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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
'코스모스'에게 배우다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드루얀의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을 읽고

코로나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 '코스모스'에게 배우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앤 드루얀의 코스모스가능한 세계들을 읽고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오래전에 샀지만 읽지 못하고 늘 서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부인이 최근에 펴낸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을 같이 사놓고 언젠가 읽어내리라고 마음만 먹다가 연초에 코스모스 두 권으로 한 해를 열어봤다. 그렇게 오랫동안 서가에 어떻게 꽂혀 있었는지 모르겠다. 칼 세이건의 책을 읽으면서 거대한 우주에 대한 시적 표현과 문학적 상상력의 향연에 전두엽은 반짝거리고 심장은 박동을 멈추지 않았다. 코스모스로 향하는 인류의 과학적 탐구 여정을 장편 서사시로 표현한 칼 세이건과 그의 부인의 한결같은 코스모스에 뜨거운 연가를 마음속 깊이 감상하면서 드디어 두꺼운 두 권의 책을 읽어버렸고 읽고 말았다. 읽어버렸고 읽고 말았으니 그 감동과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장문의 리뷰를 쓰고 말았다. 


코스모스를 만나는 마주침의 감동이 심장을 박동하게 만들다


“많은 신 들 중 어느 분이신지, 그분께서 세상을 정돈하여 카오스에서 코스모스의 영역으로 밀어 넣은 다음에, 제일 먼저 땅을 튼튼한 공의 모습으로 빚어내셨다. 어느 쪽에서 보든 땅이 같은 모습으로 보이도록 말이다. 그 어디에도 생명이 없는 곳이 없었으며, 하늘은 별과 성스러움으로 가득했고, 바다는 번쩍이는 물고기들의 집이 됐으며, 땅에는 짐승이, 공기에는 새들이 있었다.…… 그다음에 사람이 태어났다. ……모든 짐승들의 시선은 땅을 향하게 하셨지만, 사람에게는 쳐들 수 있는 머리를 주시고 곧추설 수 있게 하셨다. 사람은 자신의 시선을 하늘로 향할 수 있게 됐다”(437쪽).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1세기 중에 나오는 말을 칼 세이건이 인용한 문장이다. 사람이 머리를 들어 시선을 하늘로 향하게 만든 오묘한 신의 섭리 덕분에 인간은 지구 밖으로 향하는 우주탐사를 시작했을까. 아니면 머리를 들어 하늘로 향하는 지나친 욕망을 자극해서 거만한 인간을 만든 동인이 되었을까. 지금 시점에서 단정하기 어렵다면 세이건 부부가 펼쳐나가는 코스모스로의 위대한 여행을 떠나보는 게 어떨지.



장편의 서사시는 코스모스에 대한 칼 세이건의 감동적인 칭송으로 시작한다. “코스모스COSMOS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것이다. 코스모스를 정관(靜觀)하노라면 깊은 울림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나는 그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며 아득히 높은 데서 어렴풋한 기억의 심연으로 떨어지는 듯한, 아주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코스모스를 정관한다는 것이 미지(未知)중 미지의 세계와 마주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울림, 그 느낌, 그 감정이야말로 인간이라면 그 누구나 하게 되는 당연한 반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22쪽).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과학자의 호기심과 설렘 가득한 느낌이 담겨 있다. 미지의 세계로 탐구여행을 떠나려는 “인류라는 존재는 코스모스라는 찬란한 아침 하늘에 떠 다니는 한 점 티끌에 불과하다”(23쪽).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그동안 압력을 행사했던 자만과 오만의 극치에 이른 인간의 무지함과 나약함을 고백하고 과학자는 다시 당연함에 물음표를 던지는 회의 정신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겸허한 상상력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상상력에만 의존한다면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로 빠져 버리는 우(愚)를 범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앞에 놓인 탐험은 상상력 없이는 단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여정의 연속일 것이다. 회의(懷疑)의 정신은 공상과 실제를 분간할 줄 알게 하여 억측의 실현성 여부를 검증해준다”(23쪽).



코스모스는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아 연주하는 경이로운 선율이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1장 제목이 ‘코스모스의 바닷가에서’다. “코스모스를 거대한 바다라고 생각한다면 지구의 표면은 곧 바닷가에 해당한다”(23쪽). 거대한 우주의 세계를 알아내기 위해 그동안 인간은 바닷가에서 다양한 과학적 탐구활동을 전개해왔다. 과학기술 덕분에 인간은 바닷가에 더 깊이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기 시작한 것도 최근의 일이지만 여전히 바닷가에 발목을 담그고 발가락을 적시는 수준의 미약한 출발이다. 우주의 은하계에는 약 4000억 개 정도의 별들이 존재하는 데 그중에 우리에게 비교적 알려진 별이 태양이라고 한다. 그 태양의 중심에 수수와 헬륨 기체가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는 용광로가 있어서 태양을 중심으로 다른 별들을 두루 비추는 빛의 원천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태양을 제외한 나머지 4000억 개의 별들은 여전히 우주 안에 존재하는 외딴섬인 셈이다.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는 광막한 우주의 미아이며 무수히 많은 세계 중의 하나일 뿐이다.…바로 여기에서 인류는 코스모스 탐험의 열정을 키웠으며 아무런 보장 없이 고통스러운 우리의 운명을 개척해가고 있다.…지구는 생명이 약동하는 활력의 세계이다. 지구는 우주적 관점에서 볼 때에도 가슴 시리도록 아름답고 쉬한 세상이다”(33쪽). 인간은 코스모스 중에서 작은 공간을 차지하는 지구에서 생명을 잉태하고 지구 밖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력을 기반으로 우주 탐사의 관문을 열어왔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지구는 생명체가 생존하며 새로운 앎을 추구하며 인식 기반을 넓혀나갈 수 있는 유일한 보금자리다. 



“코스모스(Cosmos)는 우주의 질서를 뜻하는 그리스어이며 카오스(Chaos) 대응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코스모스라는 단어는 만물이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내포한다. 그리고 우주가 얼마나 미묘하고 복잡하게 만들어지고 돌아가는지에 대한 인간의 경외심(敬畏心)이 이 단어 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43쪽). 우주를 뜻하는 영어 단어에는 cosmos 외에 space, universe가 있다. 흔히 space는 지구 대기권 밖에 존재하는 물리적 탐험 공간을 지칭한다. universe는 은하계나 별 또는 유성이 거주하는 공간은 물론 그들이 움직이게 만드는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시간을 통칭한 천문학적 연구대상을 말한다. 이에 비해 코스모스는 우주가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법칙이나 원리를 포함하여 인간의 주관적인 철학이나 종교관이 반영된 우주를 말한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라는 책에도 우주에 대한 과학자의 신념과 열정, 호기심과 상상력이 곳곳에서 요동치고 있다. 더불어 광대한 우주의 세계에 비해 티끌 한 점에 지나지 않는 지구에 사는 인간의 나약하지만 경이로운 과학적 탐구열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다. 지구 밖의 세계에도 생명체가 살고 있을까? 지구처럼 비슷한 원소가 분포되어 있을까? 만약 생명체가 산다면 지구 상의 생명체와 어떤 점이 다르고 비슷할까? 이런 호기심의 질문 끝에는 과연 우리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수많은 행성 중에서 지구가 생명 발생과 유지의 최적 조건을 갖추게 된 것도 신기할 뿐만 아니라 밀접한 연관성 속에서 지구 밖의 더 큰 우주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다는 사실도 호기심 천국이자 무한한 상상력의 터전을 유지하는 기반이다. 



