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5가지 이유
당신이 개념 없이 살아가면 안 되는 5가지 이유
개념이 없는 인간에서 벗어나는 5가지 방법
비슷한 인생을 살아온 두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한 사람은 풍부한 어휘력을 근간으로 자신의 체험을 돋보이게 설명하고 설득할 수 있는 비장의 언어적 무기를 갖고 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은 비슷한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체험적 각성을 적확한 언어로 번역할 언어적 무기가 부실하다. 삶은 결국 언어를 매개로 저마다의 예술작품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나만의 독특한 삶의 자기다움이 언어를 만날 때 특유의 스토리가 탄생한다. 스토리(story)가 축적되면 역사(history)가 되고 역사는 결국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나의 길(way)을 만든다. 나의 길에 나만의 언어적 문제의식과 사유의 결정체가 숨어 있다. 우리가 언어를 공부하고 개념을 습득해서 나다움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드러낼 때, 나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나답게 살아가는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
첫째, 개념을 바꾸지 않으면 이전과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기 어렵다
언어는 습관이자 관성이다. 습관적으로 늘 사용하는 단어만 사용하면 사고도 거기서 단절된다. 언어가 바뀌지 않으면 사고도 바뀌지 않는다. 생각은 언어라는 다리를 건너 비로소 세상으로 나오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다. 그런데 전달 매체인 언어가 관성에 빠지면 사고도 마찬가지로 타성에 젖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쓰던 방식대로 언어를 반복해서 사용하면 사고도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했던 방식대로 생각이 굳어진다. 타성에 젖은 생각을 흔들어 깨우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사용하는 언어를 바꾸는 것이다. 언어가 바뀌면 거기에 담는 언어적 사유도 달라진다. 언어가 풍부해지면 다양한 언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끊임없이 상상하면 창조하는 놀이를 즐길 수 있다. 단순히 대학교수라는 말에 갇혀 살지 않고, 지식생태학자와 지식산부인과의사 같은 새로운 개념어를 창조할 때 호기심을 자극하고 이전과 다른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색다른 창의적 사고를 불러온다. 언어는 전복이자 파괴다. 전복적 언어는 그만큼 기존 사고도 전복시켜 주는 원동력이다. 언어의 빈곤과 진부함은 사고의 빈곤과 진부함으로 직결된다. 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담아내는 그릇이자 사고 자체를 전복하고 창조적으로 파괴하는 혁명의 촉진제다. 빈곤한 언어가 미천한 사고를 불러오고 타성에 젖은 언어가 타성에 빠진 사고를 데리고 다닌다. 하나의 새로운 언어는 사고 혁명을 일으키는 사건이다. 하나의 새로운 언어는 이전에 볼 수 없는 세계를 열어주는 새로운 창이다. 창이 닫히면 세상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적 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지 않으면 세상을 내다보는 새로운 창문도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 언어적 사유체계가 깊어지지 않으면 세상은 언제나 틀에 박힌 일상이 반복되는 지루한 세계다. 생각의 전환은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전환에 맞물려 있다. 모든 개념에는 고정관념이 숨어 있다. 개념이 품고 있는 고정관념을 파기하지 않는 이상 해당 개념으로 새로운 신념을 만들어낼 수 없다. 개념으로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이 품고 있는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새로운 신념이 담긴 개념으로 재개념화 시키거나 이전과 다른 개념을 창조할 필요가 있다. 개념의 재개념화 또는 개념의 창조가 곧 색다른 생각을 잉태하는 출발점이 되는 셈이다.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생각의 재료가 융합될 때 잉태되거나 탄생된다. 생각의 재료는 다름 아닌 개념이다. 아무리 위대한 생각을 갖고 있어도 그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개념이 없으면 생각은 생각으로 머무를 뿐,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색다른 생각으로 탄생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어렴풋하게 생각했던 관념이 서서히 자신의 의지와 집념을 만나면 신념으로 전환된다. 가슴속에 품고 있던 신념이 겉으로 표현되려면 개념이 필요하다. 개념 없이 신념은 세상으로 나오지 못한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신념을 전달할 수도 없다. 우리가 새로운 개념을 부단히 공부해야 되는 이유는 개념의 습득 없이 생각은 진화되거나 발전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이 고정관념에 빠지고 타성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이유는 생각의 원료인 개념이 틀에 박혀있기 때문이다. 나의 신념으로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문제의식과 위기의식을 담고 있는 개념을 창조해야 한다. 개념은 다른 말로 그것을 창조한 사람의 신념이 반영된 고뇌의 산물이다. 사람의 신념은 개념에 남다른 체험적 각성이 합해질 때 생긴다. 개념은 체험을 통해 신념으로 거듭나고 체험은 개념을 통해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다. 체험은 많지만 개념이 부족할 경우 체험은 한 개인의 신체 속에 함몰되어 겉으로 나오지 못한다. 개념은 풍부하지만 체험이 부실할 경우 개념은 관념의 파편으로 전락할 수 있다. 일상적인 체험을 반복한다고 할 때 남다른 개념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나만의 독특한 신념이 생긴다. 신념은 체험적 각성을 적확하게 담아내는 개념을 만났을 때 비로로 생기는 확신과 결단의 원동력이다. 우리가 색다른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면서도 동시에 이전과 다른 언어적 사유를 해야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서 생긴다.
