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 투혼으로 영혼을 사로잡은 한 남자의 삶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읽고
런던에서 증권 중개인 일을 하던 40대 중반의 스트릭랜드는 부인과 아이들과 함께 남부럽지 않게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여름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후 갑자기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느닷없이 파리로 떠난다. 파리로 떠나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거나 가정을 놓고 혼자 떠나서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홀연히 떠난 것이다. 가족에게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평상시에 남편의 이런 행동을 사전에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부인으로서는 너무나 어이없는 일이었다. 스트릭랜드가 갑자가 가정을 버리고 떠난 이유는 한 여인과 열애에 빠졌을 것이라는 각종 추문이 나돌았지만 확인된 바는 없었다. 고심하던 스트릭랜드 부인은 갑작스러운 남편의 도발적인 행동에 충격을 받고 평소 가까이 지내던 주인공에게 자초지종을 말한 다음 파리로 떠난 남편을 수소문해서 만나줄 것으로 요청한다. “심미감이란 성본능과 비슷해서 일종의 야만성을 띠게 마련이다. 예술가는 그런 점에서도 대단한 재능을 보여준다”(8쪽). 스트릭랜드가 갑자기 평범한 직장생활을 접고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도발적인 가출을 다짐한 것은 추후에 자세히 밝혀지겠지만 그 안에 잠자고 있는 예술적 본능 때문이다. 스트릭 랜드는 아마 매일매일 반복되는 틀에 박힌 일을 하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했을 것이다. 본질적인 그 무엇을 추구하고 싶은 내면의 본능적인 욕망이 꿈틀거리면서 어떤 일 자체의 즐거움을 위해 목숨을 던질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충격적인 가출을 감행한 것이다. “작가란 글 쓰는 즐거움과 생각의 짐을 벗어버리는 데서 보람을 찾아야 할 뿐, 다른 것에는 무관심하여야 하며, 칭찬이나 비난, 성공이나 실패에는 아랑곳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16-17쪽). 오로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통해, 그것이 고된 노동이든 예술적 창작이든 그 자체의 즐거움을 위해 빠져들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신의 일상에 강한 불만을 품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 과감한 결단과 함께 실천에 옮긴 것이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리운 사람도 버리고 떠나다
“내가 나 자신의 즐거움이 아닌 어떤 것을 위해 글을 쓴다면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가 아니겠는가”(19쪽). 스스로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더 늦기 전에 단란했던 가족을 버리기까지 하면서 스트릭랜드는 꿈을 찾아 기나긴 삶의 여정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20대 초중반으로 짐작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스트릭랜드의 부인을 만나 또한 사정에 공감하고 파리로 잠입해서 스트릭랜드의 행적을 추적하기로 한다. 갑자기 가장을 잃은 가족들의 슬픔에 공감한 주인공은 분통을 터뜨리며 파리로 향한다. 어떻게 40대 가정이 가족을 버리고 자신의 꿈을 찾아서 일말의 망설임과 미안함 없이 집을 떠난단 말인가. 수소문 끝에 스트릭랜드를 만나 집을 나온 사연에 관해 자초지종을 물어보지만 시종일관 대답은 단호했다. 그동안 가정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왔기에 지금부터 내가 해보고 싶은 걸 해도 된다는 논리였다. 부인에 대한 애정도 가족을 돌볼 책임도 없다는 대답에는 망설임도 전혀 없다. 누가 멸시하고 비난해도 상관없다는 스트릭랜드는 오로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본능적 욕망만이 자신을 살아있게 만드는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요.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 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69쪽). 오로지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일념 이외에는 모든 게 눈에 보이지 않고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스트릭랜드에게 그 어떤 질문도 아무런 동정이나 공감대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삶의 전환은 여려 모양을 취할 수 있고,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성난 격류로 돌을 산산조각 내는 대격변처럼 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마치 방울방울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에 돌이 닿듯이 천천히 올 수도 있다. 스트릭랜드의 경우에는 그 전환이 광신자에게처럼 단숨에, 사도들에게처럼 광포하게 왔다고나 할까”(75쪽). 스트릭랜드의 결단과 과감한 방향 전환은 일반인들의 눈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상식적이며 몰지각한 행동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스트릭랜드에게는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예술적 창작 욕망 이외에 자신의 관심과 인식을 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의 모든 행동이 보편적인 법칙에 맞을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격언 말입니다.