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폴라니의 인격적 지식관에서 배우다
공동체에 기여하는 지식을 창조하고 싶다면?
헌신적으로 몰입해서 인격적 지식을 창조하라
언어로 설명할 수 없지만 온몸으로 설득하는 비결,
마이클 폴라니(1891.3.11.∼1976.2.22.)의 인격적 지식관에서 배우다
마이클 폴라니라는 《개인적 지식》이라는 책을 쓴 사람입니다. 개인적인 지식의 원어는 ‘personal knowledge’입니다. ‘personal knowledge’는 개인적인 지식이라기보다 인격적 지식입니다. 폴라니는 평생에 걸쳐서 지식이 인격적 지식일 수밖에 없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주장하면서 독창적인 사유체계를 구축한 사람입니다. 모든 지식은 왜 인격적일 수밖에 없는지를 밝혀보는 게 이번 강의의 핵심이자 정수에 해당합니다. 모든 지식은 내가 이미 갖고 있는 신념과 이론에서 벗어나 주어진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가운데 탄생되지 않습니다. 관찰하면서 내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어떤 현상은 이미 내 머릿속에 그런 현상을 포착할 수 있는 개념이나 이론을 비롯한 프레임으로 걸러진 결과입니다.
“신념을 모든 지식의 원천으로서 인정”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마이클 폴라니의 주장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념이 추가되지 않은 개념은 관념의 파편에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전수나 습득 또는 창조 과정은 아무런 선입견이나 신념이 개입되지 않는 기계적 과정이 아니라 지식창조 주체의 신념과 열정. 그리고 강한 의지가 반영되는 과정입니다. 객관적인 제삼자의 입장에 머물면서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용기 있는 지식을 창조해낼 수 없습니다. 주체의 결연한 결단과 강한 신념 및 불굴의 의지가 반영되는 지식이라야 용기 있는 결단을 촉구할 수 있는 힘 있는 지식이 됩니다. 지식의 창조 및 전수과정은 지식 창조자의 주체적이고 인격적인 참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주체의 헌신적 참여 없는 지식은 헌신짝에 불과합니다
이런 점에 주목했던 마이클 폴라니는 지식의 습득과 형성에 인간 주체의 참여 의지와 열정, 그리고 주체적인 의미부여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밝혀내는 과정을 일생을 통해 연구했습니다. "우리를 유쾌하게 하는 아름다움과 우리를 황홀하게 하는 심오함을 인정하지 않은 채 우리가 그러한 이론을 받아들이는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p.40). 마이클 폴라니의 《개인적 지식》에 나오는 말입니다. 유쾌한 아름다움과 황홀한 심오함은 이론 창조자의 뚜렷한 신념과 열정이 반영된 예술적 평가에서 나오는 심미적 판단입니다. 과학이 엄밀성을 추구한다는 명목하게 인간이 추구하는 예술적 감성을 거세하고 주체의 신념과 열정도 없는 논리적 지식을 만들고자 했던 당대의 과학관에 마이클 폴라니가 왜 그토록 반대 노선을 걸었는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마이클 폴라니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집안 출신입니다. 독일 칼스루어 공과대학과 베를린 대학에서 물리학과 화학을 전공했습니다. 1919년 폴라니는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에서 물리 화학 연구원으로 들어갔으나 나치의 등장으로 영국으로 이주합니다. 영국 맨체스터 대학 물리 화학 교수와 사회과학 학장과 옥스퍼드 대학, 머튼 칼리지 펠로우를 역임했습니다. 과학철학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인 《개인적 지식》을 비롯해서 몇 권의 기념비적 작품을 남깁니다. 마이클 폴라니는 형,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덕분에 더 유명해지기도 했습니다. 칼 폴라니는 전통적인 경제 사조에 반대하면서 헝가리 지식인으로 서구의 시장 체계를 분석한 《거대한 전환》이라는 책으로 유명세를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이클 폴라니의 아들, 존 찰스 폴라니(John Charles Polanyi)는 1986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제가 특별히 마이클 폴라니의 인격적 지식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유는 제가 지향하거나 추구하는 지식관을 아주 적나라하게 잘 드러내 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이클 폴라니의 지식관에 관한 철학을 탈비판철학(Post-Critical Philosophy)이라고 합니다. 탈 비판철학은 우주를 관찰과 측정이 가능한 거대한 기계로 파악하는 뉴톤의 기계론적 근대 과학을 비판합니다. 검증되지 않은 신념이나 가정, 권위나 전통은 확실한 지식의 방해물로 간주하는 근대 철학적 전통 역시 탈 비판철학의 비판 대상입니다. 탈 비판철학은 주체의 적극적 헌신이나 개입을 제거하고 복잡한 것을 작은 단위로 분석해서 이해하려는 환원주의적 객관주의에 반기를 듭니다. 마이클 폴라니의 탈 비판철학은 특히 지식을 창조하는 과정에 주체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헌신적으로 몰입하는 행위는 지식창조 과정에 열정과 신념이 반영됨으로써 지식의 타당성과 객관성 훼손한다는 주장은 지식의 본질적 성격을 오해하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비판합니다. 마이클 폴라니는 주체의 헌신과 확신을 배제하고는 지식의 본질 규명이 불가능하고 지식 탐구 자체를 수행하기 어렵다는 입장입니다. 모든 과학자의 지식은 과학자의 철학과 신념과 열정이 첨가되지 않는 지식이라야 객관적 지식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런 지식관을 전면 부정한 사람이 바로 마이클 폴라니의 인격적 지식관입니다. 주체의 헌신적 참여와 열정이 없는 지식은 헌신짝에 불과합니다.
