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살과 피로 쓴 언어가
펜과 잉크의 언어를 이기는 이유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유(劉)르바로 변신하다

살과 피로 쓴 언어가 펜과 잉크의 언어를 이기는 이유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유()르바로 변신하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성격이 전혀 다른 두 남자가 우연히 만나서 여행을 떠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소설이다. 한 남자는 전형적인 책만 읽는 지식인이다, 다른 한 남자는 책 보다 몸으로 부딪치며 현실에서 깨닫는 체험적 지혜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전자에 해당하는 남자가 바로  니체가 말하는 아폴론적 인간상에 해당하는 30대 중반의 바실이다. 후자에 해당하는 남자는 디오니소스적 인간상을 상징하는 조르바다. 책으로 지식을 습득하는 바실과 삶으로 지혜를 체득하는 조르바는 살아가는 철학이 판이(判異)하다. 한 마디로 모범생 주인공 바실과 모험생 조르바의 논리와 일리의 한판 승부다. 예를 들면 아폴론적 인간상에 해당하는 소설 속 주인공인 나는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에 대한 책을 읽는 것’ 둘 중에 하나는 선택하라고 한다면 책을 선택한다. 반면에 후자인 디오니소스적 인간상을 대변하는 조르바는 당연히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프로젝트를 선택할 것이다. 두 사람은 폐광 위기에 몰린 갈탄 광을 재개발하기 위해 크레타로 가는 여정에서 피레우스 항구의 한 카페에서 우발적으로 만나는 운명이 인생의 대서사시를 쓰는 출발점이 된다.



대책 없는 책벌레 자본가삶이 책인 사람을 만나다


책상 지식인 바실은 야생의 사유를 즐기는 조르바에게 자신도 모르게 흠모하기 시작한다. 조르바는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야생적 지식인의 표상이었다. 책상에서 관념적으로 배우는 지식인의 전형에서 한참 벗어난 비정상적 지식인의 보기 드문 특징을 갖춘 이상형이다. 바실에게 조르바는 자신이 갖고 있지 않는 과감한 판단력과 저돌적인 추진력을 지닌 이상적인 비즈니스 파트너였다. 책상 지식으로 잔머리를 굴리는 숱한 지식인이나 합리적 기업가에 비해 조르바는 책상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야생적 사유의 소유자였다. 조르바의 배움의 원천은 책 보다 매일 반복되는 삶이다. 그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숱한 사건과 사고와 매일 전쟁 같은 삶을 사는 싸움꾼이며, 상식과 합리로 타협이 되지 않는 난봉꾼이자 세상의 모든 술은 없어서 못 마시는 술꾼이며 가끔 정석과 정의를 위반하며 현실에서 승기를 잡는 사기꾼 같은 역할도 감행하는 전형적인 모험생이다. 배움의 원천은 책이라기보다 모험을 즐기고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방식보다 느낌을 춤이나 노래 또는 요리 등 상황에 따라 적절한 표현방식을 차용해서 다양한 생각을 자유자재로 ㅍ현하는 예술적 경지를 지향한다. 조르바는 겉으로 보기에 ‘나쁜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조르바는 늘 자신만만하고 그 어떤 상황적 어려움에도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선다. 조르바가 바실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서로 잡은 비결은 뭘까. 조르바의 철학은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는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철학을 철칙처럼 믿는다. 


조르바에게 삶이란 언제나 전쟁이 펼쳐지는 사투의 현장이자 ‘총체적인 재난’이 벌어지는 현실이다. 조르바가 추구하는 삶의 철학은 그가 취했던 극단적인 삶의 한 단 면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조르바는 물레를 돌리는데 방해가 된다고 자신의 손가락을 도끼로 잘라버렸다는 사실이다. 자유에 대한 조르바의 입장은 자유에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제거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원하는 방향으로 돌려놓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갈탄 탄광 개발 사업을 위해 크레타 섬으로 가기 위해 기다리던 한 카페에서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만난다. 움푹 들어간 뺨, 튼튼한 턱, 튀어나온 광대뼈, 잿빛 고수머리에다 눈동자가 밝고 예리한 늙수그레한 노동자를 만난다. 책에 파묻혀 살면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 젊은 작가에게 도발적인 제안을 한다. “날 데려가시겠소?” “〈왜요〉가 없으면 아무 짓도 못하는 건가요? 가령, 하고 싶어서 한다면 안 됩니까?”(17쪽). ~ 때문에 한다거나 ~을 위해서 하는 일에 질색인 조르바는 같이 가자는 제안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오? 매사를 정밀하게 달아보는 버릇 말이오”(17쪽)라고 당황스러운 반문을 던져 기선을 제압한다. “붓다에서 벗어나고 모든 형이상학적인 근심인 언어에서 나 자신을 끌어내고 헛된 염려에서 내 마음을 해방시킬 것. 지금 이 순간부터 인간과 직접적이고도 확실한 접촉을 가질 것”(83쪽)을 다짐하고 갈탄광 사업을 위해 크레타로 향하면서 우발적으로 마주친 조르바는 자신이 갈구하던 이상적인 파트너였다. 책벌레 자본가는 대책 없이 살아가는, 삶이 책인 사람을 만난 것이다.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신성한 경외감이다


단테와 불경과 같은 책에 빠진 채굴 사업가 크레타 섬으로 떠나면서도 지지부진했던 ‘미완성 원고’를 잊지 않고 챙겨간다는 사실은 의아하다. “2년간 내 존재의 심연에서는 하나의 욕망, 한 알의 씨앗이 태동해 왔다. 나는 내 내부를 파먹으며 익어 가고 있는 그 씨앗을 내 장부로 느껴 왔다. 씨앗은 자라면서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밖으로 나오려고 내 몸의 벽에 발길질을 시작했다. 내게 그것을 파괴할 용기는 더 이상 없었다. 정신적인 낙태는 시기를 놓친 것이었다”(15쪽). 친구들에게 늘 대책 없는 책벌레’라고 냉소받으며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기를 싸듯이 조심스럽게 그 원고를 포장하여 다른 짐 속에 넣었다”(15쪽). 관념적 파편의 향연이 펼쳐지는 책에서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쓰던 원고를 버리지 못하고 가져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피와 땀이 버무려지는 노동의 현장과 거리가 먼 관념적 사유체계에서 벗어나 진땀 어린 얼룩과 피땀이 섞여 펄떡거리는 근육이 언어를 책 속에 집어넣고 싶은 꿈이 있어서다. 그런 갈망과 이상을 추구하는 여정에 조르바는 최적의 파트너임에 틀림없었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며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22쪽). 나는 조르바에게 한눈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으로 육신을 지배하려던 세계에서 육신과 정신이 조화를 이루며 또 다른 세계를 추구하려는 젊은 작가에게 조르바는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판이하게 다른 두 사람은 이제 같은 배를 타고 한 길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길은 다르다. 육체노동을 통해 정신을 다스리는 조르바는 주로 채굴과 노동자를 관리하는 리더 역할을 한다. 반면에 나는 정신노동으로 육체를 다스리며 둘의 조화를 꿈꾼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만남이지만 물질적 세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노동자가 정신적 세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나의 스승이 되는 이상적 동반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극과 극이 만나 과연 상생의 꿈을 그려낼 수 있을지 출발부터 호기심 천국이다.


갈탄광 사업은 시작한 지 여섯 달 만에 실패로 돌아간다. 하지만 평생 책만 읽으며 살아온 책벌레인 자본가는 조르바와 함께 일하면서 이전과 전혀 다른 인생관을 배운다. 한 마디로 정신과 몸, 육체와 영혼이 송두리째 흔들려버린 것이다. 흔들려본 사람만이 세상을 뒤흔들 수 있다. 믿었던 신년 체계와 옳다고 생각한 사유체계가 뿌리부터 흔들린 것이다. 두 사람은 여섯 달 동안 함께 먹고 마시면서 인생을 이야기했고, 바닷가에서 웃고 즐기면서 밤새워 인간과 사랑이 무엇인지를 격론을 벌이며 이야기를 나눈다. 꿈에 부풀었던 크레타 섬의 갈탄 개발 사업은 완전히 망하고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책벌레였던 작가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깨달음을 얻는다.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어디 그 이야기 좀 들읍시다. 요 몇 년 동안 당신은 청춘을 불사르며 마법의 주문이 잔뜩 쓰인 책을 읽었을 겁니다. 모르긴 하지만 종이도 한 50톤 씹어 삼켰을 테지요. 그래서 얻어낸 게 무엇이요? 나는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지식도, 미덕도, 선도, 승리도 아닌, 보다 위대하고 보다 영웅적이며 보다 절망적인 것 즉 신성한 경외감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386쪽). 신성한 경외감은 책으로 얻을 수 없다. 육체가 동반된 고통스러운 체험 속에서 몸으로 겪어내는 체험적 각성을 통해서만이 느낄 수 있는 경이로움이다. 사업을 완전히 말아먹은 뒤에 작가가 고백하는 문장에는 조르바에게 무엇을 배웠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굶주린 영혼을 만족시키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책과 선생들에게서 받아들인 영양분과 겨우 몇 달 사이에 조르바에게서 얻은 꿋꿋하고 용맹한 두뇌를 돌이켜보면 나는 격분과 쓰라린 마음을 견디기가 힘들다.” 