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돼먹지 않은 헛소리요. 칸트가 한 말인데요. 누가 말했든, 헛소리는 헛소리요”(76-77쪽). 칸트가 말하는 보편 명령도 스트릭랜드에게는 헛소리다. 칸트의 말을 인용하면서까지 주인공은 스트릭랜드의 파행적 행동을 바로잡고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게 만들고 싶었지만 무의미한 설득에 지나지 않았다. 질문을 하면서 질책할수록 스트릭랜드는 흔들림 없이 더욱 완고해졌고 자신의 신념에 대해 확고부동했다. 스트릭랜드에게 양심은 칸트가 말하는 사회가 정한 보편 법칙이 아니다. 오히려 스트릭 랜드에게 양심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체계가 가치 파단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주관적 행동강령이다. “나는, 양심이란 인간 공동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 진화시켜온 규칙을 개인 안에서 지키는 마음의 파수꾼이라고 본다. 양심은 우리가 공동체의 법을 깨뜨리지 않도록 감시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경찰관이다. 그것은 자아의 성채 한가운데 숨어 있는 스파이다”(77쪽). 스트릭랜드는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적으로 강요함으로써 인간을 집단의 이익에 따르는 노예로 전락시켰다고 주장한다.
‘아름다움’은 고통과 혼돈 속에서 태어나는 ‘앓음다움’이다
“마음이란 이성으로 알지 못하는 이유를 가지는 법”(82쪽)이다. 스트릭랜드의 결심과 결연한 행동을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오로지 마음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알 뿐이고 그건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헤아림의 대상이다. 힘든 삶이 예측이 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갈 길을 걸어가겠다는 결심은 논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지만 스트릭랜드의 마음은 확고부동하다. 스트릭랜드는 떠날 때부터 돈 한 푼 없이 무일푼으로 집을 나왔기 때문에 최소한의 생활비를 충당하면서 파리의 낡은 호텔을 전전하며 그림을 그리는 예술적 투혼을 발휘한다. 하지만 모든 육체적인 돌봄은 포기하고 오로지 불타는 예술혼에 사로잡혀 자기 몸이 극도로 나빠지는 줄도 모른다. 극단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자기 몸은 하나도 돌보지 않고 심지어 주위의 모든 것에 무관심한 채 살아간다. 오로지 그림 이외에 나머지 것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일고의 가치도 두지 않는다. 파리에서 스트릭랜드를 만나고 돌아온 주인공은 스트릭랜드 부인에게 그 동안의 자초지종을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분명한 사실은 많은 사람이 추정했던 여인과 눈이 맞아서 집을 나간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이야기하지만 스트릭랜드 부인과 언니네 가족은 믿지 않았다. 주인공은 스트릭랜드가 집을 나간 이유는 따로 있다고 설명한다. 기존 정신을 뒤흔드는 그 무엇인가가 스트릭랜드의 영혼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장본인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일이 있은 5년 후쯤, 주인공은 단조롭고 싫증이 나는 런던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신선한 자극을 받기 위해 파리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예전에 로마에서 만났던 화가 친구인 더크 스트로브와 다시 만나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스트로브는 미술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으며 비평도 날카로웠고 관심의 폭도 꽤나 넓었다. 재능 있는 예술가를 알아보는 감각이 탁월했고 다른 예술분야에 대한 탁월한 감식안을 바탕으로 다른 작품을 바라보는 안목 또한 남달랐다. 스트릭랜드의 작품성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그의 예술적 재능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기본적인 예의는 물론 다른 사람과 대화에서도 일방적으로 무시하기 일쑤인 스트릭랜드에게 과거에 당한 수모와 부인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한다. 스트릭랜드가 많은 사람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예술성을 지니고 있는 이유는 틀에 박힌 일상을 살면서도 거기서 비상하는 상상력을 잉태하기 위해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려는 과감한 결단과 그 누구의 눈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영혼이 이끄는 길을 걸어가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름다움이 해변가 조약돌처럼 그냥 버려져 있다고 생각해? 무심한 행인이 아무 생각 없이 주워갈 수 있도록? 아름다움이란 예술가가 온갖 영혼의 고통을 겪어가면서 이 세상이 혼돈에서 만들어내는, 경이롭고 신비한 것이야.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고 해서 아무나 그것을 알아보는 것도 아냐. 그것을 알아보자면 예술가가 겪은 과정을 똑같이 겪어보아야 해요”(102쪽). 예술은 틀에 박힌 당연함이나 늘 만나는 익숙한 일상을 이전과 다르게 경험하면서 겪어내는 창작자의 색다른 사유 속에 잉태되는 고통의 산물이다. 그런 면에서 스트릭랜드의 그림은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어 낯선 곳을 지향하며 우리에게 색다른 자극을 제공해주는 예술적 작품임에는 틀림없다는 것이다.
