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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자 네트워크를 바꿔서
영향력을 주고받는 비결

브뢰노 라투르(1947.6.22∼)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에서 배우다

내 인생을 바꾸는 행위자를 만나고 싶다면?

내가 만나는 모든 행위자와의 관계를 바꿔라!

     

행위자 네트워크를 바꿔서 영향력을 주고받는 비결,

브뢰노 라투르(1947.6.22)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에서 배우다



오늘은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NT: Actor Network Theory, 이하에서는 ANT라고 칭함)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ANT는 1980년대 중반에 프랑스의 브루노 라투어(Bruno Latour), 미셀 칼롱(Micell Callon), 영국의 존로(John Law) 등이 창시한 이후 많은 학문분야에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ANT는 인간관계는 물론 비인간과 맺는 혁신적인 관계를 풀어낸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라는 프랑스의 인류학자, 사회학자, 철학자, 과학기술학 연구자에 의해 창안된 새로운 이론입니다. 라투르는 2006년부터 2017년까지는 파리 정치 대학(Science Po)의 교수로 일했습니다. 현재 파리 정치 대학의 명예교수이며 《판도라의 희망》이라는 저서에서 주체와 객체, 형식과 내용, 어휘와 지시체,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는 어떠한 질적 간극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이분의 철학적 관심과 주장은 《인간, 사물, 동맹》이라는 책에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특히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어떤 간극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혁명적 주장은 인간이 비인간을 지배하면서 인류 역사는 물론 문명을 창조해왔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과 통념에 통렬한 비판적 입장입니다. 사람만 행위자(actor)가 아니라 사람 아닌 비인간 모두 다 행위자라는 생각이 라투르의 가장 혁명적인 주장입니다. 라투르에 따르면 인간이 갖고 있는 행위적 영향력만이 지구 상의 다른 존재나 생명체를 지배할 수 있다는 인간 중심적 발상 자체가 오만의 극치라는 겁니다. 오히려 인간 이외의 다른 기계든 기술이든 모든 사물도 다 행위자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행위자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돼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주객을 구분할 수 없는 역동적인 관계망이 만들어집니다. 라투르의 ANT에 따르면 내 인생을 바꾸고 싶으면 나와 연결되어 있는 행위자를 바꾸면 된다는 주장으로 수렴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위자는 사람만이 아니고 나와 연결돼 있는 모든 비인간 행위자가 다 포함됩니다. 



기차는 철도 없는 벌판을 달릴 수 없습니다


라투르가 말했던 “기차는 철도가 있어야 달릴 수 있지, 철도 없는 벌판을 달려갈 수 없다”는 주장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둘 중에 어느 하나만 있으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기차가 있는데 철도가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달리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켜줄 또 다른 행위자인 철도가 없어서 기차는 달릴 수 없습니다. 기차는 철도가 있어야 달릴 수 있습니다. 철도 없는 벌판을 달려갈 수 없습니다. 기차라고 하는 행위자가 철도라는 행위자를 만나 네트워크를 구성해야 둘이 완벽한 상호작용을 하면서 철도 위를 달리는 기차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행위자는 네트워크 속에서 다른 행위자를 만날 때만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여러분이 운전하다 자주 만나는 스피드 범퍼가 도로 곳곳에 있습니다. 스피드 범퍼를 만나는 운전수는 즉시 전속력으로 달려가다 속도를 줄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차량이 생각지도 못하게 충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스피드 범퍼는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운전하는  사람에게 속도를 줄이지 않으면 사고당할 수도 있다고 경고합니다. 비인간인 스피드 범퍼가 교통법규 위반 여부를 판단하는 경찰의 역할도 하고, 교통법규를 지켜야 한다는 도덕교사의 역할도 하는 겁니다. 스피드 범퍼라고 하는 비인간이 인간 운전수한테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이게 바로 라투르가 얘기하는 인간만 행위자가 아니라 비인간도 행위자, 특히 비인간 행위자가 인간한테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계가 행위자 네트워크입니다. 행위자와 행위자는 네트워크 속에 연결돼 있고 상호 간에 관계가 있을 때여야만 행위자의 존재 의미가 있습니다. 


ANT의 문제의식은 기술이 세상을 바꾼다는 기술 결정론을 부정합니다. 기술 결정론은 기술이 자체의 생명력을 갖고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발전한다는 입장입니다. 미디어 기술이 사회변화를 결정한다는 마샬 맥루한이 얘기한 ‘미디어는 메시지다’가 기술 결정론의 표본입니다. 미디어라는 기술 자체가 어떤 메시지를 담아내는지를 결정합니다. 어떤 기술이 개발되느냐에 따라서 기술 자체가 인간의 생명, 사회의 변화와 문명의 발전을 결정한다는 입장이 기술 결정론입니다. 이에 비해 사회적 구성주의는 기술이 사회를 바꾸는 게 아니라 그 기술을 사람이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다양한 방식으로 기술적 사용가치가 달라질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사회적 구성주의에 따르면 사회적 이해관계와 필요성이 기술 발달과 변화를 결정합니다. 기술발전의 원동력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는 사회 구성원의 필요입니다. 기술에 대해서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사회적으로 그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서 누가 어떤 목적으로 활용하느냐에 따라 동일한 기술도 다른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ANT는 두 가지 입장을 모두 부정합니다. 기술이 사회를 결정하지도 않고, 사회가 기술을 바꾸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 사이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절묘한 관계를 맺어가면서 인간이 비인간한테. 개발된 목적과 다르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고 사회적으로 어떤 목적과 의도로 사용하려고 한 적도 없었던 기술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기술이라는 행위자가 인간 행위자인 사람한테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ANT에 따르면 인간은 주제이고 인간을 제외한 다른 생명체다 사물은 모두 객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도 수많은 행위자가 거미줄처럼 엉켜 있는 네트워크 시스템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이자 다른 행위자가 행위할수록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행위자일 뿐입니다. 내가 총을 들고 누군가를 쐈다면 나만 행위자이고 총은 행위자가 아닐까? 전통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내가 총을 들고 쐈기 때문에 내가 주체이고 총은 객체인 도구가 됩니다. 그런데 내가 총을 보는 순간 본래 총을 쏠 생각이 없었는데 총은 나에게 흉기로 다가오면서 나로 하여금 총을 쏘도록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런 점에서 총은 나에게 행위를 부추긴 행위자입니다. 총이라는 비인간이 총을 갖게 되는 사람의 의도를 바꿀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기술을 결정하고 기술이 사람을 결정하고 이런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두 가지가 서로 상호 역학관계를 맺어가면서 상황에 따라 다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라투르는 총의 용도 변화를 목표의 변혁이라고 합니다. 원래 행위자의 목표가 A였었는데 이게 나한테 다가오면서 그 목표와 전혀 다른 의도와 용도로 쓰일 수 있는 경우가 목표의 변혁이 일어나나 사례입니다. ANT는 기술이 사람을 일방적으로 규제하지도 않고 사람이 기술을 일방적으로 통제하지 않는 제3의 대안을 찾습니다. 행위자와 행위자가 맺는 네트워크 속의 관계가 주고받는 영향력을 결정할 뿐입니다.



