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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함의 사유를 뒤집어
비정상적 사유를 즐기는 비결

니체의 전복과 파괴의 철학에서 배우다

정상적인 무리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정상적인 상식을 모두 뒤집어엎어라!

     

당연함의 사유를 뒤집어 비정상적 사유를 즐기는 비결,

프리드리히 니체(1884.10.15.1900.8.25)의 전복과 파괴의 철학에서 배우다 



정상(頂上)에 오른 사람은 정상(正常)입니까 정상에 오른 사람은 비정상입니다. 정상적인 높이뛰기 선수는 모두 앞으로 넘었습니다. 앞으로 넘는 사람들의 한계는 2m를 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계에 도전하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도전하기 전에 한계를 두지 않고 한계에 도전하는 방법은 정상적이지 않았습니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정상에 도전한 사람, 1968면 멕시코 올림픽 때 듣도 보도 못한 방법으로 뒤로 넘는 높이뛰기 선수가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높이뛰기의 전설, 딕 포스베리(Richard Douglas Dick Fosbury) 선수입니다. 그 사람 이름을 따서 지금은 포스베리 플롭 기법, 우리말로 배면 뛰기가 높이뛰기의 정석과 상식이 되었습니다. 비정상이어야 정상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딕 포스베리가 처음으로 뒤로 넘었을 때 세상 사람들은 딕 포스베리를 가리켜 상식에 위배되는 몰상식한 사람이며 정상에 시비를 거는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라고 놀라워했다. 정상(頂上)에 오른 딕 포스베리는 분명히 정상(正常)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딕 포스베리도 정상적인 사람처럼 정상적(正常的)인 방법으로 정상(頂上)에 도전했다면 정상(頂上)을 절대로 정복할 수 없었습니다. 정상을 정복한 사람은 하나같이 비정상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비정상적인 생각은 생각지도 못한 많은 일을 저지르고 당했을 때 비로소 잉태됩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의 발상은 인간의 신체구조상 2m를 절대로 넘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정상분포 곡선에 갇혀서 정상적인 사유와 상식, 그리고 타성과 고정관념에 얽매여 사는 사람입니다. 딕 포스베리 선수 덕분에 인간의 높이뛰기 한계는 2m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상(頂上)’에 오른 사람이 정상(正常)’이 아닙니다


딕 포스베리가 정상 정복에 도전한 방법은 정상적인 사람들과 다른 비정상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정상에 가려면 비정상이어야 합니다. 비정상만이 정상에 갈 수 있습니다. 정상에 가고 싶다면 정상적인 사람과 어울리면 안 됩니다. 정상적인 사람과 어울릴수록 정상에서 멀어집니다. ‘몰상식’한 사람이 ‘상식’을 뒤집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식’이 뒤집혀 ‘식상’해집니다. 사과 10개 중에 3개 먹으면 몇 개 남을까요? 어떤 학생이 손을 들고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3개 남는다고, 왜냐하면 엄마가 그러는데 “먹는 게 남는 거”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10개 중에 3개 먹으면 3개 남는다고 대답한 학생은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고 급기야 엄마를 학교에 부릅니다. 아이가 비정상이라고요. 아이를 엄마가 야단을 쳐서 10-3=7이라고 정상적인 답을 쓰고 나서야 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학교를 오래 다닐수록 우뇌를 통해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기대 밖의 대답을 하면 비정상적인 아이로 낙인찍힙니다. 좌뇌로 논리적인 사고를 하는 훈련을 받은 우리는 우뇌로 틀 밖에서 뜻밖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방법을 배워 본적이 거의 없습니다. 틀밖의 사유를 하면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생각되어 심한 질책이나 비난, 조소와 조롱을 받기도 한다. “전대미문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면 세상 사람은 처음에 무시(ignore)합니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조소와 조롱(laugh)을 보내고 서서히 세상을 움직이는 화두로 바뀌면서 저항(fight)하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마침내 내가 세상을 이끄는(win) 사람으로 부각됩니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입니다. 


세상을 뒤집어엎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정상적인 사람의 상식과 통념에 시비를 걸고 비정상적인 문제제기를 통해 이전과 다른 세상을 열어간다는 데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타성과 고정관념, 세상 사람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상식이 뒤집혀 식상해지기 전에 우뇌적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엉뚱해 보이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논리적인 잣대로 안 된다고 누군가 말해도 상식과 통념에 갇힌 사유에서 벗어나 틀 밖에서 뜻밖의 생각을 샘물을 길어 올리기 위해 언제나 익숙한 세계 속에서도 낯선 사유를 즐깁니다. “논리적인 사람은 정해진 목적지 A에서 B로 갈 수 있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갈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말입니다. 비정상적인 사람이 몰상식한 아이디어를 내면 정상적인 사람은 상식에 위배된다고 거부하거나 반대의사를 표시합니다. 하지만 몰상식한 아이디어는 점차 정상적인 사람들의 상식이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상식이 뒤집혀 식상해집니다. 당신은 정상입니까, 비정상입니까



니체는 기존의 가치체계를 전복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건축하는 전복의 철학자입니다


이번에는 전복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를 함께 공부해보려고 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쓴 니체가 이 책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100년 후에 이 책을 해설하는 교수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제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감동도 받았지만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았습니다. 니체의 예언대로 제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을 해설하는 교수가 되어 쓴 책이 바로 《유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입니다. 오늘은 이제 유라투스트라로 변신해서 니체 철학을 제가 관심을 갖고 있는 몇 가지 개념은 근간으로 우리들의 삶에 적용해보려고 합니다. 니체를 천의 얼굴을 갖고 천 가지 길을 걸어간 철학자라고 합니다. 저는 니체를 기존 가치체계나 옳다고 믿는 신념을 뒤집어엎어서 그 위에 새로운 철학적 건축을 시도하는 전복의 철학자라고 생각합니다. 기존 가치를 뒤집어 새로운 가치체계를 만들려고 한다는 점에서 니체를 가치전도의 철학자라고도 합니다. 니체는 기존 가치를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를 제안한다는 점에서 망치의 철학자, 파괴의 철학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돌 속에 하나의 형상이, 내 머릿속에 있는 많은 형상 가운데 으뜸가는 형상이 잠자고 있구나! 아, 그 형상이 더할 나위 없이 단단하고 보기 흉한 돌 속에 갇혀 잠이나 자야 하다니! 이제 나의 망치는 저 형상을 가두어두고 있는 감옥을 잔인하게 때려 부순다. 돌에서 파편이 흩날리고 있다, 무슨 상관인가?”(143쪽).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말입니다.