눈을 멀게 하는 사랑은 한눈에 빠지는 사랑이다
스트릭랜드는 여러 가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림 그리기를 한 번도 중단해본 적이 없다. 오로지 그림 그리기에 전력투구하는 나머지 “다른 것은 다 잊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의 격렬한 개성을 캔버스에 쏟아붓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109쪽). 그림을 전람회에 출품해서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며 명성을 추구하는 데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안락한 가정과 남부럽지 않은 행복을 버리고 굳이 고행의 길을 선택한 스트릭랜드에게 과거는 없고 오로지 자신의 예술적 욕망을 구현시키는 지금 여기서의 창작 열망이 중요했다. “나는 과거를 생각하지 않소, 중요한 것은 영원한 현재뿐이지”(112쪽). 지금 여기서 예술적 혼을 불사르던 스트릭랜드는 먹고 몸을 관리하는 일에 부실한 나머지 갑자기 소식이 끊기면서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소식을 전해 들은 스트로브와 주인공은 수소문 끝에 스트릭랜드의 집을 찾아낸다. 스트릭랜드가 머물고 있는 옥탑방 비슷한 곳에서는 병세가 악화되어도 누구 하나 돌볼 사람이 없어서 악화일로를 거듭할 것이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마땅한 대안을 고민하다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겠다고 결심하지만 부인의 강력한 반대로 난항을 거듭한다. 하지만 스트로브의 지극한 관심과 애정, 간곡한 부탁으로 스트로브 부인은 스트릭랜드를 자신의 집에서 당분간 보살피기로 받아들인다. 스트로브와 그의 부인의 지극 정성으로 보살핀 끝에 스트릭랜드는 건강이 회복되어 다시 자신이 거주하던 집으로 옮겨가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여기서 뜻밖의 사건이 발생한다. 자신의 집으로 스트릭랜드를 데려오는 것 자체를 극심하게 반대했던 스트로브 부인은 사랑했던 남편을 버리고 스트릭랜드를 따라나선다. 스트로브 입장에서는 기상천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여곡절 끝에 스트로브는 아끼던 스튜디오와 재산의 절반을 부인에게 넘기고 본인이 집을 나가기로 결정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잊어버린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제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머리로는 알지 모르나-자기의 사랑이 끝날 것임을 알지 못한다. 환상임을 알지만 사랑은 환상에 구체성을 부여해준다. 사랑하는 이는 사랑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면서도 사랑을 현실보다 더 사랑한다. 사랑은 사람을 실제보다 약간 더 훌륭한 존재로, 동시에 약간 열등한 존재로 만들어준다”(159쪽). 스트릭랜드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는 걸 그렇게 반대했던 블란치 스트로브가 어떻게 스트릭랜드와 사랑에 빠지고 스트로브를 버릴 수 있을까. 스트릭랜드와의 사랑이 환상이지만 그 환상에 지금 여기서의 사랑이라는 구체성을 부여하사면서 현실을 사랑하는 블란치의 사랑은 끝내 끝날 것이다. 스트릭랜드와의 사랑은 플란치를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미 자기가 아니다. 더 이상 한 개인이 아니고 하나의 사물, 말하자면 자기 자아에게는 낯선, 어떤 목적의 도구가 되고 만다”(159-160쪽). 사랑에 빠진 블란치 스트로브는 이미 예전의 블란치 스트로브가 아니다 더 이상 블란치 스트로브가 아니고 스트릭랜드와 사랑에 빠진 자신에게는 낯선 어떤 목적의 도구가 된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본인도 알기 어렵다.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니고 전혀 다른 나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스트로브가 아무리 설득해도 이미 건널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스트로브의 친구를 통해 블란치를 설득하고 편지를 전해줘도 요지부동이다.
