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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되어 본 적이 없는
내가 되는 비결

미셀 푸코의 자기 배려에서 배우다

어제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고 싶은가

비교하지 말고 비전을 품어라!

     

한 번도 되어 본 적이 없는 내가 되는 비결,

미셀 푸코(1926.10.15.1984.6.25.)의 자기 배려에서 배우다

     


‘번뜩’이는 통찰에 ‘섬뜩’하고 놀라는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그 사이 사람들은 ‘잔뜩’ 긴장합니다! 푸코의 철학적 사유를 훔쳐보면서 드는 단상이었습니다. “철학은 교묘합니다. 신체를 힘들게 하지 않고는 나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626쪽). 강민혁의 《자기 배려의 책 읽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푸코의 자기 배려 개념에 감동받고 동서양의 고전을 넘나드는 책 읽기로 걸작을 탄생시킨 평범한 은행원, 강민혁 저자의 고백입니다. 푸코의 철학 역시 온 힘을 다 기울여야 겨우 내 몸 안으로 들어와 속삭이기 시작합니다. “애를 쓰는 것, 시작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 시도해보는 것, 틀리는 것,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하는 것, 그리고도 여전히 발걸음을 머뭇거릴 방도를 생각해내는 것, 요컨대 의구심을 품고서 신중하게 작업하는 것이 포기와 다름없어 보이는 사람들로 말하자면, 우리가 그들과 같은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22쪽). 푸코의 《성의 역사 2》에 나오는 말입니다. 애를 써서 다시 읽어보고 큰 맘먹고 시작했다가 좌절하고 다시 읽어보려고 시도를 반복하면서 간신히 푸코가 주장하는 개념의 실마리를 잡았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이해는 미궁 속으로 빠집니다. 다시 의문의 화살을 던져 그 의미의 단서를 잡아보려고 하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미셸 푸코라는 철학자를 모셔다가 자기답게 사는 방법을 얘기하려고 합니다. 푸코를 공부하는 사람의 관심에 따라서 천의 얼굴을 지닌 니체처럼 푸코 역시 다양한 관심으로 방대한 철학 체계를 구축한 사람입니다. 여기서는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에서 말하는 자기 배려라는 개념으로 나답게 사는 방법, 나다움을 드러내는 방법, 색다름을 찾아 나만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방법, 색달라지면 저절로 남달라 지는 방법을 배워보려고 합니다. 동물 중에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남과 비교하다가 불행하게 죽어가는 유일한 동물이 바로 인간이라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남하고 비교하지 말자. (물건 떨어뜨리는 소리) 전과 비교하는 이런 삶을 살아야 될 것 같아요. 그래서 푸코를 한번 우리가 데려다가 푸코가 생각했던 몇 가지 핵심 개념에 비추어서, 어떻게 하면 나답게 살 수 있는지 이런 이야기를 같이 한번 나눠볼까 합니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은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우선 푸코 철학의 발전과정을 1기에서 3기까지 개략적으로 살펴보면서 푸코가 왜 자기 배려라는 개념에 몰두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푸코 철학의 1기는 지식과 고고학의 시기이며 《광기의 역사》, 《말과 사물》, 《지식의 고고학》이 이때 출간된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푸코는 일반 역사가와는 다르게 역사를 고고학적으로 탐구합니다. 남경태의 《한눈에 읽는 현대철학》에 따르면 역사가 동영상이라면 고고학은 사진입니다. 역사는 동영상처럼 일정한 시점에서 시점으로의 흐름이 강조되지만 고고학은 과거의 특정 한 장면을 포착, 사진으로 찍은 다음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고찰합니다. 역사학으로 밝혀낼 수 없는 숨죽이고 있는 타자들의 흔적을 들춰내는 새로운 연구방법을 푸코는 고고학에서 찾았습니다. 역사학적 흐름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흐름을 멈추고 당시의 시대적 정황에 비추어 볼 때 특정 사건이 왜 누락되거나 탈색되어 있는지, 그것이 담고 있는 침묵의 역사와 정상적인 사고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역사적 사건에서 배제된 비정상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 고고학의 임무입니다. 한 마디로 고고학은 정상적인 역사학적 관점으로는 보이지 않는 이면의 역사를 들춰보고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 잊힌 과거나 침묵하는 목소리를 드러내는 작업입니다.


푸코는 고고학을 탐구하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질문 방식을 채택합니다. 예를 들면 지식이란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혹은 누가 이러이러한 지식을 규정하는가?라고 질문합니다. 지식을 묻지 말고 지식을 둘러싼 권력을 물어보라는 게 푸코식 질문의 요지입니다. 왜냐하면 지식은 역사적 시기에 따라 그에 맞게 구성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어떤 의도를 품고 지식을 재단했는지에 따라서 지식은 전혀 다른 관점으로 편집되기 때문입니다. 누가 어떤 의도로 지식을 구성하고 누가 어떤 이유에서 그 구성물을 지식이라고 규정하는가에 따라 지식은 당대의 표준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아예 사람들에게 노출되지도 않고 숨겨집니다. 지식은 사물(사실)을 설명하는 말(담론)을 의미하지만 푸코의 관심은 사물 자체보다는 그 사물에 관해 누가 어떤 말을 왜 하는지, 즉 시대에 따라 변하는 담론에 관심에 있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과 경계, 정상과 광인을 구분하는 기준이 과학적이지 않다고 합니다. 푸코가 정상인에 의해 어둠 속에 갇혀 버린 침묵의 소리에 관심을 갖고 감옥이나 거대한 경찰 조직과 억압적인 국가 장치들의 존재 이유를 밝히는 데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입니다. 정상적인 혈압은 수축기 혈압 120mmHg 미만과 이완기 혈압 80mmHg 미만이라고 누군가 규정합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혈압 수치는 너무 낮다고 평가하고 130/90이 정상혈압이라고 규정하면 이전에는 고혈압 환자였지만 새로운 혈압 수치에 따르면 더 이상 고혈압 환자가 아닙니다. 혈압에 대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기준을 누가 정하는지에 따라서 정상과 비정상이 뒤바뀌기도 합니다. 제약회사가 혈압 기준을 정하는 기관이나 단체와 결탁해서 압력을 행사함으로써 정상적인 혈압 수치를 낮출수록 고혈압 환자가 늘어납니다. 환자의 증가는 제약 판매 신장과 직결됩니다. 고혈압을 판정하는 지식에 권력이 결탁되면 지식은 더 이상 순수한 앎을 위한 지표로 사용되지 않고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으로 작용합니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기준은 그때 그때 다릅니다


