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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머리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

몸을 움직여 삶을 바꾸는 비결,  움베르토 마투라나에게 배우다

생각한 대로 나의 미래를 바꾸고 싶다면?

몸에 밴 행동 지식을 개발하라!

     

머리의 명령을 듣지 않는 몸을 움직여 삶을 바꾸는 비결

움베르토 마투라나(1928.9.14)의 방랑하는 예술가론에서 배우다

     


칠레의 인지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는 특이하게도 심리학이 아니라 생물학을 근간으로 인간의 앎과 삶과 행동의 관계를 연구한 학자입니다. 마투라나의 철학을 한 마디로 얘기하면 “몸은 머리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입니. 해가 바뀌면서 많은 사람의 결심 중의 한 가지는 운동하기입니다. 작심삼일의 유혹을 넘기지만 운동을 지속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머릿속에서는 계속 운동하라고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운동을 지금 당장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나 핑계를 찾아서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몸은 여전히 머리의 명령에 굴복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생각한 대로 행동하지 않고 몸에 밴 행동 지식대로 행동한다는 사실을 마투라나의 주장에 비추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여기서 주장하는 많은 내용은 마투라나와 바렐라가 함께 쓴 《앎의 나무》라는 책을 참고했습니다. 



몸은 머리의 명령을 듣지 않습니다


나중에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마투라나의 주장을 살펴보기 전에 우선 《이기적 유전자》를 쓴 리처드 도킨스의 입장과 비교해보면 마투라나의 입장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전자의 역할과 생명체의 성장과정에 대해서 정면으로 반대되는 입장을 표명하기 때문입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인간은 유전자의 자기 복제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미래는 유전자가 결정한다는 입장입니다. 인간의 생명체는 유전자의 생존 기계 정도밖에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어떤 노력을 해도 변하지 않고, 이미 그 사람의 유전자 DNA에 그 사람의 미래가 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마투라나는 이와 대조되는 입장을 취합니다. 오히려 유전자는 수많은 세포 구성요소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데 문제는 언제 어디서 어떤 환경에서 누구와 상호작용하면서 적응 활동을 계속해나갈 것인지를 예측할 수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마투라나는 생명체의 모든 진화는 자연 표류(natural drift)로 설명합니다. 산 정상에서 물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고 가정할 때 물이 흘러내려오다가 바위도 만나고 나무뿌리와 각종 풀, 그리고 구덩이 등을 만나면서 언제 어디로 흘러갈지 예측할 수 없는 상태를 자연 표류라고 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흘러 다니면서 여기 부딪쳤다가 저기 부딪치고 부딪치는 과정에서 생명체의 신체구조가 환경과 만나면서 바뀌고 다시 바뀐 신체구조가 거꾸로 환경을 바꿔나가는 상호작용을 통해서 생명체는 진화를 거듭한다고 보는 입장이 마투라나의 방랑하는 예술가론입니다. 자연과 사투를 벌이면서 때로는 우발적 마주침과 무한 표류를 경험하면서 자기 존재의 고유함을 어떻게 지켜왔는지를 유구한 생명체의 역사를 통해 도발적인 주장을 펼쳐나갑니다. 나아가 자신들이 창안해낸 독특한 개념 체계와 사유체계로 새로운 생명체의 인식과 행동과 존재의 삼각관계를 파격적인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면서 마투라나의 앎과 삶과 함의 관계를 풀어보겠습니다. 오늘 제 강의 끝나고 지하철 타고 집에 가는 데 마침 옆에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남자가 앉아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시간 되면 어느 역에서 내릴지 모르지만 내리는 역에서 커피 한 잔 하시겠습니까?라고 데이트를 요청하고 싶지만 생각대로 입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 말을 할까 말까 계속 고민하는 사이에 그 남자는 지하철역에 내리고 말았습니다. 이와 반대되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딱 앉자마자 바로 행동으로 옮깁니다. 시간 되시면 편안한 역에 내려서 커피 한 잔 하시겠습니까? 생각을 거듭하며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데이트 신청을 합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뭘까요? 한 사람은 생각만 계속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못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바로 생각한 대로 행동으로 옮겨서 데이트 신청을 합니다. 멋진 남자와 낭만적인 데이트를 즐기는 사람은 바로 행동에 옮긴 한 여학생입니다. 말해야 될 것 같았는데 말을 못 하고 망설이다가 그 남자가 전철에서 내려서 떠나가는 걸 보고 아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투라나에 따르면 앎(knowing)은 함(doing)과 구분되는 독립적인 활동이 아니라 앎은 효과적인 행위라고 합니다. 앎은 이미 함입니다. 몸에 밴 행동 지식이 있는 사람은 생각한 바를 바로 행동으로 옮긴 사람입니다. 생각한 바를 몸으로 실천하면서 생긴 행동 지식이 생각하자마자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원동력이 됩니다. 세상을 바꾸고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은 몸에 밴 행동 지식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냥 지식이 세상을 바꾸지 않습니다. 몸에 밴 행동 지식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 그만큼 행동하면서 또 다른 앎을 축적합니다. 몸은 머리의 명령어를 듣지 않고. 오히려 몸이 잘 숙련되다 보면 머리에 명령을 내립니다. 몸을 많이 움직여서 습관화되고 관성에 배긴 사람들은 오히려 정신이 나태하기를 내버려 두지 않고 몸이 계속 움직여서 정신을 바꿉니다. 우리는 생각한 대로 행동하지 않고 몸에 밴 행동 지식대로 행동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 문제를 마투라나의 문제의식으로 시작해서 함께 고민하면서 풀어보겠습니다.