칼 세이건은 지구를 포함 우주 생명체가 살아가며 연주하는 음악을 푸가(fuga)에 비유한다. 푸가는 하나의 성부(聲部)가 주제를 나타내면 다른 성부가 그것을 모방하면서 대위법에 따라 좇아가는 악곡 형식이라고 한다. “우리는 우주 음악에서 화음과 불협화음이 교차하는 다성부(多聲部) 대위법 양식의 둔주곡(遁走曲)을 기대한다. 10억 개의 성부로 이루어진 은하 생명의 푸가를 듣는다면, 지구 생물학자들은 그 화려함과 장엄함에 정신을 잃고 말 것이다”(51-52쪽). 우주 음악의 원천은 성부가 10억 개나 되기 때문에 여러 그룹의 성악가나 합창단 전체가 동시에 다른 선율을 노래하는 것처럼 장엄하게 들릴 것이다. 그것도 둘 이상의 독립된 선율이나 성부를 동시에 결합시켜 하나의 성부(聲部)가 주제를 나타내면 다른 성부가 그것을 모방하면서 대위법에 따라 좇아가는 악곡으로 들릴 것이다. 푸가는 우주 자연 삼라만상이 한꺼번에 연주하는 웅장하고 경이로운 음악적 선율이자 하모니다. 수십 억 년이 지나는 동안 자연의 다양한 생명체는 환경과의 부단한 상호작용을 통해 적합한 형질을 적응하게 만들면서 이루어져 온 자연선택의 결과다. “자연선택은 영겁의 세월 속에서 생명의 소리를 더 아름다운 음악 작품으로 조탁해왔다”(58-59쪽). 자연선택은 생명체가 자연환경과 조화로운 하모니를 연주하면서 울려 퍼지는 음악적 선율이다. 적응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생명체는 고통과 신음의 과정을 거치기도 하고 완벽한 화합과 조화 속에서 아름다운 하모니를 연주하기도 했을 것이다. 곳곳에서 동시에 울려 퍼지는 다성부(多聲部)가 계절 변화를 겪으며 때로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둔주곡을 연주하기도 하고 때로는 동시에 위대한 합주곡을 연주하기도 한다. 이런 푸가에는 우주 전체의 생명주기에 비추어 볼 때 찰나의 음악일 수도 있지만 “하루 종일 날개 짓을 하다  가는 나비가 하루를 영원으로 알듯이, 우리 인간도 그런 식으로 살다 가는”(61쪽) 덧없음의 음악도 있다.


마음에 드는 환상보다 냉혹한 현실의 진리를 선택하다


푸가 음악은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살아가는 소리로 만든 음악이기도 하지만 하늘과 땅의 순환 관계가 연주하는 음악이기도 하다. 코스모스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즉 지구 중심 설인 천동설과 태양중심설인 지동설의 대결에 따라 푸가는 다르게 연주된다. “새가 왜 노래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새들은 노래하도록 만들어진 피조물이라, 노래함이 새들에게 곧 기쁨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왜 인간이 하늘의 비밀을 헤아려보려고 골머리를 썩이는지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 자연의 현상은 다채롭기 이루 말할 수 없고, 하늘은 숨겨진 보물로 가득하다. 이는 오로지 인간의 정신이 새로운 양분을 취하는 데 모자람이 없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83쪽). 요하네스 케플러의 《우주 형상의 신비》에 나오는 말을 칼 세이건이 인용한 문장이다. 천상과 지상이 함께 연주하는 음악은 천동설과 지동설에 따라 각기 다른 음악적 선율을 만들어냈다. 천동설을 체계화시킨 프톨레마이오스에 따르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과 달과 별들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믿었다”(94쪽). 인간의 신념은 이전과 다르게 교육받고 대오각성하지 않는 한 이전부터 믿어왔던 통념을 관성적으로 받아들인다. 모든 사람들에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돈다는 천동설을 믿을 당시에는 지구는 커다란 집이고 그 위를 덮고 있는 둥근 천장이 하늘이며 집과 천장은 고정되어 있고, 천장 안의 작은 태양이 새가 하늘을 누비며 날아다니듯 이쪽에서 저쪽으로 지나간다고 믿었다. 이런 천동설을 뒤집으며 혜성처럼 등장한 사람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였다. 코스모스의 중심을 지구에서 태양으로 바꾸고 지구를 하나의 행성으로 강등시키는 혁명적 쿠데타에 가까운 역사적 사건이다. 천동설에서 지동설을 주장한다는 것은 목숨까지 위협받는 지극히 위험한 모험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에 쓴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는 1616년에 금서로 지정되어 1835년까지 유지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갈릴레오가 1609년 망원경을 발명해서 더욱 확고한 근거를 갖게 되었다. 갈릴레오는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라는 책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난해한 입장을 쉽게 설명하면서 천동설이 잘 못된 주장임을 세상에 알리다 일흔이 넘은 쇠약한 몸으로 종교재판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지만 지동설에 대한 신념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가택연금 후 실명 상태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다. “막대한 권위도 과학적 진실 앞에서는 초라하다”는 본인의 명언을 죽기 전에도 주장했지만 그는 교회의 강력한 권위 앞에 무릎을 꿇고 1642년에 세상을 떠난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입증해본 또 한 사람의 과학자는 요하네스 케플러였다. 모든 자연현상에 신의 섭리를 능가하는 물리 법칙이 존재한다는 용감하고 고독한 믿음을 어린 시절부터 갖게 된 케플러는 우주 자연 삼라만상을 지배하는 전지전능한 신의 권위에 호기심을 품으면서 코스모스를 창조한 진정한 신의 모습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행성 운동에 관해 정확한 관측 자료를 보유하고 왕실 수학자로 일하고 있었던 튀코 브라헤의 천문 관측 자료를 보고 싶었지만 접촉 자체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튀코 브라헤가 죽은 이후 황실 수학자의 자리를 물려받고 간신히 그의 관측 자료도 다 얻어냈다. 오랜 연구 끝에 행성 운동에 관한 법칙을 종합적으로 정리함으로써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의 미비점을 정확히 보완해냈다. 케플러는 지동설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철학을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당시의 종교적 상황에서도 가족들에 대한 가혹한 핍박과 처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수학적 계산으로 지동설을 뒷받침하는 각종 주장을 실험적으로 증명해 보이려고 애쓰면서도 케플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철학적 사색을 통해 자신의 논리적 주장을 공고하게 다져나갔다. “이 소리들의 화음으로 인간은 영원을 한 시간 안에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적게나마 지극히 높으신 신의 환희를 맛보게 했다.……이제 나는 거룩한 열광의 도가니에 나 자신을 고스란히 내맡긴다.……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나는 펜을 들어 책을 쓴다. 나의 책을 요즘 사람들이 읽든 아니면 후세인들만이 읽든, 나는 크게 상관하지 않으련다. 단 한 사람의 독자를 만나기까지 100년을 기다린다 해도 나는 결코 서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신께서는 당신을 증거 할 이를 만나기까지 6.000년을 기다리지 않으셨던가”(115-116쪽). 여기서 케플러가 말하는 소리들의 화음은 행성들마다 움직이는 속도에 따라 다르게 내는 라틴음계인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를 의미한다. 이 중에서 지구는 파와 미를 응얼거린다고 해서 라틴어로 ‘파민(famine)’, 즉 굶주림을 연상케 한다는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어제는 하늘을 재더니, 오늘 나는 어둠을 재고 있다. 나는 뜻을 하늘로 뻗쳤지만, 육신은 땅에 남는구나.” 케플러가 스스로 지은 비문인데 칼 세이건은 30년 전쟁으로 그의 묘마저 없어진 자리에 “그는 마음에 드는 환상보다 냉혹한 현실의 진리를 선택한 사람이었다”라고 묘비명을 쓰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미래의 하늘에는 ‘천상의 바람을 잘 탈 수 있는 돛단배들’이 날아다니고 우주 공간은 ‘우주의 광막함을 두려워하지 않는 탐험가들’로 그득할 것이다”(121쪽). 케플러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과학의 힘으로 대중의 종교적 믿음과 신념체계를 격파하고 합리적으로 설득하기에는 여전히 가혹했다. 척박한 과학의 황무지에서 고군분투했던 케플러의 과감하고 용기 있는 도전과 주장은 뉴톤에게 유산으로 넘겨진다.



