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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새로운 지혜

위기가 오고 있다, 생각을 바꿔야겠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새로운 지혜

위기가 오고 있다생각을 바꿔야겠다:



코로나 19 사태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고 있다. 당분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엄습하고 있다. 나아가 앞으로도 우리는 코로나 19와 비슷한 바이러스 창궐을 더 자주 경험할 것이라는 또 다른 불안감이 가중될 때 우리 모두의 화두는 이런 난국을 어떻게 건널 것이며, 지금과 다른 세계관으로 탈바꿈을 시도할 마땅한 대안을 모색해야 된다는 부담감이다. 분야별 전문가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예측하는 움직임도 다양한 미디어 채널을 통해 모색되고 있다. 전문가는 전문적 지식과 식견을 근간으로 자기주장을 펼치는데 유력하다. 하지만 자기 분야를 넘어서는 다른 현상은 예측 자체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좌정관천의 어리석음을 범하면서 오히려 잘못된 길로 오도할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다. 섣부른 예측이 통하지 않는 이유는 아무도 어떤 변화가 우리를 엄습할지 모른 상황이 불확실성 속에서 먹구름으로 잠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모든 예측은 자기 안경으로 바라본 미래의 풍경일지 모른다. 방대한 빅데이터를 근간으로 성향과 패턴을 찾아 미래를 예측하는 시각도 여전히 인간의 해석력에 따라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미래의 흐름을 예단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지금까지의 삶을 반성하고 성찰하면서 그동안 범했던 오만과 과오를 냉정하게 되짚어보는 것이다. 인간의 자만과 오만이 불러온 파국이 다시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최소한 어떤 자세와 태도로 삶을 다시 바라봐야 하는지를 깊이 숙고하면서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탐색해보는 수밖에 없다. 이런 노력은 지금부터의 삶은 지금까지의 삶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삶으로 선회해야 한다는 심각한 위기의식의 소산이자 냉정한 자기반성과 집단적 성찰의 산물이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우리는 생태적 자각과 성찰을 통해 이전과 전혀 다른 세계관으로 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거대한 관계망의 일부라는 깨달음으로 나 아닌 다른 생명체를 함부로 대하는 일체의 생각과 행동을 멈춰야 한다. 이어서 우리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와 의미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면서 밖으로 향했던 시선을 나에게 돌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일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찾아보면서 이전과 다른 새로운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선물로 주는 사람이 되려면 내가 먼저 내가 하면 기쁜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거기에 몰입하고 몰두해야 한다. 이런 기쁨을 나눌 수 있는 타자와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감성적 공감과 소통을 통해 더욱 따뜻한 정감이 오고 가는 행복한 인간관계를 가꾸어나가야 한다. 나와 다른 타자를 만나는 순간, 그 사람과 나 사이에는 수많은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인격적으로 존중해주면서 사이좋은 관계 속에서 새로운 차이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런 노력은 수많은 상황에 직면하면서 이전에는 몰랐던 색다른 체험적 통찰력과 안목을 제공해주면서 딜레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올바른 생각과 행동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숙고하고 판단해서 과감하게 행동하게 만드는 실천적 지혜를 선물로 가져다줄 것이다. 실천적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은 개인적인 이익과 안위보다 공동체의 목적과 선을 위해 기꺼이 자기 몸을 던지는 사람이다. 실천적 지혜는 다양한 상황에서 맞닥드리는 회색지대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나의 목적과 의도에 맞게 재해석하면서 그 누구도 보유하고 있지 않은 나만이 콘텐츠를 창조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똑같은 상황에서 같은 시간에 있었어도 누군가는 그 상황에서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서 자기만의 맥락적 깨달음을 몸으로 배우는 사람이 있다. 이런 깨달음은 다른 사람과의 인간적 신뢰와 연대를 만들고 새로운 공동체 구축하는 기반으로 작용한다. 삶으로 앎을 증명하는 사람들에게 생긴 인간적 신뢰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원칙으로 일관된 신념을 보여주는 사람과의 연대를 만들고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한 공동체를 만드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생태적 자각과 성찰 그리고 새로운 세계관으로 전환 