개념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어제와 다른 방법으로 생각하기 위한 인식의 틀이자 사고의 도구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노력해야 될 일 중의 하나는 나를 표현하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을 배우는 것이다. 새로운 개념을 배우지 않으면 우리는 지금까지 배운 개념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1년 전에 내가 썼던 개념을 1년이 지난 지금도 비슷하거나 동일한 개념을 반복해서 쓰고 있다면 나는 개념 없이 1년을 살아온 것이다. 개념 없이 살았다는 이야기는 생각의 변화 없이 1년을 살았다는 이야기다.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제와 다른 개념을 갖고 있어야 한다. 청소년기에 습득한 개념으로 청년기를 살아가가는 사람, 청년기에 습득한 개념으로 중장년을 살아가는 사람은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고 예전의 생각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사람은 그 사람이 습득한 개념이다. 개념을 끊임없이 공부해야 되는 이유는 동일한 개념이라고 할지라도 예전의 개념과 다른 의미로 재탄생하기도 하고 다른 맥락에서 다른 의미로 변형 적용되어 쓰이면서 색다른 개념으로 거듭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개념을 공부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개념적 렌즈가 세상을 바라보는 안경이기 때문에 어떤 개념적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세상으로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념은 저마다의 문제의식과 탄생 배경을 갖고 있다. 특히 철학적 개념은 그 개념을 창조한 사람의 문제의식이 녹아 있다. 자신의 철학적 사유의 핵심을 이전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기존 개념에 색다른 의미를 부여해서 재개념화 시키거나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개념을 부단히 창조한다.
둘째, 미묘한 개념적 차이점을 모르면 사유 자체도 모호해진다
비슷한 단어에 담긴 의미상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면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닭고기와 치킨은 각각 동일한 실물을 가리키는 국어와 영어 단어지만 사실은 그 의미상의 차이가 있어서 분명하게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 “고유어인 닭고기는 일반적으로 닭의 살코기를 의미하지만 치킨은 닭에 밀가루를 입혀서 굽거나 튀겨서 만든 요리를 의미한다. 그래서 닭백숙의 닭고기는 닭고기이지 치킨이 아니다”(111쪽). 신지영의 《언어의 줄다리기》에 나오는 말이다. 유사 개념 간에 존재하는 의미상의 차이는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의 차이를 가져온다. 비슷한 개념이지만 의미상 많은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쓸 경우 잘못된 사유를 유발할 뿐만 아니라 엉뚱한 방향으로 행동을 유도함으로써 심각한 폐해를 유발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아서 프랭크가 《아픈 몸을 살다》에서 구분한 질환(disease)과 질병(illness)은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차이를 갖고 있다. 질환은 체온, 혈압, 혈당 수치나 피부 상태를 생리학적으로 환원하여 제시하는 의학적인 용어라서 주로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수치로 환산된다. 반면에 질병은 질환을 앓아가면서 환자가 느끼는 공포와 절망, 희망과 낙담, 기쁨과 슬픔처럼 느끼는 주관적 감정이다. 똑같은 질환을 앓고 있어도 그것에 대해 환자가 느끼는 주관적 감정은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의학적으로 위암이라는 질환은 한 가지 용어로 지칭할 수 있지만 위암을 앓고 있는 환자의 상태나 병력, 그리고 그것에 반응하는 환자의 자세와 태도에 따라 천차만별의 주관적인 질병을 앓고 있다. 문제는 의사가 환자를 진료할 때 질환으로 구분되는 몇 가지 범주로 나눈 다음 다른 환자도 그 범주에 집어넣어 일반화시켜 효율적으로 관리하려는 데 있다. 하지만 똑같은 병명으로 판정되어 비록 같은 질환의 범주에 포함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환자가 느끼는 주관적 질병은 같지 않기 때문에 질환의 범주별 일반화는 치료에는 유용하지만 돌봄에는 방해가 된다. 환자가 동일한 질환에 대해서 느끼는 공포나 두려움, 걱정과 불안감은 다른 환자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해당 환자가 주어진 환경에서 느끼는 특수한 경험이다. 이런 경험을 같은 범주로 일반화시켜 같은 환자로 취급하는 것은 의학적 치료의 효율성과 관리의 편리함을 제고시킬 수 있지만 환자를 돌보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픈 사람의 경험에서 고유함을 목격하고 차이를 전부 인식하는 것, 이것이 바로 돌봄이다”(82쪽).