호기심으로 무장한 탐험이 인류에게는 가장 안전한 보험이었다

     

갈릴레오가 세상을 떠나던 1642년 체중미달의 미숙아로 태어난 뉴턴은 “지구가 사과를 잡아당겨 떨어뜨리는 바로 그 힘이 달이 원 궤도를 따라 운동하도록 지구가 달을 잡아당기는 힘”(124쪽)이 같다는 걸 발견했다. 이게 바로 만유인력의 법칙이다. 결론적으로 튀코 브라헤가 축적한 관측 결과에 따라 발견한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도 모두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에 따라 간단한 수학공식으로 기술될 수 있다. 케플러와 뉴턴은 “행성들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예측함으로써 코스모스를 대단히 깊은 수준까지 이해할 수 있다느 확고한 증거를 제시했다. 오늘날 세계화된 우리의 문명, 우리의 세계관, 그리고 현대의 우주 탐험은 전적으로 그들의 예지에 힘입은 것이다”(127쪽). 죽기 바로 전에 썼다고 하는 뉴턴의 글은 그가 얼마나 지적 호기심으로 세상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려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세상이 나를 어떤 눈으로 볼지 모른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나는 어린아이와 같다. 나는 바닷가 모래밭에서 더 매끈하게 닦인 조약돌이나 더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아 주우며 놀지만 거대한 진리의 바다는 온전한 미지로 내 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다.” 말년까지 지적 호기심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았던 뉴턴은 영원불변하고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코스모스 세계에 느닷없이 나타나 공포감과 함께 경외심을 제공하는 혜성에 대해서도 남다른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혜성은 매우 찌그러진 타원 궤도를 그리는 일종의 행성이다”(140쪽). 심지어 뉴턴은 지구 상의 생명현상이 가능한 것도 오로지 혜성의 물질이 우리 행성에 떨어지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혼도 주로 혜성에 온다고 주장한다.


“코스모스에는 수많은 행성이 있지만 “우리의 아름답고 푸른 행성 지구는 인류가 아는 유일한 삶의 보금자리다. 금성은 너무 덥고 화성은 너무 춥지만 지구의 기후는 적당하다”(173쪽). 인류에게 낙원인 듯한 지구는 하지만 과다한 탄소배출과 환경파괴로 심각한 온난화 현상을 경험하는 듯 지구의 연약한 환경을 지속적으로 교란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 상에 존재하는 인류는 다각적인 과학적 탐사 노력을 통해 지구 밖의 생명현상을 탐구해오고 있다. 바이킹 우주선을 통해 화성에 생명 존재 가능성을 탐사하는 작업은 역사적으로 봐도 대단히 중요한 우주탐험의 이정표였다. “다른 종류의 생명에 어떤 것들이 있을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찾아본 첫 번째 시도였을 뿐만 아니라, 우주선이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서 수 시간 이상 작동할 수 있었던 최초의 경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217쪽). 다각적 시도로 마침내 화성에도 생명이 발견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칼 세이건은 화성에 생명체가 발견되면 화성에 놔둬야 한다고 믿는다. 화성 생물이 비록 미물에 불과할지라도 화성 생물은 화성에 맡겨놔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웃 행성에 존재하는 독립적인 생물계는 가치 평가를 초월하는 귀중한 자산”(221쪽)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악조건과 심각한 위기 상황 속에서도 우주탐사를 위한 발견적 열정을 식지 않게 추진해왔다. “끊임없이 지속되는 탐험과 발견이야말로 인류사를 특징지은 인간의 가장 뚜렷한 속성”(230쪽)이었다. 식을 줄 모르는 우주 탐험을 위한 인류의 도전은 15-17세기를 거치면서 인류는 “분수에 넘치는 야망, 국가적 자존심과 국가 간의 경쟁심, 종교의 맹목적 광신, 죄수의 대량 사면, 과학적 탐구심 발동, 모험에 대한 심한 갈증”(231쪽) 등 다양한 탐험 동기와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탐험 노력이 부정적인 결과도 가져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를 하나로 묶고 지역주의의 문제를 일부 해소하여 인류를 하나의 종으로 통합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무엇보다도 행성 지구와 인류 자신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231쪽)를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인류는 지구 밖의 우주를 향한 탐험은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모험심을 불태우며 계속되었다. 오늘날 문명 창조의 기반이자 원동력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아직 가보지 못한 은하계의 수많은 별은 무엇인가? 아니 그렇게 많은 별들이 도대체 어떻게 태어나서 오늘날까지도 빛을 잃지 않고 밤하늘을 수놓는 은하수가 된 것일까? 책을 통해서 깨달은 충격적인 사실은 “우리의 태양도 수많은 별들 중 하나이고 별과 다른 것은 그저 우리와 가깝다는 사실밖에 없다”(273쪽)는 것이다. 태양도 아주 멀리 가져다 놓으면 지금 우리가 하늘의 수많은 별로 보이는 것처럼 밤하늘에 반짝거리는 하나의 별로 보일 것이다. “별은 확실히 구름 뒤에 있다. 달은 천천히 움직이며 별 앞으로 지나가지만, 나중에 보면 별이 다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달은 별을 먹지 않는다. 그러므로 별들은 분명 달 뒤에 있다. 별들은 반짝인다. 그들은 기묘하고 차가우며, 멀리 떨어져 있는 빛이다. 많기도 하다. 온 하늘에 널려 있다. 하지만 밤에만 하늘에 나타난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일까?”(278쪽) 우리는 아직도 코스모스를 잘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정녕 코스모스와 겨루고자 한다면 먼저 겨룸의 상대인 코스모스를 이해해야 한다. 여태껏 인류가 멋모르고 부렸던 우주에서의 특권의식에 먹칠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코스모스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자신의 위상과 위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주변을 개선할 수 있는 필수 전제이기 때문이다”(314쪽). 무지를 깨우치는 탐험이 계속될수록 좌정관천의 어리석음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다. 인류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희망을 거는 이유다.


꿈은 미지의 목적지로 가는 지도다


“과학에는 가끔 갈릴레오,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 수는 극히 적다. 그런데 그들과는 좀 다른 과학자들도 있다.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처럼, 새로운 그림을 혼자 다 그려내지는 못하지만, 자연의 방대한 화폭에서 빈 공간을 한두 군데 이상 메우는 사람이다. 조반니 도메니코 카시니(Giob=vanni Domenico Cassini)도 그런 화학자였다”(278-279쪽). 앤 드루얀의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에 나오는 말이다. 카시니는 지구 위 두 지점의 거리를 정확히 알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 값으로 기하학적 계산을 통해 화성까지의 거리도 정확히 계산해냈다. 카시니는 나아가 발달해가는 망원경을 토대로 목성의 하루 길이를 측정했음은 물론 화성의 하루 길이도 측정해냈다. 인류가 태양계 탐사에 이르는 과정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해오는데 크게 기여한 카시니지만 세상에 알려진 대부분의 천문학자나 과학자들의 이름에 가려져 여전히 무명으로 남아있다. 카시니처럼 무명이었지만 인류의 우주탐사 과정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또 한 명의 무명은 나중에 본명이 알려지면 위험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 유리 콘드라 듀크(Yuri Kondratyuk)로 가명으로 무장했던 알렉산드로 샤르게이(Aleksandr Shargei)다. 열일곱 살의 샤르게이는 1914년 카프카스 산맥의 전선에서 쉴 새 없이 날아드는 포화 속에서 오수와 시체와 쥐가 들끓는 참호 속에서 달을 올려다보며 그곳으로 갈 방법을 궁리했던 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있지만, 몇몇은 별을 바라보고 있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에 나오는 말이다. 똑같이 악조건과 최악의 환경에서도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참혹한 현실에 눈을 감고 좌절하는 사람도 있지만 먹구름 속의 태양을 상상하며 미래를 자신의 현실로 끌어당기는 사람이 있다.



