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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심장에 꽂아 의미심장하게 만드는 비결이 궁금한가

조지 레이코프(1941.5.24∼)의 체험적 은유법에서 배우다

상대방의 마음을 훔치고 싶다면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말고 은유적으로 설득해라!

     

의미를 심장에 꽂아 의미심장하게 만드는 비결

조지 레이코프(1941.5.24)의 체험적 은유법에서 배우다 

     


오늘 만나볼 철학자는 《몸의 철학》과 《삶으로서의 은유》 책을 조지 레이코프라는 사람입니다. 레이코프를 통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훔치는 설득의 비결을 체험적 은유를 통해 배워보려고 합니다. 레이코프의 몸의 철학적 기반과 통찰력은 신체성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려면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말고 체험적 은유법을 토대로 사람을 설득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은 설명해서 의미를 머리에 꽂는 사람이 아니라, 의미를 심장에 꽂아서 의미심장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점을 주장하려고 합니다. 세상을 움직이고 싶은가요?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말고 은유적으로 설득하라는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은유에 사용되는 단어를 체험해보지 않으면 사유는 그 순간 멈춥니다

     

조지 레이코프가 몸의 철학을 토대로 주장하는 메시지를 3가지로 정리하면 첫째, 인간의 인지는 대부분 무의식적이고 합니다. 둘째, 인간의 인식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신체와 체험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인식은 신체성과 연결돼있다는 주장입니다. 체험적으로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인식의 깊이나 넓이가 이전과 다르게 심화되거나 확산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망치라는 도구로 망치질을 안 해본 사람은 망치라는 단어를 관념적으로 배워도 잘 와 닿지 않습니다. 망치질해본 사람은 망치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자신이 해봤던 망치질 경험이 선명하게 이미지로 상상됩니다. 망치에 대한 인식은 망치질을 직접 해본 체험, 망치라는 개념이 몸으로 해본 체험과 연결되면서 쉽게 이해가 됩니다. 몸의 철학이 주장하는 세 번째 메시지는 우리 사고의 대부분은 은유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레이코프는 은유를 문장의 수사법 정도로만 치부하는 은유에 대한 전통적 사고를 비판합니다. 즉 은유가 시인이나 능변가의 전유물로써 언어의 일탈적 사용과 장식적인 수단이라고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은유관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은유가 결코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은유야말로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인지적 활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은유는 이전과 다르게 사고하는 지평을 열어주며, 언어를 다르게 사용하는 방식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은유를 바꿈으로써 사고를 넘어 행위도 바꾸는 정도로 연결됩니다. 레이코프에 따르면 은유야말로 사유의 기본이자 시작이며 끝입니다. 체험주의는 은유법을 사용해서 추상명사를 보통명사로 비유했을 때 이해가 안 가면 내가 체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독서는 피클이다’라는 은유법의 예를 들어보면 오이가 피클이 되는 과정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독서는 피클’이라는 은유가 체험적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든 은유적 사유는 결국 체험적 사유에서 시작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혹은 미늘’입니다. 이 은유법을 알려면 미늘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낚시로 물고기를 잡을 때 낚싯바늘 안쪽에 낚시 바늘과 반대방향으로 또 다른 낚시 바늘 모양을 하고 있는 게 미늘입니다. 물고기가 낚시 바늘에 걸려 문 다음 몸부림을 쳐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는 장치가 바로 미늘인 셈입니다. 미늘이라는 단어를 모르고 낚시질을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 ‘유혹은 미늘’이라는 은유법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모든 은유적 사유가 체험적이지 않으면 이해가 가지 않는 의미로 생각되거나 때로는 오해를 불러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물고기가 낚시 바늘에 걸려 문 다음 몸부림을 쳐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는 장치가 바로 미늘인 셈입니다. 낚시 ‘바늘’로 낚아채고, ‘미늘’로 빼도 박도 못하게 막는다는 의미가 함의되어 있습니다. 낚시 ‘바늘’이 치명적 유혹이라면 ‘미늘’은 유혹에 걸렸다가 정신을 차리고 돌아가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그런 노력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갈고리입니다. 레이코프의 체험주의는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를 모두 비판합니다. 즉 체험주의는 객관주의(합리)와 주관주의(비합리)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제3의 대안입니다. 객관주의는 실재와 정확히 합치하는 낱말을 사용하는 일종의 표상주의(representation)입니다. 예를 들면 소나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정확히 소나무에 해당하는 밖의 소나무와 정확히 일치하는 이미지로 머릿속에 저장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에 관한 전기 철학을 언어 그림이론이라 하는데 객관주의의 언어에 관한 표상주의적 입장과 일맥상통합니다. 이에 반해 체험주의는 진리는 오로지 대상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해서만 얻어진다는 주관주의도 배격합니다. 