‘병마개’와 ‘병뚜껑’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주둥이 안으로 들어가 있으면 병마개이고 겉표면만 둘러싸고 있으면 뚜껑이다. 화가 나면 마개 열린다고 하지 않고 뚜껑이 열린다고 하는 이유다. 《국어실력이 밥 먹여 준다(낱말 편 1, 2)》는 책에는 이외에도 태어날 때부터 목적과 용도가 정해져 있는 ‘방망이’와 정해져 있지 않아서 엄마가 급하면 아무거나 들고 위협을 가하는 ‘몽둥이’의 차이점 등 일상생활에서 크게 구분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 간의 미묘한 차이점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이 책에서는 이처럼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말이지만 분명한 차이점이 있는 우리말을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쉽고 재미있는 사례를 들어 차이점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비슷한 말이지만 그 의미상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으면 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보고 구분해낼 수 있는 혜안이 생긴다. 정유정과 지승호의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에 나오는 행동과 활동의 차이가 바로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인물의 행동과 활동은 다르다. 활동이란 가치의 변화가 거의 없는 움직임이다. 먹거나, 마시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동네 한 바퀴를 돌거나...자전거를 몰고 가다 친구와 우연히 마주치는 일은 행동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행동은-그것이 작든 크든-인물이 목적과 의지를 갖고 선택하는 움직임이다”(104쪽). 사람은 활동하다 행동하는 경우도 있고 행동하다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가치중립적인 활동에 비해 가치 지향적인 행동을 통해 사람들이 꾸는 꿈이 실현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이런저런 활동을 하다 우연히 마주친 꿈의 길목에서 뚜렷한 문제의식을 갖고 행동할 때 사람들은 많은 성취감을 느낀다. 활동하는 사람과 행동하는 사람은 인간관계 맺음 방식에도 차이를 가져온다.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182쪽). 김소연의 《마음사전》에 나오는 말이다. 이해와 오해의 미묘한 차이를 국어사전에 나오는 개념적 차이로 설명하지 않고 저자 특유의 감각적 차이로 설명하는 데 묘미가 있다. 인간관계 사이에 언제나 존재하는 이해와 오해, 관계가 경계로 바뀌기 전에 그 미묘한 차이를 극복하고 화해가 될 때 관계는 다시 지속 가능한 상태로 또 당분간 유지될 것이다.