앎은 생명체가 안간힘을 쓰면서 살아가기 위해 보여주는 생존 방식입니다. 알고 나서 행동하는 게 아니라 알아가는 인식의 과정은 한 생명체가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가기 위해 보여주는 행동방식입니다. 즉 인식은 행동방식이 그것으로 탄생된 행동 지식입니다. 외부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한 앎을 근거로 행동하고 완벽한 계획을 수립한 다음 실행에 옮기는 선지후행(先知後行)의 지행일치(知行一致)를 거부하는 인지 생물학적 인식론을 주장하는 마투라나의 핵심적인 주장을 논의해봅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앎은 철학적 인식론을 연구하듯 현실과 무관한 창백한 연구실에서 탄생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인지 생물학적 인식론은 생명체의 기나긴 역사적 발자취를 추적하면서 그들이 살아가는 생태계 현장에서 오랫동안의 관찰과 통찰로 건져 올린 사회 역사적 산물입니다. 



생명체의 특이성은 ‘구조 접속’을 통한 ‘자기 생성’의 결과입니다


마투라나에 따르면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자신(auto)을 제작(poiesis)하는 오토 포이에시스, 즉 자기 생성(autopoiesis)의 역동적 실체입니다. 모든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세포에 비추어 오토 포이에시스를 생물학적으로 다시 정의를 내리면 끊임없는 생성 활동을 하면서 ‘자기가 자기 자신을 만들어내는 세포 활동 자체’를 뜻합니다. 자기 생성 체계로서 세포는 주변 환경과 부단히 상호작용을 거듭하면서 자신을 역동적인 다른 개체로 구성하는 핵심 주체입니다. “생물을 특징짓는 것은 자기 자신을 말 그대로 지속적으로 생성하는 데 있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생물을 정의하는 조직을 자기 생성 조직이라고 부르고자 한다”(56쪽). 자기 생성 개념에 따르면 유전자가 결정한 대로 환경변화에 관계없이 결정된 유전자 체계의 운명대로 살아가는 생명체는 없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환경이나 다른 생명체와의 부단한 상호작용을 통해 어제와 다른 나로 자기 변신을 거듭하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생성합니다.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생성할지는 지금 여기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자기 생성 체계의 가장 독특한 점이란 말하자면 자기 옷을 스스로 여민다는 사실, 곧 자신의 역동성을 바탕으로 자신을 주위 환경과 다른 것으로 구성한다는 사실이다”(58쪽). 자기 생성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 에너지원이 바로 구조 접속(structural coupling)입니다. 구조 접속이 끊어지면 생명체의 자기 생성을 위한 에너지원이 차단된다는 의미입니다. 개체와 환경의 구조 접속이 끊어짐으로써 에너지원의 유입이 끊기면 생명체로써의 고유한 특성을 더 이상 생성할 수 없어지고 결국은 생명성을 상실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생명체의 자기 생성을 위한 분투노력은 살아가기 위한 생존투쟁이며 그것으로 한 생명의 특이성은 살아나는 과정입니다. 자기 생성의 멈춤은 곧 생명체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생명체가 살아가면서 보여주는 모든 활동은 다른 생명체나 환경과 무관하게 홀로 작동하는 독립적인 활동이 아닙니다. 생명활동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 그리고 생명체가 살아가는 주변 환경과 구조 접속된 채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구조 접속이란 무엇인가? “개체와 환경의 재귀적 상호작용은 둘의 상호 섭동으로 나타난다. 이런 상호작용에서의 환경의 구조는 자기 생성 개체의 구조에 변화를 유발할 뿐, 그것을 결정하거나 명령하지 않는다. 이것은 거꾸로 환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개체와 환경이 해체되지 않는 한, 이런 재귀적 상호작용은 구조 변화를 서로 주고받는 역사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조 접속이라고 부르는 것이다”(91쪽). 다시 말해서 구조 접속이란 생명체가 주변 환경과의 재귀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자신의 생명 조직을 잃지 않고 부단히 자신의 신경계 구조를 변화시키는 활동입니다. 주변 환경이 생명체에 주는 모든 자극을 섭동이라고 합니다. 섭동이 생명체에 자극을 주면 기존 생명체의 구조에 변화가 일어나고 일어난 구조는 다시 환경에 영향을 주어 환경에도 구조 변화가 일어납니다. 생명체와 환경이 주고받는 이런 상호 작용을 재귀적 상호작용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재귀적’이라는 말은 생명체와 환경이 주고받는 상호작용이 일방향적으로 한 번에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반복하면서 생명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속성을 말합니다. 즉, 환경으로부터 섭동으로 영향을 받은 생명체의 구조가 변화되고, 반대로 이 생명체의 구조 변화는 환경의 구조 변화에 영향을 되돌려줌으로써 변화된 환경의 구조는 다시 생명체 구조 변화에 영향을 주고받는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생명체가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구조 접속을 통한 생명체의 구조 변화와 환경의 구조 변화는 서로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구조 변화의 무한 표류를 거듭하면서 언제 어떤 생명체가 또 다른 생명체나 환경과 어떤 구조 접속을 통해 어떤 구조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지를 모르기 때문에 구조 변화의 표류하고 합니다.



생명체의 구조 접속은 일생일대의 혁명적인 사건입니다


구조 접속을 보다 쉽게 예를 들어보자. 무거운 바벨을 들고 벤치 프레스를 하면 가슴 근육이 생기고 데드 리프트를 하면 어깨 등 근육과 기립근, 그리고 허리와 허벅지 근육의 구조 변화가 일어납니다. 너무 무거운 바벨을 들다가 왼쪽 부위 허리 근육에 무리가 가면 당분간 왼쪽에 힘을 주지 못하고 오른쪽 허리 부위 근육으로 버티면서 살아가는 신체 구조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또한 의자에 앉았는데 오른쪽으로 의자가 기울어지는 문제가 발생하면 내 몸은 자연스럽게 의지의 기울기에 맞게 내 몸의 구조 변화가 일어나 의자 구조와 내 몸의 구조가 접속해서 주어진 환경변화에 적응해갑니다. 생명체의 구조 변화는 일생일대의 큰 사건일 수도 있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역사일 수도 있습니다. 환경변화가 낳은 섭동이 한 생명체의 신체구조 변화를 일으키지만 구조 변화를 겪는 당사자 입장에서 바라보면 견딜 수 없는 아픔의 연속일 수도 있습니다. 이전 상태와 다르게 변화된 신경계의 구조 변화는 다시 현 상태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일정기간의 적응 노력이 필요합니다. 생명체의 구조 접속을 통한 자기 생성은 생명체가 살아있는 한 계속되는 영원한 미완성입니다. 