나는 알지만 설명할 수 없는 지식이 더 많습니다
인격적 지식이 비판하는 지식관은 크게 네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째, 탈 비판주의적 인격적 지식관은 모든 지식을 다 언어적으로 진술해야 분명하게 전문용어로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형식화를 비판합니다, 모든 지식을 언어를 매개로 문서화하려는 발상입니다. 하지만 문서화시킬 수 있는 지식은 전체 지식 중에서 약 20%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 80%는 언어화시킬 수 없는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입니다. 암묵적 지식은 앞으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알고 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지식입니다 마이클 폴라니는 우리는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믿습니다. 알고 있는 것 중에서 안다고 표현하는 지식은 전체 지식 중의 극히 일부분에 해당됩니다. 마니클 폴라니가 전제하는 두 번째 문제의식은 복잡한 현상을 구성하는 부분을 분석하고 그 결과를 종합하면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환원주의적 입장입니다, 예를 들면 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집을 구성하는 다양한 건축 재료의 특성을 다 합치면 된다는 발상입니다. 그런데 건축자재를 그냥 다 합친다고 집이라는 아름다운 건축미가 탄생되지 않습니다.
마이클 폴라니가 반대했던 세 번째 지식관은 가치중립적 탐구입니다. 모든 과학적 탐구는 탐구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믿고 있는 가치판단 기준이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지식을 만드는데 당사자의 신념과 철학과 가치관과 같은 주관이 개입하지 않게 만드는 방법이 존재할까요? 폴라니의 비판적 문제의식을 제기되기 이전의 과학적 지식은 가치중립적이어야 하는 신념을 믿었습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집에서 나올 때 심장은 집에다 놓고 차가운 머리만 갖고 나와서 지식을 창조하는 탐구과정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주관 없이 객관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마이클 폴라니가 비판하는 지식관은 모든 지식을 다 관찰 가능하고 계량화 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모든 지식은 물리적으로 관찰 가능하고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할 때 지식으로 인정하는 계량화에 마이클 폴라니는 반대 입장을 표명합니다. 관찰 불가능한 지식은 당연히 경험적으로 검증이 불가능합니다. 알고 있지만 언어적 표현이나 수학적 공식으로 분명하게 계량화시킬 수 없는 지식이 너무 많습니다.
경기도 파주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금고 회사가 있다. 선일금고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이 회사의 설립자이자 대표이사였던 김용호 회장님은 안타깝게 돌아가셨습니다. 이 분은 어떤 금고를 갖다 줘도 다 열어버립니다. 어떻게 금고를 그렇게 신기하게 다 여냐고 물어보면 “요렇게 조렇게, 이렇게 저렇게?” 연다고 하면서 손으로 금고를 열기 위해 돌리는 모습만 보여줄 뿐입니다. 김용호 회장은 금고 여는 노하우를 책상에서 머리로 배우지 않고 온몸으로 익혔습니다. 금고 유형별 저마다 다른 원리를 무수한 실험과 모색 끝에 손에 와 닿는 미묘한 감각으로 금고 여는 노하우를 익혔습니다. 금고 여는 노하우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말로 가르칠 수 없습니다. 오로지 금고 여는 사람만이 아는 미묘한 감각의 차이를 몸으로 느낄 수 있을 뿐입니다. 몸이 기억하는 체험적 느낌은 언어적 표현의 대상을 넘어섭니다. 신라호텔에 근무하다 독립해서 서울 청담동에 초밥집을 낸 안효주 대표, 그분은 초밥을 만들기 위해 손으로 밥을 잡으면 350개를 잡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두 번째 손에 잡은 밥 톨의 개수고 350개, 여러 번 반복을 해도 밥 톨의 개수는 어김없이 350개입니다. 밥 톨 350개 잡는 방법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직접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반복해서 연습을 하며 손에 담기는 밥알의 미묘한 감촉을 통해서 아는 수밖에 없습니다. 머리로 배울 수 없는 암묵적 노하우는 정성과 수고, 몰입과 집중을 통해 몸이 기억하도록 반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몸으로 깨달은 지혜는 오로지 타자의 몸을 통해서만이 자신의 암묵적 지식으로 내재화할 수 있습니다.