‘관능’으로 채색되어 있지만 ‘예능’을 꿈꾸는 ‘재능’을 발견하다
3개월 후, 스트로브는 끔찍한 소식을 듣게 된다. 블란치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사실은 중병을 앓게 되면서 병원에 입원한 것이다. 같이 지내던 스트릭랜드와 심한 말싸움을 하다 염료의 원료인 수산(蓚酸)을 마시며 자살을 시도한 것이다. 다행히 의료진에게 신고가 접수되어 병원에 입원했지만 중태다. 더크 스트로브가 병문안을 간다고 해도 블란치는 보고 싶지 않다고 한다. 간호사를 설득해서 다시 블란치를 만나는 방법을 강구하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난다. 끝없이 아내를 만나려고 했지만 결국 만나지 못하는 아픔을 반복한다. 스트로브는 생전에 얼굴도 구경하지 못하고 블란치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말았다. 상심의 시간을 보내던 스트로브는 마침내 자신의 고향인 네덜란드로 돌아가서 마지막 인생을 살기로 한다. “세상은 참 매정해, 우리는 이유도 모르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몰라. 그러니 겸손하게 살아야지. 조용하게 사는 게 아름답다는 걸 알아야 해. 운명의 신의 눈에 띄지 않게 얌전하게 살아야지. 그리고 소박하게 무식한 사람들의 사랑을 구해야 하는 거야. 그런 사람들의 무지가 우리네 지식을 다 합친 것보다 나아. 구석진 데서 사는 삶이나마 그냥 만족하면서 조용하게, 그 사람들처럼 양순하게 살아가야만 한단 말이야. 그게 살아가는 지혜야(184쪽)”. 아내를 잃고 수심에 찬 시간을 보내다 득도의 경지에 이른 듯 잠언을 쏟아내는 스트로브는 자신이 가장 아끼던 스튜디오에 다시 가서 경이로운 전율감이 밀려오는 누드 그림을 발견한다. 스트릭랜드가 그린 블란치 누드화였다. “스트릭랜드는 그때까지 자신을 얽어맸던 굴레를 과감히 깨뜨려버렸던 것이다. 자기 자신이 아닌, 뭐랄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힘으로 넘치는 새로운 혼을 발견했던 것이다. 강렬하고 특이한 개성을 대담하고 단순하게 묘사한 것만은 아니었다. 살결은 열정에 가득한 어떤 관능, 불가해한 어떤 것을 품고 있는 관능으로 채색되어 있었는데, 그렇다고 채색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었다. 중량감, 그러니까 육체의 무게를 뚜렷하게 느끼게 해주는 그런 중량감에 그치는 것만도 아니었다. 거기에는 어떤 영적인 것이, 혼을 어지럽히는 전혀 새로운 어떤 영성이 깃들어 있어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상상을 이끌어가면서, 영원히 별들만 빛나는 어둡고 텅 빈 우주물-벌거벗은 영혼이 두려움에 떨면서 새로운 신비를 찾아 모험의 여정을 나선 그런 우주를-암시하는 것만 같았다”(191쪽). 스트로브가 갖은 수사를 동원해서 스트릭랜드의 그림을 설명하고 있지만 언어적 기술의 한계를 넘어서는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는 그림에 대한 최고의 찬사였다.
