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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가 없으면 어이도 없다

언어의 쓸모를 바꿔서 창의적인 사람이 되는 비결, 비트겐슈타인에게 배우다

개념 없는 인간에서 벗어나고 싶다면사용하는 언어를 바꿔라!

언어의 쓸모를 바꿔서 창의적인 사람이 되는 비결,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4.26.1951.4.29)의 언어철학에서 배우다

     


내가 사용하는 단어의 세계가 내 사고의 한계입니다


경이로운 자연경관을 바라보고 감탄사를 연발할 뿐 그 광경을 표현할 언어가 부족해서 더 이상 할 말을 잃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연히 먹어본 음식을 보고 기가 막힌 맛에 침을 삼킬 뿐 적절한 어휘가 없어서 감탄사만 연발할 때가 있습니다. 우연히 마주친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의 매혹적인 매력이나 한눈에 반한 남자를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부족해서 그냥 물끄러미 바라본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순간과 장면, 전경과 배경, 잊을 수 없는 풍경과 광경에 대한 나의 체험적 느낌이 이미지로 기억의 한 편에 자리 잡고 그걸 다시 인출하여 글로 쓰려고 할 때 생각만큼 쉽게 글로 옮겨지지 않는 경험도 누구나 해보았을 겁니다. 이런 경험의 공통점은 모두 언어의 한계 때문에 직면하는 어려움입니다. 


체코의 한 서점 슬로건, Words create worlds, 즉 단어가 세계를 창조한다는 이번에 살펴볼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남긴 명언, “언어의 한계가 내 사고의 한계”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내가 갖고 있는 단어가 내가 창조하려는 세계를 결정합니다. 세계를 다르게 창조하려면 다른 단어가 필요합니다. 내가 사용하는 단어가 바뀌지 않으면 내가 창조하고 싶은 세계도 바뀌지 않습니다. 언어가 틀에 박히면 생각도 틀에 박혀서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생각은 불가능합니다. 타성에 젖은 언어를 반복해서 사용하면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동원하는 언어의 틀에 박힙니다. 언어적 점성(粘性)이 생겨서 다르게 생각하는 길을 원천 봉쇄당합니다. 언어적 점성이라 함은 귀뚜라미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귀뚤귀뚤’이라는 의성어가 연상되는 현상처럼 늘 사용하던 언어적 습관이 생기면 웬만한 노력으로 그 점성을 깨고 다른 방식으로 언어를 연상할 가능성이 희박해집니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언어적 점성에서 벗어나 다양한 표현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책상 위에 책이 ( )라는 문장 뒤에 ( )안에 들어갈 말을 다양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은 분기점이 그만큼 다양합니다. 책이 놓여 있다. 책이 누워 있습니다. ‘책이 쌓여 있다’ 정도의 분기점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만큼 수평적 연결망의 다양화가 좁은 사람입니다. 풍부한 배경지식 간 연상 기회를 확대하면서 책상 위에 책이 춤을 춥니다. 책상 위의 책이 다른 책과 대화를 나눕니니다. 책상 위의 책이 침묵과 속삭입니다. 이처럼 다양한 분기점은 방대한 독서의 산물입니다. 독서를 통해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고 사고의 깊이와 지평을 심화하고 확산한 결과입니다. 우치다 타츠루의 《소통하는 신체》라는 책을 보면 ‘언어의 해상도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해상도가 좋은 카메라로 찍으면 사진 이미지가 선명하잖아요. 해상도가 낮은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형체가 분명하지 않고 뿌옇게 나오지 않습니까.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상도가 높은 글을 읽으면 무엇을 설명하는지 선명하게 이미지가 잡힙니다. 인간의 감정도 미적분하듯이 잘게 쪼개서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만큼 어휘력이 풍부한 사람입니다. 언어적 해상도가 높은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느낌에 상응하는 적확한 단어를 선정해서 구체적으로 기술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휘력이 짧은 사람은 감정표현에 동원할 수 있는 단어가 극히 정해져 있어서 그 사람이 쓴 글을 봐도 어떤 감정 상태인지를 알 길이 없습니다. 언어의 해상도를 높이는 방법은 다양한 책을 읽고 적확한 개념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아름다운 문장을 많이 만나야 합니다.



개념의 넓이와 깊이가 사고의 넓이와 깊이입니다


내가 사용하는 단어의 세계가 내가 생각하는 세계를 결정하는 재미있는 예를 들어봅니다. 부부 싸움하고 난 뒤 부인이 남편에게 차려주는 30일 동안의 식단입니다. 첫날 콩부터 시작해서 나물과 콩나물, 그리고 콩나물국을 거쳐 마지막 30일 째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그동안 쌓였던 분풀이 차원에서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콩나물죽여살려밟아찢어꿰매눌러당겨돌려뽑아잘라갈라볶아말아국’을 끓여줍니다. 부인이 이렇게 다양한 서른 가지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은 서른 가지 요리에 동원되는 단어를 알고 이를 조합하는 능력 덕분입니다. 만약 부인이 콩이라는 단어 한 가지만 알고 있다면 훨씬 적은 종류의 음식밖에는 만들지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요리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그걸 포착해서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부족하면 언어적 점성에 휘말려 생각하는 대로 요리를 만들 수 없습니다. 결국 내가 어떤 요리를 할 수 있느냐는 다양한 요리를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어휘력이나 개념 조합 능력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Words create worlds라는 문장은 Words create foods라는 문장으로 대체해도 같은 언어적 사용 원리가 작동합니다. 즉 내가 아는 언어의 한계가 내가 만들 수 있는 요리의 가지 수를 결정합니다.


