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적 체험의 황홀한 쾌락, 슈테판 츠바이크의 《감정의 혼란》을 읽고
‘감정의 혼란’이 던져준 ‘찬란한 감동’의 시한폭탄을 만나다
심미적 체험의 황홀한 쾌락을 추구했던 슈테판 츠바이크의 《감정의 혼란》을 읽고
선물로 받은 책이 그동안 내면의 격정과 욕구를 참아내며 침묵 속에서 버티다 주인의 손길을 유혹했습니다. 무심코 집어 든 책의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 심상치 않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고요한 적막을 깨며 허공을 맴돕니다. 책을 읽어버렸습니다. 책을 읽고 말았습니다의 수준을 넘어 책이 나를 먹어버렸습니다는 표현도 부족한, 그야말로 언어의 한계와 부족을 느낍니다. 책이 내 몸을 통과하다 아예 방향을 바꿔 관통하면서 남긴 상혼이 진저리를 연주합니다. 처절한 깨달음의 서곡과 함께 몸서리치며 울려 퍼집니다. 진저리와 몸서리가 남긴 한 줄의 흔적은 생각보다 상처의 깊이가 깊었습니다. 앎의 생채기가 난 것이 아니라 감정의 파도가 격랑의 바다를 넘어 온몸을 휘감은 전율이었고 감동이었으며 경이로웠습니다. 주인공 롤란트와 스승과 주고받는 극심한 감정의 혼란을 겪다가 책장을 덮는 순간 “온몸으로 체감되는 심원한 것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느낌”(207쪽)이었습니다.
《감정의 혼란》은 말 그대로 곳곳에서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좋은지 감정적 파란이 물밀 듯이 밀려오고 밀려나가기를 반복합니다. 주인공 롤란트가 방황을 거듭하다 학문적 열정에 사로잡히면서 “활화산처럼 분출하는 언어의 광휘로 낯선 나를 처음부터 사로잡았고, 더 깊은 그의 침묵, 이마 위에 떠도는 비애의 구름이 이젠 그와 친숙해진 나(86쪽)”를 사정없이 뒤흔드는 격정의 바다를 수없이 건너갑니다. “그의 말에 완전히 귀를 기울인 상태로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되어 그 사람의 일부분이 되었으며, 넘쳐흐르는 감정의 흐름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61쪽). 이 말처럼 스승이 펼쳐내는 열강과 주장에 격렬한 감정적 동요가 일어나면서 책 속으로 흠뻑 빠져들어가 읽다가 갑자기 망치로 뇌리를 때리는 구절을 만납니다. 그 순간 이 책의 제목대로 더 극심한 감정적 혼란을 경험합니다. “나도… 나도 자네를 사랑하고 있네”(175쪽). 물론 교수가 여행을 떠나버린 어느 날 롤란트는 교수의 아내로부터 교수가 동성애자라는 비밀을 듣고 그녀와 관계를 가지면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결국 이 책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숨기고 “마치 온몸에 가면을 쓰고 파우스트의 의복을 입고 앉아있는 바그너처럼”(88쪽) 이중 세계를 살아가며 겪는 한 대학교수의 극심한 감정 흐름을 만나는 순간 심한 혼란의 도가니로 빠지곤 합니다.
방탕과 방황을 경험하다 비로소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낮에는 문학과 예술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을 본받아 그들의 삶을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정신세계에 살며, 뜨거운 청춘들에게 미래에 우리가 살아갈 지적 양식이나 튼실한 교양을 계발하는 열정적인 대학교수의 감정의 혼란을 고스란히 만나볼 수 있다. 논리적이고 치밀하면서도 뜨거운 열정으로 무장한 대학교수도 한 꺼풀 벗기면 견디기 어려운 관능적 육욕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다. 그럼에도 그걸 숨기며 강단에 서는 대학교수의 치밀한 이중적 자기 관리의 가면에 학생들은 한없이 존경하고 따르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는 들끓는 욕정을 억누르고 아무런 일이 없다는 듯 감정의 혼란을 다스리기 위해 이를 악물고 강단이라는 무대 위해서 힘겨운 연기를 이어나간다.
잠시만 한 눈을 팔아도 거침없이 다가오는 유혹의 사슬에 얷매일까봐 한 눈팔지 않고 처절한 사투를 벌이며 육신이 원하는 욕망이라는 열차에 타지 않으려는 고통스러운 투쟁을 반복합니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순간을 경험하지만, 우리의 완전한 세계가 고양되는 순간, (스탕달Stendhal이 기술한 바와 같이) 모든 진액을 빨아들인 꽃들이 순식간에 한데 모여 결정(結晶)을 이루는 바로 그 순간은, 언제나 단 한순간, 오직 한 번 뿐입니다. 그것은 생명이 탄생하는 시간처럼 마술적이며, 체험된 비밀로 삶의 따뜻한 내면에 꼭꼭 숨어 있기에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17쪽). 불현듯 다가오는 격정적 깨달음이 다가오는 순간적 마주침, 그 순간에 온몸을 관통하며 전율하는 감동으로 다가오는 직관적 경외감, 일생에 한 번 꽃을 피우는 어떤 식물처럼 기적 같은 한 순간의 체험이 우리를 살아있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이 책은 60세의 노교수 롤란트가 30년간의 교수생활을 기념하여 어문학자들이 헌정한 기념 문집을 받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영적인 삶의 경험에서 가장 소중한 본질이 빠져 있고, 자신을 창조적 충동으로 몰아간 운명적인 그 사람의 이름도 없다고 서운해합니다. 롤란트는 그래서 자신의 운명을 바꾼 그 사람과의 아름다운을 추억을 소환하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고백을 시작합니다. 롤란트는 독일 지방 소도시 대학의 학장으로 재직하며 엄격한 교육적 가르침과 교훈으로 무장한 아버지의 훈계를 받고 자랐다. 교육자 집안이라서 사방이 책을 둘러 싸인 집에서 자랐지만 사실 그런 환경 자체가 롤란트에게는 상당한 정신적 압박으로 다가왔다. 그는 졸음을 부르는 지루하고 단조로운 설교조 강의에 지독한 권태로움을 느꼈고 참기 힘든 수업시간을 벗어나 베를린 도시가 주는 자유로운 요동에 이끌립니다.
