. 성공하는 사람은 편안한 삶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지금 여기서의 안전한 삶의 경계를 넘어 낯선 곳으로 이주하거나 탈주하는 과정을 즐긴다. 생전 처음 마주치는 낯선 부딪침을 즐기며, 그런 경험을 이전과 다른 언어를 사용해서 창의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즐긴다. 성공하는 사람의 언어는 틀에 박혀 있지 않다.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는 깨달음의 언어를 사용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있는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이전과 다른 언어를 사용해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애를 쓴다. 성공하는 사람의 언어는 생각과 행동만 위험한 것이 아니고 언어를 사용해서 표현하는 방식도 위험하다. 왜냐하면 아직 사회적 합의를 거치지 않은 개념적 의미를 자신의 독특한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자유롭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언어는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재 정련되면서 특정 상황에서 특정한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는 특유한 개념으로 출산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철학자들, 예를 들면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나 니체의 아모르파티와 같은 개념어가 바로 특수한 상황에서 스스로 고뇌하는 가운데 창안해낸 독창적인 개념이다. 삶이 절박하지 않으면 언어도 간절하지 않다. 이전과 다른 상황에서 어제와 다른 삶을 살아가려고 애간장을 태우는 사람 앞에 미래는 다른 가능성을 잉태한다. 그 가능성의 잉태와 더불어 언어적 사용의 깊이와 넓이가 함께 변할 때 성공하는 사람의 삶은 색달라지기 시작한다. 뭔가 다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삶은 위험의 연속이다. 체험만 위험한 것이 아니라 위험한 모험을 표현할 언어 사용도 파격적이다. 틀을 깨고 판을 뒤흔든다. 여기에 동원되는 언어 사용도 낯설다. 개념의 조합방식도 특이할 뿐만 아니라 아예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서 자신의 생각을 담아낸다. 사유가 파격적이고 틀을 벗어나는 만큼 언어 사용도 범상하지 않고 틀밖에서 뜻밖의 의미를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비슷한 성취결과를 낳았지만 전혀 다르게 보이는 이유는 성취결과를 드러내 주는 언어 사용 방식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철판을 용접하며 회색빛 청춘을 보냈던 사람이 이질적 지식을 섞어서 새로운 지식으로 창조하는 지식융합이라는 말 대신이 지식 용접(knowledge welding)이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이질적 철판을 녹여 새로운 철판으로 만들어내듯 이질적 지식을 용접해서 새로운 지식을 만드는 지식의 연금술사를 생각하며 창조한 개념이 바로 지식 용접이다. 지식융합이라는 기존의 개념에 머물러 관념적인 사유를 즐기지 않고 뭔가 다른 사람은 지식 용접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 지식을 버무리고 뒤섞는 과정에 열정과 철학을 가미시키는 과정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타성과 상식에 사로잡힌 언어로 지은 집에는 평범한 모범생이 살아가고 탄성을 지르고 기존 상식에 도전하는 언어로 지은 집에는 이전과 다른 길을 걸어가는 모험생이 살아간다.    