행위자 간 맺어지는 관계가 행위자의 존재 의미를 결정합니다


ANT는 기존의 과학기술학 이론들과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을 드러냅니다. 첫째, ANT는 인간(human)과 비인간(nonhuman)을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습니다. 비인간 행위자에는 인간을 제외한 기술을 포함하여 모든 인공물과 동물과 생물 등과 같은 것들을 모두 포함합니다. ANT는 인간만 행위자라고 생각하는 가정에 반론을 제기하고 인간 행위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직간접적인 매개물을 모두 행위자라고 규정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하루 일과를 생각해보면 수많은 비인간 행위자가 인간 행위자와 연결되어 무수한 일처리를 합니다. 인간 행위자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인간 행위자는 비인간 행위자를 통해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고, 이러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비인간 행위자를 동원합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과정도 저 혼자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복잡한 행위자 간 네트워크의 상호작용 산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 기술, 문화, 사물 등의 구분 자체가 아니라 이들이 어떤 네트워크에서 무슨 관계를 맺고 어떤 상호작용을 주고받으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계 형성 과정에 주목해야 된다는 점입니다. 


둘째, ANT는 과학(science)과 기술(technology), 주체와 객체, 거시와 미시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ANT는 그동안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었던 인간과 비인간 또는 기계와 자연, 주체와 객체 등을 나눠서 생각했던 형이상학적 관념론을 거부합니다. 대신 ANT는 다양한 행위자들이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이질적 동맹과 배반, 이합집산과 이종결합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를 양산하는 네트워크 속의 행위자 간 연결관계로 파악합니다. ANT에서는 과학과 기술을 결합한 테크노 사이언스(technoscience)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ANT는 과학은 순수한 이론 생산에 관여하고 기술은 과학적 이론을 적용하여 응용하는 기술적 대안을 개발한다는 가정과 발상에 반대합니다. ANT에 따르면 순수한 과학적 관심만으로 뭔가를 이론적으로 탐구한다는 가정 자체도 잘못된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과학적 탐구 과정에도 기술적 도구의 도움을 받는 과정에서 더욱 빛을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기술적 해결 대안을 실험하는 과정에서도 과학적 이론이 문제를 탐구하는 이론적 프레임이나 렌즈로 작용합니다. 과학과 기술은 서로 배타적이거나 독립적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과학의 개념(객관적 진리나 사실)도 실험기구와 같은 기술에 의해 생산되기 때문에 과학과 기술은 분리하여 설명할 수 없으며, 구분 자체도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주체와 객체도 구분할 수 없습니다. ANT에서는 누가 주체이고 객체인지, 누가 원인이고 결과인지를 구분하기 불가능합니다. 주객의 전도가 수시로 일어나고 원인과 결과도 호혜적 영향력을 행사는 역동적인 관계라서 구분하기 불가능합니다. 인간이라는 주체와 대상이라는 객체가 항상 서로의 역할을 맞바꾸면서 새로운 네트워크를 끊임없이 형성하기 때문에,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 대상인 객체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를 지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인간이 비인간과 관계를 맺는 순간 주체/객체의 경계는 흐려지고 누가 주체이고 객체인지를 구분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해집니다.


셋째, ANT에 따르면, 인간의 역량은 그들이 구축한 네트워크에 따라 달라집니다. 즉, 인간 또는 비인간 행위자를 자신이 가진 네트워크에 편입시켜 얼마나 더 강력한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는가에 따라 인간의 역량이 달라집니다. 인간의 능력은 인간이 독립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실력으로 판가름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와 맺은 역동적인 네트워크 상의 복잡한 관계 형성 방식에 따라 천차만별의 경쟁력이 다르게 부각됩니다. “특별한 존재와 평범한 존재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존재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관계다. 남에게는 평범한 존재가 내게는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존재가 나와 맺고 있는 관계 때문이다. 평범한 존재는 나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특별해진다. 따라서 평범한 존재는 무가치하며 어서 빨리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할 자격 따위는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360쪽). 장유승의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 중에 나오는 말입니다. 


헌책의 가치는 헌 책 자체가 갖고 있는 독자적인 의미와 내용이 결정하는 걸까요? 그 책을 찾기 위해 관심을 갖고 찾던 사람이 그 책을 만나는 순간 결정되는 것일까요?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헌책)가 만났을 때 그 둘 사이의 관계가 그 책을 이전과 다른, 색다른 의미로 완전히 바꿉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관심을 갖고 찾아야 되는 책인데 누군가에게는 아무 관심 없이 다시 헌 책방에 그대로 쌓여 있는 책이 있습니다. 헌 책방에 쌓여 있는 책들의 가치는 그 책이 지니고 있는 독자적인 가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어떤 관심을 갖고 그 책을 포착하는지, 즉 인간 행위자가 책이라는  행위자를 만났을 때 생기는 특별한 관계가 책의 존재가치를 결정합니다. 책과 맺는 행위자 간 관계가 행위자의 존재 의미를 결정합니다.



모든 창작은 행위자들이 네트워크 위에서 펼치는 사회적 관계의 합작품입니다.


인간 행위자의 독립적인 힘으로 발휘할 수 있는 게 한계가 있기 때문에 다른 행위자로서 기술과 네트워크를 맺는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행위자로 거듭나기 때문입니다(Latour, 1999). 결국, ANT에서 권력(power)은 한 행위자가 자신이 바라는 대로 다른 행위자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ANT는 권력이 이종적인 네트워크 건설의 결과로 생겨난 것임을 보여줍니다. 힘이 있는 왕, 기업, 정부는 이종적인 네트워크를 건설한 결과로 권력을 얻었고, 이 권력은 다양한 이해관계를 협상할 수 있는 번역의 능력입니다(홍성욱, 2010). ANT는 번역의 과정을 기술(description)함으로써 숨어있는 권력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이 세상에서 이제 가장 힘 있는 사람이 누구냐면 힘없는 비인간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길들여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동맹을 맺어 나의 아군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힘 있는 사람은 한 개인의 어떤 파워나 독자적인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비인간 네트워크들이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나의 아군으로 끌어들여 이전과 판이하게 다른 영향력을 지닌 사람입니다. 


하지만 행위자 네트워크 안에서는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다른 행위자를 지배하는 만고불변의 법칙이나 진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행위자와 행위자가 맺는 역학관계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언제나 그 권력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난 바다로 나가게 되면 세계가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더는 고집할 수 없다. 그가 만나게 되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바닷물이며 언제라도 배를 뒤집을 수 있는 거대한 물너울이며 물속에 숨어있는 암초이며 예고 없이 불어오는 돌풍이다”(127쪽). 황현산의 《우물에서 하늘 보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내가 바다에 나가서 절대 권력을 갖고 내 마음대로 배를 끌고 갈 수 없는 이유는 수시로 변하는 기상조건과 배가 위치한 작금의 상태를 사람 행위자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개발된 기술로 어느 정도 예측과 통제가 가능하지만 여전히 인간 행위자가 다른 비인간 행위자와 맺는 관계를 사전에 철저하게 통제할 수 없는 변수와 상호작용이 더 많이 존재합니다.