교육의 주된 임무 중의 하나는 이전과 다른 깨달음을 통해 각성하는 사건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면 안 되겠다는 대오각성이면 금상첨화다. 지금까지 해왔던 우리들의 행동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나는 물론 우리들의 생명 자체가 보장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심어줄 때 교육은 우리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지금 우리 교육이 가장 강조해서 각성하는 사건을 만들어야 할 주제는 바로 생태적 자각과 성찰을 통해 이전과 전혀 다른 세계관으로 우리들의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나가는 것이다. 생태학적 성찰은 생태계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의 생명활동 방식에 비추어 인간적 삶을 반성하고 각성하자는 이야기다. 나의 작은 행동이 나를 둘러싸고 살아가는 무수한 생명체에 그대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개인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체가 아니라 연대를 만들어가는 거대한 관계망의 일부다. 율라 비스의 《면역에 관하여》라는 책에 보면 “우리는 늘 서로의 환경이다. 면역은 공유된 공간이다. 우리가 함께 가꾸는 정원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어서 “면역은 사적인 계좌인 동시에 공동의 신탁이다." 서로의 환경으로 작용하는 우리가 각자의 면역에 신경을 써야 되는 이유는 개인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집단의 건강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내가 무심코 버리는 쓰레기는 환경오염의 주범일 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체의 삶에도 직접 영향을 미치는 장본인이다. 쓰레기를 생산하지 않는 생태계에 비해 인간적 삶은 엄청난 쓰레기를 양산하는 자본주의의 탐욕에 걸려 헤어 나오지 못하는 형국이다. 이번 코로나 19 사건도 인간의 자연파괴와 환경오염으로 박쥐의 바이러스를 옮기는 인간을 하나의 숙주처럼 활용하면서 시작된 팬데믹(pandemic)이다. 숙주 없이 바이러스는 3시간 내외에 죽는다고 한다.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무한 소비와 무한 생산, 수요가 없음에도 계속 생산을 멈추지 않고 과잉생산을 부추기는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무한대로 부추기면서 대량생산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놓여 있다. 멀쩡하게 잘 쓰고 있는 스마트 폰의 신규 버전이 출시되면 나는 그걸 사지 않으면 불안하게 만드는 광고와 마케팅이 나의 물욕을 자극하고 무리를 해서라도 그걸 사게 만드는 게 자본주의 탐욕이다. 이런 자본주의의 헛된 야망과 인간의 욕망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고 성찰하지 않으면 지구는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소비가 무한대로 확산될수록 자연은 더 파괴되고 온난화는 가속화될 것이다. 사람이 만든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사람은 자본에 잠식당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를 붕괴함은 물론 환경과 생태계를 파괴하는 주범으로 등극하는 악순환이 더 빠르게 가속화되는 실정이다. 생태학적 감수성으로 생명체가 살아가는 생태계가 인간 세계와 맺고 있는 상호의존적 관계를 성찰해보고 생태학적 상상력을 촉발시켜 우리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공동체임을 더욱 강조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개인적 각성과 전망그리고 새로운 가치의 추구