은유를 바꾸면 사고방식은 물론 행동방식도 바뀝니다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분석해보면 은유법보다 직유법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아이돌이 부르는 노래에 은유법이 풍부하게 들어있는 가사를 경험해본 적이 있나요?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직설법을 사용해서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은유법으로 노래를 부르면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빨리 알려달라는 메시지가 빗발치지 않을까요? 자연도 삶도 본래는 곡선적 은유가 많았지만 사회가 변화되면서 곡선의 은유는 직선의 직유로 바뀌어 왔습니다. 즉 곡선의 사회가 직선의 사회로 바뀌면서 변화 속도가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사람의 심리도 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삶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사유를 잉태하고 있는 곡선의 은유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직선의 직유법으로 바뀌면서 말하는 의미를 바로 이해하는 속전속결의 원리를 지향하게 되었습니다. 구불구불한 산등성이가 터널이 뚫리고 직선 도로가 생기면서 빨리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적지에 보다 빠른 속도로 도착하면 그만 틈 여유를 갖고 깊이 사색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지만 그만큼 다시 빨리 뭔가를 하면서 속도전의 끝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점차 가속도만 내게 됩니다. KTX나 SRT 타고 부산 가서 부산하게 움직이다가 바로 또 올라와서 뭔가를 또 급하게 처리하는 일의 연속과 반복이 오늘도 예외는 아닙니다. 직유법이나 직설법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직격탄으로 전달합니다. 그 과정에서 상처가 생깁니다. 은유적 사유를 다시 복권해서 에둘러 말하는 여유와 은유 속에 담긴 사유의 씨앗이 잉태되는 시간을 기다려가면서 그 의미의 숙성과정을 통해 더욱 깊은 사색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레이코프에 따르면 은유는 우리가 세계를 지각하고 사유하는 다른 방식을 제공합니다. 내가 늘 사용하는 은유법을 바꾸면 부정적인 사고방식에서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바뀝니다. 예를 들면 결혼을 은유법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통해 결혼에 대한 사고방식이 어떻게 바뀌는지 바로 실험해볼 수 있습니다. 결혼은 무덤이라는 은유법으로 결혼의 의미를 정의한 사람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결혼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무덤 속에 살고 있으니까요.  결혼생활을 바꾸려면 결혼을 다르게 생각할 수 있도록 은유법을 바꾸면 됩니다. 결혼 뒤에 있는 무덤을 다른 긍정의 단어로 바꾸면 부정적인 결혼 생활이 긍정적인 결혼 생활로 바뀝니다. 예를 들면 결혼은 양파라는 은유법을 사용해서 결혼에 대한 의미부여 방식을 바꿉니다. 양파는 까도 까도 계속 새로운 게 나오지 않습니까. 결혼은 양파처럼 늘 새로움의 반복이 계속되면서 어제와 다름이 유지될 때 신혼처럼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도 생기지 않을까요. 이전과 다른 사유를 하고 싶은 사람은 늘 사용하던 비유를 다르게 바꿔야 합니다. 은유가 바뀌지 않으면 우리의 사유는 틀에 박힌 대로 움직입니다. 새로운 사유의 씨앗이 자라지 않습니다. 기존 방식대로 사유가 돌아가면서 사고방식 역시 관행을 답습할 뿐입니다. 비유가 바뀌지 않으면 사유는 어제 생각했던 방식을 답습할 뿐입니다. 우리의 사유는 언어 사용 방식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특정 개념을 사유하는 방식은 그 개념에 어떤 신념을 담아 나만의 방식으로 은유적 정의를 내리는지에 따라서 바뀌기 때문입니다.



와인(wine, 臥人)인은 누워 있는 여인(女人)입니다


인 비노 베리타스(In vino veritas!). 와인 속에 진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와인은 병 속에 담긴 시라고 합니다. 와인을 사전에 찾아보면 포도로 만든 서양술이라고 정의합니다. 와인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포도의 즙을 발효시켜 만든 서양 술”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결국 와인은 포도로 만든 서양술입니다. 와인에 대한 이런 정의를 읽고 감동받고 눈물 흘린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와인을 이런 식으로 정의하면 인간의 상상력은 여기서 그칩니다. 와인을 이전과 다르게 생각하는 인식의 지평을 열어가려면 와인을 다르게 정의해야 합니다. 와인을 다르게 정의하는 방법 중에 한 가지가 바로 은유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은유법은 겉으로 보기에는 닮지 않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닮은 점이 있음을 찾아내서 두 가지를 이전과 다른 관계로 연결시켜 색다른 상상력의 세계로 유도하는 수사학적 비유법입니다. 


‘와인은 여인’이라는 은유는 와인에 관한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로 유도하는 관문입니다. 와인바에 가면 와인을 왜 누워서 보관하는지에 대한 호기심을 품고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다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나의 체험적 느낌에 따라 생각해보았습니다. 와인은 보관할 때 누워서 보관하는 이유는 코르크가 건조하지 않고 적당히 젖은 상태를 유지해야 산소 침투를 막아서 와인 맛의 변질을 방지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하지만 호기심을 갖고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는 출발점은 관계없는 이질적 요소를 뒤섞거나 버무려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유를 시작합니다. 와인과 여인의 만남은 정상적인 시유로는 만날 수 없는 이질적 대상입니다. 누워 있는 와인을 보고 혹시 '와인'의 '와'가 누울 '와(臥)'가 아닐까라고 엉뚱한 발상을 시작한다면 놀라운 상상력이 발동되기 시작합니다. 와인과 여인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생각하면 생각지도 못한 닮은 점이 존재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바로 은유법의 위력입니다. 전혀 닮지 않은 것 같지만 파고들어가 생각해보면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이 발견되기 시작합니다. 


관계없었던 와인과 여인이지만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게 되고, 와인과 여인 사이에 존재했던 경계가 붕괴됩니다. 와인과 여인 사이에 상호 침투가 일어나 와인에 대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면서 포도로 만든 서양술이라는 생각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게 함으로써 와인에 대한 새로운 사유가 비약적으로 발전합니다. 이런 점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관계없다고 생각되는 두 가지 이상의 이질적 요소가 만날 때 생긴다는 점은 은유법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은유 역시 관계없는 이질적인 두 가지가 만나 관계있는 공통점을 찾아내는 사유이기 때문입니다. 비상하는 상상력은 논리의 세계가 고꾸라진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창의적인 사유는 당연한 일상에 의문의 물음표를 던져 시비를 거는 사람입니다. “은유의 본질은 한 종류의 사물을 다른 종류의 사물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이다.” M. 존슨과 조지 레이코프가 쓴 《삶으로서의 은유》에 나오는 말입니다. 


와인의 의미를 전혀 다른 여인에 비추어 상상력의 날개를 펼쳐보면 전혀 다른 연상이 시작됩니다. 전혀 다른 두 개의 이질적 대상이 하나로 융합되면서 관계없던 두 가지 사이에서 새로운 공통점이 발견되면서 색다른 사유의 씨앗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은유는 대상의 삼킴이다. 대상을 삼켜서 다른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라고 《은유의 힘》에서 주장한 장석주 시인의 말도 음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의성은 새로운 것들의 옛날식 조합과 옛날 것들의 새로운 조합을 통해 생겨난다”는 미국의 조직이론가, 칼 웨이크(Karl Weick)의 말이나 “아이디어란 ‘기존 요소들’의 ‘새로운 결합’이다”라고 생각하는 제임스 웹 영(James Web Young)의 말, 또는 창의성은 만날 것 같지 않은  이질적 요소의 충돌이나 갑작스러운 만남(Creativity comes from unlikely juxtapositions)”에서 유래한다고 말한 전 MIT Media Lab, 니콜라스 니그로폰테(Nicholas Negroponte) 소장의 말에는 모두 공통점이 있습니다. 