나의 생각을 온전히 나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창작할 수 없는 불가능한 꿈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은인은 내가 만난 다양한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늘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흔한 도구 덕분에 생각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창작은 나의 창의적인 생각만으로 이루어지는 독창(獨創)이나 독주(獨奏)의 산물이 아니라 내가 평상시에 사용하는 수많은 도구들이 합작을 통해 이루어낸 협창(協創)이나 협주(協奏)의 산물입니다. 내가 아무리 위대한 생각을 품고 있어도 그 생각을 적을 종이와 펜이 없거나 하나의 문서로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컴퓨터, 키보드, 그리고 마우스가 없다면 생각은 잠시 머물렀다가 휘발되는 파편에 불과합니다.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생각의 파편을 붙잡아 메모할 펜이나 노트가 없었다면 찰나에 빛나던 아이디어는 순식간에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그것이 지금 여기서 내 생각의 자손을 잉태하고 출산할 수 있는 원동력은 생각을 글로 전환하는데 매개 작용을 하는 도구 덕분입니다. 도구는 이제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기구가 아니라 도구 자체가 내 생각을 자극하고 촉진하는 또 다른 주체입니다. 이 말은 혁명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오로지 인간만이 다른 생명체는 물론 사물에게 영향을 미치는 주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주체인 인간을 제외하면 세상의 모든 생명체나 사물은 주체의 생각을 도와주는 객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인간만이 다른 생명체에게 영향을 미치며 주체의 자리를 지킨다는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난다면 세상은 수많은 생명체나 물체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네트워크의 세계라는 게 ANT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방향입니다. 모든 창작은 수많은 행위자들이 네트워크 위에서 펼치는 사회적 관계의 합작품입니다.



책은 저자가 쓰는 게 아니라 수많은 저 자들이 씁니다

     

내가 창작의 기쁨을 누리는 과정에서 도움을 준 도구 10가지를 꼽아 보았습니다. 이들은 저마다의 목적과 존재 이유를 갖고 창작을 시도하는 저와 함께 영향력을 주고받는 행위자들입니다. 일명 창작 과정에서 도움을 주고받으며 시너지 작용을 일으킨 10개의 도구입니다. 우선 ①책과 ②메모 노트, 그리고 ③포스트잇과 ④펜, ⑤노트북이나 데스크 탑 컴퓨터는 모두 글을 쓰는 데 도움을 주는, 다른 말로 말하면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드는 자극제이자 글을 쓰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글을 쓰면 그 결과를 저장했다가 늘 갖고 다니는 ⑥외장하드와 언제 어디서나 다양한 글의 원천을 찾아보거나 다른 목적으로 검색할 때 언제나 비서처럼 조목조목 알려주는 ⑦스마트폰과 내가 보고 싶은 책과 각종 필기구를 품고 다니는 ⑧가방, 어제와 다른 색다른 체험적 깨달음을 얻기 위해 어제와 다른 방법으로 세상의 이치를 파헤쳐 결국 몸으로 깨닫는 지혜의 출발점, ⑨신발은 언제나 낯선 곳으로 인도하면서 촉진하는 분발입니다. 이런 모든 움직임을 지배하는 원초적인 동력은 결국 운동으로 다져진 몸입니다. 그 몸을 만드는 ⑩운동기구가 체력을 축적해서 뇌력을 낳는 원동력으로 작용합니다. 10 가지 도구나 기구는 저마다의 위치에서 글쓰기와 거기에 필요한 글쓰기 근육을 길러주는 행위자(actor)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위자는 책을 쓰는 저자만 행위자가 아니라 저자로 하여금 책을 쓰도록 동기를 부여하거나 자극을 제공함으로써 행위의 원인을 제공하는 모든 생명체나 사물도 포함합니다. 여기에서 행위자는 인간만이 아니라 인간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비인간(예: 생물, 기계, 환경, 건물 등)을 포함합니다. 


‘저 자들’은 저자의 책 쓰는 데 도움을 주는 수많은 ‘도구들’입니다. 한 권의 책을 쓰는 과정도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으로 조명해보면 재미있는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책을 쓰기 위해서는 우선 책을 쓰는 저자가 존재해야 합니다. 저자만 있으면 책을 쓸 수 있을까요. 저자는 책을 쓰는데 필요한 도구의 도움 없이는 한 글자로 쓰지 못합니다. 책은 저자 혼자의 힘으로 쓰는 게 아닙니다. 저자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과 그 속에 존재하는 도구들의 합작품입니다. 저자가 책을 쓰고 싶다고 해서 금방 책이 한 권 써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책은 책을 쓰는 데 필요한 많은 도구와 환경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 다양한 행위자(actor)가 주고받은 영향력의 합작품입니다. 책을 둘러싸고 있는 행위자 네트워크는 우선 책을 쓰는 저자, 책, 노트, 펜, 포스트잇, 키보드와 마우스가 장착된 노트북이나 컴퓨터, 쓴 글을 저장하는 외장하드, 그리고 책을 쓰는 일정한 공간이 필요합니다. 이런 다양한 행위자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한 권의 책이 탄생됩니다. 하얀 백지와 볼펜으로 글을 쓰는 과정과 생각나는 대로 키보드 위에 워드프로세서를 통해 입력하면서 글을 쓰는 과정이 다릅니다. 도구가 바뀌면 도구라는 행위자와 인간 행위자가 만나서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쓰는 글의 깊이와 넓이가 달라질 수 있음을 글 쓰는 과정에서 관여하는 다양한 행위자와 이들이 다른 행위자와 맺는 상호작용의 네트워크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기억보다 기억의 힘이 세다는 걸 알려주는 펜은 내 손의 연장입니다

     

책을 보면서 만년필로 밑줄을 치고 그 밑줄 친 내용이 포함된 페이지에 포스트잇을 붙입니다. 그 페이지를 잊어 먹지 않고 책의 특정한 부분에 나의 내용을 백업하기 위해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려 입력한 다음 폴더를 만들어 저장합니다. 책은 나에게 글을 쓰도록 자극을 준 행위자고 포스트잇은 바쁜 시간에 특정 문장에 주목할 수 있도록 주의를 집중시키는 또 다른 행위자입니다. 다른 책이 아니라 그 책을 읽지 않았으면 그런 생각으로 그런 책을 쓰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연히 들춰본 책의 특정 문장이 인두처럼 심장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합니다. 곁에 있던 메모 노트를 펼칩니다. 참을 수 없는 메모의 기쁨을 참지 못하고 하얀 여백 위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의 파편을 몇 조각 붙잡아 씁니다. 쓰고 나니 그 메모의 흔적이 다른 생각을 불러와 이미 쓴 메모장의 다른 문장에 연결됩니다. 내가 쓰려고 해서 쓴 게 아니라 메모장의 유혹의 못 이겨 생각의 파편을 몇 조각 썼는데 마침 지나가던 생각이 그 생각의 파편을 보고 또 다른 생각의 파편을 불러와 그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그게 바로 문장입니다. 내가 쓰고 싶었던 문장이 아니라 쓴 문장이 다른 문장을 불러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문장 역시 나의 쓰고 싶은 문장을 자극하고 다음 문장을 불러오는 행위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글이 글을 쓴다는 말이 나옵니다. 쓰고 싶은 글을 아무리 쓰려고 해도 나오지 않다가 일단 말도 안 되는 글을 쓰는 순간 그 글이 다음 글을 물고 이어지면서 한 장의 글이 완성됩니다. 책과 메모노트, 그리고 포스트잇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나 도구가 아닙니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행위자 네트워크의 구성요소입니다.