선원이 되고 싶었던 롤란트는 아버지와 타협 끝에 선원생활을 하는데 유용할 것으로 판단되는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베를린의 대학을 갔지만 도시가 주는 무한 자유와 해방감에 빠져 방랑을 넘어 방탕 생활에 빠져듭니다. 공부는 당연히 뒷전으로 밀려나고 하숙방에서 애인과 함께 놀다 느닷없이 찾아온 아버지와 맞닥뜨리면서 일생일대의 최대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자, 대체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넌 이제 뭘 하려고 하지?”(32쪽)라는 예상외의 냉정한 아버지의 질문에 그는 아버지에 대해 처음으로 존경심을 진지하게 갖게 됩니다. 아버지가 보여준 진지함과 신뢰에 감동받은 롤란트는 그동안의 방탕생활을 청산하고 학업에 전념하기로 결심합니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한 사람이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꿉니다
19 살의 청년 롤란트는 자신의 인생을 뒤바꾸는 운명적인 한 사람의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도 의도했던 장소가 아니라 잘못 들어간 강의실에서 20여 명의 학생을 모아놓고 셰익스피어를 열강 하는 한 사람의 영문학 교수에게 그는 순간적으로 매혹당합니다. “목소리가 당당하게 터져 나올 때마다 그는 마치 날개를 활짝 펴듯 떨리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가, 지휘자로 선율에 따르듯 안정된 제스처로 천천히 손을 아래로 내려놓았습니다. 목소리는 점점 더 격렬하게 휘몰아쳤고, 마치 날개라도 달린 듯 그는 질주하는 말의 엉덩이에서처럼 딱딱한 책상에서 음악적으로 솟구쳤습니다. 그리고 섬광과도 같은 번쩍이는 비유들로 가득한 원대한 사상들을 폭풍처럼 쏟아냈습니다”(37쪽). 노 교수의 영문학 강의에 얼마나 감동받았는지를 더 이상 표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는 일생일대의 가장 감동적인 순간, “꽃들이 순식간에 한데 모여 결정(結晶)을 이루는 바로 그 순간”(17쪽)을 경험합니다. 그 순간은 “라틴어로 ‘’랍투스(Raptus,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심리적 상황을 의미하는 단어-옮긴이)라고 부르는 것, 즉 한 인간이 자신의 경계를 초월해 이끌려가는 상태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휘몰아치는 그의 입술은 자신을 위해서 말한 것도,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말한 것도 아닙니다. 그건 몸속에서 불이 일어난 사람 내부의 화염이 입술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38쪽). 어디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지적 황홀감은 감동을 넘어 감탄사를 연발하며 감격적인 장면으로 다가왔습니다. 얼마나 뜨거운 열정이었으면 몸속에서 불이난 화염이 입술을 통해서 전해진다는 표현을 썼을까요? 그 자리에서 강의를 듣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글만으로도 화염에 휩싸여 심각한 화상을 입을 것만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열정적인 강의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런 강의를 듣고 빠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한 번 빠지면 빠질 수 없습니다. 빠져야 완전히 빠져버릴 수 있습니다.
“체험 없는 어문학적 이해나 가치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단순한 문법적인 단어란 존재하지 않아요. 젊은 여러분들은 하나의 국가 그리고 그대들이 정복하고자 하는 언어를 우선 최고로 아름다운 형식 속에서, 청춘의 가장 강력한 형태 속에서, 뜨거운 정열을 통해 만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선 여러분들은 시인들의 언어를 들어야 합니다. 언어를 창조하고 완성하는 시인들 말입니다! 우리는 문학을 해부하듯 분석하기 전에 일단 호흡해야 하며 가슴으로 따뜻하게 느껴야 하지요”(44쪽). 모든 언어에는 그 사람의 열정과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한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는 국어사전에 나오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 단어에는 그 사람의 언어 사용 방식은 물론 말하는 사람의 단호한 입장이 뜨겁게 녹아 있습니다. 그래서 문학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 속에 담긴 작가의 뜨거운 정열을 온몸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문법적 분석과 문학적 해석은 그다음입니다. 분석과 해석이 앞서면 작품은 분해됩니다.
수전 손택이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했던 주장처럼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을 넘어 세계에 가하는 복수”입니다. 문학이나 예술작품을 창작 의도와 무관하게 관념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작품성을 자의적으로 해독하는 행위의 역기능과 폐해를 지적하는 말입니다. 작가가 작품을 쓰면서 녹여냈던 열정이 언어에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분석 이전에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언제나 모든 현상, 모든 인간을 그 불꽃의 형태로만, 정열을 통해서만 인식할 뿐입니다. 모든 정신은 피 속에서 끓어오르고, 모든 사상은 정열에서, 모든 정열은 영적인 감동에서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셰익스피어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먼저 눈길을 돌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을 진실로 젊게 만들어 줄 셰익스피어를 말입니다! 먼저 감동하고, 그다음에 공부하시오! 언어를 공부하기 전에 먼저, 가장 찬란한 세계의 교과서인 그 사람, 가장 고귀한 그 사람, 최고의 인물인 셰익스피어에 대해 연구하시기를!”(44-45쪽). 먼저 감동하고 공부하라는 말이 죽비처럼 다가옵니다. 가슴으로 느끼는 감정이 먼저 밑바탕을 이루고 머리가 생각하는 논리는 다음에 옵니다. 느낌이 먼저 오고 그것이 머리로 올라가 생각이 만들어집니다. 머리로 분석하고 따지는 공부 이전에 어떤 감정의 소용돌이가 온몸을 감싸 안는지를 뜨거운 가슴으로 느껴야 합니다.
강의는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사건입니다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심장이 찔린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나 자신이 스스로의 열정을 동원해 감각을 고양시킬 수는 있었지만, 내가 한 인간에게, 선생님에게 사로잡힌 것은 난생처음이었습니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나의 의무인 동시에 기쁨이었습니다. 나의 피는 뜨거워졌고, 숨소리는 점점 빨라져 들끓는 리듬이 내온 몸을 때리고, 내 모든 관절을 팽팽하게 잡아당겼습니다. 마침내 나는 어쩔 도리 없이, 그의 얼굴을 보려고 앞쪽 줄로 천천히 나갔습니다”(46쪽). 어떤 강의를 들었길래 저 정도로 온몸이 뜨겁게 반응을 할까요? 심장을 찌르는 강의는 책상 지식으로 전달해서는 불가능한 강의입니다. 노 교수는 자신의 삶으로 겪은 체험적 깨달음을 셰익스피어라는 문학가의 작품에 녹여서 셰익스피어를 바라보는 관조적(觀照的) 지식이 아니라 셰익스피어로 빙의해서 살아간 참여적(參與的) 지혜를 몸으로 전수했을 겁니다.
자신의 직접 체험으로 걸러진 지식이 아니고서야 살갗을 파고드는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특히 의미가 머리로 가지 않고 심장에 와 닿는 강의는 강사의 체험적 느낌을 싣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강사의 삶이 담긴 아우라가 저절로 느껴지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카리스마는 형식미에서 오지 않고 내용을 녹여내는 강사의 체험적 각성에서 옵니다. 처음에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먼발치에서 관망하는 자세로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들어보다가 점차 내 몸이 책상 앞으로 바짝 당겨지면서 머리가 어느 사이 강사를 향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강의가 몸을 통과하고 있다는 느낌이 올 때 보여주는 자세입니다. 그 사이 심장박동은 더욱 빠르게 뛰면서 동맥 속을 통과하는 피는 더욱 빠르게 온 몸 구석구석으로 흘러갑니다. 뜨거운 피가 흐르면서 뼈와 뼈를 더욱 가깝게 관절이 당겨줍니다. 다음 말에 한 껏 기대가 부풀어 오르면서 창조적 긴장감이 온몸을 휘감았습니다.
