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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는 의미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산파의 행동이다

《텍스트의 포도밭: 읽기에 관한 대담하고 근원적인 통찰》을 읽고

책 읽기는 의미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산파의 행동이다

텍스트의 포도밭읽기에 관한 대담하고 근원적인 통찰을 읽고

     

이 책의 저자인 이반 일리치(Ivan Illich, 1926~2002)는 어떤 주제든지 깊이 파고들어가면서 근원적인(radical) 반론을 펼치기로 유명한 비판적인 학자다. 예를 들면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가 되었다는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전문가의 의료 통제가 야기한 파괴적 경향을 보여주는 《병원이 병을 만든다 》, 학교 무용론이나 학교교육의 역기능과 폐해를 지적하는 《학교 없는 사회》, 우리를 불구로 만드는 《전문가들의 사회》와 같은 주류적 담론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책을 주로 출간하면서 세간의 관심을 끄는 특이한 학자다. 그의 이런 저술 작업은 그가 걸어온 독특한 이력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지만 박사학위는 역사학이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한 때는 사제서품을 받아 로마 가톨릭 신부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매사에 비판적인 입장을 펼쳤던 일리치는 교회의 역기능과 폐해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주장을 펼치다 교황청과 마찰을 빚으며 스스로 사제직을 그만두면서 본격적인 사회비판적 저술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타임스), 그에게 쏟아진 각종 언론의 찬사 역시 그의 급진적인 사상적 편력을 대변해주고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위치에서든 총을 겨눌 수 있는 지식의 저격수”(뉴욕 타임스), “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 명”(가디언)이라고 평가한 언론의 평가다. 12개 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지적 관심과 편력도 방대하면서 깊이를 동시에 추구하면서 사회학, 철학, 신학, 역사학, 과학기술 등을 섭렵하면서 사회적 이슈를 제기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비판적 입장을 취해왔다.



언제나 비판적 입장, 그것도 근원적인 뿌리를 캐물으며 정상적인 입장을 전복하는 일리치가 《텍스트의 포도밭》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암시는 부제목이 잘 말해준다. '읽기에 관한 대담하고 근원적인 통찰'이다. 읽기에 관해서 파격적이고 급진적이면서 근본적인 주장을 펼친다. 한 마디로 읽기의 뿌리를 찾아가면서 독서의 뿌리를 뿌리 채 뒤흔든다. 일리치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책을 읽는 진정한 독서는 어떤 의미인지를 추적하기 위해 12세기 신비주의 수도사이자 스콜라 철학자였던 성 빅토르의 후고(Hugues de Saint-Victor), 1096~1141)가 쓴 《디다스칼리콘(Didascalicon)》(가르침, 교육, 지식 입문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곧 후고의 설명이 나온다. - 옮긴이)〉를 해설하면서 진정한 책 읽기가 무엇인지 묻는다. 구체적으로 중세의 독서 습관에 대한 역사적 행동학과 더불어 12세기에 이루어지던 상징으로서의 읽기의 역사적 현상학이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일리치가 쓴 《텍스트의 포도밭》은 후고의 《디다스칼리콘》에 대한 해설서다. 이 책은 기술(Technology) 발전이 어떻게 텍스트 형식은 물론 독자가 텍스트를 읽으면서 생기는 정신작용의 변화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도 기술(describe)한다. 일리치는 오늘날과 같은 책과 전혀 다른 책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독서를 했던 12세기로 잠입해 들어간다. 왜냐하면 후고가 살았던 12세기에 읽기 방식의 혁명이 일어났던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읽는 방식의 혁명적 전복이 발생한 시점이 12세기 중세다.



