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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사고 속에서
색다른 사고(思考)를 잉태하는 비결

질 들뢰즈의 우발적 마주침에서 색다른 깨우침을 얻다

틀에 박힌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다면낯선 곳에 가서 생각지도 못한 사고를 쳐라

     

사건과 사고(事故속에서 색다른 사고(思考)를 잉태하는 비결,

질 들뢰즈(1925.181996.11.4.)의 우발적 마주침에서 색다른 깨우침을 배우다

     

모든 철학자가 공통적으로 개념을 창조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들뢰즈만큼 자기만의 독창적인 개념을 창조한 철학자는 없을 겁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철학이란 개념을 형성하고 창안하는 예술(art)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철학자는 기존 개념으로 자신의 철학적 문제의식을 해결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 때마다 색다른 개념을 창조해서 자신의 철학적 주장을 담아냅니다. 문제는 이런 개념으로 직조된 철학적 사유체계를 평범한 일반 독자가 해독해내기에는 역부족인 경우가 많습니다. 철학자의 탁월한 재능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하게 책을 쓰는 탁월한 능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들뢰즈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프루스트와 기호들》, 《의미의 논리》,  《차이와 반복》, 그다음에 가타리와 같이 쓴 《천 개의 고원》 같은 책은 일반인이 접근하기에는 한 없이 어려운 책입니다. 아마 들뢰즈를 비롯한 철학자들은  자신의 책의 독자를 일반 대중 독자로 상정하지 않고 소수 전문 학자로만 한정했을지도 모릅니다. 책을 읽으며 힘들어하는 일반 독자들에게 “왜 내 책 읽느냐고 고생하세요? 당신의 내 책의 독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오늘은 들뢰즈가 만들었던 개념 중에 몇 가지를 선정해서 가급적 쉽게 풀어서 설명해보려고 합니다. 물론 대학교수의 정의가 ‘쉬운 이야기를 어렵게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는 웃지 못할 사연도 있습니다.



색다른 사고(思考)는 사고(事故) 치는 순간 탄생합니다


여러분 지금과 다른 생각을 하면서 살고 싶지 않나요? 많은 사람들이 꾸는 꿈 중에 어제와 다른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며 다른 행동을 하는 데 있습니다. 생각을 바꿔서 제발 어제와 다른 행동을 하라는 주문을 받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생각을 바꿔서 행동을 바꿀 수 있을까요? 행동이 안 바뀌는 이유가 과연 생각을 바꾸지 못하는 데 있을까요? 오히려 행동을 바꾸지 않아서 생각이 안 바뀌는 것은 아닐까요? 어제와 다른 생각을 하려면 앉아서 생각을 바꾼 다음에 나가서 행동을 바꾸기는 참 어렵습니다. 앉아서 딴생각한 다음에 나가서 딴짓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딴짓을 하면 딴생각이 듭니다. 이번 장에서는 딴짓을 해야 딴생각이 들 수 있다는 이야기를 철학자 질 들뢰즈의 우발적 마주침론에 비추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당신은 생각하는 대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사는 대로 생각하는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 프랑스 작가, 폴 브루제가 남긴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하는 대로 살고 있습니까? 아마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는 대로 살기 어렵다는 걸 몸으로 깨달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폴 브루제의 명언을 아래와 같이 바꿨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기 어렵다. 사는 대로 생각하자.” 생각을 바꿔서 행동을 바꾸라고 주문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생각을 바꿔서 행동을 바꾸기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행동을 바꾸면 의외로 생각이 바뀔 수 있습니다. 생각은 모든 체험적 자극의 합작품입니다. 지금 내가 갖고 있거나 하고 있는 생각은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만든 내 삶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는 내 삶을 바꿔야 합니다. 삶을 바꾸지 않고 생각을 바꾸는 교육을 받는다고 생각이 바뀌지 않습니다. “삶을 바꾸지 않고 생각을 바꿀 수 없다. 내 생각은 내가 살아온 삶의 결론이다.” 이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같은 짓을 되풀이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착란이다.” 미국 작가, 리타 메이 브라운의 이야기입니다. 이 명언을 이렇게 바꿔서 생각해도 여전히 일맥상통합니다.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생각을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증세다.” 행동을 바꾸지 않고 앉아서 생각을 바꾸려는 노력은 무의미합니다. 어제와 다르게 반복하는 행동만이 어제와 다른 생각을 낳습니다. “어제와 다른 마주침이 없으면서도 색다른 깨우침을 만나려는 발상은 정신병 말기 증세다.” 이런 정신병 증세를 앓기 전에 어제와 다른 낯선 상황과 마주침의 다른 경험을 축적해갈 때 우리는 낯선 깨우침의 사유를 잉태할 수 있습니다. 낯선 마주침 없이 책상에서 배운 관념의 파편이 격전의 현장에서 무기력하게 흩어지고, 차가운 지성의 칼날이 뜨거운 현실 문제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낯선 마주침 없이 기존 개념적 차이를 머리로 공부할수록 낯선 차이와 마주칠 기회조차 갖지 못합니다. “사유는 비자발적인 한에서만 사유일 수 있고 사유 안에서 강제적으로 야기되는 한에서만 사유일 수 있다. 사유는 이 세계 속에서 불법침입에 의해 우연히 태어날수록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된다. 사유 속에서 일차적인 것은 불법침입, 폭력, 적이다”(310-311쪽).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나오는 말입니다. 사유의 씨앗이 자라기 위해서는 정상적인 방식으로 관성에 따라 생각을 반복했던 편안한 기존 사유체계에 사유의 씨앗이 갑자기 날아들어오는 불법침입이 발생할 때 우연한 마주침을 인한 위대한 깨우침이 발생한다.