와인 속으로 여인이 스며들면서 와인은 전혀 다른 의미로 변신을 거듭합니다


와인과 여인의 첫 번째 공통점은 와인이나 여인은 모두 누워 있을 때 사람의 호기심을 끌어 댕긴다는 점입니다. 포도즙으로 만든 서양술로서의 와인은 호기심과 상상력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와인을 포도주라고 생각하고 거기서 더 이상의 호기심을 갖지 않으면 와인은 그저 식사 중에 마시는 술의 한 종류일 뿐입니다. 하지만 와인을 와인(臥人)으로 해석, 누워 있는 여인에 비유하면 와인은 여인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고 여인은 와인 입장이 되어 둘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상호 침투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와인은 여인 입장이 되어 여인과의 공통점을 찾게 되는 것이고 여인은 와인 입장이 되어 와인과의 닮을 점을 찾기 시작하면서 둘 사이는 아주 가까운 관계로 돌변하기 시작합니다. 와인은 여인을 삼키고 여인은 와인을 삼켜 역지사지 입장에서 서로를 비틀고 꼬아서 색다른 관계의 지평을 열어갑니다. 상상력의 출발은 연상입니다. 만날 것 같지 않은 이질적인 두 가지 대상을 연결시켜 경계를 무너뜨리고 상호 교감하면서 일어나는 새로운 만남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와인의 ‘와‘라는 글자를 누울 ’와(臥)로 해석해내기 위해서는 한자 ‘와(臥)’를 알아야 가능한 연상의 산물입니다. 한자 ‘와(臥)’가 누워 있다는 의미를 포착한 상태에서 관찰된 누워 있는 상태로 보관 중인 와인을 만나는 순간 연상작용이 갑자기 폭발하면서 이전에 없었던 와인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는 문이 열립니다. 이제 와인은 여인으로 변신해서 와인바에 누워 있는 와인은 더 이상 포도로 만든 서양술이 아닙니다. 와인 속으로 여인이 파고 들어간, 와인이 여인을 삼킨 상태로 변신하는 순간 와인은 새로운 의미로 탄생합니다.


둘째 와인과 여인의 공통점은 숙성과 성숙에 있다. 포도가 포도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속성보다 숙성의 기다림을 견뎌내야 합니다. 일정기간 숙성의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와인의 풍부한 맛이 생겨납니다. 성숙과 숙성의 기다림의 미학을 거치지 않고 성장과 속도로 목표 달성을 중시하는 패러다임에 젖어든다면 와인의 깊은 맛과 풍미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숙성은 기다림의 산물입니다. 기다림은 지름길을 택하지 않고 에둘러가 가는 우회도로를 택하는 은근함입니다. 어떤 기술로도 대체할 수 없는 숙성미는 오로지 시간 흐름을 몸으로 견뎌내면서 절치부심하는 가운데 익히고 삭혀내는 지루한 사투의 산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산전수전을 겪어가면서 우여곡절과 파란만장이라는 친구를 사귀면서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인간적 풍비를 더해갈 때 한 여자는 형언할 수 없는 인간미를 지닌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합니다. 성장을 넘어 성숙해지는 비결은 오로지 숙성밖에 없습니다. 숙성의 길을 포기하는 순간 졸속과 기교가 판을 치면서 가짜가 진짜처럼 행세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숙성은 격을 높여 품격을 낳습니다. 품격 높은 와인일수록 오랜 기간 숙성을 통해 포도가 잉태하고 있는 자연의 기운을 고스란히 안으로 품습니다. 그런 와인을 마실수록 그윽한 맛과 향이 진하게 드러납니다. 여인도 인고의 세월을 겪으며 자기만의 스타일로 거듭나면서 성숙한 여인일수록 함께 얘기할 수 있는 체험적 공감대가 깊어지고 인간적인 매력도 더해갑니다. 숙성된 와인과 성숙한 여인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기다림의 시간을 인고의 미덕으로 견뎌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셋째, 혹독한 조건에서 자란 포도로 담근 와인일수록 와인의 맛이 그윽하고 풍미도 더 깊습니다. 비옥한 땅에서 자란 포도보다 척박한 땅에서 자라면서 쌓이는 스트레스를 내성으로 전환하면서 사계절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가면서 소화시킨 포도나무는 우주와 자연의 기운을 내장한 포도를 과실로 만들어가는 성실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포도와 포도주는 우주와 자연의 위대한 합작품이자 심금을 울리는 교향곡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카리스마로 바꿔낸 코코 샤넬처럼 여인도 시련과 역경을 견뎌낸 여인일수록 그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자태와 아우라는 형언할 수 없습니다. 지금 즐기고 있는 풍경도 곤경이 낳은 자식이고, 내가 누리는 남다른 경력도 역경이 만들어준 소중한 선물입니다. 환경이 열악할수록 포도는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지만, 그 스트레스가 바로 포도의 당도로 연결되어 형언할 수 없는 독창적인 와인 맛을 내는 원동력입니다. ‘스트레스받은’에 해당하는 영어 ‘stressed’를 뒤집으면 놀랍게도 ‘디저트(desserts)’가 됩니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포도의 당도를 높여주는 보약인 셈입니다. 마찬가지로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여인일수록 베일에 싸인 신비의 마력과 형언할 수 없는 내공을 지닙니다. 모든 ‘아름다움’은 앓고 난 사람이 보여주는 ‘사람다움’에서 비롯됩니다. 깊은 맛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윽한 와인 맛에 빠지듯 세월의 내공으로 사람을 품어주는 여인의 매혹적인 인간미의 마력에 빠져들면 그 누구도 쉽게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넷째, 좋은 와인일수록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품격 높은 와인일수록 마시기 최소 몇 시간 전에 열어 놓고 공기 중에 산소와 접촉할 시간을 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와인은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병 속에 갇혀 있으면서 품고 있었던 깊은 맛이 겉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비교적 넓은 병에서 자유롭게 산소와 접촉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닫힌 공간에서 자신의 맛과 멋을 웅크린 채 오랜 시간을 보내다 갑자기 세상으로 열리는 순간, 대기와의 마주침을 통해 병 속의 와인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기 시작합니다.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마음이 닫히면 몸도 다칩니다. 와인이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마시기 전에 2-3시간을 산소와 접촉하는 디캔팅(decanting)을 하듯 여인도 오랜 기간 동안 정성을 들여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빗장 걸린 마음의 문을 열어줍니다. 급하다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설명하면서 옳은 이야기를 한다고 설득되지 않습니다. 인간적 신뢰감을 기본으로 진정성을 보여줄 때 마음을 열 준비를 합니다. 몸으로 겪은 체험적 스토리가 솔직 담백하게 전해지면서 한 사람의 인간적 됨됨이가 묻어 나오기 시작할 때 상대는 마음을 살짝 열고 자신의 마음속으로 상대의 진심이 스며들게 합니다. 밀폐된 병 속에 갇혀 있던 와인 사이로 대기의 기운이 스며들 때 비로소 와인이 마음을 여는 이치와 일맥상통합니다. 가장 말하기 좋은 시기는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 때입니다. 