앤 드루얀에 따르면 그에게 “꿈은 지도다”(285쪽). 지금 비록 생지옥 같은 전선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지만 사람이 직접 달로 가는 탐사 전략을 마음속에 깊이 품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있지만, 몇몇은 별을 바라보고 있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에 나오는 말이다. 콘드라듀크는 이미 지구에서 로켓을 발사해서 달 궤도에 안착시킨 다음 우주인 한 명은 궤도선에 남고 두 명은 궤도선에 딸린 착륙선을 타고 내려가 달 표면을 정찰하는 꿈을 꾼 것이다. 그로부터 50년 뒤 NASA의 아폴로 프로그램이 성공리에 실현된 사실을 과연 세상 사람은 얼마나 알아줄까. 앤드루 얀은 남편의 코스모스 책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무명의 과학자들이 남긴 보이지 않는 위대한 업적을 추적하며 그들이 꾼 꿈이 후세대의 누군가에게로 전달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누군가의 꿈이 그 사람과 함께 죽을 때도 있지만, 다른 시대의 과학자들앤 드루얀에 따르면 그에게 “꿈은 지도다”(285쪽). 지금 비록 생지옥 같은 전선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지만 사람이 직접 달로 가는 탐사 전략을 마음속에 깊이 품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있지만, 몇몇은 별을 바라보고 있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에 나오는 말이다. 콘드라듀크는 이미 지구에서 로켓을 발사해서 달 궤도에 안착시킨 다음 우주인 한 명은 궤도선에 남고 두 명은 궤도선에 딸린 착륙선을 타고 내려가 달 표면을 정찰하는 꿈을 꾼 것이다. 이 그 꿈을 건져내어 달까지, 그리고 그보다 더 멀리까지 데려가는 때도 있다”(298쪽). 아폴로 우주선을 타고 세계 최초로 달 탐사에 성공한 닐 암스트롱은 달 여행에서 돌아온 이름 해 우크라이나에 있는 콘드라 튜크의 허름한 오두막집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암스트롱은 무릎을 꿇고 한 줌의 흙을 떠낸 다음 모스크바로 찾아가서 당시 구 소련 지도자들에게 오늘날 신화적인 달착륙에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콘드라 튜크 덕분이었음을 알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과학발전을 비롯해서 문명의 발달은 전경에서 화려한 업적을 쌓으면서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유명한 과학자 덕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우리가 주목하고 감사해야 될 사람은 결정적인 발전의 모멘텀을 제공해주었지만 세상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은 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감당해내는 배경의 무명 과학자들이다.



별들의 일생에 비한다면 사람의 일생은 하루살이에 불과하다


“해안에서 부서지는 물결의 출렁임도 따지고 보면 태양과 달의 중력 작용이 만드는 조석 작용의 결과이다”(318쪽). 매일 습관적으로 만나는 일상의 모든 현상도 우주 순환 원리 중에 특정한 방식으로 작용해서 나타나는 결과다. 그냥 원인과 이유 없이 움직이는 사물이나 발생한 현상은 없다. 사전에 각본에 짜여진 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구와 우주가 코스모스의 원리와 법칙대로 조화를 이루면서 꽃 피우는 아름다운 자연의 질서가 만드는 산물이자 부산물이다. “멀리 있는 달과 태양은 그 긴긴 세월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밀물과 썰물의 들고 남을 재촉했을 것이다. 기후 변화에 따른 풍화작용도 바위를 부숴 모래를 만드는 데 한몫했겠지만, 세월이라는 인내의 도움 없이는 해변의 모래밭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바닷가 모래밭은 우리에게 시간의 흐름을 실감케 하고 세상이 인류보다 훨씬 더 오래됐음을 가르쳐 준다”(318쪽). 눈 앞에 펼쳐지는 밀물과 썰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서 작동시킨 결과 목격할 수 있는 평범하지만 비범한 현상이다. 과학은 우주가 순환하고 자연이 작동하는 원리를 파헤쳐 구조적 원리나 법칙을 찾아내려고 무던히도 노력한다. 그럼에도 우리 앞에 펼쳐진 경이로운 현상의 지극히 일부분밖에 과학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아직도 과학은 코스모스의 작동원리를 탐험을 통해 밝혀내야 할 미지의 세계는 지금까지 알아낸 진리보다 더 많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들의 탐험을 기다리고 있다. “지구 상의 해변이란 해변 모두에 깔려 있는 모래알보다 우주에 있는 별들이 훨씬 더 많다”(318쪽). 해변에 깔려 있는 모래알이 얼마나 될지 한 번도 세어보려고 노력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 모래알의 수가 얼마나 많을 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모래알의 개수는 상상력 너머의 세계에 존재할지 모른다. 그런데 해변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게 우주의 별이라니 얼마나 별이 많길래 이런 비교를 할 수 있을까. 



“공간과 시간은 서로 얽혀 있다. 시간적으로 과거를 보지 않으면 공간적으로 멀리 볼 수가 없다.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전체를 들여다보고 있다면, 시간적으로 그 천체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323쪽).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공간은 시간적으로 과거의 연장선상일 수도 있지만 한 참 지나간 과거의 체험적 추억의 한 장면의 연장선상일 수도 있다. 공간 안에는 시간적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내가 글을 짓는 이 공간에서 나는 과거의 경험적 추억을 회상하면서 현재 오감각을 자극하는 감각적 깨달음을 축적하면서 동시에 미래는 적어도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는 희망을 품어본다, 하지만 사실 희망은 내가 그렇게 되고 싶은 야망의 다른 이름이자 뚜렷한 책임의식을 갖고 끝까지 나에게 맡겨진 임무와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려는 강한 책임감의 발로다. 과학적 탐험은 늘 심장 뛰는 감동적인 발견의 기쁨과 색다른 깨우침의 선물을 준다.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를 탐험한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일이다. 그러한 곳을 찾아가 보아야만 역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즉 이제 역사도 경험 과학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340쪽). 별들의 세계를 탐험한 결과 “별들의 일생에 비한다면 사람의 일생은 하루살이에 불과하다.……별들의 눈에 비친 인간의 삶은 어떤 것일까? 아주 이상할 정도로 차갑고 지극히 단단한 규산염과 철로 만들어진 작은 공 모양의 땅덩어리에서 10억 분의 1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만 반짝하고 사라지는 매우 하찮은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350-351쪽). 별들의 삶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삶은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이다. 찰나의 순간을 살아가는 수많은 인간 군상(群像)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사소한 일로 갈등과 반목 속에서 사투를 벌이며 서로의 자존심 대결을 벌이며 각축전을 벌인다.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코스모스의 자녀들이다