아내를 잃은 깊은 상심으로 스트로브는 고향인 네덜란드로 돌아간다. 블란치를 죽음에 이르게 해 놓고도 죄책감은 전혀 느끼지 않는 스트릭랜드에게 스트로브는 자신의 고향 네덜란드로 같이 돌아가 작품 활동을 계속하자는 뜻밖의 제안을 하지만 스트릭랜드는 거절한다. 자신의 부인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게 만든 원흉, 스트릭랜드에게 비참한 대접을 받으면서도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 후 우연히 주인공은 스트릭랜드와 다시 만나 블란치와 함께 했던 짧은 생활의 소회를 듣고 그동안 스트릭랜드가 그렸던 그림을 감상하는 기회도 갖게 된다. “여자는 사랑을 하게 되면 상대의 정신을 소유하기 전까지는 만족할 줄 몰라, 약해서 지배욕이 강하지. 지배하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못해. 여자는 마음이 좁아요. 그래서 자기가 모르는 추상적인 것에는 화를 내는 버릇이 있어. 마음을 쓰는 건 물질적인 것뿐이야. 관념적인 것은 시기나 하고. 남자의 정신은 우주의 저 머나먼 곳에서 방황하는데 여자는 그걸 자기 가계부 안에다 가둬두려고 하는 거요”(203-204쪽). 스트릭랜드의 여성 비하 발언으로 보일 수도 있는 발언이다. 혼자 있기를 바랐던 스트릭랜드의 관심과는 반대로 블란치는 스트릭랜드를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리려고 온갖 시도를 다한 것이다. 블란치는 스트릭랜드를 자기 소유로 만들고 싶어 안달하면서 욕망의 덫을 던졌지만 결국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자신을 함정에 몰아넣고 올가미를 씌우려는 블란치의 격정에 스트릭랜드는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스트릭랜드에게 여자 역시 예술적 탐구 대상일 뿐 자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예술적 지향점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자신이 그림을 통해 갈구하는 궁극의 그 무엇을 찾아내서 구현하려는 욕망으로 움직이는 냉혈동물같이 그림 이외에 아무 데도 관심이 없는 철갑 같은 사람이었다. “작품은 사람을 드러내는 법이다”(207쪽). 글이 작가의 삶을 반영하듯 그림 역시 화가의 삶을 그대로 담아낸다. 주인공이 스트릭랜드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느낀 점도 바로 스트릭랜드가 그토록 간절히 갈구하며 그림에 녹여내려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감을 잡으며 감동받는다. “그림들은 추하게 보이면서도 어떤 중대한 의미가 있는 비밀을 곧바로 드러내지 않고 은근히 암시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비밀을 잡힐 듯하면서도 이상하게 끝내 잡히지 않았다. 그것들은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켰지만 그것을 분석할 수는 없었다. 뭔가를 발견하고 있지만 말로써 나타내기는 불가능했다”(201쪽). 물질적인 것이 담고 있는 관념적 의미를 발견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불확실한 나머지 감상하는 사람의 독자적인 해석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 아닐까. 스트릭랜드가 표현하고 싶은 예술적 갈망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감은 잡을 수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온통 상징적 의미로 다가올 뿐이다. 그 상징을 누가 어떻게 해석해내는지에 따라서 스트릭랜드의 예술적 욕망은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그는 자기가 느낀 어떤 것을 전달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고, 오직 그것을 전달하겠다는 생각만을 가지고 그림들을 그려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찾는 미지의 그것에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망설임 없이 대상을 단순화하고 뒤틀었다. 사실이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자기와는 관계없는 무수한 사실들 사이에서 그는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만을 찾았다. 우주의 혼을 발견하고, 그것을 표현해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212쪽). 하루에도 무수히 만나는 사람과 사물에서 발견하는 사실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런 사실이 떠 다른 사실과 만나 만들어내는 사연과 사유를 파고들어 그 속에 숨어 있는 우주 자연 삼라만상이 품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그리워하면서 그림으로 녹여내는 것이 스트릭랜드의 유일한 관심이다.