읽기는 지혜의 불빛으로 존재론적 정체성을 밝히는 과정이다


책 제목이 《텍스트의 포도밭》인 이유는 무엇일까? 일리치의 말을 우선 들어보자. “후고는 읽을 때 수확을 한다. 행들로부터 열매를 딴다. 그는 파지나pagina, 즉 페이지라는 말이 함께 나란히 놓인 포도밭 이랑을 가리킬 수 있다는 점에 폴리니우스가 이미 주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페이지의 행은 포도를 지탱하는 포도 시렁의 줄이었다”(86쪽). 책의 페이지가 포도밭이고 씨줄처럼 페이지를 구성하는 행으로 된 문장을 포도를 떠받들고 있는 수평으로 된 시렁이다. 텍스트는 포도밭이고 텍스트를 구성하는 행은 포도 시렁이다. 텍스트의 포도밭에 줄줄이 누워 있는 포도 시렁에서 포도를 수확하듯 텍스트의 포도밭에 열린 저마다의 저자가 밝히는 지혜의 불빛을 만나는 것이다. 후고는 “읽기는 존재론적 치료 테크닉으로 인식하고 해석했다”(25쪽). 읽기를 통해 지혜의 불빛을 만나면 어두운 그림자에 휩싸여 자기 정체성도 환하게 밝혀진다. 《텍스트의 포도밭》으로 들어가면 정말 따 먹고 싶은 포도처럼 맛깔나게 빛나는 문장들이 곳곳에서 내 입맛을 자극한다. "페이지를 밝히는 지혜의 빛을 받을 때 읽는 사람의 자아에 불이 붙을 것이며, 그 빛 속에서 읽는 사람은 자신을 인식할 것이다"(38쪽). 텍스트의 포도밭에 매달린 한 줄 한 줄을 만날 때마다 거기서 섬광으로 다가오는 지혜의 빛은 내가 그동안 지니고 있던 통념을 통렬하게 깨부순다. 텍스트의 포도밭이 아니라 지혜의 포도밭으로 변신한 것이다. “책과 마주하는 것은 이른 아침 그 시대의 창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고딕 교회에서 맛보는 경험에 비길 수 있다. 동트기 전에는 돌 아치 사이를 검게 채워 넣었던 것처럼 보였던 스테인드글라스의 색깔이 해가 뜨면 살아 나오는 것이다(34쪽).”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지혜의 불빛에 반사되면서 어둠 속에 가려진 자기 정체성의 본질이 환하게 드러난다. 이런 읽기를 통해서 후고가 강조하는 공부는“‘자신의 ’자아‘에 불이 붙어 빛이 반짝이는 활동에 참여”(34쪽)하는 것이다. 


하지만 늘 책을 읽거나 뭔가를 배울 때 자세를 낮추고 겸손해야 한다. 이 책에서 만난 지혜의 불빛이 다시 텍스트에서 틈새를 트고 나와 내 몸에 각인된다. "겸손이 읽는 사람에게 가르쳐주는 특히 중요한 교훈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어떤 지식이나 글로 경멸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어떤 사람에게 배우든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스스로 배움을 얻었을 때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32쪽). 모든 글은 저마다의 사연을 먹고 태어난 저자 특유의 문제의식이다. 배우려는 사람에게 세상은 이미 배움의 천국이다. 텍스트 역시 그런 배움의 보고다. 파고들면 배울만한 메시지가 포도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알지 못하는 것은 약함에서 나오지만, 앎에 대한 경멸은 사악한 의지에서 나온다"(118쪽). 그 어떤 앎도 고달픈 노고 속에서 잉태된 문제의식의 소산이다. 배우는 과정은 부끄러운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배울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움을 거부하는 행동이 부끄러운 것이다. 배움을 통해 얻은 앎은 내가 얼마나 무지한가를 일깨워주는 각성제다. 더 자세를 낮추고 겸손하게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점을 인정할 때 배움은 다시 겸손을 가르쳐주는 선순환의 과정을 반복한다. 실력 있는 사람은 겸손하다. 겸손 역시 실력이다. 겸손하지 않은 실력은 없다. 진짜 실력은 모두 겸손이 낳은 자식이다. 이렇게 읽기를 통해 지혜의 불빛을 만나는 순간은 그냥 앉아서 남의 책을 읽는 관념적 사고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읽기는 저자의 고뇌의 눈빛을 읽는 것이고 그래서 내 삶에 비추어 다짐과 결의를 온몸으로 읽어내는 육체노동에 가깝다. 그런데 오늘날 독서는 책상에 앉아서 눈으로 읽고 그치는 간서(看書)에 가깝다. 독서의 의미가 언제부터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일까. 이 질문에 해답을 찾아보기 위해 일리치가 후고의 《디다스칼리콘》을 연구하는 것이다.  《디다스칼리콘》의 부제인 “데 스투디오 레젠디(de studio legendi)”는 “읽기 공부에 관하여”이다.