펜에는 붓펜, 만년필, 볼펜, 형광펜이 있습니다. 펜도 그 용도가 다릅니다. 붓펜은 찰나의 생각을 촌철살인의 아포리즘 형태로 붙잡아두는 도구입니다. 예를 들면 “공사다망(公私多忙)하면 다 망한다.” ‘공사다망(公私多忙)’이라는 사자성어를 근간으로 바쁜 사람이 위업을 달성하지 못하는 이유를 ‘다 망한다’는 말과 접목시켜 탄생시킨 아포리즘입니다. 붓펜이 하얀 백지 위에서 그림을 그리듯 써 나가는 까만 잉크의 흔적과 획을 그을 때마다 나는 종이와의 마찰 소리는 생각을 더 깊게 도와주는 배경음악입니다. 만년필은 나만의 비밀 문장에 책을 읽다 만난 인두 같은 한 문장을 메모할 때 사용합니다. 물론 책에 사인을 해줄 때에도 사용합니다. 만년필 역시 촉끝에서 글자의 획에 따라 흘러나오는 잉크가 무늬를 그리면서 만들어가는 글자의 형상을 만들어가는 위대한 필기도구입니다. 볼펜은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고 싶을 때 사용합니다. 작은 행간을 파고 들어가 나의 의도대로 밑줄을 치면서 저자의 생각을 내 몸으로 끌어들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밑줄 친 문장 중에서 특별히 더 기억하고 싶거나 심장에 꽂힌 한 문장은 형광펜을 사용하여 색칠합니다. 다음에 다시 볼 때 한눈에 들어올 수 있도록 점찍어둔 문장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펜은 내 생각을 도와주는 도구를 넘어 내 생각을 새롭게 잉태시켜주는 자극제이자 촉진제입니다. 만약 펜이 없었다면 내 생각은 저만큼 멀리서 아직도 과거를 향해 손짓을 하며 허공에 뜬 단상을 주워 담기 바빴을 것입니다. 펜은 나에게 기억은 짧고 기록은 길다는 명제를 각인시켜준 내 손의 연장입니다. 



기억보다 기억의 힘이 세다는 걸 알려주는 펜은 내 손의 연장입니다


노트북이나 데스크 탑 컴퓨터는 글쓰기의 절친으로 언제나 함께하는 내 신체의 연장입니다. 노트북은 주로 강연할 때 내 생각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빔 프로젝터에 연결시켜 아이디어를 공유할 때 사용합니다. 물론 노트북 없이도 생각을 직접 말로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노트북 없이 프레젠테이션 하는 결정적인 단점은 시각적 자료를 기반으로 상상력을 자극하는데 한계가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텍스트 메시지는 말로 전달하지만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고 이미지에 담긴 상상력을 촉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노트북은 지방 강연을 가거나 여행을 떠날 때 내 몸에 붙어 다니는 내 생각의 연장입니다. 쓰던 글을 마저 쓰거나 색다른 장면을 포착하면 바로 노트북을 열고 글을 쓰며 흔적을 남깁니다. 이동 중이 아니면 주로 글은 연구실이나 집에 있는 데스크 탑 컴퓨터를 활용합니다. 넓은 모니터에 다양한 자료를 펴놓고 강연자료 만들다가 책을 읽고 읽다가 떠오른 아이디로 강연 자료를 수정하고 그걸 기반으로 지금 쓰고 있는 책을 씁니다. 읽고 쓰는 일이 독립적으로 벌어지는 두 가지 활동이 아닙니다. 읽다가 쓰고 쓰다가 읽고 강연 자료를 만들어가는 동시 병행적으로 창작활동을 합니다. 키보드는 손가락으로 전달받은 머릿속 생각을 컴퓨터 하드에 저장하는 인터페이스입니다. 키보드가 없다면 내 생각은 컴퓨터 속으로 들어가 저장될 수 없습니다. 마우스는 가고 깊은 곳으로 신속하게 이동하고 글을 지우거나 추가할 때 원하는 대로 처리해주는 요술방망이입니다. 쓴 글을 일부 지우거나 복사해서 자리 이동을 할 때도 마우스는 마법의 손과 같은 기능을 발휘합니다. 컴퓨터 부속장치이긴 하지만 마우스와 키보드는 구속된 생각에서 벗어나 신속하게 생각을 글로 전환시켜주는 매개 장치입니다.  


외장하드는 내 기억의 연장이자 들고 다니는 제2의 뇌입니다. 가끔 뜻밖의 사고를 당해서 외장 하드에 저장된 글이나 자료가 뜨지 않아서 ‘뜨아~’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외장하드는 내 생각의 많은 부분을 글이나 자료로 정리해둔 아이디어의 창고입니다. 요즘은 구글 드라이브에 자주 사용하는 강의 자료나 책 쓰기 관련 자료를 저장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합니다. 외장하드에 저장된 방대한 데이터가 불의의 사고로 복구가 불가능한 경험을 몇 번 해본 나로서는 가급적 노트북이나 데스크 탑 하드에 분산해서 저장합니다. 외장하드는 여전히 나에게 생각의 흔적이 남겨져 있는 족적이자 창작 중에 있는 모든 책이나 글이 담겨 있는 비밀 보관소입니다. 스마트폰은 카카오톡을 비롯한 메신저 역할과 각종 SNS에 남겨진 나에 관한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걸어 다니는 비서입니다. 특히 생각나는 아이디어를 카톡 내 창이나 페이스북 나만 보기 옵션을 글을 저장해놓았다가 다시 꺼내보는 아이디어 창고입니다. 신문 칼럼이나 잡지 등에 기고된 글 중에서 지금 쓰고 있는 책이나 강연할 때 활용할 단서나 화두가 담겨 있으면 링크를 복사해 역시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에 저장해놓았다가 나중에 봅니다. 스마트폰의 이메일은 물론 문자 메시지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창이며, SNS는 세상 사람의 심리가 흐르는 마음의 강입니다. 스마트폰의 카메라는 창작하는 사람에 소중한 이미지의 원천을 축적하는 상상력의 보고(寶庫)입니다. 지나가다 기억에 남은 간판이나 낯선 생각을 북돋우는 문구를 찍어 놓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사라질법한 찰나의 장면을 찍어서 글감으로 사용합니다. 스마트폰은 창작하는 나에게 창작의 원천을 제공해주는 도구이자 창작의 재료를 축적하는 창고입니다. 스마트 폰 덕분에 생각을 스마트하게 유지해나갈 수 있습니다.  