이런 강의를 듣는 순간 그동안 눈앞에만 아른거리며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작품이 비로소 반짝이면서 나의 몸속으로 빨려 들기 시작합니다. 몸속의 위기의식이 생기면 밖의 성긴 정보가 빨려 들어 지식을 만드는 용광로로 돌변합니다. “그날의 강의가 나의 호기심에 정열이 불을 붙여 놓았으며,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시적 언어를 읽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돌연 셰익스피어의 문장 속에서 또 다른 세계가 내게 달려왔고, 그의 언어가 마치 수백 년 동안 나를 찾고 있었던 것처럼 오로지 내게만 다가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시들은 거대한 불꽃으로 나를 매혹하며 혈관 속까지 스며들었고, 잠든 상태에서 날아가는 꿈을 꾸는 것처럼 야릇하게 풀어지는 느낌을 선사했습니다. 몸이 움찔거렸고 부들부들 떨렸으며, 열병이 온몸을 습격하듯 내 피는 점점 더 뜨겁게 일렁였습니다“(52쪽).
난해한 언어적 그물에 가려져 도무지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작품이 비로소 작가의 성품을 담은 채 혈관 속으로 파고들어 혈액순환을 빠르게 재촉합니다. 오랫동안 자신이 꿈꿔왔던 환상적인 세계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꿈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몸이 강의가 전해주는 메시지의 감동과 그 깊이에 따라 계속해서 움찔거리는 걸 보면 강의는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며 전율하는 감동을 주는 게 틀림없습니다. 더구나 조용히 흐르던 혈관 속의 피가 가끔은 터질 것처럼 폭발적으로 팽창하는 듯 강의가 전하는 메시지에 공감하는 순간이 자주 찾아듭니다. 이제 강의는 듣고 감동하는 순간을 넘어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혁명적인 사건으로 거듭납니다.
스승은 제자에게 거대한 우주이자 세상의 중심입니다
하지만 스승은 늘 열정적인 강의를 언제까지나 일관되게 반복하는 철인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의기소침해진 상태에서 한없이 무기력한 상태로 강의실에 나타나곤 합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감동시킬 뚜렷한 작품을 글로 남긴 경우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시 원기를 회복한 노교수는 학생들의 뜨거운 토론장을 다시 한번 뒤흔들며 열정의 불꽃을 피웁니다. “정신적인 불꽃놀이의 한 복판에 서서 다양한 의견의 닭싸움을 자극하고 잡아당기기도 하면서 스스로 유쾌하게 홍분하기도 했습니다. 거장(巨匠)은 이렇게 밀려오는 청춘의 열광에 스스로 휩쓸렸던 겁니다. 그는 책상에 기대어 두 팔을 가슴에 낀 채 한 학생에게는 미소를 짓고 다른 학생에게는 반대의견을 제시해 볼 것을 격려하듯 남몰래 눈짓을 보내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시선을 건넸습니다. 그의 눈은 어제처럼 고무되어 반짝반짝 빛이 났습니다”(59쪽).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날 때마다 직격탄을 날리지 않고 언제 파고들어가야 학생들의 토론을 방해하지 않고 격론을 벌이는 학생들의 향연을 더욱 뜨겁게 달굴지를 압니다. 논증을 생각지도 못한 직관과 통찰로 요약해내는가 하면 토론의 방향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서 생각지도 못한 결론의 목적지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열중하는 자신의 손으로 더욱 격렬해진 리듬에 스스로 도취된 타악기 연주자처럼, 그의 연설은 뜨거운 말 가운데서 점점 더 훌륭하게, 점점 더 열띠게, 점점 더 다채롭게 비상했습니다. 우리가 더 깊은 침묵에 잠길수록, (우리의 숨소리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멎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의 표현은 한층 고조되고 긴장되어 찬양의 소리처럼 드높게 울려 퍼졌습니다. 그 순간, 그의 말에 완전히 귀를 기울인 상태로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되어 그 사람의 일부분이 되었으며, 넘쳐흐르는 감정의 흐름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61쪽). 노교수의 영문학 강의에 빠져든 롤란트는 한순간도 허비하지 않고 공부하는 과정에 광적으로 빠져듭니다, 멈추려야 도저히 멈출 수 없는 욕파불능(欲罷不能)의 상태이며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스승의 학문적 경지와 열정에 헌신적으로 충성하며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심열성복(心悅誠服)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복음서의 말씀처럼 그의 말이 나에게는 은총이자 율법이었습니다. 쉬지 않고 감시하듯 극도로 긴장된 나의 집중력은 선생님이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을 탐욕스럽게 들이마셨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 동작 하나하나를 게걸스럽게 주워 담았고, 그렇게 주워 담은 것들을 집에 돌아와서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정열적으로 어루만지며 간직했습니다. 그 분만이 유일한 나의 지도자인 듯, 질투심으로 꽉 찬 나의 의지는 매일매일 새로운 다짐을 통해 학교 친구들을 그저 능가하고 뛰어넘어야 하는 적(敵)으로 간주하곤 했습니다”(68쪽). 롤란트는 그의 교수가 사는 집 이층에 방을 구하고 아예 스승과 가까이서 배우기로 결심하고 이사를 합니다. 그는 매일 밤 일정한 시간에 만나 토론하고 스승과 그의 부인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공부하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깨닫고 롤란트는 아예 방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선 채로 식사를 하기도 합니다. 일체의 휴식시간을 줄이고 거의 잠도 자지 않고 스승에게 실망을 안겨드리지 않기 위해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립니다. 롤란트에게 영문학을 가르치는 노교수는 하나의 거대한 우주이자 세상을 움직이는 중심입니다.
“활화산처럼 분출하는 언어의 광휘로 낯선 나를 처음부터 사로잡았고, 더 깊은 그의 침묵, 이마 위에 떠도는 비애의 구름이 이젠 그와 친숙해진 나를 흔들어놓았습니다”(86쪽). 삶으로 녹여낸 언어는 잠자는 전두엽에 번개를 내리치듯 충격적인 자극으로 다가왔을 뿐만 아니라 고뇌하는 삶의 흔적이 침묵과 비애의 모습으로 묻어날 때면 강연할 때보다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스승은 강의장에서 뿐만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자신의 심연 아래를 응시하는 미켈란젤로의 사상과 처절하게 내면을 향해 꾹 다문 베토벤의 입, 이렇듯 세계 고뇌를 가린 비극적인 가면들은 모차르트의 은빛 멜로디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물 주위에 밝게 퍼지는 빛보다 더 강력하게 청년을 감동시킵니다”(86-87쪽). 한 사람의 스승의 모습에서 삶의 심연을 파고드는 미켈란젤로의 모습은 물론 할 말을 참고 침묵으로 항변하는 듯한 베토벤의 선율을 발견합니다. 롤란트는 스승의 이마 위에 떠도는 비애의 구름에서 고뇌에 찬 어둔 그림자를 애써 감추며 비극적 멜로디를 보여주는 모차르트와 다재다능으로 세상의 빛이 되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습까지도 발견합니다.
이성은 이글거리는 열정을 통제할 힘이 없습니다
하지만 롤란트는 스승과 그분의 부인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잠깐잠깐 부딪칠 때마다 묘한 감정의 기류가 저변에 흐르고 있음을 감지합니다. 스승은 개방적이고 열정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만나는 친구가 없고 오로지 학생들만 교제 상대였습니다. “집에서 그는 거의 말이 없었고, 심지어 부인과도 그러했습니다. 세상 경험이 없는 나 같은 어린 사람도 걱정스러워 보일 만큼 두 사람 사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항상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 그림자는 느낄 수 없는 어떤 물질들에 이끌려 이리저리 흩날리면서 서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지요. 처음으로 나는 결혼이란 것은 너무나 많은 비밀을 외부에 숨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81쪽). 어둡고 내성적이고 오로지 정신적인 것에만 활기를 띠는 스승과는 다르게 민첩하고 밝은 부인의 성격은 극과 극의 불편하면서도 긴장감이 감도는 조화를 유지해갑니다.
