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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의 배반과 침투

밑줄 친 문장에서 심장박동 소리가 들립니다

밑줄 친 문장에서 심장박동 소리가 들립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세 번째 읽으면서 

예전에 밑줄 친 문장을 주의 깊게 읽어봤습니다. 

예전에 읽으면서 밑줄 친 부분에 

왜 내가 밑줄을 쳤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문장도 간혹 있습니다. 


당시에 밑줄을 쳤을 때 

내가 처한 상황을 위로해주는 메시지가 들어있어서

그 문장을 보고 공감하고 다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도 활자의 바다를 건너다 

밑줄 친 문장에 담긴 저자의 생각 속으로 

허락도 없이 들어가 잠시 머물러보기도 합니다.



책을 읽는 나는 오늘도 

형광펜과 형형색색의 포스트잇을 준비했다가

볼펜으로 먼저 밑줄을 치고

다시 눈에 띄게 형광펜으로 

그곳을 칼라로 옷을 입힙니다.


밑줄 친 문장을 다시 한번 곱씹어 소화하면서

그 문장이 내 몸을 통과하는 순간

해당 문장이 있는 페이지에 

다시 포스트잇으로 표시해둡니다.



“그때 눈이 몹시 내렸다. 

눈은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지상은 눈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지 위에 닿을 듯하던 눈발은 

바람의 세찬 거부에 떠밀려 

다시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기형도의 詩作 메모 (1988.11), 《입속의 검은 잎》 중에서 


‘우리 동네 목사님’이라는 시에서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기형도 시인의 시작 노트에는 밑줄을 치지 않고

한 참 들여다보고 눈 오는 창밖을 내다봤습니다.


내가 밑줄 친 문장은

저자의 삶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사유의 정수가 농축된 의미의 껍질입니다.



밑줄 친 문장에는

외줄을 타는 기분으로 절박한 상황에서 

사투를 벌인 저자의 고뇌의 흔적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밑줄 친 문장에는

힘겨운 상황에서 참고 견디면서

깨달은 저자의 사유체계가 힘줄처럼 올곧게 흐릅니다.


책을 읽으면서 펜으로 남긴 밑줄은 

내가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이 내 몸을 관통하면서

남긴 진저리의 흔적입니다.



진저리 친 밑줄에는

저자의 핏줄이 지나가면서 남긴 

심장박동 소리가 아직도 들립니다.


오늘도 인두 같은 한 문장을 만나기 위해

활자의 바다를 건너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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