어휘력이 풍부하다는 이야기는 내가 어떤 감정 상태에 직면했을 때, 내가 느끼는 감정을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는 선택권이 넓다는 의미다. 예를 들면 뭔가를 본다고 할 때 보는 위치와 자세나 태도에 따라서 다르게 보는 다양한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말에 ’보다‘라는 말이 27가지가 있다고 한다. 보는 사람의 위치, 보는 사람의 마음가짐, 그리고 겉모습보다 사물의 본질 이면을 보는 방식에 따라 보는 방법이 무려 27가지나 된다. 우선 보는 자리를 안과 밖으로 나누면 ‘내다보다’, ‘들여다보다’, ‘넘어다보다’, ‘넘겨다보다’를 시작으로 보는 자리를 안팎이 아니라 높낮이로 나누면 ‘바라보다’, ‘굽어보다’, ‘쳐다보다’, ‘도두보디다’, ‘우러러보다’, ‘낮추보다’, ‘깔보다’ 같은 일곱 가지를 쓴다. 보는 눈이나 마음의 높낮이가 아니라 보는 이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돌보다’, ‘엿보다’, ‘노려보다’, ‘쏘아보다’, ‘흘겨보다’, ‘째려보다’ 같은 낱말들도 있다. 이제까지 살핀 열일곱 가지 ‘보다’가 주로 겉모습을 겨냥하는 것이라면, 겉모습 속에 감추어진 속살까지 겨냥하는 ‘보다’도 여러 가지가 있다. 여기에는 가장 건성으로 보는 ‘거들떠보다’, 뼈대만 추려서 보는 ‘훑어보다’, 꼼꼼히 보는 ‘(눈) 여겨보다’, 샅샅이 보는 ‘살쳐보다’를 쓴다. 이들 네 가지는 아직 속살을 보는 데까지 다다르지는 못했다. 눈에 보이는 무엇을 그대로 두지 않고 이모저모 헤쳐서 보는 ‘뜯어보다’, 눈으로 본 바를 마음으로 맞추어 보는 ‘따져보다’, 마음으로 셈하여 보는 ‘헤아려보다’. 마침내 보아야 하는 그것을 겉모습에서 속살과 속내까지 온전히 하나로 보아 내는 ‘알아보다’에 이른다. 그리고 ‘알아보다’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키워 나가면 그 걸음에 따라 속살이 환히 보이는 ‘뚫어보다’에 닿았다가, 드디어 속살의 구석구석까지 남김없이 보이는 ‘꿰뚫어 보다’에 다다른다. 여기에 이르면 비로소 더 보아야 할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온전히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셋째, 다양한 개념을 알면 사물이나 현상을 미세하게 표현할 수 있다
어휘력이 풍부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표현력에 드러난다. 어휘력이 풍부한 사람은 동일한 현상이나 사물을 보고도 감정을 미적분하듯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진부한 언어를 반복해서 사용할 뿐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신체 표현을 보고 ‘깊이가 있다, 미적인 감동을 받는다’고 할 때는 대개로 그 움직임의 ‘분할도’ 또는 ‘해상도’가 치밀해서 그렇습니다”(126쪽). 우치다 타츠루의 《소통하는 신체》에 나오는 말이다. 언어의 해상도라는 개념을 만나는 순간 글을 읽고 나서 떠오르는 이미지의 선명도가 연상됐다. 글을 읽고 나면 무슨 글을 읽었는지 이미지가 뿌연 글이 있고 내가 마치 그곳에서 실제 경험하는 장면이 연상될 정도로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글이 있다. 그 차이가 바로 글을 쓰는 사람이 품고 있는 개념적 명료성과 다양성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표현의 해상도를 소리의 해상도에 비유한다. 소리의 해상도에 차이가 나는 것은 작은 동작을 얼마나 잘게 쪼개서 미묘한 동작과 동작을 절묘하게 연결해내느냐의 차이다. 초보자와 고수를 구분하는 연주의 차이는 바로 소리의 해상도 차이다. 초보자는 건반을 치는 동작 하나밖에 없지만 고수는 건반에 다가가서 접촉하기까지 무수히 많은 동작 단위가 녹아들어 있고 건반에서 손을 떼고 다른 건반으로 이동하는 매 순간에 혼신의 힘과 에너지를 넣어서 미세한 동작의 연속으로 소리의 중후함과 감동적인 하모니를 연출한다. 문장가 이태준에 따르면 “물이 퍽 맑다”라는 것과 “어찌 맑은 지 돌 틈에 엎드린 고기들의 숨 쉬는 것까지 보인다”라고 하는 것은 다르다고 한다. 한 사람은 얼른 바쁘게 보았고, 한 사람은 오래 고요하게 보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의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한 사람은 얼른 대충 보고 한 순간을 하나의 동작으로 표현했고, 한 사람은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한 순간을 수많은 작은 순간으로 쪼개서 표현의 해상도를 높였다고 볼 수 있다. 표현의 해상도가 달라지면 사물을 차원이 다르게 바라보는 안목과 식견이 생기기 시작한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안녕 시모키타자와》에 보면 “어렴풋 알고 있는 것을 누군가 언어로 분명하게 말해주면 이렇듯 마음이 편안 진다”는 구절이 나온다. 