부인과 잠깐이라도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면 열정의 화신이었던 스승이 어떻게 서릿발처럼 차가운 냉정의 기운으로 대하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부인에게 어떤 말을 전해주는 대신에 보기 민망할 정도의 쌀쌀맞은 표정으로 돌변하거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차갑게 냉정하게 대합니다. 공부에 대한 열정을 뜨겁게 달군 다음 느닷없이 사라지는 스승의 황당함은 심각한 질문으로 제자들을 곤궁에 빠뜨리고 갑자기 종적을 감추는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와 비슷했습니다. ”무의식 중에 나를 뜨겁게 만들어놓고 느닷없이 얼음을 쏟아붓는 사람, 자신의 격정으로 스스로를 자극하더니 갑자기 반어적인 언어의 채찍을 움켜쥐는 사람, 이렇게 번갯불처럼 번쩍이고, 뜨거움에서 차가움으로 돌변하는 그 사람에게서 나는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겪었는지 모릅니다“(90쪽). 내가 스승에게서 받은 이런 느낌은 부인을 대하는 그의 자세와 태도에도 고스란히 나타나는 것을 알았습니다.
스승의 이중적 행동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을 때 자주 경험합니다. 어느 날 강의장에 걸린 이틀 동안 휴강한다는 메모는 사전에 아무런 예고 없이 펼쳐지는 예측불허의 드라마입니다. “마치 병마개 위에 달린 병뚜껑처럼 그는 느닷없이 잽싸게 튕겨나간 후 다시 돌아오곤 했습니다“(92쪽). 이럴 때마다 내가 느끼는 것은 ”이성은 이글거리는 열정을 통제할 아무런 힘“(93쪽)을 쓰지 못하고 무력하게 무너진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중간에 자주 사라졌던 이유도 청춘의 꽃들이 내뱉는 숨소리와 에로의 열정에 자신의 욕망이 심하게 꿈틀거리는 순간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고귀한 수준에서 형식의 아름다움을 구가하고 내용에 담긴 미적 감각의 숭고함을 온몸으로 호흡하는 숭고한 정신적 인간의 거장이 남몰래 어둠의 밑바닥으로 들어가 스스로 자신을 망가뜨리고 추잡한 속세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방탕생활을 주기적으로 반복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학생들에게 한 순간도 딴 눈 팔지 않고 정신적 각성의 위대함을 몸으로 증명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모르게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육욕(肉慾), 극도의 혐오스러움과 불쾌함, 환멸과 질색으로 가득 찬 맹독성(猛毒性)을 부식시키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낮에 만나는 대학의 젊은 친구들과의 숭고하고 다정한 정신적 관계와 환락과 방탕의 세계에서 밤에 만나는 환멸과 경멸의 관계를 구분하며 이중적인 생황을 반복했던 고통을 우리는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감정의 혼란은 스승의 부인과 마주치면서 롤러코스트처럼 심한 기복을 타면서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는 이중주를 연주합니다. 스승의 부인과 첫 대면은 다이빙 수영장, 기를 쓰고 그녀의 멋진 자태에 빠져 좇아가다가 결국 따돌림을 당하고 따라잡기에 실패한 롤란트는 다시 수영장 밖으로 집에 가는 동안만이라도 잠시 대화를 나누자는 데이트 제안을 합니다. 그렇게 집에 도착할 즈음, 그녀가 바로 자신의 스승 부인임을 감지하는 순간 사지가 후들거리면서 천지가 한꺼번에 뒤흔들리고 지축이 심하게 자신의 온몸을 휘몰아치듯 뒤흔들어놓았습니다. 스승에게 결국 밝혀질 수밖에 없는 오늘의 자신의 행태가 얼마나 황당하고 당혹스러울 것인지 다가올 미래의 시간을 생각하기 조차 싫었습니다. 다행스럽게 부인은 자신의 돌발행동을 비밀리에 붙여줍니다. 감정의 혼란은 스승의 돌출 행동이 일어날 때마다 느끼는 순간에도 찾아오지만 부인의 일거수일투족에서도 끝을 모르고 이어집니다. 감정의 혼란이 어디쯤에서는 파란을 일으킬 정도로 후폭풍이 심하게 밀려오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혼란은 스스로 수습하고 다시 감정은 얼마 동안 질서를 찾아 흘러갑니다.
인생은 희비(喜悲) 쌍곡선이 연주하는 이중주입니다
필생의 과업으로 작품 개발에 몰두했지만 미완성 교향곡으로 여전히 스승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세계 연극』을 완성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서 어느 날 롤란트는 스승에게 그 이유를 물어봅니다. 하지만 비밀스럽고 고통스러운 상처를 공연히 건드려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순간적으로 들었습니다. 새벽 여명과 침묵이 흐르면서 스승이 드디어 입을 엽니다. 더 이상 그 작품을 완성할 끈기가 없고 집중력을 발휘할 수 없어서 집필할 수 없다고. 체념에 빠진 스승을 보고 받아쓰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고심 끝에 제자의 제안을 받아들인 스승은 “그러면, 우리 같이 해 보세. 젊은이들이 항상 옮은 법이지. 젊은이의 말을 듣는 게 현명한 거야!”(97쪽)라고 화답해준다. 빠져나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빽빽한 가시덤불 속에서 한평생을 절치부심하며 살아왔던 노스승은 체념 속에 빠져 살다가 한 젊은이의 뜨거운 헌신과 사랑과 마주치면서 죽었던 정열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지불식간에 불현듯 찾아온 청춘의 선물 속에는 위험한 심지가 숨어서 스스로 빛을 태우며 죽어가던 작품 개발 열정에 불을 지르기 시작합니다.
“어떤 문장은 운율에 맞춘 한 편의 시 같았고 또 다른 문장은 호메로스의 배들의 카탈로그와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의 야성적인 찬가처럼 기가 막힐 만큼 훌륭하게 응축되어 폭포수처럼 흘러나왔습니다”(98쪽). 스승이 말하는 모든 언급을 받아쓰면서 전율하는 감동이 솟구침을 온몸으로 느끼기 시작합니다. 스승의 한 마디는 곧 한 편의 시였으며, 문장과 문장의 연결은 야성으로 조율된 지성의 찬가 같았습니다. “아무 색채도 없이 그저 순수하게 흘러내릴 뿐인 뜨거운 열(熱)과 같은 사상이, 충동적인 격정의 주조에서 쇳물과 같이 흘러나와 서서히 그 형태를 갖추고 그 형태가 둥근 형상으로 변하면서 마침내 명료하게 하나의 언어로 완결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종의 추가 처음 울려 퍼지듯, 창작의 충만한 감각이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는 것을 나는 처음으로 목격한 것입니다. 모든 단락이 운율로 이루어졌고, 모든 표현이 그림의 한 장면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습니다”(99쪽). 일정한 형태를 갖추지 않고 쏟아져 나오다가 격정의 주조를 통과하는 순간 분명한 의미체계를 갖추면서 감각적 언어로 재탄생합니다. 신기하고 묘한 문장의 마력을 목전에 볼 수 있는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지입니다.