구분을 통해 주류로 인정돼서 선택된 것은 권력자나 강자가 되고 밖으로 밀려나 배제된 것은 약자나 소수자가 된다. 강자나 권력자의 목소리가 약자나 소수자의 목소리를 덮어버리면서 그들은 소외된 곳에 숨어서 침묵하기 시작합니다. 선택된 것은 세상의 주목을 받고 전경으로 드러나면서 중요하게 인식됩니다. 반대로 전경으로 드러나지 못하고 배경에 남아서 배제된 소수는 세상의 눈 밖으로 쫓겨나면서 관심 영역 밖에서 베일에 가려져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예를 들면 ‘광기’라는 개념을 규정하는 방식이 달라져왔습니다. 중세는 광기를 예지적 재능이라고 생각했고, 르네상스 시대 이성을 넘어선 영역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광기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띠다가 17세기에 접어들면서 광기는 윤리적 결함이 있는 비정상으로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비정상 취급을 받는 광기를 사회에서 격리 수용하는 종합병원 탄생합니다. 즉 광기가 비정상으로 규정되면서 정상적 사회에서 누락되고 숨겨지고 베일에 가려지기 시작합니다. 


정신분석학이 생겨난 19세부터는 광기를 정신질환으로 규정, 치료를 위해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 일이 발생합니다. 푸코가 얻은 결론은  각 시대마다 광기를 규정하는 담론은 일정한 기준에 따라 연속된 체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어떤 권력과 결탁되면서 불연속적이며 단절적인 기준에 따라 부침을 거듭한다고 판단합니다. 통념과 다르게 역사는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선형적으로 발전한다는 암묵적 가정도 부정합니다. 예를 들면 1930년 처음 발견되어 행성으로 분류된 명왕성은 수십 억 년 전부터 태양 주위를 도는 별로 밝혀졌지만 2006년 국제 천문 연맹에 의해 행성에서 탈락하고 소행성으로 분류됩니다. 누가 어떤 의도와 기준으로 판단하느냐에 따라 중심에 남을 수도 있고 주변으로 전락해서 가려질 수도 있습니다. 



푸코 철학의 2기는 권력과 계보학을 본격적으로 탐구하면서 《담론의 질서》,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1》 과 같은 저서를 출간합니다. 2기에 가면 지식과 권력의 야합 문제를 계보학적 문제의식에 비추어 본격적으로 파고듭니다. 푸코에게 지식은 언제나 권력이 지원을 받으며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기준으로 작용합니다. 특정 권력의 행사에도 항상 지식은 따라다닙니다. 예를 들면 광인을 정신질환자로 규정하는 지식에 따라 그들을 정신병원에 감금하는 과정에는 지식과 권력의 합작품인 정신병리학이라는 학문이 정신질환자 구분 기준과 처방 방식을 알려줍니다. 정신병리학이라는 지식권력을 가진 의사의 발언은 처방이고 비정상적 광기에 물든 광인들은 정신병리학적 처방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은 어떤 소리를 해도 미친 소리로 취급됩니다. 이런 점에서 푸코에게 지식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보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선택과 배제를 결정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지식은 과학자의 순수한 호기심으로 창조되지 않습니다. 


지식과 지식을 구분하는 과정에는 이미 권력이 개입됩니다. 지식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뺄 것은 빼고 더할 것은 더하는 과정을 권력이 결정합니다. 푸코에 따르면, 진리란 객관적으로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그 진리를 토대로 어떤 담론을 펼치는지에 따라서 결정되는 하나의 지식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진리는 그 내용보다 그 내용을 누가 왜 진리라고 주장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즉 진리에 포함된 지식의 역학적 관계들을 계보학적으로 탐구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똑같은 사물인데 그것에 대해 어떤 때는 지식으로 포함되고 다른 시기에는 지식이 아닌 것으로 배제되는 논리는 사전에 정해진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결정되지 않습니다. 푸코는 왜 어떤 것은 대중의 관심을 받는 말해진 지식이 되고, 어떤 것은 말해지지 않고 배제된 상태로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는지를 계보학적 질문을 통해 파헤치려는 작업을 합니다.



보복과 처형보다 감금과 길들임이 더 사람을 미치게 만듭니다


이런 문제는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나누는 문제와도 연동됩니다. 계보학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 숨기고 있는 이데올로기나 감추고 있는 권력의지를 밝혀내는 작업입니다. 푸코는 ‘사회 전체를 판옵티콘(Panopticon)에 비유합니다. 판옵티콘은 ‘모두 본다’는 뜻으로,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설계한 원형 감옥을 가리킵니다. 원형 감옥에서는 감시자는 중앙 통제 센터에서 모습을 감춘 채 죄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합니다. 하지만 죄수는 감시자를 볼 수 없습니다. 감시자는 죄수가 바라볼 수 없는 상태에서 죄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게 되는 불평등한 앎의 관계가 감옥에서 빠져나오지 ㅁ못하게 만드는 장본인입니다. 이런 점에서 직장 역시 판옵티콘입니다. 요즘은 회사 문화에 따라 많이 바뀌고 있지만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임원 순서로 앉아있습니다. 임원은 부장부터 사원까지 다 감시할 수 있지만 하위직급은 고위직급의 사람을 관찰할 수 없는 감옥인 셈입니다. 사원은 보이지만 다른 상위 직급의 사람을 볼 수 없고, 임원은 볼 수 있지만 다른 하위직급의 사람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팬옵티콘의 감옥입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감옥이 처벌 권력에서 길들임 권력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연구합니다. 죄를 지으면 이에 상응하는 처벌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던 감옥이 일정한 규율에 따라 죄수를 훈련시키는 교정 권력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주목합니다. 이런 감옥의 권력 변화과정은 학교와 군대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지금 당장 범죄 유형과 정도에 따라 처벌하지 않고 일정기간 반복해서 통제와 훈육을 통해 개인들을 길들이는 기관으로 변화되는 과정에 관심을 갖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푸코는 감금 또는 길들임이 처형이나 보복보다 더 인간적인가를 묻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얼핏 보면, ‘보복(처형)’에서 ‘길들임(감금)’으로 바뀐 것은 인간적 배려처럼 보입니다. 죄를 저지를 사람이라고 해서 눈앞에서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거나 비참하게 죽이지 않습니다. 