사고(事故)는 사실의 문제이고 사건은 진실의 문제입니다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일이 갑자기 발생하면서 정상적인 방식으로 머리를 써서는 지금의 위기 상황을 탈출할 수 없다는 판단할 때 사유는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사건을 일으켰을 때 이어지는 반응이나 사고를 당했을 때 연상되는 생각은 모두 들뢰즈에 따르면 불범 침입에 의해 우연히 태어납니다. 흔히 사건은 의도적으로 본인이 일으킨 행동이고 사고는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내가 당한 일입니다. 누군가 결혼한 부부에게 질문합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결혼은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인가요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당한 사고인가요? 들뢰즈식으로 구분하면 결혼은 늘 만났던 사람이고 데이트를 반복해서 해왔지만 결혼은 이전과 전혀 다른 차이가 나는 사건인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혼의 당사자인 상대방에게는 사건이었지만 그 사람과 결혼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당한 사고일 수도 있습니다.


 사건과 사고는 자신이 어떤 의미를 부여해서 해석하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다가옵니다. 집에서 기르는 반려견을 의도적으로 물어버리면 사건이지만 반려견에 갑자기 물려버리면 사고입니다. 들뢰즈가 얘기하는 사건은 조금 다를 수 있어요. 제가 들면 하늘에 이렇게 먹구름이 끼어있어요. 이런 먹구름이 끼어있는 건 자연의 현상이고 물리적인 현상인데 그 먹구름이 나한테 사건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 먹구름은 소나기를 암시하고 예고하는 조짐이나 징후입니다. 오늘 소풍을 가야 되는데 학교에서 문자가 옵니다. 먹구름이 끼어있어 비가 예상되므로 오늘 소풍을 못 간다는 연락입니다. 이런 문자로 소풍을 못 가면 먹구름은 나에게 엄청난 사건입니다. 먹구름은 늘 존재해온 동일성의 반복이라고 생각하지만 소풍을 못 가는 아이에게는 어제와 다른 먹구름이며 기존 먹구름과 전혀 다른 차이를 함의하고 있는 먹구름입니다. 나로 하여금 소풍을 못 가게 만든 먹구름은 더 이상 늘 내가 보던 먹구름이 아니라 심각한 차이를 내포하고 있는 먹구름입니다.



사건 속에는 사연이 숨어 있고 그 사연이 이전과 다른 사유의 싹을 자라게 합니다. 결혼이 사건이 사람은 결혼을 빨리 할 수밖에 없는 말 못 할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사연 속에는 놀라운 사유의 싹이 자랍니다. 결혼이 사고인 사람 역시 사고당한 체험이 사고(思考)를 바꾸는 원동력이 됩니다. 흔히 교통사고라고 하지 교통사건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교통사고는 내가 의도적으로 일으킨 일이 아니라 갑자기 당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통사고도 누군가에게는 교통사고로 둔갑합니다. 보험료를 수령하기 위해 일부러 교통사고를 일으키는 사람에게는 교통사건이지만 여전히 당하는 사람 입장은 교통사고입니다. 예로 들었던 막 먹구름과 소풍 취소 사건으로 돌아가 봅니다. 평상시의 먹구름은 아무 의미가 없었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소풍 못 가는 어떤 전조로 다가오고 급기야 소풍이 취소되는 원인을 제공합니다. 먹구름이 나에게는 소풍을 못 가게 만드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유심히 살펴보면 이전 삶과 전혀 다른 ‘갈라짐’으로 색다른 출발점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표를 향해 정면으로 질주하던 삶은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그 순간부터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구부러짐’이 발생합니다. “사고가 많은 인생은 그 사고의 수와 크기만큼 안타깝고 불행하지만, 사건이 많은 삶은 그 사건의 수와 크기만큼 풍요롭고 행복하다”(27쪽). 이진경의 《삶을 위한 철학수업》에 나오는 말입니다. 내가 당한 사고가 많을수록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일이 많아지고, 사건이 많을수록 작심해서 많든 일이기에 의미심장한 가치가 많아집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사고 속에서 우연히 깨달은 각성이 생기고 사건 속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발생한 일로 인해 사사건건 피곤해질 수도 있습니다. 사건은 의미를 해석해야 되는 문제이고, 사고는 시급하게 처리해야 될 문제라서 사고처리라고 합니다. 사고는 누가 왜 일으킨 문제인지를 확인하는 사실규명의 문제이고 사건은 진심을 갖고 일으킨 진실인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문제입니다. 사실과 진실의 차이가 또 사건과 사고의 차이에 상응하는 이유입니다.



반복은 대상의 고유한 절대적 차이를 발견하는 과정입니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철학적 사유를 담아 ‘개념적 차이’와 ‘차이 자체’라는 개념을 구분합니다. 개념적 차이점은 남자와 여자, 소나무와 참나무, 손전등과 전조등과 같이 한 대상과 다른 대상과의 비교를 통한 상대적 다름으로 파악되는 차이입니다. 이런 개념적 차이로는 대상의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차이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남자라는 표상 체계 안에서도 수없이 다른 남자가 있고, 남자마다 고유한 특성을 갖고 있지만 개념적 차이는 이런 차이를 무시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무라는 개념으로 세상의 모든 나무를 대표하는 순간 저마다의 나무가  지닌 고유한 차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른 생물과 다른 나무를 구분하고 분류하는 기준을 표상이라고 합니다. 표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내포하고 있는 미묘한 차이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개념적 차이’로는 대상의 고유한 절대적 차이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소금이라는 개념을 다시 왕소금과 깨소금으로 구분한다고 해도 왕소금과 깨소금도 동일한 소금이라는 개념에 속하지만 그것이 탄생한 배경과 과정의 차이, 짠맛의 강도의 차이는 여전히 추출해낼 수 없습니다. 동일한 소금이라는 표상으로 기존 소금을 모두 동일한 소금이라고 생각하는 발상을 들뢰즈는 동일성의 사유라고 합니다. 소금에 대한 표상은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소금에 대한 이미지를 종합해서 지각한 결과입니다. 소금에 대한 기존 표상을 버리지 않고  소금을 색다른 사유로 구분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소금에 대한 표상을 버리고 소금마다 고유한 절대적 차이를 감각적으로 깨닫기 위해서는 반복해서 소금 맛을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비로소 소금 맛이 내는 미묘한 강도의 차이를 구분해냄으로써 소금 그 자체의 차이를 밝혀낼 수 있습니다..