창작 여정에 함께 빠진 스승과 제자는 때로는 번뜩이는 즉흥적 창작의 빛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깊은 사색과 고뇌의 바다에서 고심 끝에 건져 올린 사유의 산물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해보고 연결시켜 색다른 가능성의 관문을 열어갑니다. “그것은 완전한 비언어적인 송가(頌歌)였습니다. 장엄하게 설계되었으나 현세에서 무한함을 볼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는 바다에 대한 송가 말입니다! 먼 곳에서 먼 곳으로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 높은 곳을 향하다가 깊은 곳으로 숨어드는 바다. 그 사이에는 뜻이 없는 동시에 뜻이 충만하며, 흔들리는 인간의 나룻배를 희롱하곤 하는 바다. 그 바다와 같이 장엄한 형상의 비교를 통해 우리를 피 흘리게 하고 해체시키는 원초적인 힘이 비극의 서술을 완성시켰습니다”(99쪽). 중차대한 꿈을 싣고 먼 항해를 떠나지만 갑작스러운 파도에 부딪쳐 난파당하는 비극을 경험합니다. 깊은 사연이 심연으로 가라앉습니다.
심금을 울리는 사연을 품고요. 그 사이에 느닷없이 몰아치는 파도와 바람으로 쓰고 있던 모자가 날아가듯 삶은 예기치 못한 사고로 희비쌍곡선이 오르락(樂) 내리락(樂) 이중 주를 연주하며 어제를 배경으로 오늘을 전경에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지금 겪고 있는 곤경의 바다가 지나고 나면 풍경의 바다로 다가오면서 과거에 겪은 아픔과 슬픔을 바다가 다 받아줍니다. “선생님이 야성적이고 원시적인 서술을 열광적으로 묘사할 때는, 창작자의 단어가 웅장한 울림으로 날아올랐습니다. 처음에는 속삭이듯 빠르게 읊조리던 그의 음성은 근육과 성대를 울려 카랑카랑해졌고, 금속의 빛을 발하며 한층 더 자유로이 높게 비상하는 비행기가 되었습니다”(101쪽). 야성과 원시, 그리고 열정은 창작자의 작품 개발과정에 관여하는 삼총사입니다. 길들여진 지성만으로는 예술적 감동과 문학적 충격을 줄 수 없습니다. 길들여지지 않는 원시적 야성이 창작을 향한 열정에 불을 지핍니다.
한 사람에게 한 순간은 한 세상을 열어가는 혁명입니다
스승이 토해내는 창작의 언어와 그것으로 직조된 문장을 받아 적고 있으면 마치 자연의 위대한 서사시를 독주로 듣고 있는 기분이 듭니다. 고심 끝에 선택한 특유의 언어로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감정 변화를 포착하는 문장은 그 자체가 시이며 에세이이고 소설이자 연극이며 영화입니다. 그 속에는 한 사람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사중주가 고스란히 음악적 선율로 담겨 있습니다. “책상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나는 마치 고향의 모래 언덕에서 수많은 파도와 흩날리는 황홀한 바람을 다시 호흡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한 인간의 태어남과 마찬가지로 한 언어가 탄생하는 고통의 떨림에 놀랍고 겁먹었지만, 그와 동시에 행복한 기분 속으로 깊이 잠겨 드는 것을 느꼈습니다“(101-102쪽). 문제의식을 품고 탄생한 언어에는 당사자의 치열한 고뇌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언어적 표현으로 모습을 갖추는 순간 내가 느꼈던 감정적 기복은 모습을 감추고 언어에 장송곡을 남길뿐입니다. 감정의 혼란은 언어적 진술을 거부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슈테판 츠바이크는 놀랍도록 감정의 혼란 상태를 적확한 언어를 동원해 표현하는 경이로움을 보여줍니다. 감정을 미적분해서 상황적 특수성이 요구하는 미세한 감정 변화를 미세하게 기술함으로써 해상도 높은 감정표현을 보여줍니다. 감정 상태에 따라 적확한 언어가 준비된 사람에게는 자신의 감정 상태를 다양한 언어를 동원해 다채롭게 표현할 문장 구성 능력을 지니고 있다. 스승이 언어로 표현하는 창작의 세계에 완전히 빠져버린 롤란트는 여인에게 향하는 열정과 남자가 남자에게 바치는 열정의 차이를 구분합니다. 한 순간에 부여된 자연선택의 엄청난 기회는 한 사람에게 무한한 가능성의 관문을 열어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순수한 존경을 담은 남자의 열정이 한 여인에게 향하게 되면, 그 열정은 무의식 중에 육체적인 결합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이끌리게 됩니다. 자연은 서로의 육체를 소유함으로써 최고의 결합을 이루도록 정열을 아로새겨 놓았으니까요”(109쪽). 문제는 남자 제자가 남자 스승에게 바치는 정열과 뜨거운 사랑의 끝은 어떤 목적을 향해 불타오를 수 있을까요? 남녀 간의 사랑이 뜨겁게 불타오른 후로 심각한 후유증이든 희열의 결말이든 한 줌의 재로 남아 하염없이 흩날릴 수 있지만 남자 제자가 남자 스승에게 바치는 뜨거운 사랑의 궁극적 목적지는 어떤 모습으로 형상화시킬 수 있을까요? 불타오르다 재로 남아 없어지는 남녀 간의 사랑과는 다르게 남자 제자가 남자 스승 사이에 싹트는 사랑은 사랑이 물들어갈수록 불타오르는 화염은 사그라들지 않고 둘 사이를 꺼지지 않고 밝혀주는 등불 같은 이미지로 남습니다.
“남자가 남자에게 바치는 정신의 열정, 충족되지 않은 그 정열은 어찌해야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정열은 존경하는 인물 주위를 쉼 없이 맴돌면서 항상 새로운 황홀함을 위해 타오르지만, 자신을 바치는 최후의 순간에도 결코 가라앉지 않습니다. 정신이 항상 그러하듯 열정은 계속해서 흐르지만 영원히 충족되지 못하고 완전히 흘러가지도 못하고 맙니다”(109-110쪽). 스승과 제자가 남자 사이라면 심열성복으로 불타오르는 뜨거운 배움의 열기가 폭발하지만 그걸 멈출 수 있는 제동장치는 없습니다. 배움에 대한 갈구는 끝없이 이어지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는 미(美) 완성입니다. 어제와 다른 깨달음의 향연이 새로운 정신세계로의 여행을 자극하지만 어디를 가든 늘 어제와 다른 깨달음의 황홀함이 멈추지 않습니다.
