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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를 끊임없이 창조하는
낯선 시인이 되는 비결

리처드 로티의 아이러니스트에게 배우다

자아를 끊임없이 창조하는 시인을 만나고 싶다면

마지막 어휘로 색다른 자아를 창조하라

     

통념에 갇힌 자아를 버리고 신념으로 가득 찬 자신을 만나는 비결:

리처드 로티(1931.10.4.2007.6.8.)의 아이러니스트에게 배우다 


철학자는 저마다의 문제의식을 갖고 집요하게 탐구하는 과정에서 기존 개념으로 설명되지 않는 특정한 현상과 만납니다. 그때 철학자는 자신의 문제의식을 담아낼 독특한 개념을 창조합니다. 일반인이 철학책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철학자마다 고유한 문제의식을 이전 철학적 저작물을 탐독하면서 기존 철학적 사유체계로 더 이상 새로운 사유를 계속할 수 없는 한계 지점에 다다릅니다. 그때 철학자는 전대미문의 색다른 개념을 창조해서 자신의 철학적 고뇌를 담아냅니다. 존 듀이의 실용주의 철학을 계승 발전하면서도 언어와 언어를 사용하는 자아는 물론 자아들이 구축한 공동체나 문명조차도 철저하게 우연성의 산물이라고 보는 다윈의 진화론,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사용 이론과 니체의 위버멘쉬와 관점주의를 차용, 독창적인 네오 프래그머티즘(Neo-pragmatism)이 바로 지금 살펴보려고 하는 리처드 로티입니다.



로티의 철학적 저작물 가운데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를 통독하면서 몇 가지 독창적인 개념을 만날 수 있습니다. 눈먼 각인(Blind Impress), 마지막 어휘(Final Vocabulary), 아이러니스트(ironist)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사점을 중심으로 공부해보려고 합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 특히 철학 책을 읽는 일은 난해한 텍스트를 해독하는 일이며, 저자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을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는지에 관한 저자의 의도와 의중을 읽어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개념 속에 담긴 저자의 치열한 고뇌와 열정, 갈급한 위기의식과 반드시 딜레마 상황을 탈출하고야 말겠다는 불굴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아우라는 반복할 수 없는 아우성입니다

     

‘눈먼 각인’은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외부적 자극이 내 몸으로 들어와 강렬한 인상과 지각을 남겼지만 정확하게 그것을 언어를 사용하여 재현하기에는 불가능한 흔적이나 얼룩입니다. 눈먼 각인은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에서 언급했던 산딸기 오믈렛 이야기와 일맥상통합니다. 옛날 한 시대를 풍비했던 왕이 전쟁 중에 쫓기며 산골짜기의 한 노파에게서 얻어먹은 산딸기 오믈렛의 맛을 궁정 요리사에게 재현해달라고 요구합니다. “내가 전쟁에서 참패하고 길을 잃어 기진맥진한 채 한 오두막에 도착했을 때였네. 한 노파가 뛰쳐나와 반기며 산딸기 오믈렛을 먹여주었지. 오믈렛을 먹자마자 난 기적처럼 기력을 회복했고 희망이 샘솟았지. 자네가 그 오믈렛을 만든다면 짐의 사위가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죽음뿐이네.” 그러자 궁정 요리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산딸기 오믈렛 요리법과 하찮은 냉이에서 시작해서 고상한 티미안 향료에까지 이르는 모든 양념을 훤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오믈렛을 만들 때 어떻게 저어야 마지막 제 맛이 나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 저는 죽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제가 만든 오믈렛은 폐하의 입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폐하께서 그 당시 드셨던 모든 양료(養料)를 제가 어떻게 마련하겠습니까. 전쟁의 위험, 쫓기는 자의 주의력, 부엌의 따뜻한 온기, 뛰어나오면서 반겨주는 온정, 어찌 될지도 모르는 현재의 시간과 어두운 미래- 이 모든 분위기는 제가 도저히 마련하지 못하겠습니다." 


전쟁에 쫓기는 위험한 분위기와 당시의 절박한 긴장감, 산딸기 오믈렛을 만들 당시의 부엌의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와 온기, 요리를 만드는 사람의 정성과 관심, 산딸기가 품고 있는 태생적 향기와 맛과 식감, 반갑게 맞이해주었던 노파의 긴장된 듯한 표정, 적막한 밤을 뚫고 들리는 요리하는 소리와 풍기는 음식 냄새 등은 아무리 뛰어난 요리사라고 할지라도 과거의 맛을 그대로 재현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산딸기 오믈렛의 맛은 해당 음식이 내는 맛뿐만 아니라 그 음식 맛을 본 주체의 맥락적 경험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산딸기 오믈렛의 맛이 내는 아우라는 산딸기 오믈렛 자체의 음식 맛뿐만 아니라 그것을 만든 사람과 상황의 고유한 특성, 그리고 그 상황적 맥락에서 맛을 본 사람의 주관적 감정이 함께 만든 사회적 합작품입니다.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는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오직 그 존재만이 지닌 독특한 칼라이자 스타일이 뿜어내는 카리스마입니다. 아우라는 아무리 아우성을 쳐도 그대로 재현할 수 없는 당사자의 독특한 칼라이자 스타일입니다. 당시의 상황에 관여된 사람과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바뀌면 지금 상황에서는 그대로 재현해낼 수 없는 불가능한 추억입니다. 설혹 안다고 해도 지금의 언어로 그 당시의 맛에 담긴 추억과 아름다운 분위기를 그대로 번역할 수 없습니다.