육체의 언어로 관념의 파편을 파괴하다


“시답잖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자식들, 창피한 줄도 모르는 모양이야.” “그게 무슨 말입니까, 조르바?” “임금이니, 민주주의니, 국민 투표니, 국회의원이니 해봐야 다 그게 그거니까 하는 소리요”(27쪽). 조르바에게 관념이나 추상은 근접 자체를 거부하는 말이다. 정신도 육체에 종속된다. 육체 없는 정신은 정신 나간 사람들의 몫이다. 육체와 노동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물질적 삶이 정신적 삶을 지배한다. 육체가 지향하는 자유를 통해 정신적 행복을 얻는다. “식물이 어떻게 돋아나고 똥과 진흙 속에서 어떻게 꽃으로 피어나지요? 조르바, 자신에게 똥과 진흙은 인간이고 꽃은 자유라고 말해보지 그래요? 조르바가 주목으로 식탁을 치며 외쳤다. “그러면 씨앗은? 식물이 싹으로 돋아나려면 씨앗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내장 속에 그런 씨앗을 집어넣은 건 누구지요? 이 씨앗이 친절하고 정직한 곳에서는 왜 꽃을 피우지 못하지요? 왜 피와 더러운 거름을 필요로 하느냐는 겁니다”(36쪽). 


똥과 진흙이 인간이고 꽃이 자유인 이유는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자유는 피를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똥과 진흙처럼 더러운 곳에 씨앗이 놓여도 시련과 역경을 딛고 자유라는 꽃을 피워내는 게 인간이다. 인생의 꽃이라는 자유는 역경을 뒤집어 경력으로 만든 사람이 난관을 뚫고 마침내 성취한 피눈물의 산물이다. 자유는 펜과 잉크로 얻어내는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살과 피로 얻어낸 육체적 격투의 결과다. 조르바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는 피눈물이 흐르는 격전의 현장에서 걷어 올린 살아 숨 쉬는 깨달음이다. 그 속에 생명이 있고 욕망의 물결이 넘치며 육체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이런 삶을 온몸으로 관통하지 않으면 관념의 덫에 걸려 계산기만 두드리는 창백한 지식인으로 전락한다. "조르바는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고 그 머리는 지식의 세례를 받은 일이 없다. 하지만 그는 만고풍상을 다 겪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열려 있고 가슴은 원시적인 배짱으로 고스란히 잔뜩 부풀어 있다. 우리가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조르바는 칼로 자르듯,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아스 매듭을 자르듯이 풀어낸다.…우리들 교육받는 자들이 오히려 공중을 나는 새들처럼 골이 빈 것들일 뿐"(95쪽). 


 “기분 내키면 치겠지요. 내 말 듣고 있소? 마음 내키면 말이요. 당신이 바라는 만큼 일해 주겠소. 거기 가면 나는 당신 사람이니까. 하지만 산투르 말인데, 그건 달라요. 산투르는 짐승이오. 짐승에겐 자유가 있어야 해요. 제임케키코, 하사피코, 펜토잘리도 출 수 있소. 그러나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 놓겠는데, 마음이 내켜야 해요.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24쪽). 비록 내가 당신 자본에 고용된 노동자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한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유다. 산투르라는 악기도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움직여야 비로로 움직이는 노동도 하는 법이다. “시장하지 않으시다. 하지만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들지 않았어요? 육체에는 영혼이란 게 있습니다. 그걸 가엾게 여겨야지요. 두목, 육체에 먹을 걸 좀 줘요. 뭘 좀 먹이셔야지. 아시겠어요? 육체란 짐을 진 짐승과 같아요. 육체를 먹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바닥에다 영혼을 팽개치고 말 거라고요”(52쪽). 


육신의 쾌락을 업신여기면 영혼도 꼼짝하지 않는다.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조르바는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날 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영혼이 곧 육체, 다소 변화무쌍하고 투명하고 더 자유롭긴 하지만 역시 육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소 과장되어 있고 긴 여행으로 지치고 물려받은 짐에 짓눌려 있기는 하나 육체 또한 영혼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343쪽). 육체는 매일매일 일상을 온몸으로 만난다. 육체의 기쁨이 곧 영혼의 기쁨으로 연결된다. 육체와 영혼은 따로 노는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하나가 보여주는 양면성이다. 육체를 무시한 영혼만의 세계가 얼마나 사상누각 인지를 조르바는 온몸으로 보여준다. 조르바는 복잡한 머리로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아폴론적인 인간이라기보다 뜨거운 가슴에서 나오는 열정과 광기로 세상을 뒤흔드는 디오니소스적 인간에 가깝다. 머리로 계산하기 이전에 몸으로 느끼고 반응한다. 그렇게 겪은 체험적 각성이 입을 통해 언어로 번역된다. 조르바의 언어가 삶의 결을 닮은 이유다. 그는 언제나 육체의 언어로 책벌레들이 말하는 관념의 파편을 파괴한다. 책만 읽는 바보들은 조르바에게 언제나 일갈(一喝)의 대상이다. “당신 책을 한 무더기 쌓아놓고 불이나 확 싸질러 버리쇼. 그러고 나면 누가 압니까. 당신이 바보를 면할지.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니까”(139쪽).



일상은 상상력이 비상하는 텃밭이다


"예사로 보아 넘기는 사실들도 조르바 앞에서는 무서운 수수께끼로 떠오른다. 지나가는 여자를 봐도 그는 말을 멈추고 큰일이나 난 듯이 말한다. ‘대체 저 신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는 묻고 또 묻는다……그는 남자나, 꽃 핀 나무, 냉수 한 컵을 보고도 똑같이 놀라며 자신에게 묻는다. 조르바는 모든 사물을 매일 처음 보는 듯이 대하는 것이다"(78쪽). 조르바에게 세상은 늘 시적 탐구 대상이다. 매일 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고 세상의 익숙한 사물이나 현상도 언제나 색다른 사유를 자극하는 배움의 터전이다. “그때 내 뒤로 행복에 겨운 목소리가 들렸다. 조르바가 일어나 반라의 몸으로 문께로 나선 것이었다. 그 역시 봄 풍경에 화들짝 놀란 것이었다. “저게 무엇이오?” “……두목, 저기 저 건너 가슴을 뭉클거리게 하는 파란 색깔, 저 기적은 무엇이오? 당신은 저 기적을 뭐라고 부르지요? 바다? 바다? 꽃으로 된 초록빛 앞치마를 입고 있는 저것은? 대지라고 그러오? 이걸 만든 예술가는 누구지요? 두목, 내 맹세코 말하지만, 내가 이런 걸 보는 건 처음이오”(329쪽). 세상은 언제나 물음의 대상이다. 묻지 않으면 세상에 묻히고 군중에 무리가 된다. 하지만 조르바는 매일 만나는 일상에서도 언제나 비상하는 상상력의 날개를 달고 고공 높이 치솟아 오른다. 