감정의 혼란은 생각의 파란을 일으킵니다
그 선물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에로스의 횃불을 독으로 오염된 상처 위로 가까이 대며 몸을 굽혔던 것”(192쪽) 임을 누가 알았을까요. 스승에게 다가가는 뜨거운 열정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스승의 감정 변화와 혼란은 나의 감정을 끝도 없는 나락으로 추락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합니다. 이미 언급했던 “병마개 위에 달린 병뚜껑”(92쪽)처럼 느닷없이 돌출 행동을 일삼는 스승의 변덕과 기행은 그야말로 예측불허였습니다. 밤을 새워 글을 정리해서 갖다 드리면 성의 없이 대충 뒤적거리다 잘 보지도 않고 냉담한 표정을 짓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롤란트는 극도로 과민해진 신경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감정 상태로 인해 이제 정신과적 치료를 받을 정도로 심각한 위기의 터널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그가 가까이 있으면 뜨거운 아픔을 느꼈고, 그가 소원하게 나를 대하면 차갑게 얼어붙었습니다”(111쪽). 선생님을 향한 배움에의 갈구와 열정에 제동이 걸릴 때마다 롤란트는 그의 부인에게 도피하며 위로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남편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가득 찬 감정의 혼란과 그동안 쌓인 응어리를 말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스승이 왜 제자를 미워하고 배움의 길로 향하는 갈망을 절망으로 내리치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다시 학기말이 다가오고 방학을 맞이합니다. 스승과의 구술 대화는 계속되었고 나는 더욱 박차를 가해 필기합니다.
“느닷없이 언어의 폭풍이 밀려왔습니다. 그 바다, 무한한 정열의 바다는 그 마룻바닥의 내부에서부터 모든 시대와 모든 곳의 인간에게 붉은 열정의 물결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결코 마르지 않고 끝을 가늠할 수조차 없으며, 명랑하면서도 비극적인 다양한 형태로 바뀌며 충만하게 인간의 근원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곧 잉글랜드의 극장이고 셰익스피어의 희곡입니다”(120쪽). 시공을 초월하여 문학적 향기를 온 세상으로 퍼져나갑니다. 인간적 삶의 다양한 측면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품고 언어를 매개로 독자에게 전달됩니다. 그 언어에는 저자의 문제의식이 꽈리를 틀고 뇌리를 파고드는 진리를 향한 숨결이 담겨 있고 저자의 열정이 폭풍을 싣고 거센 파도의 포효하는 기운이 담겨 있습니다. 접속만 해도 광기가 느껴지고 살아가는 인간군상의 다양한 이미지가 우리들을 미지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스승과 제자는 혼연일체가 되어 스승의 언어적 폭풍을 활자의 바다에 녹여냅니다. “제1부가 완성되었네”(121쪽). 무려 170쪽에 달하는 위대한 작품의 일부를 끝냈다는 기쁨과 뜨거운 감동은 갑자기 소리를 지를 뻔할 정도로 경이로운 전율로 다가왔습니다.
히스테리적 발적 증세와 느닷없는 냉소적 반응을 보일 때와는 다르게 따사로운 눈길로 부드럽게 나를 감싸 안으며 그동안의 회한을 감동의 기쁨으로 표현하려는 스승의 모습에서 다시 한번 롤란트는 깊은 감동의 희열 속으로 빠져듭니다. “자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 이 작업을 시작할 수 없었을 거야. 결코 자네를 잊을 수 없겠지. 자네는 내가 무기력함을 떨치고 일어나 구원의 도약을 해주었어. 산만함에 빠져 생기를 잃어가지 않도록 자네가 나를 구원해 준거야”(123-124쪽). 이윽고 스승은 ‘자네’라는 말 대신에 ‘너’라는 말을 쓰면서 이제 우리가 한 시간 동안은 형제처럼 지내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스승의 제자에 대한 사랑을 넘어 또 다른 차원의 사랑이 시작되는 전조임을 롤란트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스승의 감정의 혼란은 제자의 생각의 파란을 일으킵니다. 파격적인 감정적 혼란이 제자에게는 소란한 가운데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생각의 파란을 낳습니다.
감정의 혼란은 견딜 수 없는 긴장상태를 유발합니다
1부를 완성하고 오랜만에 스승과 와인을 마시면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사제간의 진한 정을 나누면서 흥겹지만 진한 긴장감이 감도는 이유는 지금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모두 엿듣고 있을 스승의 부인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느슨해진 기분으로 한껏 기분이 고조된 스승은 처음으로 제자에게 자신의 젊은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다고 말하자마자 피곤함을 이유로 오늘은 안 된다고 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인공은 자신의 침대로 올라가 몸을 던지듯 누워버립니다. 밖에서 스승의 부인이 계속 둘 사이의 대화를 엿들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스승의 기분은 다시 돌변합니다. 잡았던 손을 마치 돌멩이 던지듯 매정하게 내쳐버립니다.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며 주인공은 “어둠과 음산함과 더불어 무거운 침묵에 휩싸인 집 안 전체에 갑자기 악몽이 드리워진 것 같았습니다”(130쪽)는 예감을 합니다.
주인공을 더욱 불안과 긴장감에 떨게 만드는 것은 “오싹한 털을 살짝 스치게 해서 놀라는 소리, 소리 없이 앞발을 들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유령 고양이 같은 그 그림자가 집안에 위험스럽게 도사리고 있다(131쪽)”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하루 동안의 격렬했던 노고를 잠재우고 긴 밤의 고유를 벗 삼아 휴식을 취해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밤의 적막은 있는 그대로의 편안한 휴식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붕 위에, 은빛 안개를 머금은 달과 같은 부드러운 안식과 고요함이 맴돌고(132쪽)” 있음과 동시에 “기이한 상념들이 불쾌하게 포개져……열병에 시달리는 나의 감각은 마음속에서 혼란스럽게 소용돌이치는 어떤 속삭임“(132)이 교차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갑자기 자신이 누워있는 방의 계단으로 누군가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오싹할 정도의 소름이 돋습니다. 스승께서 초를 들고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낮에 둘 사이 나눴던 자네가 아니라 너라고 이야기했던 말이 결국은 학생과 선생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잘 못된 발언이었다고. ”증오와 모욕, 적대적인 악의로 가득 찬 표정”(136쪽)과 “차가운 분노와 이글거리는 절망이 어쩔 줄 모르고 격렬하게 교차(137쪽)하면서 여러 상념이 폭죽처럼 현란하게 뒤엉키는 극심한 감정의 혼란 상태를 하룻밤 사이에 경험합니다. 잠깐 눈을 붙인 후 아침에 간신히 눈을 떴지만 어젯밤에 일어난 믿지 못할 사건이 꿈이었기를 기대했지만 엄연한 사실로 롤란트를 괴롭혔습니다.