니체는 사람들이 궁극적 진리나 가치로 믿었던 근본을 뒤흔들어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가치를 정초함으로써 삶의 밑바닥이 흔들리는 근원적인 상실감을 느끼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니체 철학은 허무주의(nihilismus)라고 합니다. 니체는 세상에 난무하는, 있지도 않는 형이상학적 신념들을 깨부수고 허구적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창조로 가는 길로 이끕니다. 주역의 사자성어로 말하면 물극필반(物極必反)입니다. 사물이 요동을 치면서 난맥상을 거듭하다가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전을 거듭합니다. 니체의 허무주의가 허무한 상태를 거듭하다 우여곡절 끝에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희망을 바라보는 부정의 부정 끝에 찾은 긍정입니다. “뒤집어엎기, 그에게 그것이 증명이다. 열광케 하기, 그에게 그것이 설득이고. 그리고 그에게는 피가 최상의 논거로 간주된다”(85쪽).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말입니다. 


니체에게 뒤집어엎는 전복은 그 살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반증이고, 자신의 철학으로 세상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것은 설득을 통해 사람을 변화시키는 전략이며, 피땀 흘려 구축한 사유체계는 처절하게 살아가는 삶에서 철학적 깨달음을 녹여낸 정수(精髓)다. “일체의 글 가운데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쓰려면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넋임을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게으름을 피워가며 책을 뒤적거리는 자들을 미워한다”(63쪽). 역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말입니다. 니체가 말하는 피는 관념적 사유의 파편이 아니라 오로지 온몸으로 현실이라는 무대 위에서 사투를 벌이며 흘린 노고와 영혼을 울리는 깨달음을 상징한다. 처절한 사투로 흘린 피가 담긴 글이라야 기존 사유체계를 과감하게 전복할 수 있는 신념과 결단을 부를 수 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한 사람이 아니라 신을 죽인 사람입니다

     

니체 하면 떠오르는 말은 바로 “신은 죽었다”입니다. “신은 죽었다”가 아니고 정확히 해석하면 니체가 신을 죽인 겁니다. “신은 죽었다”는 선언은 ‘옳다’라고 믿었던 신념체계, 암암리에 우리들의 삶을 지배했던 초월적 가치관, 나도 모르게 따르고 신봉했던 도덕적 규범을 전복시킨 일생일대의 사건입니다. 여기서 신은 기독교의 신이기도 하지만 서구 철학에서 지배적 위치를 담당했던 사상과 문화, 형이상학적 신념과 초월적 가치입니다. 그동안 서구 철학을 전통을 지배해왔던 위대한 생각들을 죽여 버리고 거기에 이전과 다른 새로운 가치관의 터전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말에 끄트머리라고 있지 않나요? 끝에 머리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끝에 존재하는 머리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1/4분기 끝에서 2/4분기가 시작되잖아요. 신을 죽인 그 끝에서 좌절하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그 끝에서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것입니다. 믿었던 신념체계가 무너지는 절망과 상실감이 밀려오지만 그 지점에서 새로운 사유 실험 히 시작되는 희망과 다짐의 전초기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삶의 ‘철학자’가 강단의 ‘학자’가 된 세상에서 자기 분야만 깊이 파는 전문가를 양산하고 선호하는 시대, 그들이 추구하는 보편적 진리, 불변하는 가치, 우리가 믿고 따르는 도덕과 윤리적 판단은 여전히 지금 여기서도 유효한지를 따져 물어봄으로써 근거 없는 근본을 맹목적으로 믿는 우리 자신을 생각하는 배움의 촉발점이 바로 신이 죽은 그 자리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신념체계가 판단의 근거로 작용하는 선판단이나 근원은 무엇인지, 어떤 근거로 그걸 옳다고 주장하는 것인지,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면에 내가 잘 모르고 있다는 것도 고려하고 있는지를 꼼꼼히 따져 물어보는 아픈 물음이 이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허무주의는 삶을 덧없다고 생각하는 허무가 아니라 믿었던 가치체계가 무너지면서 갖게 되는 상실감에 초점을 두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기존 가치체계가 붕괴됨과 동시에 그동안 믿었던 가치들이 얼마나 허위적인 굴레였는지를 심각하게 깨닫는 과정입니다. 허무주의에서 말하는 허무는 내가 그동안 신념체계가 무너지면서 다가오는 느낌이지만 동시에 허무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그 촉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허무하지만 절망과 좌절의 늪에서 새로운 희망을 싹 틔우는 가능성이 자라는 이유입니다. 허무주의는 초월적이고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궁극적인 가치였지만 생각해보면 허구적 가치를 폐기하고 새로운 가치를 건설하자는 주장입니다. 진리는 내가 사는 세계의 밖에 있지 않고 내가 의미를 부여하면 생기는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게 니체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었던 가치가 허물어지기 때문에 가치 전도가 시작되는 것이고, 삶의 밑바닥에서부터 밀려오는 근원적인 상실감을 참을 수 없기에 허무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허위적인 것들이 실제 우리 삶에서는 아무런 효용가치도 발휘할 수 없는 무가치함을 깨닫는 과정이 허무주의의 긍정적 측면입니다. 니체를 전복의 철학자라고 하는 이유를 몇 가지 더 추가로 설명하면 이해가 쉬울 거 같습니다. 우선 모든 전통은 진통 속에서 탄생합니다. 진통 없이 전통도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니체는 전통을 망치로 산산조각 깨부수는 전복의 철학자답게 진통을 당연히 겪어야 할 고통으로 받아들입니다. 둘째, 니체는 위험한 질문을 던져 기존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통념을 통렬하게 부정합니다. 정답보다는 위험한 질문을 던져 정답에 매몰된 우리들을 위험에 빠뜨립니다. 질문 자체가 위험합니다. 니체는 언제나 위험한 삶을 살아가라고 강권합니다. 셋째, 나만의 신념을 만들려면 기존에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통념을 통렬하게 깨부수는 전복의 철학을 보여줍니다. 통념을 깨부숴야 나만의 신념이 생깁니다. 