내 몸을 관통한 한 순간의 눈먼 각인이 한 평생을 좌우합니다

     

우연히 내 몸으로 파고 들어왔는데 강렬한 흔적이나 지적 자극이 그때의 느낌이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남아 있습니다. 이런 눈먼 자극은 롤랑 바르트가 《밝은 방》에서 이야기하는 푼크툼( punctum)입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틀에 박힌 방식으로 사진을 해석하는 관습적 방식을 스투디움(studium)이라고 하는 데 반해 푼크툼은 화살 같은 강렬하고 순간적인 자극이 우연히 내 몸을 관통하면서 생긴 깊은 상처(깊게 파인 홈)이자 섬광 같은 자극입니다. 이미 타성에 젖은 관습적 코드에 얽매이지 않고 사진 속의 특정 이미지가 뇌리 속에 박히면서 생기는 색다른 의미를 포착하려는 노력이 바로 눈먼 각인으로 꽂힌 내 마음속의 이미지를 언어로 번역하려는 노력과 비슷합니다. 푼크툼은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 예기치 못하게 찾아오는 뜻밖의 지적 충격이자 웅크린 야수로 날아드는 강한 심리적 동요이기도 합니다. 푼크툼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뜻밖에 날아오는 우발적 충격이자 불현듯 생기는 깊은 정서적 울림이자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나의 관심을 끌고 가서 비상하는 상상력의 날개입니다. 푼크툼으로 생긴 무딘 의미는 리처드 로티가 말하는 눈먼 각인과 일맥상통합니다. 우연한 마주침의 흔적이 시간이 흘러도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오감각으로 받아들인 눈먼 각인은 구체적 이미지로 형상화할 수 없지만 그 당시에 받은 느낌은 여전히 온몸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무딘 의미는 둥근 형태를 하고 있는 무디어진 것을 뜻하는 라틴어 옵투스(obtus)에서 유래합니다. 지적 인식이나 논리로 접근할 수 없는, 언어로 번역할 수 없어서 말로 설명할 없지만 직관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는 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할 수 없는 이미지가 내뿜는 의미입니다. 알 것 같지만 또 다른 의미를 품고 다른 세계로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다양한 여운을 남기는 의미가 바로 무딘 의미입니다. 눈먼 각인도 푼크툼의 자극으로 깊은 의미의 상처를 입혔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언어를 매개로 직접 번역이 불가능한 체험적 충격입니다. 눈먼 각인은 재현(representation)이 불가능한 일회성의 단독적인 경험입니다. 그 어떤 기술적 수단을 사용해서도 동일하게 반복할 수 없는 고유한 맥락적 추억입니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장면을 재연해도 당시에 몸으로 받아들인 신체적 각인과 동일한 느낌을 반복할 수 없습니다. 눈먼 각인은 시간과 공간과 인간의 삼자가 만나는 상호작용 속에서 창조되는 역동적인 감각의 향연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어휘는 죽음과도 바꿀 수 있는 신념 어입니다

     

리처드 로티가 말하는 ‘눈먼 각인’은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산딸기 오믈렛이 풍기는 아우라입니다. 어느 특정 시점과 특정한 상황에서 우연히 마주쳤지만 전율하는 경험적 흔적으로 내 몸에 남아있는 특이하고 고유한 과거의 추억이자 체험적 느낌입니다. 리처드 로티는 이런 눈먼 각인의 흔적을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언어적 문법이나 사용 방식에서 탈피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독특하게 표현하려는 안간힘이 한 사람의 삶을 그 누구의 삶과도 바꿀 수 없는 고유한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눈먼 각인의 체험적 흔적이 다양한 사람은 그만큼 그런 경험을 다양한 예술작품으로 창작할 수 있는 가능성의 텃밭이 풍부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몸을 관통한, 내 몸속에 남아있는 전율했던 과거의 추억의 한 점은 오로지 나만이 반추해보고 회상해서 지금 여기서 다시 한번 느껴볼 수 있는 소중한 회상이자 잊을 수 없는 체험적 각인입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참신한 메타포를 활용하여 당시의 경험적 각성을 다시 표현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과정에서 나만의 고유한 언어 사용 방식이 재탄생합니다. 이런 와중에 탄생하는 단어가 마지막 어휘(Final Vocabulary)입니다. 마지막 어휘는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는 신념 어입니다. 어떤 신념이 ‘눈먼 각인’으로 우연히 생겼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위해 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단어가 바로 마지막 어휘입니다.


