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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색깔 무지개를 띄우는
강사의 7가지 비밀 병기

지각 불가능한 것과의 피할 수 없는 마주침이 깨우침을 낳는다


《개인적 지식》(참고 6장 ‘지적 열정’)을 쓴 마이클 폴라니에 따르면 미지의 세계로 몸을 던져 뭔가를 찾아내려는 발견적 열정(heuristic passion)과 마침내 구축한 과학적 이론을 후학들에게 알려주려는 설득적 열정(persuasive passion)이 만날 때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혁명이 일어난다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무거운 짐(load)을 짊어지고 의미의 바다에서 유영(遊泳)하며 길(road)을 찾아가는 끊임없는 암중모색(groping for the meaning of the facts)의 연속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 사실과 마주칠지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설혹 만난다고 할지라도 그 의미를 분명하게 밝혀낼 수 없는 미결정성(indeterminacy)이 사람을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지금까지 읽고 경험하면서 나도 모르게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지적 프레임워크(intellectual framework)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좌우한다. 기존 프레임만으로는 새롭게 부각되는 의미의 바다를 이전과 다르게 해석해낼 수 없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언제나 내가 선호하는 감각적 색채(emotional color)로 물들어 있다. 내가 쓰고 있는 안경의 색깔대로 세상이 보이듯이, 내가 어떤 감각적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세상은 이전과 전혀 다르게 보인다. 문제는 나의 감각적 편향성은 경계 너머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이전과 다른 감각적 자극을 받지 않으면 고착화된다. ‘넘어섬’의 경험이란 지각 불가능한 것과의 피할 수 없는 마주침이라 질 들뢰즈도 《차이와 반복》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지각 불가능한 것과의 마주침의 경험이 있어야 이전과 다른 감각적 색채로 물들여진다. 끊임없이 지금 여기의 세계를 넘어서려는 안간힘이 필요한 이유다. 



뭔가를 배우고 싶은 사람에게 장애물은 없다. 한 번 앎의 바다에 빠지면 그 어떤 외부적 힘도 멈추게 할 수 없다.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는 욕파불능(欲罷不能)의 상태로 돌입한 것이다. 배움에의 갈망과 앎에 대한 강한 호기심, 그리고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어보겠다는 불굴의 의지와 열정은 한계를 만나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더욱 적극적으로 온몸을 던져 발견의 욕구를 불태운다. 욕파불능의 상태로 진입한 사람은 한계는 한 게 없는 사람의 핑계라고 생각한다. 한계는 책상에서 알 수 없다. 오로지 내 몸을 던져 한계 상황에서 도전을 반복할 때 감각적으로 느낌이 온다. 지금이 한계라고. 그때 몸에서 들리는 소리가 바로 한계 신호다. 한계를 몸으로 만나본 사람만이 거기서 도전을 멈추고 다른 미지의 세계로 도전을 반복한다. 이번 도전에도 여전히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거기서 어떤 의미심장함을 건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불가지의 세계를 불가능으로 설정하지 않고 영원히 도전을 반복하면서 어제와 다르게 깨달음을 얻으려는 지적 열정(intellectual passion)을 불태울 뿐이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의 세계에 비록 도달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어둠을 배경으로 늘 어제와 다른 동경심을 마음에 품고 오늘도 도전을 반복할 뿐이다. 하지만 내가 추구하는 미지의 세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으며, 거기에 이르는 길이 정확한 절차나 프로세스로 사전에 철저하게 계획되어 있다면 인생은 더욱 살아갈 재미가 없을 것이다. 불확실한 의미의 바다이면서 언제 어떤 파도와 함께 나에게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삶의 의미를 추구(persistent pursuit)하는 지적 열정(intellectual passion)을 잃지 않는다면 생각지도 못한 색다른 세계를 발견(discovery)할 수 있다.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나의 무지함을 깨우치는 감동과 감탄의 인식으로 이끌어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결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불확실한 세계지만 그럼에도 뭔가를 발견하려는 열정(heuristic passion)은 마침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운 기적을 만나게 해 준다. 그것이 나를 비롯해 우리들이 살아가는 지금 여기서 어떤 의미와 시사점이 있는지를 따져 묻는(valid) 가운데 한 개인의 신념과 철학, 열정과 믿음이 축적된 믿음의 체계(systems of belief)로서의 과학적 이론(scientific theory)이 산고 끝에 세상으로 나온다. 이런 과학적 이론이 발견하기도 전에 성과(fruitful)가 있는지는 참(true)인지는 알 수 없다. 오로지 참일 것이라는 강한 암시만을 믿고 노력하는 가운데 과학적 발전과 성장을 가늠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혁명이 일어난다, 사투 끝에 발견해서 하나의 이론적 체계로 만들어낸 믿음의 체계인 과학적 이론은 이제 아직 경지에 이르지 못한 후진들에게 선진은 자신이 발견한 성과를 알려주려는 설득적 열정(persuasive passion)을 발휘한다. 선진의 입장에서 볼 때 후진은 답답하기 그지없고 때로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진의 소명이자 사명은 자신이 발견한 기쁨과 즐거움을 후진에게도 고스란히 전하고 싶은 강렬한 열망에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선진의 이런 설득적 열정에 부응하는 후진의 발견적 열정이 자주 만날 때 운명을 바꾸는 지적 혁명은 계속될 것이다. 이때 후진은 즐거운 마음으로 성심을 다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믿고 복종하는 심열성복(心悅誠服)의 자세가 필요하다. 알고 나서 믿는 게 아니라 믿어야 앎의 강도(强度)가 올라간다. 사투 끝에 도달한 스승의 경지를 믿고 충성을 다해 믿고 따라갈 때 서광 속에 휘몰아치는 깨달음의 광휘가 몰아칠 것이다.