니체는 《아침놀》에서 사상가를 네 등급으로 분류합니다. 첫째, 현상의 표면을 바라보는 ‘피상적 사상가’입니다. 둘째, 심층이나 현상의 이면을 파고들어 깊은 곳을 연구하는 ‘심오한 사상가’입니다. 셋째, 사물의 근거를 파고들어 현상 밑의 바닥을 탐구하는 ‘철저한 사상가’입니다. 이들은 사물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무조건 밑으로 파고들어 깊이만 추구하는 사상가보다 사물의 근본이나 뿌리를 파헤쳐 그것이 담고 있는 숨겨진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 사상가의 더 소중한 역할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진흙탕에 박고 밑바닥을 뚫고 들어가서 파헤치고 뒤엎는 ‘지하의 사상가’입니다. 마지막 지하의 사상가는 ‘심오한 사상가’처럼 깊이를 추구하거나 ‘철저한 사상가’처럼 근본을 해명하지 않고 깊이 뿌리박고 있는 근거 자체를 뒤집어엎는 사상가입니다. 니체의 표현을 따르면 이들이야말로 사랑스러운 지하 철학자입니다. 니체는 평생 지하의 사상가처럼 깊이 파고들어 세워놓은 이전의 철학적 전통을 뿌리째 전복시켜 지금까지의 철학적 탐구와 성취결과가 무의미하며 잘못된 신념에 근거하고 있음을 파헤치는 전복과 파괴의 스승입니다.  



니체는 전복하지 않으면 전복당한다는 사실을 체감한 철학자입니다


파괴와 전복의 철학자, 니체는 무엇을 뒤집고 파괴했을까요? 첫 번째, 신체와 이성의 관계에서 서구 철학은 이성이 신체를 지배했습니다. 이성을 중시하는 서구 철학은 로고스의 철학입니다. 니체가 신체의 이성의 관계를 뒤집었습니다. 지금까지 믿었던 이성은 작은 이성이고 오히려 신체가 커다란 이성이라고 전복합니다. 그래서 신체 중심 철학. 신체가 욕망하는 디오니소스적 철학을 펼친 겁니다. 사실 니체는 죽기 전까지 신체가 안 좋아서 투병생활로 극심한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두 번째 니체가 전복한 대상은 신입니다.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존재한다고 믿었던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궁극의 진리와 당연하다고 믿었던 가치체계를 전복합니다. 남이 만든 해석체계에 종속되어 노예처럼 살지 말고 너의 관점으로 세상을 다시 해석해라는 게 니체의 주장입니다. 니체는 아폴론적 합리성과 논리적 이성보다는 광기가 취해 신체적 욕망을 추구하는 디오니소스적 열정을 좋아합니다. 세 번째 니체가 전복한 것은 선악의 저편과 도덕의 계보학에서 말했던 선과 악을 폐기하고 나의 입장에서 좋고 나쁜지를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 선악에 종속되어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기준을 전면에 내세우지 못하고 살아왔다고 니체는 주장합니다. 니체는 그동안 우리는 사회가 정한 도덕과 윤리적 판단 기준에 종속되어 살아온 노예적 삶이었음을 비판적으로 생각해보라는 주장입니다.


선악은 영어로 얘기하면 모럴(moral)입니다. 좋고 나쁨은 스피노자 식으로 얘기하면 에티카 야 즉 윤리를 의미하는 에식스입니다. 누군가가 정한 세상의 도덕에 얽매여 살지 말고 네가 주체적으로 판단해서 좋은지 나쁜지 우리기 스스로 판단해서 살아가라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면 나이 많은 사람은 젊은 여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사회적 도덕의 계율을 따르지 말고 나에게 그런 결혼이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해서 눈치 보지 말고 행동하라는 겁니다. 당연히 해야죠. 사회가 정한 도덕적 규범을 따르지 않고 나한테 좋은 거니까 나의 주관으로 판단해서 과감하게 행동하는 주인의 삶이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마지막으로 니체는 절대주의를 뒤집어 관점주의로 바꿉니다. 관점주의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남이 만든 해석체계나 정의에 빠져 살지 말고 내가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주인이 돼서 세상을 나의 관점으로 바라보라는 겁니다. 기존 가치 체계를 스스로 전복하지 않으면 오히려 내가 기존 가치체계에 전복당한다는 사실을 니체는 너무 빨리 깨달은 철학자입니다.



“도덕이란 무엇인가?” 정답을 요구하는 질문 대신에 “도덕이 뭔지 묻는 의도가 무엇인가?” 또는 “누가 왜 도덕을 묻는가?” “우리가 믿는 도덕은 과연 믿고 따라야 하는 강제성을 누가 정한 것인가? 니체는 이처럼 어떤 답을 전제로 물어보는 질문에 질문을 던질 뿐만 아니라 맹목적 믿음을 의심해보는 질문을 니체는 계보학적 질문이라고 합니다. 교육공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누가 교육공학을 정의하는가? 교육공학을 정의하는 사람이 정의하는 관점에 숨어 있는 의도는 무엇인가라고 물어보는 것이 니체가 관심을 두는 계보학적 질문입니다. 계보학적 질문은 익숙한 것, 당연한 것을 더 이상 익숙하지 않도록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비판적 질문입니다. 기원을 찾아 올라가 나의 조상이 위대하다는 점을 밝혀냄으로써 나를 정당화하려는 족보학과 다르게 계보학은 기원을 찾아 올라가긴 하지만 그 기원이 얼마나 별 볼일 없는 것인지를 의문에 붙이고 비판하는 방법입니다(이진경, 2020). 이런 계보학적 질문은 누군가의 철학책을 읽고 무조건 철학자가 주장하는 메시지를 믿을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의 근본적인 의도는 무엇인지? 어떤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인지를 따져보고 파헤치는 질문입니다. 니체는 자신의 책을 읽고 그 책에 빠져서 살아가면서 해설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철학자마다 주장하는 핵심 메시지에 의문을 던지고 그것이 내 삶에 던져주는 의미에 비추어 나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반추해보고 재해석할 때 비로소 나의 삶을 중심으로 철학 체계를 구축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니체 철학 전공자는 아니지만 니체 철학을 읽고 제 삶에 조금씩 적용해보면서 제가 보고 느낀 점들을 중심으로 여러분하고 같이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저는 니체 철학을 해설할 정도로 철학적 깊이가 깊지 못합니다. 니체 철학 해설자 입장이 아니라 니체 철학을 저마다의 삶에 실천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철학적 실천의 길로 안내해보려고 합니다.