다른 대상과 비교를 통해서 알게 되는 개념적 차이와는 다르게 ‘차이 자체’는 세상의 모든 존재는 다른 것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절대적인 차이입니다. 개별 대상의 고유한 차이는 반복과 강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차이와 반복》은 결국 모든 존재 자체의 절대적인 차이를 반복을 통해서 점차 지각하는 과정입니다. 똑같은 된장찌개라는 동일한 개념 체계로 포착된 음식 맛도 반복해서 먹다 보면 된장찌개에 포함된 재료들의 미묘한 맛의 차이와 요리 방식의 차이로 된장찌개 맛의 미묘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들뢰즈가 말하는 반복은 모든 존재의 미묘한 차이를 지각을 통해 이전과 다른 미묘한 강도를 지각하는 과정입니다. 들뢰즈에게 반복은 흔히 말하는 일상적 반복과는 다릅니다. 차이는 반복을 통해서만 더욱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들뢰즈가 말하는 반복이란 되풀이하여 지각되는 강도의 차이를 통해 개별대상의 차이 자체를 발견하는 과정입니다. 이때 강도란 언어적으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다른 대상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개별 대상의 차이 자체로 인해 지각되는 고유한 감각적 경험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피아노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는 연주자의 미묘한 연주 스타일의 차이를 감각적으로 경험할 없었지만 반복해서 들어보니까 다른 연주자가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한 차이를 알아챌 수 있습니다. 반복해서 들어봐야 피아노 연주가 지니고 있는 차이 자체를 감각적으로 포착해낼 수 있습니다. 이때 피아노 연주마다 다르게 감각되는 경험적 느낌의 차이를 강도라고 하고, 그 강도의 차이를 발견하는 과정이 바로 반복인 셈입니다. 



오솔길은 우연성의 보고이자 터전이며 마주침의 공간이자 기호의 천국입니다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와 반복에 비추어 세 가지 교육 패러다임을 비교해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선 철도 패러다임을 생각해봅시다. 전통적으로 교육은 주로 학교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교는 공장처럼 규격화된 인재가 달성해야 될 목표를 사전에 규명하고 여기에 이르는 최단거리를 컨베이어 벨트처럼 체계적으로 돌아가는 기계적 노동의 현장이었습니다. 기계로 학교를 바라보는 관점은 학교에 오는 학생을 기계의 부속품으로 간주하고 가르치는 사람은 기계를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관리자라고 봅니다. 학생은 사전에 정해진 철도나 고속도로를 따라 목적지에 가급적 빠르게 도착해야 합니다. 철도를 달리는 기차를 학교에 비유하면 학교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일사불란하고 질서 정연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목적지도 딱 한 군데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철도 패러다임의 교육은 들뢰즈가 얘기하는 동일성을 계속 반복하는 재현(representtion)의 교육입니다. 재현의 교육은 A를 가르치면 학생도 A로 기억하고 암기해서 가르친 대로 배우는 교육입니다. 어제와 똑같은 내용을 똑같은 방법으로 주어진 목표를 최단기간 내에 달성하는 효율 극대화를 추구하는 기계적 교육 패러다임입니다. 한편 학교를 고속도로에 비유하면 정해진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점은 철도와 동일합니다. 철도와 도로를 지배하는 학교 패러다임은 속도와 효율이 핵심원리로 작용합니다. 하지만 목적지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철도와 다른 고속도로는 출발지는 정해져 있지만 목적지에 가는 방법은 다릅니다. 예를 들면 부산이 목적지라고 하면 철도는 부산에 가는 방법이 철도 노선을 결정하면 부산에 도착하는 방법이 단 한 가지밖에 없지만 고속도로는 노선을 결정했어도 중간에 다양한 방법으로 부산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목적지는 결정되어 있지만 출발지와 목적지에 이르는 방법은 어느 정도 열려 있습니다.  



반면 학교를 오솔길에 비유하면 속도와 효율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솔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남이 걸어가지 않은 길을 얼마든지 개척해서 갈 수 있기 때문에 목적지까지 단숨에 도달하는 방법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솔길을 걸어가는 방법은 때에 따라서 대단히 비효율적인 사색의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철도와 도로가 지향하는 교육 패러다임은 원인과 결과가 단선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직선형 패러다임입니다. 투입하는 요소가 결정되면 결과는 정확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솔길 패러다임은 언제 어디서 어떤 낯선 마주침을 겪을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목적지도 가는 도중에 바뀔 수도 있습니다. 빠르게 직선으로 달려가서 목표를 달성하는 효율적인 패러다임은 오솔길에서 무의미합니다. 철도와 고속도로는 가다가 도로가 막히면 별다른 방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선적으로 이어지는 직선 주로 가 갖는 치명적인 한계입니다. 하지만 오솔길을 걷다 길이 막히면 자신이 결정해서 걸어가는 길이 모두 새로운 길입니다. 우발적 마주침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우연성의 보고이자 터전이 바로 오솔길입니다. 철도 패러다임에서 일어나는 우발적 마주침이나 우연성은 치명적인 손상이나 폐해를 입히는 위협적인 요소이자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오솔길에서는 우발적 마주침을 통해서 색다른 깨우침이 일어나는 깨달음의 텃밭입니다. “배운다는 것, 그것은 분명 어떤 기호들과 부딪히는 마주침의 공간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73쪽).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나오는 말입니다. 오솔길을 걷다 보면 낯선 기호가 난무합니다. 사건과 사고도 수시로 일어납니다. 똑같은 길임에도 불구하고 어제와 다른 기호가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해석을 기다리고 의미를 부여해주기를 원하는 마주침의 공간이 바로 기호의 천국, 오솔길입니다.