구조 접속이 무엇인지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양대학교 교육공학과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처음 굉장히 낯선 경험을 합니다. 유영만 교수를 지도교수로 결정한 대학원생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일 중의 하나는 교육 공학자인데 교육공학은 안 가르치고 주로 철학 책을 근간으로 수업을 하고 스터디를 진행한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낯선 공부 환경이었지만 공부하는 공동체 안에서 배우고 익히는 개념과 철학적 원리가 대학원생의 머릿속에 가랑비에 옷 젖듯이 생각의 구조가 서서히 바뀌어감을 느낍니다. 자신도 모르게 1~2년 정도 지나면서 이제 학문 공동체에서 논의되는 철학적 화두가 낯설지가 않고 서서히 적응해나가는 과정을 체험합니다. 처음에는 철학적 개념과 원리가 나의 뇌 구조와 맞지 않아서 불편함을 느끼다 점차 철학적 개념과 원리가 원하는 사고 구조에 내가 접속함으로써 새로운 사고 구조가 생깁니다. 


이런 구조 접속을 통해서 예전의 나와 전혀 다른 나로 끊임없이 재탄생되는 과정을 자기 생성이라고 합니다. 자기 생성은 말 그대로 자기 혼자 자기를 생성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환경과 만나서 주어진 환경이 요구하는 구조대로 나의 사고나 신체 구조를 바꾸면서 제2의 나로 거듭나고 탄생하는 과정이 자기 생성과정이고 그 생성과정에 에너지를 지원해 주는 것이 바로 구조 접속입니다. 한 생명체가 어떤 환경과 만나서 구조 접속을 한다는 것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일생일대의 혁명적인 사건입니다. 생명체는 혼자 내가 외롭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서로의 구조 접속을 통해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자기를 부단히 생성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을 충북 음성에서 수렵, 어로, 채취, 농경생활을 하면서 자랐습니다. 자연환경이 요구하는 신체 구조대로 내 몸이 구조 접속되면서 지게질도 하고 가래질과 쟁기와 같은 농기구도 다루면서 몸은 이런 육체노동에 적합한 구조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농사체험 후에 저는 뒤늦게 중학교를 갔지만 제 몸은 농경 생활에 적합한 신체나 정신구조에 맞게 접속되어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았습니다. 오랜만에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는 신체구조가 제 몸에 접속된 지가 오래되어서 공부하는 환경에 구조 접속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체를 공부하는 신체구조로 바꾸면서 구조 접속을 통한 환경 적응에 어느 정도 성공한 셈입니다. 공부하는 환경에 어느 정도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구조 접속에 적응한 저는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대입 준비를 하지 못하고 취업을 위한 용접 기능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합니다. 난생처음 용접을 해보니 여러 가지로 적응이 되지 않습니다. 용접의 유형, 용접봉의 종류, 용접기의 유형과 온도, 용접 각도 조정 등 많은 환경이 용접의 결과에 영향을 미칩니다. 용접에 임하는 자세와 마음에 따라 용접으로 녹여내는 쇳물의 흐름이 미세하게 차이가 납니다. 숙련된 용접공으로 원하는 각종 용접 설비와 기구에 맞게 나의 정신과 신체는 다시 한번 구조 접속을 통해 재탄생합니다. 


졸업 후 평택화력발전소에 취업하지만 다른 직장과는 다르게 여기는 4조 3교대 근무를 합니다. 아침에 출근해서 오후 늦게 퇴근하는 근무와 오후에 출근해서 한 밤중에 퇴근하는 근무, 그리고 밤늦게 출근해서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에 퇴근하는 근무가 교대로 반복해서 돌아갑니다. 생체리듬은 없어지고 근무방식이 원하는 대로 내 몸을 맞추어야 하는 또 다른 구조 접속의 위기가 다가왔습니다. 2년간 평택화력발전소에 근무하면서 생긴 생체리듬은 다시 고시 공부를 하러 한양대학교에 인생의 대전환을 하는 시점에서 더 이상 필요 없는 신체와 정신 구조를 다시 공부하는 환경에 맞게 구조 접속을 시도합니다. 재학 중에 입대해서 군대가 요구하는 구조 접속으로 적응을 하다 제대 후 고시 공부를 포기하고 재미있는 공부 여정에 빠져 유학까지 갔지만 미국 유학생활이 요구하는 공부환경은 또 다른 낯선 환경이었습니다. 우선 영어로 말하고 쓰기 위해서는 언어 사용 방식과 구조를 바꿔야 했습니다. 공부하는 환경도 낯선 학생들과 어울려 토론을 하고 연구소에서 조교로 일하면서 일정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나에게 맡겨진 임무와 역할을 수행하는 일과 공부의 병행 구조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공부하는 여정에 몸을 던진 이유는 그 자체가 재미있었기 때문입니다. 수업을 마치고 12시까지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고 다시 집에 와서 새벽 5시까지 공부한 다음 9시에 일어나 학교로 가는 생활 구조를 스스로 만들어 내 몸이 적응하게 만들었습니다. 


정상적인 사고 구조를 갖고 있는 사람과 제가 사고 접속이 잘 안 되는 이유는 저는 뭔가 좀 이렇게 색다르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면서 자기의 어떤 신체구조도 바꾸지만 사고 구조를 계속 바꿔나가는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제 인생의 역사를 한 마디로 얘기하면 구조 접속의 역사였습니다. 삶은 구조 접속할 때마다 생각이 바뀌는 공부 여정이고, 자기 생성을 계속해 나가는 혁명적인 사건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모두 알게 모르게 우발적인 구조 접속을 통해서 자기를 부단히 생성해나가는 생명체입니다. 한 생명체는 환경과 우발적으로 구조 접속을 하면서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태로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해나갑니다. 이게 바로 마투라나가 말하는 방랑하는 예술가론입니다.