증명할 수 없는 지식이야말로 증명할 수 있는 지식의 토대입니다
폴라니가 만든 개념 중에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이라고 있습니다. 알고 있지만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지식입니다. 예를 들면 엄마가 김치 담그는 노하우를 매뉴얼로 만들어서 딸이 시집갈 때 선물로 줬어요. 이거 그대로 김치를 담그면 엄마가 담그는 김치 맛 하고 똑같을 거라는 말과 함께요. 딸이 시집가서 엄마의 매뉴얼대로 김치를 그대로 담갔는데 엄마가 만든 김치 맛 하고 맛의 차이가 납니다. 그 맛의 차이를 무슨 맛의 차이라고 하나요? 네, 손맛의 차이라고 합니다. 바로 손맛이 마이클 폴라니가 얘기하는 암묵적 지식입니다. 손맛을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엄마하고 장기간 합숙 훈련할 수밖에 없습니다. 엄마의 김치 담그는 노하우를 매뉴얼로 만들기 위해 언어를 통해서 문서화하는 과정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암묵적 지식이 담기지 않습니다. 이런 과정을 마이클 폴라니가 형식화, 객관화, 문서화, 계량화라는 이름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입니다. 암묵적 지식은 이처럼 문서화해서 언어를 통해 외면화시킬 수 없는 지식인데 반해 명시적 지식은 매뉴얼이나 문서로 외면화된 지식입니다. 하지만 순수한 명시적 지식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지식은 암묵적이거나 암묵적 지식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암묵적 지식과 명시적 지식은 분리되어 존재하는 두 가지 지식이 아닙니다. 개념적 편의상 구분한 지식의 종류일 뿐입니다. 일종의 양쪽 스펙트럼으로 존재한다고 보면 좋을 거 같습니다. 왼쪽 극단에는 명시적 지식이고 오른쪽 극단에는 암묵적 지식이 위치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치 담그는데 필요한 지식은 암묵적 지식입니다. 다만 그걸 명시적 언어로 드러낼 수 있는 측면이 있고 그럴 수도 없는 측면이 있을 뿐입니다.
제가 예전에 학교 오기 전에 회사에 5년 동안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일신상의 이유로 퇴직을 할 때 해당 회사 팀장님이 그동안 회사에 근무하면서 축적한 노하우를 여기에 다 쏟아놓고 나가라는 황당한 요구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은 그동안 작업했던 모든 파일이 저장된 하드디스크를 전해주는 방법밖에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하드 디스크에 정리된 지식은 제가 갖고 있는 노하우의 약 20%에 해당하는 명시적 지식입니다. 마이클 폴라니가 얘기한 암묵적 지식은 퇴사를 하면 저와 함께 같이 해당 조직을 떠나는 지식입니다. 지식을 창조한 주제와 분리할 수 없는 지식이 암묵적 지식입니다. 폴라니가 유명해진 이유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우리는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주장 때문입니다. 다만, 알고 있는 바를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뿐입니다. 알고 있는 지식은 전체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빙산의 20%가 겉으로 드러나 있는데 그게 바로 명시적 지식이고 보이지 않는, 수면 밑에 잠재되어 있는 빙산이 바로 암묵적 지식입니다.
문제는 조직에서 지식을 전략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암묵적 지식보다 보이는 명시적 지식을 창조하고 공유하는 환경이사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우리 지금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저 보이지 않는 암묵적 지식 80%가 아니라 관찰과 측정이 가능한 20%를 어떻게 공유하고 전달하는 노력에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증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분명 알고 있는 그 지식이야말로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 모든 지식의 토대이며, 또 그것의 타당성을 보장해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간과해버렸다”(p.286). 마이클 폴라니의 《개인적 지식》에 나오는 말입니다. 증명할 수 있는 지식은 증명할 수 없는 지식에 비해 극히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과학적 탐구 대상에서 지식을 제외시켜버렸다는 것이 마이클 폴라니의 지식관입니다.
보이지 않는 배경이 보이는 전경의 모습을 좌우합니다
암묵적 지식과 명시적 지식에 상응하는 보조식(subsidiary awareness)과 초점식(focal awareness)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망치로 못을 박는데 나는 망치로 내리치는 못대가리에 의식적으로 초점을 둡니다. 못을 쥐고 있는 손을 망치로 내리치지는 않을까를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널빤지에 못을 똑바로 박기 위해서는 수많은 다른 동작들이 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망치로 내리치는 힘을 적당하게 줘야 되고, 그 사이에 못을 잡고 있는 손은 못이 삐딱해지지 않도록 못을 적당히 잡고 있어야 합니다. 망치를 잡고 있는 오른손이 어느 정도 각도와 회전을 유지한 상태에서 못 상단 부분을 정확히 내리쳐야 못을 잡고 있는 손도 다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못이 널빤지에 똑바로 박힙니다.
못을 널빤지에 박기 위한 모든 동작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지만 보이지 않는 가운데 못 박는 행동을 도와주는 보조식입니다. 겉으로 드러나 있는 초점식은 명시적 지식이고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못을 똑바로 박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모든 인식을 보조식이라고 하며 거기서 탄생하는 지식을 암묵적 지식이라고 합니다. 암묵적 지식과 보조식의 도움을 받지 않는, 명시적 지식과 초점식은 없습니다. 전문가의 초점식은 수많은 변수들이 동시에 관여하면서 하나의 성취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완벽한 하모니의 결과로 보이는 인식입니다. 심지어 못을 박는 과정에서 호흡조절만 잘 못해도 망치는 정확한 초점을 잃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내리칠 수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배경이 저마다의 위치에서 본분을 다할 때 전경으로 드러나는 게 초점식입니다. 전경으로 드러난 초점식은 보이지 않는 배경에서 관여하는 무수한 보조식 덕분에 빛나게 보일 뿐입니다.