독서는 낭독을 통해 텍스트의 의미를 내 몸에 각인시키며 몸서리를 치는 진저리다


그렇다면 왜 일리치가 12세기를 중심으로 읽기 방식을 살펴보려고 했을까? 그 이유는 이때 오늘날 우리가 흔히 접하는 ‘책’이 탄생했고 그 순간부터 이전과 다른 읽기 방식이 혁명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물론 12세기 이전에도 책이라는 모습을 띠는 텍스트는 존재했지만 오늘날의 책과는 2가지 점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달랐다. 우선 책의 외관과 구성 방식, 그리고 휴대 가능성 측면에서 오늘날의 책과 판이하다. 두 번째 책을 읽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12세기 책 읽기 방식은 낭독 중심의 수사식 읽기였다. 요즘의 묵독 중심의 학자식 책 읽기 방식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가장 먼저 부각되는 차이점은 책의 외관과 휴대 가능성이다. 《텍스트의 포도밭》에서 일리치는 당시의 책을 책이라고 하지 않고 ‘필사본’이라고 했다. 필사본의 외관은 화려했지만 당시 성경의 무게가 5kg에 육박할 정도로 무거워서 오늘날의 책처럼 휴대하기는 불가능했다. 이런 성경 필사본마저도 오늘날의 책처럼 하나의 책으로 차례로 순서대로 묶여있지 않았다. 실제로 이런 필사본을 읽으려면 그것이 보관된 장소를 직접 방문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후고 시대의 책이 오늘날의 책과 다른 점은 몇 가지 더 찾아볼 수 있다. 당시의 책은 오늘날의 책처럼 내용별로 구분되는 장(chapter)을 구분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책처럼 목차를 보고 원하는 장에 들어가 필요한 내용을 읽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후고의 세대에 책은 인시피트가 입구인 복도와 같았다. 누가 어떤 구절을 찾고자 책을 넘긴다 해도, 그 구절을 만나게 될 확률은 아무 데나 펼쳤을 때보다 더 높지 않았다”(149쪽). 여기서 인시피트는 책을 시작하는 모두(冒頭)에 해당된다.  당시의 필사본은 인시피트, 즉 첫 문장이 그대로 제목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저자를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인시피트로 시작한 책은 마지막 줄로 끝나는 엑스플리시트(explicit)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책을 읽으면서 보완 설명이 필요로 한 부분은 예나 지금이나 주석을 달았다. 《텍스트의 포도밭》도 주석과 참고문헌이 본문 내용과 비슷할 정도다, 문제는 12세기 필사본에는 주석과 본문 텍스트가 구분되지 않았다. 주석이 본문 텍스트와 구별되기 시작한 것도 12세기 이후부터다. 책을 떠올리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알파벳 순서에 따른 배치, 책의 핵심 개념을 알려주는 주제 색인, 읽기 편하도록 디자인된 페이지 레이아웃, 내용에 따른 목차별 구조화되는 방식은 12세기에 이르러 생겨난 책의 테크놀로지이다. 