1일 콩

2일 나물

3일 콩나물

4일 콩나물국

5일 콩나물무침

6일 콩나물도리탕

7일 콩나물무쳐튀김

8일 콩나물무쳐튀김찜

9일 콩나물무쳐튀겨볶음

10일 콩나물무쳐튀겨쪄데침

11일 콩나물무쳐튀겨끓여조림

12일 콩나물무쳐빨아삶아끓여찜

13일 콩나물무쳐끓여던저받아튀김

14일 콩나물수육포떠또떠막떠다떠탕

15일 콩나물삶아건져담가말려찢어중탕

16일 콩나물끓여식혀덥혀익혀말려푹쪄찜

17일 콩나물다시무쳐끓여돌려주고받아데침

18일 콩나물다시무쳐다시끓여다시받아다시찜

19일 콩나물먹어뱉어다시삼켜다시게워그걸무침

20일 콩나물심어길러뽑아갈아끓여삶아데쳐때려탕

21일 콩나물말아돌려풀어볶아삶아끓여갈아모아튀김

22일 콩나물훔쳐들켜튀어잡혀맞아터져부어그걸밟아국

23일 콩나물꼬셔벗겨입혀볶아데쳐튀겨씻어빨아말려조림

24일 콩나물때려울려달래그걸볶아삶아무쳐조려다려불려탕

25일 콩나물끓여식혀무쳐줬다뺏어다시끓여식혀무쳐푹삶아탕

26일 콩나물잘라붙여갈라쪄무쳐던져받아놓쳐버려그걸주어볶음

27일 콩나물꼬아말려붙여늘려그걸잘라갈아뿌려주어팔아키워부침

28일 콩나물끓여말려갈아불려국쒀개줘때려뱉어모아삶아빨아신선로

29일 콩나물심어길러모아팔아골라골라때돈모아부어마셔망해도길러찜

30일 콩나물죽여살려밟아찢어꿰매눌러당겨돌려뽑아잘라갈라볶아말아국


Words create worlds에서 'worlds'를 기업에서 개발하고 싶은 신제품이나 서비스(products & services)로 바꾸어 놓고 생각해보면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체감합니다. 내가 사용하는 단어의 세계가 내가 상상하고 만들 수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결정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생각과 아이디어를 갖고 있어도 이를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단어가 없다면 이전과 제품과 서비스는 창조되지 않습니다. 어제와 다른 제품과 서비스는 어제와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어휘력이 결정합니다. 다양한 경험을 갖고 있어도 그 경험을 포착할만한 적절한 개념이 없다면 그냥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며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결국 색다른 경험이 계속 축적되어도 그 경험이 내포하는 소중한 의미를 적확한 언어로 포착할 수 없습니다. 똑같이 여행을 갔다 왔어도 누군가는 여행에서 마주친 색다른 체험을 자기만의 개념으로 포착,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자극하는 감동적인 글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또 누군가는 적확한 개념이 부족하기 때문에 “재미있었다”, “즐거웠다”, “감동적인 광경이었다” 정도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무슨 음식을 먹었는데 얼큰하고 담백하면서 동시에 시원해서 음주 후에 속 풀이 해장으로는 최고로 이야기를 하지만 그런 음식을 포착할 개념이 없다면 그저 잡다한 이미지나 생각으로 기억의 저편에 자리 잡고 머무를 뿐입니다. 만약에 지금 먹은 “얼큰하고 담백하면서 동시에 시원한 음식”을 김치찌개라는 개념으로 포착했다면 모호했던 잡다한 인상들을 보다 일반적으로 보편화시켜 그 의미를 오랫동안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내가 어떤 개념적 렌즈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이해됩니다. 세상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고 싶다면 이전과 다른 개념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세상은 내가 보유한 개념적 넓이와 깊이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을 뿐입니다.



언어는 의미가 아니라 사용입니다


비트겐 슈타인이 쓴 전기 철학의 대표작인 《논리철학논고》의 핵심주장은 “언어의 유일한 기능은 어떤 대상을 지시 혹은 서술하는데 있으며, 따라서 한 언어의 의미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일치한다”입니다. 언어는 지시하는 대상을 그림처럼 1:1의 대응 관계로 정확하게 재현(representation)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언어철학을 언어 그림이론이라고 합니다. 언어 그림 이론은 “세계는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들의 총체다.” 세계는 물이나 나무처럼 사물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물이 흐른다”, “나무가 흔들린다”처럼 사물이 만들어가는 사실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언어 그림이론에서 언어는 낱말이 아니라 문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차가 달린다”는 문장은 실제로 차가 달리는 모습을 그림처럼 지시하거나 묘사하고 있습니다. 언어 그림이론은 세계를 구성하는 사실들을 그림처럼 분명하게 반영할 때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언어 그림이론은 언어의 의미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일대일로 일치하는지의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언어 그림이론은 지시하는 대상이 없거나 지시하는 대상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언어는 무의미하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철수가 밥을 먹는다”거나 “영자가 글을 쓰고 있다”와 같은 말은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언어는 현실을 고스란히 묘사해주는 그림과 같다고 생각하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곧 세계를 언어로 그림처럼 묘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대상은 철학적 탐구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죠. 


언어 그림이론에서 언어는 세계를 구성하는 사실들을 얼마나 정확하게 그림처럼 묘사해내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효용가치가 달라진다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쓰는 모든 언어를 그림처럼 표현할 수 있을까? 언어를 그림이라고 생각했던 언어 이론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음을 비트겐슈타인은 어떻게 깨닫게 되었을까요.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는 말로 자신의 철학적 작업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케임브리지를 떠나 오스트리아 시골마을에서 약 6년간 교사 생활을 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언어로 시골 아이들과 소통이 잘 되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자신이 경험적으로 터득한 언어의 세계와 시골 아이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의 세계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함을 알게 됩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더 이상 침묵으로 일관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실제로 일상 언어에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다는 점을 깨닫고 자신의 언어 그림이론이 결정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인식합니다. 