하늘 높이 상상력의 궁전을 지어놓고 설레는 마음으로 자신이 살아가는 일상을 바라보며 경이로운 감동과 감탄의 소리를 지른다. "조르바가 돌멩이를 걷어차자 돌멩이는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조르바는 그런 놀라운 광경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걸음을 멈추고 돌멩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나를 돌아다보았다……. 그의 시선에서 가벼운 놀라움을 읽을 수 있었다……. 무릇 위대한 환상가와 위대한 시인은 사물을 이런 식으로 보지 않던가! 매사를 처음 대하는 것처럼! 매일 아침 그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를 본다. 아니, 보는 게 아니라 창조한다"(201쪽). 돌멩이에서 우주 자연 삼라만상의 원리를 깨우쳤던 싯다르타처럼 조르바 역시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익숙함은 자신의 인식 깊이를 성숙하게 만드는 상상력의 근거지다. 자두 하나를 보고도 시심을 생각하는 앙드레 지드처럼 조르바는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세계는 신세계다. 조르바에게 오늘 하루는 선물이고 기적이며 감동이고 감탄사가 살아가는 경이로운 세상이다.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가 조르바에게는 신이 준 선물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반복되어도 조르바는 늘 흥겨운 콧노래를 부르며 아름다운 음악과 그림을 그리는 일상의 음악가이자 미술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울타리 곁을 지나다 갓 핀 수선화 한 송이를 꺾었다. 그러고는 한동안 그 꽃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성이 차지 않는다는 듯이, 수선화를 생전 처음으로 보는 사람처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눈을 감고 냄새를 맡더니 한숨까지 쉬었다. 그는 꽃을 내게 건네주었다. “두목, 돌과 비와 꽃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부르고 잊는지도, 우리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르는 데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일 거예요. 두목, 언제면 우리 귀가 뚫릴까요! 언제면 우리가 팔을 벌리고 있는 만물(돌, 비, 꽃, 그리고 사람들)을 안아줄 수 있을까요?(139쪽)”. 조르바에 일상은 언제나 상상력이 비상하는 텃밭이다. 늘 만나는 익숙한 사물이나 현상, 식물이나 동물도 새로운 관찰과 탐구 대상이다. 어제와 다르게 바라보고 느끼고 생각하며 늘 뭔가를 창조하는 경이로움의 향연을 펼친다. “어린아이처럼 그는 사물과 생소하게 만난다. 그는 영원히 놀라고, 왜, 어째서 하고 캐묻는다. 만사가 그에게는 기적으로 온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나무와 바다와 돌과 새를 보고도 그는 놀란다. 그는 소리친다”(223쪽). 


어린아이처럼 동심으로 호기심을 부른다. 원래 그런 세계는 없다. 당연한 세상도 없다. 오로지 물음표를 던져 캐물어야 할 탐구 대상이자 탐험 영역이다. 감각적 깨달음으로 오감을 열어젖히지 않고 타성에 젖어 책만 읽는 바보들을 조르바는 언제나 책벌레로 취급한다. “이 기적은 도대체 무엇이지요? 이 신비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나무, 바다, 돌, 그리고 새의 신비는?”“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타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그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낡은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그 세계는 존재한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환상적이고 유동적이며 꿈이 짜낸 빛의 천이다. 보랏빛 바람(사랑, 증오, 상상력, 행운, 하느님)에 둘러싸인 구름…이 땅의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도 이제는 암호 이상의 예언을 들려줄 수 없다. 암호가 모호할수록 선지자는 위대한 것이다”(92-93쪽). 기적과 신비 속에서 언제나 상상력의 날개는 비상을 준비한다. 놀라움이 일상이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이 곧 자유이며 행복으로 향하는 평범한 보행이다.



살과 피가 펜과 잉크를 이긴다

     

“나는 햇볕을 받으며 음식을 먹었다. 시원한 녹색 바닷물 위에 뜬 것 같은 육체적 행복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내 마음이 이 육체의 환희를 독점하여 그 나름의 형상을 찍고 생각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나는 내 몸이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짐승처럼 환희를 즐기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따금 무아지경에서 내 외부와 내부를 기웃거리며 이 생명의 기적에 경탄했다”(344쪽). 머리가 몸을 지배하려는 서구 철학의 역사에 종지부를 날린 니체 역시 신체성이 커다란 이성이고 우리가 믿었던 이성을 오히려 작은 이성이라고 뒤집어엎는 전복의 철학자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조르바가 니체 철학에 심취하고 영향받은 흔적이 곳곳에서 보이는 이유다. “정신의 싸움은 육체를 쑥밭으로 만들지만, 육체의 싸움은 정신을 투명하게 만든다”(92쪽). 이성복 시인의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에 나오는 말이다. 머리가 복잡한 이유도 몸을 움직이지 않고 머리만 쓰기 때문이다. 몸이 바빠야 정신이 한가해지고 여유를 즐길 수 있다. 육체를 움직이지 않고 가둬놓은 상태에서 머리만 바빠지면 꼬인 내장에서 편견이 나온다고 니체도 말하지 않았던가. “가능한 한 앉아 있지 마라: 야외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생겨나지 않는 생각은 무엇이든 믿지 마라 - 근육이 춤을 추듯이 움직이는 생각이 아닌 것도 믿지 마라. 모든 편견은 내장에서 나온다. - 꾹 눌러앉아 있는 끈기- 이것에 대해 나는 이미 한 번 말했었다 - 신성한 정신에 위배되는 진정한 죄라고…….”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에 나오는 말이다. 근육이 춤을 추려면 움직임이 보장돼야 한다. 움직임이 세상을 내다보는 프레임을 바꾸는 이유다. 움직이지 않고 책상에서 허리를 꼬고 앉아서 연구할수록 내장에서 편견이 나온다는 것이다. 직접 움직여보면 내 생각이 얼마나 편견의 틀에 빠져 있는지를 몸으로 느낄 수 있다. 


“나는 정신의 껍질을 깨고, 인간이라는 물방울을 실어 나르며 대해로 섞여 드는 저 어둡고 위험한 해협을 뚫고 나아가려는 강렬한 열망에 전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나는 장막을 찢고 새해가 내게 가져다 줄 미래를 보고 싶었다”(177쪽). 인간은 한 방울의 물이다. 한 방울의 물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다른 물방울과 강으로 흘러들어 굽이굽이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다 바다로 흘러간다. 바다는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 사람의 아픔을 다 받아준다. 다 받아 주기 때문에 바다는 받아준다. 혼자 흘러 내려가면 두려움에 떨지만 함께 연대해서 어깨동무를 하면 위험한 해협도 뚫어내는 강렬한 열망이 생긴다. 강렬한 열망은 어둔 장막조차 찢어버리고 과감하게 미지의 세계로 몸을 던진다. 미지(未地)의 세계로 몸을 던진 자만이 아름다운 지식(美知)의 향연, 즉 영원히 완성할 수 없지만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지는 미(美)완성 교향곡을 들을 수 있다. “정오의 태양이 뼈마디까지 즐겁게 했다. 바다 역시 태양 아래서 느긋하게 몸을 덥히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옅은 안개에 싸인 크레타는 바다 위로 불쑥 튀어나와 물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182쪽). 


긴 어둠의 터널이든 위험한 해협이든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오의 태양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뼈  아픈 인생을 살아온 사람에게 잠시지만 몸을 녹이며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안식을 준다. 세상의 시름을 잊고 바다와 구름과 바람, 그리고 태양이 연주하는 미완성 교향곡을 들을 수 있는 우리 모두는 이미 시인이고 음악가이자 화가이다. 그나마 미완성 교향곡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감각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사람이다. 이성의 칼날로 육체로 들어가는 감각의 향연을 잘라내지 않을 때 비로소 몸으로 느끼는 기쁨과 즐거움의 축제는 시작된다. “나는 조르바라는 사내가 부러웠다.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이다. 내가 고독 속에서 의자에 눌어붙어 풀어 보려고 하던 문제를 이 사나이는 칼 한 자루로 산속의 맑은 대기를 마시며 풀어버린 것이었다”(329쪽). 조르바에 책은 삶 그 자체다. 책 속에 묻힌 죽은 지식으로 지성을 자극하는 훈련을 거부하고 매일매일 부딪치는 격전의 삶의 현장 속에서 육체로 살갗을 파고드는 깨달음의 지혜를 각인시킨다.  



검토를 거듭하다 적극 검토하고 결국은 두통이 생긴다


“「……그리스도가 나셨소, 우리 현명한 솔로몬이여. 죄 많은 백면선생(白面書生)이여! 세상만사 꼬치꼬치 따지지 맙시다! 예수님이 태어났어요? 안 났어요? 물론 태어나셨지……그런데 왜 멍청하게 앉아 있어요? 확대경으로 음료수를 들여다보면(언젠가 기술자 하나가 가르쳐줍니다) 물에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쪼그만 벌레가 우글거린답니다. 보고는 못 마시지……. 안 마시면 목이 마르지……. 두목, 확대경을 부숴 버려요. 그럼 벌레도 사라지고, 물도 마실 수 있고, 정신이 번쩍 들고! “(173쪽). 백면선생은 희고 고운 얼굴에 글만 읽는 사람이란 뜻으로, 세상일에 조금도 경험이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창백한 책상에서 일상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관념적 지식을 양산하는 사람이다. 책벌레의 다른 이름이나 마찬가지다. 확대경은 지식인이 갖고 있는 기존 지식이나 패러다임이다. 세상을 내다보는 안경이자 프레임이다. 기존 지식으로 구조화된 사유체계가 새로운 생각의 임신을 방해한다. 앎으로 삶을 평가하고 판단한다. 조르바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이다. 