다섯째, 좋은 와인과 아름다운 여인일수록 꼬달리(caudalie)가 오랫동안 유지됩니다. 꼬달리는 불어로 “와인을 삼키거나 뱉어낸 이후에도 계속되는 와인의 미각, 후각적 자극의 길이를 측정하는 단위”입니다. 한 마디로 꼬달리는 와인을 마시고 난 후에도 빈 잔에 남아있는 와인 특유의 잔향(殘香)입니다. 좋은 와인일수록 와인을 마시고 나도 그 진한 꼬달리가 빈 잔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와인을 다 마시고도 빈 잔을 돌리면 진한 향기가 진동합니다. 그만큼 좋은 와인은 겉으로 자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자연으로부터 받은 사계절의 기운을 안으로 품고 있다 은은하고 은근하게 드러냅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 향이 주변을 맴돌면서 와인의 잔향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병 주변을 맴돕니다. 꼬달리는 기계적으로 가공한 인위적 향기가 아니라 자연의 기운을 받아 오랫동안 대지에서 자라면서 받은 기운을 축적하면서 만들어낸 형언할 수 없는 향기입니다. 마찬가지로 매력적인 여인일수록 한 번 만났어도 그 여인의 이미지가 깊게 각인되면서 오랜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잠깐 만났지만 그 여인의 어투와 몸짓, 그리고 전반적으로 다가왔던 강렬하지만 은은한 독특한 칼라와 스타일뿐만 아니라 인간적 면모가 선명한 이미지로 오랫동안 뇌리에 남습니다. 얼굴에 담긴 미소와 표정의 변화는 곧 그 사람의 심장박동의 변화를 담아냅니다. “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의 심장이 올라와 있다.” 박용하 시인의 《견자》라는 시집에 나오는 ‘심장이 올라와 있다’는 시의 일부입니다. 표정이 흔들린다는 것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심장도 같이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옷차림과 외모는 물론 전반적인 모습에서 풍기는 한 여인의 뇌쇄적인 이미지는 그 사람을 만난 남자를 미지의 세계로 자꾸 데려가려는 상상력이 날개를 펼치게 만듭니다.     


여섯째, 좋은 와인일수록 감각적으로 남은 그 맛의 기억은 코와 입은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합니다. 기회가 되면 다시 마시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와인 마니아의 욕심입니다. 어떤 와인은 처음 마셔봤지만 그 맛과 향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입안을 가득 채우면서 목구멍을 타고 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듭니다. 스쳐 지나간 와인은 언젠가 또 인연이 될지 모르지만 스며든 와인은 깊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연인으로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여인일수록 다시 만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립니다. 첫 만남에서 받은 강한 인상은 묘한 매력을 풍기면서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꼬달리가 오랫동안 남는 와인일수록 그 향기가 가시기 전에 다시 마시고 싶은 충동을 자제할 수 없듯이 아름다운 여인일수록 보고 또 봐도 다시 보고 싶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와인이든 사람이든 매혹적인 모습에는 인간적 자제력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이 숨겨져 있습니다. 또 만나고 싶게 만드는 끌림의 원동력은 자기만의 독창적인 칼라로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기 위해 자기다움의 DNA를 뿌린 결과입니다. 즉 뿌림이 끌림을 낳습니다. 독창적인 칼라나 스타일에 끌리기 시작하면 이제 아예 쏠림현상이 발생합니다. 마음의 쏠림은 신체의 꼴림을 가져와 마음을 움직여서 몸이 가닿고 싶게 만드는 욕망을 자극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제 몸과 마음이 통제할 수 없는 속수무책의 상태가 될 때 완전히 넋이 나가는 홀림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일곱째, 동일한 와인과 여인일지라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는지에 따라서 다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와인의 종류와 빈티지가 같은 와인이라도 누구와 어디서 마시느냐에 따라 와인의 맛과 향은 천차만별(千差萬別)입니다. 포도나무가 자라는 땅과 기후조건, 매일 변하는 날씨와 환경이나 상황, 포도나무를 재배하는 사람의 정성과 포도 수확 방식 등 와인 맛을 다르게 만드는 조건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합니다. 심지어 동일한 시기에 동일한 땅에서 자란 포도나무라고 할지라도 전혀 다른 포도맛을 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포도로 담근 와인 맛은 당연히 천차만별의 선택권을 선물로 주지만 오히려 선택의 다양성은 결정 장애를 가져올 정도입니다. 이렇게 만든 와인은 또다시 누구와 어떤 상황에서 마시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을 냅니다. 동일한 와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날의 기분과 분위기에 따라서 혀끝에 감도는 미각과 콧속으로 다가오는 향은 다르게 와 닿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껏 만나온 여인이지만 언제 어디서 만나느냐에 따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같은 와인과 여인도 이럴진대 다른 와인과 여인은 탄생 배경과 제조과정에 따라서 칼라와 스타일이 다종 다양합니다. 저마다의 특성과 고유한 색깔을 지니고 있는 와인과 여인을 같은 와인과 여인이라는 범주로 일반화시키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그만큼 저마다의 고유한 칼라와 스타일로 만나는 사람에게 언제나 색다른 감흥과 자극을 주기 때문입니다.     