두 번째 12세기 독서 방식과 오늘날의 독서방식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당시의 독서방 식이 소리 내어 읽는 낭독(朗讀) 방식이었다면 오늘날의 독서방식은 눈으로 읽는 묵독(默讀)이다. 저자는 이러한 12세기 읽기 방식을 ‘수사식 읽기’라고 칭하며 묵독(默讀)으로 대변되는 현대의 읽는 방식인 ‘학자식 읽기’와 대조를 이룬다고 설명한다. 일리치는 12세기 수사식 “읽기를 신체적 운동에 기초한 활동으로 경험한다”(83쪽). 즉 읽기는 앉아서 눈으로 읽고 머리로 생각하는 관념적 독서가 아니다. “행은 읽는 사람의 입이 포착하고 자신의 귀를 위해 소리를 내는 사운드 트랙이다. 페이지는 읽기에 의해 말 그대로 재현되고 육화 된다(84쪽). 입으로 크게 소리 내어 읽는 소리를 귀담아들으면서 그것의 의미를 머리가 해석한다. 읽기는 눈으로 읽고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으면서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로 생각하는 다감각적 활동이다. “읽는 사람은 자신의 박동에 따라 움직임으로 행들을 이해하고, 박자를 다시 포착하여 그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생각할 때는 입안에 넣어 씹는 것과 관련짓는다“(84쪽). 수도사들은 읽으면서 입에 감기는 박자와 운율에 따라 몸을 움직이며 글에 담긴 미묘한 의미를 온몸으로 이해했고, 과거의 기억 속에 담긴 유사 경험을 불러와 연결시켰으며, 그것을 다시 지금 여기서 반추할 때는 마치 입안에 넣어 음식 맛을 보면서 씹는 것과 같았다. “읽는 동안 학생들의 몸은 엉덩이에서부터 위로 흔들리거나 몸통이 천천히 좌우로 흔들린다. 눈을 감거나 이슬람 성원의 복도를 내려다볼 때도 학생은 마치 황홀경에 빠진 것처럼 몸을 흔드는 동작과 암송을 계속한다... 학생들은 이렇게 의식을 수행하는 것처럼 몸 전체를 이용하여 행들을 체현한다”(91-92쪽).” 읽기는 앉아서 의미를 반추하고 곱씹어보는 수동적인 동작이 아니다. 오히려 읽기는 저자가 텍스트 속에 숨겨 놓은 의미의 껍질을 깨부수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온몸을 동원해 해석해보는 적극적인 감각적 깨달음의 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읽기는 수도사들에게 단순히 책을 읽음으로써 지식을 흡수하는 행위가 아니다. 읽기는 어제와 다르게 살아가기 위한 생활양식의 일부다. “고전시대 웅변가, 소피스트, 수사에게 읽기는 몸 전체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수사에게 읽기란 한 가지 활동이 아니라 하나의 생활방식이다“(88쪽). 낭독하지 않으면 나와 다른 세계에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쓴 삶의 텍스트를 내 몸에 완전히 새기고 암기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지금의 책과 다르게 순서대로 편집되어 장이 구분되지 않았고 내가 원하는 부분을 선택해서 읽기도 어려웠다. 읽고 싶은 문장이 있어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쉽지 않았다. 책을 낭송하면서 기억력을 강조한 이유다. “기억 기술은 읽기 기술과 밀접하게 얽혀있다. 기억 기술이 없으면 읽기 기술도 이해할 수 없다”(67쪽). 기억력 훈련이 읽기의 전제 조건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수사학적 대가가 대중연설을 할 때도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문장을 기억하면 적재적소에 활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다. “기억을 찾아 꺼내 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학생에게 익숙한 정신적 라벨을 각각의 기억에 하나하나 붙이는 것이라는 사실은 일찌감치 발견되었다. 예를 들어 기계적인 암기를 위해 염소나 해, 가지나 칼에 문장을 하나씩 붙여놓았다. 연설이나 논쟁을 위해 이렇게 궁전을 갖추어놓은 저자는 그냥 적당한 상상의 방으로 옮겨 가 한눈에 라벨이 붙은 물건들을 파악하고, 자신이 그런 상징들과 연결시켜놓은 기억된 공식들을 바로 꺼내 올 수 있었다”(65-66쪽). 오늘날의 책과 다르게 책의 내용별로 목차가 구조화되어 있지 않고 순서대로 일목요연하게 편집되어 있지 않은 필사본을 이해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통째로 암기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찾고 싶은 구절이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소리 내어 낭독하면서 책을 읽어야 책의 메시지가 내 몸을 관통하는 시간을 만들어 줄 수 있다. 읽기는 저자의 메시지가 내 몸을 관통하면서 몸서리를 치면서 전율하는 느낌이 울려 퍼지는 진저리다.


독서는 존재론적인 치료를 통해 나를 거듭나게 만드는 사건이다


낭독을 통해 내 몸에 각인된 독서의 흔적이 세상을 밝히는 깨달음의 지혜로 부각되면서 지금 여기서의 삶을 물론이고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의 연장선상에서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한다. 이 과정에서 경험한 사건과 사고를 유추해보고 해석해보면서 독서를 통해 내 몸을 관통하고 있는 의미에 비추어 나의 존재 이유와 살아가는 방식을 부단히 성찰해보게 된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책을 읽는 독자 자신의 신체 안에 구성된 이스토리아(historia, 역사, 옮긴이)가 시공간의 연결선상에서 흔적을 남기면서 역사적으로 의미를 지니는 족적이 된다. “읽는 사람의 과제는 창세기부터 묵시록 사이의 이스토리아historia(역사, 옮긴이) 가운데 자신이 읽는 모든 것을 그것이 속하는 각각의 지점에 집어넣는 것이다”(53쪽). 읽기를 반복할수록 책을 읽는 존재가 책에 담긴 우주와 자연의 섭리를 내 신체에 각인시키고 그와 동시에 자연과 우주와 내 신체는 하나의 합일점을 이루면서 기존의 나는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런 점에서 읽기를 통한 공부는 자아에 불을 붙이는 과정이자 존재론적인 치료를 통해 나를 거듭나게 만드는 사건이다. 존재론적 재탄생을 촉발시키는 사건으로서의 독서가 언제부터 눈으로 읽고 주마간산처럼 지나가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사태로 전락하게 되었는가? 낭독하면서 온몸으로 읽었던 적극적이고 육체적인 수사의 읽기가 눈으로만 주마간산 격으로 훑어보면서 관람하는 수동적이고 정시적인 학자의 읽기로 전락하게 되었는가? 수도원 안에서 의식을 갖추고 집단적 의례로 소리 내어 읽었던 낭독은 어떤 연유로 조용히 침묵과 함께 눈으로만 읽는 개인적인 묵독으로 바뀌었을까? 설렘을 안고 텍스트의 포도밭에서 포도 시렁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지혜의 결실을 따먹으면서 심신을 수양했던 순례와 같았던 독서는 점점 파현화된 지식을 어떤 목적을 위해 효율적으로 획득하는 수단적 가치로 전락하고 말았을까.