가방은 책과 필기구들의 다방이고 신발은 어딘가로 떠나는 출발입니다


가방은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데 필요한 모든 도구를 한 군데 모아서 들고 다니기 편하게 만들어주는 이동수단입니다. 가방은 언제나 나에게 말없이 물어봅니다. 오늘은 내 안에 무엇을 담아서 갈 것인지, 어제 담아간 책은 왜 안 읽었는지, 메모장은 왜 아직도 꺼내 쓰지 않는지, 틈바구니에 꽂혀 있는 볼펜은 언제 사용할 것인지 끊임없이 묻습니다. 가방을 여는 순간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필기구들이 일제히 아우성을 칩니다. 나를 데려다가 책 쓰는 데 빨리 사용하라고. 가방은 말이 많은 필기구를 조용한 침묵의 방에 가둬놓고 잠시 그들에게 휴식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다방 같은 곳입니다. 가방에 들어가면 들어오기 전의 신분계층에 관계없이 가방이 요구하는 기준에 맞춰 들어가야 합니다. 가방이 들어오지 못하게 입구를 막거나 가방이 원하는 사이즈를 넘어서면 출입이 불가능합니다. 가방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지만 일단 자신의 품 안으로 들어온 모든 필기구에게 다음 목적으로 사용하기 전까지는 따뜻하게 품어줍니다. 가방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 가득합니다. 정해진 양보다 항상 많은 걸 넣어 갖고 다닙니다. 배가 너무 벌어져서 아프기도 하고 무거운 하중을 견디느냐고 힘겨운 한숨을 연발 내쉬기도 합니다. 가방 끈은 끊어지기 일보 직전에도 불평불만 털어놓지 않고 여전히 근근이 목숨을 이어갑니다. 가방 끈은 이제 땀에 젖은 손가락 힘으로 버티면서 까맣게 닳고 닳았습니다. 어제와 다름없이 오늘도 가방은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수많은 책과 필기구, 그리고 메모장을 기꺼이 받아주면서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쓰도록 언제나 낮은 자세로 나를 위해 봉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가방(bag)은 든든한 백(back)입니다.


가방을 뒤져보면 펜으로 끄적거리다 만 메모장에 별 표시★가 되어 있어서 자기를 봐달라고 애원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별을 주목하다 연상되는 글귀가 있어서 노트북을 열고 쓰다가 만 글에 이어서 다시 문장을 이어나가다 막힙니다. 거기까지만 쓰고 저장을 노트북에 하고 다시 외장 하드에도 저장합니다. 그 순간 단톡 방에 올라온 이미지가 곁들인 명언이 다시 글발을 촉발시킵니다. 복사해서 카카오톡 내 방에 저장해놓고 저녁에 집에 들어가서 그동안 여기저기 써놨던 글을 이리저리 조합해보고 글의 전체적인 구조를 맞춰봅니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겠다고 해서 창작이 시작되었다기보다 책을 읽고 만난 어떤 문장이 나의 문리를 자극해서 시작될 수도 있고 메모장에 적힌 작은 흔적 하나가 잠들어 있는 글발을 흔들어 깨운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글이나 책을 쓰는데 도움이 되는 도구가 다른 도구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행위자가 되어 글 쓰는 행위를 촉발시킵니다. 이제 글발을 신나게 날리기 위해서는 말발을 잠시 멈추고 몸을 단련해야 합니다. 글은 머리로 쓰는 게 아니라 몸으로 쓰는 육체노동의 산물입니다. 뇌력은 체력에서 나옵니다. 체력이 있어야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끝까지 씁니다. 체력이 고갈되면 끗발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글발은 내가 걸어온 삶을 적확한 개념을 동원해서 표현할 때 휘발되지 않고 분발하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촉발시켜 줍니다. 신발은 나에게 언제나 어딘가로 떠나는 출발이자 여기 머물러 있지 않고 색다른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분발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신발을 신고 차로 이동해서 피트니스 센터에 도착합니다. 내 몸을 단련하는 다양한 운동기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글발의 힘을 솟아나게 해주는 연구실은 지식 출산실입니다


운동기구는 내 몸의 피가 잘 돌게 만들어주는 유산소 장치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방을 제거하고 근육을 만들어 기초 대사량을 늘려주고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활력제입니다. 내가 운동을 시작하면 운동 도구는 따라와서 나의 몸을 만들어주는 객체가 아니라 운동 기구가 나로 하여금 운동을 하고 싶게 만드는 행위자입니다. 운동은 내 몸과 기구가 합작할 때 최고의 효과를 냅니다. 운동 기구는 내 몸 밖에 있는 물체가 아니라 이미 나와 한 몸이 된 내 몸의 연장(延長)입니다. 운동하는 연장이 있어야 근육을 만들고 힘을 길러 더 오랫동안 창작할 수 있는 시간을 연장(延長)할 수 있습니다. 뇌력도 체력에서 나옵니다. 운동은 시간 내서 하는 동작이 아니라 밥 먹듯이 언제나 반복하는 하루의 일과이자 습관입니다. 운동기구도 만들고 싶은 근육에 따라 종류가 다양합니다. 우리 몸의 근육은 종류가 다양하지만 큰 근육 중심으로 이야기하면 가슴 근육을 단련시켜주는 벤치 프레스, 등 근육을 비롯하여 상체 근육과 하체 일부 근육을 단련시켜주는 데드 리프트, 그리고 허벅지와 힙, 그리고 기립근 등을 단련시켜주는 스쾃 운동이 대표적입니다. 


벤치 프레스, 데드 리프트, 그리고 스쾃 모두 바벨에 일정한 무게를 걸어서 하는 운동입니다. 누워서 무게를 들어 올리는 벤치 프레스를 하면서 나에게 내리누르는 세상의 짐을 견뎌봅니다. 내 몸무게보다 더 무거운 바벨을 들어 올리면서 힘든 상황을 버티는 지구력을 기릅니다. 역시 내 몸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일어나는 안간힘을 쓰면서 없었던 힘을 기릅니다. 돈 들여서 살은 뺄 수 있지만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근육을 만들 수 없습니다. 운동으로 만드는 근육은 나의 글쓰기 근육이자 뿌리까지 파고들어 본질을 밝혀내는 근력(根力)의 원동력입니다. 근육의 힘, 근력(筋力)이 생겨야 근본을 파고드는 글쓰기의 힘, 근력(根力)도 생깁니다. 운동 기구 덕분에 생긴 근력(筋力), 근력 덕분에 생긴 글의 힘이 생깁니다. 근육은 다시 나의 글쓰기 근육을 자극해서 글의 힘을 만듭니다. 근육으로 단련된 내 몸은 글쓰기를 자극하는 행위자입니다.