진부한 은유는 진부한 생각을 낳습니다


메타포는 배움의 대포입니다. 메타포를 잘 쓰는 사람들은 닮지 않은 것에서 닮은 걸 찾아내는 이 상상력의 촉발제가 은유법입니다. 은유적 상상력이야말로 창의성의 원동력입니다. 은유법은 “공부는 망치다”처럼 A는 B다의 형식을 취하는데 이때 B의 자리에 들어갈 말을 계속 바꾸면 그것에 상상력도 계속 변화되면서 변신을 거듭합니다. 은유적으로 표현하면 교수는 거지입니다. 은유법의 핵심은 겉으로 보기에는 닮지 않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닮은 점을 찾아내는 겁니다. 교수하고 거지는 겉으로 보기엔 닮지 않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닮은 점이 너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출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항상 뭔가 들고 다닙니다. 교수는 가방, 거지는 깡통을 들고 다니잖아요. 교수와 거지는 공통적으로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살아갑니다. 작년에 한 말 또 한다는 점과 수입이 일정하지 한다는 점도 공통점입니다.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항상 남한테 얻어먹고 산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은유법을 사용하면 관계가 없던  두 가지 이질적 대상 간에 새로운 관계가 발견됩니다. 교수와 거지, 공부와 망치, 결혼과 양파. 이런 것처럼 관계없던 양자 간에 새로운 관계가 발견됩니다. 관계가 발견되는 순간 두 가지 대상을 구분했던 경계가 무너집니다. 교수와 거지의 경계가 무너지고 결혼과 양파 사이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그다음에 두 가지 이질적 관계 사이에 상호 침투가 일어납니다. 교수가 거지 속으로 가고 거지가 교수 속으로 들어가면서 이종결합이 일어납니다. 이종결합으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면 없었던 새로운 의미가 형성되고 사유가 비약적으로 발전합니다. 비유를 잘 쓰면 우리의 막힌 사유도 새롭게 뚫어주는 어떤 치유라고 생각합니다. 은유는 한 마디로 이전과 다른 사유를 촉진하면서 좀처럼 뚫리지 않았던 막힌 사유도 뚫어주는 치유입니다. 


《진짜 두꺼비가 나오는 상상 속의 정원》이라는 책을 쓴 제임스 기어리(James Geary)에 따르면 우리의 은유는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결정합니다. 어떤 은유를 사용하는지에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결정합니다. 생각을 바꾸려면  은유법을 바꿔야 합니다. 틀에 박힌 은유를 사용하면 사고도 틀에 박힙니다. 예를 들어 ‘공부는 망치다’라는 은유법을 다른 은유법으로 바꾸는 순간 공부에 생각도 새롭게 시작됩니다. 공부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를 은유법을 사용하여 정의를 내리는 순간 공부는 전대미문의 새로운 의미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전혀 관계없던 것처럼 보이는 공부와 망치는 은유적으로 연결되면서 공부에 대한 전혀 정의로 재탄생됩니다. 공부에 대한 이전과 다르게 사유를 하려면 ‘공부는 망치다’에서 망치라는 말 대신에 다른 단어를 대입합니다. 공부는 거울이라는 은유법을 사용하면 망치에 비유했던 공부가 이제는 거울에 비유되는 공부로 새롭게 정의됩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거울에 비추어 부끄러워지는 이유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내가 아는 것이 전부인양 자기 과시에 몰두했던 자신을 반성하기 때문입니다. “진부한 은유는 진부한 생각을 낳는다. 뒤섞인 은유는 혼란을 낳는다. 그리고 은유는 쌍방향으로 흐른다. 무언가를 끌어들여서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는 건 둘 다를 조명하는 일일 수도 있지만 둘 다를 흐리는 일일 수도 있다”(193쪽). 율라 비스의 《면역에 관하여》에 나오는 말이다. 프롤로그에서 언급했던 장철문 시인의 “오월의 산빛은 비유의 바깥에 있다 “는 시 구절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늘 사용하던 비유를 반복해서 사용하면 사유도 그 틀 안에서 타성에 젖어들기 시작합니다. 이제껏 사용하지 않았던 비유와 전혀 다른 비유를 사용하지 않으면 사고도 늘 그 안에서 틀에 박힌 사유를 반복할 뿐입니다. 



비유는 막힌 사유를 뚫어주는 치유입니다


율라비스의 같은 책에 보면 면역에 관한 놀라운 은유가 나옵니다. “면역은 사적인 계좌인 동시에 공동의 신탁이다”(36쪽).  면역은 왜 사적인 계좌일까요? 내가 주사를 맞으면 내 몸이 건강해집니다. 개인적으로 통장에다 돈을 저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익이 생깁니다. 그런데 왜 면역이 공동의 신탁이라고 했을까요? 내 몸의 건강을 챙기는 노력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내 몸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의 건강을 위한 노력이기도 합니다. “내가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면 내 몸만 입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과 관계된 다른 사람의 몸도 같이 입원한다. 내 몸은 독립적이지 않으며, 의존적 관계망으로 연결된 더 큰 우주의 일부다”(127쪽). 유영만, 김예림의 《부자의 1원칙, 몸에 투자하라》에 나오는 말입니다. 운동의 개인차원의 몸을 돌보는 노력을 넘어 나와 연결된 수많은 관계와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건강을 책임지는 노력이기도 하다. 내가 운동을 하지 않으면 문제가 나 혼자에게만 영향이 오지 않고 내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의 건강까지 해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인간관계로 맺어지는 모든 사람의 건강이 결국 나의 건강과 직결된다는 인식은 운동을 개인차원을 넘어 공동체와의 연대 측면에서 건강을 더 수준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출발점이다. 내가 주사를 맞아야 되는 이유는 개인의 건강을 위해 사적으로 계좌에 가입함과 동시에 공동체의 건강을 위해서 신탁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율라 비스가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요리란 그 재료를 먹어 버림으로써 사라지게 하는 일, 음식을 먹는 이의 몸 안에 묻는 흥겨운 장례식이다.”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에 나오는 말입니다. 요리를 장례식에 비유한 메타포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한 가지 방법은 내가 사용하는 언어를 바꾸거나 기존 개념에 담긴 나의 신념을 바꿔서 재정의하는 것입니다. 은유는 기존 개념을 재정의해서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들어줍니다.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하기보다 “스스로 비유를 만들 수 있는 것만이 나의 앎이고, 내가 아는 것만이 나의 삶이에요. 남이 만든 비유를 사용하는 건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것과 같아요.” 이성복의 《무한화서》에 나오는 말입니다. 남이 만든 비유를 반복해서 사용한다는 의미는 남의 생각에 세 들어 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만의 독창적인 사유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남들이 사용하는 비유를 그대로 사용하는 수준을 넘어서 나만의 독창적인 은유를 개발해야 합니다. ‘비유’는 막힌 ‘사유’를 뚫어주는 ‘치유’입니다. 남과 비교하는 데 일생을 낭비하다 비참해지지 말고 나만의 독창적인 비유를 개발해서 비전을 추구해야 합니다. 내가 고민하는 화두를 풀어내는 비유를 개발할수록 놀라운 상상력은 발동되고 미지의 세계로 다가가는 거리는 좁아집니다.