마지막 어휘는 평상시에는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잠자고 있다가 결정적인 딜레마 상황에 빠져있을 때 결단과 결행 일보 직전에 눈앞에 나타납니다. 저마다 ‘눈먼 각인’으로 생긴 앎의 얼룩과 무늬가 다르기 때문에 거기서 생성되는 각성과 통찰의 언어도 다릅니다. 예를 들면 간디가 아프리카 한 지역에서 1등석 기차를 탔다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쫓겨나면서 부유한 변호사의 길을 포기하고 비폭력 저항운동을 하기로 인생의 방향 전환을 시도합니다. 결정적인 사건 후에 생긴 결연한 방향 전환은 간디에게 새로운 신념 어를 잉태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지막 어휘는 가장 나다운 색깔을 담고 있는 내 삶의 등대이자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가던 길을 잃었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알려주고 어디로 왜 가야 하는지를 고심하게 만들어주는 내 삶의 가치판단 기준이자 행동규범입니다. 플라톤은 이데아, 사르트르는 실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라캉은 욕망.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라는 단어가 마지막 어휘로 떠오릅니다. 코나투스는 나의 삶을 본성대로 살아가려는 에너지입니다. 누군가를 만나 코나투스가 통하면 끌림이 생기고 통하지 않으면 멀어짐의 조짐이 생기는 법입니다. 어떤 사람은 딱 만나는 순간 기가 꺾이면서 순간적으로 에너지가 다운되고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은 기운을 느끼는 경우가 생깁니다. 코나투스가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는 기분이 좋은 사람을 만나 삶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감정을 강조합니다. 니체는 아모르파티 이외에 위버멘쉬나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 중에서 니체의 선택에 따라 마지막 어휘가 결정될 것 같습니다. 



한계는 한 게 없는 사람의 핑계입니다


저의 마지막 어휘가 도전입니다. 저에게 도전은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호기심의 발로이자 능력을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내 삶의 ‘카니발’입니다. 도전은 내 능력의 한계를 알려주기도 하지만 능력의 심화와 확장 가능성을 알려주는 성장 발판이기도 합니다. 도전은 나에게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어제와 다르게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버팀목입니다. 도전을 멈추는 순간 제 삶에는 축제가 없어지고 숙제가 많아지면서 피곤한 인생이 반복됩니다. 숙제하는 인생을 살지 말고 축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게 저의 마지막 어휘인 도전을 통해서 살아가는 저의 삶의 자세입니다. 저에게 도전은 이렇게 제 삶을 늘 어제와 다른 호기심을 가지고 재밌고 신나게 살면서 내 능력의 한계에 도전하면서 지금의 능력을 확장시켜주고 심화시켜주는 삶의 윤활유와 같습니다. 도전은 왼쪽 심장(좌파, Courage)과 오른쪽 머리(비정상, Imagination)가 시키는 일입니다. 심장이 박동되지 않는 상태에서 지나치게 머리가 관여하면 도전하기도 전에 생각을 거듭하다 안 해도 되는 이유나 핑계를 끌어대고 도전을 멈춥니다. 머리가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심장이 시키는 대로 했다가는 도전은 모험을 넘어 위험한 만용일 수도 있습니다. 내 능력의 한계를 아는 방법, 능력의 확장과 심화도 오로지 도전을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창작이라는 것은 본래 왼쪽에서 뛰는 심장이 시켜서 하는 일입니다”(p.193).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래서 좌파들은 왼쪽 심장이 오른쪽 심장보다 크다는 겁니다. 재밌는 표현이지 않습니까? 저도 왼쪽 심장이 더 큰 것 같아서 좌파일 것 같아요. 아무튼 도전은, 도전은 머리로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도전은 첫 번째 심장으로 느낌이 올 때 머리가 논리적으로 계산하기 전에 이루어집니다.


느낌이 왔을 때 이게 머리로 올라가서 계산이 시작되기 전에 나가서 행동하지 않으면 이 머리는 이제 안 해도 되는 열까지 이유를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사하라 사막에 도전하는데 참가비가 300만 원이라는 이유가 비싸서 못 가는 핑계로 연결됩니다. 더구나 낮에 40도가 넘으니 사막에서 달리다 죽을 수 있다는 위험을 머릿속으로 따져봅니다. 내가 왜 사하라까지 가서 죽어야 돼라는 자기 합리와 함께 안 가도 되는 10가지 이우를 생각한 다음에 결국 사하라 사막 마라톤 도전을 포기합니다. 그런데 저같이 왼쪽 심장이 큰 사람들은 바로 느낌이 오면 바로 카드로 300만 원 결제한 다음에 가서 재미있게 도전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합니다. 제가 근무하는 한양대에서 분당 집까지 왕복 56km를 일요일마다 마라톤으로 왕복하면서 지국력을 단련합니다. 계단을 30층 이상 배낭 10Kg의 무게를 짊어지고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허벅지 근육과 심폐기능을 강화합니다. 6박 7일 동안 달리는 레이스를 완주하지 못하고 미완의 성공으로 마무리되었지만 도전 자체만으로도 정말 많은 몸으로 깨달은 소중한 체험이었습니다. 도전은 인생의 동반자이기도 하고 내 능력의 한계를 아는 가장 강력한 방법입니다. 책상에서 내 능력의 한계를 알 수 없습니다. 한계는 한계 없는 사람의 핑계입니다. 한계에 도전해보지 않는 이상 한계를 알 수 없습니다.