공간에서 인간이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에 따라서 한 인간의 역사가 바뀝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합작품입니다. 공간은 인간에게 창작욕을 부추기는 강력한 행위자입니다. 체력을 단련하는 피트니스 센터와 뇌력을 단련하는 지식 임신실, 즉 연구실이라는 공간은 인간 유영만을 창작하는 작가이자 강연하는 명사로 만들어준 일등 공신입니다. 피트니스 센터에 가득 들어선 운동기구와 장비는 내 몸의 곳곳을 지명하며 자신을 사용해달라고 침묵으로 우렁차게 항변합니다. 피트니스 센터에서 보낸 시간은 인간의 몸을 만드는 역사적 현장입니다. 내가 거기서 흘린 땀의 양은 지방을 태우고 근육으로 보답해주는 증표입니다. 별일이 없는 한, 나는 매일 여기서 몸을 변함없이 만듭니다. 변함없이 운동하니까 내 몸이 놀랍게 변합니다. 


허벅지가 두꺼워지고 엉덩이는 볼록해지며 팔뚝근육이 팽창하며 기립근이 바로 서고 뱃살은 빠지고 익살은 늘어납니다. 가슴은 펌핑(pumping)되어 찢어지는 근육 맛이 나고 어깨 근육은 솟아오릅니다. 피트니스 센터에서 단련된 체력은 뇌력을 자극하는 강력한 행위자입니다. 힘이 생기니 글의 힘도 생깁니다. 운동하고 연구실에 들어서는 순간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이 아우성을 칩니다. 나를 뽑아서 읽어달라고. 테이블 위에 누워 있는 책 역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릅니다. 너무 오랫동안 누워 있어서 허리가 아프다고. 나를 일으켜 세워 쓰다듬어 달라고. 책으로 가득 찬 연구실 공간은 어제와 다른 지식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지식 분만 소입니다. 글 쓰는 데 필요한 자료를 찾고 또 찾으며(Research) 생각하고 그 생각을 문장으로 만들면서 보내는 탐구의 시간은 새로운 지식을 탐색하면서 이전과 다른 글을 구상하는 몸부림의 시간입니다. 연구실은 그래서 안간힘을 쓰면서 이전과 다른 지식을 출산하는 지식 출산실입니다. 



이렇게 탄생된 글이나 책은 이제 독자의 세계로 넘어갑니다. 독자는 저자와 다른 세계에 살아갑니다. 하지만 저자의 책을 잡아드는 순간 독자는 더 이상 독자가 아닙니다. 독자는 저자의 글을 읽고 자기 삶을 살아가는 또 다른 창작자입니다. 저자의 글에 대한 독자의 피드백은 저자로 하여금 다시 글을 쓰게 만드는 행위자입니다. 독자는 더 이상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독자는 책과 접속하는 순간 저자의 낯선 생각과 만나 자기 생각을 변화시켜 나갑니다. 독자의 생각이 저자의 생각과 만나 생각의 자손이 잉태되는 순간입니다. 저자의 책에 대한 독자의 생각은 다시 저자에게 입력되어 다른 글의 씨앗으로 발아됩니다. 독자(讀者)는 이제 독자(獨自)가 아닙니다. 독자는 저자의 생각으로 이전과 다른 생각을 잉태시킨 미래의 작가입니다. 독자는 그래서 작독자(作讀者)입니다. 작가이면서 독자이고 독자이면서 작가입니다. 독자는 저자의 저술 행위를 자극,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자 네트워크의 인플루엔서(influencer)입니다. 오늘과 다른 더 멋진 글과 책을 쓰려면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자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합니다. 거기서 건강한 지식을 임신하고 출산해서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일조할 수 있습니다. 덕분에 행복한 글을 쓰는 작가로서 기쁨을 맛볼 수 있고 덕분에 책을 내는 저자로서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데 즐거움을 더해나갈 수 있을 겁니다.


번역은 권력의 양산지인 네트워크를 건설하는 과정입니다

     

ANT는 독특한 개념을 창안해서 다른 이론과 다른 독특한 문제의식을 품고 색다른 가능성의 관문을 열어갑니다. 첫째 인간-비인간의 대칭성(symmetry)의 개념입니다. 비인간을 인간과 마찬가지로 행위자로 보는 게 ANT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런 특징을 대변하는 개념이 바로 인간과 비인간을 대칭적(symmetrical)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ANT의 ‘인간-비인간 대칭성’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인간만 행위한다고 가정했습니다. 하지만 ANT에서  가장 강조하는 개념은 비인간도 인간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자라고 가정합니다. 비인간은 사물, 혹은 대상의 행위자적 속성을 드러내기 위한 개념으로 인간 개념과 쌍을 이룹니다.  ANT는 그래서 인간(주체)과 비인간(객체)을 구분하고, 기술이 인간 주체의 의지와 목표를 실현하는 중립적인 도구라는 생각을 비판합니다. 행위자 이론의 창시자인 라투르(Latour)(1988)는 행위자(actor)를 행위능력(agency)을 가진 존재로 정의합니다. 행위자로써 행위능력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 또는 능력을 통해 주변의 다른 행위자의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게 만들고, 이러한 행위능력을 다른 행위자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행위자의 행위능력은 단독으로 발생하지 않으며, 다른 행위자와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 때문에 발생합니다. 생명체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다른 생명체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인간 중심주의나 생태계의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 다른 생명체에게 영향을 미치는 관계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자는 생태주의 역시 아직 비생명체를 행위 주체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 행위는 행위자 본인의 의지와 결단에 따라 행위가 이루어지기보다 행위자를 둘러싸고 있는 네트워크 안의 다른 행위자와의 관계 속에서 주고받는 영향력에 따라 다르게 이루어집니다.


ANT에서 한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와 결합해서 네트워크를 건설하는 과정을 ‘번역(translation)’이라고 합니다. 번역은 질서를 만드는 과정으로서, 행위자가 이미 유지하던 네트워크를 끊어버리고 다른 행위자를 자신의 네트워크로 끌어들여 기존과 다른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자신의 네트워크를 확대하고, 강화하는 질적 변화를 모색하는 행위입니다. 번역은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네트워크를 건설하는 과정입니다. 한 행위자의 이해나 의도를 다른 행위자의 언어로 바꿨을 때 다른 행위자가 어떻게 인식을 하는지에 따라 행위자는 새로운 네트워크로 편입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번역을 잘하면 네트워크 건설이 순조롭게 진행되는데 번역을 잘못하면 행위자와 행위자가 기능적으로 골절이 생겨서 연결이 안 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이런 점에서 번역은 기존 행위자가 새로운 권력을 창출하는 정치적 행위입니다. 어떤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를 대신해서 말하거나 행동할 때 그 권위를 갖게 되는지 안 갖게 되는지는 정치적으로 협상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가서 어떤 결과를 맺는지에 따라 바람직한 행위자 네트워크가 형성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와 전혀 다른 네트워크에서 활동하는 행위자를 나의 행위자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설득하고 협상하면서 나의 파트너로 끌어들이는 과정이 번역입니다. 이런 점에서 번역은 한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를 자신이 통제하고 장악하고 있는 네트워크 안으로 포함시키고 귀속시키는 과정인 동시에 자신의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다른 네트워크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면서 이전에 없었던 질적 변화를 다각적으로 탐색하는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즉, 한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를 자신의 영향력 범위 내로 이끌어오기 위하여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과정입니다. “한 행위자의 이해나 의도를 다른 행위자의 언어로(즉 다른 행위자의 이해나 의도에 맞게) 치환하기 위한 프레임을 만드는 행위”(홍성욱, 2010, p.25)이기에 번역은 한순간에 끝나는 결과가 아니라 끝없이 계속 진행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명사가 아니라 동사”(홍성욱, 2010, p.25)입니다. 번역은 네트워크 상에서 행위자가 상호작용을 하는 계속하는 한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과정이다. 변역이 끝나는 순간 행위자도 행위자가 소속되어 있는 네트워크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번역은 문제제기관심 끌기, 등록하기동원하기 4단계로 이루어집니다