제가 책 쓰기를 과정으로 존 듀이의 하나의 경험으로 예를 들었던 것처럼 어떻게 그렇게 책을 빨리 쓰는지, 책 쓰는 노하우를 가르쳐달라는 사람이 많습니다. 《책 쓰기는 애쓰기다》라는 책이 바로 제가 책을 쓰는 과정에서 언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명시적 지식의 산물입니다. 이런 명시적 지식을 창조하기 위해서 제가 하는 모든 활동 중에서 겉으로 드러난 인식 가능한 활동이 초점식입니다. 예를 들면 자료를 수집하고 서론을 쓰고, 본론의 내용을 구조화시켜 정리하고 결론을 쓴 다음 제목을 정하는 활동은 초점식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서론을 쓰는지, 서론을 쓰기 위해서 제가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 서론에 동원하는 다양한 논리적 근거는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일관성 있게 정리가 되는지, 제목은 어떻게 정해진 것인지, 본문의 구조는 왜 그렇게 어떤 방법을 통해서 구조화된 것인지, 결론은 왜 그런 내용으로 화룡 점점하게 되었는지를 일일이 다 밝혀내서 언어적으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동시에 머릿속에서 돌아기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디어가 나왔다가 사라지고 어떤 아이디어는 채택되어 기존 아이디와 합병되면서 제3의 새로운 아이디어로 뻗어나갑니다. 왜 어떻게 정리되는지는 명시적으로 설명해낼 수 없습니다. 이런 과정에 관여되는 인식이 보조 식이고 보조식으로 창조되는 지식이 암묵적 지식입니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콘셉트는 어떻게 만드는 것이고, 그것을 기반으로 책 내용을 논리적으로 요약해서 그 구조를 한 장으로 그림으로 도해하는 과정은 수많은 보조 식이 관여해서 결과적으로 드러나는 초점식을 우리가 육안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질환은 치료 대상이지만 질병은 치유 대상입니다
초점식과 보조식은 질환(disease)과 질병(illness)의 차이에 상응합니다. 질환은 ‘치료(curing)’는 대상이자 초점식이며 명시적 지식으로 표현 가능합니다. 질병은 치유 또는 ‘보살핌(caring)’의 대상이자 보조식이며 암묵적 지식의 영역입니다. “질병은 질환을 앓으면서 살아가는 경험이다. 질환 이야기가 몸을 측정한다면, 질병 이야기는 고장 나고 있는 몸 안에서 느끼는 공포와 절망을 말한다. 질병은 의학이 멈추는 점에서, 내 몸에 일어나는 일은 내 삶에도 일어난다. 내 삶에는 체온과 순환도 있지만 희망과 낙담, 기쁨과 슬픔도 있으며, 이런 것들은 측정될 수 없다. 질병 이야기에 그 몸 같은 것은 없으며 오직 내가 경험하는 내 몸만이 있다”(p.28-29).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에 나오는 말입니다. 체온은 명시적 지식이지만 체온으로 느끼는 낙담과 기쁨, 그리고 슬픔은 모두 감정 언어로 번역해낼 수 없는 암묵적 영역입니다.
어떤 사람의 혈압 수치가 140에 90이라서 고혈압이라고 진단하는 것은 질환입니다. 똑같은 고혈압 질환인데 내가 받아들이는 심리적인 감정이나 두려움, 불편함이나 불안감은 질병입니다. 질환은 환자가 지금 당장 초점을 두고는 초점식이라서 명시적 언어, 즉 수치로 표현이 가능한데 반해 질병은 환자가 고혈압 수치를 보고 느끼는 다양한 심리적 감정의 변주가 보조식으로 관여할 뿐입니다. 고혈압 140에서 90을 떨어뜨리기 위해 고혈압 약을 처방하는 의사의 진료는 치료에 해당하지만 고혈압으로 겪는 심리적 불안감과 두려움은 보살펴주는 의사의 진료는 치유다. 의사들이 주로 진료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겉으로 드러난 증상과 질환을 일으킨 원인 치료는 초점식이고 명시적 처방일 뿐입니다. 환자가 진짜 원하는 치료는 초점식으로 드러난 객관적 수치가 아니라 그 수치가 환자에게 미치는 불안감과 알 수 없는 두려움을 해소하고 질환을 받아들여 이겨내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북돋아주는 치유에 있습니다.