코로나 19 사태가 본격화된 이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 읽기와 책 쓰기에 몰입을 넘어 흠뻑 빠져서 한 동안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 외롭고 괴로운 시간의 연속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에게 지난 몇 개월은 물리적으로 흐르는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이 아니라 나에게 의미심장한 보람과 가치를 제공해준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이었다. 시간에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와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간인 '카이로스'로 구분된다. 시간이 나서 어쩔 수 없이 뭔가를 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똑 같이 주어지는 물리적인 크로노스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고, 시간을 내서 의도적으로 뭔가를 하는 사람은 저마다 다른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카이로스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다. 세상은 크로노스보다 카이로스의 시간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바꿔 나간다. 똑같은 물리적 시간이 흘러가도 누군가에는 전대미문의 새로운 창작의 시간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누군가의 눈치를 보거나 사회적 일방적으로 정한 가치판단 기준에 비추어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오히려 카이로스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하면 재미있고 즐거운 재능이나 적성을 찾아 몰두하고 몰입하며 뭔가를 창작하는 과정을 즐긴다. 비교의 기준이 내 밖에 있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어제의 나다. 나는 오늘 어제의 나보다 뭐가 나아지고 있는지 스스로를 반성하고 성찰하며 지금까지의 삶과는 다른 삶을 전망하며 이전과 다른 가치를 추구한다. 사회가 정한 기준이나 남이 정한 가치에 나를 매몰시켜 그것들과 나를 비교하는 삶은 살아갈수록 피폐한 삶이 이어진다. 카이로스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남과 비교하는 삶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나에게 기쁨을 주는 행복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 보람을 느끼면서 끊임없이 나를 창조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푸코가 《주체의 해석학》에 말하는 ‘자기 배려’라는 철학을 구현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자기 배려는 “단 한 번도 되어본 적이 없는 자기가 되기” 위해서 기존의 “자기를 포기”하고 이전과 다른 나로 부단히 변신하는 모습이다. 자기 배려는 외부로 향하던 시선을 우선 내면으로 향하게 만들어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지 않으면 기존의 자기가 갖고 있는 한계와 무지를 모른다. 따라서 자기 배려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과거의 자기에서 벗어나 ‘자기에 의한 자기의 구축,’ 혹은 자기 자신의 ‘작품화’다. 세상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오로지 나만이 창조할 수 있는 전대미문의 나를 작품화시키는 과정에 필요한 노력이 바로 ‘자기 배려’다. 남과 경쟁하며 자기를 소진시키는 자아실현이나 자기 계발 노력을 멈추고 나의 색다름에 주목하며 나다움을 만들어가는 자기 배려에 주목할 때 나와 다른 존재에게도 존중과 존경으로 배려를 해줄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자기 배려는 난생처음으로 밖으로만 향했던 시선을 안으로 돌려 진정 나답게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모색하는 개인적 각성이자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한 위대한 터닝 포인트다.



감성적 공감과 소통그리고 새로운 인간관계의 회복


코로나 19 사태는 사회적 거리를 두더라도 우리는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개체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이자 연대라는 점이 더욱 분명하게 밝혀졌다. 나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사람의 문제가 곧 나의 문제이자 우리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나 하나쯤이야”라는 안이한 생각이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연쇄적인 감염을 일으키고 그것이 또 다른 연결을 통해 무한대로 확산되는 전염의 공포는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각성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거리 두기가 일상화된다면 인간적 접촉으로 만나는 만남보다 비대면 접속으로 만나는 만남이 우리들의 일상이 될 것이다. 만날 수 없는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소통을 통해 서로의 처지를 공감하고 보듬어주는 서로의 노력이 필요하다. 나와 다르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소통 불가능이라는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사실은 드러났지만 진실은 여전히 오리무중 일 때 무책임하게 퍼트리는 가짜 뉴스는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당사자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심하게는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수도 있다. 서로가 모르는 상태에서 몇 가지 증상이나 겉으로 드러난 피상으로만 판단하고 무차별 공격을 가하거나 집단 따돌림 현상을 주도할 때 소통의 연대망은 순식간에 파괴되고 분노와 적개심의 네트워크만 잔존하게 된다. 



거리두기를 유지하되 더욱 살가운 인간적 관계는 타자가 겪고 있는 사연과 배경을 염두에 두고 배려하고 존중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내가 모르는 상황에서 전혀 다른 아픔을 겪고 있을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내가 판단하는 지금의 상태는 내가 알고 있는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내가 모르는 상대방의 정황을 파악하는 방법은 인간적 존중과 배려를 기반으로 마음 깊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질문 없이 타자를 이해하는 관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 직접 만날 수는 없어도 오프라인 만남보다 더 자주 소통함으로써 살아가는 가운데 느끼는 일상의 소회(素懷)를 나눌 때 비로소 물리적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소회에는 그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하찮은 소감일지라도 거기에는 말 못 할 사연이나 회한이 묻어난다. 하찮은 말 한마디라도 귀담아 들어줄 때 비로소 상대 역시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준다.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으면 상대의 마음으로 들어갈 수 없고 서로는 각자의 방향으로 기울어지면서 소원해진다. 진정한 소통은 자기 변화를 전제로 한다. 공감이 생기지 않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나는 바꾸지 않고 타자에게 일방적으로 바꾸라고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미 결정된 나의 마음으로 타자에게 나의 입장을 알아달라고 요구할 때 그건 소통이 아니라 소탕에 가깝다. 우리 모두는 정현종 시인의 <비스듬히>라는 시에 나오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 를 받치고 있는” 인간관계 속에서 나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찾아간다. 한 생명은 다른 생명에 비스듬히 기대면서 오늘과 다른 내일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관계의 산물이다. 