예능과 기능의 경계에서 영혼의 숨결이 흐르는 달빛을 좇아가다
“어쨌든 당신은 자신을 괴롭히는 정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딘가를 향해 위험하고 고독한 모색의 길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당신은 존재하지도 않는 신전을 찾아 나선 영원한 순례자 같아 보여요”(212쪽). 스트릭랜드는 극심한 궁핍 생활을 경험하면서도 그것을 고생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로지 그가 추구하는 그림의 세계에 부합되는 정신적인 삶만을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수중에 가진 돈이 하나도 없어도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는다. 당장 필요한 돈이 있으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최소한 필요한 돈만 번다. 궁핍된 삶이 끝을 모르고 이어져도 그는 그림에 대한 열정만큼은 식은 적이 없었다. 며칠을 굶어도 표현하고 싶은 욕망의 물줄기가 흐른다고 생각하면 붓을 잡고 스쳐 지나가는 그리움을 사력을 다해 캔버스에 쏟아붓는다. 과거의 단란했던 가정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도 추호도 들지 않는다. 오로지 스트릭랜드에게는 현재만 존재할 뿐이다. 스트릭랜드는 힘든 삶이 반복되어도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누군가 도와주려고 하면 오히려 경멸의 눈치를 보낸다. 필요한 돈이 없으면 무슨 일을 하든 딱 그만큼만 벌었다. 먹을 음식이 없으면 며칠을 먹지 않고 오로지 그림에만 사력을 다해 열정을 불살랐다. 자신의 예술적 창작을 방해하는 모든 현실적 요소를 제거하고 오직 내면의 예술적 충동이 이끄는 삶을 살아가려로 안간힘을 썼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인과 같은 행세도 일반인의 생각으로는 알 길이 없다. 안락함을 포기하고 스스로 고통의 굴레를 짊어지고 그걸 예술적 창작욕으로 해소하려는 노력만이 스트릭랜드의 삶을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스트릭랜드가 무일푼 화가 생활을 반복하면서 무료 배식소 등을 전전하는 나날을 보내다 그가 꿈꾸던 이상적인 목적지, 환상적인 상상력을 제공해주는 ‘달’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바로 45세경에 도착한 타히티 섬이었다. 그곳에서 어린 아내 아타를 만나 아이들을 낳고 예술 활동을 계속한다.
《달과 6펜스》라는 제목의 의미가 이 책 어디를 봐도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을 번역한 송무 교수의 해설 부분에 나온다. 달은 미지의 세계를 지향하는 사람이 마음속에 품고 도달하고 싶은 이상적인 목적지다. 이에 반해서 6펜스는 현실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경제적 수단이다. 욕망은 달을 향하고 있지만 현실은 6펜스를 벌어야 하는 고달픈 삶이 반복된다. 달과 6펜스는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먼 전혀 다른 두 가지 세계를 지칭한다. 달은 사람을 들뜨게 만들고 잠 못 이루는 꿈을 꾸게 만든다. 하지만 6펜스는 지금 당장 먹고살기 위해 내가 벌어야 하는 돈을 의미한다. 6펜스 없이 심장을 뛰게 만드는 달이라는 목적지에 이를 수 있을까. “달빛은 영혼을 설레게 하며 삶의 비밀에 이르는 신비로운 통로로 사람을 유혹한다. 마음속 깊은 곳의 어두운 욕망을 건드려 걷잡을 수 없는 충동에 빠지게도 한다. 그래서 달은 흔히 상상의 세계나 광적인 열정을 상징해왔다. 6펜스란 영국에서 가장 낮은 단위로 유통되었던 은화(銀貨)의 값이다. 이 은화의 빛은 둔중하며 감촉은 차갑고 단단하다. 그 가치는 하찮다. 달이 영혼과 관능의 세계, 또는 본원적 감성의 삶에 대한 지향을 암시한다면 6펜스는 돈과 물질의 세계, 그리고 천박한 세속적 가치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사람을 문명과 인습에 묶어두는 견고한 타성적 욕망을 암시한다”(309-310쪽). 스트릭랜드는 6펜스가 상징하는 증권거래 중개상과 가장으로서 책임져야 할 가정생활이 묶어둔 관성과 타성의 끈을 끊어버리고 예술적 충동이 이끄는 달의 유혹에 빠진 것이다.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에서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두 가지가 ‘별이 빛나는 밤하늘’과 의사결정의 기준으로 작용하는 ‘도덕 법칙’이라고 했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스트릭랜드에게 별이 빛나는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은 비록 과학의 힘으로 도달할 수 없는 불가지의 세계지만 예술적 욕망만이라도 얼마든지 도달하고 싶은 꿈을 꾸게 만드는 삶의 본원적 지향점이다.