2018년도 코로나 오기 전에 몽블랑에 가서 뚜르 드 몽블랑 트레킹을 하고 왔거든요. 그런데 제가 인제 중동 산화를 신고 갔어요. 발목 위 복숭아뼈까지 덮어 발목을 보호하는 등산화가 중등산화입니다. 중 문제는 중등산화의 발목을 보호하는 부드러운 내피가 복숭아 뼈 맨산을 계속 자극해서 물집이 생겼습니다. 언덕을 올라갈 때는 크게 통증이 없다가 내려갈 때는 똑바로 내려가지 못하고 옆으로 몸을 틀어서 힘겹게 내려가야 그나마 통증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저의 사정도 모르고 가이드는 왜 빨리 안 내려 오냐, 시간이 촉박한데 라고 야단을 치는 겁니다. 이렇게 아픈 모습을 옆에서 계속 지켜보던, 저하고 같이 갔던 동료 소장님이 뜻밖의 제안을 합니다. 교수님, 신발을 저하고 바꿔 신으면 어떨까요? 그 소장님의 신발은 부드러운 헝겊으로 만든 신발이라서 저의 중등산화보다 훨씬 물집에 땋는 접촉 감이 덜 자극적이었습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신발을 짝짝으로 신고 등산한다고 뭐라고 하겠지만 속사정을 아는 사람에게는 정말 동료를 가까이서 살펴본 사람만이 제안할 수 있는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최고의 벗은 타자의 아픔을 가슴으로 생각하며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발 벗이야말로 최고의 벗입니다.
덕분에 안전하게 하산해서 다음 날 등산에는 제가 사전에 발목 밑에까지 덮는 또 다른 등산화를 준비한 걸 신고 별 탈 없이 산행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제가 준비해 간 등산화는 발목 밑에까지 덮는 등산화라서 물집이 생긴 복숭아 뼈 위까지는 닿지 않아서 안전하게 산행을 즐겼습니다. 저를 가까이서 살펴본 동료 소장님 덕분에 저를 보살필 수 있었습니다. 살피지 않으면 보살필 수 없습니다. 살펴보는 행동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말 못 할 아픔을 계속 관찰하는 애정과 관심의 표현입니다. 제가 겪는 아픔을 미리 상상으로나마 경험해보고 어떤 조치를 취하면 저 아픔이 치유될 수 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으면 이런 보살핌의 미덕은 나오지 않습니다. 보살핌은 초점식으로 드러나지 않고 명시적 지식으로 처방전을 표현할 수 없는 상대방에 대한 지극한 사랑입니다. 끊임없이 계속 살펴본 다음에 온 마음을 동원해 가지고 상대방의 마음을 어루만질 때, 언어화시킬 수 없는 엄청난 암묵적 지식이 탄생합니다.
몸이 입증하는 체험적 각성을 논리의 이름으로 부정할 수 없습니다
“여자 사랑하기를 좋아하는 내 바람둥이 친구는 “연애란 오직 살을 비비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아, 저렇게 간단한 것을 몰라서 이토록 헤매었나는 말인가 싶었다. 살은 오직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작동한다. 나는 살의 아날로그를 자세히 쓸 힘이 없다. 그것은 아직도 내 언어의 힘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살의 아날로그는 언어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언어의 반대말은 ‘살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276쪽).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에 나오는 말입니다. ’ 살의 아날로그‘는 몸으로 느끼는 감촉입니다. 대상에 대한 가장 정직한 느낌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정도까지만 표현이 가능합니다.
표현이 불가한 특정한 상황에서 직감적으로 다가온 느낌이나 찰나의 순간에 문득(聞得) 드는 생각,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깨달았던 교훈이나 체험적 노하우를 고스란히 언어로 전환하거나 번역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몸에 남아있는 깨달음의 흔적은 언어화를 거부합니다. 지하철을 타면 빈자리가 있는지 확인합니다. 만약 빈자리가 없으면 금방 내릴 거 같은 사람 앞에 서서 기다립니다. 어떻게 금방 내릴지 알까요? 머리로 앎이 오기 전에 가슴으로 느낌이 옵니다. 느낌은 언제나 앎보다 먼저 옵니다. 그리고 느낌은 앎을 능가하는 정확성을 지닙니다. 물론 느낌은 다양한 정보를 종합해봤을 때 직감적으로 생깁니다. 노선도를 확인한다든지, 가방을 싼다든지 아니면 기타 행동거지나 표정이 불안한 모습을 종합적으로 판단해봤을 때 다음 역에서 내릴 확률이 높다고 판단합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의 세계가 앎의 세계를 이끌어갑니다. 하나의 초점식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지원하는 수많은 보조식의 세계가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될 초점입니다.
“우리 섬의 어른들은, 비록 오늬 죽의 맛에 날카롭지는 못 했어도, 소금 그 자체의 맛에는 너나없이 귀신들이었다. 소금 한 알갱이를 입에 넣으면, 섬의 동쪽 염전 소금인지 서쪽 염전 소금인지, 초여름 소금인지 늦가을 소금인지, 어김없이 알아맞혔다”(251쪽).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에 나오는 말입니다. 오랜 경험의 반복으로 혀가 감각을 기억하고 알아맞히는 현상을 동쪽 염전 소금과 서쪽 염전 소금의 차이를 언어적 표현의 차이로 분간해내기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맛의 차이로 소금의 출처와 시기를 판별하는 능력은 논리적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체험적 각성의 과정입니다. 소금 맛을 분간해내는 어른들의 노하우는 어떤 지식이나 이론을 체계적으로 축적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라 저마다 다른 상황 속에서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면서 몸으로 깨닫는 지혜에 가깝습니다. 역시 언어화시킬 수 없는 체화된 앎의 세계, 가르칠 수도 없고 일정한 틀을 갖춘 매뉴얼로도 문서화시킬 수 없는 앎입니다.