세계를 그림처럼 표현할 수 없는 문장이 훨씬 더 많다는 깨달음과 함께 자신의 신념을 반영하는 개념을 폐기 처분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적확하게 표현할 새로운 개념을 물색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림’이라는 개념에서 ‘게임’이라는 개념으로 언어철학적 사고를 전환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물 먹지 말고 물처럼 살아라”는 말은 어떤 대상을 지시하거나 서술하는 게 아니라 어떤 교훈을 다의적 의미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언어 그림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물이 흐르고 있다”는 문장은 지시하는 대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문장입니다. 하지만 “물 먹지 말고 물처럼 살아라”는 문장에 쓰인 ‘물‘은 “물이 흐르고 있다”는 문장에 쓰인 ’ 물‘과 전혀 다른 교훈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동일한 ’ 물‘이라고 할지라도 ’ 물‘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는 콘텍스트, 즉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동일한 텍스트라고 할지라도 그 텍스트가 어떤 콘텍스트에서 쓰이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논리철학 논고》를 발표하고 오랫동안 잠적,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가 자신의 전기 철학적 작업에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음을 깨닫고 다시 발표한 그의 철학적 후기 작품이 바로 《철학적 탐구》입니다. 그의 후기 철학은 전기 철학을 전면적으로 뒤집어 “언어에 관해서 알려거든 의미를 묻지 말고 사용을 물어라”라는 말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전기 철학이 언어를 안다는 것은 언어가 지시하는 사실적 대상을 그림처럼 동일하게 그려내는지의 여부를 아는 것이라면 후기 철학은 게임처럼 어떤 맥락에서 어떤 규칙과 용법으로 쓰이고 있는지의 여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을 ’ 언어 그림이론‘이라고 하는 데 반해 후기 철학을 ’ 언어 게임이론‘이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언어철학은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서 그것의 쓰임새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언어의 의미를 알고 싶으면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일치하는지의 여부를 묻지 말고 그 언어가 어떤 맥락에서 쓰이고 있는지 용도를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잘한다”는 언어는 남다른 성취를 이룬 사람에게 할 때는 칭찬이지만 기대 밖의 예상치 못한 잘 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할 때는 비난하는 말입니다. 즉 잘한다는 언어의 의미는 그것이 어떤 문맥에서 사용되는지에 따라서 같은 말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의미로 쓰입니다. 언어는 의미가 아니라 사용이 결정합니다.



언어는 규칙을 따르는 게임입니다


동일한 언어라고 해도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 쓰일 수 있는 맥락 앞에서 넘을 수 없는 절벽을 만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초기 언어 그림 이론을 폐기합니다. 이제 사실로 구성된 세계를 그림처럼 정확하게 일대일로 묘사하던 언어는 언어 자체의 의미보다 어떤 상황에서 누가 어떤 의도로 사용하는지 문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게임은 그림과 다르게 게임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지켜야 될 규칙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축구 게임의 규칙을 모르고 축구 게임에 참가할 수 없습니다. 축구는 골키퍼를 제외하고 손으로 공을 다룰 수 없는 규칙이 있습니다. 누군가 축구하면서 왜 손으로 만지면 안 되냐고 물어본다면 그 사람은 이미 축구 규칙을 무조건 따르는 사람과 같이 축구 게임을 즐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내가 규칙을 따를 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른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어떤 경기의 규칙이 왜 그런지 의문을 던지지 않고 무조건 믿고 따를 때 게임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규칙은 의문과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맹목적 믿음과 순종의 대상입니다. 장기 게임에서 차(車)와 포(包)가 가는 길이 다른 것은 게임을 만들 때 사전에 천명한 약속입니다. 예를 들면 몇 가지 예외적인 경우는 있지만 차(車)는 상하 및 좌우로 마음대로 원하는 곳에 자유롭게 다닐 수 있고, 포(包)는 다른 기물 한 개를 반드시 넘어야 상하 및 좌우로 다닐 수 있습니다. 이를 어기고 차(車)가 포(包)처럼 또는 반대로 움직일 때 이미 장기는 쌍방 간에 즐길 수 있는 게임이 될 수 없습니다. 주어진 게임을 즐기기 위해서는 우선 그 게임의 규칙을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규칙을 의심하는 순간 게임도 즐길 수 없고 같이 게임을 하는 사람과도 소통할 수 없습니다. 게임에 참가하는 사람은 게임의 규칙에 의문을 던지거나 비판적 논의를 해서는 안 됩니다. 게임을 가장 잘 배우는 방법은 물론 게임을 재미있게 즐기는 방법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특정한 공동체에서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은 그 사람들이 사전에 정한 규칙에 따라 맹목적으로 그렇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 규칙을 왜 그렇게 사용하냐고 질문하는 순간 그 사람은 해당 공동체에 있는 사람과 같이 언어를 사용해서 소통할 수 없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문맥을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태어납니다 


예를 들면 “사랑해”라는 말이 사랑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 사용했을 때는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담아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시작한 지 어느 정도 지난 사람들이 주고받는 “사랑해”라는 말은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인사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이 식어서 헤어질 무렵에 사용하는 “사랑해”라는 말은 분노와 좌절감이 스며든 말입니다. “사랑해”라는 말을 왜 그렇게 사용하느냐고 묻거나 깊이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그렇게 사용하는 게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규칙인 것입니다. 어린이가 처음 말을 배울 때 문법을 먼저 배운 다음 문법에 맞는 말을 배우지 않습니다. 무조건 어른들이 사용하는 말을 따라서 배웁니다. 여기서 문법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규칙입니다. 