“애플파이를 만드는 데에는 밀가루, 사과, 설탕 조금, 비전(祕傳)의 양념 조금 그리고 오븐의 열이 필요하다. 분자는 다시 원자들로 구성된다. 탄소, 산소, 수소, 그 외의 원자들이 파이의 재료가 되는 분자들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이 원자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가? 수소를 제외한 나머지 원자들은 모두 별의 내부에서 만들어졌다. 그러고 보니 별이 우주의 부엌인 셈이다. 이 부엌 안에서 수소를 재료로 하여 온갖 종류의 무거운 원소라는 요리들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이다”(354쪽). 평범한 애플파이에 포함되는 각종 영양소 성분을 파고들어가 보면 탄소, 산소, 수소, 그 외의 원자들이 파이의 재료가 되고 있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런 원자들의 출처를 조사해보니 수소를 제외하고 모두 별에서 왔다. 별이 우주의 부엌이라는 놀라운 사실에 도달한다. 부엌에서 먹는 대부분의 음식은 결론적으로 별에서 날아온 원소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애플파이를 맨 처음부터 만들려면, 이렇게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354쪽). 별은 지구의 생명체가 탄생하는 근본적인 원소를 제공해준 터전이다. “생명의 기원과 진화는 별의 기원과 진화와 그 뿌리에서부터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우리는 생명의 탄생에서 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새로 생긴 태양에서 쏟아져 나온 자외선 복사가 지구 대기층으로 들어와서 그곳에 있던 원자와 분자에서 전자를 떼어내면서 대기 중에는 전통과 번개가 난무하게 됐고 이것이 복잡한 유기화합물들의 화학반응 에너지원으로 작용했다”(377쪽). 심지어 우리는 우주의 행성 중의 하나인 태양빛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태양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으면 생명활동 자체가 불가능하다. 동물은 식물에 의존하거나 기생하며 살아가고 식물은 태양 에너지에 의존해서 광합성을 통해 성장한다. 결국 동물과 식물 모두 태양 에너지가 없으면 생명활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양은 우리를 따뜻하게 해 주고 먹여주고 우리가 사물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또 태양은 땅을 비옥하게 하여 다산의 충만감을 우리에게 안겨 준다. 태양은 인간 경험의 한계가 범접할 수 없는 권능 자체의 화신이다”(392쪽).



지구 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명활동은 태양을 포함해서 지구 밖의 다른 행성 활동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코스모스의 질서 정연한 섭리와 원칙의 경이로운 신비를 실감할 수 있다.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코스모스의 자녀들이다”(392쪽). 코스모스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물론 비 생명체마저도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이루어지는 관계망의 행위자들(actors)이다. 행위자는 인간만 해당하지 않는다. 인간 행위자의 사고방식과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사물이나 환경을 포함한다. “은하는 1000억 개의 별들로 만들어진 유동성의 구조물이다”(403쪽). 유동성의 구조물이 바로 부단히 움직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력을  주고받는 거대한 구조적 관계망이다. 즉 코스모스는 행위자 간 긴밀한 상호작용을 하면서 맺어가는 거대한 네트워크의 세계다. “팔을 넓게 벌리고 휘돌아 감도는 나선 팔 구조의 위용, 4000억 ‘인구’를 자랑하는 성단에서 벌어지는 별들의 퍼레이드, 중력 수축의 고통과 충격에 소리 없이 신음하는 암흑 성간운들, 그 안에서 새로이 태어나는 행성계, 초거성들의 휘황한 광채, 중년에 이른 주계 열성들의 늠름한 모습, 적색 거성들의 빠른 팽창, 백색 왜성의 단아함, 행성상 성운의 미려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신성, 초신성, 중성자별, 블랙홀 등은 어찌하고? 우리는 그들과의 만남 속에서 우리를 구성하는 물질들, 우리의 내면과 겉모습 그리고 인간 본성의 형성 기제 모두가 생명과 코스모스의 깊은 연계에 좌우된다는 점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393쪽). 코스모스에서 펼쳐지는 경이로운 세계를 이 보다 더 아름답고 놀랍도록 감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붉은 행성을 위한 블루스(5장)이자 지상과 천상의 하모니(3장)이며 우주 생명의 푸가(2장)이자 별들의 삶과 죽음(9장)이 시간과 공간을 가르는 여행(8장)이 아닐 수 없다. 극심한 혼돈의 세계처럼 보이지만 거대한 코스모스의 영도력으로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우주의 대서사시가 지금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느낌이다.



우주는 자연과 생명의 어머니인 동시에 문명을 멸망시키는 파괴자다


우주의 대서사시는 천상에서만 펼쳐지는 게 아니다. 지상의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의 위치에서 그냥 살아가는 것 같지만 다른 생명체와의 긴밀한 관계와 상호 의존 속에서 위대한 생명 찬가를 연주하며 살아간다. “그 꽃가루 한 알이 식물에 앉아서 쉬던 말벌의 몸에 난 털 끝에 점처럼 들러붙었다. 말벌은 그 식물을 떠나서 다음에는 어디로 갈까 잠시 망설이다가 또 다른 백악기 식물의 암 생식기관으로 다가가고, 대충 꽃 비슷하게 생긴 그 칙칙한 갈색과 초록색의 기관에 올라앉는다. 말벌이 다시 그곳을 떠나려는 데, 꽃가루가 털 끝에서 까닥거리다가 공중그네 곡예사처럼 훌쩍 날아오른다. 잠깐의 숨 막히는 순간, 꽃가루는 공주을 가른다. 꽃가루가 그리는 궤적은 새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질 수 있는 단 한 곳의 좁은 장소로 귀결될까? 수생식 세포인 꽃가루는 버저가 울릴 때 던져진 3점 슛처럼 날아서 암그루의 발아점인 암술머리 끝에 정확히 안착한다”(250-251쪽). 앤드루 얀의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에는 지상에서 꿀벌과 꽃이 펼치는 위대한 서사곡을 연주하는 장면을 놀랍도록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동이 불가능한 꽃이 이동이 가능한 꿀벌을 유혹해서 자신의 종족보존을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한다. 움직일 수 없지만 움직이는 생명체의 도움을 받아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는 생존 전력을 구사하는 것이다. 이 책의 다른 곳에서는 일벌과 여왕벌이 만들어가는 위대한 자연 교향곡이 나온다. “집을 떠나 돌아올 기약 없이 모든 것을 걸고 미지를 택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분봉(分蜂)이라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 벌들은 분주히 움직인다. 왕대(王臺)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새 여왕벌들이 자라기 시작한다. 일벌들은 기존의 여왕벌들을 둘러싸고 쿡쿡 찔러댄다. 일벌들이 여왕벌을 밀고 당기고 하는 것은 적대적인 행동이 아니다. 여왕벌이 몸무게를 줄여서 다시 날 수 있도록 호되게 운동시키는 것이다. 모두가 준비되면, 벌들은 여정의 첫 단계에 나선다. 분봉할 때다. 벌집에서 갑자기 까만 구름 한 덩이가 솟아오른다. 수천 마리 벌들이 이룬 구름이다. 원래의 벌집에서 새 여왕벌이 올랐으니, 기존의 여왕벌은 떠나는 모험가들의 무리 한 중간에 자리 잡는다. 빽빽하게 무리지은 벌들은 눈물방울 모양으로 대형을 바꾸어, 근처 나뭇가지에 묵직하게 매달린다. 부산이 들썩거리는 벌들로 이뤄진 그 눈물방울은 수많은 개체로 구성된 하나의 유기체다”(256-257쪽). 자연이 빚어내는 한 편의 감동적인 서사시가 아닐 수 없다.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자기가 맡은 자리에서 본분을 다하며 공동체의 삶을 만들어가는 벌들의 생존전략은 같은 지구 상에서 살아가는 인간 생명체에게도 큰 시사점과 교훈을 던져준다. 생명은 이처럼 또 다른 생명 과정을 통해 생명 탄생과 유지의 신비로운 지혜를 배우며 성장하는 것이다.