“문명의 책에 담긴 책장이 수사의 페이지에서 학자의 페이지로 넘어가면서, 읽는 사람에게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읽는 사람의 사회적 지위는 페이지를 넘기기 전과 후가 다르다”(129쪽). 수사와 학자의 차이는 낭독과 묵독의 차이를 넘어 독서를 통해 달성하고 싶은 목적의 근본적인 차이를 낳았다. 낭독을 통해 독서를 하면서 어둠 속을 헤매던 본질적 자아를 찾아내는 과정을 반복하던 독서는 어느 순간 읽기가 곧 내가 사투를 벌이는 삶 읽기임을 자각하게 된다. 수사적 읽기는 수사학적 기교를 부리기 위한 수단적 독서가 아니다. 오히려 수사적 읽기는 읽기를 통해 지금 여기서 사투를 벌이는 삶의 양상을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존재론적 혁명이자 사건의 출발이다. 이들에게 읽기는 교양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적 독서가 아니라 지금 나를 여기에 머무르게 만드는 삶의 양식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탈바꿈시키는 삶의 혁명이다. “그들은 수사의 방식이 아니라 학자의 방식으로 읽고 썼다. 이제 포도밭, 정원, 모험적인 순례를 떠날 풍경으로서 책에 접근하지 않았다. 이제 책은 그들에게 보고(寶庫), 광산, 창고에 가까운, 판독할 수 있는 텍스트였다”(149쪽). 이제 책은 잘 익은 지혜가 저마다의 빛깔을 강조하면서 농익은 자태를 과시하는 《텍스트의 포도밭》이 아니다. 《텍스트의 포도밭》은 지혜의 불빛이 어둠을 밝히기 위해 절치부심하며 심장 떨리는 기다림을 머금고 웅비의 씨앗을 잉태하는 터전이 아니다. 대신에 《텍스트의 포도밭》은 지금 당장 돈 되는 실용적 지식만 가득 보관하고 있는 광산이자 창고로 전락했다. 독서는 신체의 오감각을 열고 몸으로 소리 내어 읽었던 음독(音讀)에서 침묵 속에서 외롭게 혼자 눈으로 읽는 묵독(默讀)으로 바뀌면서 숭고한 삶의 진리를 추구했던 수도사의 성스러운 독서에서 목적 달성에 필요한 수단적 거치로서의 독서로 그 의미가 변질되었다.



물론 이때의 지혜란 그리스도가 존재 자체로 발하는 빛을 의미하는 말이다. 하지만, 온몸으로 책을 읽어내면서 지혜의 불빛에 다가가는 사람에게 지혜는 지금 당장 밥 먹고 살기 위해서 필요한 기술적 지식이 아니라 나의 존재 자체를 새롭게 조명해주는 혜안이자 안목이다. 후고는 개인의 지적 탐욕이나 출세를 위해 파편화된 단편적 지식을 축적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 발전에 필요한 공동의 선이 무엇인지를 심사숙고해보는 것이 지혜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문자 자체에 담긴 피상적 의미를 쫓아가며 읽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읽기보다 책 속에 담긴 텍스트의 이미지나 의미가 지금 여기서 나에게 던져주는 의미심장이 무엇인지를 심사숙고하며 자신의 내면에 새롭게 기억의 궁전을 짓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읽기는 몸으로 체험하면서 어제와 다른 나로 변신하는 여행이다