“그래요 당신은 나를 그 잘난 머리로 이해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이건 진실이고 저건 아니다, 그 사람은 옳고 딴 놈은 틀렸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 팔과 가슴을 봅니다. 팔과 가슴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침묵한다 이겁니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아요. 흡사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것 같다 이겁니다. 그래, 무엇으로 이해한다는 건가요? 머리로? 웃기지 맙시다!”(322쪽). 팔과 가슴의 침묵 속에 탄생한 모든 지식은 관념적 지식이거나 진공관 속에서 증류된 건조한 생각일 뿐이다. 머리로 이해하는 과정은 언제나 치밀한 계산이 따른다. 해보기도 전에 안 되는 이유도 생각해낸다. 이해타산을 따지는 머리는 언제나 복잡하고 열이 난다. 머리가 평소에 뜨거운 이유다. 하지만 손과 발을 움직여 실천하는 가운데 생각해내는 아이디어는 관념의 파편이 파고들 틈이 없다. 그 자체가 삶이 담겨 있는 얼룩과 무늬의 집결체다. 


“나는 벌떡 일어서는 조르바를 보았다. 그는 옷을 벗어 자갈밭에다 던지고는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희미한 달빛으로 나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그의 커다란 머리를 볼 수 있었다. 이따금 그는 소리를 지르다 개처럼 짓다 말처럼 힝힝거리다 수탉처럼 꺼이꺼이 울었다. 이 텅 빈 밤에 그의 영혼은 동물과 친화한 것이었다”(111쪽). 조르바는 생각과 행동이 늘 붙어 다닌다. 생각이 곧 행동이고 행동 속에 다음 생각이 잉태되고 있다. 생각한 다음 행동하지 않고 행동하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행동한다. 몸이 움직이면서 새로운 생각은 늘 임신을 거듭한다. 새로운 행동이 새로운 생각을 출산하며 어제와 다른 삶이 늘 펼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동하기 전에 검토를 거듭한다. 검토의 결론은 적극 검토다.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길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은 자르지 않으면…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 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 아니, 아니야! 더 붙잡아 맬 뿐이지…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432쪽) 계산을 거듭할수록 안 해도 되는 이유를 생각한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검토로 이어지고 검토를 거듭할수록 토할 정도로 의사결정은 뒤로 밀린다. 행동하지 않고 생각을 거듭하는 사람에게 두통이 자주 오는 이유다. 두통을 해결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으니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이다. 



사랑으로 생긴 감정은 논리적 언어로 번역될 수 없다


대부분의 개론서는 체험적 각성과 교훈으로 쓴 책이 아니다. 개론서에는 다른 책을 참고로 저자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고 구조화시켜 만든 사유체계의 산물이다. 예를 들면 경영학 개론에는 경영학자가 실제 경영현장에서 체험적으로 깨달은 통찰력이 들어있지 않다. 경영학을 경영현장에서 공부하지 않고 경영 논리를 책상에서 정리한 결과가 경영학 개론이다. 경영학  개론은 경영 위기 상황에서 난국을 돌파하는 체험적 깨달음을 전해주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다른 학문분야의 개론서도 공통적인 한계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타인과의 접촉은 이제 나만의 덧없는 독백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타락해 있었다. 여자와의 사랑과 책에 대한 사랑을 선택하라면 책을 선택할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150쪽). 


진짜 사랑에 빠져본 사람만이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미묘한 감정 변화를 몸으로 감지할 수 있다. 사랑학 개론서로는 대처하기 어려운 감정의 파고가 오르락내리락한다. “사랑에 관해 물으면 한수 시까지 읊겠지만 한 여인에게 완전한 포로가 되어본 적은 없을 걸. 눈빛에 완전히 매료되어 신께서 너만을 위해 보내주신 천사로 착각하게 되지. 절망의 늪에서 널 구하라고 보내신 천사! 또한 한 여인의 천사가 되어 사랑을 지키는 것이 어떤 건지 넌 몰라. 그 사람은 그 어떤 역경도 심지어 암조차 이겨내지. 죽어가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두 달이나 병상을 지킬 땐 더 이상 환자 면회시간 따윈 의미가 없어져. 진정한 상실감이 어떤 건지 넌 몰라. 타인을 너 자신보다 더 사랑할 때 느끼는 거니까. 누굴 그렇게 사랑한 적 없을걸? 내 눈엔 네가 지적이고 자신감 있기보다는 오만에 가득한 겁쟁이 어린애로만 보여.” 영화 굿윌 헌팅(Good Will Hunting)에 나오는 대사 중의 일부다. 몸으로 겪어본 사랑의 감정이 없는 사람에게 사랑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감정은 논리적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다.



“내 인생은 한갓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걸레를 찾아 내가 배운 것, 내가 보고 들은 것을 깡그리 지우고 조르바라는 학교에 들어가 저 위대한 진짜 알파벳을 배울 수 있다면……내 인생은 얼마나 다른 길로 들어설 건가? 내 오관과 육신을 제대로 훈련시켜 인생을 즐기고 이해하게 된다면! 그러자면 달음박질을 배우고, 씨름을 배우고, 수영을, 승마를, 배를 젓는 것, 차를 모는 것, 사격을 배워야 한다. 내 정신을 육신으로 채워야 했다. 내 육신을 정신으로 채워야 했다. 그러면 내 내부에 도사린 두 개의 영원한 적대자를 화해시켜야 했다”(111쪽). 육신과 분리된 정신이 지배한 세상과 결별하고 정신을 육신으로 채우고 육신을 정신으로 채우는 순간 심신(心身)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박자에 맞춰 움직이는 춤으로 변한다. 조르바는 설명하다 이해가 안 가면 춤으로 보여 달라고 한다. 언어로 담아내지 말고 몸으로 보여 달라는 것이다. 


“두목, 내 대가리 가죽은 몹시 두꺼워요. 그래 가지고는 뭐가 뭔지 대가리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 당신이 춤으로 방금 말한 걸 표현할 수 있다면 나도 알아들을 텐데”(399쪽). 관념의 언어가 아니라 육체의 언어로 표현하면 조르바는 바로 몸으로 감지한다. 조르바의 몸은 세상을 감지하는 감각 기관이자 세상의 변화를 느끼는 감정의 보고다. “나라는 놈은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어요. 내 속에는 소리치는 악마가 한 마리 있어서 나는 그놈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감정이 목구멍까지 올라올 때면 이놈이 소리칩니다. “춤춰” 그러면 나는 춤을 춥니다. 그러면 숨통이 좀 뚫리지요. 칼키디체에서 우리 꼬마 디미트라키가 죽었을 땝니다. 나는 벌떡 일어서서 조금 전처럼 춤을 추었지요. 친척과 친구들이 시체 앞에서 춤추는 나를 말렸어요. “조르바가 돌아버렸다. 미쳐 버렸다.” 그 사람들이 웅성거리더군요. 하지만 춤을 추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미치고 말았을 겁니다. 너무 슬퍼서죠. 그게 내 첫아들인 데다, 세 살 때 죽어 나로서는 견딜 수가 없었지요“(108쪽). 춤에는 육체와 정신이 뒤범벅되어 한 박자로 돌아간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사람은 노예다. 몸은 여기 있는 데 마음이 다른 곳으로 마중을 나가면 지금 여기 있는 몸은 괴로울 뿐이다. 몸과 마음, 육체와 정신이 한 박자로 어울리는 사람이 조르바가 꿈꾸는 이상형이다. 



