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우물 파다가 그 우물에 매몰되지 않는 비결, 데리다의 차연에서 배우다
색다른 전문가가 되고 싶은가?
전문가와 전문가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에 주목하라!
한 우물 파다가 매몰되지 않고 다른 우물을 만나는 비결,
자크 데리다(1930.7.15.∼2004.10.9.)의 차연(differAnce)에서 배우다
깊이 파되 넓게 파야 기피 대상이 되지 않는다
지금 우리 사회를 지칭하는 위기 중에 전문가의 위기라는 화두가 있습니다. 전문가는 많아짐에도 불구하고 전문적인 식견과 안목을 갖고 대중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절름발이 전문가가 대량 양산되는 사회의 위기입니다. 이런 위기의 시대에 진정한 전문가가 갖추어야 될 자격이나 자질, 역량이나 능력, 또는 덕목이나 미덕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전문가와 색다른 전문가가 되고 싶은가요? 이런 질문에 어떤 대답이 필요할까요? 깊이를 추구하는 전통적인 전문가(specialist)상에서 벗어나는, 즉 깊이만 파면 기피 대상이 되는 전문가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전문가가 깊이가 너무 없어도 기피 대상이 됩니다. 그만큼 전문가가 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옛날에는 한 우물만 파면 전문가가 됐었는데 이제 한 우물 파다가 내가 판 우물에 매몰돼버리고 다른 우물을 파는 사람과 소통이 안 되는 전문가의 위기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전문가가 겪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 가지 방안으로 오늘은 철학자 데리다가 만든 개념 중에 디페랑스(differance)라는 단어에 비추어 진정한 전문가상을 만나보려고 합니다. 디페랑스(differance)는 영어의 디퍼런스(difference)라는 단어의 ‘e’를 ‘a’로 바꾸어서 조어한 개념입니다. 영어의 차이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새로운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이 말에는 영어의 차이를 시간, 공간적으로 연기시켜 개념적 차이를 끊임없이 더 생각해보자는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모든 경계에 꽃이 핍니다
데리다의 차연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흔적(trace)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눈 위를 걸어가면 발자국을 남기고 자동차가 지나가면 바퀴 자국이 남습니다. 발자국이나 바퀴 자국이 바로 데리다 말하는 흔적입니다. 발자국이나 바퀴 자국이 남긴 흔적은 사람이나 자동차가 지나갔다는 표시이지만 그 흔적을 남긴 사람이나 자동차는 없습니다. 누군가 밥은 먹은 흔적도 마찬가지입니다. 빈 그릇에 남긴 밥 먹은 흔적은 분명히 남아 있지만 밥을 먹은 사람은 지금 여기 없습니다. 흔적을 남긴 사람이나 자동차는 이미 지나가고 현재는 없습니다. 흔적을 남긴 사람이나 자동차는 분명히 현재는 없습니다. 하지만 흔적을 남긴 사람이나 자동차는 과거에 지나갔다는 사실입니다. 흔적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표시이기 때문에 현전(現前)(현재 있음, presence)은 아닙니다. 그런데 분명히 과거에 남긴 표시이기 때문에 그것이 지금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부재, absence)고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 중간적인 존재가 바로 흔적입니다. 데리다는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흔적의 이러한 모호성을 ‘비확정성’(undecidable)이라고 말합니다. 현전과 부재의 사이와 경계에 걸쳐 존재하는 애매한 차이의 사유가 바로 데리다가 강조하는 ‘비확정성’과 ‘경계의 사유’에 해당합니다. 언어는 그 자체만으로 의미를 확정할 수 없습니다.
함민복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보면 “모든 경계에 꽃이 핀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경계에 꽃이 피려면 경계와 경계 사이에 에너지의 흐름이 이 있어야 하고 활발한 소통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앞으로의 전문가가 추구해야 될 바람직한 방향은 학문 사이에 철옹성처럼 쌓아놓은 높은 전공의 벽과 담을 무너뜨리고 선명한 학문적 경계선을 불투명하게 하거나 모호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야 학문적 소통이 이루어지고 이질적 분야에 근무하는 전문가 사이에 공감이 가능해집니다. 학문과 학문 사이에 이동의 상상력이 발휘되고, 학문 간 이종결합이 자유자재로 이 루어져야 창조의 열매가 열립니다. 미래의 전문가(specialist)는 자기 분야 한 가지에 대한 깊이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공에 대한 깊이는 물론 동시에 인접 유관 분야에 대한 넓이를 동시에 추구하는 ‘스페셜 제너널리스트(Special Generalist)’나 ‘제너널 스페셜리스트(General Specialist)’입니다. 깊이 없는 넓이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며, 넓이 없는 깊이는 견딜 수 없는 답답함입니다. 깊이가 전제된 넓이라야 의미심장합니다. 넓게 파기 시작해야 종국에는 깊이 팔 수 있습니다. 전혀 다른 이질적 분야를 넘나들며 자기 지식을 창조하는 전문가라야 진정한 전문가로 대접받습니다.