일방적 가르침으로는 우발점 깨우침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오솔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학습자라면 가급적 천천히 주변을 살피면서 배우는 삼라만상이 모두 스승입니다. 오솔길에서는 누가 선생이고 학생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 모두가 스승이고 배우는 사람입니다. 나에게 우발적 마주침을 통해 깨우침을 주는 모든 사람이나 사물, 또는 현상은 다 스승입니다. 정해진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려는 철도와 도로 패러다임에 비해 오솔길 패러다임은 목적지로 가는 여정에서 우연히 깨닫는 부산물에 더 의미심장한 교육적 시사점이 존재합니다.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여정은 비효율적인 탐색과 시도이자 탐험과 도전의 과정입니다. 오솔길 교육 패러다임은 어제와 다른 차이가 무한 반복되는 차이 생성의 교육입니다. 오솔길 패러다임에서는 정해진 로드맵이나 철저하게 따라야 할 매뉴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뉴얼은 오솔길에서 일어나는 우발적 학습을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입니다. 통제할 수 없는 우연한 마주침이 가장 많이 존재하는 배움의 터전이 바로 오솔길입니다. 


오솔길 패러다임에서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에 나오는 ‘리좀(Rhizome)’이 생길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집니다. 리좀은 중심이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항상 중간, 사물의 틈, 존재의 사이, 간주곡을 의미합니다. 리좀은 체계성과 계획성보다 우연성과 무목적성을 선호합니다. 리좀은 정해진 구조나 위계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나무뿌리가 어디로 뻗어가서 또 다른 나무뿌리와 만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연한 접속을 통해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또 다른 결과를 부단히 창조하는 과정이 바로 리좀입니다. 리좀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사이나 경계에서 꽃을 피웁니다. “’ 사이’라는 것. 나를 버리고 ‘사이'가 되는 것. 너 또한 ‘사이'가 된다면 나를 만나리라(149쪽).” 이성복의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에 나오는 말입니다. 리좀을 통해 새로 태어나는 모든 창조는 사이와 사이가 우연히 접속되는 과정에서 일어납니다. 리좀은 다양한 개념과 우발적으로 만나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냅니다. 전공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사이와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며 무한 리좀을 양산하는 과정, 그것이 바로 마음껏 펼쳐지면서 공부의 즐거움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오솔길 패러다임입니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따르면 가르치고 배우는 방법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나처럼 해봐 형 교육’과 ‘나와 함께 해보자 형’ 교육입니다. ‘나처럼 해봐 형 교육’은 가르치는 전문가의 전문성이 배우는 비전문가의 기준이자 정답입니다. 전문가가 지니고 있는 전문성을 비전문가는 그대로 따라서 모방하는 데 전력투구합니다. 전문가는 비전문가에게 어떻게 전문가의 전문성을 습득할 것인지를 사전에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구체적인 절차와 방법, 실무적 지침이 들어있는 매뉴얼을 제시하고 그대로 따라 할 것을 강조합니다. 이에 반해서 ‘나와 함께 해보자 형 교육’은 전문가의 전문성은 비전문가에게 그대로 모방할 수 있는 노하우가 아니라고 규정합니다. 나아가 전문가의 전문성은 전문가가 비전문가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쳐서 습득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전문가의 전문성은 비전문가가 그대로 모방하거나 이상적으로 지향해야 될 기준이나 표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철도와 고속도로 패러다임은 ‘나처럼 해봐 형 교육’ 패러다임을 선호합니다. 정해진 길이 있고 그 길을 잘 따라가는 학생들의 노력만 뒤따라 준다면 별 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솔길 패러다임은 계획된 대로 풀리지 않는 우발성의 연속입니다. 상황에 따라 대처해야 되는 처방적 교육 매뉴얼이 통용되지 않습니다. 머리를 맞대고 스승과 제자가 복잡한 난국을 돌파할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면서 이리저리 실험하고 모색하면 주어진 난관을 돌파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일방적 가르침으로 우발점 깨우침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우발적 마주침이 색다른 각성이 동반되는 깨우침을 낳습니다.



공부하는 과정은 낯선 기호를 해석하는 과정입니다 


동일한 것을 반복하면 차이가 드러나지 않고 사건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들뢰즈에게 사건은 반복할 때마다 이전과 다른 차이를 드러내며 일어나는 모든 현상입니다. 똑같은 셰익스피어 책을 읽어도 읽을 때마다 다른 차이를 발견하면 그때마다 셰익스피어 읽기는 사건입니다. 모든 사건은 낯선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가 해석해내서 이해를 해야 되는가를 품고 있는 게 바로 기호입니다. 사건 속에는 반드시 낯선 기호를 품고 해석을 기다립니다. 들뢰즈가 말하는 기호는 나한테 색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모든 현상입니다. 나로 하여금 기호가 품고 있는 의미를 해석하게 만듭니다. 낯선 기호가 나타나지 않으면 들뢰즈가 말했던 사유의 불법침입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이전과 동일한 생각을 반복하게 됩니다. 기호가 나에게 일어난다는 의미는 다양한 의미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결혼한 사람이 집에 갔는데 집사람이 없다고 가정해봅시다. 집사람이 집에 있으면 그건 기호가 아닙니다. 집사람이 집에 없으면 나는 집에 왜 없는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남편에게 집 사람이 집에 없는 것은 색다른 의미로 해석하게 만드는 색다른 마주침이자 사건입니다. 집사람이 집에 없다는 현상, 즉 사건은 이미 낯선 기호를 내장하고 있어서 그것의 의미를 해석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과정은 나한테 다가오는 낯선 기호를 해석하는 과정입니다. 기호를 품고 있는 사건은 주로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 개의 고원》에서 말하는 ‘아장스망(agencement)’일 때 발생합니다.