미셀 칼롱(Michel Callon)에 의하면 번역의 단계는 4가지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는 한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들을 정의하고 이들의 문제를 떠맡으며 기존의 네트워크를 교란시키는 ‘문제제기(problematization)’ 단계이다. 한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의 문제를 진단하고 기존 네트워크에 파란이나 교란을 일으키는 단계입니다. 평온했던 세상에 새로운 이슈를 제기하고 사람들한테 관심을 끌어 주목을 받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다른 행위자들을 기존의 네트워크에서 분리하고 이들의 관심을 끌면서 새로운 협상을 진행하는 ‘관심 끌기(interessement)’ 단계이다. 다른 행위자들을 기존 네트워크에서 분리시킴과 동시에 우리 네트워크에 가입하면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를 제시하고 관심을 끌면서 협상을 진행합니다. 기존 네트워크에서 벗어나 내가 소속된 네트워크에 가입해서  같이 한번 일해보자고 협상도 하고 관심을 끌어서 내 편으로 만들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다른 행위자들로 하여금 새롭게 주어진 역할을 맡게 하는 ‘등록하기(enrollment)’ 단계입니다. 관심을 끌어서 우리 네트워크로 넘어온 행위자들이 적극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특정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다른 행위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역할을 받아들이고 수행하도록 독려하는 단계입니다. 새로운 역할 부여는 행위자로 하여금 적극적인 관심과 책임감을 갖고 헌신적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사전에 조율하고 협상을 통해 결정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들을 대변하면서 자신의 네트워크로 포함시키는 ‘동원하기(mobilization)’ 단계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단순히 역할만 부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네트워크로 끌어들여 아군으로 합병하고 적극 활동하도록 장려하는 단계입니다. 새로 가입한 행위자지만 기존 행위자와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또 다른 행위자로 네트워크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조만간에 한국 지식생태학회 이런 걸 만들 거거든요. 사람들로 하여금 이제 생태학회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그래서 지식생태학회는 겨울에 지식동태학회로 바뀝니다. 뭐 이렇게 사람들한테 문제를 제기하고. 그다음에 생태계는 뭐냐. 생태계가 망가지면 여러분 생계도 위험해집니다. 여러분, 요즘에 코로나가 이렇게 위험해지고 있는 이유, 코로나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여러분이 생태계를 파괴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생계를 위협받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이제 문제를 제기하고 관심을 끌게 한 다음에, 사람들을 지식생태학회에 막 끌어들여가지고 등록을 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제 많은 전략을 수립하고 지식생태학회에 이제 우리 사회에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여서 등록을 하게. 그리고 이제 그 사람들로 하여금 역할을 부여하고 그래서 어떤 모종의 행동을 하게 해서 우리 사회를 바람직한 사회로 바꿀 수 있는 그런 어떤 학술적 학회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그다음에 우리의 삶을 생태학적으로 반성하고 각성하게 만들 수 있도록 그런 지식생태학회를 만드는 것도, 한 마디로 얘기하면 나 이외의 모든 사람, 다른 행위자. 이런 거 다 생태계의 행위자 네트워크라고 보시면 되고 그 사람들을 나의 편으로 끌어들여서 결국은 우리가 다 같이 공동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어떤 단체를 만드는 과정. 이런 게 다 이제 번역이라고 보시면 돼요.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translation’의 어떤 외국어를 모국어로. 모국어를 외국어로 번역하는 게 아니라고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번역은 부드럽고 평화로운 소통이 아니라 사고와 일탈을 근원적으로 동반하는 강렬한 충돌이자 접속이며 존재들의 생성과 확장의 다른 이름이다(김진택, 2012, p.15).



네트워크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는 결절은 존재 의미를 깨닫는 각성 사건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공기와 호흡하면서 행위자 네트워크에 살고 있는데 평상시에 공기에 대해서 의식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태가 블랙박스 상태입니다. 행위자 네트워크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어서, 외부에서는 네트워크의 실제를 볼 수 없고, 입력과 출력 기능으로만 인식되게 되는 상태가 바로 블랙박스 상태입니다. 아무런 문제 없이 네트워크가 움직이고 상호작용을 하다가 이전과 전혀 다른 상태에 놓이면 비로소 정상적인 상태에서 생활했던 경험이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킬리만자로 정상 등반을 하면서 5800m 정상에 오르는 동안 늘 머물던 지상에서 느끼지 못했던 산소 부족을 심각하게 느낍니다. 그때부터 호흡이 곤란해지고 정상적으로 작동하던 신체 특정 부위 기능에 문제가 생기면서  결절이 생깁니다. 평상시에는 전혀 느끼지 못하다가 산소가 부족한 고산 지대에 도착하면 갑자기 공기가 나한테 이렇게 소중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점을 뒤늦게 깨닫기 시작합니다. 