문법 즉 규칙을 선택하지 않고 당연히 배워야 될 것으로 가정합니다. 그리고 그 문법에 맞는 말을 자동적으로 배웁니다. “사랑해”라는 말이 문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사전에 정한 규칙입니다. “사랑해”라는 언어는 특정 대상을 지칭하는 그림이라기보다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의미를 지니는 게임으로서의 언어로 변신한 것입니다. 사랑해라는 말은 더 이상 그림이 아니라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과 규칙에 따라서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 언어를 그림이 아니라 게임으로 이해하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삶의 기반이 중요해집니다. 같은 생활양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어적 사용 방식에 관한 일정한 규칙을 공유합니다. 삶의 양식이 다른 공동체로 옮겨가면 다른 언어 사용 규칙을 따라야 합니다. 



언어에는 저 맥락 언어와 고맥락 언어가 있습니다. 인류학자 중에 에드워드 홀이 《침묵의 언어》라는 저서에서 밝힌 언어적 차이입니다. 우리말처럼 함축적인 언어로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문화를 고맥락 문화(high context culture)라고 하고 직설적이고 분명하게 자기 의사를 전달하는 저 맥락 문화(low context culture)라고 합니다. 진심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우회적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 우리말의 단서는 누가 어떤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에 따라 단어나 문장에 담긴 단서 파악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 못된 단서를 잡아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결혼하신 분이 명절을 맞이해서 시집이나 친정에 전화 이번 시골에 내려간다고 하면 고향의 부모님들은 뭐라고 대답하나요? 


예를 들면 이번 명절에는 코로나 19 사태로 이동도 제한하고 바쁘게 지내서 시간이 없잖아. 안 와도 돼. 이런 대답을 듣고 실제로 안 가면 나중에 다른 빌미로 잡아서 서운함을 표현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안 와도 돼”를 그대로 해석하면 맥락적 언어의 의미를 잘 못 파악한 겁니다. 말을 그렇게 하셨지만 실제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면 좋겠다는 속마음이 담긴 표현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후속 조치를 취해야 하는 대답이었습니다. 엄마가 전화해서, “너 어디야?” 이렇게 물어보는 질문의 의도는 영어로 Where are you?를 물어보는 게 아닙니다. 어디서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언제쯤 집에 오는지, 지금 밥은 먹었는지, 컨디션은 좋아졌는지 등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 복합적인 질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지나가다가 만날 때, “식사하셨어요?”라는 질문을 인사의 한 방편으로 물어봅니다. 이 말 역시 진짜로 밥을 먹었는지를 물어보는 의도도 포함하고 있지만 만나서 검연쩍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하는 인사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말에는 이중적 의미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은연중에 드러내서 상대방이 알아서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묘한 표현이 유독 많습니다. ‘번역할 수 없는 말들의 사전’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한국문화 특수 어휘집》에 따르면 한국말은 그 낱말이 쓰이는 사회문화적 맥락을 벗어나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있습니다. 특히 한국말은 문법적 규칙만으로는 단어의 의미를 포착할 수 없는 맥락 의존적 의미를 담고 있는 말들이 많습니다. 단어와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의 의미는 단순히 단어의 의미의 합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뭐 이런 걸 다 주십니까. 괜찮습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인사를 한다고 바로 “그래요? 그럼 알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인사말에 담긴 진짜 화자의 의도를 잘 못 이해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물을 주면 너무 좋아서 넙죽 받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는 예의에 어긋나거나 전후좌우 상황을 잘 못 판단하는 답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양하는 듯한 인사말에는 “주신 선물은 사양하지 않고 감사히 받을게요”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양하는 말의 진의는 진심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님에게 어떤 호의를 베풀면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뭘 이런 걸 다! 괜찮고 하십니다. 나는 신경 쓰지 마라.”는 말을 듣고 진짜로 신경 쓰지 않으면 부모님은 속으로 속이 상하거나 원망합니다. 사양한다는 의미는 겉으로는 그렇지만 속으로는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입니다. 주의해서 그 의미를 맥락에 비추어 파악하지 않으면 단어에 담긴 단서를 잘 못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농담과 진담 사이상담이 필요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 이론은 문맥에 따라 동일한 말이라도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상황에 따라 사용되는 말의 의미를 포착해서 맥을 잘 짚는 사람과 맥을 못 추는 사람과 어떤 말이 왜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지 그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맥을 못 추는 사람이 있습니다. 후자를 숙맥(菽麥)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맥락적 사유가 언어를 통해서 잘 될 때 소통이 잘되는데 숙맥일 경우 언어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맥락적 소통이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발언(發言)은 언제나 맥락을 배경으로 그 의미가 전달되고 이해됩니다. 어떤 맥락에서 그런 발언을 했는지를 알면 발언자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발언이 이루어진 맥락을 거세하고 텍스트 메시지만을 드러내면 발언자의 진의와 관계없이 심각한 의문의 표현으로 오해될 수도 있습니다. 전달하는 사람은 청중이 재미있게 들을 수 있도록 성인 수준에 맞는 농담을 던집니다. 농담이 농담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전달자의 진의(眞意)와 진의에 대한 청중의 의미 해석이 맞아떨어져야 합니다. 만약 강사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진의가 어떤 맥락에서 사용된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할 때 농담은 진담으로 받아들여져 성적 비하 발언이나 청중을 무시하는 언사로 오해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농담을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의 의미를 오해 없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농담이 어떤 맥락에서 통용되는지를 청중이 올바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똑같은 메시지라도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무슨 사연과 배경을 품고 있는지, 그것을 통해 공감하려는 강사의 전달 의도가 무엇인지를 청중이 이해하지 못할 때 불통의 장벽을 만들기도 합니다. 똑같은 메시지를 비슷한 청중을 대상으로 전달하는데 한쪽 청중은 폭풍 반응과 함께 무한 감동을 불러일으키지만 또 다른 청중의 일부는 심각한 오해로 받아들여 자신들을 무시했다는 생각지도 못한 반응을 보여줄 때도 있습니다. 맥락을 파악할 것이라는 가정 위에 던진 화두가 맥락 없이 겉으로 드러난 텍스트 메시지만을 탈취해서 받아들일 때 오해를 넘어 청중 비하 발언으로 오점을 남길 수도 있습니다. 유머는 농담이나 에피소드를 주고받는 상황에서 청중이 반응하는 정도나 수준을 파악, 청중들의 이해를 촉진하고 오해를 방지하는 맥락적 감수성입니다. 하나의 유머를 던졌을 때 즉각적으로 청중의 반응을 살핀 다음 자신의 유머가 여기서 통용될 수 있는지를 파악하고 청중의 반응 유무나 강도에 따라 다음 발언의 정도나 수위를 조절하는 능력이 바로 맥락적 감수성입니다. 