경계를 ‘건너감’은 또 다른 사유와 만나는 ‘넘어섬’입니다
이런 전형적인 예를 맹그로브 나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맹그로브라는 나무는 식물 중 유일한 태생종으로 나뭇가지의 가장자리에 생긴 새끼 나무가 바닷물에 떨어져서 번식하는 특이한 나무입니다. 줄기와 뿌리에서 많은 호흡근이 내리고, 열매는 바닷물로 운반되지만 어떤 종은 나무에서 싹이 터서 50∼60cm 자란 다음 떨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맹그로브 나무가 다른 나무와 다른 가장 큰 특징은 뿌리의 일부가 땅 위로 올라와 있다는 점입니다. 맹그로브 나무는 뿌리를 통해 산소호흡을 하기 때문에 항상 뿌리의 일부가 문어다리 모양으로 수면 위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염해와 냉해처럼 염분은 식물에게 치명적입니다. 그런데 맹그로브는 특수한 뿌리 구조로 인해 염분에 견디는 나무입니다. 맹그로브 나무는 갯벌에서 자라기 때문에 몸에 축척된 소금기를 빼내는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맹그로브의 또 다른 뿌리는 옆으로 퍼져 나가면서 다른 보조물을 붙잡고 맹그로브가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역할을 하는 뿌리입니다. 맹그로브 나무가 열악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늠름하게 잘 자라는 비결은 바로 평범하지 않는 맹그로브 나무의 뿌리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올림푸스 12 신중에 ‘헤르메스(hermes)’라는 신이 있습니다. 헤르메스라는 낱말의 어원인 헤르마(herma)는 ‘경계석․경계점’을 뜻합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헤르메스’는 "건너서 넘어감"이라는 개념이 구체화된 신이었습니다. 헤르메스는 교환․전송․위반․초월․전이․운송․횡단 등과 같은 활동과 관련되는데 이 모든 활동에는 어떤 종류의 ‘건너감’이 들어 있습니다. 건너감은 여기서 저기로 넘어섬이기도 합니다. 건너사고 넘어서야 새로운 사유와 만납니다. 이런 이유로 헤르메스는 신들의 뜻을 전하는 전령사나 메신저일 뿐만 아니라 재화나 상품의 교환, 의미와 정보의 전달 등을 돕는 신입니다(참고: 위키백과사전). 미래의 전문가는 헤르메스처럼 전문가와 전문가 사이를 오가며 두 세계를 이어주는 존재여야 합니다. 맹그로브 나무는 육지와 바다 사이의 경계에 서식하면서 육상과 수상의 경계를 잇는 아름다운 숲을 이룹니다. 맹그로브 나무는 헤르마처럼 육상을 수상으로 수상을 육상으로 잇는 다리 역할을 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비옥하고 생물학적으로 가장 복잡한 숲 생태계를 형성합니다. 하늘을 나는 새들은 맹그로브 꼭대기에 둥지를 틀고, 새우, 게, 진흙 랍스터, 각종 갑각류와 연체류 같은 해양 생물이 살아가는 장이고, 뱀과 악어 등과 같은 파충류는 맹그로브 숲에서 사냥을 합니다. 이처럼 맹그로브 숲은 물고기의 산란장이며, 새들의 놀이터이자, 박쥐와 꿀벌이 맹그로브 나무 꽃에서 꿀을 얻는 공급원임과 동시에 원숭이와 사슴, 캥거루 등과 같은 포유류의 먹이 사냥터입니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셀리(P.B. Shelley)의 ‘사랑의 철학’이라는 시도 경계와 경계 사이에 존재하는 이질적 사물과 사람이 섞여서 하나가 되는 과정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경계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아니라 넘어서서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아름다운 ‘사이’입니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사물과 사람이 뒤섞이면서 아름다운 차이가 발생합니다.
샘물은 강물과 하나 되고
강물은 바다와 하나 되며
하늘의 바람은 끊임없이
다정한 정으로 뒤섞인다
세상에 홀로인 것 없으니
만물이 신의 섭리 따라
한 마음으로 만나 섞이기 마련이라
내가 왜 그대와 섞이지 못하랴
보라! 산이 높은 하늘과 입 맞추고
파도가 서로를 껴안는다
누이 꽃이 아우 꽃을 경멸하면
누이 꽃은 용서받지 못하리라
햇빛이 대지를 얼싸안고
달빛은 바다와 입 맞춘다
하지만, 달콤한 이 모든 것
무슨 소용 있으랴
그대 내게 입 맞추지 않으면...
모든 차이는 공간적 다름과 시간적 지연으로 새롭게 드러납니다
모든 언어는 다른 요소들과의 차이에서 의미가 발생합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 경계의 사유를 즐기는 철학자가 바로 데리다라고 생각하니다. 머리라는 단어를 떠올려보세요. 그다음에 대머리라는 말을 이어서 떠올리는 순간 머리의 흔적은 없어지고 그 지워진 흔적 위에 대머리라는 말이 머리와의 차이를 인식하면서 각인됩니다. 대머리 다음에 골머리, 잔머리, 책상머리라는 말을 연속해서 떠올리는 순간 머리라는 단어 위에 ‘대’, ‘골’, ‘잔’, ‘책상’이라는 요소와의 차이가 겹쳐지고 지워지면서 다른 의미가 생성됩니다. 머리 위에 새겨진 대머리가 다시 골머리로 바뀌면서 이전 흔적은 남아있고 그것을 대체한 ‘대’와 ‘골’은 머리와 합쳐지면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합니다. 남의 말을 잘 못 알아듣는 것도 바로 이런 언어의 미묘한 요소들의 결합과 대체가 혼동되면서 발생합니다.
언어는 독자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없고 다른 언어체계의 다른 요소와 만나서 발생하는 차이로 인해서 비로소 의미를 지닙니다. 원래 있던 자리에 다른 언어체계의 다른 요소가 자리를 새롭게 차지하고 이전의 흔적 위에 다른 흔적을 남기면서 있다가도 없어지고 사라졌다가도 다시 살아나는 과정의 연속입니다. 즉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있는 사이의 끊임없는 교직(交織)이라고 표현합니다. 있다가 없어지는 씨줄과 없다가 나타나는 날줄 사이가 무한 변주되면서 만들어지는 직조(織造)가 바로 텍스타일(textile), 즉 텍스트를 만든다고 합니다. 마치 다양한 이질적 옷감이 하나의 직물(textile)을 만들듯이 수많은 흔적이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나타나는 텍스트에는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인 중심 의미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흔적이 사라지고 나타나는 과정에서 언어 체계의 요소가 다른 요소로 대체되고 교환되는 과정에서 끊임없는 미끄러지는 의미입니다. 의미의 미끄러짐은 의미의 절대 중심성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언어적 불안정성을 내포하는 말입니다.