연애학 개론 지식으로 욕망의 파도에 대처할 수 없다


백면선생처럼 경험하지 않고 남의 책을 참고로 또 다른 책을 쓰는 사람이 있다. 삶으로 책을 써야 몸으로 읽히는 데 머리로 책을 쓰니 몸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머리로 의미가 다가와 이해는 되지만 의미가 심장에 꽂히지 않아 의미심장해지지 않는 이유는 머리로 생각한 결과가 책 속에서 관념의 향연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책에 쓰인 것이면 뭐든 꿀꺽꿀꺽 삼킵니다만, 책 쓰는 사람들이 어떤 것들인지 한 번 생각해봐요! 퉤퉤! 기껏해야 학교 선생들이지. 그런 것들이 여자니, 여자 꽁무니를 쫓는 남자 일을 뭐 알겠어요? 개 코도 모르지!”(314쪽). 연애를 해봐야 미묘한 감정 변화를 몸으로 파악할 수 있고 그 순간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를 감지할 수 있다. 연애학(戀愛學) 개론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연애술(戀愛術)은 구체적인 맥락성을 읽어버린 일반화된 관념적 지식일 뿐이다. 스쳐 지나가는 한 편의 팁은 될 수 있지만 욕망의 파도가 치는 바다 한가운데에서는 속수무책으로 전락한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텍스트가 있다. 이론과 지식에 전적으로 기대어 쓴 텍스트가 한편 에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이론과 지식에 선행하는 삶에 대한 성찰에서 나온 힘으로 쓴 텍스트가 있다. 이론과 지식으로 쓴 텍스트에는 논리적 엄밀성이 있지만, 머리가 아니라 살갗으로 파고드는 떨림이 없다. 삶을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대면한 후에 쓴 텍스트에는 논리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무게와 깊이를 담은 진심이 있다. 논리적 글은 두뇌로 쓸 수 있지만 진심이 담긴 글은 삶으로만 쓸 수 있다.” 노명우 교수가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추천사 중에서 한 말이다. 조르바 역시 격전의 현장에서 몸으로 겪은 글쓰기를 사랑한다. 그렇지 못한 글쟁이에게는 가차 없이 일격을 가한다. “두목, 이런 말을 해서 어떨지는 모르지만 당신은 가망 없는 펜대 운전사올시다. 평생에 한 번이라도 그 아름다운 녹석을 봐야 하는 건데 당신은 보지 않았어요. 젠장, 일이 없을 때 나는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지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나 어제 당신의 편지를 받고 나는 두목 같은 펜대 운전사에게는 지옥이 있다고 확신했습니다”(436-437쪽). 펜대 운전사는 운전을 실전을 통해 배우지 않고 책과 글을 통해 배운 관념적 지식인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하며 쓰기 시작했다. 아니 쓰는 것이 아니었다. 전쟁이었다. 무자비한 추격전, 포위 공격, 은거로부터 괴물을 불러내기 위한 주문이었다. 예술이란 사실은 마법의 주문 …….예술은 우리의 오장육부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의 살인적인 힘을 충동질한다. 필사적으로 살인과 파괴와 증오와 타락을 충동질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술은 달콤한 노래로 다시 나타나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이다”(197쪽). 글쓰기는 전쟁이다. 우선 나를 극도의 불안감으로 몰아넣고 마치 사금에서 금을 골라내는 연금술을 발휘하듯 불안감으로 포위된 삶의 위기감을 극복하고 해소될 언어를 찾아 사투를 벌여야 한다. 힘겹게 골라낸 언어로 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경험이라는 바다를 유영하면서 적확한 단어를 찾아 배열하는 전투를 벌여야 한다. 힘겹게 자리 잡은 단어와 단어가 치열하게 싸우다 마침내 한 문장을 완성하면 다음에 다가올 문장과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 피고름을 짜내듯 통증이 다가와도 그걸 참고 견뎌내면서 피로 얼룩과 무늬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가면서 직조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그것도 한 번에 끝나는 전쟁이 아니라 매일 밥 먹듯이 전쟁터에 출전하는 고독한 사투가 글쓰기 전장(戰場)이다. 나의 전부를 쏟아부었지만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고 절망해서는 안 된다. 절망하는 순간 당신은 삶을 글로 녹여내는 불길에서 멀어져 얼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화염에 한 번 휩싸인 사람은 불길에서 자기만의 불꽃을 피워낸다. 화상에 아픈 줄도 모르고 그 상처가 다시 아물기 전에 또 다른 불길로 겁 없이 뛰어는 드는 전사가 글을 쓰는 사람이다.



정신력으로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려는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이다


“읽다가 책을 닫았다가 다시 펼쳤다. 그러다 나는 결국 그 책을 놓고 말았다. 그의 시는 핏기도 없고 냄새도 없고 인간의 본질을 비켜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 경험한 느낌이었다. 그의 시가 창백한 진공 속의 공허한 언어로 보였던 것이다. 박테리아 한 마리 없는 물 같은 것, 요컨대 생명력이 없는 것으로 느껴졌다”(195쪽). 밑바닥 인생을 살면서 처참하게 패배해보지 못하고 건져 올린 성공담, 자신의 정작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이런저런 책에서 건져 올린 관념의 파편들로 직조된 자기 계발서, 말 못 한 고민을 품고 온몸으로 세상에 항거하면서 추운 겨울을 보낸 적이 없는 작가 쓰는 문장은 ‘창백한 진공 속의 공허한 언어‘로 치장되어 있다. 구체적인 경험 속에서 건져 올린 한 모금의 물이 아니라 증류 기계를 통과하고 나서 맑은 물로 나타난 증류수처럼 들끓는 심정과 갈등과 전면전을 펼치면서 토해낸 언어가 아니고서는 


“대지와 씨앗을 품은 심장의 열화 같은 호흡이 완벽한 지적 놀음, 교묘하면서도 덧없는 구조물이 되어버린”(195쪽) 상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인간의 본질은 사랑과 육체와 불만의 호소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을 추상적인 관념으로 승화시켜 보라. 정신의 도가니 속에서 연금술의 과정을 쫓아 순화시키고 증발시켜 보라”(196쪽). 폭풍우에 뒤집혀 사투를 벌이는 통통배의 사투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항변,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한 끼도 채우지 못해 벌벌 떠는 노숙자들의 칼잠 자는 모습, 갑자기 쏟아지는 눈보라 속에서 갈 길을 잃고 먹이 사냥을 하는 들짐승들의 날 선 포효가 사라지면 ’추상적인 관념으로 승화‘된 ’창백한 진공 속의 공허한 언어‘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 글에는 진땀 흘린 흔적도 없고 식은땀을 흘리며 창백해진 사람의 허망한 흔적도 없다. 피눈물로 뒤섞인 전쟁 같은 삶의 얼룩도 없고 오로지 관념으로 직조된 추상화의 세계만이 펼쳐질 뿐이다.



“조르바에게 복 있을 진저. 조르바는 내부에서 떨고 있는 추상적인 관념에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살아있는 육체를 부여했다. 조르바가 없으면 나는 다시 떨게 되리라”(226쪽). 평생 책을 읽으며 남의 사유에 종속된 사람은 자기 땀과 피로 얼룩진 삶을 기반으로 치열하게 사유한 흔적이 없다. 남이 만든 관념에 기생해서 사는 개념에 종속된 사고방식이 최선의 생각인 줄 착각하고 산다. 문제가 발생하면 책이나 참고 자료를 토대로 참조할 뿐 내 몸으로 겪어낸 문제 해결의 노하우가 없다. 배가 고플 때 육체노동을 통해서 땀 흘린 대가로 주어지는 한 끼의 식사가 얼마나 행복감을 주는지 몸으로 경험해보지 않고 책을 통해 배고픔을 이겨내는 관념적 사유를 배운다. 몸으로 머리를 통제하지 않고 머리가 몸을 통제하는 데 여념이 없는 사람에게 피와 땀과 눈물은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겪어내야 하는 고통이자 고행이다. 정신력으로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려는 사람에게 세상은 정신 ‘나간’ 세계다. 


육체가 발휘하는 체력이 정신력을 이긴다. 정신력으로 험난한 세상을 이겨나가려는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이다. 정신 ‘차린’ 사람은 정신력으로 세상을 이겨나가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체력 단련을 통해 정신력을 통제하는 삶을 살아간다. 체력 없는 정신력은 모래 위에 집을 지으려는 사상누각이 발상이다. “노동, 노동에는 정신적 노동과 육체적 노동이 있겠는데 나는 육체 쪽이네. 나는 즐겨 나를 혹사하고 땀을 쏟으며 내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듣네. 번 돈의 반쯤은 떼어 내어 아무렇게나 어디서나 마음 내키는 대로 써버리네. 내가 돈의 노예가 아니라 돈이 내 노예인 것. 나는 일의 노예이며 내가 처해있는 노예 상태를 자랑으로 여기네”(202쪽). 뼈 때리는 명언을 품은 문장은 뼈저린 노동을 통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다. 노동의 현장에서 땀 흘리며 견뎌낸 수고와 정성이 경지에 이르는 고수의 사유체계를 구축하는 원동력이다.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 몸이 망가진 상태에서 정신력은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 무용지물이다. 



행복은 바디감이 무거운 와인이 목구멍을 훑고 내려가는 충만감이다


조르바에게 내일은 없다. 내일 해가 뜰지 말지는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내일 비가 올지 말지 역시 나의 걱정 권역을 벗어나 있다. 나는 오로지 지금 여기서 내가 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해 노력하고 그 과정을 즐기면 된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영원함에 대한 질시도, 또 유한함에 대한 한탄도 아닐 겁니다. 다만 우리가 맞이하는 지금 이 순간, 이 모든 순간에 영원을 새겨 넣는 일입니다"(291쪽). 심강현의 《욕망하는 힘, 스피노자의 인문학》에 나오는 말이다.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뭘 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 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 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391쪽). 