니체는 나력(裸力)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는 앙스트 블뤼테의 상징입니다


니체는 다른 철학자들과 다르게 명언이나 잠언으로 불리는 말을 많이 남긴 대표적인 철학자입니다. 아포리즘 형태의 명언도 있고 삶의 근원을 성찰하면서 툭 던진 잠언인데 심장을 단도직입적으로 파고드는 명언도 많습니다. “철학자는 체계를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니체는 기존의 철학 체계를 부숴버리고 늘 문제를 던지잖아요. 정말 철학계의 이단아이자 문제아가 니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예전에 《유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라는 책 이전에 《니체는 나체다》라는 책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게 나오자마자 19금 도서에 걸린 난처한 상황도 발생했습니다, 니체 철학을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주장하지만 제 입장에서 니체 철학의 핵심은 나력(裸力, naked strength)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단하게 생각해봅시다. 한양대학교 유영만 교수. 한양대학교라는 소속을 뗴어버리고, 교수라는 직위를 떼 버리면 남는 건 유영만이라는 이름 석 자입니다. 이처럼 이름 석자로 한양대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바깥에 나가서도 보여줄 수 있는 본연의 경쟁력 나력이라고 합니다. 



나력은 몸으로 체득하는 변화입니다. 나력은 과거에 성공한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방법을 우상화함으로써 오류에 빠지는 ‘휴브리스(hubris)’에서 벗어나는 ‘슬기’입니다. 나력은 자신의 취약점으로 작용하는 트라우마를 카리스마로 전환하는 ‘광기’입니다. 나력은 자신을 포장하고 위장하는 거짓 자아에서 탈출하는 ‘용기’입니다. 나력은 견디기 어려운 역경을 뒤집어 독특한  경력으로 만드는 ‘끈기입니다. 나력은 마지막으로 무성한 형용사의 거품을 걷어내고 본질과 핵심이 스스로 빛을 내는 ‘야성’입니다. 나무도 겨울에 나목(裸木)으로 혹한의 추위를 다 견뎌내고 새봄에 희망의 싹을 틔우듯이, 니체 철학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나력을 키우는 방법에 관한 사유체계라고 생각합니다. 니체 철학을 공부하면서 니체와 저의 공통점을 비교해보니까 비슷한 점이 의외로 많더라고요. 저는 사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얼굴조차 기업을 못합니다. 니체도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다는 공통점이 첫 번째 떠오릅니다. 두 번째 니체와 저의 공통점은 헌책방에서 책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결단한다는 점입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책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접하면서 철학에 깊게 매료됩니다. 


《라이프치히에서의 회고》라는 수기에서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다음과 같은 소감을 남겼습니다. "나는 그때 그 정력적이고 음울한 천재 철학가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고 내 몸을 전부 내맡겨 버렸다. 그 책은 첫 줄부터 모든 말들이 하나같이 단념과 부정과 체념뿐이었다. 그 책을 통해서 나는 세계와 인생과 나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큰 거울을 발견한 것이다.  그 책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은 예술이 지니고 있는 사심 없는 완벽한 태양의 눈이었다. 나는 질병과 치유, 추방과 피난처, 그리고 지옥과 천국을 보았다. 자기 인식과 자기 해체의 욕구가 나를 사로잡은 것이다." 쇼펜하우어를 만나 읽은 니체의 독서 체험으로 말미암아 쇼펜하우어는 니체의 위대한 스승이 되었지만 결국은 니체가 극복하고 넘어가야 할 거대한 표적이 되었습니다. 저 역시 공고를 졸업하고 평택화력발전소에 취업했을 때 어느 날 헌책방에서 우연히 만난 고시 체험생 수기집을 읽고 고시 합격을 통한 인생역전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때 탄 고시행 기차는 잘 못 탄 기차였지만 결과적으로 오늘의 제가 되는 과정에서 역사적인 전환점을 마련해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파울로 코엘료가 말하듯,  '잘못 탄 기차가 때로는. 목적지에 데려다줍니다.' 니체는 1864년, 본 대학교에 진학해 신학과 그리스 고전 문헌학을 배웠지만 그는 본 대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깁니다. 절치부심의 방황 끝에 1869년, 학생 신분이었던 그는, 불과 24세의 나이에 바젤 대학교 문헌학 최연소 교수가 됩니다. 저 역시 고시 공부하려고 대학에 입학했지만 그 길이 잘못된 꿈이 인도했던 잘 못된 길임을 뒤늦게 깨닫고 다시 방황을 거듭했습니다. 방탕을 해보면 방랑생활을 할 수 있고, 방랑을 하면 방황을 할 수 있으며, 방황을 해본 사람만이 인생의 방향을 잡을 수 있다는 깨달음도 얻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니체하고 저의 마지막 공통점은 앙스트블뤼테(Angstblute) 상황에서 다양한 저작을 남긴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앙스트 블뤼테란 독일의 생물학 용어로, 앙스트(Angst, 不安)와 블뤼테(blute, 開花)의 합성어로 전나무가 이전과 다르게 환경이 열악해져 생명이 위태로워짐을 느끼면 평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유난히 화려하고 풍성하게 꽃을 피우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불안의 꽃’이라고 번역되며, 시련과 역경을 견딘 후에 생기는 설명할 수 없는 내공의 깊어짐을 의미합니다. 죽음을 앞둔 처절한 상황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생애 마지막 의지와 집중력을 총동원하여 꽃을 피우는 전나무처럼 정신병자적 증세를 보였던 니체도 절망적인 위기 상황에서