한 사람의 마음에 일곱 색깔 무지개를 띄우는 강사의 7가지 비밀병기


스승의 이런 가르침으로 어둠 속에 헤매는 제자들의 세계에 일곱 색깔의 무지개를 띄우는 7가지 비밀 병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강사는 알고 있는 지식을 전달하는 보통명사로서의 강사(講士)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지향하는 강사(講師)는 발견적 열정으로 깨달은 체험적 지혜를 설득적 열정으로 후세대에게 전달하려는, 즉 온몸으로 살아오면서 깨달은 체험적 깨달음을 자기만의 언어로 녹여서 전달하는 삶의 스승이다.



강사는 정관사(定冠詞).


정관사(the)는 유일무이한 대상이나 사람에게 붙이는 품사다. 강사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강의, 대체 가능한 강의를 할수록 나의 경쟁력은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똑같은 분야의 내용이라도 내가 하면 뭔가 다르게 전달되는 강의 라야 내가 강의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 남들처럼 강의하지 않고 나처럼 강의할 때 가장 나다운 강의가 되며, 그런 강의 라야 남과 비교할 수 없는 색다른 강의로 평가받을 수 있다. 강의가 정관사인 이유는 나만이 할 수 있는 강의로 이름을 남기는 깨달음의 전도사기 때문이다. 한 강사가 주는 깨달음의 충격은 오로지 그 강사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각성의 목소리다.



강사는 대명사(代名詞).


대명사는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을 대신 나타내는 말 또는 그런 말들을 지칭하는 품사다. 대명사는 품사를 넘어서 어떤 속성을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한 분야의 경지에 오른 경험을 녹여내는 전설적인 전형이나 모델을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나만이 강의할 수 있는 분야를 계속해서 어느 정도 명성이 쌓이면 특정 분야를 지칭하면 바로 특정 강사가 떠오를 때, 그 강사는 대명사가 된 것이다. 대명사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정관사다. 정관사로서의 강사가 치열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반복해서 수련할 때 위대한 반전이 일어나면서 대명사로서의 강사가 태어난다.



강사는 접속사(接續詞).