술을 마시는 데 집에 갈 걱정을 하지 말자. 내일 할 일을 염두에 두고 저녁 시간을 보내지 말자. 황금 같은 시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소중한 시간에 우리는 몸과 마음을 던져 황홀한 시간을 보내며 행복을 만끽해야 한다. 조르바의 지상과제는 지금 여기서의 행복한 삶이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조르바는 티베트 속담을 온몸으로 실천하며 걱정 대신 격정적으로 자기 삶을 즐기며 의미를 찾아가는 거리의 방랑자다. “인생의 신비를 사는 사람들에겐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살 줄을 몰라요”(315쪽). 나날이 경이로움의 연속인 사람은 늘 시간이 부족하고 흘러가는 매 순간이 소중하다. 이들에게 하루는 의미심장함으로 가득 찬 감동과 환희의 시간으로 채워지는 카이로스의 순간이다. 오로지 지금 순간 느끼는 감동만이 행복이며 과거도 미래도 지금 내가 보내는 시간에 따라 채색되기도 하고 기대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인가.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성탄절 잔치에 들러 진탕 먹고 마신 다음, 잠든 사람들에게서 홀로 떨어져 별은 머리에 이고 뭍을 왼쪽,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해변을 걷는 것……. 그러다 문득 기적이 일어나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동화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177쪽). 야망이 없으면서도 야망을 다 품은 자세로 나는 지금 손가락이 부러지도록 글짓기를 하고 책을 쓴다. 코로나 19로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지내며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일도 불가능함을 온몸으로 느낀다. 어젯밤 친구와 함께 와인을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신 다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벌떡 일어난다. 그 순간 새벽까지 밤하늘을 지켜주는 별을 보며 그리움을 긁어 글을 만든다. 


흔적을 축적하다 만난 목적의식이 나만이 쓸 수 있는 위대한 예술작품으로 유도한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지혜처럼 불가능 앞에 한탄하지 않고 앉아서 기적을 바라는 꼼수를 버리고 작은 실천을 진지하게 반복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탄생하는 위대한 기적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오늘도 조르바의 사유체계에 빠져 빠져나갈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그의 자유분방한 삶에 파묻혀 내 삶을 그의 거울에 비추어 반추하고 반성해본다. 조르바가 걸어간 길을 추체험하면서 내 육신으로 견뎌내는 삶의 고통을 나만의 언어로 녹여내며 뼈저린 노동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렇게 탄생한 노동의 열매를 바디감이 농밀한 와인과 함께 목구멍에 털어 넣는 그 순간의 환희와 희열을 어찌 참아낼 수 있단 말인가. 


 "(포도주를 보며) 이 빨간 물이 대체 뭐요? 말해 봐요. 늙은 가지에 새 가지가 뻗으면 처음엔 아무것도 없지요. 거기 처음에 달리는 건 쓰디쓴 열매뿐이지요. 시간이 지나고 태양이 이 열매를 익히면 마침내 꿀처럼 달콤한 물건이 되지요. 이걸 포도라고 합니다. 이 포도를 짓이겨, 우리가 술고래 성 요한의 날 열어보면, 아! 포도주가 되어 있지 뭡니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빨간 물을 마시면, 오, 보라, 간덩이가 몸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커지고, 신께 시비를 겁니다. 두목, 말해 봐요. 대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요!"(78쪽). 포도가  변신해서 탄생한 포도주를 마시면 간덩이가 커지는 신비는 도대체 어떤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요? 그걸 마시면 온 세상이 갑자기 나를 끌어안고 농염한 자태로 속삭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뭇가지에 달리는 포도는 신비스럽지만 그것이 포도주로 바뀌는 과정은 물론 포도주로 살과 뼈 사이로 스며들어 황홀한 기분을 만드는 신비를 도무지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요? 신체성이 담보될 때만이 느끼는 감각적 맛의 향연은 와인이 주는 물질감이 펼치는 신비의 축제다. 수년을 병 속에 갇혀 지내다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탁 트인 공기와 만나면서 본색을 드러내는 와인은 병 속에 든 시다. 우리는 와인을 마시는 게 아니라 저마다의 칼라와 스타일을 간직하고 자연의 경이로움을 전하는 시를 마시는 것이다. 마시는 시는 그때 그때마다 다른 맛으로 몸속을 파고든다. 어떤 시는 목구멍을 타고 들어갈 때부터 흥건하게 적시는가 하면 어떤 와인은 혀에 닿는 순간부터 묵직한 내공으로 입안을 수놓는다. 



행복은 느닷없이 저지르는 일에서 느끼는 경이로운 감탄사다


“눈을 감았다. 조용하고 신비스러운 환희가 내 몸을 감쌌다. 내 주위의 초록빛 신비가 바로 천국인 듯했다. 내가 느끼는 신선하고 상큼하고 소박한 희열 자체가 하느님인 듯했다. 하느님은 시시각각으로 모습을 바꾼다. 어떤 모습으로 변장하든 하느님의 모습을 알아보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한 잔의 신선한 물이 되는가 하면 무릎 위에서 노는 아이가 되고 아름다운 여자가 되는가 하면 아침 산책이 되기도 한다). 조금씩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은 변화를 멈추면서 이윽고 꿈이 되었다. 나는 행복했다. 이승과 저승은 하나였다. 한 덩어리의 꿀을 안은 들판의 꽃 ……. 생명은 내게 그렇게 보였다. 내 영혼은 그 꿀을 탐닉하는 벌이었다”(302쪽). 행복은 한 바탕의 뜀박질 뒤에 마시는 막걸리 한 잔이고, 넘어가는 저녁노을에 저절로 내뱉는 감탄사이자 어쩌자 마주친 하늘 따라 움직이는 뭉게구름이다. 행복은 그리움에 젖어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갑자기 떠오른 한 문 장이고, 그리움에 사무쳐 잠 못 이루다 꿈속에서 만난 한 여인이다. 


행복은 경계 너머의 삶이 나에게 다가오는 경이로움이며,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심장 박동의 즐거움이자 고대하던 만남을 기다리는 설렘이다. 행복은 관념 속에 포장된 위장 행렬이 아니라 지금 내가 여기서 느닷없이 느끼는 찰나의 순간이다. 행복은 늘 만나던 세상이 낯선 상상력을 품고 천둥번개처럼 갑자기 내리치는 깨달음의 환희이자 힘들게 버티고 견디다 마침내 원하던 간절함이 절망을 뚫고 달려오는 희망의 메시지다. 신은 나와 독립적으로 바깥 세계에 존재하는 불가지의 대상이 아니라 내 안에서 늘 어제와 다르게 현현하는 일상의 깨달음이다. 행복은 꿀을 품은 꽃이 벌을 기다리다 만나는 우연한 마주침처럼 갑자기에 나에게 달려온다. 그걸 맞이하려는 사람에게만 깊은 마음의 파동을 던지며 전율하는 감동을 선사한다. 행복은 어제와 오늘 사이, 오늘과 내일 사이, 여기와 저기,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나들며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살아있는 신이다. 



“내가 인생과 맺은 계약에 시한 조건이 없다는 걸 확인하려고 나는 가장 위험한 경사 길에서 브레이크를 풀어 봅니다. 인생이란, 가파른 경사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는 법이지요. 잘난 놈들은 모두 자기 브레이크를 씁니다. 그러나(두목, 이따금 내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가를 당신에게 보여 주는 대목이겠는데) 나는 브레이크를 버린 지 오랩니다. 나는 꽈당 부딪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거든요. 기계가 선로를 이탈하는 걸 우리 기술자들은 <꽈당>이라고 한답니다. 내가 꽈당하는 걸 조심하다면 천만의 말씀이지요. 밤이고 낮이고 나는 전속력으로 내달리며 신명 꼴리는 대로 합니다. 부딪쳐 작살이 난다면 그뿐이죠. 그래 봐야 손해 갈 게 있을까요? 없어요. 천천히 가면 거기 안 가나요? 물론 가죠. 기왕 갈 바에는 화끈하게 가자 이겁니다”(215쪽). 조금만 속도가 나도 브레이크를 걸면 안전한 삶은 보장되지만 긴장감 속에서 느끼는 희열감은 줄어든다. 절대로 추월할 일이 없고 예기치 못한 장애물과 부딪힐 일도 없다. 행복은 느닷없이 벌어지는 해프닝 속에 있다. 