데리다의 《글쓰기와 차이》에 따르면 차연(differance)도 흔적이라는 개념이 낳은 또 다른 산물입니다. 차연은 공간적 차이와 시간적 연기(延期)를 합쳐 만든 색다른 신조어입니다. 차이를 여기서 결정하지 말고 공간적 다름과 시간적 지연을 통해 새롭게 더 생각해보자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영어의 단어 차이(difference)는 ‘대머리’와 ‘잔머리’에서 ‘대’와 ‘잔’과 같은 공간적인 다름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어떤 언어의 의미상의 차이를 인식하는 순간은 언어체계의 기존 요소가 다른 요소로 대체될 때입니다. 예를 들면 대머리와 잔머리의 의미상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대’가 잠시 우리 의식 속에 머물러 있다가 ‘잔’으로 대체되는 시간 속에 있을 때입니다. 언어에서의 의미는 공간적인 차이와 시간적인 지연이 한데 합쳐졌을 때 발생합니다. 공간적인 차이와 시간적인 지연이 합쳐져서 탄생한 개념이 바로 차연입니다.
언어체계의 한 가지 요소가 다른 언어체계의 다른 요소들과 대체되면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미끄러짐과 겹침이 결국 차연의 논리입니다. 차연의 논리에 따르면 언어적 의미는 지금 여기서 결정할 수 없고 언제나 확정할 수 없는 상태로 미끄러져나가는 비확정성을 대변하는 개념입니다. 차연 개념에 비추어보면 중심과 기원(起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언어의 의미는 언제나 이전 언어가 남긴 흔적이며, 그 흔적은 다시 나타나는 새로운 언어체계의 다른 요소와 대체되면서 다시 사라집니다. 지금의 언어는 또 다른 언어체계의 다른 요소와 만나면서 잠시 머물렀다가 미끄러지면서 사라지고 흔적을 남길뿐입니다. 절대적인 중심도 없고 처음 시작을 의미하는 기원도 또 다른 흔적의 연속이 남긴 흔적의 흔적일 뿐입니다.
차연은 끊임없이 차이를 생산하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입니다
데리다가 차연이라는 개념을 만든 배경에는 우리가 오랫동안 생각해오면서 굳어진 이분법적 세계관에 대한 반론이 숨어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형성된 우리들의 사고방식은 사실 이항(二項) 대립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안과 밖, 어둠과 밝음, 정상과 비정상, 음지와 양지, 전경과 배경, 성공과 실패, 희망과 절망, 주관과 객관의 이항대립적 구조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항대립 구도의 더욱 심각한 문제는 대립되는 두 가지 항목 중에서 어느 한 항목이 다른 항목에 비해 우월하거나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어서 이와 대립되는 다른 항목은 의도적으로 소외되거나 배제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가치관이 사고방식을 규제하면서 데리다는 차연이라는 개념을 도입, 전통적인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한계와 문제점을 비판합니다.
왜냐하면 차연 개념을 우리가 차용한다면 두 가지 대립되는 개념적 차이점도 지금 여기서 결정된 고정적 의미상의 차이가 아닙니다. 오히려 개념적 차이는 언제나 시간과 공간 속에서 계속 진화되는 진행과정에 있습니다. 대립되는 두 가지 개념 간의 우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차연은 개념적 차이점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동태적 움직임의 연속입니다.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를 들면 교육에 대한 정의가 뭡니까? 교육은 가르치고 배워서 사람을 육성하는 행위입니다. 교육이라는 정의를 이런 의미로 여기서 규정하거나 정의 내리지 말고 연기시켜놓고 다른 상황적 맥락에서 더 생각해보자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차이는 딱 고정돼있는 정태적 명사가 아니라 어떤 공간에서 어떤 인간이 그 공간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에 따라서 그 차이는 끊임없이 계속 지연, 연기되면서 또 다른 차이가 계속 생산되는 동태적 동사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소나무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의 개념적 차이를 생각해봅니다. 소나무를 생물학자들은 어떻게 해석할까요? 생물학자의 눈에는 당연히 생물학적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생물학자가 소나무를 보면 활엽수와 다른 침엽수라고 정의합니다. 한편 시인에게 소나무는 시인 나름이겠지만 생물학자처럼 침엽수와 활엽수를 논리적으로 구분하는 차이점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소나무를 은유적으로 생가하면서 지조나 절개와 개념으로 상징적 표현을 통해 생물학자가 생각하는 소나무와 전혀 다른 차이를 드러냅니다. 소나무에 대해 생물학자가 정의한 걸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지연시켜놓고 시인한테 물어봤더니 시인은 소나무를 전혀 다른 개념적 차이로 드러냅니다.
저는 지식생태학자로서 소나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어보면 생물학자나 시인과 전혀 다른 의미로 대답합니다. 소나무는 제가 보기에 독야청청 패러다임으로 살아가는 나무입니다. 소나무는 주변에 다른 나무가 잘 자라지 못합니다. 소나무 밑에는 오로지 송이버섯만 자랄 수 있을 정도로 혼자 잘 먹고 잘 살아가는 독창적 패러다임을 지향하는 나무입니다. 소나무를 이런 관점으로 바라보면 생물학자의 침엽수와 시인의 지조와 절개 같은 은유적 표현과 전혀 다른 의미상이 차이를 드러냅니다. 독창성(獨創性)을 추구하는 소나무에 비해 신갈나무는 협동(協同)의 창의성(創意性), 즉 협창성(協創性)의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나무입니다. 신갈나무는 소나무와 다르게 다른 나무나 식물과 여럿이 함께 어울려 살아갑니다. 소나무가 시인에게는 지조와 절개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지식생태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자기 외에 다른 생물체는 잘 못 살아가게 막는 악덕의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패러다임은 독창성에 머무르지 않고 협동의 창의성, 협창성의 패러다임입니다. 지식생태학자는 소나무가 목재로써의 가치는 있지만 또 다른 의미와 가치로 의미를 부여합니다. 똑같은 소나무를 놓고 봤을 때 침엽수, 지조와 절개와 같이, 독야청청 혼자 자신을 뽐내는 독창성의 패러다임을 상징하는 나무로 자리매김을 다르게 합니다. 똑같은 소나무가 전혀 다른 의미를 띠면서 계속 차이를 발생합니다. 차연이라는 개념은 지금 여기서 “소나무는 이런 의미야”라고 결정하지 말자는 의미입니다. 차연은 지연시켜놓고 다른 공간에서 다른 시간에 누가 소나무를 이야기하는지에 따라서 끊임없이 이전과 다른 차이를 계속 발생할 가능성을 열어두자는 의미입니다. 차연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의 두드러진 차이로 사물이나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고정시키지 말자는 의도에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식생태학자라는 수식어는 유영만 교수의 명함에 새겨진 저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브랜드 명칭입니다. 