불후의 명작을 남겼으며 청력을 거의 상실한 베토벤도 극도의 불안감 속에서 길이 남을 수 있는 명작을 작곡했습니다. 니체도 마지막 10년을 극한의 고통과 더불어 살면서 대저작을 써냈습니다. 저는 니체만큼의 앙스트 블뤼테 상황은 아니지만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나를 넘어서기 위해 창작 욕망에 불길을 내면서 90여 권의 저역서를 출간했습니다. 제가 대학원생들도 극한의 고통 상황인 앙스트 블뤼테 상황에 몰아넣은 다음 극도의 불안감 속에서 위대한 창작의 꽃을 피우는 연습 기회를 제공합니다. 사람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정상적으로 사고합니다. 정상적인 사고로는 지금 직면한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면 사람은 이전과 다르게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머리를 쓰기 시작합니다. 정상에 간 사람은 이처럼 비정상적인 사유로 기존 사유체계를 전복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경지에 이른 사람입니다. 



니체는 신체이자 나체이자 전체입니다


《니체는 나체다》 책을 쓰면서 니체(尼體)를 세계 최초로 한자로 썼습니다. 세계 최초로 만든 니체의 한자입니다. ‘니(尼)’자가 시사하는 세 가지 의미에 비추어 니체를 세 가지 다른 의미로 해석해봅니다. 첫째, `니(尼)`는 `가깝다` 또는 `가까이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니(尼)`라는 한자의 의미를 생각하다가 만약 니체를 `니체(尼體)`라고 명명한다면 니체 철학의 핵심을 포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니체(尼體)는 `몸에 가깝다` 또는 `몸에 가까이 가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몸에 가까이 간다는 의미는 몸을 둘러싸고 있는 허례허식이나 가식, 위장이나 포장을 걷어내고 벗은 몸, 즉 나체(裸體)로서의 나를 드러낸다는 의미입니다. 나체로 나를 드러내야 나의 정체(正體)나 전체(全體)를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니(尼)`는 또한 멈춤이나 정지를 의미하므로 니체(尼體)는 몸(體)의 멈춤이나 정지(尼)를 의미합니다. 몸의 멈춤은 변화의 거부나 현실 안주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나로 재탄생하거나 변신하기 위해 잠시 멈춰 서서 방향을 점검하고 내 몸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는 과정입니다. 셋째, `니(尼)`는 `비구니(比丘尼)`의 다른 이름입니다. `니(尼)`는 `화평하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물질적 욕망이 춤을 추는 속세에서 벗어나 마음의 화평을 찾는 비구니에게서도 니체의 철학을 읽을 수 있습니다. 철학자 니체(尼體)는 물질적 욕망을 채우려는 `바구니`가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밝혀 참된 나를 만나려는 `비구니`입니다. `비구니`는 겉치레를 벗어던지고 내 안으로 들어가지만, `바구니`는 채울 것을 찾기 위해 밖으로 관심을 돌립니다. `비구니`는 버림으로써 깨달음을 얻지만 `바구니`는 채움으로써 만족을 추구합니다. `비구니`는 자신과 대화를 나누지만 `바구니`는 욕망하는 물건과 대화를 나눕니다. 


니체 책 후반부에다가 니체를 3가지로 이렇게 한번 써봤어요. 첫째, ‘니체’는 ‘신체(身體)’입니다. 온몸으로 부대끼며 ‘신체’가 꿈꾸는 욕망을 따라갈 때 새로운 신체를 만나는 것이며 새로운 삶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동안 ‘작은 이성’, 즉 정신이 ‘커다란 이성’, 즉 신체를 배제시키고 순수한 앎, 궁극의 진리에 도달하려는 철학적 노력을 전개해왔지만, 신체 없는 정신, 신체와 분리된 이성은 관념적 허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인간의 본능적 욕구나 충동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신체적 존재가 추구하는 의지와 열망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감각과 정신은 한낱 도구이며 장난감이다. 그것들 뒤에는 ‘자기(自己, das Selbst)’라는 것이 버티고 있다. 이 ‘자기’가 감각의 눈을 도구로 하여 탐색하며, 역시 정신의 귀를 도구로 하여 경청하는 것이다. ‘자기’는 언제나 경청하며 탐색한다”(52쪽).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말입니다. 생각과 느낌 배후에는 알려지지 않은 강력한 현자가 있습니다. 그 현자가 바로 ‘자기’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신체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체가 바로 ‘자기’라는 것입니다. 신체는 인간 자체이자 총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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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니체’는 ‘나체(裸體)’입니다. 내가 입고 있던 관념의 옷, 나를 포장했던 환상의 외투를 벗어던지고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 나서는 낯선 여행을 떠나야 한다. 내 이름 석자 이외에는 다 버려야 한다. 나를 포장(包裝)했던 허상, 나를 위장(僞裝) 하기 위해 보여준 생각과 행동, 내 대신 나로 가장(假裝)했던 나의 모습에서 벗어난 나체(裸體)로서의 내가 나의 본모습이다. ‘나력’은 겨울에 잎을 다 벗은 오크가 ’적나라(赤裸裸)한 힘‘을 가진다고 예찬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즉 권력을 휘두르던 정치가가 권좌에서 물러나 권력의 옷을 벗은 뒤나 잘 나가던 대기업 임원이 어느 날 갑자기 해고 통지를 받았을 때, 인기 절정의 연예인이 고공행진을 하다가 갑자기 추락했을 때, 저명한 학자가 명예의 옷을 벗은 뒤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격적으로 존경받을 수 있는 인간적 매력이 ’나력‘이다. 누구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어떤 조직이나 시스템적 지원을 받지 않고도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할 수 있는 영향력이 바로 ’나력‘이다. 등반가가 후원단체로부터 많은 금전적 지원을 받고 첨단 장비를 동원하여 세르파의 도움을 받아 정상을 정복했다면 그 등반가는 나력이 없는 산악인이다. 진정한 의미의 나력이 있는 산악인은 예를 들면 기존의 정상 정복을 위한 ’ 속도경쟁‘에서 벗어나 산과 홀로 하나가 되어 온 몸으로 산에 오르면서 ’ 의미 경쟁‘을 하는 사람이다.    