     

책을 만드는 데에는 네 가지 길이 있다. “한 가지도 보태거나 바꾸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을 적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게 하는 사람은 서기(scriptor)다. 다른 사람의 말을 적으면서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더라도 뭔가 보태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을 편찬자(compilator)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말과 자신의 말을 모두 적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자료가 지배적이며 그 자신의 말은 설명하기 위한 부록처럼 덧붙인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저자라기보다 주석가(commentator)라고 부른다. 그러나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과 남에게서 나온 것을 모두 쓰되, 자신의 말을 확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남의 자료를 붙이는 사람은 저자(author)라고 불러야 한다”(163쪽). 서기는 완전히 남의 말을 그대로 옮기는 사람이고 편찬자는 남의 의견이라도 뭔가 보태는 사람이다. 주석가는 대부분의 남의 말에 자신의 의견을 약간 붙이는 사람이고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남의 의견을 활용하는 사람이다. 일리치는 우리 모두 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되지만 남의 주장에 종속되어 자기 의견이 없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한다. “현대의 읽기, 특히 학문적이고 전문적인 유형의 읽기는 컴퓨터나 관광객의 활동이다. 보행자나 순례자의 일이 아니다. 차의 속도와 도로의 따분함과 정신 사나운 광고판 때문에 운전자는 감각적 박탈 상태에 빠지며, 이 상태는 책상에 앉자마자 급하게 매뉴얼이나 정기간행물을 넘길 때도 계속된다. 카메라를 든 관광객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학생은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복사기로 간다. 그는 사진, 삽화, 그래프의 세계에 살고 있고, 여기에서는 채식彩飾이 있는 문자 풍경의 기억은 이미 다가갈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168-169쪽). 정보의 바다에서 하루 종일 헤매지만 정작 나의 사유로 녹여내지 못하고 정보 관람객으로 전락하고 있다. 몇 년째 서가에 꽂혀 있지만 나의 문제의식으로 재해석하는 치열한 사유의 과정을 거쳐 내 삶의 사유 기반으로 건축하지 않으면 지식은 물론 지혜도 될 수 없다. 내 몸을 관통시켜 진저리 치는 몸부림을 거치지 않고서는 독서를 통한 진정한 공부의 길을 열어갈 수 없다.

 

"책은 눈의 약이다"(37쪽). 하지만 지금은 책은 눈의 독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책을 읽는 눈은 온데간데없고 스크린에 한눈팔려 있다. “모든 컴퓨터에는 데이터, 대체, 역전, 즉시 인쇄로 가는 새로운 고속도로를 열겠다고 약속하는 불도저가 웅크리고 있다... 유령선에서 나오는 신호처럼 그 디지털 사슬은 스크린에서 자의적인 폰트 형태를 이룬다.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유령들이다”(181쪽). 이제 시간이 없어서 책을 못 읽는 게 아니라 시간이 있어도 책을 읽는 눈이 없어서 못 읽는다. 눈은 뜨고 있지만 정보의 바다에서 신출귀몰하는 현란한 자극에 빠져있다. 바빠서 못 읽는 게 아니라 읽지 않아도 바쁜 눈은 늘 언제나 한눈에 반하는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다. 주마간산 방식으로 관람하지만 기억에 남은 것은 없다. 많이 봤지만 내 몸을 관통하면서 남긴 흔적이 없다. 이런 점에서 후고는 진정한 읽기는 여행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몸으로 한 페이지에서 다음 페이지로 나아간다. 몇 줄의 문자들을 따르는 장식은 그 말을 이 여행이 거쳐 가야 할 풍경 속에 집어넣는다. 행이 달라지면 보이는 것도 달라진다. 어느 두 페이지도 같지 않고, 어느 두 머리 문자 A도 또 같은 색이 아니다. 행과 결합된 나뭇잎이나 그로테스크는 기억의 힘을 강화해준다. 길의 경치가 산책 때 이루어진 대화를 되살려주듯 삽화는 보체스 파지나룸에 대한 읽는 사람의 기억을 지탱해준다(168쪽). 내가 책을 읽기보다 책이 내 몸을 통과하면서 전율하는 감동을 남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래서 온몸으로 집중하면서 몰입해서 저자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가치를 발굴하는 의미 채굴작업이다. “읽는 사람은 모든 관심과 욕망을 지혜에 집중하기 위해 스스로 망명자가 된 사람이며, 이런 식으로 지혜는 그가 바라고 기다리던 고향이 된다”(33쪽). 그래서 후고의 《디다스칼리콘》 첫 문장이 “구해야 할 모든 것 가운데 첫째는 지혜”라고 한 것이다.