주기적으로 일정한 프로그램에 따라 죄수를 길들이고 훈육해서 교정하고 교화하는 과정은 참으로 인간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푸코는 ‘감금이 처형보다 더 인간적이다’라는 우리의 일반적 가정을 부정합니다. 처형이나 보복은 눈에 띄는 괴로움을 몸소 지금 당장 경험하지만 감금이나 길들임은 지금 당장 피부로 느끼지는 못하지만 점차 자신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괴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 사람은 눈에 보이는 고통인 처벌이나 처형에는 극도로 저항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감시와 반복되는 훈육에는 꼼짝 못 하고 당할까요? 예를 들면 제가 논문을 일정 기간 안에 써오지 않는 대학원생들을 집합시켜 놓고 군대처럼 얼차려를 주고 신체를 가격하면 저에게 아마 학생들이 저항할 겁니다. 하지만 한 사람씩 불러서 “너를 정말 믿었는데 실망했다”는 말을 하고 오랜 기간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속수무책이지만 애간장만 녹입니다. 


논문을 쓰기 싫은 대학원생들을 불러다 윽박지르고 강한 경고조치나 벌금으로 처벌하는 것보다 일정 기간 동안 논문을 쓰는지 별다른 언급도 하지 않고 집요하게 관찰하고 감시하면서 논문 쓰는 행동으로 교정하는 과정이 더 대학원생들을 괴롭게 만듭니다. 《한입 매일 철학》의 저자 황진규는 푸코의 감옥 변화 과정에서 등장하는 두 가지 권력을 재미있게 비교합니다.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 두는 권력(고문, 처형)에는 저항하지만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 권력(감시, 훈육)에는 저항조차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예전의 사장, 부모, 교사가 윽박지르고(죽게 만들고) 무관심했다면(살게 내버려 두고), 지금의 사장, 부모, 교사는 타이르고(살게 만들고) 실망하는(죽게 내버려 두는) 방식으로 길들이면서 교묘하게 자발적 복종심을 기릅니다. 자신도 모르게 감시와 훈육으로 지배당하면서도 저항하기는커녕 감사한 마음으로 충성을 다해 자발적 복종을 하다니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를 되물어봅니다.



자기 배려는 자기 포기에 가깝습니다


드디어 푸코 철학의 3기에 돌입하면서 자기 배려를 다루는 《주체의 해석학》이 정면에 등장합니다. 《성의 역사 1》을 1976년에 발간한 후 8년간 침묵을 유지하다 《성의 역사 2》, 《성의 역사 3》, 《주체의 해석학》을 펴냅니다. 한 마디로 권력에 예속되어 수동적으로 움직였던 주체가 자기다움을 향해 정면으로 부각됩니다. 지식과 권력의 야합으로 생긴 덫에 빠져 타율적으로 움직였던 무기력한 주체가 누구의 삶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전대미문의 작품으로 만들기 위한 결단, 즉 자기 배려로 거듭납니다. 즉 지식권력에 종속되었던 수동적 주체가 적극적 자기로 변신하는 혁명의 와중에 《주체의 해석학》이 위치합니다. ‘자기 배려’는 ‘배려’라는 단어가 주는 통념 때문에 자기를 배려한다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누군가를 배려한다는 caring은 가까이서 유심히 살펴보면서 보살펴 주고 돌봐준다는 뉘앙스로 다가옵니다. ‘자기 배려’는 물론 자신을 배려하는 의미지만 사실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예측하는 자기 배려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주체의 해석학》에 따르면 ‘자기 배려’는 “단 한 번도 되어본 적이 없는 자기가 되기(132쪽)” 또는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존재로서의 ‘자기’, 단 한 번도 그렇게 되어 본 적이 없는 ‘자기’를 구성”(119쪽) 해내기 위해서 기존의 “자기를 포기”(282쪽)에 가깝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이고. 자기 자신을 돌보는 행위이며, 자기 자신에 몰두하는 행위”(41쪽)이자 ”자기 배려는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고 최초의 빛을 접하는 순간에 위치합니다“(48쪽). 더 구체적으로 ‘자기 배려’는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기, 자신을 점검하기”(120쪽),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자신을 통제하기, 자신을 주장하기, 자신을 해방하기, 자신을 존중하기, 자기 자신을 돌보기,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기, 자기 자신에게서 즐거움을 발견하기, 자신을 치료하기, 자기 자신을 존중하기”(55쪽)이자 “자기 인식”(103쪽)입니다. 