유영만은 지식생태학자라는 개념으로 규정하는 순간 유영만은 다른 의미로 재탄생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은 매 순간 다른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며 또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려는 사람입니다. 이미 지식생태학자로 결정된 유영만이 아니라 매 순간 다른 방식으로 유영만의 차이를 드러내는 무한한 진행형의 반복입니다.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은 사람들이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생기는 학습 질환을 규명하고 치료하기 위해 학습 신약을 개발하고 처방하는 학습건강전문의사로 변신합니다. 학습건강 전문의사 유영만은 지식 임신의 최적 조건을 탐구하고 지식 자연분만과 지식 낙태수술 방지법을 연구하는 지식산부인과의 사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일할수록 환자는 아픕니다
이제 데리다가 말한 차연 개념을 전문가와 접목시켜 ‘사이 전문가(호모 디페랑스, Homo Differance)’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사이 전문가’는 전문가와 전문가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에 주목하고 이질적 전문성을 융합, 색다른 전문성을 창조하는 전문가를 말합니다. 이런 전문가를 구상하게 된 배경에는 개인적으로 깊은 아픔이 깃들인 대형 교통사고가 있습니다. 2007년 4월 11일, 개인적으로 다시 태어난 제2의 생일입니다. 너무 많은 일을 하면서 쌓인 피로와 과로로 인하여 분당-수서 고속도로 상에서 중앙분리대를 들이받는 대형사고가 났었습니다. 깜빡 졸았던 모양입니다. 차는 전복되고 차 앞은 중앙분리대와 부딪히면서 거의 파괴되었습니다. 저는 좌우 갈비뼈가 상당 부분과 왼 팔이 부러졌고, 충격으로 목이 돌아가지 않는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갔었던 치명적인 교통사고였습니다. 다행히 사고 직후 119에게 누군가가 연락해서 분당 서울대 병원으로 급송되어 응급처치를 받은 한 참 후에 심각한 교통사고가 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억장이 무너지는 심각한 고통 속에서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오락가락했습니다. 점차 의식이 회복되면서 사람을 알아보게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온 몸 구석구석에서 통증이 엄습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좌우 갈비뼈가 부러져서 숨 한번 제대로 크게 쉬지 못할 정도로 그때의 아픔은 상상조차 하기 싫습니다.
가장 심각하게 다친 부분이 갈비뼈라서 흉부외과 의사가 주치의로 선정되었습니다. 흉부외과가 전공인 흉부외과 의사는 갈비뼈를 중심으로 내 몸의 전반적인 상태를 살펴봅니다. 부러진 갈비뼈로 혹시 장기에 손상이 가지 않았는지를 확인해봤지만 다행히 장기는 온전했습니다. 천만다행입니다. 갈비뼈가 부러졌기 때문에 딱딱한 침대 위에 똑바로 드러누워서 한 동안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왼쪽 팔이 끊어져 나갈 정도로 통증이 심각해서 흉부외과 의사에게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팔은 정형외과 의사가 진단을 해봐야 알 수 있으니 그쪽으로 협진을 요청하겠다고 합니다. 이제나 저제나 정형외과 의사가 오기만을 기다렸지만 다른 환자들이 밀려서 좀 늦어질 것이라는 이야기만 반복해서 들으면서 왼쪽 팔에 가해지는 통증을 참아야 했습니다. 병원에 있으면서 더욱 참을 수 없었던 점은 매일 아침 몸무게를 재러 오는 사람이 막무가내로 내 몸무게를 잽니다. 갈비뼈가 부러졌기 때문에 마음대로 일어날 수도 없고 전자저울이라서 타이밍을 맞추어서 저울 위로 올라가야 몸무게가 측정됩니다. 매일 몸무게를 재야 되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몸무게 재는 게 자기에게 맡겨진 일이기 때문에 몸무게를 재야 된다는 말만 반복합니다. 몸무게가 하루 사이에 그렇게 많이 변화되는 것도 아닌데 몸무게를 매일 재는 유일한 이유는 몸무게를 매일 재는 게 그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열심히 일할수록 환자는 아픕니다.
몸무게를 재는 사람은 내 몸의 상태에 관계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막무가내로 내 아픈 몸을 전자저울 위로 올라가게 만들었습니다.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다음부터는 몸무게 재는 것을 스스로 거부해버렸습니다. 팔은 정형외과 의사를 기다려도 오지 않아서 아픔을 참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은 내가 지금 몸담고 있는 한양대 병원으로 옮기고 나서 정형외과 의사에게 아픈 팔 부위 진단을 받았습니다. X-레이 촬영 결과 왼쪽 팔이 부러졌다는 결과를 2주 만에 알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부러진 팔 위아래가 맞물려 있어서 수술을 하지 않고 깁스를 하면 붙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습니다. 흉부외과의 전공분야가 아닌 왼쪽 팔은 정형외과 전문의사의 진단 후에 비로소 그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교통사고가 나면 가장 아픈 부위 중에 목뼈가 있습니다. 목뼈는 신경외과 전문의가 봅니다. 흉부외과는 갈비뼈, 정형외과는 팔뼈, 신경외과는 목뼈를 전문적으로 보고 진단하고 처방합니다. 자신이 맡은 뼈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인접 유관분야의 뼈가 어떤 상태인지는 관심이 없는 듯했습니다. 갈비뼈, 팔뼈, 목뼈도 아프지만 갈비뼈와 팔뼈 사이, 팔뼈와 목뼈 사이, 갈비뼈와 목뼈 사이가 아프다. 각 부위별 뼈 전문의사는 있지만 사이 뼈를 전공하는 의사가 병원에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사이 전문가는 전문가와 전문가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전공합니다
신체 뼈 부위별 전문 의사는 따로 있지만 뼈와 뼈 사이에 존재하는 사이 뼈 전문 의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는 전문가가 없어서 생기는 문제라기보다 전문가가 너무 많아서 또는 전문가끼리 소통이 되지 않아서 생기는 불통의 문제입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자기 분야만 깊이 파고들다 자기가 판 우물에 매몰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그야말로 깊이 파다가 기피 대상이 되는 경우입니다. 갈비뼈 전문의사인 흉부외과의사는 자신의 전공분야인 갈비뼈만 보지 말고 갈비뼈와 연관된 다른 뼈 전문가, 예를 들면 정형외과의사나 신경외과의사와 만나 서로의 진단 결과를 놓고 토론하면서 한 사람의 신체를 건강하게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협업이 필요한지도 논의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주 만나서 소통하고 진단 결과를 나누면서 함께 최상의 치료방안을 협업을 통해 강구해나가야 합니다.