셋째, ‘니체’는 ‘전체(全體)’입니다. 신체를 구성하는 다수의 살아있는 존재들은 각각 고유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합법칙적 관계를 맺고 전체로서의 신체가 기능을 발휘합니다. 나아가 니체에 따르면 신체는 육체는 물론 영혼과 의지까지도 포괄하는 전체입니다. 결국 니체가 생각하는 신체는 인간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명칭입니다. 작은 이성과 육체, 그리고 영혼과 의지를 포괄하는 전체로서의 신체는 총체적 존재입니다. 총체적 존재로서의 신체를 연구의 편의상 부분이나 개체로 구분해서 연구하면 할수록 총체나 전체로서의 신체에 대한 이해는 오히려 왜곡되고 편향된 주장을 낳을 뿐입니다. 육체는 물론 정신과 영혼, 그리고 의지까지 포함하는 신체를 철학적으로 연구한 니체는 전체입니다. 니체는 진리를 문제 삼는 다른 철학자들과 다르게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을 문제 삼습니다. 진리를 찾으려는 천 가지 욕망이 천 가지 다른 진리를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천 가지 이야기를 갖고 살아갑니다. 니체는 그래서 대상이나 진리 속에서 작동하는 수많은 힘과 권력, 숨은 의지나 숨긴 의도를 밝힘으로써 진리에 담긴 의미와 가치를 총체적으로 조명하려고 했습니다. 논리적 설명방식으로 일관하는 전통적인 철학에 망치질을 하고 철학으로서의 삶과 삶으로서의 철학이 갖는 총체성을 다양한 감각적 표현방식을 차용함으로써 총체적 현상이자 전체로서의 온전한 삶을 그대로 드러내려고 했던 니체는 그래서 더욱더 전체입니다.



기존 가치와 신념체계를 스스로 전복하지 않으면 전복당합니다


전복의 철학자 니체는 저에게도 네 번의 전복을 경험하게 만들었습니다. 첫 번째 전복은 제가 이성을 지배하는 근원적인 힘은 뇌력이 아니라 체력임을 깨달은 사건입니다. 제가 유학 가서 공부를 하다 보니까 이게 뇌력도 체력 없이는 발휘하기 힘들다는 점을 몸으로 느꼈습니다. 그때부터 신체를 단련하기 시작해서 별일이 없는 한 지금까지도 밥먹듯이 운동을 하는 습관을 만들었습니다. 모든 사유의 혁명은 신체성에서 비롯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신체의 혁명이 사고방식의 혁명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뇌력은 체력에서 나온다는 확신도 이런 노력을 통해서 만들어진 산물입니다. 두 번째 전복은 인식론적인 혁명입니다. 박사 학위 논문을 쓰면 통계적 방법을 활용하는 계량적인 논문을 쓰는 와중에 깨달은 인식론적 혁명입니다. 통계적 정교함을 추구해서 논문을 썼지만 통계적으로 유의미하나, 실천적으로 무의미한(Statistically significant, but practically no significant) 연구결과의 대량 양산에 깊은 회의감을 느꼈습니다. 파리 앞다리의 움직임이 파리 몸통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는다고 해도 파리 앞다리를 몸통에서 떼어서 연구한 결과이기에 죽은 파리 앞다리를 통해 파리를 알 길이 없는 통계적 논문은 앎의 통증을 유발할 뿐입니다. 제 삶에 있어서 인식론적인 혁명은 계량적인 연구를 폐기하고 삶의 질적 의미를 연구하는 질적 연구로 전환하는 와중에 일어난 사고 혁명입니다. “가능한 한 앉아 있지 마라: 야외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생겨나지 않는 생각은 무엇이든 믿지 마라 - 근육이 춤을 추듯이 움직이는 생각이 아닌 것도 믿지 마라. 모든 편견은 내장에서 나온다. - 꾹 눌러앉아 있는 끈기- 이것에 대해 나는 이미 한 번 말했었다 - 신성한 정신에 위배되는 진정한 죄라고…”(279쪽). 《이 사람을 보라》에 나오는 말입니다. 실천하는 생의 철학을 하지 않고 책상에 오래 앉아 고민하는 관념적 철학을 거듭할수록 편견이 내장에서 만들어집니다. 