자기 배려는 세 가지 관점(pp.53-54)에서 이해됩니다. 첫째,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계에 대한 태도입니다. 지식권력에 예속되어 감옥에 갇혔던 주체가 자기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둘째, 시선을 외부로부터 내부로 이동시켜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기입니다. 밖으로만 향했던 시선을 안으로 돌려 진정 내가 누구인지, 한 번도 되어본 적이 없는 내가 누구인지를 탐험하는 과정입니다. 셋째, 항시 자신에게 가하는 다수의 행위, 자신을 변형하고 정화하며 변모시키는 행위입니다.  정체된 상태에서 권력으로 구분되는 가운데 오염된 자기 자신을 새롭게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본래의 나의 모습으로 정화하고 변형시키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자기 배려, 그것은 내가 나에게 저항하는 것이다.……자기 배려는 본래적인 자기가 되는 일이며, 수많은 자기로 들끓는 그곳으로 돌아가 것이라고 할 수 있다”(120쪽). 자기 배려는 밖으로 향했던 욕망의 눈길을 거두고 본래적인 내가 되기 위해 시선을 안으로 돌리는 과정입니다. 푸코가 말하는 자기 배려는 남과 비교하면서 자기 계발을 추진해왔지만 자기 계발이 추진될수록 자기는 탕진되고 진정한 자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배려는 외부로 향하던 시선을 우선 내면으로 향하게 만들어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지 않으면 기존의 자기가 갖고 있는 한계와 무지를 모른다고 가정합니다. 따라서 자기 배려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과거의 자기에서 벗어나 ‘자기에 의한 자기의 구축,’ 혹은 자기 자신의 ‘작품화’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오로지 나만이 창조할 수 있는 전대미문의 나를 작품화시키는 과정에 필요한 노력이 바로 ‘자기 배려’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너 자신을 배려하라는 말입니다


자기 배려가 자기 돌봄이라면 무엇을 돌보는 것인가? 이것에 대한 단서가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 Ⅰ·Ⅱ》 ‘에 나옵니다. “자신에게 속하는 것들을 돌볼 때면, 그때 자신도 돌보는 것인가?”(알키비아데스, 128a)라는 물음으로 시작됩니다. 예를 들면 반지는 손에 속하고 신발은 발에 속합니다. 하지만 반지와 신발을 돌본다고 해서 손과 발을 돌보는 것은 아닙니다. 손에 속하는 것과 발에 속하는 것을 돌본다고 손과 발을 돌보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신발의 원료인 가죽을 활용해서 발을 더 편하게 만들기 위해서 신발을 제조하는 기술을 개발한다고 해서 발 자체를 편하게 만드는 기술로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신발을 돌보기 위해 배려해야 될 기술이 필요하듯 발을 돌보기 위해 필요한 기술이 따로 필요합니다. 무엇을 돌볼 것인지에 따라서 거기에 필요한 기술이 달라집니다. 문제는 진짜 돌봐야 하는 나는 돌보지 않고 나와 관련된 욕망의 사슬에 얽힌 수많은 부수적인 것들을 돌보는데 우리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나를 나로서 바로 서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를 돌보지 않고 현재 내가 남과 비교해볼 때 뒤처지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돌보다가 나는 없어지고 맙니다. 나의 안으로 파고들어가는 자기 수련의 과정을 포기하고 밖으로 향하는 욕망의 열차를 타고 다른 사람처럼 살아가는 수많은 나의 페로소나를 만들어내면서 다양한 상황에 따라 가면을 쓰고 나타납니다. 무엇을 돌보고 배려할 것인지를 정확히 알아내기 위해서 자기 인식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자기 연마의 고된 과정을 거치면서 자기를 인식하지 않을 때 푸코의 자기 배려는 심각한 위기를 맞이합니다.


푸코에 따르면 인간이 진리와 만나는 두 가지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그리스 사람들이 자기 삶의 주체가 되고, 주체가 진실과 만나는 방법이자 원칙이기도 합니다.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가 그것입니다. 푸코는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자기 인식은 자신을 돌보고 배려하면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삶인지를 실천 속에서 깨닫는 자기 배려에 속해있었습니다. 자기 배려가 자기 인식의 상위 개념으로 포섭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기 배려가 없어지고 자기 인식이라는 개념이 정면에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푸코에 따르면 고대철학의 과제는 추상적 이론을 검증하고 명제의 의미를 따져보며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을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인지적이고 인식론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고대 세계의 철학적 과제는 존재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실천의 문제였다.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일상적 삶의 조건과 기술을 어떻게 변화시킬지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 속에서 철학은 본래적 삶으로 돌아가 참된 자아의 모습을 발견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 푸코는 이런 철학적 자세를 자기 배려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배려는 스스로를 삶의 능동적 주체로 부각하는 삶의 기술입니다. 이런 자기 배려의 삶을 철학적 명제로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소크라테스입니다. 그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푸코식으로 해석하면 “너 자신을 배려하라”는 말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자기 배려의 이미지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을 돌보는 일보다 자신에게 속한 것을 돌보다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이처럼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자기 인식의 표본’인 것처럼 알려진 소크라테스는 사실 자기 배려의 아버지이자 선동가였습니다. 그에게 자기 배려가 중요했던 이유는 신이 명령하는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아 마땅한 것이 뭔가요? 살아오는 동안 나는 조용히 지내지 않았고,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돌보는 것(즉 돈벌이, 집안 살림, 군대 지휘, 대중 연설, 그리고 국가에서 생겨나는 다른 관직이나 결사나 파당)을 돌보지 않고, (…) 또 여러분에게나 나 자신에게나 아무 이득이 못될 그런 쪽으로는 가지 않고, 대신 가능한 최상의 혜택을 베풀어주는 쪽으로 갔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자신을 돌보는 일(즉 가장 훌륭하고 가장 현명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신을 돌보는 일) 보다 자신에게 속한 어떤 것을 돌보는 일을 앞세우지 않고, 또 국가 자체를 돌보는 일보다 국가에 속한 것들을 돌보는 일을 앞세우지 않도록, 그리고 다른 것들도 그런 똑같은 방식으로 돌보도록, 여러분 각각을 설득하려 시도하면 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내가 마땅히 겪어야 할 게 뭔가요?”(변명, 36c-d). 