마지막 어휘는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입니다


마지막 어휘에는 그 사람의 불굴의 의지와 결연한 판단이 들어있습니다. 확실한 자기 주관을  갖고 포기하고 싶은 상황에서도 불타는 의지로 끈질기게 파고드는 집요한 힘도 마지막 어휘가 담고 있습니다. 나태해지고 게으름에 빠질 때 그 마지막 어휘를 보는 순간 죽어있던 의지들이 새롭게 생기게 되는 이유입니다. 마지막 어휘는 길을 잃었을 때 나를 올바른 방향으로 안내해주는 나침반입니다. 예를 들면 저의 도전이라는 마지막 어휘에 비추어 제가 기업에서 프로젝트 제안이 들어올 때 할지 말지를 결정합니다. 제가 갖고 있는 평상시 지식만 갖고도 그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다는 판단이 들면 프로젝트를 추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마지막 어휘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공부를 하지 않고도 해당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다는 판단이 들면 저에게는 도전 의욕이 생기지 않습니다. 프로젝트를 하면 나도 배우는 게 많은데 기존 지식만 갖고도 금방 해낼 수 있다. 그러면 나한테는 돈은 되지만 별로 나한테 배움의 포인트를 제공해주지 못하거든요. 마지막 어휘는 이런 점에서 딜레마 상황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 작용하는 가치판단의 기준입니다. 마지막 어휘는 또한 등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어디로 가야 될지 어떤 기준으로 삶을 살아야 될지를 고민할 때 빛을 밝혀줍니다. 저의 독창적인 자기다움을 드러내면서 자기 다운 철학과 신념에 따라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삶을 살아가게 만든 중심축입니다. 


마지막 어휘는 틀에 박힌 생각이 고치 안에 머물면서 자란 고정관념을 생각의 망치로 자꾸 깨부숴가지고 나의 가치를 드높이는 자극제입니다. 저는 도전이라는 마지막 어휘를 생각하기 전에 제 삶의 나침반과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다섯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첫 번째 제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키워드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입니다. 가슴에는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고 새의 양 날개처럼 왼쪽에는 도전과 오른쪽에는 혁신을 기반으로 살아갑니다. 신뢰를 기반으로 뜨거운 열정으로 도전하고 혁신하는 삶을 살아갈 때 저를 행복하게 만들어줍니다. 즉 신뢰, 열정, 도전, 혁신, 행복이 제 삶의 중심을 바로 잡아주는 핵심가치에 해당합니다. 열정(Passion), 혁신(Innovation), 신뢰(Trust), 도전(Challenge), 행복(Happiness)에 해당하는 영어 첫 글자를 따서 차례로 연결하면 PITCH가 됩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힘과 용기를 내서 피치를 올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야구에서 공을 던지는 사람을 투수, 영어로 피처(pitcher)라고 합니다. 투수가 공을 던지는 스타일을 영어로 피칭 스타일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선동열, 최동원, 장명부, 박철순 투수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독특한 투수였습니다. 이런 투수가 공을 던지는 것을 피칭 스타일이 저마다 독특합니다. 한 투수가 다른 투수를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자기만의 고유한 스타일로 공을 던집니다. 이게 바로 제가 얘기하는 PITCH입니다. 이 가치대로 살면 저의 독특한 색깔이 드러나고 가장 이상적인 나다움이 드러납니다. 



색달라지면 저절로 남달라 집니다


밤하늘의 별은 내가 길을 잃었을 때 등대처럼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입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모든 별을 국어사전에 나오는 추상명사라고 생각해봅니다. 그렇게 많은 별을 근면, 정직, 열정, 혁신, 신뢰, 도전, 행복, 겸손, 사랑, 나눔, 겸손, 봉사라고 가정해봅니다. 그 별 중에서 유난히 내 마음을 확 움직이는 단어들을 한 5개만 선정하라고 한다면 어떤 별을 선정하겠습니까. 예를 들면 저는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 단어 중에서 열정, 혁신, 신뢰, 도전, 행복을 선택했습니다. 다섯 가지 별을 연결시켜 줄을 그어보니까 북두 오성이 됩니다. 5개의 별이 밤하늘에 빛나면서 별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개별적인 별로 바라보다 다섯 개의 별로 연결된 별자리로 보면 훨씬 더 잘 보이기도 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등대처럼 마음에 각인됩니다. 제가 길을 잃었을 때 북두칠성을 통해서 길을 찾아가듯이 저 밤하늘에 빛나는, 5개의 별이 제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끌고 갑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 5가지가 제가 인생을 살면서 의사결정할 때 마음의 판단 기준이 되기도 하고 등대이자 나침반 역할을 합니다.  