“전문가란 무언가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만 다른 분야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미국의 작가 앰브로즈 비어스(Ambrose Gwinnett Bierce)의 말입니다. 깊이 있는 전문성도 좋지만 전문성이 심화될수록 전문성의 함정이나 덫에 걸려 다른 전문성을 볼 수 없는 안타까운 처지가 된다는 말입니다. 전문가는 자기 분야는 물론 다른 전문 분야와 접목해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색다른 전문성을 부단히 창조하는 새로운 전문가로 거듭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초연결 시대로 돌입할수록 전문가도 다른 전문가여 연결해서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협업의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전문성과 경험이 깊어질수록 세상을 보는 특정한 방식에 매몰된다.” 미국 텍사스주 라이스대 에릭 데인(Erik Dane) 교수의 말입니다. 전문가가 세상을 본다는 것은 자신이 쌓은 전문성과 경험적 안경으로 세상을 본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다른 전문가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색맹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를 위해 전문가는 기꺼이 다른 전문가와 연결해서 협업하고, 소통하고 공감하며, 융합해서 창조를 이끌어가려는 남다른 의지와 실천력을 지녀야 합니다. “위대한 아이디어는 레스토랑의 회전문에서 탄생한다”는 카뮈의 말은 서로 다른 전문가가 소통하고 공유하면서 전문성이 융합될 때 새로운 가능성이 탄생된다는 말입니다. 전문가는 나와 다른 전문가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틀림이 아니라 다름으로 간주하고 그 차이 속에서 위대한 가능성의 싹이 자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전문가가 판정을 내린 결과에 매몰되지 않고 다른 전문가의 시각으로 다시 바라보며 전문가 자신의 겪을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시도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이 전문가를 구상하게 된 배경입니다. 사이 전문가는 전문가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지금 여기서 규정하지 않고 시간적으로 연기시켜 놓고 끊임없이 그 차이를 다르게 정의하려는 사람입니다.
전문가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전문가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아프게 만드는 장본인은 네 가지 분야의 전문가가 득세하기 때문입니다. 틀에 박힌 방식대로 일하면서 습관과 관성의 늪에 빠진 멍청한 전문가, 자기 분야만 파고들다 매몰된 답답한 전문가, 전문가 행세를 하지만 사실은 무늬만 전문가, 가장 심각한 문제의 전문가는 머리는 좋지만 가슴이 따뜻하지 않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모르는 밥맛없는 전문가입니다. 이런 전문가의 위기를 극복하고 무한 가능성의 텃밭이자 상상력의 보고인 사이를 오가며 새로운 지식을 융합해내는 사이 전문가는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할 미래의 전문가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시인의 ‘섬’이라는 시입니다. 그 섬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이자 두 사람이 만나 다른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융합적 지식창조의 공간입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있다가 사이를 두고 경계에 있는 양편의 입장 차이를 존중하고 이해하지 못할 경우 비판의 빵이 아니라 비난의 화살이 날아들 수 있습니다. 박덕규 시인의 ‘사이’가 바로 그런 시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사이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있고 싶었다/ 양편에서 돌이 날아왔다.’ 사람과 사람 사이, 전문가와 전문가 사이, 그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존중해줄 때 우리는 좋은 사이가 될 수 있으며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만연된 전문가의 위기는 네 명의 전문가가 만든 위기의 전문가입니다.
첫 번째, 멍청한 전문가입니다. 멍청한 전문가를 삼행시로 풀어봤습니다. 전통과 관행에 근거해서 습관적으로 판단합니다. 문제의 본질과 핵심을 간파하지도 못합니다. 가능성과 다양한 변수를 고려하지 못하고 한 우물만 파고듭니다. 두 번째 전문가의 위기는 답답한 전문가입니다. 전공을 너무 깊이 파고들어가지고 전체를 보지 못합니다. 문하생에게도 한눈팔지 못하게 하고 한 분야에만 관심을 갖게 만듭니다. 가당치 않다는 표정으로 다른 전문성을 무시해버리는 악덕을 지녔습니다. 세 번째 위기의 전문가는 무늬만 전문가, 즉 사이비 전문가입니다. 전지전능한 척 많은 사람들한테 이렇게 허장성세를 떨고. 문전성시를 이루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뭔가 이렇게 주목을 받을 것 같지만, 가짜 전문성으로 위장한 무늬만 전문가입니다.
마지막으로 전문가의 위기에 속한 전문가는 싹수없는 전문가나 밥맛이 없는 전문가입니다. 전대미문의 상식 이하의 발언을 일삼고, 문전박대당하는 이유도 깨닫지 못하며, 가슴이 따뜻하지 않고 공감능력이 부족한 전문가입니다. 우리는 “전문가가 되려고 끊임없이 노력은 해야 되지만, 전문가처럼 생각하진 말아야 된다.” 미국의 동기부여 연설가인 데니스 웨이틀리라는 사람의 말입니다. 전문가가 되려고 노력해야 되는데 여기서 전문가는 한 우물 파는 전문가가 아니에요. 한 분야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전문가가 되려고 분투노력하지만 전문가처럼 자기 분야만 생각하는 외골수 전문가가 되지 말라는 말입니다. 전문가가 비전문가를 대상으로 강의하는데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전문적으로 설명하면 비전문가가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전문가의 설명을 못 알아듣는 비전문가의 아픈 마음을 몰라주는 거를 전문용어로 지식의 저주라고 합니다.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의 마음을 모릅니다.