배가 고팠음에도 불구하고 스승과 부인을 마주칠 용기가 나지 않아 뒤척이고 있는 사이, 계단으로 올라와 부인이 아침식사하러 왜 오지 않느냐는 뜻밖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사지가 떨려서 계단을 간신히 내려온 롤란트는 스승의 자리가 비어 있음을 알아채고 부인에게 물어봅니다. 오늘 아침에 다시 여행을 떠났다고. 한바탕 울음을 터뜨린 후 잠시 부인과 소파에서 롤란트는 처음으로 어머니처럼 부드러운 연민이 손길이 자신을 어루만져주고 있음을 느낍니다. 뻔뻔하고 거들먹거리면서 때로는 분노와 적개심 어린 표정으로 자신에게 비난과 적개심의 화살을 날리던 그녀가 한없이 온화하고 연민에 가득한 얼굴과 손길로 다가오고 있는지 자신도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감정의 혼란은 표리(表裏)가 전혀 다른 두 가지 다른 페르소나입니다
과거를 회상하다 스승의 덫에 걸려 고심하던 나에게 부인은 계속해서 그 사람을 믿지 말라고 충고하고 강권한다. 예상했던 불행한 일이 벌어진 것이니 더 이상 자신의 남편에 종속되어 불행한 인생을 살지 말고 한다. “오늘 오후에는 집에만 처박혀 있지 말아요. 산책을 해요. 마음껏 뛰고 즐겁게 보내요!”(145쪽) 오랜만에 즐겨보는 여유로운 야외에서의 신나는 놀이였습니다. 그는 도시 외곽으로 나가 여성 악단의 음악에 맞춰 광란의 춤을 추며 몇몇 여인들과 맥주와 와인, 그리고 독주를 뒤섞어 마시면서 흥청망청 유흥을 즐기며 하루를 보냅니다. 잠에서 깨어난 롤란트는 어젯밤 자신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심각한 후회와 함께 억지를 써서라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정당화시켜보려고 애를 씁니다.
“이제 그 사람을 상대하지 않겠어! 악마가 데리고 가라고 하지! 나이 들고 어리석은 그 사람 때문에 내가 마음고생할 필요가 뭐가 있어!”(148쪽). 스승의 부인이 제안한 대로 대학강사 W. 씨와 그의 약혼녀와 함께 보트도 타고 수영도 함께 합니다. 스승이 여행을 떠난 빈자리는 롤란트에게 엄청난 감정의 혼란이 다시 한번 파란을 일으키는 사건의 현장으로 작용합니다. 부인을 통해 스승이 동성애자임을 간접적으로 확인합니다. 그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뜨거워진 부인과 급기야 서로의 육체를 격렬하게 탐닉하고 맙니다. 다음날 롤란트는 부끄러움과 함께 스승에 대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지금 여기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짐과 책을 묶고 방값을 계산한 다음 떠날 채비를 하는 순간 다시 롤란트는 놀랍게도 스승이 다시 찾아왔음을 알아챕니다. 스승의 전형적인 신출귀몰 상태를 반증하는 사례가 마지막 떠나는 여정에서도 구현됩니다. 쉽게 끊을 수 없는 인연입니다.
기필코 떠나겠다는 롤란트의 결심을 들어본 스승은 편지나 다른 방법 말고 직접 만나서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누자고 부탁한다. 스승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롤란트는 늘 하던 대로 스승의 서재로 7시에 찾아갑니다. 스승은 그동안의 자신의 무례함을 반성하면서 상처 주었던 그 간의 언행도 반성합니다. 왜 떠나는지 스승은 그 이유를 집요하게 캐묻지만 롤란트는 뚜렷한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스승이 묻습니다. 스승이 이런저런 생각 끝에 “여자 때문이지…? 내 아내인가?”라고 물었을 때 롤란트는 온몸에 전율이 번져 옴을 느낍니다. 스승은 롤란트의 성품과 외모에 비추어 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수긍합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사실은 “나도… 나도 자네를 사랑하고 있네”(175쪽)라는 스승의 고백을 듣는 순간 “마치 암호 하나가 별안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보고서의 말을 한 번에 풀어준 것 같은 느낌”(176쪽)을 받습니다. “수염 아래 있는 그의 입술에서 관능적이고 애정 어린 음성으로 사랑이라는 말이 새어 나오자 달콤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전율이 나의 관자 돌이에 파고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겸허함과 동정이 극렬하게 타올랐지만, 불시에 습격을 당한 젊은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하게 내게 털어놓았던 그의 정열에 대해 아무 응답도 할 줄 몰랐습니다”(177쪽). 스승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충격받은 롤란트는 사랑으로 흘러내렸다가 다시 사랑으로 가로막혔던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어 봅니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 정신분석학자 라캉이 주장한 내용입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과 실제로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다릅니다. 실제로 내가 살아가는 모습과 다르게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페르소나라고 합니다. 일종의 정신적 가면을 쓰고 저마다의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며 살아가는 모습니다. “낮 동안에는 흠잡히지 않도록 대학 강사로서 근엄하고 품위 있는 행동을 유지하지만, 매일매일의 이중적인 면모를 조심스럽게 숨기려면, 메두사의 비밀을 낯선 사람들의 시선에서 은폐하려면, 밤이 되어 어둠 속에서 깜박이는 가로등 아래 지하 세계에 갇힌 수치스러운 모험을 남모르게 감행하려면, 강철같이 단단하고 굳은 의지를 단련해야 했습니다“(184-185쪽). 젊은 학생들을 가르치며 느끼는 고상한 지식인으로서의 대학교수의 생각과 자신도 모르게 꿈틀거리는 육욕을 통제하고 자제하기 남모르게 안간힘을 썼던 두 얼굴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까요?
제자에 대한 사랑이 무르익고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마다 느닷없이 여행을 떠났고 밑바닥 인생을 살면서 동성애적 충동을 해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한 인간이 완전히 벌거벗은 채 내게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자신의 가슴속 깊은 곳 완전히 부서지고 망가지고 연소되고 곪아 터진 심장을 기꺼이 노출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181-182쪽). 자신이 평생 간직한 비밀의 정원은 그리 오래지 않아 제자에게 억눌렸던 격렬한 욕망의 강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고백 속에서 스스로를 채찍질하듯 부끄러움을 온몸으로 감추면서 살아온 한 사람이 비로소 내면 속에 숨겨 왔던 사랑의 화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여기, 한 인간이 그이 삶을 자신의 가슴에서 한 조각 한 조각 뗴어 냈습니다. 그 순간 소년이었던 나는 이 세상의 감정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다는 것을 처음으로 똑똑히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182쪽).
감정의 혼란은 과거의 나를 죽이고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출발입니다
정신적 혼란기를 겪고 있었던 롤란트는 마치 구세주처럼 나타났던 스승을 거의 광신도처럼 따라다니며 열렬히 사랑했습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창조적인 씨앗을 발아시키기 위해서는 스승과 같이 열정적으로 뭔가를 탐구하면서 먹구름 속에 가려진 태양의 정체를 드러내 주는 삶의 스승이 필요했습니다. 가시밭길을 걸으며 학문적 열정을 온몸을 다해 불사르던 스승의 기력이 쇠퇴하고 자신감마저 쇠잔 해갈 즈음 에로스의 등불을 꺼져가는 영혼 속에 들이밀어 불을 붙임으로써 스승은 죽어가는 자신을 흔들어 깨우며 멈출 수 없는 광기를 발휘한 것입니다. 롤란트의 발견적 열정과 스승의 설득적 열정이 만나 불꽃을 틔우는 사이 스승이 의도적으로 비웃고 거절하며 굴욕감을 느끼게 한 것도 “운명의 마지막 은총에 욕정의 장난이 끼어들도록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194쪽). 스승이 제자의 헌신적 열정과 사랑에 얼음 같은 말을 쏟아내며 냉담한 반응을 보여주고 느닷없이 달려드는 헌신적 충성도 격렬하게 저항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압도적 관능에 못 이겨 몽유병 환자처럼 삐걱거리는 계단 위로 올라왔으면서도, 오히려 모욕적인 말을 내뱉음으로써 우리의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그날 저녁의 혼란스러움은 이제 소름 끼칠 정도로 명백해졌습니다”(195쪽). 갈고닦아왔던 지고의 가치와 의미가 한순간에 무너지기는 쉽습니다. 견딜 수 없는 관능적 욕망을 억누르며 올라왔던 계단을 다시 내려갔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위대한 세제 지간을 넘어 인간적 유대관계의 끈이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에로스의 등불로 불 붙인 “나 때문에 얼마나 무섭게 고민하고, 나 때문에 얼마나 지독하게 자신의 감정을 억제해왔는지, 나는 열병에 걸린 것처럼 몸을 떨며 감동하고, 흥분하며 이해하고, 그를 향한 애틋함에 녹아들었습니다”(195쪽). 타오르는 관능적 정염의 불꽃 뒤에는 그걸 타오르지 못하도록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서 억누르며 참고 견디며 감당했던 이중적 생활은 그 자체가 처절한 고역이자 처참한 사투였습니다.