칸트도 비슷한 맥락에서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이야기합니다. “내 마음을 채우고 내가 그것에 대해 더 자주 더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늘 새로운 경외심과 존경심을 더해 주는 것 두 가지가 있다. 머리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 그리고 내 마음의 도덕 법칙.” 칸트의 묘비명에 나오는 말입니다. 《실천이성 비판》에 나오는 마지막 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은 불가지(不可知)의 세계입니다. 인간의 인식으로 도달할 수 없지만 그것만 생각해도 심장이 뜁니다. 도덕 법칙은 딜레마 상황에서 의사결정을 하는 표준입니다. 도덕 법칙이야말로 의사결정의 기준으로 작용하는 핵심 가치입니다. 핵심 가치는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 한 단어를 가지고 이 세상을 향해서 몸을 던질 수 있는 가치판단의 기준입니다. 푸코식으로 이야기하면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파레시아(parresia)에 해당하는 단어가 바로 핵심가치입니다. 핵심가치는 남다르게 살아가려는 나에게 색다르게 살아가라는 당부이기도 합니다. 나만의 색다름은 결국 마지막 어휘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색다르면 저절로 남달라 지는데 우리는 남달라 지려고 노력하다가 나만의 색을 잃어버렸습니다. 색계(色戒)라는 영화에서 자기만의 색(色)으로 경계(儆戒)하는 마음을 무너뜨리듯, 마지막 어휘를 근간으로 아이러니스트의 삶을 살아갈 때 가장 나다움이 빛나 보입니다. 색다름은 자기만의 칼라가 독특하게 빛나는 상태입니다. 색다름은 남달라 져서 저절로 자기다움이 드러나고 그것이 그 사람의 아름다움을 결정합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색다른 사람이고 색다른 사람은 자기답게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자기다움과 색다름, 그리고 아름다움은 동의어입니다. 



자기답게 살아가는 사람은 꾸미는 사람이 아니라 가꾸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마지막 어휘를 근간으로 자기만의 고유한 개성이 드러나는 작품을 개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야 합니다. 대강 만들어서 시장에서 팔고 사는 상품을 만들면 금방 돈은 어느 정도 벌 수 있지만 시장가치가 떨어지면 바로 반품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처지에 놓일 수도 있습니다. 상품은 시장가치가 시간이 지나면 떨어지는데 나만의 철학과 신념이 담긴 작품은 마침내 명품이 됩니다. 상품은 신상품으로 바로 대체되지만 작품은 개발자의 철학과 신념을 담아낸 거니까 그 누구도 쉽게 따라잡을 수 없는 자기 특유의 명품이 됩니다. 철학자 니체와 푸코는 작품 세계가 닮은 점보다 다른 점이 더 많습니다. 자기만의 문제의식으로 자기만의 언어로 자기만의 철학 체계를 구축한 철학자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르트르, 칸트, 들뢰즈,  데리다 모두 자기만의 철학으로 자기만의 스타일을 창조한 사람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어보면 누가 봐도 괴테 작품임을 알아챕니다. 톨스토이, 찰스 디킨스, 프루스트, 카프카 역시 자기만의 문체로 자기만의 문학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문체는 일종의 지문입니다. 그 사람만이 지닌 고유한 지문처럼 문체에도 그 사람 특유의 작가적 정신이 살아 숨 쉽니다. 푸코가 말하는 자기 배려처럼 자기만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문학가입니다. 마찬가지로 베토벤의 교향곡을 들어보면 누가 들어도 베토벤의 작품성이 드러납니다. 모차르트, 바그너, 슈만, 브람스 모두 자기만의 음악적 스타일을 창조한 음악가입니다. 


