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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破片)은 남편(男便)보다
언제나 강력하다!

작가의 관념의 파편은 상대편을 중독시키는 아편이다

파편(破片)’은 남편(男便)’보다 언제나 강력하다!

작가가 사투 끝에 남긴 관념의 파편은 상대편을 중독시키는 아편이다


책을 읽다 작가가 남긴 관념의 파편에 아편(阿片)을 맞은 듯 온몸이 마비되고 정신에 분열이 일어나는 듯했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책을 읽다가 말고 벌떡 일어나 빈방을 오고 가며 갑자기 창밖을 내다보기도 했다. 무엇인지 분명히 설명할 수 없지만 내 사고체계의 기반을 뒤흔드는 색다른 생각이 순식간에 임신되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지적 정열이 잠들어 있다가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열정을 뒤흔들지 않았을 것이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서 다시 앉아 책을 계속 읽을 수 없었다. 파편에는 한 작가가 한 가지 주제를 놓고 사투를 벌이다 남긴 생각의 얼룩과 무늬가 씨줄과 날줄로 교직 되어 있다. 얼마나 온몸으로 밀고 다니면서 씨름을 했으면 아직도 선혈(鮮血)이 낭자하고 땀과 눈물이 뒤범벅되어 도무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두 같은 문장이 똬리를 틀고 있다. 문장으로 살아남았지만 그 속에는 아직도 저자의 심장박동이 느껴지고 손바닥에 남긴 땀의 잔액이 만져진다. 머릿속의 생각을 토해냈지만 입으로만 중얼거리지 않고 온몸을 던져 생각을 출산하면서 겪은 사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관념의 파편은 불현듯 저편에서 찾아온 관념의 파편이지만 이미 내 몸속에서 꿈틀거리며 생각의 자손을 잉태하다 마침내 때가 되어 좁은 문을 뚫고 세상으로 나와 남긴 창조적으로 파괴된 생각의 잔해다. 



작가의 파편에는 품격을 뒤흔드는 파격이 숨어 있다


파편 속에 작가가 추구하는 파격(破格)이 숨어 있다. 장편(長篇)을 읽지만 언제나 파편은 장면의 그 어딘가에 숨죽이고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긴 글에는 언제나 긴 생각의 파동이 살아 숨 쉬지 않는다. 일정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심금을 울리는 수준을 넘어 혈압을 급격히 상승시킬 정도로 피를 거꾸로 치솟게 만드는 파격적인 생각이 낮은 자세로 엎드려 있다 갑자기 독자에게 일어나 정면으로 맞부딪히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독자의 숨결이 나에게 다가올지 치열한 고요 속에서 긴 기다림을 몸으로 겪다가 갑자기 다가오는 독자의 인기척에 숨이 멎는 듯 극도의 긴장감이 감돈다. 작가의 파편에는 한때는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전남편의 짙은 체취가 담겨 있다. 지금은 아픈 상혼은 물론 견딜 수 없는 적개심과 분노의 화살이 허공을 나르고 있지만, 그래도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마음이 뜨겁게 마음을 만나 온몸을 구석구석 파고들며 전율하는 감동을 느낀 앓음다운 추억은 여전히 내 몸 어딘가에 각인되어 있다. 비록 뜨거운 열정이나 격정이 차가운 냉정이나 무관심으로 대체되긴 했지만, 한 때 타올랐던 불길은 사실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작가가 남긴 관념의 파편은 그냥 건너갈 수 없는 잔향이 진한 고독함을 품은 채 독자의 손길을 기다리는 신념의 아편이다. 한 번 맞으면 치명적으로 중독되면서 어지간한 약으로 해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하다. 


인두 같은 문장에 담긴 저자의 관념의 파편은 우편배달부가 소식을 갖고 오는 것처럼 서서히 다가오는 예고편이나 보통우편이 아니다. 그냥 어느 날 잡자기 저편에서 빠른우편처럼 건너편에서 일순간에 달려온다. 인두 같은 문장이 품고 있는 작가의 파편은 그래서 언제나 불편하다. 여기서 말하는 불편은 육체적 거북함이나 심리적 거추장스러움을 지칭하지 않는다. 한 번도 마주쳐본 적이 없는 사유체계가 나의 기존 인식체계를 뿌리 채 흔들고 있다는 점에서 불편하다. 불편함은 언제나 이편과 저편, 왼편과 오른편 사이를 오고 가지만 어느 편도 내편이 아닐 때 찾아오는 일순간의 느낌이다. 사람은 불편할 때 편안함을 맞이하기 위해 이전과 다른 각도에서 생각을 바꾸기 시작한다. 그때 남기는 작가의 생각이 독자에게는 관념의 파편으로 갑자기 날아오지만 그 파편 때문에 앎의 상처는 쉽게 치료되지 않는다. 그 상처는 치료(curing) 대상이 아니라 치유와 보살핌(caring)의 대상이다. 치료는 질환(disease)을 물리적으로 진료하는 행위지만 치유는 신체적 치료를 넘어 정신적으로 보살피며 마음까지 챙기는 질병(illness)이다. 질환은 물리적, 신체적 증상에 대한 객관적 치료로 해결할 수 있지만 질병은 똑같은 질환을 앓아도 환자마다 느끼는 심리적 불안감이나 불편함 또는 두려움의 강도는 저마다 다르다. 질환의 수주에 따라 발급되는 의사의 처방전과 약물이 한 사람의 아픔을 모두 치유할 수 없다. 심리적이고 주관적으로 느끼는 아픔의 강도와 상태는 오로지 보살핌의 대상이며 치유가 필요하다.