성공하는 사람은 긍정의 언어를 사용한다. 긍정의 언어를 사용하면 긍정적인 내가 되고, 부정의 언어를 사용하면 매사에 부정적인 자세와 태도를 보여주는 내가 된다. 열정과 도전의 언어를 사용하면 열정적으로 도전하는 내가 되지만 좌절과 절망의 언어를 사용하면 언제나 좌절과 절망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희망과 가능성의 언어를 사용하면 생각지도 못했던 가능성의 세계가 활짝 열린다. 내가 어떤 언어로 내가 존재하는 집을 짓는지에 따라서 나의 생각과 행동도 바뀌고 삶도 바뀐다. 모범생은 지금까지 자신이 배운 언어로 주어진 현상을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그에게는 언어의 쓸모가 새롭게 생기지 않는다. 지금까지 배운 언어로도 우리 생각을 표현하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외국어 단어는 외우면서 모국어 단어는 공부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언어를 쓰던 방식대로 답습하기 때문에 언어의 쓸모도 변함이 없다. 반면에 모험생은 어제와 다른 방식으로 언어의 쓸모를 변화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언어의 쓸모를 바꾸는 노력만큼 나 역시 쓸모가 바뀌고 세상을 위한 쓰임새도 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범생은 소일하면서 오래전에 지은 언어의 집에서 안빈낙도하지만 모험생은 소임을 다하면서 어제와 다른 언어의 집을 끊임없이 증축하고 개정하며 변화를 꿈꾼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대로 나의 미래가 결정된다    


언어력은 왜 필요한가? 내가 아는 언어만큼 낯선 세상이 열린다. 좋은 경치를 봐도 그 장면이나 풍광을 표현할 언어가 부실하면 못 본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모르는 언어만큼 세상도 어둠에 갇혀 있다. 어둠의 세계에서 밖으로 나와 나에게 의미를 갖는 순간이 바로 언어를 매개로 세상이 표현될 때다. 내가 아는 언어만큼 세상도 밝은 세상으로 나와 나에게 의미 있는 세계로 열린다.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도 누군가에게는 매일 만나는 일상이지만 어제와 다르게 상상력을 품고 비상하는 이유는 어제와 다른 관심을 갖고 똑같은 대상도 다르게 표현하는 언어를 늘 배우기 때문이다. 세상이 틀에 박힌 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표현할 언어가 타성에 젖은 것이다. 작년에 사용했던 언어와 지금 언어 사용 수준이 비슷하다면 나는 1년 동안 영안실에 갇혀 산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배운 언어만큼 세상은 어제와 다르게 나에게 다가온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지 않고 기존 생각으로 반복해서 사고한다면 틀에 박힌 타성이나 관성만 양산할 뿐이다. 언어적 입력이 바뀌지 않으면 언어를 매개로 표현하는 출력도 바뀌지 않는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입력은 점차 줄어들고 출력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책을 읽지 않지만 책을 쓰려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고 유튜브를 비롯, 각종 미디어를 통해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자기주장을 펼치려는 사람의 숫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늘어나고 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지 않고 표현하는 양이 많아질수록 표현(expression)은 선물(presentation)이 되지 못하고 재현(representation)의 반복일 뿐이다. 나의 표현이 선물이 되려면 어제와 다른 언어로 다른 사유를 촉발시켜야 한다. 하지만 언어가 진부함에 젖을수록 어제와 동일한 생각에 갇혀 있는 현상을 동일하게 반복(representation)할 뿐이다. 입력의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출력이 많아질수록 기존 생각을 진부한 언어로 반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거나 기존 언어를 다르게 사용하려는 노력은 없는데 토해내는 말은 점차 많아지면 틀에 박힌 언어 사용 방식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


언어력을 키워야 하는 이유는 나의 언어로 세상을 바라보고 나만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표현하기 위해서다. 이 말을 뒤집으면 나의 언어가 없다면 남이 바라보고 남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표현한 방식에 종속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나의 언어는 내 생각의 고유함이나 독창성을 표현하는 무기다. 자기 언어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세상을 자기 방식으로 바라보고 생각한다. 책이 신간 코너 판매대에 진열되어 있다고 표현하는 사람은 신간은 누군가 써서 독자들에게 팔아야 하는 상품으로 본다. 또 누군가는 신간 코너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독자에 잘 보이기 위해서 누워있다고 표현하는 사람은 신간을 독자를 유혹하는 작품으로 본다. 