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사라진 기억의 실마리를 잡아
한 권의 책을 마무리하다

언어의 쓸모가 곧 한 사람의 쓸모를 결정한다


사라진 기억의 실마리를 잡아 한 권의 책을 마무리하다


지난 6월 노트북과 함께 나의 모든 지적 고뇌의 산물이 저장된 외장하드와 그 어떤 것으로도 복구할 수 없는 손글씨 메모장 두 권을 제주도 공항에서 분실했다. 어느 정도 구글 드라이브에 저장된 것도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나의 사유의 족적이 담긴 손글씨 메모장과 한참 작업 중이었던 몇 권의 저서에 관한 최근 작업 결과가 없어진 사실을 아는 순간,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다. 특히 언어에 관한 책을 쓰면서 거의 다시 쓰다시피 수정한 원고가 남아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그때의 느낌을 표현할 적확한 언어를 찾지 못했다. 며칠을 상실감에 시달리다 마음을 다잡고 데이터 기반 사유의 치명적인 한계를 깨닫고 데이터에 의존하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의 가능성을 찾아 이런저런 생각으로 뇌리 속을 떠다니는 상념의 날개를 잡고 이리저리 떠돌며 그동안 작업했던 기억을 되살려보기로 했다.


워낙 방대한 자료를 참고로 저술 작업을 했던 결과물이라서 그걸 다 기억을 더듬어 복원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일찍 깨닫고 마음을 비워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한 아쉬움을 달랠 길 없어서 틈틈이 저술 작업의 큰 줄기와 구조를 다시 복원하고 그 사이로 뻗었던 잔가지를 하나둘씩 회상하기 위해 내가 붙잡고 씨름했던 키워드나 큰 화두 중심으로 수시로 메모장에 다시 메모하면서 한 장 두 장 메꿔나가기 시작했다. 기억의 실마리가 여전히 뿌연 상태로 안갯속을 헤매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점의 흔적이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선으로 연결되면서 내가 쓰고 싶은 방향으로 글감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끄적거리면서 축적한 흔적을 모아 집중적으로 연휴기간에 폭발적으로 글발을 날려보았다. 


9.30일부터 10월 4일까지 5일 동안 집념을 갖고 집중적으로 집필에 몰두했더니 어느덧 결론 부분을 쓰고 있는 연휴의 마지막 날, 고군분투하는 나를 발견하고 잠시 한 잔의 와인으로 꼬였던 뇌 회로를 풀어주고 뜨거운 심장을 잠시라도 식혀본다. 지금까지 쓴 책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 붙잡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고 그러다 다시 쓰는 작업을 반복하다 탄생될 책이 될 것이다. 심지어 힘들게 수정을 거듭하던 원고를 아예 분실하는 뼈아픈 아픔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은 이 책에 대한 남다른 문제의식과 언어의 쓸모가 곧 한 사람의 쓸모를 결정한다는 결정적인 신념 덕분이다. 나는 내가 사용하는 언어다. 언격이 곧 인격이고 품격을 결정한다. 


이제 결론을 쓰면서 화룡점정의 순간이 다가옴을 몸으로 느낄 수 있을 때, 지난 몇 개월의 우여곡절과 파란만장한 궤적이 스쳐 지나간다. 사실 이 원고는 오래전부터 내가 꼭 해보고 싶은 지적 도전의 증표이자 공부하고 연구하며 강의하고 글 짓는 모든 사람들에게 언어적 마력이 지니는 위대한 힘을 증명해보고 싶었던 책 쓰기의 산물이다. 언어는 생각의 옷이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지니고 있어도 그걸 드러낼 언어가 없으면 생각은 사각지대로 전락한다. 언어는 세상을 다르게 보는 안경이다. 언어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늘 예전대로 보인다. 언어적 안경이 바뀌어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바뀐다. 



다행히 탈골되기 전에 탈고의 끄트머리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탈고의 끝에서 나는 다른 책의 원고를 시작할 것이다. 한 권의 책을 탈고하는 순간, 나는 다시 다른 원고를 붙잡고 지적 탐험의 세계로 빠질 것이다. 그 탐험이 험난하고 위험할지라도 나의 체험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가장 강력한 비법은 책을 쓰는 일임을 반복해서 새삼 깨닫고 있다. 수고한 당신, 책 쓰기의 고수로 가는 길 위에서 오늘도 더 낮은 자세로 세상을 보듬어 안고 사람을 향하는 따뜻한 애정의 손길을 내민다. 손발이 움직여 쓰는 글발이 입으로 전달하는 글발보다 더 위력적임을 오늘도 몸으로 깨닫는다. 이빨은 썩지만 글발은 썩지 않는 이유다. 오늘도 글발을 단련하기 위해 어제와 다르게 부지런히 손발을 움직인다.


텍스트북 와인을 마시면서 한 권의 텍스트를 탈고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이 개념 없이 살아가면 안 되는 5가지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