경이로운 자연경관을 바라보고 감탄사를 연발할 뿐 그 광경을 표현할 언어가 부족해서 더 이상 할 말을 잃는 경우가 있다. 우연히 먹어본 음식을 보고 기가 막힌 맛에 침을 삼킬 뿐 적절한 어휘가 없어서 감탄사만 연발할 때가 있다. 우연히 마주친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의 매혹적인 매력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부족해서 그냥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던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순간과 장면, 전경과 배경, 잊을 수 없는 풍경과 광경에 대한 나의 체험적 느낌이 이미지로 기억의 한 편에 자리 잡고 그걸 다시 인출하여 글로 쓰려고 할 때 생각만큼 쉽게 글로 옮겨지지 않는 것도 내가 갖고 있는 언어의 한계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언어적 미세함의 차이가 얼마나 정교한 묘사력을 지니는지 한 가지 예를 살펴보자. 부부 싸움하고 난 뒤 부인이 남편에게 차려주는 30일 동안의 식단이다. 첫날 콩부터 시작해서 나물과 콩나물, 그리고 콩나물국을 거쳐 마지막 30일 째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그동안 쌓였던 분풀이 차원에서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콩나물죽여살려밟아찢어꿰매눌러당겨돌려뽑아잘라갈라볶아말아국’을 끓여준다. 부인이 이렇게 다양한 서른 가지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은 서른 가지 요리에 동원되는 단어상의 미묘한 차이점을 알고 이를 조합하는 능력 덕분이다. 만약 부인이 콩이라는 단어 한 가지만 알고 있다면 훨씬 적은 종류의 음식밖에는 만들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좋은 요리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그걸 포착해서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대로 요리를 만들 수 없다. 결국 내가 어떤 요리를 할 수 있느냐는 다양한 요리를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어휘력이나 개념 조합 능력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일 콩
2일 나물
3일 콩나물
4일 콩나물국
5일 콩나물무침
6일 콩나물도리탕
7일 콩나물무쳐튀김
8일 콩나물무쳐튀김찜
9일 콩나물무쳐튀겨볶음
10일 콩나물무쳐튀겨쪄데침
11일 콩나물무쳐튀겨끓여조림
12일 콩나물무쳐빨아삶아끓여찜
13일 콩나물무쳐끓여던저받아튀김
14일 콩나물수육포떠또떠막떠다떠탕
15일 콩나물삶아건져담가말려찢어중탕
16일 콩나물끓여식혀덥혀익혀말려푹쪄찜
17일 콩나물다시무쳐끓여돌려주고받아데침
18일 콩나물다시무쳐다시끓여다시받아다시찜
19일 콩나물먹어뱉어다시삼켜다시게워그걸무침
20일 콩나물심어길러뽑아갈아끓여삶아데쳐때려탕
21일 콩나물말아돌려풀어볶아삶아끓여갈아모아튀김
22일 콩나물훔쳐들켜튀어잡혀맞아터져부어그걸밟아국
23일 콩나물꼬셔벗겨입혀볶아데쳐튀겨씻어빨아말려조림
24일 콩나물때려울려달래그걸볶아삶아무쳐조려다려불려탕
25일 콩나물끓여식혀무쳐줬다뺏어다시끓여식혀무쳐푹삶아탕
26일 콩나물잘라붙여갈라쪄무쳐던져받아놓쳐버려그걸주어볶음
27일 콩나물꼬아말려붙여늘려그걸잘라갈아뿌려주어팔아키워부침
28일 콩나물끓여말려갈아불려국쒀개줘때려뱉어모아삶아빨아신선로
29일 콩나물심어길러모아팔아골라골라때돈모아부어마셔망해도길러찜
30일 콩나물죽여살려밟아찢어꿰매눌러당겨돌려뽑아잘라갈라볶아말아국
다양한 경험을 갖고 있어도 그 경험을 포착할만한 적절한 개념이 없다면 그냥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며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결국 색다른 경험이 계속 축적되어도 그 경험이 내포하는 소중한 의미를 포착할 수 없게 된다. 똑같이 여행을 갔다 왔어도 누군가는 여행에서 마주친 색다른 체험을 자기만의 개념으로 포착,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자극하는 감동적인 글로 적확하게 묘사하지만, 미세한 개념적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저 “재미있었다”, “즐거웠다”, “감동적인 광경이었다” 정도로 표현되지 않는다. 무슨 음식을 먹었는데 얼큰하고 담백하면서 동시에 시원해서 음주 후에 속 풀이 해장으로는 최고로 이야기를 하지만 그런 음식을 포착할 개념이 없다면 그저 잡다한 이미지나 생각으로 기억의 저편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만약에 지금 먹은 “얼큰하고 담백하면서 동시에 시원한 음식”을 김치찌개라는 개념으로 포착했다면 모호했던 잡다한 인상들을 보다 일반적으로 보편화시켜 그 의미를 오랫동안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도 있다.