고대 철학은 인식(자기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자기 배려)의 문제였습니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돌봐야 할 나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에게 속한 부수적인 산물이나 경제적 가치와 연결된 것을 돌보다가 자기 배려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진짜 돌봐야 할 것이지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면 무엇을 돌봐야 할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자기 배려는 자기 인식의 중요성과 연결됩니다. 돌보는 나는 정말 돌봐야 할 소중한 것을 돌보고 있는지 아니면 부수적이고 현실적으로 급하게 요구하는 중요한 것만을 돌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돌보지 않아도 될 것은 과감하게 포기하고 진짜 돌봐야 할 본질적인 것에 집중적으로 시간을 투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돌봄을 근간으로 전개되는 자기 배려와 돌봄의 대상을 정확하게 알기 위한 앎 또는 자기 인식은 자연스럽게 긴밀한 연관성을 띠게 됩니다. 무엇을 돌봐야 할지를 분명하게 알았다면 이제 자기 배려는 돌봄의 대상을 추상적으로 관조하거나 관념적으로 사유하지 않고 구체적인 실천 활동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점에서 자기 배려는 자기 인식과 다르게 삶을 변화시키는 구체적인 실천을 의미합니다.


고대 철학의 핵심적 과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 지금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와 같은 실천적 명제였습니다. 이렇게 자기 배려 속에서 자기 인식이 갖는 의미를 지녔던 관계가 어느 순간부터 자기 배려라는 개념보다 자기 인식이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을 푸코는 ‘데카르트의 순간’이라고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의 일보 직전까지 가서도 돌봄의 본질을 항변했던 자기 배려의 전통은 데카르트에 이르러 실천적 자기 배려는 관념적 자기 인식으로 완전히 대체됩니다. 데카르트는 아시다시피 딜레마 상황에서 결단과 실천을 통해 자기 변화를 모색하는 대신 자기 자신에 몰두하는 자신조차 믿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데카르트는 확실한 인식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불확실해 보이는 모든 것을 의심해 봄으로서 절대적으로 확실한 토대를 마련하고 그 위에 확실한 인식을 쌓아가려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인식 방법을 강조합니다. 푸코에 따르면 데카르트는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명증한 ‘자기 인식’으로 충분하다고 보면서 자기 배려를 결정적으로 실격시킨 사건의 주인공입니다. 


푸코의 자기 배려 개념에 비추어 볼 때 데카르트의 자기 인식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문제점은 인식 주체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적극적인 참여와 헌신적인 열정 없이 오로지 의심할 수 없는 순수한 의식을 통해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점입니다. 이렇게 되면 진리는 주체의 삶과 함께 혼연일체가 되는 삶의 체험적 깨달음이 아니라 진리는 냉정한 주체가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가야 할 객관적 대상일 뿐입니다. 진리를 발견했다고 해도 그것은 나의 삶을 구원할 수 없는 허망한 이데아일 뿐입니다. “달리 말해서 철학자에게 어떤 다른 것도 요청되지 않고 자신의 주체를 변형시키라는 요청을 전혀 받지 않고 철학자(혹은 학자나 단순히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는 자기 자신 안에서, 또 오로지 인식 행위만을 통해서 진실을 확인할 수 있고, 또 진실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61쪽). 주체의 자기 수련과 연마 그리고 변혁적 노력 없이도 인식만으로도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인식이 전면에 부각됨으로써 자기 삶을 변혁시키는 주제의 결단과 항거는 데카르트의 순간을 맞이하면서 추방됩니다.



진실은 주체의 존재 자체를 내기에 거는 대가로만 주체에게 부여됩니다


 자기 배려가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을 돌보는 행위이며 삶의 구체적인 기술을 통해 자신을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자기 수양 과정이라면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우리 삶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참여와 헌신을 회의에 빠뜨리는 장본인으로 작용할 뿐입니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 주체가 자기 자신을 변형시킬 수 있고……자기가 자신에게 공들이는 작업, 자기 수련이라는 장기간의 노력 속에서 자신이 그 책임을 지는 자기에 의한 자기 자신의 점진적 변화입니다”(59쪽).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을 전대미문의 위대한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자기 창조 과정이 구현되어 나갈 때 자기 배려로 변화되는 삶 자체가 진실이 됩니다. “진실은 주체의 존재 자체를 내기에 거는 대가로만 주체에게 부여(59쪽)되고 “주체의 개심이나 변형 없이는 진실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59쪽). ‘자기 배려’와 ‘자기 인식’은 실천과 인식으로 상반된 두 가지 세계를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푸코가 추적해서 연구해본 결과 소크라테스를 비롯해서 그리스인들의 실제 삶 속에서는 ‘자기 인식’은 항상 ‘자기 배려’의 큰 범주 속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를 배려하는 것은 자기를 인식하는 것”(117쪽)이 되는 자기 배려와 자기 인식의 상호관계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데카르트의 결정적인 순간을 기점으로 자기 배려는 실종되고 자기 인식이 서양철학의 대표적인 사유 체계로 자리를 잡게 된 주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독교가 자기를 포기해야 신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신념을 강조하면서 육체적 실천보다는 정신을 기반으로 신을 만나야 작금의 현실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교리 때문에 자기 배려는 일종의 죄악으로 간주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배려의 오랜 전통이 인식만으로도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자기 인식으로 대체되는 데카르트의 순간은 중세 기독교적 교리가 주장하는 ‘신의 뜻에 따르기 위해’ 자기를 포기하라는 교리를 만나면서 가속도가 붙기 시작합니다. 데카르트의 합리 주적 담론은 자기 인식을 우위에 두고 자기 배려를 완전히 배제하는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자기 배려가 진실된 삶을 기반으로 진리에 접근하는 삶의 큰 목적이라면, 자기 인식은 자기를 배려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나 수단적 전제 조건에 해당합니다.