“나는 몸이 입증하는 것들을 논리의 이름으로 부정할 수 있을 만큼 명석하지 못하다”(141쪽). 김훈의 《자전거 여행 2》에 나오는 말입니다. 몸이 입증하는 것은 살이 직접 접촉하면서 느끼는 감각적 체험의 흔적입니다. 머리로 기억하는 경험이 아니라 몸이 직접 접촉하며 얻는 느낌을 논리의 이름으로 판별해내기 어렵습니다. 뭔가 느낌이 왔지만 그 느낌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했던 경험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한눈에 반했는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느낌은 앎 이전에 오면서 앎을 능가하는 심오한 직관과 통찰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행을 하면서 가끔씩 여행가방 잃어버릴 때 있죠?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권창민 대표에게 갖다 주면 잃어버린 비밀번호를 모름에도 불구하고 여행 가방을 순식간에 열어버립니다.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이렇게 저렇게 이렇게 비밀번호를 조합하면서 손가락에 느껴지는 여행가방의 자물쇠 원리를 감각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역시 이론적으로 배울 수 있는 이성적 앎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할 수밖에 없는 체험적 깨달음입니다. 마이클 폴라니의 언어로 이야기하면 암묵적 지식입니다. 이런 감각적 깨달음은 존 듀이의 언어로 이야기하면 질 성적 사고가 동반되는 2차적 경험입니다. 질성적 사고는 논리적 앎이 아니라 감각적 느낌으로 다가오는 사고입니다. 우리가 결혼 상태를 결정할 때도 논리적으로 여러 가지 변수를 놓고 복잡하게 머리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은 느낌입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이 사람 정도면 내가 평생을 같이 살아도 되겠다는 느낌이 올 때 이전의 논리적 사고로 결정했던 많은 변수들을 덮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듀이는 이런 첫 느낌을 질성적 사고라고 했고 마이클 폴라니는 보조식으로 판단한 암묵적 지식이라고 합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은 설득적 열정과 발견적 열정이 만나는 공감의 향연입니다
마이클 폴라니에 따르면 과학자와 과학자가 하는 일이 객관적인 입장을 갖고 제삼자의 자세로 섬에 머물며 관조하는 게 아니라 뜨거운 열정과 감정과 정서적 몰입으로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키는 예술적 작업입니다. 감성이나 감정을 기반으로 발동되는 정열과 열정이 과학적 발견과 정당화의 맥락에 편파적 의견을 개입시키는 오염원으로 간주하는 전통적인 실증 과학에 우리 모두 싫증을 내야 합니다. 모든 탐구는 탐구 주체의 열정과 신념과 가치판단이 초기부터 강하게 개입하는 예술적 창작과정입니다. 폴라니가 과학은 예술적 작품이라고 선동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술가는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대상에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열정을 보여주고 정열적으로 몰입합니다. 과학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지적으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발견에 열정을 불태웁니다. 그것이 바로 과학자가 보여주는 발견적 열정(heuristic passion)입니다. 발견적 열정을 가로막을 수 있는 장애물은 없습니다. 뭔가를 배우고 싶은 사람에게 장애물은 없습니다.
한 번 앎의 바다에 빠지면 그 어떤 외부적 힘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는 욕파불능(欲罷不能)의 상태로 돌입합니다. 배움에의 갈망과 앎에 대한 강한 호기심, 그리고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어보겠다는 불굴의 의지와 열정은 한계를 만나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더욱 적극적으로 온몸을 던져 발견의 욕구를 불태웁니다. 욕파불능의 상태로 진입한 사람은 한계는 한 게 없는 사람의 핑계라고 생각합니다. 한계는 책상에서 알 수 없습니다. 오로지 내 몸을 던져 한계 상황에서 도전을 반복할 때 감각적으로 느낌이 옵니다. 지금이 한계라고 그때 몸에서 들리는 소리가 바로 한계 신호입니다. 한계를 몸으로 만나본 사람만이 거기서 도전을 멈추고 다른 미지의 세계로 도전을 반복합니다. 이번 도전에도 여전히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거기서 어떤 의미심장함을 건질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는 불가지의 세계를 불가능으로 설정하지 않고 영원히 도전을 반복하면서 어제와 다르게 깨달음을 얻으려는 지적 열정(intellectual passion)을 불태울 뿐입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의 세계에 비록 도달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어둠을 배경으로 늘 어제와 다른 동경심을 마음에 품고 오늘도 도전을 반복할 뿐입니다. 하지만 내가 추구하는 미지의 세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으며, 거기에 이르는 길이 정확한 절차나 프로세스로 사전에 철저하게 계획되어 있다면 인생은 더욱 살아갈 재미가 없습니다. 불확실한 의미의 바다이면서 언제 어떤 파도와 함께 나에게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삶의 의미를 추구(persistent pursuit)하는 지적 열정(intellectual passion)을 잃지 않는다면 생각지도 못한 색다른 세계를 발견(discovery)할 수 있습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을 설득적 열정(persuasive passion)과 발견적 열정이 만나는 공감의 향연입니다. 미지의 세계로 몸을 던져 뭔가를 찾아내려는 발견적 열정과 마침내 구축한 과학적 이론을 후학들에게 알려주려는 설득적 열정이 만날 때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혁명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무거운 짐(load)을 짊어지고 의미의 바다에서 유영(遊泳)하며 길(road)을 찾아가는 끊임없는 암중모색(groping for the meaning of the facts)의 연속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 사실과 마주칠지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설혹 만난다고 할지라도 그 의미를 분명하게 밝혀낼 수 없는 미결정성(indeterminacy)이 사람을 더욱 불안하게 만듭니다.