인격적 사이와 차이그리고 새로운 인간상 정립


흔히 전문가는 넓이보다 깊이 파고들어가는 사람이다. 깊이 파고들어가다 보니 다른 깊이와 만날 가능성이 희박해지고 자기가 판 우물에 매몰될 가능성도 있다. 전문가가 다른 전문가와 만나서 자주 소통해야 되는 이유다. 깊이만 파고들어가는 전문가가 기피 대상이 되는 이유다. 깊이가 없는 전문가도 기피 대상이 되지만 깊이만 추구해도 기피 대상이 된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전문가는 자주 나와 다른 전문가와 일정한 거리를 두되 자주 만나서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존중해주고 함께 만나서 공동으로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봐야 한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틀림이 아니라 다름으로 간주하고 그 차이 속에서 위대한 가능성의 싹이 자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전문가와 전문가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에 주목하고 이질적 전문성을 융합, 색다른 전문성을 창조하는 전문가를 ‘사이 전문가’(호모 디페랑스·Homo Differance)라고 한다. ‘디페랑스’는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가 영어의 ‘차이(difference)’로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차이를 시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 연기해놓자는 의미로 ‘차연’ 또는 ‘차이(差移)’라는 개념으로 새롭게 창조된 개념이다. 호모 디페랑스는 생각하는 지혜로운 인간, 호모 사피엔스 사이를 좋게 만드는 사이 전문가다. 좋은 사이가 좋은 관계를 만든다. 사이가 좋으면 그 사이에 어떤 차이도 차별받지 않고 잘 살아간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어제와 다른 차이를 반복하며 어제와 다른 나와 너로 변신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양지와 음지, 남과 여,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 높이와 깊이, 바닥과 정상, 희망과 절망, 걸림돌과 디딤돌, 흑과 백, 어둠과 밝음, 배경과 전경 사이를 넘나들며 색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는 전문가가 바로 사이 전문가다. 코로나 19 이후 뉴 노멀 시대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전문가가 바로 전문가와 전문가 ‘사이’의 ‘차이’에 주목하는 ‘사이’ 전문가, 호모 디페랑스다. 호모 디페랑스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아무리 해도 전문가와 전문가 사이를 다양한 방법으로 매개해서 두 사람 이상의 전문성의 차이가 융합되어 새로운 차이를 창조하는 전문가다. 전문가와 전문가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존중해주는 미덕을 전제로 새로운 차이를 무한 반복해서 양산하는 호모 디페랑스야말로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미래의 바람직한 전문가상이다. 사이 전문가는 내가 아는 전문성만으로는 나를 비롯해 세상을 바꾸는 데에는 치명적인 한계가 존재함을 인정한다. 내가 갖고 있지 못한 다른 사람의 전문성과 부단히 만나면서 혼자 힘으로 해낼 수 없는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게 만드는 파수꾼이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차별의 장본인이 아니라 특별한 가치를 창조하는 원동력이다. 사이 전문가는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에 주목하면서 오늘과 다른 우리 사이로 거듭나게 만들어주는 변화의 촉매제다.