행복한 감동을 맛보기 위해 철저하게 세운 계획을 따라 체계적으로 운영하는 삶에서 행복은 오기 어렵다. 예기치 못한 장애물과 부딪히기도 하고 계획에 없던 일이 갑자기 생겨서 생각대로 풀리지 않을 때 행복은 다음 골목에서 똬리를 틀고 기다린다. 디오니소스적 충동이 발동할 때 아폴론적 이성이 시동도 걸기 전에 브레이크를 걸 때 인생은 파란만장하지 않고 위험하지 않지만 그만큼 스릴감은 없어진다. 브레이크 없이 전속력으로 질주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가끔은 하고 싶은 일에 꽂히면 자신을 통제하거나 자제하지 말고 몰입과 집중을 통해 흠뻑 빠져버려야 빠지지 않는다. 대충 보면 대충 생각한다. 대강하면 절대로 강력해질 수 없다. “일을 어정쩡하게 하면 끝장나는 겁니다. 말도 어정쩡하게 하고 선행도 어정쩡하게 하는 것,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 다 그 어정쩡한 것 때문입니다. 할 때는 화끈하게 하는 겁니다”(333쪽). 신명 나게 일하는 사람의 세계는 어정쩡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함성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다. 매 순간이 감동이고 감탄이며 기적이자 경이로움의 연속이다. 



시인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아찔한 혼돈 속에서도 질서를 보는 사람이다


“모험은 건강에 아주 좋습니다”(220쪽). 모험이 부족한 사람은 좋은 어른이 될 수 없다. 일본 철도(JR: Japan Railroad)의 카피 중의 하나다. 모험은 위험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서는 탐험이다. 모험을 통해 생긴 난관 돌파력이야말로 험난한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체험적 지혜다. “나는 어느 날 아침에 본, 나뭇등걸에 붙어 있던 나비의 번데기를 떠올렸다. 나비는 번데기에다 구멍을 뚫고 나올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렸지만 오래 걸릴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입김으로 데워 주었다. 열심히 데워 준 덕분에 기적은 생명보다 빠른 속도로 내 눈앞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이 열리면서 나비가 천천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날개를 뒤로 접으며 구겨지는 나비를 본 순간의 공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엾은 나비는 그 날개를 펴려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내 입김으로 나비를 도우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것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쭈그러진 채 집을 나서게 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어 갔다. 나는 나비의 가녀린 시체만큼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누른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바위 위에 앉아 새해 아침을 생각했다. 그 불쌍한 나비라도 내 앞에서 몸을 뒤척이며 내가 갈 길을 일러준다면 참 좋겠다 싶었다”(178쪽). 자연의 생명성은 열악한 환경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려는 야생성에 나온다. 야생성이 담보되어야 자생성이 생긴다. 스스로 견뎌내는 자생력은 지력이나 지성으로 길러지지 않는다. 험난한 인생을 스스로 버티고 견뎌나가려면 혼자 극복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진정한 생명성은 야생에서 혼자 견디면서 생기는 내성을 통해 확보된다. 


“조르바, 우리는 구더기랍니다. 엄청나게 큰 나무의 조그만 잎사귀에 붙은 아주 작은 구더기지요. 이 조그만 잎이 바로 지굽니다. 다른 잎은 밤이면 가슴 설레며 바라보는 별입니다. 우리는 이 조그만 잎 위에서 우리 길을 조심스럽게 시험해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잎의 냄새를 맡습니다. 좋은지 나쁜지 알아보려고 우리는 맛을 보고 먹을 만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이 잎의 위를 두드려 봅니다. 잎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소리를 냅니다. 어떤 사람은(겁이 없는 사람들이겠지요) 잎 가장자리까지 이릅니다. 거기에서 고개 빼고 카오스를 내려다봅니다. 그러고는 부들부들 떱니다. 밑바닥의 나락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게 되지요. 멀리서 우리는 거대한 나무의 다른 잎들이 서그럭거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 가슴이 부풀지요. 끔찍한 나락을 내려다보고 있는 우리는 몸도 마음도 공포로 떨고 맙니다. 그 순간에 시작되는 게……' 나는 말을 멈추었다. 나는, 그 순간에 시작되는 게 바로 시(詩)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조르바가 알아들을 것 같지 않아 말을 끊어 버린 것이었다”(386-387쪽). 거대한 우주에 속하는 나무의 작은 잎사귀는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에서 이야기하는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한 지구에 해당된다.  또 다른 잎은 지구와 함께 은하계를 이루는 수많은 별이다. 잎사귀에 사는 지구인들 중에 용감한 사람만이 절벽의 끝에서 추락하지 않고 뛰어내리는 용기를 발휘한다. 그 바닥에서 솟구치는 심연의 진리를 맛보기 위해 기꺼이 혼돈 속으로 뛰어내리는 사람이다. 대단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락하지 않고 먼저 죽음이 기다릴지도 모르는 나락으로 몸을 던져 모험을 감행하는 사람만이 지구 상에 존재하는 다른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인이다. 시인은 보통 사람이 가보기 위험한 극단까지 자신의 몸을 던져 위험한 사고 실험을 밥 먹듯이 반복하는 사람이다. 발상이 정발상이라는 식상함에 머물지 않고 상식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는 몰상식한 비정상적 발상을 즐기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다.



말썽거리가 많아야 이야깃거리도 많아진다


“존재의 심연에서 나는 소리쳤다. ”유아독존(唯我獨尊)! 오 대지여! 나는 그대의 막내, 그대 젖줄을 빠는 나는 그대를 놓치지 않으리라. 그대는 다만 한 순간의 삶을 내게 베풀었지만 그 한순간이 젖이 되고 나는 그 젖을 빠는구나”(253쪽). 대지는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다. 우리는 대지에서 태어나 대지로 돌아간다. 대지에 살아있는 동안 생명체는 씨앗을 싹 틔우고 뜨겁게 사랑하며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다. 대지와 접촉하는 순간만 사람은 거기서 나오는 기운은 먹고 살아갈 수 있다. 대지는 격전의 삶이 펼쳐지는 무대다. 그 무대에서 뒹굴고 뒤엉켜 살아가는 동안 육신이 경험한 감각적 깨달음만이 영혼을 뜨겁게 달군다. 대지와 떨어진 상념은 공허한 관념으로 무기력해지는 이유다. “뱀은 배로, 꼬리로, 그리고 머리로 대지의 비밀을 안다. 뱀은 늘 어머니 대지와 접촉하고 동거한다”(94쪽). 


대지는 삶을 관통하는 체험적 통찰력의 살아 있는 학습 무대다. 육체와 대지가 뜨겁게 만나는 순간, 태양빛을 만나 바람에 몸을 식히고 흙에서 씨앗을 싹 틔우는 순간, 생명체의 경이로운 기적은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살아갈 수 없다. 저마다의 생명주기가 정해져 있다. 한 번뿐인 생명성, 어찌 헛되게 낭비할 수 있을까. “꺼져가는 불가에 홀로 앉아 나는 조르바가 한 말의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의미가 풍부하고 포근한 흙냄새가 나는 말들이었다.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한 그런 말들이 따뜻한 인간미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으리. 내 말은 종이로 만들어진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내 말들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것이었다. 말에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그 말이 품고 있는 핏방울로 가늠될 수 있으리”(400쪽). 조르바의 말과 언어가 심장에 박히고 살갗을 파고드는 이유는 대지에서 비바람과 햇빛, 눈보라와 혹한의 추위를 견디며 온몸으로 배운 감각적 깨달음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조르바는 책상머리에서 머리로 익힌 관념적 유희를 거부한다. 조르바에게 학교는 물질성과 생명성이 만나 교감이 이루어지는 대지다. 대지는 삼라만상이 하나의 전체로 엮여 돌아가는 우주의 축제 무대이자 배움의 향연이 시시각각 펼쳐지는 인생 학교다.


“계절의 어김없는 리듬, 무상한 생명의 윤회, 태양 아래서 차례로 변하는 지구의 네 가지 얼굴, 생자필멸(生者必滅), 이 모든 사실이 다시 한번 내 가슴을 조여 왔다. 해오라기의 울음소리와 함께 내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경고였다. 생명이란 모든 사람에게 오직 일회적(一回的)인 것, 즐기려면 바로 이 세상에서 즐길 수밖에 없다는 경고였다”(246쪽). 생자필멸(生者必滅), 산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오직 일회적 삶인데 살아있음의 기적을 어찌 그냥 흘려보낼 수 있을까. 뜨겁게 사랑해도 모자랄 시간이다. "당신, 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151쪽). 평범하게 흘러가는 강물에는 파장이 일지 않는다. 강물에 돌멩이를 던져보자. 던지는 돌멩이의 무게에 따라 일어나는 파장의 깊이와 넓이도 달라진다. 삶은 내 몸에 새겨진 감정의 파고만큼만 기억되고 추억으로 남는다. 말썽거리가 없는 사람은 이야깃거리도 없다. 내 이야기가 없는 사람은 지루하고 배울 게 없다. 파란만장과 우여곡절을 친구이자 스승으로 모시고 살면서 사건을 일으키고 사고를 당하는 사람이 몸으로 배우는 것도 많다. 조르바의 삶은 사건과 사고의 연속이다. 조르바의 사고(思考)는 사고(事故) 치면서 생긴 생각의 산물이다. 말썽거리를 만든 사고만큼 내 사고의 깊이와 넓이도 심화되고 확산된다. 대지에서 전개된 삶의 파고만큼 나의 사고도 심연이 달라지는 이유다. 그렇게 책을 많이 읽었어도 노동자 조르바에게 깨달음을 얻는 이유는 몸으로 경험하면서 축적한 사유의 깊이와 넓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고 있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보게’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보게. 키스할 동안 다른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 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391쪽). 오로지 지금 이 순간만 내가 존재하고 그 순간만 내가 관여해서 바꿀 수 있는 시간이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느끼고 몸으로 체험하는 것만이 내 몸을 관통하며 깊은 상혼(傷魂)을 남긴다. 과감하게 몸을 던져 뜨겁게 사랑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지금은 과거로 사라진다. 사라진 시간은 어떤 힘으로도 되돌릴 수 없다.