“박식한 학자의 책에서는 또한 거의 언제나 억누르고 또 억눌린 어떤 것이 느껴진다: 어디에선가 전문가의 티를 내는 것이다. 그의 열성과 진지함, 원한, 그가 앉아서 생각을 짜내는 구석자리에 대한 과대평가, 그의 곱사등에서-모든 전문가는 곱사등을 가지고 있다. 학자의 책은 또한 언제나 굽은 영혼을 반영한다. 모든 전문 수공업은 구부리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잠언 366, 367쪽). 니체의 《즐거운 학문》에 나오는 말입니다. 움직이지 않고 오랫동안 앉아서 연구하는 학자들은 내장에서 나온 편견이 있을 뿐만 아니라 곱사등에서 나오는 굽은 영혼을 반영합니다. 니체가 왜 이성보다 신체성을 강조하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입니다. 전문가 책상머리에 오랫동안 앉아서 계속 연구를 하기 때문에 곱사등이 생기고 내장이 꼬여서 편견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 연구는 그만하고 격전의 현장에 몸을 던져 디오니소스적 광기로 무장된 신체성을 기반으로 연구 활동을 전개하는 것 자체가 자기 삶의 철학을 실천하면서 자기 방식으로 새로운 철학적 사유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입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제가 맞은 세 번째 전복과 파괴의 사유의 혁명은 관계론적인 혁명입니다. 서양철학의 핵심은 존재가 관계를 압도하는데 동양철학은 반대로 관계가 존재를 결정합니다. 관계없는 존재는 없습니다. 듀이가 말하는 특정 상황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관계가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결정한다는 입장과 일맥상통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체험한 니체의 전복과 파괴의 철학은 전복을 체험한 혁명은 가치론적인 혁명입니다. 2007년 4월 11일, 목숨을 잃을 뻔했던 교통사고를 경험하면서 가치관에 혁명이 일어는 경험을 했습니다. 앞만 보고 직선으로 달리다가 워커홀릭으로 성과나 효과를 극대화하면서 효율을 달성하다가 하늘나라로 가기 직전에 구사 회생하면서 소중한 삶의 가치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보았습니다. 직선의 가치관을 곡선의 가치관으로 전복되면서 직선적 사유를 곡선적 사유로 바꾸었습니다. 사고의 전복이 혁명적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니체는 나력을 회복하기 위해 새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첫째, 나는 진정 나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니체처럼 뒤흔들라고 명령합니다. 거미가 거미줄에 먹이가 걸리면 거미줄을 주기적으로 흔들 듯, 우리도 내가 근거하는 신념이나 옮다고 믿는 가정을 뒤흔들어봐야 합니다. 그래야 잘못된 믿음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나는 나체의 ‘나(裸)’자입니다. 여러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裸)처럼 살지 않고 남들처럼 살다가 나를 잊어버리잖아요. 과연 진정 나는 나로 살고 있는가는 자기에게로 향하는 심각한 질문입니다. 두 번째 니체가 던진 질문은, 낡은 나를 파괴하고 허위적 가치관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있는지 물어보는 질문입니다. 나를 옭아매는 초월적 가치관이나 형이상학적 신념의 덫에서 탈출, 새로운 가치체계로 나를 새롭게 건축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메시지입니다. 세 번째는 끊임없이 새롭게 나는 재탄생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니체가 이상적 인간상으로 설정한 위버멘쉬처럼 부단히 변신을 거듭하라는 메시지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세 가지 질문을 통해서 니체 철학을 배웠으면 자신의 곁을 떠나 너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고 합니다. 나의 책에서 벗어나 너의 책을 쓰기 위해 너의 삶을 살아가라는 주장입니다. 니체가 주장하는 대로 산등성이를 타고 정상에 올랐으면 이제 너의 방식대로 너의 길을 찾아가면서 세상을 내다보라고 합니다. 다른 곳에 이르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니체 옷을 벗어던져고 니체로부터 벗어날 때 니체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인생을 다시 한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니체 철학의 핵심과 근간이 되는 주요 개념 몇 가지를 알아두면 난해한 철학적 사유체계를 나의 삶의 철학으로 재건축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 되는 일도 많고 생각대로 풀리지 않아서 누군가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도 생깁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직장에 뒤늦게 출근해가지고 팀장님한테 혼나는 일이 생깁니다. 상사에게 혼나는 팀원은 고객을 숙이고 이런 말을 하면서 순간적인 모욕감과 위기를 넘어서려고 합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지만 니체의 ‘영원회귀’라는 개념에 비추어 보면 지금 상사에게 혼나고 있는 이 상황이 앞으로도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과 다르게 여러분이 변신을 하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이 200년, 300년, 500년을 넘어 영원히 반복된다면 얼마나 끔찍하겠습니까? 남은 삶의 미래는 지금 이 순간에 달려 있다는 것이 니체의 영원회귀가 주장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보내는 매 순간을 영원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처럼 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돌고 돈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소생한다. 존재의 해(年)는 영원히 흐른다. 모든 것은 꺾이고, 모든 것은 다시 이어진다. 똑같은 존재의 집이 영원히 지어진다. 모든 것은 헤어지고, 모든 것은 다시 만나 인사를 나눈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이렇듯 영원히 자신에게 신실하다. 매 순간 존재는 시작된다. 모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라는 공이 굴러간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 영원이라는 오솔길은 굽어 있다“(361쪽).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말입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운 삶이 펼쳐지더라도 지금 이 순간을 미래의 행복을 추구하는 목적을 위해 수단적 도구로 전락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어쩔 수 없이 견뎌내는 고통스러운 삶이 앞으로도 영원히 반복되기 때문에 “지금 인생을 다시 한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라고 차라투스트라가 외치고 있는 이유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고생을 조금만 참고 견디면 미래의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가정과 믿음은 니체의 영원회귀에 비추어 보면 완전히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내가 어떤 삶의 자세와 태도로 임하는지의 여부가 앞으로 도래할 삶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비록 오늘의 삶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고 힘겹게 지나갔다고 생각해도 거기서 안간힘을 쓰면서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창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운명을 탓할 시간이 없습니다. 운명을 끌어안고 뜨겁게 사랑하는 아모르파티(amor fati), 즉 운명애(運命愛, Love of Fate)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아모르파티는 ‘아무렇게나 살지 말고 파티’하면서 살아라! 뭐 이 정도의 의미라고 번역해봅니다. 참된 사랑은 운명의 거부도 운명에 구속되는 것도 아닙니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운명을 아름답게 창조하는 것입니다.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은 결국 너의 삶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사랑할 만한 삶이 무엇인지, 그런 삶을 위해서 나는 지금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어차피 지금 살고 있는 인생의 모든 순간이 앞으로도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면 우리는 인생을 ‘숙제’하는 괴로운 삶이 아니라 즐겁고 신나게 ‘축제’하는 삶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이 내가 태어난 운명에 관계없이 어차피 영원히 반복된다면 부정과 회의에 빠지지 말고 내 운명을 사랑하면서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 부단히 변신하는 과정을 통해 어제와 다른 나로 다시 태어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니체가 힘든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이상적으로 제시한 인간상이 바로 위버멘쉬(Übermensch)입니다. 영원 회귀의 철학을 믿고 자신의 운명조차 사랑하는 아모르파티 철학을 수용한다면 자연스럽게 현실의 삶에 만족하고 안주하기보다 비록 험난한 여정이 눈앞에 보일지라도 시련과 난관을 극복하면서 부단히 전진하며 성장하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끊임없는 자기 변신을 통해서 나다움을 찾아 부단한 자기 창조를 거듭하는 인간상이 바로 위버멘쉬입니다. “너는 너 자신의 불길로 너 자신을 태워버릴 각오를 해야 하리라. 먼저 재가 되지 않고서 어떻게 거듭나길 바랄 수 있겠는가!”(106쪽).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말입니다. 위버멘쉬는 자신을 불태워 재를 만들겠다는 각오로 매 순간을 마지막 순간처럼 목숨을 걸고 살아갑니다. 위버멘쉬에게 필요한 정신은 니체의 언어로 말하면 ‘힘에의 의지’입니다. 