작가의 관념의 파편은 갑자기 날아든 불법침입자다


작가가 사투 끝에 남긴 문장 속의 관념의 파편이 독자에게 남긴 깊은 상처는 치료 대상이라기보다 본인이 주체적으로 치유해야 할 질병이다. 질병은 약물과 객관적인 처방만으로 낳지 않는 아픔이다. 파편은 간편하게 생겼지만 그 속에 담긴 사유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이 끊임없는 생각의 꼬리를 물고 오는 무한 속편(續編)에 가깝다. 파고 들어갈수록 그 의미심장함에 심장이 멎는 감동과 감격의 파고는 줄어들지 않는 화약고가 바로 관념의 파편이다. 말이 관념의 파편이지 저자의 뜨거운 열정과 신념, 철학과 가치관이 고스란히 녹아든 신념의 파노라마다. 마치 열길 물속은 알 수 있지만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것처럼 작가의 관념의 파편은 언제, 어디서, 어떤 고민이나 문제와 씨름하면서 남긴 맥락적 사유냐에 따라 전혀 다른 신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관념의 파편은 일률천편(一律千篇)이 아니다. 관념의 파편은 저마다 생각의 깊이와 넓이가 사유의 바다를 거닐다 남긴 생각의 단편이지만 참을 수 없는 인식의 가벼움이 느껴지는 박편(薄片)은 아니다. 오히려 관념의 파편은 긴 시간 동안 관심을 갖고 관찰하다 어느 순간 통쾌한 통찰의 깨달음을 얻을 즈음 순식간에 저편에서 이편으로 날아들며 찰나의 각성이 농축된 사색의 산물이다. 파편은 저마다 다른 시간에 날아든 단상이 단편적으로 엮여 있지만 그걸 관통하는 관념이 작가 특유의 신념으로 물들인 관점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관념의 파편에 밑줄을 긋다가 너무 깊이 굵게 남긴 선에 뒤덮여 인두 같은 문장의 열기가 잠시 식는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문장 속에 숨겨둔 작가의 열기는 독자를 다시 화상에 입힐 정도로 작가의 생각의 열기는 쉽게 식지 않았다. 작가의 관념의 파편은 때로는 너무 파격적으로 다가와 어리둥절하고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절망적이다. 왜냐하면 믿고 있었던 신념체계가 뿌리부터 뒤흔들리기 때문이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생각의 파편이지만 그 파편의 위력은 폭탄의 파편을 능가할 정도로 치명적이다. 솔직히 말해서 너무 잔혹하고 처참할 정도다. 작가의 처절함 몸부림은 독자의 처연한 괴로움을 불러오고 한겨울 엄동설한의 냉기보다 강하게 처참한 패배의식을 불러온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사유의 불법침입이 순식간에 일어난 사건이다. 사건 후에 남긴 사유의 흔적에는 이미 새로운 사유의 봄을 기다리며 싹을 틔우고 있다. 관념의 파편에 일격을 당한 독자의 사유체계는 체계적으로 무너지고 그 위에 고된 생각 노동으로 시작되는 다른 건축양식을 탐색하며 생각의 집을 짓기 시작한다. 작가를 비롯해서 타인의 생각에 불법 침입당한 내 생각은 집을 잃고 한 동안 방황을 거듭하다 그동안 머물던 집 자체를 파괴하고 아예 재건축을 시작하려고 한다. 생각의 터전을 다시 잡아 정초를 만들고 그 위에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유의 건축으로 이전과 전혀 다른 생각 임신의 터전을 마련하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기존의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제와 다르게 생각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어제와 다르게 생각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방법은 나와 다른 세계에서 다르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남긴 생각의 흔적에 자주 접목해보는 것이다. 다름 아닌 낯선 사유와의 부단한 접선, 즉 독서를 통해 낯선 생각을 부단히 잉태할 때 한 가지 생각, 틀에 박힌 과거의 통념에 갇혀서 살아가지 않는다. 작가가 밤잠을 설쳐 가면서 남긴 한 문장 속의 관념의 파편은 머리로 이해하는 대상을 넘어선다, 갑자기 피부 속을 꿰뚫고 몸속으로 파고든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머리는 한 참 뒤에 전후좌우 맥락을 따지면서 뒤늦게 나타난다. 가정 먼저 심장이 심하게 반응한다. 몸으로 다가온 감각적 느낌이 심장으로 모아지면서 의미심장함의 깊이가 속을 모르고 파고든다. 평범한 작가는 다른 세계를 데려와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여기 말고 저기 다른 세상이 있음을 머리로 설명한다, 뭔가 다른 작가, 몸으로 세상의 지혜가 무엇인지를 체득한 사람은 우리를 평범하고 틀에 박힌 상식의 세계에서 상식이 통하지 않는 비정상적 사유의 세계로 인도해준다. 작가가 남긴 관념의 파편에는 이미 작가가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상을 시공간을 초월해서 벌써 잉태하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논리적 이성으로 아무리 머리를 써 봐도 저자가 남긴 인두 같은 한 문장 속의 담긴 감성은 쉽게 이해되지 않고 뛰는 심장박동을 멈추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어쩌다 만난 장편 속의 관념의 파편을 우연히 만났다고고 할지라도 아마 작가는 독자가 읽고 있는 와중에 필연적으로 만날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물론 독자가 받아들이는 의미심장함의 강도는 다를 것이다. 