‘파리 학과’ 대학원의 앞다리 전공 석사에게 뒷다리를 물어보면 모릅니다
자기 전공분야에 매몰된 나머지 타 전공에 대한 이해는 물론 소통과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는 극단적인 폐해와 역기능을 파리 학과 메타포에 비추어 설명해봅니다. 여러분이 대학의 파리 학과를 졸업한 파리 학사라고 가정해봅시다. 파리 학사는 ‘파리 개론’부터 배우기 시작해서 파리 부위별 각론으로 나눠서 배우기 시작합니다. ‘파리학 개론(槪論)’은 보통 파리 전공과 관련해서 처음 오리엔테이션 성격을 띠는 일종의 입문 교과목입니다. 보통 ‘~개론’은 학생들에게 감동적인 교과목인 경우는 드뭅니다. 이제까지 개론 책을 읽고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눈물을 흘렸거나 지적 분개 의식을 느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개론서는 저자의 지적 고뇌나 체험적 노하우, 지적 분개 의식이나 자기 목소리가 담겨있는 경우가 드뭅니다. ‘파리학 개론’ 수업을 들은 파리 학과 학생들은 학년이 올라가면서 이제 ‘파리 앞다리론’ ‘파리 뒷다리론’ ‘파리 몸통론’ 등 ‘파리학 각론’을 배웁니다. 졸업하기 이전에 파리를 분해․조립하고 파리가 있는 현장에 가서 인턴십 등 실습을 한 다음 파리 학사 자격증을 취득합니다. 파리 학과를 졸업하면 “이제 파리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 것 같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파리 학과 학생들이 말하는 이제 모든 것을 알 것 같다는 말은 파리에 대해서 들은 적은 있으나 설명할 수 없는 상태라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파리 학과 학생들은 파리에 대해서 잡다하게 들은 것은 많으나 설명할 수 없는 절름발이 지식인인 셈입니다. 파리 부위별로 배웠던 ‘파리학 각론’이 ‘파리학 개론’으로 다시 통합되지 않는 부분 분석과 분해 중심의 교육과정은 파리에 대해서 배웠지만 진정 파리를 알지 못하는 학생들을 대량으로 양산하는 주범이 되는 셈입니다.
파리에 대해서 전문지식이 부족한 파리 학사는 좀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하기 위해 파리 학과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합니다. 파리 석사는 파리 전체를 연구하면 절대로 졸업할 수 없기 때문에 파리의 특정 부위, 예를 들면 ‘파리 뒷다리’를 전공합니다. 파리 뒷다리를 전공하는 파리 학과 대학원생은 파리 뒷다리를 몸통에서 분리, 실험실에서 2년간 연구한 다음 「파리 뒷다리 관절상태가 파리 움직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나 「파리 뒷다리 움직임이 파리 몸통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파리 석사학위를 받습니다. “이제 무엇을 모르는지 알 것 같다”라고 깨달으면 주어지는 학위가 바로 파리 석사학위입니다. 파리 뒷다리 전공자에게 절대로 파리 앞다리를 물어봐서는 안 됩니다. 파리 뒷다리 전공자는 파리 앞다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파리 뒷다리를 전공하는 교수님에게 자꾸 파리 앞다리에 관한 질문을 하면 졸업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전문가는 ‘전문적으로 문외한인 사람’ 또는 ‘그것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줍니다. 파리 뒷다리 전공의 교수님이나 석사학위 취득자에게 파리 앞다리는 잘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전공영역입니다.
파리 앞다리 전공자와 뒷다리 전공자 간 파리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위해 자주 만나서 각자의 연구결과를 갖고 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전공영역별 연구대상은 물론 연구방법론이나 방법의 차이로 각기 다른 연구결과를 생산하기 때문에 다른 전공자들이 함께 논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전공별 최선을 다해서 연구하지만 결국 전공 이전의 전체, 예를 들면 파리에 대해서는 점점 알 길이 없는 아이러니가 존재합니다. 파리 뒷다리를 전공한 석사의 더욱 심각한 문제점은 파리 뒷다리를 파리 몸통에서 떼어내서 독립적으로 연구한다는 점입니다. 파리 뒷다리는 파리 몸통에 붙어있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몸통에서 떨어진 파리 뒷다리는 이미 파리 뒷다리로서의 생명성을 상실한 죽은 다리에 불과합니다. 파리 뒷다리를 파리 몸통과 관계없이 분석하고 이해할 경우 파리 뒷다리를 알 길이 없습니다. 항간에 ‘석사’(碩師)의 ‘석’(碩) 자가 돌 ‘석’(石) 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석사학위를 받아도 자기 전공 이외에는 별로 아는 바가 없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파리 학과’ 교수는 파리 앞다리 발톱에 낀 때를 전문적으로 연구합니다
파리 석사는 파리에 관한 보다 세분화된 전공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파리 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합니다. 파리 학과 박사과정생은 파리 뒷다리를 통째로 전공해서는 절대로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없습니다. 이제 파리 학과 박사과정생은 석사학위보다 더 세부적인 전공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파리 박사학위 취득에 필요한 전공 부위는 ‘파리 뒷다리 발톱’이 될 수 있습니다. 파리 뒷다리를 전공한 석사과정은 파리 뒷다리 발톱을 더욱 전문적으로 깊이 있게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전에 파리 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생은 ‘전국 추계 파리 발톱 학술대회’에 나가서 그동안 연구한 「파리 뒷다리 발톱 성분이 파리 발톱 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라는 부 논문을 발표합니다.
보통 박사학위 논문 이전에 학술대회에 나가서 부 논문을 발표하거나 전문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해야 박사학위 논문을 쓸 자격을 부여합니다. 파리 발톱 학술대회에서 파리 발톱에 관한 다양한 논문을 발표하는 예비 박사과정 후보나 전문 학자들 간에도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전공영역별로 사용하는 전문용어가 다르고 전문용어가 다르면 동일한 전공영역 내에서도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파리 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생은 이런 부 논문을 더욱 발전시켜 「1년생 파리 뒷다리 발톱의 성장패턴이 파리 먹이 취득 방식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합니다. 파리 박사학위는 “나만 모르는지 알았더니 남들도 다 모르는군”이라는 깨달음이 오면 주어지는 학위입니다. ‘박사’(博士)의 ‘박’’(博) 자는 얇을 ‘박’(薄) 자라는 설도 있습니다. 석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돌(石)을 계속 갈다보면 돌이 얇아져서 ‘박사’(薄士)가 된다는 설이 지금까지 나온 가장 유력한 설입니다.