물리학적 용어 중에 상전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상전이는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될 때, 물과 얼음이 뒤섞여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온도가 더 뜨거워지면 물로 바뀌고, 온도가 더 낮아지면 얼음으로 바뀌는 상태가 혼재된 상태를 상전이라고 합니다.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둘 사이의 교집합 상태가 바로 상전이 상태입니다. 자기 인식 상태와 푸코가 주장하는 자기 배려가 뒤섞여있는 상태가 상전이 상태입니다. 푸코가 데카르트의 순간을 전복시키면서 비로소 이제 “너 자신을 알라”를 너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 너는 너로 살아가고 있는지 “너 자신을 들여다봐라”라고 외칩니다. 그 순간이 바로 자기 배려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주체가 진실이라고 믿는 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실천을 해보라는 주장 합니다. 자기 배려는 파레시아를 통해 현실에 구현됩니다.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가 믿는 진리를 나의 신념으로 각인하고 그 주장을 삶에 실천하면서 우리가 갈구하는 진실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바로 자기 배려의 여정입니다. 자기 인식은 실천하지 않고 관념적으로 진리에 도달하려고 했다면, 자기 배려는 내가 믿고 있는 진실을 현실에 구현하기 위해 결연한 결단과 함께 실천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실천과 행위와 무관하게 앉아서 독립적인 인식만으로도 어떤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자기 철학을 만들어나가는 출발점에 자기 배려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상전이를 푸코는 ‘전복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데카르트의 순간을 뒤집어엎고 자기 인식으로 실종된 자기 배려가 다시 복권되는 시점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탐험해봐야 행복한 진로를 찾습니다


이런 자기 배려를 향한 결단과 결행이 이루어지려면 권력과 규율, 제도와 장치에 의존했던 순종적 주체가 진실을 발굴하기 위해 위험한 실천을 주도하는 적극적 ‘영성’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푸코는 말합니다. 푸코가 말하는 ‘영성’이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진실의 알맹이를 찾아 신체에 각인시키는 노력입니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변형을 가하는 탐구·실천·경험 전반”(58쪽)이나 “주체의 존재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를 구성하는 정화, 자기 수련, 포기, 시선의 변환, 생활의 변화 등과 같은 탐구, 그리고 실천, 경험 전반을 영성”(58쪽)이라고 정의합니다. 이런 영성은 파레시아(parresia), 즉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말하는 용기와 만날 때 어떤 압력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향하는 마음에 불꽃을 태웁니다. 내 목에 칼이 들어오는데 위험을 무릅쓰고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을 파레시아스트트(parrêsiastês)라고 합니다. 


파레시아스트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진실이라고 말하는 과감한 결단과 용기를 갖고 자신의 소신과 신념을 굽히지 않는 사람입니다. “말해야 할 바를 말하게 하며,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를 말하게 하는 자유”(394쪽)를 함의하며, 이 자유는 “말해야 할 바를 말하고 싶기 때문에 그것을 말하고 싶은 순간에, 그것을 말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형식 속에서 말하게 만드는 솔직함 자유 개방 같은 것”(398쪽)입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던 갈릴레오나 사형선고를 앞두고도 거침없이 자신의 주장을 피력한 소크라테스가 파레시이스트의 전형입니다. 파레시아스트는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을 말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이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에 진실된 것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파레시아를 통해 자기 배려는 안락함의 나락으로 추락하지 않고 타자와 진실한 관계를 맺으려 안간힘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 ‘단 한 번도 되어 본 적 없는 자기 되기’라는 철학의 격투가 시작되며 경이로운 자기로 재탄생을 시작합니다.



논어(論語)에 따르면 진짜 공부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노동으로 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 이 아니라 내가 하면 즐겁고 신나는 과정을 놀이로 즐기는 위기지학(爲己之學)입니다. 위기지학으로 공부할 때 비로소 나였던 그 아이가 나타나 나답게 살아가는 길을 따라가는 삶이 시작됩니다.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고 도(道)를 얻어내려는 공부가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면 남에게 보여주고 이목을 끌기 위해 온 정신을 쏟는 공부를 위인(爲人之學)입니다. 위기지학이 나다움을 찾아 나서는 놀이로서의 공부라면 위인지학은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노동으로서의 공부입니다. 위기지학의 공부를 할수록 자신의 내면적 성숙을 위한 성찰 과정에 집중하지만, 위인지학의 공부를 할수록 남의눈을 의식하면서 어떻게 하면 남에게 잘 보일 수 있을지에 집중하게 됩니다. 위기지학의 공부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을 구축하기 위해 깊은 뿌리를 내리는데 주력하는 공부입니다. 반면에 위인 지학의 공부는 내면적 성숙과 성찰보다 외형적 포장과 치장에 치중합니다. 그래서 위기지학이 자기다움의 발견과 인격적 성숙을 추구하는 공부라면, 위인지학은 타인에게 인정받고 이해타산을 따지며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공부입니다. 위인지학의 공부는 할수록 내면적 공허감이 깊어지지만 위기지학의 공부는 할수록 내면적 충만감이 깊어집니다. 


푸코 식으로 얘기하면 세상에 누가 뭐라고 말하건 말건 파레시아, 진실을 가지고 위험함을 무릅쓰고 파고들어가는 공부의 길을 들어선 사람은 파레시아스트입니다. 저도 예전에 고시공부  합격해서 충북 음성 출신 사법고시 합격이라는 플래카드 걸고 남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시작했습니다. 이런 공부가 전형적으로 위인지학입니다. 위인지학은 결과 중심으로 하는 공부입니다. 어머니나 선생님한테 잘 보이려고 자신은 하기 싫은 데 억지로 하는 공부입니다. 푸코는 이런 공부를 노동으로 하는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하면 할수록 불행한 공부입니다. 내가 하면 신나고 재미있는 공부, 재미있는 능력인 재능을 찾아가는 공부는 밖으로 향하는 시선을 통해서 알 수 없습니다. 자기 내면을 응시하며 내가 잘할 수 있는 능력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면서 알아내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이런 공부는 인식으로 진리에 도달하려는 자기 인식으로 알 수 없고 자기 연마와 수련을 통해 나다움을 찾아가는 자기 배려를 통해서만이 찾아낼 수 있습니다. 