생명체의 진화는 자연선택이 아니라 ‘자연 표류’의 결과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선택(自然選擇, natural selection)의 결과입니다. 자연선택이란 특수한 환경 하에서 생존에 적합한 형질을 지닌 종이, 그 환경 하에서 생존에 부적합한 형질을 지닌 종에 비해 생존과 번식에서 이익을 본다는 이론입니다. 자연도태(自然淘汰)라고도 합니다. 다윈의 자연선택을 진화론적으로 계승한 사람이 바로 《이기적 유전자》를 리처드 도킨스입니다. 자연환경에 적응을 잘하는 생명체일수록 유전자 역시 잘 보존될 수 있다는 입장이 바로 도킨스의 진화론적 관점입니다. “유전자는 자기 복제자이고 우리는 유전자들의 생존 기계인 것이다”(68-69쪽).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나오는 말입니다. 도킨스에 따르면 우리는 유전자가 만든 생존 기계에 불과합니다. 내가 아무리 무슨 노력을 해도 나는 변하지 않습니다. 내 운명은 이미 유전자가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이기적으로 작용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하는 이기적 생존 기계입니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결정론은 내가 나의 노력으로 결정되지 않고 유전자가 결정하는 헤테로 포이에시스(heteropoiesis)로 보면서 유전자를 나를 결정하는 절대적 신으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구조 접속을 통한 자기 생성은 유전자가 품고 있는 결정된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고 그때 그때의 개체와 환경이 주고받으며 이루어지는 구조 접속의 변화에 따라 달라집니다. 어떤 섭동 작용으로 생명체의 구조에 변화가 생기면 그 생명체가 몸담고 있는 환경의 구조 변화로 이어지고, 이러한 구조 변화는 또다시 생명체들의 구조 변화를 촉발합니다. 그렇게 두 개체의 상호작용이 반복적으로 이뤄지면서 서로의 상태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역동적으로 변화해갑니다. 이런 구조 변화의 연속을 구조 변화의 표류라고 합니다. “생물이 환경 안에서 겪는 개체 발생적 구조 변화는 언제나 환경의 표류와 어울리는 구조적 표류일 것이다”(120-121쪽). 구조적 표류의 연속은 생명체의 진화를 전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미래 어느 시점에서 어떤 구조 변화를 일으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구조적 표류이고 이것이 결국 진화를 자연 표류로 바라보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생물이 삶을 시작해서 죽기까지 자기가 속한 부류의 정체 및 자신과 환경의 구조 접속을 보존한 채 겪는 과정이다. 중략. 개체 발생은 생물과 환경이 주고받는 상호작용의 역사 속에서 상호작용이 유발하는 생물의 구조 변화를 통해 선택된 경로를 밟는다”(147쪽). 생명성은 결국 환경과 주고받는 구조 접속 과정에서 발원됩니다. 구조 접속의 유형과 성격은 생명체가 놓여 있는 환경과의 관계가 결정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구조 접속과 구조적 표류는 생명체의 진화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지 모르게 만드는 예측불허의 변수입니다. 산꼭대기에서 양동이로 물을 쏟아붓는다고 거정 해봅니다. 쏟아진 물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어떤 자국을 내며 어떤 움직임을 보여줄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물이 흘러가다 만나는 장애물, 부는 바람과 물이 흐르는 땅의 굴곡 상태에 따라 예측불허의 방향으로 물은 흘러가면서 흔적을 남깁니다. 이런 상상이 바로 움베르또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가 《앎의 나무》를 통해 다윈의 자연선택이나 리처드 도킨스의 유전자 결정론을 부정하는 내용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진화는 자연 표류(natural drift)”라는 주장입니다. “자연 표류란 오직 그때그때 갈 수 있는 길만을 따라간다. 자연 표류 속에서 유기체들의 모습은 때때로 큰 변화 없이 이어지는가 하면 때때로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기도 하는데, 이것은 유기체와 환경이 그때그때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달렸다, 유기체와 환경은 따로따로 변한다. 곧 유기체는 생식 단계마다 변화하고 환경은 또 다른 역동성에 따라 변화한다”(128-129쪽). 유기체가 지금 이 순간 환경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유기체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어떤 방향으로 표류를 지속할지를 결정합니다. 유기체가 결정하는 방향이나 의도대로 표류 통로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유기체의 표류 방향은 유기체와 환경이 시시각각 맺고 있는 관계의 양상에 따라 결정됩니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 생명체가 누구와 어디서 어떤 만남을 통해 관계를 만들어가는지만 볼 수 있을 뿐, 앞으로 어떤 구조 접속을 통해 자기 생성을 계속 이어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생명체는 자연 표류를 거듭하는 방랑하는 예술가입니다. 



“진화란 자기 생성과 적응이 보존되는 가운데 일어나는 자연 표류다.……진화란 오히려 방랑하는 예술가와 비슷하다. 그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여기저기에서 실 한 가닥, 깡통 한 개, 나무 한 토막을 주어 그것들의 구조와 주위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그것들을 합친다. 그가 그렇게 합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저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가 떠돌아다니면서 서로 어울리게 연결해 놓은 부분들이나 형태들로부터 온갖 복잡한 형태들이 생겨난다. 여기에는 어떤 계획도 없으며 그저 자연스럽게 표류하는 가운데 생겨났을 뿐이다”(135쪽). 환경이란 정지된 상태에서 생명체에게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고정된 존재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체도 고정된 환경에서 정해진 유전자 구조에 따라 사전에 결정된 통로를 통과하는 정태적  개체가 아닙니다.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이 상호작용을 주고받으면서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변화되듯, 생명체도 환경변화에 맞물려 저마다 다른 변화를 거듭합니다. 