아장스망은 영어의 배치(arrangement)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듯이 기존 사물의 낯선 조합과 우연한 마주침으로 낯선 환경입니다 다. 들뢰즈가 말하는 사유의 불범 침입이 발생하는 원인도  아장스망 덕분입니다. 이전에 접해보지 못했던 낯선 마주침을 통해 기존 사유체계의 기반을 뒤흔드는 사유의 불범 침입이 발생하는 사건의 무대가 아장스망입니다. 아장스망이 바뀌지 않으면 낯선 마주침도 발생하지 않고 낯선 마주침이 없으면 색다른 깨우침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결국 아장스망은 낯선 사유가 잉태되는 색다른 배치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전문가는 낯선 사람과 마주치는 기회보다 자신이 파고들어가는 깊이 있는 분야에서 비슷한 사람을 만나 비슷한 방식으로 대화하고 비슷한 문제를 비슷한 방식으로 해결하는 동일성을 반복하면서 아장스망을 마주칠 가능성은 희박해집니다. 


전문가가 다른 전문가와 마주쳐야 자기 전공 분야에서 느끼지 못했던 색다른 깨우침을 얻을 수 있는 데 불행한 현실은 대부분의 전문가가 그럴 기회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데 있습니다. 마주침이 일어나면 깨우침도 일어나고 더불어 뉘우침과 가르침이 생깁니다. 이런 마주침이야말로 피뢰침처럼 정문일침의 따끔한 충고를 줄 수 있는 새로운 생각의 원천으로 작동합니다. 다른 환경과 마주치고 이제까지 가보지 못한 곳을 방문해보며 아장스망을 바꿔나가야 나의 사고도 한 곳에 정체되어 있거나 한 분야에 갇혀서 살지 않습니다. 회사원의 아장스망은 아침에 일어나 출근해서 저녁때 집에 오는 틀에 박힌 패턴의 반복입니다. 화사원의 아장스망을 바꾸기 위해서는 회사 안 가도 되는 날은 다른 곳을 가보고, 집에 안 들어가도 되는 날은 다른 곳에 가서 잠을 자보는 등 낯선 환경과의 마주침의 기회를 늘려야 합니다. 



익숙한 배치를 바꾸지 않으면 낯선 상상력의 가치는 탄생되지 않습니다

     

제가 평범한 대학교수지만 기회가 생길 때마다 오지 체험을 시도하고 극한 상황에 도전하는 등산이나 마라톤에 도전하는 이유는 대학교수의 틀에 박힌 아장스망을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2012년도 사하라 사막 가서 마라톤 뛰다 죽을 뻔 한 체험을 해보고 킬리만자로 정상에 등정하고 내려오면서 극한의 피곤함으로 추락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공부는 이전과 다른 배치를 만나 이전과 다르게 사유하는 과정을 부단히 탐구하는 즐거운 여정입니다. 아장스망이라는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가 일상에서 늘 경험하는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 막걸리 좋아하세요? 막걸리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퍼뜩 떠오르는 단어나 이미지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막걸리 안주는 파전을 주로 먹고 막걸리는 비 오는 날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막걸리는 등산 갖다 내려와서 마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막걸리와 연상되는 단어가 파전, 비 오는 날, 등산과 같은 단어가 연상되는 이유는 막걸리와 관련된 아장스망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막걸리에 대한 상상력 수준이 향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막걸리에 대한 글을 써보라고 대학생들에게 A4용지 한 장씩 나눠주고 약 10분 정도의 시간을 줍니다. 막걸리 비 오는 날 먹고 파전과 함께 먹었던 추억 정도를 벗어나는 색다른 상상력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가 뭘까요? 막걸리에 대해서 아장스망이 바뀌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막걸리에 대한 새로운 연상을 하려면 막걸리를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마셔야 합니다. 예를 들면 막걸리를 새벽에 출근하기 전에 빈속에 2~3병 정도 마시고 취해봅니다. 취한 덕분에 회사도 못 가는 사고를 칩니다. 그래서 출근을 못했던 아픔이 생깁니다. 이제 막걸리 하면 연상되는 단어는 새벽이 떠오릅니다. 막걸리를 빈속에 새벽에 마시다 출근을 못한 아픔이라는 새로운 스토리가 연상되는 이유는 막걸리에 대한 아장스망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막걸리는 늘 비 오는 날-파전-둥산이라는 배치를 떠난 적이 없었는데 막걸리를 새벽에 그것도 안주로 스테이크를 먹었다면 세계 최초로 막걸리-새벽-스테이크-출근 못하는 사고라는 아장스망이 생깁니다. 막걸리에 대해 이전과 전혀 다르게 글을 쓸 수 있는 원동력도 결국 막걸리가 늘 만나서 만드는 배치, 즉 아장스망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막걸리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은 막걸리와 늘 어울려 다니는 익숙한 배치를 바꾸지 않으면 생기지 않습니다. 늘 만나서 어울려 다니던 익숙한 배치를 바꾸지 않으면 새로운 상상력의 가치는 탄생되지 않습니다. 가치 창조는 배치의 재조합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바로 아장스망의 위력입니다. 앞에서 예로 들었던 집사람 이야기를 아장스망이라는 개념과 연결 시켜 생각해보면 재미있습니다. 집-집사람의 배치는 늘 동일함이 반복되는 배치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회식이 일찍 끝나서 집에 일찍 가봤더니 원래 있어야 될 부인이 집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남편에게는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 것이고 해석되어야 할 새로운 기호가 남편에게 신호를 주는 상황입니다. 남편은 집에 부인이 없는 현상이 던져주는 기호의 의미를 해석합니다. 집에 집사람이 없다는 이야기, 특히 아무런 연락도 없이 집에 집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는 낯선 상황, 즉 아장스망입니다.


