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터디는 지적 정열의 연대와 관계망이 꽃피는 뜨거운 터전입니다.
이번 주 토요일은 예정했던 대로 마이클 폴라니의 《개인적 지식》, ‘6장: 지적 정열’을 같이 공부하는 시간입니다. 6장에는 과학자와 과학자가 하는 일이 객관적인 입장을 갖고 제삼자의 자세로 섬에 머물며 관조하는 게 아니라 뜨거운 열정과 감정과 정서적 몰입으로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키는 예술적 작업이라고 나옵니다. 늘 그렇듯이 폴라니의 텍스트는 읽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원서와 대조하면서 꾸역꾸역 읽어나갈수록 폴라니의 사유체계가 지니는 정밀함과 지적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음을 조금씩 감으로 다가오면서 지적 희열도 느끼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런 지적 정열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안타까운 학동들이 있어 깊어가는 가을밤의 적막을 깨 봅니다. 지금부터 내일 어떻게 하면 안 나올 것인지를 연구해서 저에게 메일과 쪽지 보내지 말고 다 같이 모여서 지적 정열을 불태우는 스터디를 합시다. 한 권의 책을 같이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깨우침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지를 우리가 몸소 겪어보지 않았습니까? 더구나 폴라니의 《개인적 지식》은 우리가 지향하는 지식생태학적 지식관의 정초를 이루는 신념과 열정의 결정체, 인격적 지식의 근간이지 않습니까? 인격적 지식을 모르고서야 어떻게 우리가 나아닌 다른 사람의 인격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감성이나 감정을 기반으로 발동되는 정열과 열정이 과학적 발견과 정당화의 맥락에 편파적 의견을 개입시키는 오염원으로 간주하는 전통적인 실증 과학에 우리 모두 싫증을 내야 합니다. 모든 탐구는 탐구 주체의 열정과 신념과 가치판단이 초기부터 강하게 개입하는 예술적 창작과정입니다. 폴라니가 과학은 예술적 작품이라고 선동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술가는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대상에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열정을 보여주고 정열적으로 몰입합니다. 과학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지적으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발견에 열정을 불태웁니다. 그것이 바로 과학자가 보여주는 발견적 열정입니다. 발견적 열정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뭔가를 발견하려는 과학자의 열정은 비록 비래 무엇을 발견할지 모르는 불확실성이 늘 상존하고, 지속적인 노력을 전개해도 어떤 발견을 할 수 있을지 결정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호기심을 잃지 않고 과학적 탐구를 지속하려는 끈질긴 열망의 산물이다. 과학자가 발견적 열정을 잃는 순간 과학자의 존재 이유도 상실됩니다. 과학자는 오로지 발견적 열정이 살아 숨 쉴 때만 살아 숨 쉽니다. 발견적 열정은 개인적 탐욕이나 이익의 추구를 넘어섭니다. 나의 질적 열정이 공동의 선을 위해 기여할 수 있도록 헌신하는 공적인 열망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스터디에 참석하는 과정에 얼마나 뜨거운 발견적 열정을 보여주고 있나요? 폴라니도 말하지 않습니까? “지적 정열로 인도되지 않는 모든 탐구과정은 반드시 잡동사니의 사막으로 내 팽개쳐질 것이다(212쪽)”라고요. 저도 핑계와 이유를 대면 스터디에 자주 나갈 수 없습니다. 제가 격주 토요일 스터디에 가급적 빠짐없이 참석할 수 있는 원동력은 저에게 스터디는 다른 어떤 일보다 소중한 깨우침의 세계로 몰입하는 발견적 열정의 시간이자 여러분들을 이전과 다른 호기심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설득적 열정의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자세입니다. 스터디는 그냥 한가한 사람이 모여서 관념적 담론을 주고받는 개념 성찬 모임이 아니라 한 학자가 주장하는 낯선 지적 세계로 몸을 던져 다 우선 파고들어가 저자의 세계로 흠뻑 빠져본 다음 다시 빠져나와 그것이 나의 삶에 어떤 의미와 시사점을 던져주는지 함께 토론해보고 치열하게 고뇌하는 열정적 연대의 시간입니다.