믿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읽고 경험하면서 나도 모르게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지적 프레임워크(intellectual framework)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좌우합니다. 기존 프레임만으로는 새롭게 부각되는 의미의 바다를 이전과 다르게 해석해낼 수 없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언제나 내가 선호하는 감각적 색채(emotional color)로 물들어 있습니다. 내가 쓰고 있는 안경의 색깔대로 세상이 보이듯이, 내가 어떤 감각적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세상은 이전과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문제는 나의 감각적 편향성은 경계 너머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이전과 다른 감각적 자극을 받지 않으면 고착화됩니다. ‘넘어섬’의 경험이란 지각 불가능한 것과의 피할 수 없는 마주침이라 질 들뢰즈도 《차이와 반복》에서 말하지 않았던가요.
지각 불가능한 것과의 마주침의 경험이 있어야 이전과 다른 감각적 색채로 물들여집니다. 끊임없이 지금 여기의 세계를 넘어서려는 안간힘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나의 무지함을 깨우치는 감동과 감탄의 인식으로 이끌어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결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불확실한 세계지만 그럼에도 뭔가를 발견하려는 열정은 마침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운 기적을 만나게 해 줍니다. 그것이 나를 비롯해 우리들이 살아가는 지금 여기서 어떤 의미와 시사점이 있는지를 따져 묻는(valid) 가운데 한 개인의 신념과 철학, 열정과 믿음이 축적된 믿음의 체계(systems of belief)로서의 과학적 이론(scientific theory)이 산고 끝에 세상으로 나옵니다.
이런 과학적 이론이 발견하기도 전에 성과(fruitful)가 있는지는 참(true)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로지 참일 것이라는 강한 암시만을 믿고 노력하는 가운데 과학적 발전과 성장을 가늠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혁명이 일어납니다, 사투 끝에 발견해서 하나의 이론적 체계로 만들어낸 믿음의 체계인 과학적 이론은 이제 아직 경지에 이르지 못한 후진들에게 선진은 자신이 발견한 성과를 알려주려는 설득적 열정을 발휘합니다. 이미 앞서 나간 선진의 입장에서 볼 때 후진은 답답하기 그지없고 때로는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진의 소명이자 사명은 자신이 발견한 기쁨과 즐거움을 후진에게도 고스란히 전하고 싶은 강렬한 열망에 밤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선진의 이런 설득적 열정에 부응하는 후진의 발견적 열정이 자주 만날 때 운명을 바꾸는 지적 혁명은 계속됩니다. 이때 후진은 즐거운 마음으로 성심을 다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믿고 복종하는 심열성복(心悅誠服)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알고 나서 믿는 게 아니라 믿어야 앎의 강도(强度)가 올라갑니다. 사투 끝에 도달한 스승의 경지를 믿고 충성을 다해 믿고 따라갈 때 서광 속에 휘몰아치는 깨달음의 광휘가 몰아칩니다. 알고 믿는 게 아니라 믿고 나면 알게 됩니다. 알기 전에 믿지 않으면 앎도 생기지 않고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을 갖고 있어야 앎에 대한 열정도 뜨거워집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믿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nisi credideritis, non intelligitis). 믿지 않으면 밑집니다. 여러분이 대학원에 입학했다고 가정해봅니다. 대학원마다 지도교수가 추구하는 학문적 전통이 저마다 독특합니다. 대학원에 갓 입학한 학문 초보생은 그동안 학문공동체가 쌓아온 전통을 믿고 심혈을 기울여 공부하며 절대로 복종하는 자세가 심혈성복입니다.