화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피카소, 반 고흐의 그림을 멀리서 봐도 피카소와 반 고흐의 그림이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역시 저마다의 화풍으로 자시의 고유함을 드러내는 그림으로 자기만의 그림 스타일을 창조한 화가입니다. 이렇게 저마다의 분야에서 자기다움을 창조하고 고유한 스타일을 드러낸 문학가나 예술가는 모두 자기 다운 컬러를 드러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형용사로서 ‘~다운’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피카소다운’ 또는 ‘피카소 답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표현을 붙일 수 있으면 그게 바로 자기다움을 드러내면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이러니스트의 삶입니다. 괴테답다고 하면 괴테만이 창조할 수 있는 괴테 다움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괴테스럽다고 하면 괴테를 따라잡으면서 모방하다가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괴테다운’이라는 표현은 아이러니스트로서 자기다움을 창조하는 삶이라면 ‘괴테스럽다’는 말은 아이러니스트로서의 독특한 삶을 살아가지 않고 누군가의 삶을 모방하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스럽다’는 말은 이류가 그 사람을 따라서 모방하는 아류작을 지칭합니다. 예를 들면 ‘칸트답다’는 칸트 다움을 드러내서 칸트만의 고유한 스타일이 드러난 상태이지만 ‘칸트스럽다’는 칸트를 따라 하다가 영원한 칸트 이류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칭합니다. 리처드 로티가 얘기하는 아이러니스트의 삶은 마지막 어휘를 가지고 그 사람답게 누구와 비교하지 않는 자기다움을 드러내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을 가꾸는 사람이지만 ‘~스럽다’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꾸미는 사람입니다. 가꾸는 사람은 자신을 가꿀수록 자기다움이 드러나는 삶을 살아가지만 꾸미는 사람은 꾸밀수록 자기다움은 죽고 남들처럼 살아가는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아이러니스트는 마지막 어휘로 색다른 자아를 창조하는 사람입니다


아이러니의 반대는 상식입니다. 리처드 로티에 따르면 마지막 어휘로 틀에 박힌 상투적인 말투를 버리고 자신만의 메타포로 자아를 끊임없이 창조하는 시인을 아이러니스트라고 합니다. 우연히 어떤 사건이 내 몸을 파고들며 눈먼 각인을 만들었지만, 그 당시의 전율하는 감동적인 느낌을 색다른 언어를 동원해서 작품화시키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전대미문의 색다른 작품을 만들어가는 예술가가 바로 아이러니스트입니다. 아이러니스트는 기존 언어적 사용 문법이나 전승되어 내려오는 언어 사용 방식에서 탈피하여 기존 사고를 전복할 참신한 메타포를 자주 사용하는 시인입니다. 아이러니스트는 무엇보다도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적 관성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언어 사용 방식을 새롭게 개척하면서 자신의 삶을 하나의 스토리로 구성해나가는 소설가입니다. 무엇보다도 아이러니스트는 자신의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어쩔 수 없는 과거라고 할지라도 주체적으로 재서술을 통해 이전과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역사를 재창조하는 역사 주의자입니다. 역사는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경험을 하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로 재 서술될 수 있다는 점에서 특수한 사건과 사고의 합작품입니다. 한 마디로 아이러니스트는 상식과 통념을 통렬히 깨부수고 어제와 다른 의미의 세계로 자신을 부단히 변신시키면서 자아를 창조하는 혁명가입니다.


‘눈먼 각인’으로 몸에 파인 흔적은 어느 누구의 경험과도 비교할 수 없는 우연적 특이성입니다. 이미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인 언어 사용 방식으로는 우연적 특이성을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고유한 감각적 체험의 기억을 마지막 어휘로 정리해서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는 결연한 각오로 담아내려는 안간힘이 이전과 다른 나를 새롭게 창조하게 만듭니다. 아이러니스트는 통념에 갇힌 기존 자아를 버리고 어제와 다른 언어적 문법으로 나의 깨달음을 부단히 다르게 표현하면서 새로운 나로 거듭 변신하는 니체의 위버멘쉬이기도 합니다. 오늘 여기서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색다른 나로 거듭 변신을 반복하는 혁명가적 자기가 바로 아이러니스트입니다. 비록 현실적 장벽이 높고 불가능한 그림자가 주변을 감싸고돈다고 할지라도 진부함을 거부하고 색다른 변화와 혁신을 거듭하는 시인의 삶은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본보기입니다. 마지막 어휘로 표현한 메타포가 과연 자신의 삶을 가장 자기답게 서술할 수 있을지  질문을 반복해서 던지면서 가장 자기 다운 모습을 부단히 재 서술하고 재창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아이러니스트입니다.



모든 것을 바꾸되 마지막 어휘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꿉니다

     