블랙박스 상태에서는 사람이 인식을 못하다가 사람이 고통을 경험하면서 특정 기능에 결절이 생길 때 아니면 네트워크에서 어떤 고장이 발생해서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을 때 비로소 사람은 그 행위자의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노트북으로 글을 쓰는데 평상시에는 노트북이 잘 작동할 때는 별 문제가 없이 씁니다. 이 상태가 바로 블랙박스인 상태로 노트북을 쓰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노트북에서 갑자기 어떤 기능이 고장 나거나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으면 노트북의 존재를 새롭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몸이 건강할 때 몸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걸어가다가 돌멩이를 잘못 발로 차 가지고 발톱이 빠진 경우를 상상해보세요. 그때서야 비로소 발톱의 아픔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면서 발톱이 발휘했던 독특한 기능과 역할을 생각합니다. 발톱이 아프기 전, 즉  인간의 신체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는 특별히 우리 몸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아도 정상적으로 저마다의 신체 기관이 기능적으로 작동하는 블랙박스 상태입니다.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가 행위자 네트워크 상에 문제가 발생하면서 결절이 생기면 비로소 정상적으로 돌아가던 행위자 네트워크의 어떤 특정한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사람들은 비로소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정상적으로 작동하던 행위자 네트워크에 어떤 문제가 생기는 거를 고장이나 결절이라고 합니다. 평상시에는 아무 문제없이 잘 돌아가던 시스템이나 네트워크가 갑자기 사람들한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결국은 고장이나 결절로 인해 평소 경험하지 못했던 낯선 현상에 직면하는 사건입니다. 결절은 평상시에는 모르고 지내던 다른 행위자의 존재 가치나 의미를 새롭게 깨닫는 소중한 계기입니다. 다른 각도에서 결절을 해석해보면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에 의존해서 자신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또 다른 행위자임을 깨닫는 각성 사건입니다. 평상시에는 사람들한테 아무런 관심과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갑자기 고장이 나서 시스템이나 네트워크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때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서 배경으로 소중한 역할을 했던 행위자의 소중한 존재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평상시에는 몰랐던 행위자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깨닫는 사건이 결절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려면 가끔씩 사고를 일으키면 나와 연결돼 있는 모든 행위자들한테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시스템이 질서 정연하게  돌아가서 그 존재 자체의 기능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블랙박스라고 했습니다. 블랙박스 상태에서는 저마다의 위치에서 행위자가 발휘하는 의미가 뭔지를 의식하지 못합니다. 숨어 있는 상태에서 저마다의 역할을 발휘하고 있는 행위자의 영향력을 분석하는 과정을 역 번역이라고 합니다. 본래는 부여된 역할대로 네트워크에서 작동하고 있을 때는 그것의 존재 이유와 의미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기 어렵습니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서 저마다의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행위자를 부각해 그것의 존재 의미를 다시 밝히는 과정이 바로 역 번역입니다. 역 번역을 하면 블랙박스가 갖고 있는 소중한 의미나 존재의 의의들이 사람들한테 새롭게 부각이 되고 그 존재가치가 세상에 알려집니다. 결국 역 번역은 아무런 주목을 끌지 못하는 상태에서 묵묵히 자기 위치에서 저마다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행위자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부각해 블랙박스화 된 네트워크를 역으로 성찰하는 과정입니다. 



네트워크는 우발적 마주침이 일어나는 하이브리드의 경연장입니다


ANT 이론의 교육적 의미와 시사점이 뭔지를 잠깐 얘기해 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교육은 이제까지 인간이 인간을 만나서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노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교육 시스템을 설계할 때 사람이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어떻게 바꿀지를 주로 고민했습니다. ANT에 비추어 미래 교육의 방향을 생각해보면 강의장에 있는 책상의 배치를 바꿔도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 있고, 교실 환경 속에 낯선 행위자를 새롭게 도입해도 비인간이 행위자가 인간 행위자한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행위자들이 이전과 다르게 행동을 하게 하려면 나와 맺는 관계 맺음 방식을 계속 바꾸는 교수-학습 전략을 구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행위자 네트워크는 지금 상태로 존재하는 명사가 아니라 계속 가변적으로 역할을 변신하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동사입니다. ANT에 비추어 보면 교육대상은 인간을 포함해서 다양한 비인간으로 확대하고, 이들 간의 역동적인 관계 맺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육에 참여하는 주체-비인간을 포함하여-행위자들 간의 관계 맺음은 고정적이지 않고, 가변적이고, 역동적입니다. 행위자 네트워크도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어제와 다른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하는 역동적인 행위자의 움직임을 구상합니다. 오늘과 다른 관계 속에서 다른 행위자 존재에게 이전과 다른 영향력을 주고받는 관계가 네트워크 속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번역의 과정이 바로 학습과정입니다. 



번역은 협상을 통해  행위자를 나의 편으로 끌어들여서 역할을 부여하고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창출하는 과정입니다. 행위자가 저마다의 위치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본분과 역할을 정상적으로 수행하는 상태가 지속되면 블랙박스 상태로 우리가 의식적으로 지각하지 못하는 상태로 바뀝니다. 이때 우리는 끊임없이 그 존재를 다시 드러내고 탐구하는 역 번역을 통해서 행위자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깨닫는 노력을 반복해야 합니다. 이게 바로 뭔가를 배우는 학습과 기존 지식을 잊어버리는 망각 학습 또는 폐기 학습(unlearning)이 선순환적으로 반복되는 과정입니다. 행위자를 새롭게 끌어들여 나의 편으로 만드는 번역은 물론 블랙박스를 역 번역하는 과정도 교육과정(敎育課程)에 반영할 때 중요한 시사점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ANT에 비추어 보면 지식은 네트워크를 통해 창조되며, 학습은 번역을 통해 네트워크를 건설하는 과정입니다. 


새로운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기존의 네트워크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지식이 획득되고, 학습이 일어납니다. 행위자 네트워크에서 일어나는 교육은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 됩니다. ANT는 전술한 바와 같이 과학과 기술, 주체와 객체, 원인과 결과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교육은 주체와 객체가 만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진화하고 발전하는 흐름입니다. 이런 과정을 자세하게 분석하는 기술(description)이 포화상태에 이르면 저절로 어떤 처방전(prescription)을 내릴지가 드러납니다. 기술 없는 처방도 처방 없는 기술도 무의미해집니다. ANT는 행위자 네트워크가 어떻게 만들어져서 안정화 단계까지 왔는지의 기술적(技術的) 변화 과정을 기술(記述)함으로써 비인간 행위자는 다른 행위자에게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처방해줄 수 있습니다. 자세한 기술 자체가 축적되어 포화 상태에 이르면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하는 처방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행위자 네트워크에서는 이질적 행위자들이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합니다. 행위자가 와 행위자가 맺는 관계와 다른 관계를 구분 짓는 경계를 넘나들며 이질적 행위자 간 부단한 잡종적 융복합을 통해 제3의 지식을 끊임없이 창조하는 하이브리드가 네트워크에서 일어납니다. 특히 ANT에서 행위자는 인간만이 행위자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인간 행위자는 물론 다른 행위자에게 영향력을 주고받는 모든 사물과 비인간도 행위자입니다. 행위자 네트워크에서 만나는 또 다른 행위자는 나와 전혀 다른 이질적 속성으로 전혀 다른 관심과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질적 행위자와 이질적 지식이 만나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의도된 결과뿐만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만남이나 마주침이 수시로 일어납니다. 우발적 마주침을 통한 잡종적 지식의 부단한 생산과 공유는 행위자 네트워크의 살아있는 지식창조 무대라는 걸 예시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질적 지식들이 융복합돼서 제3의 지식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위자 네트워크는 이질적 지식이 수시로 잡종 경연대회를 통해 어제와 다른 지식이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무대이자 학습의 장면입니다. 미래의 교육은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노력보다 한 사람의 행위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자 네트워크를 설계하고 실행하는 관계와 연대, 번역과 역 번역 과정에 관심을 기울여야 우리가 의도하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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