이제 파리 학과 교수는 보다 세분화된 전공을 선택해야 교수사회로 입문할 수 있습니다. 파리를 통째로 전공한 파리 학과 학사, 파리 뒷다리를 전공한 파리학 석사, 파리 뒷다리 발톱을 전공한 파리학 박사보다 더 세부 전공 부위를 선택해야 합니다. 교수가 전공하는 파리 부위는 ‘파리 뒷다리 발톱에 낀 때’가 됩니다. 파리 발톱에 낀 때를 전공하는 교수들도 까만 때를 전공하는 교수, 누런 때를 전공하는 교수, 누르스름한 때를 전공하는 교수, 까무잡잡한 때를 전공하는 교수 등 발톱에 때의 색깔별로 파리 발톱 때와 관련된 학파가 다릅니다. 학파별로 다종 다양한 파리 발톱의 때 관련 논문이 양상 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누런 파리 발톱 때의 화학성분이 파리 발톱 성장과정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이 탄생되기도 합니다.
파리 뒷다리 발톱에 낀 때의 역사, 예컨대 30년 산 때나 21년 산 때를 전공하는 교수, 18년 산이나 15년 산 또는 12년 산 때를 전공하는 교수로 전공분야가 나뉜다. 30년 산 파리 발톱의 때를 전공하는 교수는 12년 산 파리 발톱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습니다. 오로지 30년 산 파리 발톱에 낀 때를 연구하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파리 뒷다리의 때를 전공하지만 전공영역이 달라서 파리 뒷다리의 때를 전공하는 교수들끼리도 사용하는 전공 용어상의 차이로 인하여 커뮤니케이션이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자신이 연구하는 파리 발톱의 때인지 돼지발톱의 때인지를 모르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파리 발톱의 때를 색깔이나 역사에 따라 더욱 깊이 있게 연구하기 때문에 나중에는 자신이 연구하는 때의 정체성에 대해서 모르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이렇게 교수가 되면 “어차피 모르는 것, 끝까지 우겨야 되겠다”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이제 파리 학과 교수는 파리에 대한 쉬운 이야기를 전문적으로 논의하기 때문에 아주 어렵게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교수를 ‘쉬운 이야기를 어럽게 이야기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사회적 합의에 대해 우리는 주목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파리는 파리 전체를 이해한 다음 각론으로 들어가서 이해해야 합니다. 나무를 보기 전에 숲을 먼저 보라는 말이 여기에도 통용됩니다. 파리의 특정부위가 파리 몸통 전체와 어떤 구조적 연관성을 맺고 있는지에 대한 지식 없이 파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파리, 파리 뒷다리, 파리 뒷다리 발톱, 파리 뒷다리의 발톱에 낀 때와 같은 전공영역은 모두 파리라는 생물체의 일부분입니다. 파리와 파리 생물체의 일부분 간에 구조적 관계성과 상호의존성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는 상태에서 파리의 각 부위에 대한 분석적 이해는 파리 전체에 대한 이해를 왜곡할 뿐입니다. 전공의 세분화를 중시하던 시대에는 전문성의 깊이는 전문가가 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었습니다. 이러한 전공의 세분화는 급기야 더 이상 종합할 수 없는 상태로 분해되어버렸고 동일 전공 내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고 세부 전공영역 간 높은 벽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제 대학의 교육과정은 전공 간 벽을 넘어 동일 전공은 물론 타 전공 간에도 가로지르는 융합 교과목이 생기는 추세로 급진전되고 있습니다. 미래 융합대학의 교육과정이 바뀌고 그 안에서 가르쳐야 될 교육내용이 기능-횡단적(cross-functional)으로 융합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융합대학에서 교수는 가르치는 내용뿐만 아니라 방법 측면에서도 과거의 교수방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융합 교수방법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교수가 자신의 전공영역뿐만 아니라 타 전공영역에 대한 전문성을 폭넓게 섭렵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볼 때 현실적으로 교수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융합 교수방법밖에 없습니다. 융합 교수방법의 핵심은 ‘개별적 지식’보다 지식과 지식 사이를 흐르는 ‘관계적 지식’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특정 분야의 지식은 그 지식이 탄생될 수밖에 없는 사회 역사적 문제의식은 물론 다른 지식과의 상호의존적 관계에서 탄생됩니다. 부분을 가르치기 이전에 부분이 구조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 전체와의 관계성 속에서 해당 지식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가르치는 데 주력할 필요가 있는 이유입니다.