예를 들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잠시 이미지로 보여주고 바로 감춘 다음 방금 보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똑같은 자세로 생각하는 자세를 취해보라고 요구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로댕과 똑같은 자세로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를 취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다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이미지를 보여주고 방금 여러분이 취한 자세가 얼마나 다른지를 실감하고 생각하게 기회를 줍니다. 사진 속의 로댕은 오른쪽 팔꿈치가 왼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편한 대로 오른쪽 팔꿈치를 책상에 올려놓거나 오른쪽 팔꿈치 위에 올려놓습니다. 이게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이런 연습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생각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배가 나온 사람은 오른쪽 팔꿈치를 왼쪽 허벅지에 올려놓을 수 있을 만큼 유연하게 허리가 돌아가지 않습니까. 로댕처럼 생각하려면 일단 뱃살을 빼고 허리를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로댕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교훈은 우리가 세상의 변화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볼 때 유심히 관찰하지 않고 대충 본다는 사실입니다. 왜 우리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수없이 봤다고 생각하는 데 안 보여주고 로댕과 똑같은 자세로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를 취해보라고 하면 못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이 대충 봐서 대충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에 사는 가장 큰 해충이 대충입니다. 뭐든지 대충 보면 대충 생각합니다. 


이런 발언 뒤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이미지를 통해서 우리가 나누고 싶은 메시지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한 다음 마지막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오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똑같은 자세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봐서 생각이 없는 인간들만 강연에 참석한 것 같아요”라는 농담을 던집니다. 이런 농담은 유영만 교수가 강연 도중에 “우리에게 생각이 없는 인간”이라고 욕을 했다고 항의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정말 강사는 청중들에게 생각이 없는 인간이라고 욕을 했을까요? 물론 당시의 상황적 맥락에서 당사자가 문맥을 잘 못 파악할 수도 있고 전달자가 맥락적 감수성이 떨어져서 잘 못 말할 수도 있습니다. 농담으로 던진 발언이 누군가에게는 진담으로 다가갈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발언에 담긴 언어적 맥락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순간입니다. ‘생각이 없는 인간’이라는 말은 전후좌우 아무런 배경 설명과 맥락적 이해 없이 통용될 때는 비하 발언이 될 수 있지만 그 말이 지금 여기서 어떤 의미로 통용되고 있는지를 충분히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가벼운 농담입니다.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에 필요한 것은 상담입니다.



개념 간의 미묘한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하면 개념 없는 사람으로 전락합니다   


언어의 한계가 사고의 한계를 규정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발언에서 언어의 한계는 여러 가지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새로운 개념을 주기적으로 습득하는 노력을 게을리할 경우 언어적 한계가 올 수 있고, 기존 개념을 이전과 다르게 의미를 부여해서 재개념화 하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언어적 한계에 봉착합니다. 색다른 개념과 부단히 접속할 뿐만 아니라 익숙한 개념의 색다른 용법을 배우는 노력을 전개할 때 언어적 한계는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말은 외국어로 번역이 불가능한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는 말들이 많습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미묘한 차이점이 있는 비슷한 단어들의 차이점을 정확히 알고 사용한다면 그만큼 우리의 사고도 명확해집니다. 예를 들면 방망이와 몽둥이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방망이는 태어날 때부터 목적과 용도가 정해져 있어요. 빨래방망이, 야구방망이처럼요. 몽둥이는 용도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게 다 몽둥이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엄마가  아이들을 야단치면서 급하면 아무거나 집어서 몽둥이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가 자주 사용하지만 그 미묘한 차이를 모르고 사용하는 단어 중에 마개와 뚜껑이 있습니다. 두 가지 단어의 의미상 차이는 무엇일까요? 어떤 걸 마개라고 하고 어떤 걸 뚜껑이라 할까요? 여러분 그럼 화가 날 때 뚜껑이 열리나요? 마개가 열리나요? 뚜껑이 열립니다. 뚜껑은  겉 표면만 둘러싸고 있는 겁니다. 탄산음료 병뚜껑이나 물병 뚜껑, 소주나 맥주 뚜껑처럼 겉에서 용기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겉표면을 둘러싸고 있는 게 뚜껑입니다. 반면에 마개는 와인병의 코르크처럼 안으로 들어가서 내용물의 유출을 방지하는 게 마개입니다. 마개는 잡아 뽑는 거고 뚜껑은 돌려서 따는 겁니다. 그럼 약간 난도가 높은 엉덩이와 궁둥이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여러분이 의자에 앉았을 때 의자하고 내 살이 닿는 접촉부 위만을 궁둥이라고 합니다. 볼기의 아랫부분으로 앉으면 바닥에 닿는 부분입니다. 나머지 의자에 닿지 않는 궁둥이 부위에서 허벅지 위쪽 부위 정도까지를 엉덩이라고 합니다. 둔부(臀部), 영어로는 히프(hip)라고 합니다. 그럼 여러분 주사는 엉덩이에 맞아야 될까요? 궁둥이에 맞을까요? 그건 아무 데나 맞아도 됩니다.