이런 상호작용을 통한 변화로 생명체는 자기 존재의 조건을 창조하고 다음 구조 변화의 기반을 만들어 갑니다. 지금 어떤 상황에서 구조 접속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다음 환경변화에 대응하는 구조 접속 방식을 결정합니다. 생명체와 환경이 주고받으며 변화를 일으키는 역동적 구조 접속과 이것으로 맺는 생명체와 환경과의 관계야말로, 다윈의 자연선택설이나 도킨스의 유전자 결정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생명체의 정체성을 새롭게 모색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된 것입니다. 구조 접속을 통한 생명체의 표류하는 예술성이 생명체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흐름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생명체는 정해진 운명대로 살아가지 않고 지금 여기서 새로운 자기 삶의 조건을 스스로 창조해나가는 역동적인 주체입니다. 



앎은 생명체가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마투라나가 바라본 앎의 세계와 본질은 기존의 심리학적 앎이나 철학적 인식과 어떤 점에서 다를까요? 마투라나는 단순히 외부 세계를 지각하는 인식 주체의 객관적인 인식 현상만을 탐구 대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들은 인식 현상의 본질을 해명하기 위해서 생명의 기원으로 파고들어갑니다. 그들은 가장 원시 생명체에서 고등 동물까지 최초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세포 활동을 관찰하면서 인식이란 외부 세계를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표상이나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생명체가 또 다른 생명체나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일어나는 구조 접속을 통한 끊임없는 자기 생성 활동 과정으로 정의합니다. 인식 능력이 없다고 가정하는 단세포 생물에서 출발해 수십억조 개의 세포들이 결합한 '메타 세포체'로 변화한 생명체들, 특히  가장 고등의 신경계 세포를 지닌 사람까지 추적 조사하면서 이들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세상과 사물을 인식하고 행동하면서 대물림을 통해 자신들의 행동방식을 문화적으로 전수해오고 있는지를 근본적으로 다시 파고들어가며 질문을 던집니다. “학습이란 유기체의 작업방식과 환경의 작업방식이 줄곧 어울려 있는 구조 접속의 표현”(195쪽)입니다. 생명체는 수동적으로 외부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 한 다음 어떤 행동을 보여줄 것인지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즉 인식한 다음 행동하지 않고 그들의 인식 행위 자체가 이미 환경이나 다른 생명체와 부단히 상호작용하면서 효과적으로 행동하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생명체의 앎은 그 생명체가 살아가는 방식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앎이 삶과 분리되거나 독립된 채 별도의 장소에서 관념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앎은 격전의 삶의 현장에서 체득되고 체득된 앎은 삶을 바꾸는 원동력으로 직결됩니다.


“유기체의 인식활동이란 유기체가 살아가는 구조 접속의 영역 안에서 감각 작용적 상관관계로서 일어나는 활동”(188쪽)입니다. 사람을 포함해서 모든 생명체가 인식하는 세계는 수백만 개의 운동 뉴런과 수천억 개의 중간 뉴런, 수천만 개의 감각세포로 구성된 신경계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낸 세계 일 뿐입니다. 신경계로 인식할 수 있는 범위는 생명체에 따라 다르고 인식방식도 전혀 다릅니다. 개미의 신경계가 사물을 인식하는 범위는 물론 저마다의 신경계로 사물을 인식한 결과도 차이가 납니다. 어떤 신경계로 바라본 인식 결과가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생명체들은 저마다의 신경세포로 외부 사물을 감각적으로 인식하여 저마다의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합니다. 생명체가 인식할 수 없는 범위는 수많은 세포로 구성된 신경계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그 능력 범위일 뿐입니다. 


“신경계란 생물의 계통 발생적 역사를 거쳐 유기체 안에 확립된 특별한 세포 집단이며 감각 부위와 운동 부위의 여러 지점들을 접속하는 구실을 한다”(185쪽).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의 계통 발생적 역사를 갖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감각 부위와 운동 부위를 연결하는 지점을 개발해왔습니다. 아메바의 신경계는 자기 고유의 먹이를 인식해서 잡는 행동방식을 개발해왔고, 말미잘은 말미잘 나름의 신경계를 감각적으로 인식하고 행동해서 먹이를 잡는 방식을 개발해왔습니다. 물론 가장 고등동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사람의 특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신경계를 개발, 외부의 사물을 인식해서 때로는 위험에 대처하고 사전에 준비하는 행동방식을 개발해왔습니다. 앎은 언제나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를 고민하면서 발전해왔습니다. 앎이 곧 삶이 되고 그 속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지를 몸으로 익힙니다. 



존재와 행동과 앎은 나눠지지 않는 삼위일체입니다


여기서 “신경계(그리고 유기체)는 어느 누가 설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개체들이 자기 상태들의 역동성을 바탕으로 겪어온 계통 발생적 표류의 결과다. 따라서 신경계란 자신의 내부 관계들을 통해 정의되는 개체로 보아야 한다”(191쪽). 모든 생명체는 신경계가 받아들일 수 있는 감각 작용만큼 세계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신경계가 인식할 수 없는 불가지(不可知)의 세계는 여전히 무궁무진합니다. 신경계가 계통 발생적 표류를 거듭해오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개발해 왔습니다. 특정 생명체가 지금 여기서 세계를 바라보고 인식하며 행동하면서 존재 자체의 특이성을 신장시키는 가능성은 신경계가 외부 세계와 구조 변화를 겪는 정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단세포 생물이든 고등동물이든 신경계가 외부 사물을 지각해서 행동하는 방식은 머리로 생각해서 어떤 행동을 하겠다고 결정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오랜 구조적 표류를 겪으면서 몸에 배고 태어나서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몸에 밴 행동방식, 즉 행동 지식으로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생각에 머물지 않고 바로 행동으로 옮깁니다.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생물로서의 구조 접속을 끊임없이 유지하는 일) 바로 그 생물의 존재 영역에서 일어나는 인식활동이다. 경구로 나타내 지면, 삶이 곧 앎이다. 다시 말해 생명활동이란 생물로서 존재하는 데 효과적인 행위이다”(197쪽). 말미잘이 파도치는 물결 속에서도 먹이를 잡는 행동은 외부 사물을 인식한 다음 잡겠다고 생각해서 일어난 결과가 아닙니다. 아메바가 먹이를 보고 잡아먹겠다고 결심해서 행동에 옮기지 않습니다. 생명활동이란 생물이 존재하기 위해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반복해서 생긴 효과적인 행동입니다. ”앎이란 곧 효과 있는 행동이다. 그래서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34쪽)