일상에서 비상하며 미지의 세계를 상상하다
“스트릭랜드를 사로잡은 열정은 미를 창조하려는 열정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마음이 한시도 평안하지 않았지요. 그 열정이 그 사람을 이리저리 휘몰고 다녔으니까요. 그게 그를 신령한 향수에 사로잡힌 영원한 순례자로 만들었다고나 할까요. 그의 마음속에 들어선 마귀는 무자비했어요. 세상에 진리를 얻으려는 욕망이 지나치게 강한 사람들이 있잖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진리를 갈구하는 나머지 자기가 선 세계의 기반마저 부려버리려고 해요”(276쪽). 미를 창조하려는 스트릭랜드의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은 영원한 순례자의 길을 걷다 타히티 섬에 도착한 것이다. 스트릭랜드는 꿈의 목적지 타히티 섬에 도착했지만 말년에 나병에 걸려 육체적 자유로움을 즐길 수 없는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다. 나병을 얻은 스트릭랜드는 육체를 잃어가고 있지만 그것으로 겪는 고통 덕분에 영혼의 눈을 뜬다. 육체적 시력으로 볼 수 없는 세계는 결국 마음의 눈이나 영혼의 눈으로 보는 수밖에 없다. 눈을 감아야 세상을 더 잘 볼 수 있는 역설이다. 점점 기력을 상실해가는 스트릭랜드는 혼신의 힘으로 예술적 열정을 쏟아부으며 오두막 벽에 인생 최고의 작품을 남긴다. 그가 육안(肉眼)으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예술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그가 비록 시력까지 잃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이 창조하고 싶은 예술적 경지를 더 잘 볼 수 있게 된다. 오히려 육안과 뇌안(腦眼)을 잃고 심안(心眼)과 영안(靈眼)으로 영혼의 세계를 투명하게 내다본 것이다. “육체의 휘장은 속이 비쳐 보일 듯이 투명했지만, 분명하게 보이는 그것이 영성(靈性)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얼굴에는 야수적인 관능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말이 안 되는 것 같기도 해도, 그의 관능성에는 야릇하게 영성이 어려 있는 듯했다. 그에게는 어딘지 원시성 같은 것이 있었다”(138쪽). 육체적 관능에서도 영성이 보이는 이유는 시력을 잃고 마음의 눈으로 그림의 이미지를 상상하며 속세의 세계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달의 관능적 영성을 잉태했기 때문이다. 사실과 현실 세계에 두고 있는 몸이 6펜스를 벌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인생이지만 지금 여기를 벗어나 사실과 현실 너머에서 영혼이 휘몰아치는 달의 세계를 늘 꿈꾸었던 것이다.