남편은 집에 없는 부인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지나도 전혀 소식도 없어지면서 남편은 부인을 더욱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남편이 부인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원동력은 평상시와는 다른 상황, 즉 아장스망이 바뀐 장면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밤 12시가 넘어서여 평소 때와는 전혀 다른 짙은 화장을 하고 들어오는 부인을 남편은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잠시 망설입니다. 부인이 집에 없는 것도 들뢰즈 입장에서는 기호이고 사건이며, 밤 12시가 넘어서 들어오는 것도 역시 기호이자 사건입니다. 짙은 화장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고, 밤 12시가 넘도록 연락도 없이 외출한 사유는 무엇일까를 심각하게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남편은 평상시와는  다르게 부인에 대해 생각합니다. 불법 침범이라는 사건이 발생하면 사람은 그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화장이 기호인 거야. 나한테. 그 기호를 남편은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농담이지만 결국 남편으로 하여금 부인을 자주 생각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부인이 종종 집에서 연락도 없이 사라지는 외출을 자주 하는 방법입니다. 아장스망이 바뀌고 사유체계에 불범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해야 비로소 사람은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생각을 시작합니다. 낯선 사유와 마주치는 사건이 사유의 깊이와 넓이를 심화하고 확장해준다는 반증입니다. 



낯선 배치를 만나지 않으면 사유의 가치도 올라가지 않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사실은 용접을 하다 용접기 온도조절을 잘못해서 철판에 구멍이 뻥 뚫린 적이 있습니다. 기능사 2급 자격시험이었지만 시험을 다 치르기 전에 불합격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떨어진 게 분명하니 철판에 용접봉으로 녹여 구멍을 더 크게 뚫어버렸습니다. 당시의 기능사 2급 자격증 시험 실패 체험 덕분에 철판만 생각하면 저는 보름달이 연상됩니다. 철판과 보름달을 연결시켜 상상력을 발휘하려면 두 가지 이질적 사물이나 현상 사이를 연상했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상상력이 체험적 상상력이어야 창조로 연결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체험이 동반되지 않는 상상은 공상이나 환상, 몽상이나 망상일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의 실패 체험 덕분에 철판과 보름달을 연결시켜서 시를 썼습니다. 


“철판 함부로 만지지 마라/너는 철판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적이 있느냐?” 안도현 시인의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를 패러디한 시입니다. 철판과 보름달은 익숙한 배치나 어울림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이질적 사물이나 현상을 조합해서 이전과 다른 마주침을 체험하게 만드는 사유의 텃밭이 아장스망입니다. 지금 생각을 바꾸려면 그 생각과 관련돼서 무의식적으로 연결되는 연상력을 바꾸려면 이전에 해왔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부딪치고 마주쳐야 합니다. 막걸리와 용접에 대한 아장스망을 바꿔야 이전과 다른 연상 능력이 생기고 거기서 새로운 상상력으로 비상할 수 있습니다. 체험의 반경과 깊이를 바꿔서 이전과 다르게 파고들거나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는 이상 나의 연상 능력의 수준과 깊이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낯선 배치를 만나야 사유가 배반하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1년 365일 중에서 가장 자주 가는 곳 두 군데 얘기해라고 하면 어디를 말할까요? 회사원일 경우에 가장 자주 가는 곳 두 군데는 아침에 회사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돌아가는 집입니다. 아장스망이 바뀔 가능성이 거의 없는 셈입니다. 아장스망이 바뀌지 않으니 회사원의 생각을 바꾸려고 해도 쉽게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왜 회사원이 된 거냐면 아침에 일어나 회사 갔다 저녁에 집으로 동일한 일정을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회사원에게 낯선 사건도 없고 새로운 해석을 기다리는 기호도 없으니 낯선 사유가 잉태할 가능성이 없는 이유입니다. 회사원이 정상적인 회사원과 다른 생각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회사 안 가도 되는 날은 철저하게 회사를 안 가고 다른 데를 가봐야 다른 생각이 드는 겁니다. 딴 데 가서 딴짓을 해야 딴생각이 든다는 주장을 이 장의 처음 부분에서 강조한 이유입니다. 가끔 회사로 출근하는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출근해서 한나절 딴짓을 하고 출근해야 사건과 사고가 발생합니다. 