넷째, 개념을 구분하지 못하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어울리기 어렵다
개념적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아예 특정 개념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하지 못할 경우 대화는 깊이를 더해갈 수 없다. 겉으로 도는 피상적인 대화를 이어가다 중간에 멈출 수밖에 없다. 대화를 통해 상대방에 전달되는 개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가지 않거나 유사 개념 간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할 때 오해가 발생한다. 모호한 개념으로 상대방을 이해시키려는 노력보다 짧지만 강력한 사운드 비트가 있는 말로 마음을 움직이는 대화가 이루어질 때 공동체는 튼실한 신뢰로 강한 연대망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동행의 언어보다 동원의 언어가 구사되면서 공동체 내에서의 인간관계도 무너지고 있다. “동행의 언어는 사라지고 동원의 언어만 남았다”(275쪽). 여기서 말하는 동행의 언어는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주고받는 언어다. 반면에 동원의 언어는 상대보다 나를 내세우고, 상대의 치명적인 약점을 건드려 상처를 내려는 언어다. 동원의 언어는 같은 공동체 사람들이 보다 쉽게 즉흥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극적이지만 동행의 언어를 타자를 따뜻하게 품기 위한 정감의 언어다. 문제는 동행의 언어보다 동원의 언어가 자주 구사되면서 공동체는 붕괴되고 인간관계는 피폐해진다. 언어는 공동체가 약속한 규칙대로 사용된다. 예를 들면 빨간 불은 교통 신호등에서 정지를 의미한다. 왜 빨간 불이 정지를 의미하는지는 이유가 없다. 그렇게 사용하기로 약속한 언어적 규칙이다. 특정 언어의 의미를 사회적으로 규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 언어적 규정을 모르면 해당 공동체에서 소통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해당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어렵다. 사회적 약속으로 만들어진 규칙에 따라 언어적 의미를 공유하면서 공동체가 더욱 결속력을 갖춰 나간다. 언어적 약속과 규칙에 반기를 들거나 주류 담론과는 다른 입장에서 기존 언어를 새롭게 규정할 경우 한 사람은 해당 공동체가 사회적으로 약속해서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를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
언어가 빈약하거나 부실하면 대화도 오도되거나 불통된다. 상대가 사용하는 개념이 이해되지 않으면 원활한 소통이 불가능하거나 오해를 불러온다.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거기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이 다르면 언어를 매개로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구축하기 어렵다. “언어는 세계를 짓는 도구다. 우리는 타인의 말을 듣고 그 말에 응답하면서 그 사람과 나 사이에 관계를 맺고 유지한다. 말을 통해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면서 그 안에 나와 그가 머무른다. 이것을 공동의 집, 세계라고 한다. 언어는 바로 이 공동의 집인 세계를 짓는 도구다”(13쪽). 공동의 집에서 빈번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대화가 오고 가려면 주고받는 언어에 대한 합의는 물론 언어에 담긴 사회 역사적 의미를 공유해야 한다. 책에 나오는 사전적 의미(denotation)보다 사전적 의미의 뒤안길에 숨어있는 함축적 의미(connotation)를 공유하지 못하면 공동체는 구축되기 어렵다. 이럴 때 더불어 살아가려는 동행의 언어는 사라지고 서로 비난과 힐난, 시기와 질투의 언어만 횡행한다. 공동체를 근간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함축적 의미가 다른 의미로 공유될 경우 공동체의 정체성은 심각하게 위협받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밥 무어헤드가 쓴 「우리 시대의 역설 Paradox of Our Age」에는 등장하는 life에 담긴 함축적 의미를 다르게 해석할 경우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진다. ˝우리는 생활비를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배우지 못했다. 우리의 수명은 늘었지만, 시간 속에 생기를 불어넣지는 못하고 있다.˝에 해당하는 원문은 다음과 같다. ˝We learned how to make a living, but not a life. We‘ve added years to life but not life to years.˝ 여기서 두 번째 문장의 ‘life‘ 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함축적 의미가 전혀 다르다. ‘years to life‘ 에서 ‘life‘는 그냥 근근이 살아가는 생물학적인 삶이다. 이이 비해 ‘but not a life’에서 ‘life‘는 매 순간 심장 뛰는 뿌듯한 삶을 지칭한다. 삶은 생물학적 존재 자체만으로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없기에 내가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을 깨닫고 매 순간 분투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우리는 나다움을 추구하며 보람찬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똑같은 개념도 겉으로 드러나는 사전적 의미와 안으로 숨기고 있는 함축적 의미가 다르다. 