고통의 극복은 곤경을 풍경으로 바꿔줍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기엔 언제나 자기와 싸우는 처절한 사투입니다. 나중에 멀리서 보면 그것이 앓음다운 풍경으로 다가와도 당시에는 당사자이게 엄청난 비극적 충동이었습니다. “고통을 당하는 자는 계속 긴장하면서, 자기 억제의 회초리를 들고 일상의 길에서 벗어나려는 열정을 울타리로 몰아넣어야 했습니다. 충동이 자꾸만 그를 어둡고 위험한 곳으로 끌고 갔기 때문입니다. 치유할 수 없는 욕정의 힘, 보이지 않는 자석 같은 그 힘에 맞선 신경을 갉아먹는 혈투가 10년, 12년, 15년 동안 계속되었고, 그건 하나의 경련과도 같은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즐거움 없는 향락, 숨 막힐 것 같은 부끄러움, 자신의 정열에 대한 수치심은 서서히 어두워지며 그 눈빛을 감추기에 이르렀습니다”(185쪽).
어둠 속에 가둬둬야만 했던 또 하나의 나를 겉으로 꺼내놓고 세상과 정면으로 맞선 나를 바라봅니다. 가면으로 위장했던 지난날의 삶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서의 삶과 마주친 자신의 본모습을 들여다봅니다.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 보면 오상아(吾喪我)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염된 ‘나(我)’를 죽여야 원래의 ‘나(吾)’로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누가 오염된 나이고 죽여야 할 나는 누구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원래의 내가 누구인지도 죽여야 할 내가 누구인지와 구분될 수 없는 같은 나입니다. 아(我)와 오(吾)는 한 사람이 보여주는 두 가지 다른 모습, 페르소나이기 때문입니다. “한 인간이 인생에 단 한차례에, 한 인간만을 위해 말하고는 영원히 침묵한 것입니다”(195쪽). 한 인간이 나라는 가면을 벗고 또 다른 나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날이었습니다.
스승과 제자는 일생에 단 한번 진한 사랑을 나눕니다. 한 인간이 인생에서 단 한번, 한 사람을 위한 사랑입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쉼보르스카의 ‘두 번은 없다’와 정확히 일맥상통하는 황홀한 쾌감의 연주였습니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의 사랑으로 불타는 장면만 존재할 뿐, 과거도 미래도 없다. “그것은 내가 그전에 어느 여자에게도 받아본 적이 없는 키스, 죽음의 울부짖음 같은 거칠고 절망적인 키스였습니다. 그의 몸의 떨림과 경련이 내게 고스란히 옮겨졌습니다. 낯설고 두려운 감정, 그 이중적인 느낌 때문에 온 몸이 오싹해졌습니다.……나를 짓누르는 그 순간이 점점 더 나를 완전히 마비시킬 것 같은 스산한 감정의 혼란이 느껴졌습니다”(197쪽).
스승과 헤어진 이후 편지도 소식도 받아본 적이 없는 롤란트는 함께 작업했던 저술 작업이 끝내 빛을 보지 못했고 그의 이름조차 잊혀 감을 느꼈습니다. 오노레 드 발자크가 말하는 《미지의 걸작》에도 미치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영원한 미완성 교향곡으로 남을 수도 있겠습니다.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인생의 파노라마가 우여곡절(迂餘曲折)의 선율과 함께 연주되다 절치부심(切齒腐心)의 쉼표 앞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습니다.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때로는 끝을 모르는 한 숨도 쉬면서 숨 가쁘게 달려온 스승과 부인, 그리고 제자의 애틋한 사랑의 변주곡이 낭만적인 사랑을 구가하는 세레나데(serenade)나 로맨스로 들릴지 아니면 육욕의 광풍에 휩싸인 욕망을 느리게 연주하는 안단테풍의 랩소디(rhapsody)나 장송곡으로 들릴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깁니다.
사람은 이성의 동물이기에 앞서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동물입니다. 호숫가에 던진 돌멩이의 크기에 따라 호숫가 표면에 생기는 파장의 넓이와 깊이가 다르듯, 내 몸에 각인된 감정적 흔적의 깊이와 넓이에 따라 그걸 추억할 수 있는 강도가 달라집니다. 때로는 억누를 수 없었던 분노와 적개심에 불타 이성이 통제할 시간적 여유조차 잃어버리고 분출되거나 폭발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의 각성이 너무도 깊게 다가온 나머지 시간이 지나도 당시에 느꼈던 감정적 파고가 희석되지 않고 강렬하게 회상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뚜렷한 메시지는 생각나지 않아도 강렬한 이미지가 여전히 부각되는 이유는 거기에 담긴 감정의 격렬함 때문입니다. 이 책을 잡아든 순간부터 멈추지 않고 순식간에 롤란트의 감정의 혼란한 흐름이 엮어가는 스토리에 빠져 읽어버렸습니다.
다양한 감정의 기복을 겪으면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사중주가 스승과 부인, 그 사이의 제자가 엮어가는 사랑의 삼중주와 뒤섞입니다. 세 사람의 역학적 인간관계가 만들어가는 감정은 혼란기를 겪으면서 앎의 세계로 향하는 로고스와 여기서 겪는 파토스가 춤을 추면서 인간적 에토스에 따라 다른 음악으로 들립니다. “대립의 큰 구도에서 보면 영웅적인 죽음이 있어야 삶은 고양되고, 몰락이 있어야 무한한 상승 의지가 솟아 나오는 법이다. 우연한 성공과 손쉬운 성취를 보고 고무되는 것은 명예욕에 불과하다. 한 인간이 막강한 운명을 상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벌이다가 몰락하는 것을 보는 것만큼 우리의 마음을 드높이는 일은 다시없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어느 시대에나 가장 위대한 비극이다. 시인은 몇 차례 그런 비극을 만들어 내지만 삶은 수도 없이 만들어낸다”(324쪽). 슈테판 츠바이크의 다른 책,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 나오는 말입니다. 영웅적인 죽음과 몰락하는 삶으로 오늘도 저마다의 시인은 자신의 삶을 시로 엮어냅니다. 내일은 오늘과 다른 시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