⑤체험적 통찰과 직관그리고 새로운 지혜의 습득


코로나 19는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금시초문의 사건이자 사고다. 사건은 내가 의도적으로 일으킨 일이라면 사고는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내가 당한 일이다. 코로나 19는 누가 일으킨 사건인가. 내가 보기에 박쥐를 비롯해서 동물들이 인간의 오만과 자만에 가한 일종의 습격이다. 코로나 19는 자연을 무한정 개발하면서 파괴해온 인간에게 경종을 울리면서 우리는 모두 하나로 엮어진 거대한 관계망의 일부임을 제발 뼈저리게 느끼라는 적색 경고등이다. 하나의 미물에 지나지 않지만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우리들의 일상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뿌리가 흔들리고 근본 가정을 뒤흔드는 바이러스는 지금까지의 삶을 근본부터 다시 성찰해보라는 메시지를 갖고 우리들에게 다가온 역사적 메신저일지도 모른다. 이런 극도의 위기를 몰고 온 코로나 19를 주기적으로 창궐하는 바이러스 습격으로 보고 이걸 어떻게 박멸할지에 대해서만 고민한다면 인류는 생각지도 못한 난국으로 빠져 들어갈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이전과 다른 깨달음을 얻고 다가오는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를 준비한다. 자연의 변화는 무목적성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나무가 어떤 목적을 갖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지 않는다. 들판에서 자라는 많은 야생초가 언제쯤 어떤 변화를 거치면서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변신할지 예측할 수 없다. 그들은 저마다의 때를 기다리면서 자연의 흐름에 따라 수년간 생존해온 순리를 배운 지혜의 생명체들이다. 목적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계획적이지 않고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다. 언제 어디서든 우연히 뭔가가 일어날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떤 파급효과를 가져올지 아무도 모른다. 



인간이 이룩한 과학의 힘으로 자연현상은 물론 사회적 현상까지도 정확하게 예측하고 통제해서 마음먹은 대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인간의 오만한 과학 맹신주의를 근본부터 다시 재점검하고 새로운 지혜로 무장해야 될 시점이다. 인간의 힘으로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아직도 많이 존재하며 과학도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학문적 성과의 극히 일부라고 생각하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개인의 이익과 안위를 우선 생각하는 극단적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공동의 선을 위해 내가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 무엇인지를 윤리적으로 숙고하고 판단해서 과감하게 행동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phronesis)가 필요한 시점이다. 실천적 지혜는 딜레마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올바른 실천인지를 깊이 숙고하지만 빠른 상황판단력으로 과감하게 결단하고 행동하는 직관적 지혜다. 실천적 지혜는 통찰이 축적되어 생기기보다 직관이 축적되다 어느 시점에서 기적을 일으키는 지혜다. 실천적 지혜는 이런 점에서 코로나 19 사태를 견뎌내는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불확실한 시대의 생존기술이다. 실천적 지혜는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객관적인 입장에서 최선의 대안을 모색하는 직관적 통찰력이기도 하다. 실천적 지혜는 오로지 회색지대에서 고뇌하는 실천을 통해서만이 습득되는 체험적 지혜인 셈이다.



맥락적 해석과 창조그리고 새로운 콘텐츠 개발


창조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의미로 보이는 상황(situation)을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맥락(context)으로 전환될 때 일어난다. 상황은 누구에게나 똑 같이 보이는 환경(environment)이나 배경(surroundings)이다. 상황은 주변에 널려 있다. 똑같은 상황에 있어도 누군가에게는 그곳이 남다르게 와 닿거나 특이하게 기억된다. 그 상황에 나의 특별한 의미나 의도를 갖고 바라보기 때문이다. 아니면 말 못 할 사연이 그 상황에 숨어 있어서 특별한 애정의 눈길로 바라보기 때문에 상황은 그냥 저쪽에 나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상태가 아니라 깊은 관심과 해석의 대상으로 부각되는 정황(情況)이다. 상황은 화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이전에 도처에서 발견되는 무수한 광경(光景) 일수도 있다. 하지만 맥락은 무수히 많은 상황 중에서 나의 주관적 관심과 애정의 손길로 포착되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정경(情景)이다. 상황은 나와 무관하게 저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관조와 관망의 대상이지만 맥락은 나와 깊은 관계가 있어서 관심과 관찰의 대상이다. 똑같은 상황에 있었지만 거기서 경험했던 사건과 사고를 나만의 프레임으로 재해석해낼 때 그 상황은 더 이상 나와 무관한 독립적인 환경이 아니라 나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 독특한 맥락으로 다가온다.