상품으로써의 책은 사용하면서 점차 가치가 떨어지는 소모품에 불과하지만 작품으로서의 책은 보면 볼수록 그 가치가 배가되는 소장품을 넘어 예술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내가 어떤 언어를 선택하는지에 따라서 나의 생각이 바뀌고 실제로 선택된 언어에 담긴 생각대로 행동한다. 자기다움을 찾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내기 위해서 언어 선택도 심사숙고하고 고뇌에 고뇌를 거듭하면서 정련된 단어를 사용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틀에 박힌 관성대로 언어를 사용해서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진부한지를 선택하는 단어가 반증해준다. 나는 내가 사용하는 언어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표현한 하이데거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언어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와 태도는 물론 시선의 높이와 관점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내가 사건이나 사고를 통해 사유하는 방식까지 결정한다. 언어력을 갈고 다듬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은 그 문제들이 발생할 때 사용했던 사고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의 명언이다. 이걸 언어로 바꿔도 여전히 일맥상통한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은 그 문제들을 해결할 때 사용했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 언어가 통념에 갇히고 틀에 박혀 타성에 젖기 시작하면 이전과 다른 사유체계를 만들어낼 수 없다. 우리가 특정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문제 상황과 해결방안을 기술하고 제안하는 언어적 선택권의 다양성에 따라 문제 상황을 기술하고 해결 대안을 모색하는 사고방식을 다양하게 언급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문제 해결(problem solution)이라는 말과 문제 결의(problem resolution)라는 말은 미묘한 개념적 차이지만 의미상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문제 해결은 문제는 완벽하게 규명될 수 있고, 해결될 수 있다는 과학적 신념을 반영한 개념이다. 이에 반해 문제 결의는 문제는 문제 상황에 따라 인식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항상 이해관계자의 갈등이 내재되어 있어서 문제는 절대로 완벽하게 해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해결할 수도 없는 심리적 합의의 이슈라고 생각한다. 문제 해결 패러다임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문제 해결의 과정에 보다 정교한 과학적 방법을 적용하려는 노력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만 문제 결의 패러다임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문제 상황에서 문제를 인식하는 심리적 갈등과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관여하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합의의 문제를 중요한 이슈로 생각한다. 문제 해결과 문제 결의는 문제를 바라보는 결이 다르다. 


언어는 습관이자 관성이다. 습관적으로 늘 사용하는 단어만 사용하면 사고도 거기서 단절된다. 언어가 바뀌지 않으면 사고도 바뀌지 않는다. 생각은 언어라는 다리를 건너 비로소 세상으로 나오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다. 그런데 전달 매체인 언어가 관성에 빠지면 사고도 마찬가지로 타성에 젖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쓰던 방식대로 언어를 반복해서 사용하면 사고도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했던 방식대로 생각이 굳어진다. 타성에 젖은 생각을 흔들어 깨우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사용하는 언어를 바꾸는 것이다. 언어가 바뀌면 거기에 담는 언어적 사유도 달라진다. 언어가 풍부해지면 다양한 언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끊임없이 상상하면 창조하는 놀이를 즐길 수 있다. 단순히 대학교수라는 말에 갇혀 살지 않고, 지식생태학자와 지식산부인과 의사 같은 새로운 개념어를 창조할 때 호기심을 자극하고 이전과 다른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색다른 창의적 사고를 불러온다. 언어는 전복이자 파괴다. 전복적 언어는 그만큼 기존 사고도 전복시켜 주는 원동력이다. 언어의 빈곤과 진부함은 사고의 빈곤과 진부함으로 직결된다. 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담아내는 그릇이자 사고 자체를 전복하고 창조적으로 파괴하는 혁명의 촉진제다. 빈곤한 언어가 미천한 사고를 불러오고 타성에 젖은 언어가 타성에 빠진 사고를 데리고 다닌다. 하나의 새로운 언어는 사고 혁명을 일으키는 사건이다. 하나의 새로운 언어는 이전에 볼 수 없는 세계를 열어주는 새로운 창이다. 