행성 물질에서 지구 생명이 탄생해서 의식을 갖기까지의 대장정 또한 코스모스가 연주하는 대서사시가 아닐 수 없다. “대폭발에서 은하단, 은하, 항성, 행성으로 이어지고, 결국 행성에서 생명이 출현하게 되고 생명은 곧 지능을 가진 생물로 진화하게 된다. 물질에서 출현한 생물이 의식을 지니게 되면서 자신의 기원을 대폭발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 인식할 수 있다니, 이것이 우주의 대서사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400쪽). 생명의 탄생은 매번 생산적인 것은 아니다. 생명의 탄생과정에는 그에 못지않게 죽음으로 연결되는 과정도 부지기수다. 두 가지 이상의 이질적 물질이 만나 생각지도 못한 위대한 생명이 탄생되기도 하지만 파멸의 길로 접어드는 과정도 흔하게 발생한다. “파괴되는 세상 중에는 생물과 그 파괴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적 생물이 살고 있는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이 파괴되는 순간에도 에너지의 분출과 대혼란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고민할 것이다. 고통 또한 인식 기능이 감내해야 할 의무가 아닌가. 우리는 외계 은하들을 연구함으로써 우주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었다. 상상을 초월한 규모로 벌어지는 격렬한 혼돈의 폭력 역시 우주의 한 속성이다. 우주는 자연과 생명의 어머니인 동시에 은하와 별의 문명을 멸망시키는 파괴자이다. 우주는 자비롭지만은 않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적의를 품지도 않는다. 우주 앞에서 우리의 생명, 인생, 문명, 역사는 그저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다”(406-406쪽). 코스모스 속에는 언제나 파괴와 창조, 죽음과 삶, 어둠과 밝음, 혼돈과 질서가 공존한다. 코스모스는 이런 점에서 생명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파멸의 터전이기도 하다. 질서는 혼돈이 낳은 자식이듯 생명도 또 다른 죽음이 낳은 산물일 뿐이다. 한 세포가 죽어 없어지는 그 자리에 또 다른 세포가 들어서서 또 다른 새로운 생명체를 세포분열로 메워나간다. “어느 한순간 사람은 대략 100조 개의 세포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을 구성하는 세포가 늘 같은 세포는 아니다. 100조 개의 일부는 죽어 없어지고 동시에 새 세포가 만들어짐으로써 항상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육체이다. 은하도 마찬가지다. 은하의 자살률은 의외로 높다. 은하의 자살은 흔히 폭발로 목격된다”(403쪽). 은하도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자살을 한다. 은하가 스스로 판단해서 자살하기보다 주변 다른 행성과의 역학적 관계가 죽음을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조건에 놓이게 할 것이다. 자살한 은하 자리에 행성 궤도 움직임 속에서 또 다른 은하가 자리를 메운다. 비슷한 맥락에서 앤 드루얀도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에서 생명의 탄생과 죽음의 과정을 선순환적으로 묘사한다. “우주는 은하를 낳는다. 은하는 별을 낳는다. 별은 행성을 낳는다”(126쪽).  



우주 문명과 인류의 발전은 이전 세대의 깨달음 위에서 자란다


“박학하다는 것과 현명하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지적 능력은 단순히 축적된 정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지적 능력은 주어진 정보에서 연관성을 읽어 내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438쪽). 지식이 많아질수록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통찰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사물의 이면에서 움직이는 구조적 힘을 파악해내는 과정에서 다양한 이론적 관점이 저마다의 주장으로 빈틈을 파고들어 판단과 숙고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자기도 모르게 편향된 관점과 시각으로 세상을 내다본다. 이럴 때일수록 스스로 판단 중지를 한 다음 내가 직면한 현상파악에 작용하는 이론적 관심을 파악해본다. 나도 모르게 나의 신념 기반 편향된 시각으로 주어진 현상을 이해하려고 접근하는지를 읽어내야 한다. 다르게 생각하기는 나와 다른 세계에서 다르게 생각하면서 살아간 사람들의 기록물인 책에 접속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내 경험의 범위와 경계를 넘어서는 색다른 사유는 낯선 생각과의 부단한 마주침이 반복될 때 통렬한 깨우침과 뉘우침도 가능해진다. 인간은 자신의 체험적 깨달음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후세대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혁명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글쓰기야말로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이다. 글쓰기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놓았고, 먼 과거에 살던 시민과 오늘을 사는 우리를 하나가 되게 했다. 책은 인간으로 하여금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러므로 글쓰기를 통해서 우리 모두는 마법사가 된 것이다”(54쪽).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가는 길을 연결하는 강력한 매개체가 책이다. 누군가 책에다 지난 역사를 통해서 깨달은 흔적을 축적하기 시작한 덕분에 이전 세대의 통찰력을 지금 여기서 다시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우연히 붙잡은 책에 시공을 초월해서 자라고 있는 지혜의 씨앗을 발견하고 내 몸을 관통하는 상처를 남긴다. 그 상처 위에 어떤 꽃이 필지 아무도 모른다. “책은 씨앗과 같다. 수세기 동안 싹을 틔우지 않은 채 동면하다가 어느 날 가장 척박한 토양에서도 갑자기 찬란한 꽃을 피워 내는 씨앗과 같은 존재가 책인 것이다”(455-456쪽). 언제 누구를 만나 어떤 꽃을 피울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연히 잡은 책 한 권이 한 사람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는 경우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인류는 코스모스를 여행하면서 이전 세대에는 꿈도 꾸지 못할 경이로운 지혜를 축적해왔다. 이런 깨달음의 흔적을 축적해서 기록으로 남기는 흔적이 일정 분량을 넘어서자 인간의 뇌로 전부 기억하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된다. “생존에 꼭 필요한 정보 전부를 유전자에 저장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양이 증가하자 진화는 서서히 두뇌를 새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월이 어느 정도 흘러 지금으로부터 대략 1만 년 전쯤부터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보의 양이 새로 만든 두뇌로도 쉽게 보관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늘어났다. 진화가 그다음에 택한 방책은 육체 바깥에다 필요한 정보를 저장해두는 것이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유전자나 뇌가 아니라 별도의 공용 장소를 만들어 그곳에 보관할 줄 아는 종은 지구 상에서 인류뿐이라고 한다. 이 ‘기억의 대형 물류창고’를 우리는 도서관이라고 부른다”(453-454쪽). 육체밖에 기억의 대형 물류창고를 짓겠다는 발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운 인간 두뇌의 진화적 산물이다. “도서관은 인류가 이룩한 거대한 지식 체계와 위대한 통찰의 세계를 우리와 연결시켜주는 고리의 구실을 한다. 도서관이 전해주는 통찰과 지식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이 자연으로부터 숱한 고생 끝에 힘들여 발굴해 낸 고귀한 보물이다. 그들은 온 인류사를 거쳐 행성 지구의 전역에서 선발된 위대한 지성들이었다. 그들은 지칠 줄 모르는 정열로 우리에게 큰 교훈과 영감을 불어넣어주었고 하나의 종으로서의 인류가 고유의 지식체계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457-458쪽). 인류는 깨달음의 흔적을 책으로 남길 수 있었고 그런 책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도서량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도서관을 만들어 인류의 소중한 지혜를 후세대에게도 전해줘야 한다는 사명감이 솟구쳐 오른 것이다. 도서관이 있었기에 오늘날 첨단 문명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이고 우주 탐사과정에서 깨달은 지혜의 보고를 저장하고 후세대에게 전해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지구 문명의 지속성 여부는 전적으로 공공 도서관에 제공하는 우리의 기부 규모에 달려 있는 것이다”(458쪽). 공공 도서관에 우리가 얼마나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도서를 기증하고 장서를 마련해서 발전시키는지의 여부가 한 시대의 문명 발전을 다음 세대에도 전수할지의 여부를 결정한다.