우리말의 미묘한 개념적 차이는 한자어를 구분할 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글만으로는 우리들의 미묘한 생각과 감정표현을 다 드러내기에는 한계와 문제점이 있습니다. 한자어는 우리말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이유입니다. 한자는 표의문자(表意文字)이기 때문에 한자의 의미를 이해하면 해당 단어가 품고 있는 의미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예로 직업을 보면 회사원(會社員)과 예술가(藝術家), 대사(大使), 판검사(判檢事)와 변호사(辯護士), 그리고 교사(敎師)는 각각 원(員)과 가(家), 다른 의미의 사(使, 事, 士, 師)로 끝나는 한자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직업의 보편적 차이를 알기 위해서는 한자의 차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원(員)으로 끝나는 직업, 예를 들면 회사원(會社員), 공무원(公務員), 종업원(從業員), 세관원(稅關員), 임직원(任職員), 미화원(美化員), 경비원(警備員), 특파원(特派員), 상담원(相談員), 판매원(販賣員), 안내원(案內員), 승무원(乘務員), 은행원(銀行員), 교환원(交換員), 취재원. 집배원(集配員)은 특정 조직에 소속되어 있어서 일정한 시간에 출근해서 주어진 시간 동안 일을 하고 퇴근하는 직업입니다. 한 마디로 특정 조직이나 기관의 일원(一員)이 된 사람입니다. 일원이 된 사람은 반드시 남의 집으로 출근해야 된다는 부담감이 있습니다. 물론 남의 집으로 출근하는 일이 즐거운 사람도 있겠지만 일원이 된 사람은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과 의무가 있고 책임을 지고 일정한 기간 안에 주어진 목표를 달성해야 됩니다. 일원이 된 사람은 각자 맡은 분야에서 독창성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지만 어느 정도 매일 반복하는 일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가(家)’로 끝나는 직업은 ‘원(員)’으로 끝나는 직업과 어떻게 다른가요? 평론가(評論家), 소설가(小說家), 문학가(文學家), 사상가(思想家), 연출가(演出家), 비평가(批評家), 작곡가(作曲家), 예술가(藝術家), 성악가(聲樂家), 조각가(彫刻家), 건축가(建築家), 미식가(美食家), 탐험가(探險家), 수필가(隨筆家), 여행가, 저술가(著述家), 전문가(專門家), 역사가(歷史家), 만화가(漫畵家), 무용가(舞踊家), 연설가(演說家), 서도가(書道家) 등 무수히 많은 직업이 가(家)로 끝납니다. 이들은 원(員)으로 직업에 비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특정 기관에 소속되어 활동하기보다 한 분야의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이라 자기 집이(家) 있습니다. 일원(一員)이 된 사람과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내 일인지 아니면 남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일인지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일원이 된 사람은 소속된 조직이나 기관에 이미 결정된 일을 일정한 방식으로 해내야 되는 일이지만 일가를 이룬 사람은 저마다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자기 색깔과 스타일을 드러내지 않으면 자기다움을 상실하고 곧 존재 이유를 잃어버립다. 이들은 비교 기준이 밖의 다른 사람이 아니라 어제의 나입니다. 예를 들면 빈센트 반 고흐가 피카소 스타일과 비교하거나 소설가 밀란 쿤테라가 톨스토이 스타일을 모방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창작 스타일을 더욱 독창적으로 개발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오로지 경쟁상대는 어제의 나입니다. 나아지기 위해 다른 방법으로 개발하지 않으면 경지에 다다르지 못합니다.


《언 다르고 어 다르다》의 저자는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비애(悲哀)의 비(悲)는 일시적이고 옅은 슬픔이라면 애(哀)는 슬픔보다 서러움 또는 설움에 가깝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슬픔이 비교적 짧게 지나가는 감정인데 비해 설움은 웬만해서는 사라지지 않는 길고도 깊은 김정”(137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애절(哀切)한 애원(哀願)이나 애걸복걸(哀乞伏乞)하는 사람 앞에서 속수무책인 경우가 많습니다. 애인(愛人)과 연인(戀人)은 똑 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말하지만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애인은 주로 구어체 문장에서 연인은 주로 문어체 문장에서 고풍스럽게 사용된다고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애인은 사랑하는 어떤 사람을 지칭하지만 연인은 사랑하는 남녀 두 사람을 지칭합니다. 예를 들면 “다정한 연인이 손을 잡고 있다”는 어색하지 않지만 “다정한 애인이 손을 잡고 있다”는 말은 어색합니다. 또한 애인은 사랑을 매개로 한 사람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관여되지만 연인은 멀리서 만날 수 없는 날에도 서로를 깊이 생각하는 그리움의 감정이 관여됩니다.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언어 경작법입니다   