진학과 진로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인식과 실천, 즉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의 차이점을 실감할 겁니다. 진학, 즉 내가 어느 대학을 갈지는 책상에 앉아서 결정할 수 있지만  내가 어떤 길을 가면 행복한 진로인지는 몸을 던져서 해보지 않으면 찾을 수 없습니다. 《연금술사》의 저자, 파울로 코엘료가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때로는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로 이끌 때도 있습니다.” 기차를 탔는데 잘못 탄 것 같다면 중간에 뛰어내리지 말고 그냥 가보는 겁니다. 가다 보면 제대로 된 길로 가고 있는 경우도 만납니다. 제가 용접공을 하고 싶어서 힌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시작했습니다. 일종의 잘 못 탄 기차를 탄 셈입니다. 중간에 고시 공부행 기차를 또 한 번 잘 못 탑니다. 덕분에 대학교에 와서 은인들을 만나고 우여곡절 끝에 유학 가는 기차를 탔다가 다시 회사로 가는 취업행 기차를 탑니다. 다시 우여곡절 끝에 한양대행 대학교수가 되는 길로 들어섭니다.



자기 계발은 자기를 탕진하는 작업입니다


푸코가 비난하는 공부는 요즘 말로 얘기하면 자아실현이나 자기 계발을 위한 공부입니다. 자기를 계발할수록 자기가 탕진되는 공부입니다. 비교 대상의 어제의 내가 아니라 밖에 있는 다른 경쟁 상대입니다. 전보다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공부가 아니라 남보다 잘하기 위한 공부에 몰입할수록 나를 알 수 없는 공부로 전락합니다. 자기 계발(자아실현)을 위한 공부와 자기 배려(자아발견)를 위한 공부의 차이를 제대로 인식하고 자기 계발을 할수록 자아실현의 길에서 멀어지는 위인지학의 공부를 멈춰야 합니다. 대신에 한 번도 되어본 적이 없는 자기를 찾아가는 자아발견의 공부, 즉 위기지학의 공부를 해야 합니다. “자본주의에 유용한 신체의 기술은 증대시키지만,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힘으로 커지지 않는 데까지만 그렇게 한다. 더군다나 우리의 증대된 신체의 힘을 자기를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 타자에 의해 구성된 욕망들(명문대 입학, 승진, 급여 인상 등)에 투여되어 소비될 뿐이다. 자기 계발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권력에 예속된다. 자기 계발은 자기를 탕진하는 작업이다”(114쪽). 강민혁의 《자기 배려의 책 읽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자기 계발의 방향은 밖의 경쟁자에 주어져 있다. 나의 색다름을 찾는 공부가 아니라 남과 다르게 하기 위한 공부에 초점이 주어져 있습니다. 남다르게 차별화되는 자기 계발을 반복할수록 나다움을 찾는 자기 배려는 실종되는 공부입니다. “자기 배려의 출발점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존재로 대하는 것이다. 모르는 존재, 알 수 없는 존재, 즉 철학에서 말하는 타자(他者)다.……모를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이기, 자기 말을 듣기, 이것이 자기 배려의 출발”(178쪽). 엄기호의 《공부 공부》에 나오는 말입니다.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처음으로 안으로 돌려 내가 되고 싶은 나의 본래 모습에 귀를 기울여봅니다. 치열하게 자기 계발을 해왔지만 자기는 계발되는커녕 자아는 실현되지 않고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설혹 자아가 실현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참다운 자기는 모습을 감추고 사이비 자아가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리와 토끼, 그리고 참새가 동물학교에 입학했다고 가정해봅니다. 동물학교의 첫날 교과목은 수영하기입니다. 수영은 오리가 제일 잘합니다. 그런데 토끼는 선천적으로 수영을 할 수 없는 동물입니다. 토끼가 오리의 재능인 수영하는 능력을 따라잡기 위해서 토끼 엄마가 토끼를 데리고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괌으로 전지훈련을 다녀옵니다. 그래도 토끼는 수영을 오리처럼 잘할 수 없습니다. 수영을 배우는 토끼는 죽을 맛입니다. 둘째 날 교과목은 눈 오는 날 산등성이 올라가는 등산입니다. 산등성이 올라가는 교과목을 배우는 동안에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동물은 오리입니다. 수영을 배우기 위해 스트레스를 받았던 토끼는 가장 신나는 시간을 맞이합니다. 이번에는 오리 엄마가 토끼와 비교해서 오리를 야단칩니다. 야 너는 바보 아니냐고. 옆집의 토끼는 눈 오는 날 산등성이를 저렇게 잘 올라가는 데 너는 바보 아니냐고. 오리 엄마는 경쟁심에 부타 겨울방학을 맞이하여 토끼처럼 등산을 잘하기 위해 어리를 데리고 알래스카로 전지훈련을 다녀옵니다. 오리는 뼈를 깎는 각오로 훈련에 임했지만 남은 것은 찢어진 물갈퀴, 동상에 걸린 발, 관절염이나 디스크에 걸린 질병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날 교과목은 노래하기입니다.. 노래는 참새가 제일 잘합니다. 물론 오리도 노래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토끼는 전혀 노래를 못합니다. 노래를 못하는 토끼를 데려다 성대 수술을 해도 토끼의 재능은 노래를 잘하는 참새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토끼는 수영할 필요가 없고 오리는 산등성이를 올라갈 필요가 없으며, 참새 역시 수영하거나 산등성이를 올라갈 필요 없이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잘하면 되는 능력을 개발, 신나게 하다 보면 그게 재능이 되는 삶, 그 재능을 살려 즐겁고 신나게 살아가는 삶이 행복한 삶입니다.