지능은 다른 전문가와 함께 일하는 사회적 기술입니다
시대별로 전문가상도 계속 변화되어 왔습니다. 예를 들면 농업화 사회에서 필요했던 근면하고 성실한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를 요구했습니다. 깊이는 없지만 다방면에 걸쳐서 여러 가지를 아는 인재상입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기술 발달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고 분업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등장한 산업화 시대가 요구했던 기능적 전문가는 I자형 스페셜리스트(specialist)였습니다. 스페셜리스트는 I자형처럼 넓이보다는 깊이를 추구하는 전문가입니다. 1990년대부터는 지식정보가 토지나 물질적 자산보다 중시되면서 지식 정보화 사회가 요구했던 인재는 T자형 인재였습니다. 해당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갖춤과 동시에 다른 분야에 대한 종합적인 안목과 식견을 갖춘 T자형 인재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도요다(Toyota)에서 회사의 이니셜(T)을 따서 처음 사용했던 T자형 인재는 폭넓게 알면서(ㅡ) 전문분야별 깊이 있는 지식(ㅣ)을 겸비한 인재를 지칭합니다. T자형 인재는 GE나 삼성 등 한때 국내외 주요 기업에서 각광을 받았던 인재상이었습니다. 예측불허의 변화가 극심하게 전개되는 불확실한 사회로 접어들면서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는 도전적이고 창의적 V자형 인재가 새롭게 부각됩니다. 콘 모양의 V자형 인재는 우선 자기 분야를 깊이 파고들면서 동시에 인접 유관 분야까지도 넘나들면서 전문성을 넓혀가는 인재상입니다. V자형 인재의 또 다른 버전으로 컨버전스 시대에 필요한 인재상으로 A자형 인재상이 등장합니다. 컨버전스 시대의 전문가는 자신의 전문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A는 사람 인(人)자와 그 사이의 가교와 같은 선(―)으로 구성되어 있는 글자입니다. 이는 한 분야의 전문지식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 대한 상식과 포용력이 있는 각 개인들(人)이 서로 가교(―)를 이루어서 하나의 팀으로 협력한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다음에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이라는 책이 나오면서 등장한 인재상입니다. 통섭형 인재 또는 O자형 인재라고 합니다. 지식의 큰 줄기를 잡아 대통합을 이루는 인재상입니다. 마지막으로 데리다의 차연이라는 개념에 비추어서 제가 새롭게 창조한 전문가상이 전술한 바 있는 사이 전문가입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사물과 사물이 연결되는 초연결 시대를 열어가듯이 사람과 사람도 연결을 넘어 깊은 연대를 구축해야 합니다. 전문가와 전문가는 점점 소통이 안 되는 시대에 사이 전문가는 전문가와 전문가를 연결해주는 최상의 전문가입니다. 사이 전문가는 저마다 다른 전문성에 존재하는 차이를 서로 존중해주고 그 차이에서 창조의 꽃을 피워냅니다. 함민복 시인이 언급한 경계에서 꽃이 피는 것처럼 경계를 넘나들면서 세상의 이질적 지식을 융합,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전문가가 바로 사이 전문가입니다. 존 실리 브라운(John Seely Brown)이라는 지식 경영학자에 따르면 지능(intelligence)은 IQ로 설명하는, 더 이상 탁월함을 지칭하는 개인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지능은 전문가가 네트워크로 연결된 공동체에서 함께 일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기술입니다. 지능은 혼자 독창성을 무기로 문제를 해결하는 고독한 개인의 능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능은 나와 다른 분야의 전문가와 협업을 통해 함께 고민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적 상호작용 능력입니다. 더 더욱이 사이 전문가가 전문가 네트워크에서 소중한 역할을 발휘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사이에서. 전문가와 전문가 사이에서 탄생하는 거예요.
콘텍스트 밖에 존재하는 텍스트는 없습니다
진정한 전문가일수록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능력이 공감능력입니다. 다른 사람과 협업을 통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는 협업능력과 의사소통 능력, 그리고 타자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생각하고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공감능력이 필요합니다. 미래의 전문가에게 필요한 두 번째 능력은 특수한 상황이나 어떤 맥락에서 떠돌아다니는 의미를 해당 맥락에서 반추해보고 해석하는 능력입니다. 한 마디로 맥을 잘 잡는 능력, 거꾸로 이야기하면 맥을 못 추는 전문가로 대접받기 어렵습니다. 맥을 못 추는 사람을 숙맥이라고 하잖아요. 진짜 전문가는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사용하는 어떤 지식이나 의미들이 어떤 맥락성을 갖고 있는지를 간파하고 다음 생각이나 행동을 순간적으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 미래의 전문가에게 필요한 능력은 역사적인 문제의식입니다. 한 시대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의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이 시대변화에 따라 어떤 의미 변화가 있었는지, 지금 여기서 그것이 이슈화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내가 갖고 있는 전문성으로 기여할 방안도 모색할 수 있습니다. 넷째, 미래의 전문가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창발성(emergence)입니다. 전문가일수록 매뉴얼에 처방된 대로 따라가는 기계적 전문성을 갖고 있을 것이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일이 느닷없이 발생해도 임기응변력을 발휘해서 대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전문가는 독창성보다는 협동의 창의성을 다른 사람과의 역동적인 상호작용 관계에서 발휘하는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위대한 창조는 혼자 외롭게 고민할 때보다 나하고 인식과 관심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면서 우연히 영감이 떠오를 때입니다. 동백꽃처럼 혼자 아름다움을 뽐내는 독무가 아니라 개나리꽃처럼 여러 개의 꽃이 함께 어울려 추는 군문가 더 아름답습니다.
《철학이 필요한 순간》이라는 책을 쓴 스벤 브링크맨에 따르면 “외부-텍스트는 없다.”는 말은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로 오역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말의 진의는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와 관계를 맺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텍스트는 콘텍스트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콘텍스트 없는 텍스트, 콘텍스트 바깥에는 텍스트가 없다는 말입니다. 데리다는 “외부-텍스트는 없다”는 명제가 불러일으킨 오해를 풀어보려고 “콘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명제로 바꿨습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해석해보면 “콘텍스트 밖에 존재하는 텍스트는 없다’입니다. 모든 텍스트는 어떤 콘텍스트 속에서 존재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이해되고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데리다가 사용하는 비결 결성이나 의미의 불안정성 개념에 비추어보면 그 콘텍스트조차 불안정하고 불완전합니다.
고정 불변하는 절대 진리도 없고 그런 절대 진리를 판정하는 중심이나 기준도 없다는 것이 데리다의 해체(deconstruction) 철학입니다. 해체는 엄격한 위계적 구조나 거기에 종속된 것을 해체하고 수평적 해방을 추구합니다. 질서 정연한 진리보다 무질서나 혼돈 속에서 끊임없이 차이를 생성하는 무한 탈주를 선호합니다. 텍스트 역시 다양한 콘텍스트 속에서 이전과 다른 의미를 잉태하며 어제와 다른 텍스트로 계속 재탄생할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데리다는 텍스트는 저자가 쓰는 게 아니라 독자가 쓴다고 주장합니다. 저자의 텍스트가 독자의 콘텍스트 속에서 이전과 다른 버전으로 반복해서 재생산되기 때문입니다. 전문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고정된 불변의 진리나 가치체계는 없습니다. 다른 전문가와 만나는 사이에서 어제와 다른 차이가 무한 반복해서 재창조될 뿐입니다. 단 하나의 영구 불변하는 진리를 중앙에 두고 그것을 중심으로 자신을 따르라고 주장하는 전문가일수록 해체되거나 전복될 위기에 처한 전문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