상황은 도처에 널려 있지만 맥락은 담벼락 너머에 존재하는 상황이어도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벼락처럼 달려오는 특별한 장소다. 똑같은 상황에 똑같은 시간에 머물렀지만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한 공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깊은 의미로 다가오는 색다른 장소다. 우리가 하는 공부는 결국 익숙한 상황을 낯선 맥락으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이다. 학습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의미로 작용했던 객관적 배경으로서의 상황을 의미심장한 사랑과 의도성을 반영한 정경으로서의 맥락으로 바꾸는 과정이다. 도처에 산재하는 상황을 남다른 관심과 애정으로 눈길을 보내주고 손길을 내밀면 상황은 맥락으로 탈바꿈을 시도하면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모든 학습은 특정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맥락적 의미 창조를 일으키는 경험이다. 상황을 맥락으로 바꿔 경험하는 삶이야말로 관심과 애정으로 세상을 나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경이로운 기적의 연속이다. 오늘도 숱한 상황에 직면하면서도 거기서 얻은 체험적 통찰력으로 맥락을 재구성하는 탐색과 모험의 과정을 계속할 때 그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독창적인 콘텐츠가 창조된다.   



인간적 신뢰와 연대그리고 새로운 공동체 구축  


접속으로 만나든 접촉으로 만나든 인간적 신뢰를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연대와 공동체는 더불어 살아가는 믿음의 텃밭이다. 오랜 노력 끝에 생긴 인간관계 사이의 신뢰도 실례(失禮)를 범하는 실수(失手)가 잦아지면 금이 가기 시작하고 관계 사이에 경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신념은 옳다고 믿는 가치관에 비교적 오랜 기간의 체험적 깨달음이 추가될 때 비로소 생기는 뿌리 깊은 생각이다. 사람에 대한 믿음과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가치관에 대한 신념은 신뢰 없이는 싹이 트지 않는다. 신뢰를 기반으로 신념이 공유되고 공감될 때 조건 없는 연결과 협업의 꽃이 피며 아름다운 연대가 생기고 믿고 의지하는 공동체가 구축된다. 생전 만나보지 못한 사람과 어쩔 수 없기 연결되고 연결의 맥락에서 관계가 생기는 4차 산업혁명, 그 관계 속에 신뢰가 자라고 신념이 공유될 때 4차 산업혁명의 기술적 혁명은 관계 기반 인간적 혁명으로 꽃을 피울 것이다. 신뢰의 텃밭에서 옳다고 믿는 신념이 공유되는 연대가 조성되기 위해서는 우선 앎과 삶이 하나의 톱니바퀴로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주장하는 앎이 삶과 어긋나고 삶으로 앎을 증명하지 않을 때 신뢰라는 텃밭에는 무성한 잡초가 자라기 시작하고 그 위해서 신념이라는 식물은 자라지도 못하고 고사할 것이다. 



상황에 따라 원칙이 바뀌고 변칙이 판을 치면 인간적 신뢰와 연대는 바로 깨진다. 원칙과 규칙, 규범과 규율을 함께 지켜 나갈 때 공동체는 지속 가능하다. 공동체의 신뢰와 연대는 약속을 먹고 자란다. 약속을 밥 먹듯이 지키지 않으면 야속해진다. 약속은 함께 지키기로 합의한 쌍방 간의 규약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방대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 한 사람의 약속 불이행은 공동체의 치명적인 약점이나 아킬레스 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신뢰와 연대는 의사결정 과정이 투명하고 판단과 판정이 공정할 때 더욱 견고해진다. 공정하지 않은 평가가 자주 일어나면 힘들게 쌓은 신뢰의 연대는 사정없이 무너지고 함께 할 수 없다는 신념이 자라기 시작한다. 누가 봐도 믿을만한 기준과 잣대로 서로의 가치와 성취를 평가하고 함께 나눌 때, 그리고 그런 평가와 피드백 과정이 체중을 실은 언어로 진솔하게 교감될 때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공동체의 믿음 기반은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이런 행복한 공동체는 한 사람의 외로운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모든 구성원이 저마다의 장기와 재능을 발휘해서 서로가 서로를 위한 헌신과 몰입이 이어질 때 가능해진다. 자신이 하는 일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기쁨과 교감될 때 기쁨을 주고받는 관계와 연대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튼실한 공동체로 성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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