 “재수 없는 사람은 자기의 초라한 존재 밖에도 스스로 자만하는 장벽을 쌓는 법이다. 이런 자는 거기에 안주하며 자기 삶의 하찮은 질서와 안녕을 그 속에서 구가하려 하는 게 보통이다. 하찮은 행복이다. 만사는 정해진 순서를 따라 진행된다. 험한 길, 신성한 길을 따르다 안전하고 단순한 법칙에 따르기도 한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로부터 공격이 차단된 하찮은 확신의 테두리 안에서 지네처럼 꼼짝거리다 보면 아무 도전도 받을 수 없다. 숙명적인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는 강력한 적은 오직 하나, 터무니없는 확신뿐이다. 확신은 내 경험의 벽을 허물고 내 영혼을 덮치려 하고 있다”(424쪽). 일상에서 반복하는 동사(動詞)를 바꾸지 않으면 내 삶 역시 바뀌지 않는다. 나는 내가 매일 취하는 동사의 합작품이다. 허겁지겁 일어나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출근해서 회의하고 친구 만나 술 마시며 놀다가 비몽사몽 잠자리 든다. 어쩔 수 없이 결혼하고 아이 낳아 뒷바라지하며 융자받아서 힘들게 살다가 생각지도 못한 대사증후군 병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진다. 지루한 동사가 반복되면 삶도 비루해진다. 그 사이 나도 모르게 쌓인 자만심의 벽과 확신의 경계는 넘을 수 없는 자기 고립을 가져온다. 그 안에서 하찮은 질서와 안녕을 추구하다 나도 모르게 안락사의 길로 접어든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일탈해서 전혀 다른 동사를 내 삶의 일상으로 받아들일 때 이전과 다른 활기찬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외부적 파멸의 순간이 지고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이다


조르바는 육체노동의 장인이자 에로스의 전형이다. 그는 광기 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몸으로 보여주는 행동하는 지성인의 표본이다. 광기로 가득 찬 조르바는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왜라고 묻지도 않는다. 느낌이 오면 계산하지 않고 몸을 던진다. 오로지 자신이 하는 일과 하나가 되기 위해 뜨겁게 사랑할 뿐이다. 사물을 바라볼 때는 사물과 하나가 되어 거기서 색다른 상상력을 잉태한다. 산투리를 연주할 때는 산투리와 한 몸이 되어 완전히 몰입해서 빠져든다. 탄광 갱도에서 갈탄을 캘 때는 그가 사용하는 연장이나 도구와 그것이 파고드는 흙의 깊이 속으로 함께 파고든다. 여자와 사랑을 나눌 때는 여자와 한 몸이 되어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조르바에게는 책 보다 대지, 지식보다 경험이 배움의 원천이자 스승이다. 조르바와 만나는 모든 사물이나 사람은 뜨거운 사랑의 대상이자 느낌으로 만나는 파트너다. 


“사는 것은 자신을 내놓고, 자신을 이어가는 일이다. 그리고 자신을 이어가고 자신을 내놓는 일은, 곧 죽는 일이다. 번식 행위가 엄청나게 즐거운 까닭은 어쩌면 죽음의 맛을 미리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기 생명의 정수가 조금 흘러나온 것을 미리 맛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남과 결합하지만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은 분열한다. 가장 친밀하게 포옹할 때 가장 은밀하게 우리의 뿌리가 뽑힌다. 성애(性愛)의 즐거움, 곧 유전적 경련의 본질은 타인 속에서 자신이 부활하고 소생한다는 느낌에 있다. 우리는 오로지 타인 속에서 자신을 소생시키고 이어갈 수 있다”(303쪽). 미겔데 우나모노의 《생의 비극적 의미》에 나오는 말이다. 조르바의 삶도 타자의 삶과 연결되고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더불어 살아가는 연대를 이루는 것이다.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한 갈탄 채굴 사업도 비록 망하긴 했지만 서로에게 연계된 깊은 관계와 뜨거운 연대로  절망의 나락에서 피워 올린 위대한 꽃이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엄청나게 복잡한 필연의 미궁에 들어 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417쪽). 자유는 자기의 존재 이유라고 신영복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이다. 조르바에게 자유란 누군가가 강제적으로 요구하는 사항에 부응할 의무 없이 자기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활동하는 여유다. 다른 사람이 만든 기준과 척도에 종속되어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치관에 비추어 옳다고 믿는 신념체계에 비추어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의 용기 있는 결단이 자유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억지로 했던 일에서 벗어나 내 몸이 욕망하는 선택에 따라 행동하되 그 결과를 책임지는 결단과 결행이 진정한 자유다.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적-혹자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혹자는 악마라고 부르는-이 우리를 쳐부수려고 달려온다. 그러나 우리는 부서지지 않았다”(417쪽). 


모든 것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은 실패에 직면해서도 결연하게 일어설 수 있는 용기에서 나온다. 비록 계획대로 풀리지 않았지만 그 순간에 비로소 나와 너는 또 다른 세계로 열린 문을 향해 걸어갈 수 있다. 한쪽 세계가 막은 문은 우리가 걸어갈 운명의 관문이 아닌 것이다. 시험대 위에서 혹독하게 경험한 시련으로 나의 영혼은 더욱 영롱해졌다. 실패로 겪은 야성이 험난한 세상을 열어갈 지성과 만나고 육체와 정신이 만나 하나로 융합하는 원동력이 된다. “외부적으로는 참패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정복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끼는 법이다. 외부적인 파멸은 지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었다”(417쪽). 길을 가는 사람만이 길을 잃을 수 있다. 길을 잃은 덕분에 새로운 길이 있음을 알게 된다. 심각한 사업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긍지와 환희 속에서 축제의 밤을 보낸 것은 그날이 바로 또 다른 인생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끝에서 다시 시작하는 용기야말로 조르바가 지향하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다. 그리고 조르바는 생전에 써 놓은 묘비명으로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을 남겼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조르바는 육체나 신체와 정신이나 영혼, 지성과 야성, 몸과 마음, 이성과 감성, 합리와 광기, 어둠과 밝음의 양면을 온몸으로 통합하려고 발버둥 친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그가 일생을 통해 추구했던 걸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메토이소노(성화(聖化))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인생과 작품의 핵심에 위치하는 노른자위 개념이자 그가 지향하던 궁극적인 가치의 하나인 메토이소노(성화(聖化))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메토이소노는 거룩하게 되기이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의 임계 상태 저 너머에서 일어나는 변화, 거룩하게 되기가 바로 이것이다.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것은 물리적인 변화다. 포도즙이 마침내 포도주가 되는 것은 화학적인 변화다.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성체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메토이소노다. 조르바가 사업이 거덜 난 날 사업체 하나를 춤으로 변화시켰다.. 이것이 바로 메토이소노다. 거룩하게 만들기이다”(460쪽). 


조르바가 걸어간 길을 김주대 시인의 '진화론'에 비추어 생각하며 장문의 리뷰를 마친다'


진화론


벼랑 끝에 이른 삶은 허공에서 길을 찾는다. 

그때 

몸 전체가 허공을 만지는 눈이어야 한다. 


(땅에서 추방된 새는 하늘에 터널을 뚫는다0 


길 아닌 길을 밝는 몸 전체가

지네처럼 섬세한 발이어야 한다.


(빛에서 추방된 벌레는 눈을 감고 땅 속을 전차처럼 간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공포가 

생을 전향시킨다. 

눈이 없던 곳에 눈이 생기고

온몸에서 발이 자란다.


(사실 모든 진화는 징그럽고, 괴물은 새로운 곳에서 탄생한다)


 -김주대 시집 《그리움의 넓이》 중에

매거진의 이전글 밑줄의 배반과 침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