앎을 행동과 분리시켜 연구한 패러다임이 바로 지행일치(知行一致) 패러다임입니다. 지행일치 패러다임은 왜 아는 대로 행동하지 않느냐고 물어봅니다. 지행일치 패러다임은 아는 만큼 행동한다고 가정합니다. 하지만 몸은 머리의 명령을 듣지 않듯이 사람은 머리로 아는 만큼 행동하지 않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이유는 그 원인이 다양합니다. “인식이란 효과적인 행위다”(37쪽). 즉 한 생물이 특정 환경에서 자신의 세계를 산출함으로써 그 환경에서 생존을 지속케 해주는 행위로 인식을 이해하는 것이다(38쪽). 모든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나 환경과 부단한 구조 접속을 통해 자기를 생성하는 역동적인 과정을 통해 생명체마다 독특한 신경세포와 신경계를 발달시켜 왔습니다. 그 신경계를 바탕으로 각 생명체마다 독특한 자신들의 감각 기관이 만들어낸 환경을 산출합니다. 생명체마다 자신들의 감각기관이 인식하는 세계는 저마다 다릅니다. 이런 점에서 콥 폰 웩스쿨(Jakob von Uexküll)과 토마스 A. 세벡 (Thomas A. Sebeok)가 구분한 ‘벨트(welt)’와  '움벨트(Umwelt)'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벨트가 객관적인 세계라고 본다면 움벨트 용어는 주로 자기중심적으로 바라보는 주관적 세계입니다. 움벨트는 각각의 동물들이 지니고 있는 신경계로 세상을 인식하고 느끼는 감각 세계입니다. 사람의 움벨트는 개미나 모기의 움벨트와 다릅니다.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합니다. 누구의 세계 인식이 더 적절하거나 맞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디스 콜과 허버트 콜은 《떡갈나무 바라보기》에서 움벨트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동물들이 바라보는 세계의 다름을 해명합니다. 움벨트가 시사하는 바는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의 감각기관이 달라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인식한다는 점입니다. 또 다른 시사점은 각기 다른 감각기관으로 바라본 세계는 또 다른 감각기관으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한 생명체의 신경계가 아직 인식하지 못하는 세계는 우주 자연 삼라만상에 아직도 널려 있습니다. 결국 인식하지 못하는 세계가 여전히 인식하는 세계보다 더 있다는 가능성 앞에 인식의 한계를 깊이 통감해야 합니다. 내가 인식하는 세계가 절대적인 세계이고 다른 생명체가 인식하는 세계는 그렇지 않다는 오만도 버려야 합니다. 박쥐가 초음파로 상대를 인식하지만 사람은 그런 초음파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개는 냄새로 멀리 떨어진 또 다른 생명체를 인식할 수 있는 감각기관을 갖고 있지만 사람은 그런 냄새 감각 체계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의 감각 체계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행동하며 존재가치를 드높여 갑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체가 보여주는 인지 활동의 본질이며 주어진 환경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행동방식입니다.



삶에 관한 근본적인 해답은 몸으로 알아냅니다


앎과 삶이 딱 분리되어 있지 않고 그 삶으로 앎을 만들어나가는 철학은 앎과 삶이 구분되지 않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패러다임입니다. 지행합일을 추구하는 패러다임은 책상 위에서 배운 앎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지행일치 패러다임이 아니라 이 사람은 몸으로 터득하는 삶으로 앎을 축적하려는 노력입니다. 예를 들면 가수 중에 자신이 직접 겪은 인생을 노래로 작곡해서  우여곡절과 파란만장한 경험이 아름다운 선율로 되살리는 가수가 있습니다. 삶으로 노래를 하는 이런 가수와는 다르게 일찍부터 음악 스쿨에 가서 다양한 몸동작과 가창 기법을 조련해서 화려한 무대의상과 테크닉으로 노래를 하는 가수가 있습니다. 전자는 지행합일의 가수이지만 후자는 지행일치의 가수입니다. 제가 보기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아이돌 가수가 노래하는 방식은 삶으로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로 노래하는 방법입니다. 이런 가수들의 음악성에는 삶이 녹아있지 않습니다. 반면에 살면서 겪은 산전수전과 희로애락의 스토리로 작사하고 그때마다 느꼈던 감정의 흔적이 작곡되어 삶이 곧 노래로 들리는 가수가 있습니다. 자기 삶으로 강의를 하면 감동적인 강사로 거듭날 수 있고, 자기 삶으로 책을 쓰면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작가가 됩니다. 자기 삶으로 그림을 그리면 시공간을 초월하는 위대한 화가가 되고, 자기 삶으로 작품을 만들면 누구든 예술가가 됩니다. 삶이 곧 앎이 되는 사람, 앎이 곧 자신의 삶이 되는 지행합일의 패러다임은 마투라나가 주장하는 앎은 효과적인 행위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합니다.


“삶에 관한 근본적인 해답은 우리 몸에서 이루어진다. 그때 몸은 버려진 악기처럼 저절로 울린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정신인 줄 알고 있다(31쪽).” 이성복의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에 나오는 말입니다. 몸으로 깨달은 앎은 비록 완벽하게 언어로 번역할 수 없지만 그것이야말로 근본적인 해답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위기와 난국에서 사투를 벌이며 깨달은 체험적 지혜는 이성과 논리적 증명 이전에 몸으로 깨닫는 감각적 지각입니다. 감각적 지각이 바로 마투라나가 말하는 몸에 밴 행동 지식입니다. 몸은 거짓말하지 않지만 머리는 거짓말을 합니다. 몸에 밴 행동 지식이 축적되면 마음이 움직이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을 합니다. 몸이 정신을 지배합니다. 몸이 머리의 명령을 듣지 않는 이유는 몸으로 체득한 앎이 머리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마인드가 몸을 통제한다고 가정하고 마인드 컨트롤 훈련을 받습니다. 마인드 컨트롤은 몸이 따라줄 때나 가능한 전략입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을 정도로 피폐해지면 몸은 마음의 통제권역을 벗어납니다. 