읽기는 색다른 지식을 출산하는 산파의 행동이다


눈으로 대강 읽어서는 읽기를 통해서 지혜를 출산할 수 없다. 저자가 혼신의 힘을 다해 책 속에 집어넣은 의미의 껍질을 깨고 들어가서 나의 몸으로 다른 지식을 잉태하는 노력을 반복해야 한다. 저자의 말은 입으로 토해낸 말(言,speak)이 아니라 저자의 몸으로 삶을 녹여낸 말(語, tell) “‘말’이 ‘책’에서 ‘육(肉)’이 된다. 쓰기는 동정녀의 자궁에 강잉(降孕)하는 과정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189쪽). 저자의 말(語, tell)이 책에서 육(肉)이 되는 이유는 몸으로 겪은 삶의 정수(精髓)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정수가 담긴 말을 쓰는 과정은 혼인하지 않은 여자의 자궁 속에 강제로 신생아를 임신시키는 과정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새로운 지혜를 잉태하는 과정이다. 쓰기는 몸으로 겪은 각성 체험의 결과 체득한 지혜를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임신하고 출산하는 과정이다. 의미는 사람만 잉태하고 있지 않다. 《싯다르타》에서 헤세가 ”사물보다 사상을 중시“하는 것처럼 자연 삼라만상은 이미 사상적 의미를 잉태하고 있다. ”모든 자연은 의미를 잉태하고 있으며, 우주 만물 가운데 불임인 것은 없다“(190쪽). 이미 저마다의 의미를 잉태하고 있는 자연은 한 권의 책을 능가한다. 자연은 이미 의미를 잉태하고 있는 위대한 스승이다. “자연은 그냥 책과 비슷한 것이 아니다. 자연 자체가 책이며, 인간이 만든 책은 그 유사물이다(190쪽). 자연을 위대한 스승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인간이 쓴 책은 책의 유사물이다. 그런 유사물의 책을 읽고 나의 지혜로 재탄생시키기 위해서는 나의 언어로 재해석하는 몸부림이 필요하다. 의미를 품고 있는 책이 내 몸을 통과하면서 남긴 흔적의 의미를 내 삶에 비추어 반추해보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나의 언어로 번역되는 지혜가 다시 출산되는 것이다. 



읽는 자는 읽기를 통해서 이전과 다른 사람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하느님에 의해 깨달음을 얻어 페이지의 행들을 읽는 사람은 의미를 낳으려고 그곳에서 기다리는 피조물을 만난다. 책의 이러한 존재론적 지위는 기독교 수도원 생활을 읽기의 삶으로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한다(190쪽). 의미를 낳으려고 기다리는 수많은 피조물인 책 속으로 파고 들어가 나의 의도와 연결시키는 작업을 부단히 전개할 때 이전과 다른 의미를 잉태하는 제3의 나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독서는 눈으로 읽고 끝나지 않고 몸으로 실천하는 독행(獨行)으로 이어진다. "인간이 만든 책을 읽는 것은 산파의 행동이다. 읽기는 추상화의 행동이기는커녕 오히려 육화의 행동이다. 읽기는 출산을 거드는 육체적인 행동, 몸의 활동으로, 순례자는 페이지들을 거치며 만나는 만물이 의미를 낳는 것을 목격한다"(190쪽). 책을 읽는 행위는 의미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육체적 활동이다. 책 읽기가 삶과 구분되지 않는 이유다. 읽기는 곧 삶 읽기다. 읽지 않는 삶은 죽은 삶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들의 삶은 어떤가. 4차 산업혁명,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 인공지능 등을 부르짖고 있지만 동물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의 생각지도 못한 침공에 전 세계 인류가 처참한 현실을 체험하고 있지 않은가. 위대한 스승인 자연을 인간의 오만한 과학지식으로 침범하고 개발하며 약탈한 죄과가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은가. 자연이 품고 있는 의미에 귀를 기울이고, 지혜의 보고인 책을 몸으로 읽고 숙고하며 실천하는 성찰적 삶의 연대를 구축하지 않으면 인류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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