우리는 언어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과 다르게 언어를 사용할 때, 그 언어가 품고 있는  의미가 이전과 다르게 창조되는 것입니다. 세종대왕처럼 한글을 다시 창제할 필요는 없습니다. 익숙한 언어 사용 방식을 바꿔서 낯설게 사용할 때 동일한 언어라고 할지라도 전혀 다르게 와 닿습니다. 언어에 담긴 의미를 창조하거나 단어 자체를 부분적으로 변형, 색다른 의미로 재창조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아니면 기존 단어와 단어의 조합이나 배치를 바꿈으로써 익숙한 이미지를 낯선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단어로 다르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언어 경작을 통해서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는 첫 번째 방법은 단어를 뒤집어 생각의 물구나무를 서보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면 ‘역경(逆境)’을 뒤집으면 ‘경력(經歷)’이 된다거나 금지를 뒤집어 지금 하면 된다는 말과 같은 언어유희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남 다른 경력을 쌓으려면 남다른 ‘역경’을 경험해야 합니다. ‘교육(敎育)’을 뒤집으면 ‘육교(陸橋)’가 됩니다. ‘교육’은 지금 여기서 미래로 가는 ‘육교’를 건설하는 업입니다. ‘기자(記者)’를 뒤집으면 ‘자기(自己)’가 되고, ‘기사(記事)’를 뒤집으면 ‘사기(詐欺)’가 되며, 사설(辭說)을 뒤집으면 ‘설사(泄瀉)’가 됩니다. ‘기자’는 ‘자기’가 쓴 ‘기사’나 ‘사설’에 이름을 걸고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은 ‘기자’가 쓴 ‘기사’는 ‘사기’가 되고, ‘사설’은 ‘설사’해놓은 관념의 파편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일생(一生)’을 목숨 걸고 살지 않으면 ‘생일(生日)’조차 맞이할 수 없으며. ‘성숙(成熟)’하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마련하지 않으면 절대로 ‘숙성(熟成)’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소음과 ‘단절(斷絶)’하지 않으면 인생이 ‘절단(絶斷)’날 수 있으며, ‘성품(性品)’을 곱게 가꾸지 않으면 ‘품성(品性)’마저 망가집니다. ‘수고(手鼓)’하지 않으면 ‘고수(高手)’가 될 수 없으며, ‘체육(體育)’으로 몸을 단련하지 않으면 ‘육체(肉體)’를 잃을 수 있습니다.


언어 경작을 통해서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는 두 번째 방법은 시작 또는 끝나는 말이 같은 단어로 언어를 조합해서 의미도 기억하기 쉽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면 뒷길이나 옆길로 빠져 헤맬 때도 있었고 갓길이나 샛길로 가끔 샐 때도 있었네 라고 단어를 조합하는 방법입니다. 살길을 찾다 숨길조차 막히고 발길 닿는 데로 하염없이 걸었었지라는 말처럼 길이라는 말로 운율을 맞추면서도 새로운 의미가 다가올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입니다. 세상에는 6가지 지식이 존재합니다. 숙성된 지식을 만드는 묵은지(知), 모든 지식의 토대가 되는 근거지(知),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결정적인 한 가지(知), 공동체 발전에 기여하는 이바지(知), 기존 통념을 깨는 뚱딴지(知). 색다른 상상력의 세계로 인도하는 별천지(知)입니다. ‘초심’으로 출발해서 ‘뒷심’으로 마무리되는데 ‘초심’이 ‘뒷심’으로 연결되는 중간에 ‘중심’이 있습니다. ‘중심’이 흔들리면 ‘초심’도 ‘뒷심’도 발휘할 기회를 상실합니다. ‘중심’은 신념입니다. 신념이 흔들리면 모든 게 흔들립니다. ‘신념(信念)’없는 ‘개념(槪念)’은 ‘관념(觀念)’에 지나지 않습니다. ‘개념’에 자신의 철학과 열정, 그리고 용기를 추가하지 않으면 ‘개념’은 현실 변화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관념’의 파편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개념 놀음의 원동력은 풍부한 어휘력, 동의어와 반의어에 대한 지식, 그리고 한자의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언어 경작을 통해서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는 세 번째 방법은 단순히 단어의 물리적 운율을 맞추는 두 번째 방법과는 다르게 의미론적 운율, 라임을 맞추어 언어적 운율을 띠게 만드는 언어유희입니다. 예를 들면 스치면 인연이요 스미면 연인이 된다는 말이 라임을 맞춘, 의미론적 운율을 띠는 사례입니다. 한계는 한 게 없는 사람의 핑계입니다. 공사다망(公私多忙)하면 다 망(亡)합니다. 이기적(利己的)으로 살아야 기적(奇蹟)이 일어납니다. 모두 언어적 운율을 맞춰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의 의미를 극대화하는 방법입니다. 체험 없는 개념은 관념이고, 개념 없는 체험은 위험하다는 말이나 지성 없는 야성은 야만이고, 야성 없는 지성은 지루하다는 말도 의미론적 운율을 맞춘 세 번째 언어유희에 해당됩니다.


언어 경작을 통해서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는 네 번째 방법은 동음이의어, 즉 같은 한글이지만 다른 한자로 색다른 의미를 찾아보는 언어유희입니다. 예를 들면 ‘사고(事故)’쳐야 이전과 다른 ‘사고(思考)’가 생긴다는 말이나 꿈꾸는 ‘동안’은 ‘동안(童顔)’이다 같은 말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시작하는 말이나 끝나는 말을 통일시켜 글의 운율을 줄 뿐만 아니라 발음은 동일하지만 한자어로는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개념을 연결시켜 편집하면 색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예를 들면 ‘사색(思索)’과 ‘사색(死色)’, ‘사고(思考)’와 ‘사고(事故)’를 비교하면서 글을 편집하는 것입니다. ‘사색(思索)’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사색(死色)’이 될 수 있습니다. ‘사색’은 홀로 ‘사유(思惟)’하는 시간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반추하는 ‘사고(思考)’ 과정입니다. ‘사고(思考)’하지 않으면 심각한 ‘사고(事故)’가 날 수 있습니다. 남다른 사고를 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길, 길 밖의 길을 가야 합니다. ‘길’을 벗어나면 다른 ‘사고(思考)’를 할 수 있지만, 남들이 달려간 ‘도로’를 벗어나면 심각한 ‘사고(事故)’가 납니다.