자연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절대로 남하고 비교하지 않습니다. 오리는 산등성이에 올라가는 능력을 배우지 않고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토끼는 수영하는 능력을 배우지 않고도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불필요한 걸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능력을 개발하는 자기 계발이 시작되면서 비참한 인생을 사는 겁니다. 시선을 밖으로 향해서 남과 비교하지 말고 시선을 안으로 향하면서 내가 갖고 있는 고유한 능력으로 한 번도 되어 본 적이 없는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이 바로 자기 배려입니다.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 보면 오상아(吾喪我)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염된 ‘나(我)’를 죽여야 원래의 ‘나(吾)’로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뒤에 있는 아(我)는 허구의 나이고 맨 앞에 있는 오(吾)는 본연의 나입니다. 허구의 껍데기를 둘러싸고 있는 나(我)를 죽여야 본래의 내(吾)가 탄생합니다. 아(我)와 오(吾)의 싸움에서 늘 오(吾)는 죽고 아(我)가 득세했던 공부가 자아실현을 목표로 대중의 심리를 자극했던 자기 계발 패러다임입니다. 본래의 내가 누구인지를 책상에서 앉아서 인식만으로 찾을 수 없습니다. 본래의 나는 다양한 실험과 모색,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실천하는 가운데 내 몸속에 꿈틀거리던 자기다움이 드러나면서 발견됩니다. “당신을 연기하라. 다른 배역은 이미 다 찼다.” 오스카 와일드의 명언입니다. 푸코 식으로 해석해보면 너를 드러낼 수 있는 참다운 자기를 연기해야지 왜 자꾸 다른 배역을 연기하는지를 물어보는 말입니다.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안으로 향하게 만든 다음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고유함을 찾아가는 여정이 자기 배려에 해당됩니다.



친숙한 환경의 바깥으로 나가야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푸코의 자기 배려를 철학을 읽고 유영만의 독특한 브랜드 이미지를 3개를 만들었어요. 첫 번째는 명함에 명시된 지식생태학자입니다. 지식생태학자는 생태계에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원리를 관찰하고 고찰해서 통찰력을 얻은 다음 인간과 조직 변화에 적용, 이전과 다른 변화 추진 아이디어를 얻으며 성찰을 반복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겨울에는 생태계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지식동태학자로 그 모습을 살짝 바꾸기도 합니다. 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또 다른 브랜드 이름은 지식산부인과 의사입니다. 이런 타이틀도 지식생태학자와 마찬가지로 전 세계에 저 혼자밖에 없습니다. 세계 최초로 지식 임신과 출산과정에 대해서 연구를 통해 건강한 지식의 임신과 출산 조건과 방해요인을 분석하고 규명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지식 자연분만 유도법, 지식 낙태수술 방지법, 건강한 지식 잉태법과 같은 전대미문의 새로운 연구를 통해 저의 고유함을 드러내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의 고유한 정체성은 학습건강 전문의사로 자리매김을 시도합니다. 개인별로 앓고 있는 학습 질환을 독특한 학습 병명으로 명명하고 이를 예방, 진단, 치료할 수 있는 학습 신약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학습 질환 유형별 예방과 치료를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학습건강 전문의사는 물론 학습 신약을 환자 상태에 맞게 조제해서 제공하는 학습 약사도 육성할 예정입니다. 학습 병원과 학습 약국을 차리면 학습 병원을 전문적으로 운영하는 학습 의사 자격증도 개발하고 학습 약국을 담당할 학습 약사 자격증을 발급할 예정입니다. 이런 고유한 브랜드 이름을 통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재미있고 즐겁게 학습, 자기한테 필요한 건강한 지식을 임신하고 출산하게 한 다음 자기 분야에 적용해서 보람찬 성과를 거두게 할 수 있을지를 지원해주는 데 저의 사명이 숨어 있습니다. 제가 지식 임신 클리닉을 세계 최초로 개설해서 지식 잉태가 잘 안 되는 사람을 대상으로 지식 임신 컨설팅 서비를 제공하면 정말 산부인과 의사가 저에게 의사 자격증이 있냐고 물어보기도 합니다. 의사 자격증이 없는데 의사라는 말을 쓰면 사기죄로 고소당할 수 있다고 저에게 시비를 거는 정말 개념이 없는 의사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내가 걸어가는 길은 앞에 있지 않고 뒤로 생깁니다. 신영복 교수님도 길은 앞에 있지 않고 뒤로 생긴다고 했습니다. 놀라운 통찰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통 길은 앞에 있고 그 길을 따라가는 게 길을 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길은 이미 누군가 걸어간 길입니다. 이 세상에 그 어디도 없는 나를 작품화시키는 과정은 그 누구도 걸어가지 않은 길을 걸어가면서 심장 뛰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 바로 푸코가 말하는 자기 배려입니다. 전대미문의 나만의 작품은 누군가의 작품을 벤치마킹하거나 비교해서 나오지 않습니다. 내면으로 들어가서 도대체 기존의 나를 완전히 파괴하고 진정한 나다움이 지향하는 방향을 찾아갈 때 자기 배려는 비로소 깊은 의미를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한 번도 된 적이 없는 내가 되려는 애쓰는 과정 속에서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나만의 작품이 탄생한다고 생각합니다. 


“알아야만 하는 것을 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호기심인 것이다. 앎에 대한 열정이 지식의 획득만을 보장할 뿐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되도록 아는 자의 일탈을 확실히 해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23쪽). 푸코의 《성의 역사 2》에 나오는 말입니다. 기존의 나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들어서려는 안간힘 속에 푸코가 말하는 호기심이 자라고 지식의 획득을 넘어서 익숙한 여기를 벗어나 미지의 세계로 탈주하려는 일탈의 욕망 속에 호기심은 또한 촉발점으로 작용합니다. 오늘도 호기심 어린 동심으로 본래의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시작합니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 파블로 네루다의 《질문의 책》에 나오는 시 구절의 일부입니다. 나였던 그 아이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찾아들어가지 않아서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애타게 기다리는 그 아이를 찾아가는 여행을 떠납시다. “결국 위험은……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보장을 멀리 떠나 친숙한 광경들의 바깥(dehors)으로, 우리가 아직 그 범주들을 구성하지 못한 땅으로, 예견하기 어려운 종말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69쪽). 《지식의 고고학》에 나오는 말로 이 장을 마무리합니다. 친숙한 환경의 바깥으로 나가야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호기심을 무장하고 나를 발견하기 위해 떠나는 자기 배려의 여행은 내가 몸담았던 익숙한 여기를 떠나 바깥으로 떠나는 위험한 여정입니다. 비록 그 길이 예견하기 어려운 종말을 앞당긴다고 해도 파레시아스트는 더 위험한 일이 생기기 전에 용기 있게 그 길을 향해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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