스터디는 그래서 가족과 친구들의 결혼식보다 더 소중한 지적 정열의 공감대가 이루어지는 카이로스의 시간이며, 가족 모임이나 동료들과 놀이 약속보다 더 의미심장한 각성과 반성과 성찰의 시간입니다. 스터디는 여러분이 반드시 참석해야 되는 공식적인 수업의 일환입니다. 스터디가 공식적인 수업이 아니라 나가도 좋고 안 나가도 좋다는 저마다의 관례를 누군가 만들어서 근면하게 실천한 덕분에 안 나와도 아무러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죄책감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어느새 암묵적으로 그런 관례를 따르는 학동들이 악동으로 변질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적 신뢰와 책임의 연대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몸소 느낍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착하다는 성선설이나 악하다는 성악설을 떠나 우선 나 자신부터 깊이 반성해봅시다. 나는 그동안 스터디를 안 나오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스터디에 나오지 않는 것은 나태와 무관심의 결과가 아니라 나오지 않기 위해서 매번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사투를 벌인 끝에 나도 모르게 생긴 근면의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모임에 참석하기로 다 같이 약속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공동체는 변칙이 판을 치고 리더십은 붕괴되며 전통은 심한 진통을 겪기 시작합니다.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이 담보되지 않고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기 시작합니다.
나도 스터디 시간에 강의가 들어옵니다. 강의 가면 90분에 ???만원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삶의 원칙은 선약 우선주의입니다. 먼저 약속된 일정을 일관되게 따른다는 원칙을 지키면 심리적 동요도 없습니다. 스터디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스터디는 언제나 뒷전이고 다른 일이 우선순위로 작용하는 것이죠. 친구가 결혼하기로 해서 가야 되기 때문에 스터디는 내가 안 나가도 된다는 안이한 발상, 가족 모임이 있는데 스터디를 포기해도 된다는 대학원생의 본분을 망각하는 몰지각한 생각, 강의가 잡혀서 스터디에 못 온다는 이유 등 저마다 그 이유가 제각각입니다.
앎은 효과적인 행위라고 《앎의 나무》에서 배웠습니다. 삶은 앎과 분리될 수 없고 매일 반복한 함 역시 앎과 더불어 돌아가는 삼위일체입니다. 앎과 삶과 함이 분리되지 않는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우리들의 공부하는 삶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도록 앎의 등대가 삶에서 생겨납니다. 스터디는 한 권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이 아니라 오늘부터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앎을 점검해보고 삶에 비추어 그 앎을 재해석해보는 숭고한 결단과 결행의 기반을 다지는 시간입니다.
스터디는 취미 생황의 일부가 아닙니다. 스터디에 완전히 취(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취(取)할 수 없습니다. 흠뻑 빠져서 폴라니가 심어놓은 의미의 껍질 속으로 파고들어가 무슨 의도와 의미를 말하고 싶은 것인지 깊이 생각해보고 다시 빠져나와 그것이 내 삶과 전공 공부에 무슨 의미와 시사점이 있는지를 깊이 따져보는 시간을 반복할수록 어느 순간 놀라운 반전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순간은 반드시 오지만 언제 올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진지한 실천을 반복하는 사람에게만 반전의 선물이 다가옵니다. 그 선물을 받으러 우리 모두 스터디에 가열차게 참여합시다.
웬만하면 같이 나와서 폴라니의 지적 정열의 바다에 빠져봅시다. 남의 논문에 인용된 폴라니의 암묵적 지식과 형식적 지식, 초점식과 보조식만 2차 인용하지 말고 이 기회에 원전을 파고들어 봅시다. 원저자의 문제의식을 심연의 바다에서부터 파고드는 열정적인 공부가 여러분의 지적 탐험에 정열적인 에너지를 제공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지식생태학 캠프 주동자 유영만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