공동체는 함축적 의미를 공유함으로써 관계와 연대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나가는 단체다. 이처럼 나는 언어라는 창과 감옥 속에서 내가 사용하는 언어적 스크린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나는 언제나 언어라는 스크린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한다. 내 생각은 언제나 내가 사용하는 언어적 스크린에 걸러져서 생긴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보다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해 제도를 만든다. 언어는 하나의 제도(制度)이자 감옥이다. 제도란 관습이나 도덕, 법률 따위의 규범이나 사회 구조의 체계를 말한다. 제도란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 결정한 약속이기도 하다. 모든 제도는 그렇게 하기로 합의한 약속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교육제도가 있다. 교육제도가 어떤 교육을 펼쳐나갈지 결정하고 통제한다. 우리나라 교육제도는 초등학교 6년 중학교와 고등학교 3년, 그리고 대학교 4년으로 이루어진다. 그 안에서 어떤 교육을 어떻게 운영할지 다양한 제도와 규칙이 다시 규제를 가한다. 만약 교육제도가 없다면 저마다의 방식으로 교육을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저마다의 다양한 교육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일정한 체계나 구조 없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무질서한 교육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제도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언어가 제도인 이유는 한 사회 속의 인간은 언제나 그 사회가 합의한 언어적 규칙과 제도 안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나의 생각을 전달하는 의사소통의 수단이 일뿐만 아니라 뭔가를 생각하고 인식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의사소통의 수단인 언어는 언제나 해당 공동체나 사회가 합의한 양식에 따라서 내 생각을 전달해야 한다. 언어가 전달의 수단을 넘어서 생각하고 인식하는 수단일 때는 반드시 누군가 정한 규칙이나 분류기준을 따를 필요가 없다. 창의적인 사람의 특징은 언어를 사고나 인식의 도구로 사용할 때 이미 사회가 정한 제도적 약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용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언어는 잘 양육되면 무한한 상상 밖의 생각을 창조해낼 가장 완벽한 도구를 제공하는가 하면, 우리의 집단적 지능을 발전시킬 토대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그 역도 참입니다”(137쪽). 매리언 울프의 《다시, 책으로》에 나오는 말이다.
다섯째, 개념을 바꾸지 않으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없다
“모험이 부족하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없다.” 일본 철도(JR: Japan Railroad) 카피 중의 하나다. 모험이야말로 어른으로 성장시키는 가장 확실한 보험이다. 모험을 했어도 그걸 표현할 언어가 부족하면 모험은 모습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언어가 부족하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없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배우는 언어의 품격이 나의 품격을 결정한다. 그래서 일본 철도는 어른들에게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을 추천하는 것이다. 그것도 철도를 타고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 언어도 마찬가지다. 개념이 부족하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없다. 부족한 개념을 보충하는 방법은 개념의 향연이 이루어지는 각종 문학작품이나 책을 읽어야 한다. 그것도 이제껏 읽어보지 못한 개념의 세계로 진입하지 않으면 늘 익숙한 개념의 세계에 안주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철학자 들뢰즈는 “개념은 인격”이라고 했다. 내가 사용하는 개념의 품격이 나의 인격을 좌우한다. 내가 사용하는 개념의 세계를 보면 내가 살아가는 세계의 한계를 알 수 있다. 아이와 어른의 차이는 사용하는 개념의 차이다. 그렇다고 모든 어른이 개념적 성숙을 통해 인격을 갖추지 못한다. 어른도 어른 나름이다. 어른을 어른으로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사용하는 개념적 성숙도에서 비롯된다. 그동안 나에게 우연히 꽂혔던 수많은 개념은 성숙과 숙성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신념의 꽃으로 피어났다.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개념도 내가 의도적으로 포착해서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부표하는 관념에 불과하다. 그런 관념에 나의 신념을 추가하면 나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개념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어제와 다른 개념을 만나지 않으면 오늘을 살고 미래를 지향하고 있어도 여전히 나의 세계는 과거의 개념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개념의 세계로 떠나는 모험을 거듭하지 않는 한 나는 언제나 어제의 개념으로 현재를 살고 미래를 관념적으로 꿈꾼다.