“숙고하는 것이 손전등이라면 행동하는 것은 전조등이다. 행동의 빛은 보이지 않는 세상을 훨씬 더 멀리까지 비춘다. 그러므로 흥미롭고 새로운 장소로 나아가려면 고민의 손전등을 꺼야 한다” (270쪽). 롤프 도벨리의 《불행 피하기 기술》에 나오는 말입니다. 앉아서 생각하면 아까운 데 밖에 비출 수 없는 손전등에 불과하지만, 나가서 행동하니까 정말 놀라운 사유가 저 멀리까지 비출 수 있는 전조등처럼 떠오른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은유법을 설명해주면 어떤 사람은 전조등이 뭐냐고 물어봅니다. 은유법으로 다른 사유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은유에 동원되는 다양한 어휘를 알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은유법을 쓸 때 조건이 있습니다. 첫 번째, 풍부한 개념이 필요합니다. 개념이 없으면 은유적 사유를 넓힐 수가 없습니다. 앞에서 예를 들었던 바늘과 미늘처럼 은유에 차용되는 다양한 개념적 의미를 모를 경우 은유를 오히려 사유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둘째 사용하는 개념의 사회적 의미에 대한 정치적 합의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내 마음은 호수’라는 은유법에 사용된 호수는 오염되지 않는 맑은 호수라는 암묵적 합의가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자연환경 파괴로 인해 대부분의 호수가 오염되었다고 가정할 때 내 마음은 호수라는 은유는 더 이상 통용될 수 없습니다.



양식에 호소하면 외면하고 상식을 어루만져주면 다가옵니다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과 아이디어가 별로 없는 사람의 결정적 차이가 뭘까요?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은 아이디어의 재료가 풍부한 사람입니다. 아이디어의 재료는 직간접적인 경험의 총합입니다. 아이디어의 전제조건은 재료가 풍부한 사람입니다. 전문용어로 참고문헌(references)이 두꺼운 사람을 교양이 두꺼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교양이 두꺼운 사람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 창의성의 재료 창고에 들어가서 이질적인 두 가지 이상의 재료를 연결시킬 경우의 수가 많습니다. 아이디어는 결국 익숙한 것을 낯설게 조합하는 가운데 탄생됩니다. 그렇다면 창의성(creativity)이라는 무엇인가요? 창의적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 남과 다르게 색다른 조합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MIT 미디어랩에 마빈 민스키 박사에 따르면 창의성이란 “흔한 것의 흔치 않은 결합”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지식산부인과 의사라는 브랜드 네임을 갖고 있습니다. 지식이라는 개념과 산부인과 의사라는 개념은 우리가 접하는 흔한 개념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는 흔한 개념을 지식산부인과 의사라는 직함으로 세계 최초로 흔치 않게 결합했습니다. 그때부터 지식 임신이나 지식자연분만 유도법 또는 지식 낙태수술 방지법을 연구할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서 제가 유일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됩니다. 결국 창의성의 문제도 이질적인 두 가지 이상을 남다르게 엮어내는 과정에서 발현되는 능력입니다. 이번 장의 주제인 메타포, 은유법 역시 아이디어나 창의성과 마찬가지로 이질적인 대상 두 가지를 연결시켜 새로운 사유를 잉태하는 비유법입니다. 관계없다고 생각되는 두 가지 이상을 연결시켜 닮은 점을 찾아내는 은유법 역시 아이디어나 창의성과 공통점이 많습니다. 아이디어, 창의성, 은유법 모두 두 가지 이상을 이전과 다르게 연결시키는 사유의 방법입니다. 메타포를 잘 쓰는 사람이 결국 아이디어가 풍부한 사람이고 그리고 창의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창의적인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이 은유법을 잘 쓰고 아이디어가 풍부해지려면 첫 번째 전제조건은 두 가지 이상을 연결시켜 새로운 사유를 잉태할 재료가 풍부해야 됩니다. 그 재료가 바로 직간접적인 경험입니다.


은유법을 적재적소에 잘 사용하는 사람은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설득하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애플의 고 스티브 잡스와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가 모두 대학 졸업식에 가서 축사 연설을 했습니다. 누구 연설이 더 재미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까요? 스티브 잡스는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사건 속에 담긴 사연과 사고(事故)로 바뀐 사고(思考)를 솔직 담백하게 선동가 스타일로 청중의 심장을 파고듭니다. 그런데 빌 게이츠는 옳은 얘긴데 재미가 없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선동하는 데 비해서 빌 게이츠는 논리적으로 설명하면서 선전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누구나 쉽게 아는 상식으로 청중의 마음을 어루만져줍니다. 생각대로 되지 않았던 일을 솔직히 고백하고 자신의 아픈 부위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그 속에서 본인이 몸으로 깨달은 이야기를 감성적으로 설득합니다. 의미가 심장에 꽂히는 이유입니다. 이에 비해 빌 게이츠는 양식에 호소합니다. 모험생 스타일인 스티브 잡스에 비해 모범생인 빌 게이츠는 만인이 아는 양식에 호소하면서 계몽하고 권장하며 추천합니다. 양식에 호소하면 추천도서로 서가에 꽂히고 상식을 잘 어루만져주면 베스트셀러로 매대 위에 누워있다는 《세상 물정의 사회학》을 쓴 사회학자 노명우 교수의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스티브 잡스는 의미가 심장에 꽂히는 의미심장 감동적인 연설을 하는데 비해서, 빌 게이츠도 다 맞는 얘긴데 의미가 심장에 꽂히지 않고 자꾸 머리에 꽂히는 설교 스타일의 연설을 합니다. 스티브 잡스의 연설이 빌 게이츠 연설에 비해 설득력을 지니는 이유는 체험적 은유법을 사용해서 청중의 심장에 호소하기 때문입니다.