강사는 수많은 삶의 다양한 사연과 사건의 끝(End)을 독창적인 문제의식으로 연결(AND)해서 새로운 사유의 꽃을 피우게 만드는 연금술사다. 끝과 끝(End AND End)의 무한 연결 속에서 우리들의 삶이 이루어진다. 즉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 순간 경험하는 감동적인 순간이나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 나도 모르게 당하는 사고의 끝에서 온몸으로 배운 교훈을 반추하고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만들어주는 주인공이 바로 접속사로의 강사다.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다시 도전하게 만드는 ‘그럼에도’라는 접속사로 좌절과 절망 대신 희망과 용기를 전해주는 역발상과 역전의 용사가 바로 강사다. 겉으로 드러난 피상적 의미에 머물지 않고 사건과 사고의 끝에서 연결의 상상력으로 비상하게 만드는 디딤돌이 강사다. 


강사는 자동사(自動詞).


자동사는 동력의 원천을 내부에서 주체적으로 얻는다. 반면에 피동사는 나 아닌 밖의 힘으로 어쩔 수 없이 움직이는 동사다. 강사는 피동적으로 움직이던 사람을 어떤 계기나 각성으로 주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힘의 원천을 전환시켜주는 사람이다. 이런 점에서 강사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해주는 동기부여가(動機附輿家)다. 강사는 지금까지는 누눈가 또는 누군가의 생각에 의지(依支)하며 살아온 사람에게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의지(意志)를 심어주는 사람이다. 강사가 자동사인 이유다. 강의는 무엇보다도 남의 힘이나 환경에 지배당하면서 종속되어 살아가던 피동사(被動詞)로서의 삶에 종지부를 찍게 만드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강사는 형용사(形容詞).


형용사는 명사를 수식하는 품사다. 어떤 형용사가 명사 앞에 위치하는지에 따라서 명사의 존재 이유와 정체성도 색달라진다. ‘열정적인’ 유영만 교수라는 표현에 형용사, ‘열정적인’이라는 말은 유영만 교수의 특징을 부각해 준다. 마찬가지로 강사는 무채색으로 살아가던 사람에게 나만의 고유한 색깔이 무엇인지를 깨우쳐준다. 나에게 어울리는 색깔은 내가 하면 나의 정체성을 가장 드러내는 상징적 지표다. 칼라 강사가 어울리는 색깔을 추천해줄 수는 있지만 그것이 나에게 어울리는지의 여부는 나만이 알 수 있다. 색깔은 내가 하면 재미난 능력, 재능이자, 가장 나다움을 드러내 주는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이다. 강사는 저마다 사람에게 어울리는 형용사를 찾아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내며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칼라 테라피스트다. 


강사는 감탄사(感歎詞).


강사는 무엇보다도 힘든 하루하루를 버티며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되는 이유를 감동으로 전달하는 사람이다. 강사의 업의 본질은 감탄사 제조업이다. 몰랐던 사실을 깨우쳐주고, 알고 있지만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해 주고 이전과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들어주는 관점 제시자다. 강사는 남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설명하며 의미를 강조하기보다 체험적 스토리로 설득하고 감동시켜 행동하게 만드는 행복 전도사다. 강사의 강의는 만족을 넘어 감동과 감탄을 불어올 때 앙코르 강의를 요청받는다. 청중에게 감탄사를 선물하려면 강사가 먼저 일상에서 비상하는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매 순간을 감동적인 시간으로 보내는 체험적 스토리를 만들어야 한다. 



강사는 요리사(料理師).


강사는 청중의 관심사를 자기 방식으로 맛깔나게 조리하는 지식 요리사(Knowledge chef)다. 지식 요리에 필요한 건 무엇보다 요리의 재료가 지닌 신선함과 독특함이다. 강사의 지식 요리 재료에는 주로 강사 자신이 겪은 경험과 읽은 책이나 본 영화, 만난 사람과의 사연 등이 포함된다. 요리 수준을 가늠하는 핵심적인 경쟁력은 요리사의 지극한 정성과 자세와 태도는 물론이고 어떤 양념을 섞어 어떤 방법으로 음식재료로 요리하는지에 달려 있다. 똑같은 재료도 요리사에 따라 전혀 다른 음식 맛이 나기 때문이다. 지식 요리 레시피는 독창적인 콘텐츠를 창조하는 강사만의 노하우다. 특급 요리사의 요리 비법이 있듯이 특급 강사의 지식 요리 비법만이 수많은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감동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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