물론 회시 사정에 따라서 팀장이나 담당 임원의 질책과 처벌이 따르겠지만 그럼에도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일상을 일탈하지 않는 새로운 상상력은 날개를 달고 비상할 수 없습니다. 저 역시 학교 가다가 갑자기 학교 가는 방향과 다른 방향을 차를 틀어 아무 데나 가서 카페에 앉아 책도 읽고 창밖을 내다보며 멍 때리는 시간을 갖기도 합니다. 잠깐 동안의 일탈이지만 틀에 박힌 출퇴근 일정에 나름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면서 이전과 다른 사유가 잉태되기 시작합니다. 들뢰즈가 아장스망이라는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여 우리한테 던져주는 시사점은 내가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사물, 현상, 어떤 환경과 위치를 바꿔서 배치하지 않으면 가치가 달라지지 않고 우리의 생각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장스망을 바꾸면 어제와 다른 방법으로 내가 출근할 수 있잖아요. 예를 들면 출근도 어제와 다른 방법으로 하면서 아장스망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무궁무진합니다. 오늘은 버스나 전철을 타고 가능하면 가끔 자전거 타고 출근합니다. 한번 가보기도 하고. 출근 방식을 바꾸면 점심때 만나는 사람도 바꿔보고 먹는 음식도 바꿔봅니다. 읽는 책도 바꾸고 회사에서 업무를 추진하는 방식도 조금이라도 바꾸기 시작하면 낯선 자극이 내 몸으로 들어오면서 색다른 사유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매일 반복하면서 생긴 깨달음의 흔적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합니다


아장스망과 연결시켜서 들뢰즈가 창조한 개념이 다양체(multiplicity)입니다. 멀티(multi)와  주름을 뜻하는 ‘pli’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주름이 많이 축적되어서 생긴 결과물이 다양체입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마주친 흔적이나 씨줄과 날줄로 엮여 생긴 주름이 다양체입니다. 다양체는 이제까지 내 몸에 각인된 다양한 흔적과 주름이 만든 역사적 산물입니다. 공부는 익숙한 주름을 제거하고 낯선 환경에 몸을 던져 배치를 바꾸고 없었던 흔적과 주름을 만들어가는 지난한 과정입니다. 제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나 킬리만자로에 올라가 보고 사하라 사막에서 마라톤을 뛰는 엉뚱한 짓을 자주 하는 이유는 앉아서 가만히 있으면 관념적 사유에 갇히는 위험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장스망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환경에 몸으로 부딪쳐가면서 잠자고 있는 감각을 흔들어 깨우는 무대입니다.


 아장스망이 바뀌면서 익숙했던 정신 근육이나 신체 근육이 바뀌면서 내 몸에 낯선 주름이 축적되는데 그 결과 생긴 흔적의 산물이 다양체입니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어떤 다양체의 주름을 몸에 각인시켜왔는지가 결정합니다. 예를 들면 축구선수 박지성의 아장스망은 뭘까요? 박지성의 발 + 축구공 + 운동장의 배치가 박지성으로 하여금 세계적인 축구 선수로 발돋움하게 만드는 다양체를 만들었습니다. 박지성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발로 차면서 생긴 다양한 주름이 몸에 배게 만들어 추구와 익숙한 다양체를 만들었습니다, 운동장을 쟤는 그냥 거의 그냥 무의식 중에도 이렇게 공이 차지는 이런 주름이 생긴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박지성에게 수영선수 박태환처럼 수영선수로 전환하라고 하면 빅 지성에게는 수영선수가 갖추어야 할 익숙한 주름이 하나도 없습니다. 박지성의 정체성은 축구선수로 생긴 다양체이지 수영선수로 만드는 다양체가 아닙니다.



박태환 수영선수를 물과 몸이 만나는 아장스망을 통해 자신에게 가장 최적의 다양체를 만들어오면서 세계적인 수영선수가 되었습니다. 물속에서는 거의 물개처럼 수영하는데 익숙한 다양한 주름을 개발한 덕분에 수영장은 그에게 너무나도 편안한 아장스망입니다. 그런데 박태환 선수에게 갑자기 피겨 스케이트 김연아 선수처럼 빙판에서 스케이팅을 하라고 하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빙판에 익숙한 다양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다양체는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떤 일을 어디서 어떻게 해나 가는지에 따라서 고유한 방식으로 다양하게 형성되어 가는 정체성의 흔적입니다. 똑같은 축구선수라도 할지라도 축구화와 운동장도 바뀌고 축구공도 바뀌면서 같은 종류의 축구를 한다고 하지만 어제와 다른 방식으로 주름이 생기면서 어제의 박지성과 다른 다양체가 계속 새로운 축구선수 박지성을 거듭나게 만들어갑니다. 


저는 한양대학교 교육공학과 유영만 교수로 제가 주로 만나는 배치는 한양대학교, 연구실, 책, 강의실에서 책 읽고 글 짓고 책 쓰며 연구하고 강의하는 주름이 매일 누적되어 유영만의 다양체가 생깁니다. 동일한 일이 반복된다고 생각되지만, 심지어 같은 책을 읽는다고 생각되지만 어제와 다르게 읽고 쓰며 강의하는 미묘한 강도의 차이가 반복되면서 어제와 다른 유영만의 다양체가 생성됩니다. 하지만 한양대학교 연구실과 강의실에서 생긴 유영만의 다양체가 갑자기 한양대학교 병원 진료실로 근무 위치가 바뀌면서 제가 하는 일도 교수가 아니라 의사로 업종 변경이 일어났다고 가정해봅니다. 제가 주로 학생을 가르치고 가르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자나 교수로 지내다가 환자를 진단하고 처방하는 의사로 변신하는 순간 새로운 다양체가 생깁니다. 유영만 한양대학교 교수가 유영만 한양대학교 병원 지식산부인과 의사로 변신하면서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다양체를 생성합니다. 지식산부인과 유영만 의사는 세계 최초로 지식 임신 클리닉을 개설해서 지식이 잉태가 잘 안되거나 지식 출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환자를 대상으로 세계 최초로 지식 임신 클리닉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이전과 다른 배치가 이전과 다른 가치를 만드는 창조입니다