기록의 흔적이 기억을 능가하는 기적을 낳는다

     

인류 문명의 꽃이 찬란하게 핀 시기를 생각해보면 그 뒤안길에는 반드시 책과 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인류 전체가 눈부신 과학 문명에 큰 희망을 걸 수 있었던 시기가 역사에 단 한 번 있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의 일이었다.…… 이오니아 문명의 수혜자들이었던 고대의 최고 지성들은 수학, 물리학, 생물학, 천문학, 문학, 지리학, 의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을 알렉산드리아에 구축할 수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 바로 그 핵심 성채였다”(539쪽). 하지만 이렇게 엄청난 인류 유산의 깨달음의 보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한 순간에 인류가 고군분투해서 깨달은 체험적 지혜가 소실된다면 우리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과거의 유산과 지혜를 복원할 수 있단 말인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한 때 영화도 이제는 하나의 흐릿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히파티아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서 도서관에 남아있던 마지막 책들마저 모두 파괴됐다. 인류 문명을 잘 못된 뇌수술 때문에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총체적인 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인류의 위대한 발견과 사상 그리고 지식 추구의 열정이 모두 어디론가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 손실을 어떻게 숫자로 계량화할 수 있겠는가?”(543쪽). 기록 없이 기적도 없다. 모든 문명 창조의 기적은 이전 세대가 겪어온 체험적 깨달음의 흔적 위에 피운 꽃이다. 인류가 무한한 학습 가능성을 지니고 있어서 우주 탐사를 미지의 상상 속에 버려두지 않고 끈질기게 위업을 달성해온 원동력과 과학적 탐험과 탐구의 결과를 꾸준히 축적해온 기록과 그것을 담아낸 책과 도서관 덕분이다. 


전문 과학자 입장에서는 쉽게 이해가 가지만 일반 대중들에게는 전문용어는 물론 여기에 등장하는 각종 수식이나 공식은 이해 대상을 넘어선다. 아인슈타인이 1939년 세계 박람회 개막식에서 했던 “과학이 예술처럼 그 사명을 진실하고 온전하게 수행하려면, 대중이 과학의 성취를 그 표면적 내용뿐 아니라 더 깊은 의미까지도 이해해야 합니다”라는 주장을 돌이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수 과학자 집단만 과학적 성취결과를 공유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 발견의 경이로움과 그것이 가져올 인류 미래의 기적과 비전에 대해서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할수록 과학으로 꾸는 꿈은 보다 현실적으로 빨리 다가올 것이다. 그것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핵심 매개체가 책이고 책을 보관하고 널리 읽히는 지성의 전당이 바로 도서관이다. “고대에 이루어진 과학적 업적들이 거의 대부분이 실제로 응용되지 못하고 잊혔다. 이렇게 됨으로써 과학은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지 못했다. 지적 발전의 정체, 비관주의의 확산, 신비주의에의 비참한 굴복 등에 길항(拮抗)할 수 있었던 그 어떤 기제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폭도들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불을 지르고 소장품과 장서를 약탈해갔지만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541-542쪽). 책과 도서관의 멸시와 파괴는 곧 인류문명의 멸망을 부르는 도발적 범죄행위나 다름없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문명의 혜택도 어려운 여건과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진리를 밝혀 세상을 보다 밝게 만들고 싶은 여망과 갈망 덕분이지 않은가. “우리가 현대에 와서 성취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보다 먼저 살았던 4만여 세대에 걸친 우리의 선배들이 이룩한 업적에 뿌리를 대고 있다. 그들 중에 이름을 남긴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현대인들은 과거 세대들에 대한 고마움을 완전히 잊은 채 살고 있다”(544쪽). 책 속에 담긴 하찮은 깨달음의 흔적도 그걸 발견하고 포착해서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와 가치를 후세에 전해주기 위한 사투의 산물이라고 생각해보라. 저절로 숙연해지고 경건해지지 않는가.



과학이 밝혀준 미지(未知)의 세계는 여전히 아름다운 미지(美知)의 경지(鏡智)


“자연에는 신비와 경외의 대상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537쪽). 자연뿐만 아니라 우주 자연 삼라만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물론 비 생명체도 저마다의 존재 이유가 가치가 없는 것이 없다. 내 주변에 있는 돌멩이도 탄생 배경과 근원을 지니고 있고, 어디서나 발견하는 나무도 씨앗이 자리 잡은 그곳에서 계절 변화를 온몸으로 감지하면서 사투를 벌이며 살아가고 있다. 모두가 기적이고 경이로운 생존의 결과이자 세월의 흐름이 낳은 위대한 산물이다. “인류는 우주 한 구석에 박힌 미물(微物)이었으나 이제 스스로를 인식할 줄 아는 존재로 이만큼 성장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기원을 더듬을 줄 알게 되었다. 별에서 만들어진 물질이 별에 대해 숙고할 줄 알게 됐다. 10억의 10억 배의 그리고 또 거기에 10배나 되는 수의 원자들이 결합한 하나의 유기체가 원자 자체의 진화를 꿰뚫어 생각할 줄 알게 됐다. 우주의 한 구석에서의 의식의 탄생이 있기까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갈 줄도 알게 됐다. 우리는 종으로서 인류를 사랑해야 하며, 지구에 충성해야 한다”(556쪽). 별에서 생긴 물질이 생명성을 지니면서 생물이 되고 인간이라는 생명체로 진화되면서 위대한 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엄청난 희소적 가능성 속에서 태어나 생각하고 느끼면서 코스모스를 쓴 한 부부의 위대한 깨달음의 향연을 좇아가고 있다. “지구에서 과학을 아는 생물종은 인간밖에 없다. 지구에서 벌어진 생명 진화의 긴 역사에서 아직까지 과학 하기는 전적으로 인류만의 것이다. 인류의 과학 하기 능력은 자연선택의 과정을 거쳐 대뇌 피질에 새겨진 진화의 산물이다”(538쪽). 물질에서 생물로 생물이 다시 의식을 가진 인간 동물로 거듭 재탄생하면서 겪어온 진화의 역사는 그 자체가 기적이며 경이다. 더구나 과학적 탐구 대상인 코스모스나 우주에서 탄생한 인간이 다시 본류로 돌아가 과학 하기를 통해 감춰진 우주 순환 원리를 찾아가는 여정은 얼마나 심장 뛰는 탐험이자 탐구인가. 그래서 인류는 과학 하기라는 뜨거운 사랑을 통해 베일에 가려진 우주의 신비를 이만큼이라도 벗겨낼 수 있었다. “나는 평생 과학에 연애편지를 써왔다”(205쪽). 앤 드루얀의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는 이런 과학 하기를 통해 달성한 과학적 업적 앞에 때로는 자만하고 오만할 때도 있었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폭군이 되어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지나친 야망이 우리가 겪고 있는 심각한 위기도 불러왔다. 과학이 마치 전지전능한 신처럼 행세하면서 신비한 자연과 우주의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지나친 야망이 인류를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했다. 과학을 사랑하지만 지나치게 숭배해서 잘못된 믿음의 세계로 이끌 위험성은 경고해야 된다. “과학 하기에는 우리가 지켜야 규칙이 있다. 그것은 단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신성불가침의 절대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가정이란 가정은 모조리 철저하게 검증돼야 한다. 과학에서 권위에 근거한 주장은 설자리가 없다. 두 번째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주장은 무조건 버리거나 일치하도록 수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코스모스는 있는 그대로 이해돼야 한다”(538쪽). 절대 진리는 인간이 만들어낸 오만한 믿음일 뿐이다. 늘 실험과 모색, 검증과 반증을 거쳐 전복되고 다시 창조되는 가운데 부단히 순환하는 일리(一理)의 세계를 지향해야 한다. 당연과 물론의 세계에 물음표를 던져 시비를 걸고 의심하고 회의하고 상상하며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경건한 탐구정신을 잊지 않아야 한다. 가정은 언제나 가정일 뿐이다. 가정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감 속에서 절치부심하는 삶을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앤 드루얀의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에도 비슷한 주장을 나온다. “최종 목적지, 즉 절대적 진리를 가정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과학이 성스러운 탐색에 걸맞은 방법론이 되어주는 이유다.……코스모스는 자신이 틀렸음을 모른다는 사실을 수시로 상기시키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자만이 온전히 받아준다”(32-33쪽). 과학적 탐구가 경지에 이를수록 자세를 낮추고 더욱 겸손해져야 하는 이유다. 아직도 인류는 코스모스라는 거대한 바다의 모퉁이인 바닷가에서 발목을 담그고 발가락을 적셨을 뿐이라는 칼 세이건의 고백을 다시 한번 상기해보자. 과학이 밝혀준 미지의 세계는 여전히 탐구할수록 아름다운 세계가 펼쳐지는 미지(美知)의 경지(鏡智)이자 경이로운 지고의 세계다.