내가 살아온 역사는 내가 습득한 개념의 역사다. 나의 전공분야를 기반으로 책을 읽으면 전공 분야 안에서 주로 사용하는 전공 용어에 익숙해진다. 익숙한 개념은 익숙한 사고를 낳고 익숙한 사고는 익숙한 개념만 받아들인다. 내가 전공하는 분야의 사유를 능가하는 다른 사유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다른 분야에서 통용되는 개념과 접속해야 한다. 다른 개념과 부단히 접속하는 가운데 언어의 쓸모는 날로 변모해나간다. 언어의 쓸모는 이미 내가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반복해서 생기지 않는다. 언어의 쓸모는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언어를 쓸 때가 왔을 때 적확하게 표현하는 순간에 생긴다. 나아가 언어의 쓸모는 기존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난국을 탈출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며 새로운 언어를 구상하는 안간힘을 쓰는 사이에 쓸모가 새롭게 발견되기도 한다. 소설가 배수아가 《당나귀들》에서 사용한 표현을 빌리면 ‘언어의 틈새’를 메우려는 노력이 부단히 전개될 때 언어의 쓸모도 한층 더 의미 있게 생긴다. 경이로운 순간을 목격했지만 기존 언어로는 그 장관을 표현할 수 없는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언어를 찾아 나서는 안간힘 속에 언어의 틈새는 존재한다. 배운 언어로는 표현이 안 되는 감동적인 순간이나 처절한 절망의 시간을 보낼 때마다 언어의 틈새는 점차 벌어진다. 이전과 다른 어른으로 탄생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어른은 점차 벌어지는 언어의 틈새를 메꾸기 위해 다시 새로운 언어를 찾아 나서거나 스스로 언어를 창조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배운 언어로는 일상의 기적을 담아낼 수 없을 때 사람은 거기서 좌절하지 않고 다른 언어를 찾아 나서거나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려는 몸부림을 부리는 사이에 언어의 틈새는 부단한 모색과 실험 속에서 그 간격이 조금씩 좁혀진다. 그 순간 언어 역시 비약적으로 방향으로 쓸모가 생긴다. 언어의 쓸모가 어제와 다르게 업그레이드될 때 사람의 쓸모 역시 어제와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언어는 거기 그냥 있는 명사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누가 그걸 사용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재탄생하는 동사로서 움직이는 생성의 산물이다. 어른은 어느 시점에서 배운 언어를 명사로 받아들여 정태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고 한 번 배운 언어도 시간과 장소, 그리고 그걸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끊임없이 변주해서 어제와 다른 동태적 의미로 다시 사용하는 사람이다. 언어의 죽음과 탄생은 곧 어른의 죽음과 탄생을 같이 한다. 언어적 사용법이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내 사고체계도 일정 시점에서 변화와 혁명을 멈추고 정체되어 있다는 의미다. 꼰대는 입력장치는 고장 났지만 출력장치는 살아 있는 사람이다. 꼰대의 언어는 늘 진부하고 과거에 묻혀 있다, 하지만 리더의 언어는 늘 새롭고 다르다. 동일한 언어도 어제와 다른 방식과 용법으로 사용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늘 리더로서의 어른은 늘 언어를 배우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언어를 배우는 시간, 새로운 언어 습득에 투자한 시간만큼 언어의 쓸모는 달라진다. 뭔가 다른 어른은 오늘도 언어를 배우기 위해 어제와 다른 모험을 떠난다. 어른이 어른다워지는 이유는 성숙된 사고를 격이 다른 언어로 표현할 때 미치는 영향력의 차이 때문이다. 육체적 어른은 많아도 정신적으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어른이 드문 이유는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력의 차이 때문이다. 모두가 인정하는 자리에 앉아있으면서도 눈살을 찌푸리는 언어를 구사하는 어른을 보면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본다. 사유가 적확한 언어를 만나 숙성의 시간을 거치지 않고 내뱉는 말로 인해 어른의 모습이 어리석어 보이기 시작한다. 뭔가 다른 어른은 우선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부터 다르다. 평범한 어른에게는 배운 언어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소설가 배수아가 말하는 ‘언어의 틈새’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뭔가 다른 어른은 어제와 다른 낯선 세계를 탐험하기 때문에 경이로운 순간을 만날 때마다 언어의 부족을 느낀다. 오늘 만든 언어의 틈새를 메우기 위해 내일 나는 어떤 언어 공부를 할 것인지, 배우는 언어가 우리를 삶의 주연 배우로 만들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