전공서적은 어려운 책이고 교양은 쉬운 책입니까?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사람이나 일반 대중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창의적인 발상을 일상적으로 하는 사람들, 일상적인 상식을 파괴하고 익숙한 관습을 타파하며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을 아이코노클라스스트(iconoclast) 또는 《상식 파괴자》라고 합니다. 상식 파괴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사물을 보는데 익숙해져 있지만, 대중은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사물을 봅니다. 《상식 파괴자》를 쓴 그레고리 번스에 따르면 우상이 된 상식 파괴자들은 자신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상대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전달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세상을 움직이는 상식 파괴자가 되려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물이나 현상을 색다르게 볼 수 있는 혁신적인 눈을 갖고 있어야 될 뿐만 아니라 상식 파괴자가 아닌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익숙하고 평범한 방식으로 설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반 고흐는 땡전 한 푼 없이 외롭게 죽었지만, 피카소는 엄청난 재력가였을 뿐만 아니라 젊은 여자와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산 비결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레고리 번스에 따르면 상식 파괴자가 마침내 성공을 거두느냐 실패자가 되느냐는 그가 지닌 사회적 지능의 두 측면, 즉 익숙함과 평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피카소가 다양한 사회 집단 사이를 부드럽게 순항하는 동안, 반 고흐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조차 고역스러워했습니다. 둘 다 자신의 그림에 대해 야유를 받았고, 심각한 저항에 부딪혔으며, 세상 사람들이 이해해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초기 저항에 대해 반 고흐는 외롭게 골방에서 고민했고, 피카소는 세상으로 뛰어나가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피카소는 독창적인 그림 아이디어를 독창적인 못한 평범한 사람들에게 쉬운 설득을 통해 다가선 것입니다. 난해한 그림을 대중이 이해하기 쉽도록 방대한 사회적 네트워크를 구축한 피카소와 대중과 소통하지 않고 외로운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반 고흐의 차이는 결국 소통을 통한 설득력의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이디어는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고 해도 세상에 노출되지 않으면 묻히고 맙니다. 아이디어는 세상 사람들의 심한 저주와 비난을 받고 살아남은 아이디어라야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반 고흐 식의 독창성은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사후에나 유명해질 수 있습니다. 피카소처럼 과감하게 자신의 그림을 세상에 노출시키고 그들의 거침없는 비난과 질책을 인내심을 갖고 들어주면서 난국을 돌파할 아이디어를 구상해야 합니다.  



공부를 어느 정도 한 사람은 다 알만한 독일의 정치학자이자 경제학자이면서 사회학자로 알려진 막스 베버(Max Weber), 그가 쓴 고전 중의 고전, 《경제와 사회》라는 굉장히 난해한 책이 있습니다. 막스 베버 추종자나 몇몇 학술연구자 또는 전문가만이 읽어낼 수 있는 책입니다. 저도 읽다가 너무 난해해서 몇 번 읽기를 시도하다 포기한 적이 있습니다. 학자들에게는 닮고 싶은 모델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름조차 모르는 막스 베버. 그는 합리성이 오히려 비합리성을 낳는 자본주의적 모순을 논리적으로 파헤친 역저를 남겼지만 전문가의 세계를 넘어 비전문가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학문적 논의로 가득 차 있는 고전적 추천도서로 남아 있습니다. 공부를 한 사람도 잘 모르지만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진 미국 메릴랜드 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조지 리처(George Ritzer). 그가 쓴 대중서적,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도화(The McDonaldization of Society)》는 막스 베버가 지적한 합리성의 비합리성을 맥도날드의 세계화 표준화 전략을 합리성의 이름으로 구체적이면서도 쉽게 분석한 대중 서적을 썼습니다. 학자의 세계에서 외면받을 수 있는 조지 리처는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한 몸에 누렸습니다. 


저도 막스 베버의 학문적 전통에 부합하는 전공서적처럼 《교육공학의 학문적 지평 확대와 깊이의 심화(2탄)》라는 난해한 전공서적을 쓴 적이 있습니다. 같은 분야의 전공 교수나 연구자들에게도 다가가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인문사회과학적 이론과 간학문적 융합을 시도했던 책입니다. 한편 진로 선택을 고민하는 중고등학교 학생이나 진로 지도에 관심을 두고 있는 학부모나 선생님 대상으로 교육공학을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MT 교육공학》이라는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한양대 교육공학과에 입학하는 학부생과 대학원생이 많습니다. 똑같은 전공 책이지만 한 권은 소수의 전문가만이 볼 수 있는 난해한 책이고 다른 책은 전공에 관계없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쓴 전공 교양서적입니다. 전자의 책은 주로 논리적 설명을 중심으로 학자들의 다양한 이론적 관점을 비교하고 설명하며 양식에 호소하는 데 역점을 둔 난해한 책이라면 후자의 책은 체험적 깨달음을 근간으로 일상에 접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를 근간으로 설득하면서 상식을 어루만져 주는데 중점을 둔 쉬운 책입니다. 전자가 막스 베버 입장이라면 후자가 조지 리처 입장과 일맥상통합니다. 



물건을 훔치면 범인이지만 마음을 훔치면 연인이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 따르면 인간적 신뢰감에 해당하는 에토스와 감성적 설득력에 해당하는 파토스, 그리고 논리적 설명력에 해당하는 로고스가 각각 6:3:1의 비중으로 작용합니다. 메시지의 힘은 메신저의 신뢰에서 비롯됩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자 삶을 드러내는 증표입니다. 말을 바꾸기 위해서는 살아가는 삶을 바꿔야 합니다. 말은 한 사람의 정신을 담고 있는 매개체입니다. 특히 강사에게 강연은 삶을 이야기하는 공연입니다. 사실적 메시지를 임팩트 있는 이미지와 융합, 인간적 신뢰감(에토스), 감성적 설득력(파토스)으로 청중에게 호소하고 논리적 구속력(로고스)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화룡점정을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득의 3요소는 만고불변이 진리입니다. 에토스는 그 사람의 품성이나 품격에서 나오는 인간적 신뢰감으로 사람을 설득하는 데 60%를 좌우합니다. 파토스는 청중의 가슴을 파고드는 감성적 호소력이며 30%의 설득력을 차지합니다. 마지막으로 로고스는 객관적 사실이나 이론적 근거를 갖고 설명하는 논리적 구속력에 해당하며 청중 설득력의 10%를 좌우합니다. 에토스는 그 사람의 체험적 통찰력에 비추어 생기는 인간적 신뢰감입니다. 체험의 깊이와 넓이를 부단히 심화․확산시키는 공부를 계속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파토스가 있어야 에토스의 효력이 발휘되며 파토스와 에토스는 로고스의 도움을 받아 비로소 완성됩니다. 파토스는 몸이고 에토스는 심장이며 로고스는 머리에서 나옵니다. 체험적 통찰력으로 생기는 에토스와 감성적 설득력으로 생기는 파토스, 그리고 논리적 설명력으로 생기는 로고스는 우리가 공부를 통해서 평생 갈고닦아야 될 영원한 숙제입니다. 