관념의 파편은 독자의 상상력 속에서 침몰하거나 비상한다


관념의 파편이 얼마나 파격적으로 다가가느냐는 독자의 상상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다. 저자와 독자의 연상 세계가 비슷할수록 저자가 관념의 파편에 숨겨놓은 의미의 강도가 더욱 강력하게 전달될 것이다. 저자의 관념의 파편에는 이미 저자가 체험적으로 각성한 깨달음이 농축된 신념의 집결체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세상을 살아가지만 사람마다 경험하는 일상이 다르고 거기서 생각 너머를 상상하는 세계도 다르다. 세상은 연구자가 흔히 상정하는 독립변수와 독립변수에 의존해서 영향을 받는 종속변수 사이의 단선적 인과관계나 상관관계로 해명할 수 없는 복잡한 상상의 세계다. 체험적 각성에 근거하지 않는 상상은 오히려 앙상한 관념, 예를 들면 공상이나 망상, 몽상이나 환상의 무기력함을 대량 양산할 뿐이다. 하지만 상상에 힘(力)이 붙으면 상상력(想像力)이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체험적 아픔이 추가되면 그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이연 연상(二連聯想)이 시작되면서 상상력은 엄청난 에너지를 품고 비상하기 시작한다. 이연연상을 통해 관계가 맺어지고 현실로 구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아이디어로 발전하면서 상상력은 현실을 변화시키는 추동력으로 발전한다. 상상력은 이미지로 미래의 모습을 끌어들여 지금 여기서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다. 멀건 대낮에는 분명하게 보였던 확실한 인과관계나 상관관계가 어둠이 짙게 깔리면서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변수가 생각지도 못하게 복잡한 상호관계로 발전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겉으로 드러난 변수만으로 주어진 현상을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치명적인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독립변수의 고독한 영향력만으로 종속변수에 직격탄을 날릴 수 없다. 인연은 한 줄기 단선적 관계로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관념의 파편은 또 다른 파편을 만나 한 편의 글을 탄생시킨다. 파편이 파편을 먹고 단편을 탄생시키고 단편은 또 다른 단편과 만나 장편의 글로 이어진다. “나는 전체 매혹되거나 설득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나를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파편이다. 파편이 총체보다 더 크고, 심오하고 생명력이 있고, 강렬하다”(5쪽). 김홍중의 《은둔 기계》에 나오는 과념의 파편이다. 이 파편에 충격적으로 내가 반응한 후 파편이 더 이상 공중으로 흩어지기 전에 붙잡고 내 몸속으로 퍼져나가는 파편 조각을 모아 이 글을 써 봤다. 내 몸속으로 관통하며 지나가는 관념의 파편에 또 누군가가 순간적인 감전을 일으키고 또 다른 관념의 파편이 잉태되기를 바랄 뿐이다. 작가의 몸을 빠져나간 관념의 파편은 어느 독자의 신념을 뒤흔드는 인두 같은 한 문장으로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희망일까. 어떤 작가가 남긴 관념의 파편이라고 해도 작가를 떠나는 순간 수많은 독자들에 의해 창조적으로 오독될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무궁무진 오역될 작가의 관념의 파편은 이제 돌아갈 수 없는 강물을 건넌 것이다. 이전의 관념의 파편은 오로지 이후의 독자가 발휘하는 상상력의 세계에서만 살아 움직이거나 죽어 없어질 운명이다. 왜곡과 폄하, 비난과 비판, 그 어떤 화살도 작가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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