진리는 증명과 비판의 대상 이전에 신뢰와 믿음의 대상입니다
학문적 전통으로 오랫동안 전해진 진리는 증명과 비판의 대상 이전에 신뢰와 믿음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기존 학문적 전통을 믿지 않고 의심하기 시작하면 앎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제가 아침에 출근할 때 청담대교를 건너옵니다. 제가 만약 청담대교의 안전성을 믿지 못한다면 저는 절대로 청담대교를 건널 수 없습니다. 혹시 내가 청담대교를 건너는 와중에 무너지지는 않을까, 그래서 청담대교를 건축했던 모든 토목공학자와 기계공학자, 그리고 당시 공사를 담당했던 현장 책임자를 동원해서 청담대교의 안전성을 검증한 다음 다리를 건너겠다고 생각하면 아마 당분간 청담대교는 건널 수 없습니다. 청담대교를 일단 믿고 건너야 그다음 단계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청담대교를 믿고 건너야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나를 누군가에게 또는 어떤 대상에게 내맡기는 결단입니다. 학문적 선각자자가 사용하는 도구나 전제 또는 가정을 믿지 않으면 그것의 신빙성 여부를 다른 도구나 지식에 의존해서 검증을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검증과정은 끝나지 않는 무한 검증과정입니다. 예를 들면 청담대교의 안전성을 검증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하중을 테스트하는 도구나 기계를 사용합니다. 그럼 그 도구나 기계의 안전성을 검증하는 또 다른 도구나 기계를 무한 반복하는 검증과정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해당 공동체가 쌓아 놓은 암묵적 지식을 비롯해서 학문적 전통을 일단 믿어야 다음 단계의 앎으로 향하는 문이 열립니다. 이런 믿음 역시 명시적 언어로 표현하기 불가능한 암묵적 신념이 많습니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해당 학문 공동체에서 공유되는 암묵적 신념은 머리로 이해하는 믿음이 아니라 오랫동안 같이 생활하면서 몸으로 느끼고 수용한 믿음입니다.
주체의 믿음과 신뢰, 신념과 열정, 헌신적 참여로 창조된 개인적 지식은 주관적 지식을 넘어 어떻게 보편타당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식 형성 과정은 주관적인 선호도에 좌우되지 않고 올바른 추측과 반박을 통해 책임감을 갖고 열정적으로 파고드는 과정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탐구해서 밝혀내는 지식은 개인적 발견의 즐거움을 넘어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인정받을 수 있기를 강하게 염원한다는 점에서 창조된 지식은 보편적 타당성(universal validity)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체는 그가 헌신하는 것 이상을 말할 수 없다”(77-78). 마이클 폴라니의 《개인적 지식》에 나오는 말입니다. 주체가 책임을 지고 보편타당성을 주장하는 지식은 그의 열정과 헌신을 불러옵니다. 이미 내 몸속으로 들어와 존재의 일부로 자리 잡은 지식은 한계를 모르고 불타오르기 시작합니다. 인격적 지식을 창조하는 여정에 뛰어든 사람은 지나가다 든 편파적 생각을 충동적으로 펼치는 무책임한 행동과는 거리가 멉니다. 현실이나 실재(reality)를 무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자신이 직면한 문제 상황을 그 어디서도 경험할 수 ㅇ없는 단독적(singular)인 상황으로 인식하고 여기서 해결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belief)이 생깁니다. 이 믿음을 보편적(universal) 진리로 만드는 과정에 주체의 헌신적 기여나 몰입(commitment)이 따릅니다. 헌신적 기여나 몰입은 열정적(passionate)으로 촉진하는 책임감 있는(responsible) 인격적(personal) 기여이지 참여하지도 않고 수동적(passive)으로 관조하는 자세로 바라보며 규제(regulative) 원리에 따라 해석하는 주관적(subjective) 또는 충동적(impulsive) 개입이 아닙니다.
학문 공동체는 가르치고 배움을 나누며 공감하고 공유하는 열정 공동체입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습니다. 밖에 어미 닭이 달걀을 쪼고 안에서 병아리는 밖으로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노력이 거의 동시에 일어날 때 달걀은 위대한 생명 탄생의 터전이 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특히 어미 닭은 열심히 밖에서 자극을 주는 데 안의 병아리가 별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을 때 달걀은 타인의 힘으로 깨져버리고 프라이라는 요리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밖에서 쪼는 어미닭은 스승의 설득적 열정에 해당하고 안에서 밖으로 나오려는 병아리의 안간힘은 제자의 발견적 열정에 상응한다. 두 사람이 열정이 만나는 그 교차지점에서 엄청난 창조의 불꽃이 튀기면서 가르치고 배우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학문 공동체가 탄생합니다.
배우려는 열망과 미지의 세계로 이끄는 가르침의 열정이 암묵적으로 공유되고 공감되는 가운데 학문 공동체의 연대는 더욱 튼실해집니다. 이런 학문 공동체를 마이클 폴라니는 연회(conviviality)라고 합니다. 인식과 관심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문제 상황이나 이슈에 대해 토론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가운데 색다른 관점을 충돌과 갈등을 경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방향을 향해 함께 노를 저어 간다는 느낌이 들 때 공동체 구성원은 형언할 수 없는 즐거움과 행복감을 느낍니다. 이런 느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주고받는 대화나 현장 분위기에서 느낄 수 있고 몸도 마음도 함께 한다는 연대와 관계 속에서 믿음과 신뢰는 더욱 튼실해집니다. 형언할 수 없는 공감대가 바탕에 믿음직스럽게 흐르고 대화는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자세로 끝없이 이어지며 내가 여기 소속되어 있다는 강한 연대감이 함께 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달굽니다. 이런 연회 속에 스승과 제자의 뜨거운 열정이 막 부딪히면서 불확실하지만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앎의 향연은 멈추지 않고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