한 자동차 회사의 디자인 슬로건 중에 “Change It. But don't Change it”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꿔라 그러나 바꾸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 문장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바꾸라고 해놓고 바꾸지 말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바꾸는 데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리처드 로티의 마지막 어휘이고 제가 말하는 핵심가치입니다. 예들 들면 저는 열정, 혁신, 신뢰, 도전, 행복이라는 다섯 가지 핵심가치는 바꾸지 않습니다. 다만 바꾸는 것은 이 다섯 가지 핵심가치대로 세상을 바꿉니다. 다섯 가지 키워드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생긴 스토리를 근간으로 책을 쓰고 강의하면서 세상을 다섯 가지 키워드대로 바꾸려는 노력이 바로  “Change It. But don't Change it”이라는 표현입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바꾸지 말아야 할, 죽음과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어휘가 바로 Don’t change it의 대상입니다. 저의 마지막 어휘인 도전은 바꾸지 않고 세상 사람들에게 뜨거운 열정을 심어서 도전하는 삶을 살게 만듭니다. 여성들이 좋아하는 명품 가방이 추구하는 슬로건 중에 “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러나 근본은 변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게 리처드 로티가 얘기하는 마지막 어휘입니다. 마지막 어휘대로 모든 걸 다 바꾸는 게 everything changes입니다. 로티가 마지막 어휘라고 말하는 개념이 저에게는 도전인데, 이 말은 절대로 바꾸지 않고 모든 것을 도전이 추구하는 방향대로 바꿔나가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아이러니스트는 자신의 신념이 담긴 마지막 어휘도 질문의 대상에 올려 놓고 끊임없이 고뇌합니다. 과연 이 마지막 어휘가 진정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적확한 어휘인가를 묻고 또 묻습니다.


자동차 회사의 디자인 슬로건, “바꿔라. 그러나 바꾸지 말라”는 말이자 명품 가방의 슬로건인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러나 근본은 변하지 않습니다!”에 해당하는 말이 바로 리처드 로티의 마지막 어휘입니다. 도전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대로 의사결정하고 실천하는 삶을 끊임없이 살아가며 스토리(story)를 만들고 책을 쓰며 강연하는 삶을 통해 주변 사람을 도전하는 사람으로 변화시켜나가며 스토리를 축적하는 삶이 바로 아이러니스트의 삶입니다. 스토리가 반복해서 축적되면 저만의 독특한 히스토리(history)가 만들어지고. 히스토리는 다시 그 사람의 특유의 삶의 방식, 즉 마이 웨이(My Way)를 만들어갑니다. 마이웨이는 내가 누군가를 벤치마킹하고 모방해서 생긴 게 아니라 제 인생의 마지막 어휘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생기는 고유한 삶의 방식입니다. 리처드 로티가 얘기하는 마지막 어휘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도전하고 스토리를 만들어서 책을 쓰고 강의를 하고 사람들한테 전파하는 저의 삶 역시 누구의 삶을 모방해서 흉내 내는 삶이 아니라 저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살아가면서 생긴 단독적인 삶(singular life)입니다. 도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저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도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한계에 도전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동기를 부여하고 실천을 장려하는 책을 쓰고 강연하는 삶이 바로 리처드 로티가 이야기하는 아이러니스트의 삶입니다. 여러분도 리처드 로티처럼 마지막 어휘를 하나씩 선정해서 그대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여러분만의 스토리를 축적하면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독창적인 색깔과 스타일이 탄생합니다. 그때 비로소 여러분은 자기 다운 삶을 사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신을 시작합니다. 



아이러니스트의 삶은 우연성의 연속입니다


로티가 말하는 아이러니스트는 옳다고 믿는 진리 문제에 관해서도 오류일 수 있음을 열어두는 개방적인 사람입니다. 아이러니스트는 자신이 참이라고 믿는 진리조차도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궁극적 신념이 담긴 ‘마지막 어휘' 마저도 때에 따라서는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타성에 젖어 살아가지 않기 위해 기존의 고정관념이나 통념을 끊임없이 폐기 처분하고 늘 새롭게 배우는 아이러니스트는 폐기 학습(unlearning)의 전형입니다. 시인이 언어적 점성에서 벗어나 역발상을 시도하고 기존 상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발상을 즐기듯 아이러니스트는 늘 자신만의 메타포나 어휘를 사용하여 색다른 표현의 가능성을 추구합니다. 시인이 다른 시인의 시어를 모방하거나 시심을 따라서 흉내 내지 않듯이 아이러니스트 역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자기만의 언어로 스스로를 재창조하기 위해 재서술을 멈추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아이러니스트의 자아 창조 작업은 철저하게 사적인 영역 안에 한정시킵니다. 자기 고유의 마지막 어휘를 근간으로 어제와 다른 재서술을 통해 자아를 창조하는 작업은 누구나 합의할 수 있는 보편적 기준도 없고, 나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공통된 진리로 내 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의 메타포로 늘 자유로운 사색을 즐기면서 시심을 녹여내는 고유한 시를 쓰는 시인들이 다른 시인의 세계를 억압하는 정치적이고 공적인 힘을 갖지 않듯이, 아이러니스트 역시 사적인 영역에서 개인적인 희망과 창조적인 자율성을 갖고 무한한 자유를 즐깁니다. 