제가 2015년도 킬리만자로에 올라가면서 깨달았던 사실도 몸이 마음을 통제한다는 사실입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직면할 때 몸의 상태에 따라 마음이 롤러코스트를 탑니다. 마음이 몸을 통제하지도 않고, 머리가 몸을 통제하지도 못합니다. 몸이 마음이나 머리를 통제한다는 걸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했을 때 깨달았습니다. 4700 고지에서 마지막 베이스캠프를 치고 킬리만자로 정상 등반을 준비하고 있을 때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에서 체력은 고갈된 상태였습니다. 정상 등반을 해야 된다는 마음을 아무리 먹어도 몸은 말을 듣지 않습니다. 마음은 이미 정상 등반을 향해 올라가려고 하지만 몸은 여전히 누워있습니다. 심기일전에서 몸을 다시 추스른 상태에서 밤 11시에 심야에 킬리만자로 정상을 향한 등정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했던 원동력도 그나마 몸이 따라주었기 때문입니다. 신체성이 고갈된 상태에서 인간의 정체성은 심각한 위협을 받습니다. 몸은 마음이 거주하는 우주입니다. 몸이 망가지면 자기가 거주할 마음의 집이 없어지기 때문에 마음이 몸을 통제할 기력도 없어집니다.



우리의 세계는 타인과 함께 산출한 세계입니다


어제와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방법은 나 혼자 불가능합니다. 마투라나가 이야기하는 자기 생성도 결국 나와 다른 자기와 구조 접속을 통해 에너지를 얻어야 합니다. 그렇게 구조 접속을 통해 서로의 구조 변화를 겪으며 함께 구축한 세계에서 우리라는 공동체가 태어납니다. “우리가 타인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세계를 산출하는 바로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되는 것이다”(279쪽).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존중하는 가운데 하나의 공동체로 태어납니다. 공동체 안의 우리는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극복하고 피워낸 합작품입니다. 생명체는 이기적 생존을 목표로 살아가면서도 이타적인 사랑을 베풀며 함께 공생하는 삶을 추구합니다. “타인과 공존하고 싶으면 그들에게 확실한 것 또한 (그것이 아무리 하찮게 보인다 해도) 우리 것만큼 정당하고 타당함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확실성이 그렇듯이 타인의 확실성 또한 한 존재 영역에서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리 매력 없게 보인다 해도) 그들이 보존한 구조 접속의 표현이다. 따라서 공존하려면 더 넓은 관점을 가져야만 한다. 곧 양쪽이 만나 공동의 한 세계를 내놓을 존재 영역을 찾아야만 한다”(276쪽). 나의 영역만 주장하는 독재적 입장표명이 아니라 내 것만큼 다른 사람의 존재가치도 소중함을 인정하고 그 존재가 거주할 공간을 비워두는 배려가 뒤따를 때 공존의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집니다. 구조 접속을 통해 함께 거듭나는 과정은  내 몸과 마음의 구조를 기꺼이 바꾸겠다는 결단과 동시에 타자를 위해 기꺼이 내 것을 고수하지 않겠다는 판단이 같이 작용하는 동행입니다. 지금 당장 여기서의 삶을 넘어 여기보다 더 넓은 세계가 있음을 상정하고 거기에 이르는 여정을 함께 하기 위해 기존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자기 생성이 계속될 때 공동체는 지속 가능해집니다.  


“우리의 세계가 타인과 함께 산출한 세계임을 알게 되면, 타인과 다투더라도 그들과 계속 공존하고자 하는 한 우리에게 확실한 것을(어떤 절대적인 진리를) 고집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부정할 것이기 때문이다”(275쪽). 타인과 함께 산출한 세계는 타인과 함께 할 때 지속 가능합니다. 공존 욕구가 존재하는 한 존재는 다른 존재의 욕구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나의 욕구만이 생존 욕구임을 고집할 때 공동체는 무너집니다.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구조 접속으로 얻은 에너지가 나를 거듭나게 만듭니다. 나의 욕심만으로 세상은 우리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란 우리가 타인들과 함께 만들어낸 세계이며 이 세계는 다시 우리에게 거꾸로 영향을 미친다. 이 사회적 세계에서 우리는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따라서 타인의 인정은 이 세계의 성립 조건이다”(14-15쪽). 모든 생명체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다른 생명체와 부단한 구조 접속을 통해 자기를 생성하는 존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구조 접속은 자기 생성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어떤 구조 접속은 부정적으로 작용하는지 오랜 기간의 구조 접속 경험을 통해서 인지하는 것입니다.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구조 접속 과정에 개입하는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에 따라 자기 생성 과정은 달라집니다.  모든 생명체는 구조 접속을 통해서 바람직한 관계 맺음은 어떤 것인지를 몸으로 체득하면서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다툼이란 언제나 상호 부정이다. 다툼은 양쪽이 서로 자기 것을 확신하는 한, 다툼이 생긴 영역에서는 결코 풀리지 않는다. 다툼을 극복하려면 공존할 수 있는 다른 영역으로 옮아가야만 한다. 이 앎에 대한 앎이야말로 사람다움에 바탕을 둔 윤리의 사회적 명령(imperative)이다”(276쪽). 다른 영역으로 이동하지 않고 각자의 영역에서 자기 자리라고 우기는 앎은 그냥 ‘앎’입니다. 다툼을 극복하고 공존할 수 있는 다른 영역으로 옮겨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깨달음은 ‘앎에 대한 앎’입니다. 



앎에 대한 앎을 공유하며 사람답게 살아가는 공동체가 윤리적 공동체인 셈입니다. 인간의 신체가 내부 기관들 간에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상호 간의 구조 접속을 통해 평형을 유지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공동체 속에서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면서 성장과 발전에 도움이 되는 구조 접속이 끊임없이 이어지기 위해서는 타자와의 관계 형성과정에서 윤리적 판단은 피할 수 없는 결단으로 작용합니다. 생물학적 자기 생성 체제로서의 생명성은 이제 윤리적인 문제로 재고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앎은 나 혼자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앎입니다. 앎에 대한 앎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윤리적 결단이요 도덕적 판단력입니다. 지금 상태로 버텨서는 공존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들 때, 기꺼이 나를 포기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순간, 앎의 앎은 새로운 지혜를 창조하며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윤리적 공동체로 발전합니다. 