타히티 섬에서도 산골짜기 타라바오의 원주민 오두막 벽에 그려진 스트릭랜드의 마지막 불꽃같은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로마의 시스틴 성당 천장에 그린 천장화를 능가한다. 지극히 정상적인 몸으로 그린 미켈란젤로의 작품과는 다르게 스트릭랜드의 창작과정은 앞을 볼 수 없는 극도의 불안감이 잉태한 꽃이었다. 스트릭랜드가 오두막 벽에 그린 그림은 불안감이 피워낸 꽃을 의미하는 앙스트 블뤼테(angstblute)의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된다. 정신병으로 마지막 10년을 보내면서 작가적 투혼으로 위대한 책을 남긴 니체나 청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에서 위대한 작곡을 탄생시킨 베토벤의 몸부림도 앙스트 블뤼테를 말해주는 전형이 아닐 수 없다. “내 생각에 스트릭랜드는 최후의 힘을 내어 거기에다 자신의 온 존재를 표현했던 것 만 같았다. 그것이 마지막 기회임을 깨닫고 그는 묵묵히 자신의 삶에 대해 알고 있던 모든 것, 자신이 깨달은 모든 것을 그 그림에 표현했음에 틀림없었다. 또한 그는 마침내 거기에서 평온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을 사로잡은 악마를 마침내 몰아내고, 평생을 고통스럽게 준비해왔던 작품을 완성함으로써 외로움과 괴로움에 지쳐 있던 그의 영혼은 휴식을 찾았을 것이다”(295-296쪽). 자신이 그동안 꿈꾸던 예술적 경지에 이르렀음을 직감한 스트릭랜드는 비록 육체는 나병에 갇혀 자유를 잃은 몸이었지만 앞을 볼 수 없는 눈은 마음으로 세상을 꿈꾸는 심안과 영혼의 눈으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꿈과 비전을 잉태시킨 영안을 선물로 준 것이다. 극심한 육체의 고통이 평온한 영혼의 문을 열어줌으로써 불편함 몸이지만 자유롭게 예술적 경지를 넘나들며 자신의 모든 것을 오두막 벽화에 쏟아부은 것이다.
“이 세상이 처음 생겼을 때의 상상도랄까. 아담과 이브가 있는 에덴동산 같은 거였어요. 뭐랄까, 인간의 형상, 그러니까 남녀 형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이기도 하고, 숭엄하고 초연하고 아름답고 잔인한 자연에 대한 예찬이기도 했어요. 그걸 보면 공간의 무한성과 시간의 영원성이 섬뜩하게 느껴졌어요”(296쪽). 스트릭랜드는 사실보다 사실과 사실 사이가 품고 있는 경이로운 사유체계를 구축하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적 경지에 이르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다. 눈으로 보이는 형상(形狀)이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상상(想像)을 이미지로 포착해서 우리들을 미지(未知)의 세계로 끌고 가는 것이다. 작가적 상상력은 현실에 몸을 두고 있지만 일상을 넘어 비상하는 상상력을 이미지로 포착해서 눈앞의 현실로 구현해낸 것이다. 현실은 현상(現狀)이지만 그림은 미지의 세계를 상상(想像) 한 결과를 구상화(構想化)시켜 보여준 것이다. 거기에는 스트릭랜드가 그토록 갈망해왔던 예술적 욕망이 물결처럼 흐르면서 공간의 무한성과 시간의 영원성을 넘나드는 모습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역동적으로 구현된 것이다. 스트릭랜드는 타히티에서 만난 마지막 부인인 아타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자신이 앓고 있었던 나병 때문에 사람들이 오두막까지 오는 것을 꺼린다는 걸 알고 “집에 불을 지른 다음 모조리 탈 때까지, 작대기 하나 남지 않을 때까지 떠나지 말라고요”(298쪽).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탄생시킨 불멸의 작품은 이렇게 불에 타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스트릭랜드 본인도 그게 걸작인 줄 알았을 겁니다. 자기가 바랐던 걸 이룬 셈이죠. 자기 삶이 완성된 거예요. 하나의 세계를 창조했고, 그것을 바라보니 마음에 들었어요. 그런 다음 자부심과 함께 경멸감을 느끼면서 그걸 파괴해버린 거죠”(299쪽). 이렇게 한 사람의 예술적 경지는 고지를 넘으면서 실체는 사라졌지만 그가 살아내면서 보여준 예술적 투혼만큼은 우리들의 심안과 영안을 자극하면서 강렬한 여운으로 심장박동을 일으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