로버트 그린의 《유혹의 기술》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유혹의 달인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유혹 전략을 강연을 할 때 적용하면 색다른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새로운 지식의 창조는 익숙한 정보를 나의 문제의식이나 목적의식에 맞게 재편집하고 가공함으로써 탄생됩니다. 한국 사람들이 명절이면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서 즐겨하는 고스톱 게임의 오광 전략에 비유해서 강연으로 청중을 유혹하는 전략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여기서 유혹은 청중은 마음을 뒤흔들어 감동은 물론 진한 여운을 남겨 자신의 삶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행위를 지칭합니다. 섬광 발광, 열광, 각광, 후광에 고스톱의 오광 이미지를 뒤섞어 청중의 마음을 유혹하는 강연의 오광 전략이라는 지식을 창조합니다.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한 가지 방법입니다. 강연의 첫 번째 단계는 섬광(閃光) 단계입니다. 오광으로 따지면 삼광에 해당된다. 관심을 유발하고 욕망을 자극해서 청중으로 하여금 두근거리게 만드는 단계입니다. 섬광은 순간적으로 다가오는 강렬한 찰나(刹那)의 빛입니다. 그러나 마음속을 파고들어 잠재되어 있는 호기심과 궁금증을 유발해서 지속적인 주의집중을 유도함으로써 강연에 빠져들게 만드는 출발 전략입니다. 강의를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바로 내가 평소에 궁금했던 내용이며 뭔지는 모르겠지만 평소에 내가 갈망하는 주제이면서 동시에 쉽게 해답의 정체를 찾을 수 없었던 내용이라는 점을 강한 섬광으로 암시하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섬광의 빛이 가시기 전에 발광(發狂)하게 만드는 단계입니다. 발광에 적합한 오광은 팔광입니다. 발광과 팔광은 발음이 비슷하다는 공통점 이외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습니다. 한껏 부풀어 오른 관심이 일순간에 사라지기 전에 환상을 심어주고 기대감을 자극함으로써 도저히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전략입니다. 청중이 두근거림의 단계를 지나 빠져들게 하려면 콘텐츠의 의미가 심장에 꽂혀서 의미심장해야 됨은 물론 재미가 추가되어서 한 번 빠지면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들어야 합니다. 문제는 발광이 갖고 있는 한 가지 단점에 있습니다. 발광은 청중의 열기가 식거나 내용에 대한 몰입도가 떨어지면 순식간에 뜨거운 열기가 냉기로 전환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발광하는 청중을 열광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열광(熱狂)입니다. 오광에 일광이 열광과 발음이 비슷합니다. 발광으로 빠져든 청중의 애간장을 태우고 긴박감을 조성해서 후끈 달아오르게 만드는 단계입니다. 다양한 메타포를 활용하여 쉽게 공감하면서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에피소드나 유머를 활용하여 적재적소에 구사함으로써 발광의 열기가 식기 전에 다시 열광하게 만드는 전략입니다. 발광해서 빠져들게 만들었다면 열광시켜서 더 이상 빼도 박도 못하게 강력한 싸운드 임팩트 메시지를 심어야 합니다.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의미심장한 재미가 있으면서도 삶의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메시지가 전달되어야 합니다.


네 번째 단계는 각광(脚光)입니다. 각광은 오광 중에 똥광과 어울립니다. 최후의 일격을 가하면서도 진한 여운을 남겨 안달 나게 만드는 단계입니다. 안달은 주로 속이 타면서 조급해질 때 일어납니다. 열광으로 달아오른 청중의 마음에 잊을 수 없는 강한 이미지를 심어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의 오른 강사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단계입니다. 각광받는 강사는 하나의 메시지 속에서도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융복합시켜 삶을 관통하는 철학적이면서도 동시에 구체적인 삶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각광은 발광과 열광과는 다르게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각광받는 강사로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는 독창적인 콘텐츠 개발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후광(後光)입니다. 후광에 해당하는 오광은 비광입니다. 후광은 각광받고 있는 강사가 떠난 자리에도 여전히 그 강연의 메아리가 들려주는 아우라가 남아 있어서 앙코르를 청하고 싶은 강한 아쉬움이 감돌 때 나타납니다. 그러나 강사는 이미 떠나고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강연 내용과 강사가 그리움에 사무치는 단계입니다. 후광 단계에서 청중은 강연에 몰입되어 감동을 받은 나머지 감탄사를 끊임없이 연발하게 됩니다. 감동적인 공연은 오랫동안 공연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남아 있듯이 강동적인 강연도 마찬가지로 강연이 주는 이미지와 함께 메시지의 영향력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강연입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은 논리적으로 설명해서 머리를 공략하는 사람이 아니라 감성적으로 설득해서 심장을 공격하는 사람입니다. 머리를 공략하는 사람들의 중요한 특징은 자기 체험이 없다는 점입니다. 설명을 계속한다는 얘기는 자기가 체험한 게 거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설득해서 심장을 공략하는 사람은 자기 체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조지 레이코프 방식으로 말하면 체험적 은유법을 사용해서 청중의 마음을 훔친다는 이야기입니다. 체험적 은유법을 사용해서 설득하면 재미있고 의미가 더불어 따라옵니다. 재미없는 의미는 견딜 수 없는 답답함이고, 의미 없는 재미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재미와 의미의 토끼를 두 마리를 다 잡을 수 있을까요? 물건을 훔치면 범인이지만 마음을 훔치면 애인이 됩니다. 스치면 인연이지만 스미면 연인이 됩니다. 한 글자 차이지만 스치는 것과 스미는 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오늘 강의의 핵심은 내가 사용하는 은유법을 바꾸면 거기에 상응하는 사유도 바뀌고 행동도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은유는 체험적 은유입니다. 그래야 공감대가 형성되고 쉽게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고 감동의 연대가 형성됩니다. 체험적 은유법을 구사해서 사유의 지평과 깊이를 열어가고 추구하려면 풍부한 어휘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누구나 접하는 일상 언어지만 거기에 담긴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바로 사유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원동력입니다. 은유법을 풍부하게 사용하려면 어휘력이 풍부해야 되고 그 어휘와 관련된 체험의 반경과 깊이가 넓고 깊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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