창이 닫히면 세상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적 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지 않으면 세상을 내다보는 새로운 창문도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내다보기 위해서는 이전과 다른 언어력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김선우 시인의 ‘지옥에서 보낸 세 철’이라는 시에 “혹시 나는 나에 대한 습관 아닙니까”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문장을 “혹시 나는 내가 사용하는 언어적 습관 아닙니까”로 바꿔도 일맥상통한다. 나는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결정한다. 나를 바꾸는 방법은 내가 사용하는 언어를 바꾸는 것이다. 언어가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내 삶이 바뀐다. 거꾸로 내 생각을 바꾸려면 내가 사용하는 언어를 바꾸고 언어에 담긴 진부한 의미를 부단히 깨부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에는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단적으로 지적하는 구절이 나온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저 바람에 흔들리는 수많은 꽃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내가 꽃의 이름(개념 부여)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그 꽃은 새로운 의미를 갖고 나에게 특별한 꽃으로 바뀐 것이다. 오늘 내가 부여한 의미대로 밖의 꽃은 언제나 내게로 달려온다. 똑같은 꽃이지만 어제와 다르게 의미를 부여할 때 전혀 다른 낯선 꽃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언어는 생각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그릇의 크기가 생각의 크기를 결정한다. 복잡하고 난해한 내용을 전혀 다른 분야 사람이나 나보다 못한 사람을 대상으로 쉬운 언어로 단순하고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틀에 박힌 언어적 관성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이해의 틀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런 과정에서 인간은 기존에 없었던 놀라운 지혜가 생긴다. 늘 부르는 이름이지만 어제와 다른 의미를 부여할 때, 익숙한 이름은 전혀 다른 부름을 받고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


Kodak이라는 회사는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위해 필요한 필름을 만드는 회사였다. 찍고 싶은 장면을 카메라로 찍으면 이미지가 필름에 상으로 맺히고 그걸 현상하고 인화하면 보고 싶은 사진이 탄생되던 때의 이야기다. 필름을 만들던 이 회사의 스티븐 새슨(Steven Sasson)이라는 엔지니어가 있었다. 벤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유치원생들이 견학을 와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첫 질문은 “아저씨 여기가 어디예요?” 처음 듣는 질문이었지만 정성을 다해 대답했다. “응 여기는 필름 만드는 회사야.” 그러자 다른 아이가 “아저씨, 필름이 뭐예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한 번도 필름이 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더욱 필름이 무슨 의미인지를 설명해본 적이 없는 스티븐 새슨은 당황하면서 어떻게 설명하면 유치원생이 알아들을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물론 대학생이나 성인이면 “필름이란 빛에 노출되면 이미지를 형상화하기 위해서 화학반응하는 물질”이라고 설명해도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유치원생은 필름을 설명하는 데 동원된 많은 개념, 예를 들면 형상화나 화학반응, 물질과 같은 개념 조차 처음 들어보는 말일 것이다. 스티븐 새슨은 고민하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필름은 그릇이야.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이미지를 다 담을 수 있으니까.” 필름이 유치원생이 알아들을 수 있게 그릇이라고 쉽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엔지니어는 놀라운 지혜를 터득하게 된다. 이미지를 담는 그릇이 필름이라고 재정의하는 순간 필름은 이제 세상의 모든 이미지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새롭게 다가온다. 필름에게 그릇이라고 불러주었을 때 이제부터 필름은 이미지를 형상화하기 위한 화학반응 물질이라는 난해한 과학적 설명 대상에서 벗어난다. “언어의 미래는 작가들이 어렵게 얻은 생각으로 우리를 이끄는 단어들을 찾아내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것과 함께, 독자들도 그에 맞춰 최선의 사고를 읽으려는 노력을 계속해나가는 것과 연결돼 있습니다(136쪽). 매리언 울프의 《다시, 책으로》에 나오는 말이다. 필름을 어떻게 하면 더 쉽고 와 닿게 설명할 수 있을지를 고뇌하는 엔지니어의 남다른 노력이 필름을 그릇이라고 생각하는 언어적 사유를 탄생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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