진화가 열어주는 미지의 관문은 과학으로도 알 수 없다


코스모스의 세계는 과학의 힘만으로 정복할 수 없는 신비의 세계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는 비경의 불모지(不毛地)다. 과학 하기를 통해 인간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로운 지식과 지혜를 축적해오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틀릴 수 있고 원대한 계획과 비전에 어긋나는 잘 못된 방향으로 빠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과학적 탐구와 탐험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코스모스가 우리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용기는 자신의 편견이 밖으로 드러나는 한이 있더라도 또 찾아낸 결과가 자신의 희망과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일지라도 코스모스의 조직과 구조를 끝까지 탐구하여 그 깊은 신비를 밝혀내려는 이들의 것이다”(538쪽). 인류의 위대함은 과학을 통해 미지의 코스모스 세계를 밝혀내는 업적과 성취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인류의 위대함은 아무리 많은 지식과 지혜를 축적한다고 해도 여전히 인간의 힘으로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자세와 태도다. 나아가 인류는 엄청난 위험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옳다고 믿는 신념체계를 기반으로 자신의 편견을 깨부수고 새로운 가능성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꿈꾼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도적인 노력의 결과 우리들이 지금 여기서 과학적 발견과 문명 발전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류의 문명 발달과 과학적 성취도 때로는 우연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진화의 과정에서 ‘우연’이 휘두르는 폭력의 위력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주선 입자가 유전자 중에서 어떤 것을 때릴지 전혀 알 수 없으며, 그 결과로 나타나는 돌연변이 역시 제각각일 것이다. 진화의 초기에는 돌연변이의 작은 차이가 크기 문제 될 바가 아니지만 긴 진화의 과정을 통해 돌 연변이 이 작은 차이들이 누적된 결과는 엄청난 규모의 변화를 가져온다. 오래전에 생긴 사건일수록 그것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지대하기 마련이다. 역사와 마찬가지로 생물 현상에서도 우연이 결정적인 차이를 초래한다(458쪽). 



진화의 과정에서 내가 누구를 만나 어떤 노력을 통해 무슨 결과를 가져올지 철저하게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우연히 만난 하나의 변수가 본래의 계획을 송두리째 바꿔버리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탐구를 이끌어가는 경우도 얼마나 많았던가. “진화는 특정한 목표를 향해 움직이지 않는다. 생명은 긴 세월 동안 비틀거리고 휘청거리면서, 마주치는 모든 문을 다 두드려 보면서 그중 미래로 열린 문이 있나 찾아보았다. 그런 문을 발견하면서, 자신의 메시지를 더 오래 남기기 위해서 얼른 그 문으로 들어갔다”(262쪽). 앤 드루얀의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에도 같은 맥락에서 진화의 우연성을 강조한다. 내 앞에 어떤 미지의 문이 있는지 앉아서 머리로 찾아낼 수 없다. 적극적인 실험과 탐험, 모색과 시도 속에서 가능성을 품고 있는 관문이 느닷없이 내 앞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을 방랑하는 예술가라고 표현하면서 인간은 철저하게 자연 표류(Natural Drift)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던 칠레의 인지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Humberto R. Maturan)의 주장 역시 여기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인류는 오랜 시간 동안 과학적 탐험을 통해서 많은 성취를 이루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류가 알 수 없는 것은 왜 우리는 이렇게 저마다 다른가이다. 지구 상에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일란성쌍둥이도 어딘가 다른 점은 많다. “우리는 희귀종인 동시에 멸종 위기종이다. 우주적 시각에서 볼 때 우리 하나하나는 모두 귀중하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너와 다른 생각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를 죽인다거나 미워해서야 되겠는가? 절대로 안 된다. 왜냐하면 수천억 개나 되는 수많은 은하들 중에서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548-549쪽). 



다름과 다양성으로 무장한 저마다 고유한 희귀종이자 멸종 위기종인 인류는 전대미문의 위기를 겪고 있다. 우주의 중심에는 지구가 있고, 지구의 중심은 인간이라는 발상, 그리고 인간이 창조한 과학의 힘만 있다면 코스모스가 펼치는 거대한 우주도 마침내 정복할 수 있다는 오만과 야망이 우리를 코로나 19가 불러온 전대미문의 팬데믹에 굴복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인간은 자연을 훤히 꿰뚫어 볼 만한 큰 지혜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겨우 여기까지만 볼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호기심만 잔뜩 키웠다가 결국 실망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현시점은 인류에게 있어, 존재의 여명기이거나, 그도 아니면 겨우 존재의 단초에 불과하다고 믿습니다. 현시점은 먼 미래를 향한 준비단계와 수습의 기간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473쪽). 콜린 맥클로린(1748년)의 글을 칼 세이건이 인용한 말이다. 더 낮은 자세로 겸손함을 유지한 채 그동안 인류가 코스모스 안에서 해왔던 행태들을 반성하고 성찰할 시점이다. 인간 역시 코스모스라는 거대한 우주 체계 속에서는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각성과 더불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심각한 위기의 근원을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평범한 인간의 일상이 위협받을수록 역설적으로 지구 생태계는 빠르게 회복되는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인류가 이룩한 모든 것은 진정한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꾼 한낱 꿈에 불과합니다. 면면히 이어지는 유산과 혈통 속에서 위대한 정신이 태어났습니다. 그 정신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볼 줄 알아 자신의 미미함을 인식할 수 있었고, 그래서 더 나은 미래를 희망할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올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끝없는 반복을 통해 그날은 오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육체 안에 가능성으로만 숨어 있던 그 무엇이 자신의 참모습을 언젠가 드러내어, 지구를 발받침으로 삼아 훌쩍 밟고 일어서서, 큰 소리로 웃으며 저 별들에게 우리의 손을 내밀 날이 정녕 우리에게 오고야 말 것입니다”(513쪽). H. G. 웰스, 미래의 발견, 《네이처》 65, 326, 1902년에 한 말을 역시 칼 세이건이 인용한 말로 리뷰의 마지막 하고 싶은 말로 대체한다. 마지막으로 뉴톤이 남긴 명언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인류가 품어야 미래에 대한 바람직한 자세와 태도를 구생해본다.



“세상이 나를 어떤 눈으로 볼지 모른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나는 어린아이와 같다. 나는 바닷가 모래밭에서 더 매끈하게 닦인 조약돌이나 더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아 주우며 놀지만 거대한 진리의 바다는 온전한 미지로 내 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다.”

-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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