내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떤 방법으로 마주 칠지의 여부는 통제가 불가능하지만 그런 마주침을 이어서 계속할지의 여부는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합니다. 통제가 불가능해서 생기는 다양체와 통제가 가능해서 생기는 다양체가 함께 뒤섞이면서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갑니다. 들뢰즈의 마주침을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나오는 코나투스(Conatus)로 해석하면 마주침의 통제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코나투스는 사물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고 스스로를 계속 높이려는 경향을 말합니다. 기쁜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과 더 만나고 싶지만 나에게 슬픔을 주는 사람을 만나면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고 빨리 헤어지고 싶은 충동이 바로 코나투스입니다. 내가 만나서 기쁨을 주는 마주침은 지속하고 슬픔을 안겨주는 마주침은 중단할 수 있습니다. 기쁨의 마주침이 남기는 주름과 슬픔의 마주침이 남기는 주름이 모두 모여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다양체를 만들어나갑니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에 말하는 다수가 일반적으로 따라가는 선악은 버리고, 내 입장에서 좋고 나쁨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들뢰즈의 마주침을 통제할 수 있는 영역과 그럴 수 없는 영역으로 나눠서 생각하는 방법입니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에 비추어 들뢰즈의 다양체를 생각하면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씨줄과 날줄이 엮여서 내 몸에 생성된 주름이 곧 나의 다중체입니다.



들뢰즈는 실재성, 현재성, 그리고 잠재성이라는 개념에 비추어 한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실재성은 유영만이라는 사람의 실존적 정체성이 입니다. 유영만이라는 사람의 존재는 한양대학교 교수라는 현재성과 유영만 교수가 꿈꾸고 있는 잠재적 가능성, 잠재성의 합작품입니다. 현재 유영만은 한양대학교 교수이지만 이걸 바꿔서 미래의 언젠가는 되고 싶은 잠재성을 실현하면 유영만의 실재성은 바뀝니다. 예를 들면 유영만 교수라는 현재성의 잠재성은 지식산부인과 의사입니다. 한양대학교 교수라는 현재성을 제가 꿈꾸는 잠재성인  지식산부인과 의사로 바꾸면 유영만의 실재성은 지금과 판이한 모습으로 바뀝니다. 현재성을 잠재성으로 바꾸면 실재성이 바뀝니다. 그렇다면 유영만 교수라는 현재성을 유영만 지식 산부 이관 의사라는 잠재성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앉아서 생각하면서 아이디어를 낸다고 바뀌지 않습니다. 들뢰즈의 충고를 따르면 제가 자주 만나는 시간과 공간과 인간의 배치, 즉 아장스망을 바꾸면 제가 꿈꾸는 잠재적 가능성이 현실로 구현되면서 유영만의 실재성은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바뀝니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가 말하는 창조는 없었던 무(無)에서 새로운 유(有)를 만드는 게 아니라 기존에 유(有)와 유(有)의 배치를 바꾸면 여기서 뭔가 새로운 유(有)가 생성됩니다. 제가 유영만 대학교수(현재성)였다가 저의 아장스망을 바꾸니까 유영만의 잠재성(지식산부인과 의사)이 현실로 구현되면서 유영만의 실재성이 전혀 다르게 창조됩니다. 그래서 들뢰즈를 생성의 철학자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뭔가 자꾸 이렇게 생성한다는 것은 기존에 있는 것들과 있는 것들을 만나는 것을 자꾸 바꿔주는 거예요. 이 위치를 바꾸고. 그러면 이제 우리의 생각이 새롭게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바뀔 수 있다는 걸 이제 들뢰즈가 이야기하고 있어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쓴 《공산당 선언》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들뢰즈의 아장스망에 비추어 이 말을 바꿔봅니다. “만국의 학습자들이여. 아장스망을 바꿔라.” 아장스망만 바꿔도 어제의 나와 전혀 다른 나로 변신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는 게 바로 들뢰즈의 주장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생각지도는 생각지도 못한 생각의 지도자에서 나옵니다


생각만 해본 사람은 당해본 사람을 못 당합니다. 세상을 이끌어가는 사람은 앉아서 생각을 오랫동안 하는 사람이나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비록 미천한 아이디어라고 할지라도 이리저리 시도하면서 우발적 깨우침을 얻는 사람입니다. 생각대로 안 될 때 사람은 많이 배우고 크게 깨닫습니다. 생각만 해본 사람은 그런 깨달음의 경지로 가지 못합니다. 앉아서 깊이 생각할수록 실천할 가능성은 희박해지고 다양한 방법을 아이디어 차원에서 제기합니다. 그것의 실효성을 책상에서 판단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직접 몸으로 부딪쳐 봐와 머릿속 생각이 잘 못됐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난국을 돌파하는 색다른 방법도 떠오릅니다. 생각대로 안 될 때 생각지도 못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생각지도 못한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방법이 바로 지금까지 들뢰즈가 얘기하는 아장스망, 즉 사물이나 현상 또는 환경과 시스템의 배치를 바꾸는 방법입니다. 서두에 얘기했던 딴짓을 하면 딴생각이 든다는 점, 놀라운 생각은 책상에서 나오지 않고 일상에서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나옵니다. 들뢰즈의 우발적 마주침과 아장스망을 통해서 낯선 배움을 촉진시키는 한 가지 방법으로 조만간 제가 들이 대학교 저 질러 학과 뒷수습 전공이라는 대학을 설립할 예정입니다. 이 대학은 ‘그럼에도(島)’라는 섬에 설립할 예정입니다. 난관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이를 돌파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과감하게 도전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대학입니다. 안 되는 다양한 이유와 핑계보다는 힘들고 어려운 시련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한계에 도전하는 사람을 위한 대학입니다. 위대한 생각과 위대한 아이디어는 아이디어일 뿐이고 생각일 뿐입니다. 나가서 행동해봐야 생각지도 못했던  생각지도를 그리는 방법을 알게 되고 거기서 세상을 이끌어 갈 위대한 생각의 지도자가 탄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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