아이러니스트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믿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가변적인 것이고 우연히 마주쳐서 태어난 잠정적인 일리뿐입니다. 사실 로티가 자신의 철학에서 ‘우연성’을 강조하는 이유도 전통 형이상학에서 주장하는 ‘불변하는 실체·본질·본성’에 반대하기 위해 구안해낸 철학적 개념입니다. 우리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믿었던 고대 철학의 형이상학적 신념은 잘 못된 가정에서 생긴 오류하고 주장합니다. 로티는 세상에는 불변하는 본질로 이루어진 진리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마투라나가 말하는 생명체는 방랑하는 예술가처럼 우리라는 공동체는 물론 나의 정체성과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가 우연한 마주침을 통해서 생겼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로티는  아이러니스트에게 종교적 신념이나 근본적 가정 위에 세워졌다고 생각하는 절대적인 형이상학적 원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이러니스트는 삶 자체가 불안정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늘 어제와 다른 언어를 사용해서 어제와 다른 삶을 추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쓸 뿐입니다. 만고불변의 절대적 믿음이나 신념체계가 없다고 가정하는 토대 위에서 로티는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자유주의자(liberalist)를 그려냅니다. 자유주의자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나 신념으로 다른 사람이 믿도록 강요하는 잔인성이 최소화된 사회입니다. 하지만 자유주의자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이라는 이유로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는 존재하지도 않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근간으로 다른 사람에게 특정한 가치관을 믿으라고 강압하지도 않습니다. 자유주의자가 기껏해야 타자의 잔인성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가급적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뿐입니다.



아이러니스트는 자유주의자와 만나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liberal ironist)가 됩니다


자유주의자와 쌍두마차를 이루는 또 다른 주인공은 바로 사적인 영역을 무대로 삼는 아이러니스트입니다. 아이러니스트는 틀에 박힌 식상한 언어에서 벗어나 낯선 은유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아를 이전과 다르게 끊임없이 재창조는 사람입니다. 로티가 말하는 이상적인 자유주의 사회는 저마다의 신념과 철학이 담긴 마지막 어휘들이 특정한 잣대와 편견으로 재단되지 않고 자유롭게 경합하는 사회입니다. 마지막 어휘에 담긴 저마다의 눈먼 각인과 그 사연을 풀어나가는 어휘가 누가 더 설득력 있는지를 주고받으며 공감과 동의를 얻어가는 사회가 바로 자유주의 사회입니다. 로티는 우리 모두가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자유주의 사회라면 차별 없이 누구나 자유주의자가 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아이러니스트로 자유롭게 변신할 수 있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로티는 이런 사람을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liberal ironist)라고 말합니다.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는 사적인 영역에서는 아이러니스트처럼 마지막 어휘를 근간으로 새로운 메타포를 활용, 자아를 끊임없이 재 서술하고 재창조하는 과정에 몰두하고, 공적인 영역에서는 자유주의자처럼 잔인성이 강행됨으로써 당하는 고통과 굴욕을 최소화시키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고통과 굴욕을 최소화시키려는 안간힘 속에서 자유주의자에게 필요한 미덕이 바로 공감적 상상력입니다. 공감적 상상력은 내가 겪어보지 못한 타자의 아픔을 가슴으로 사랑하면서 역지사지로 생각하는 측은지심입니다. 이런 공감적 상상력이 커질수록 나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동료로 받아들이는 애정과 관심도 늘어납니다. 나와 인식과  관심이 다른 사람을 공동체 속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 만들어가는 관계를 로티는 ‘연대’라고 합니다. 우연성을 추구하는 아이러니스트는 비로소 다른 아이러니스트와 연대를 이루며 자유주의자와 함께 대화를 통해 민주 사회를 열어갑니다.



한 사람이 남긴 철학적 텍스트는 다양한 해독과 오독을 오고 가면서 사람들의 머릿속을 지배하며 또 다른 가능성의 세계로 문을 열어주는 지적 자극제입니다. 저자의 삶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어주는 살아있는 지침서로 작용합니다. 평범한 관심으로 읽기 시작했다가 읽기를 그만두지 못하고 책 속에 숨어 있는 저자의 숨은 숨결에 빠져들면서 뜨거운 열정과 냉철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문장 속으로 파고들어갑니다. 깊이 빠져들며 무수한 멈춤과 시작을 반복하다 깊은 사색에 빠지기도 하고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색다른 가능성을 잉태합니다. 이해가 가지 않으면 훑고 지나가다 다시 돌아와 그 의미를 문맥 속에서 다시 한번 파악해보고 책을 쓴 저자의 문제의식에 비추어 부분적 의미를 되짚어 봅니다. 핵심 개념 간 논리적 관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맺어보면서 개별 개념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논리적 지향점을 다시 생각합니다. 개별적 개념이 또 다른 개념과 만나 생성하는 관념은 단순한 상념이 아니라 저자 특유의 신념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틀에 박힌 언어 사용 방식의 점성(粘性)과 관성(慣性)에서 벗어나 참신한 연결 관계로 낯선 사유를 촉진하는 메타포의 세계로 몸을 던져 아이러니스트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써봅니다. 아이러니컬한 현실 속에서 진실의 의미를 파헤치는 아이러니스트의 탐구 여정은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자유주의자와 연합하여 저마다의 자기다움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열어가는 연대를 만들어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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