사랑으로 매개된 구조 접속만이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해줍니다


“누구나 다 아는 이 세계는 ‘오직 한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타인과 함께 산출한 ‘어느 한 세계’ 임을 깨닫도록 우리를 얽어맨다.……앎의 앎은 우리를 얽어맨다. 왜냐하면 우리가 안다는 것을 알면 더 이상 우리 자신이나 타인 앞에서 우리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275쪽). 앎의 앎은 앎을 알기 전의 생각과 행동으로 살아가면 위험하다는 경각심을 전해줍니다. 앎은 곧 살아감이고 살아감은 무수한 행동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제 내가 어떤 판단과 행동을 해야 되는지 알았기에 그 앎은 나의 행동으로 연결되고 그 행동의 연속은 내 삶을 구성합니다. 앎을 알면 알기 이전과 다르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앎의 앎은 나의 존재 이유를 드러내는 앎이고 존재가치는 더불어 살아갈 때 비로소 빛이 난다는 각성입니다. 앎의 앎은 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파고드는 앎입니다. 앎을 알면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숙고합니다.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대안이 무엇인지를 선택하기 전에 전후좌우 맥락을 다양한 선택지에 위에 올려놓고 판단한 다음 옳다고 믿는 신념대로 행동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어려움의 핵심은 바로 앎을 잘 못 아는 데, 앎을 모르는 데 있다. 우리를 얽어매는 것은 앎이 아니라 앎의 앎이다. 폭탄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앎이 아니라, 우리가 폭탄으로 무엇을 하려 하느냐가 그것을 쓰느냐 마느냐를 결정한다. 우리는 이런 깨달음을 무시하거나 못 보게 억누르면서, 우리의 일상 행위에 대한 책임을 떠맡지 않으려 한다”(279쪽). 앎의 앎을 무시할 때 나는 당분간 편하게 살 수 있을지 몰라도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은 나의 행동 때문에 피해를 보거나 아픔을 경험합니다. 


나의 앎으로 이루어진 행동이 타인에게 불편을 줄 수 있다는 앎에는 기본적으로 사랑이 매개되어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앎의 앎도 필요가 없어집니다. 오직 사랑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앎이라야 개인을 넘어 관계, 관계를 기반으로 공동체를 완성합니다. “사랑은 뿌리 깊은 생물학적 역동성의 하나다. 사랑은 유기체의 한 역동적인 구조양식을 규정하는 감정으로, 사회적 삶의 작업적 응집성을 낳는 상호작용들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단계다”(278쪽). 사랑이 개입되어야 유기체도 역동적인 구조 접속을 통해 사회적 삶을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의 멤버십이 생깁니다. 사랑이 관여되어야 더불어 살아가는 세계를 구축하려고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깊은 관심과 애정이 동반되지 않는 앎은 피상적 앎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세계란 오직 타인과 함께 산출하는 세계뿐이다. 그리고 오직 사랑의 힘으로만 우리는 이 세계를 산출할 수 있다”(278-279쪽).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라야 타자 입장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가 생기고 타자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생각하는 측은지심이 생깁니다. “사람들 사이의 생물학적 일치 때문에 우리는 타인을 볼 수 있고, 또 우리 곁에 타인이 있을 자리를 비워둔다. 이런 행위를 가리켜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좀 약하게 표현하면 일상생활에서 내 곁에 남을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277쪽). 내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을 내 ‘곁’으로 받아들이는 게 사랑입니다. 물리적으로 거리가 떨어졌던 ‘옆’이 심리적으로 가까이 다가와야 ‘곁이 탄생합니다. 내 곁에 나와 다른 남이 존재할 때 나 역시 어제와 다른 나로 탄생할 수 있습니다. 



“사랑 없이, 타인을 받아들여 우리 곁에서 살도록 놓아두는 일 없이, 사회적 과정과 사회화, 나아가 사람다움이란 있을 수 없다”(277쪽). 사람다움은 사람과 사람이 사랑으로 만날 때 탄생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순간 사람은 이전과 다른 구조 접속을 통해 다른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다른 생각의 구조를 갖고 있는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이전과 다른 구조 접속이 일어납니다. 이전과 다른 구조 접속은 나의 생각이든 행동이든 이전과 다른 구조적 변화를 유발합니다. 구조 변화는 고통이 동반되는 사건입니다. 그 사건을 견뎌낼 수 있는 원동력도 바로 나를 사랑으로 받아주는 사람이 곁에서 보살펴주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유심히 살펴봐야 사랑으로 보살펴줄 수 있다. 살핌 없이 보살핌도 없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사랑 없이, 남을 받아들임 없이 사회적 과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277쪽). 오직 사랑으로 타자를 받아들일 때 나 역시 이전과 다른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받아들임의 과정을 구조 접속에 비추어보면 이전과 다른 나로 탄생하는 역사적 터닝 포인트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구조 접속 없이 나는 거듭날 수 없습니다. 그것도 사랑으로 매개된 구조 접속이라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과 접목할 수 있습니다. “타인과 공존하면서 만들어내는 이 세계는 우리가 사람다운 것이라 부르는 것을 산출한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적 행위는 윤리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세계를 산출하는 데 이바지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의 이 연결이야말로 궁극적으로 타인의 존재의 정당성에 대한 성찰인 모든 윤리의 바탕을 이룬다”(276쪽).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윤리적인 삶인지를 끊임없이 성찰할 때 저자들이 주장하는 자기 생성과 구조 접속을 통한 재탄생도 타인과 공존하는 사람으로 연결됩니다. 사랑과 윤리적 판단은 이런 점에서 생명체가 생태계 속에서 공존하는 삶을 살아가는 전제조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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