언어 경작을 통해서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는 다섯 번째 방법은 단어를 일정한 의미단위로 분할시켜 본래 단어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거나 색다른 의미를 부여해서 전혀 다른 느낌을 갖게 만드는 언어유희입니다. 예를 들면 ‘끄트머리’라는 말은 ‘끝’과 ‘머리’의 합성어라고 생각하거나 ‘의미심장’은 ‘의미’가 ‘심장’에 꽂힌다고 해석하는 경우입니다. 우리말과 한자에 대한 어휘력은 물론 영어 어휘력도 편집력을 향상하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예를 들면 영어 단어 ‘Live’를 뒤집으면 ‘Evil’이 됩니다. 올바른 삶(live)을 살지 않으면 죄악(evil)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Life’ 안에는 ‘if’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삶은 수많은 가정법과 가능성으로 구성되는 과정입니다. ‘together’라는 영어 단어는 ‘to+get+her’의 약자입니다. 우리가 ‘투게더’(together)하는 이유는 그녀(her)를 얻기 위해서(to get)입니다. 여기서 그녀는 고객이 될 수도 있고 청중이 될 수도 있으며 국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업의 입장에서 그녀는 고객이고, 강연하는 사람 입장에서 그녀는 청중이며, 정치가 입장에서 그녀는 국민입니다. 고객, 청중, 국민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되려면 그들의 마음을 얻어야 된다는 말로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언어 경작을 통해서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는 마지막 방법은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개발한 데페이즈망 기법을 차용하는 방법입니다. 데페이즈망은 익숙한 이미지의 낯선 조합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익숙한 ‘얼룩말’과 ‘사자’를 합성하면 낯선 ‘얼룩말’ 사자가 탄생하는 경우에 해당됩니다. 익숙한 이미지의 낯선 조합처럼 익숙한 개념의 낯선 조합도 같은 효과를 가져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익숙한 ‘지식’과 ‘산부인과 의사’를 조합하면 낯선 ‘지식산부인과 의사’가 탄생합니다. ‘체인지(體仁智)’라는 단어를 발음하면 체인지, 영어의 ‘Change’와 발음이 같습니다. 나를 비롯해 세상을 ‘체인지’하려면 우선 몸으로 체험(體)해보면 가슴으로 공감(仁)되며 머리로 정리가 되어 지혜(智)가 탄생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변화는 책상에 앉아서 머리로 지식을 습득해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직접 내가 몸을 움직여 시행착오도 겪어보고 가슴으로 느껴봐야 깊은 깨달음이 다가오면서 지혜가 체화된다. 체화된 지혜만이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하면 할수록 어렵지만 재미도 생기면서 표현은 적확해지고 문장을 정밀해지는 공부가 말공부(김철호, 2020)이자 언어 공부입니다. 《언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책의 저자, 김철호에  따르면 언어(言語)라는 말의 ‘언(言)’과 ‘어(語)’는 둘 말이지만 ‘언(言)’이 주로 입으로 하는 짧은 말이고, ‘어(語)’는 머리로 말하는 긴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언어(言語)가 만드는 형언(形言)할 수 없는 모국어(母國語)의 세계는 배워도 끝이 없는 무한 탐구 영역입니다. 중언부언(重言復言)해서도 안 되고 유언비어(流言蜚語)를 퍼뜨려도 안 되는 세계,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동원한 설명(說明)과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시도하는 설득(說得)도 통용되지 않는 다양한 품사(品詞)의 세계입니다. 경험담(經驗談)이나 목격담(目擊談), 횡설수설(橫說竪說)이나 천일야화(千一夜話)만으로도 강변(强辯)할 수 없는 언중유골(言中有骨)의 세계이자 잘 난 체하고 과장하며 떠벌리는 고담준론(高談峻論)의 세계도 아닙니다. 분명한 논리와 이론적 무장을 통해 끊임없이 배우고 넘어야 할 산이 바로 언어의 세계입니다. 경지에 이른 사람의 공통점은 언어 사용 방식이 남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구분하는 방법도 언어 사용 방식으로 가능합니다. 자기만의 언어로 독창적인 세계를 열어가는 수많은 작가, 화가, 음악가, 미술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은 전문 직업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 역시 그 누구의 삶과도 비교할 수 없는 단독적인 삶을 하나의 위대한 예술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예술가입니다. 저 역시 평범한 대학교수 유영만에 머무르지 않고 지식생태학 유영만으로 거듭나기 위해 생태학적 감수성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오늘도 어제와 다른 언어로 제 삶을 벼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문정희 시인의 동백꽃이라는 시의 일부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에 관한 공부 여정을 마칩니다.



동백꽃/문정희


나는 저 가혹한 확신 주의자가 두렵다


가장 눈부신 순간에

스스로 목을 꺾는

동백꽃을 보라


지상의 어떤 꽃도

그의 아름다움 속에다

저토록 분명한 순간의 소멸을

함께 꽃 피우지는 않았다


모든 언어를 버리고

오직 붉은 감탄사 하나로

허공에 한 획을 긋는

단호한 참수


나는 차마 발을 내딛지 못하겠다


전존재로 내지르는

피 묻은 외마디의 시 앞에서

나는 점자를 더듬듯이

절망처럼

난해한 생의 음표를 더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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