‘힘에의 의지’는 지금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가기 위해서 위버멘쉬가 밧줄에 매달려 발버둥 치면서 살아가려는 그 의지입니다. 힘에의 의지는 지금 상태를 벗어나 여기서 저기로 발버둥 치며 성장하려는 의지입니다. 즉 지금 여기서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바람직한 미래 상태로 상승작용의 의지입니다. 내가 뭔가를 하면 힘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한테 힘이 생기는 게 힘에의 의지입니다. 힘에의 의지는 내가 뭔 일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나에게 없었던 힘을 주는 의지입니다. 나에게 힘이 되는 일을 하면서 그 일을 할수록 힘이 되는 의지가 바로 힘에의 의지입니다. 힘에의 의지는 개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관계에도 작용하는 의지입니다. 힘에의 의지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인간관계에서 생성되는 관계적 의지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만나면 코드가 통해서 저절로 에너지가 생기고 서로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힘에의 의지는 개인의 의지기도 하지만 서로가 만나면서 관계 속에서 힘을 주고받으며 시너지를 만들어가는 의지입니다. 힘에의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변신도 하고 힘에의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나서 서로 힘을 주고받으면 아름다운 삶을 펼쳐나갈 수 있는 연대와 공동체도 구축될 수 있습니다. 



정의를 바꾸지 않으면 남이 정의한 세계에 갇혀 살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용접공(welder)라는 시계가 있습니다. 제가 한 때 공고 다니면서 전기용접 기능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용접공 체험을 해서 그런지 이 시계에 각별한 관심과 애정이 갑니다. 특히 제가 이 시계를 주목하는 이유는 발상이 남다르기 때문입니다. 우선 용접으로 시계를 만듭니다. 정밀함을 추구하는 시계 산업의 섬세한 이미지와 대조를 이룹니다. 이 시계를 주문하면 용접공 공구박스처럼 생긴 상자에 담아서 보내줍니다. 이 시계의 파격적인 발상은 시계 가운데 쓰여있는 ‘since 2075’라는 문구입니다. 정상적인 영문법에 따르면 since라는 단어 뒤에는 과거 시제가 와야 되는 이 시계는 미래 시제를 썼습니다. 시계가 내세우는 슬로건 Welding of Time, 시간을 용접하겠다는 겁니다. 2075년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우리가 보내는 매 순간의 시간을 용접해서 2075년이라는 미래를 만들겠다는 발상처럼 들립니다. 니체 식으로 이야기하면 기존 정상적인 시간관념을 전복하고 새로운 시간관념을 내세운 비정상적인 역발상으로 평범한 시계를 색다르게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만약 이 시계 회사가 since 1975처럼 평범하게 설립년도를 과거형으로 제시했으면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처럼 비정상적인 발상을 하려면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가정을 없애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선풍기에는 날개가 있다는 가정이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이런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풍기에는 꼭 날개가 있어야 할까? 색다른 질문은 색다른 감동을 불러옵니다. 정상적인 질문은 정상적인 답을 갖고 오지만 비정상적인 질문은 비정상적인 답을 찾아옵니다. 날개 없는 선풍기는 정상적인 사람들의 선풍기에 대한 가정을 없애버리고 순간 태어난 비정상적 사유의 산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스테이플러에는 고정시키는 데 필요한 침이 있습니다. 스테이플러에는 반드시 침이 있어야 한다는 가정에 의문의 물음표를 던지지 않는 이상 모든 스테이플러에는 침이 있다는 생각을 바꾸기 어렵습니다. 스테이플러에는 반드시 침이 있어야 할까요? 이런 도발적 질문 덕분에 침이 없는 스테이플리스 스테이플러(stapleless stapler)가 나왔습니다. 식당에는 메뉴가 있다는 가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정관념입니다. 누군가 메뉴 없는 식당을 구상했을 때 기존 식당과는 전혀 다른 요리를 개발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메뉴를 없애버리면 메뉴 없는 식당이 출현하면서 주방장이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서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주는 새로운 콘셉트의 음식점이 탄생하는 겁니다. 



이런 발상은 존 케이지를 연상하면 비정상적 사유가 얼마나 색다른 음악을 작곡하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4분 33초〉라는 음악은 전위예술 음악으로 세계적 명성을 떨쳤으며 백남준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존 케이지가 작곡한 독특한 악보입니다. 이 작품은 미술에서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레디메이드(Readymade, 기성품)인 남자 소변기를 ‘샘’이라는 작품으로 출시했던 것만큼이나 충격적인 음악작품입니다. 뒤샹이 기성품인 남성용 변기를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출품한 것처럼 존 케이지의 4분 33초도 아무것도 없는 악보에 의미를 부여해서 작곡하지 않고도 위대한 음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미술 역사상 창작 행위를 하지 않고 기성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서 예술품이라고 재해석한 혁명적인 미술작품을 창시한 뒤샹처럼 실험적인 음악가 케이지 역시 연주를 통해 나오는 소리를 소거하는 대신 자연과 일상에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재해석합니다. 모든 혁신은 원래 그런 세계, 당연하고 생각한 일상, 원래 그렇다고 치부해버린 세상에 문제를 던져 시비를 걸고 의문을 제기하는 가운데 일어납니다. 정의를 바꾸지 않으면 남이 정의한 세계에 갇혀 살 수밖에 없습니다. 


정의(定義)를 바꾸면 정의(正義) 로운 세상이 내가 정의한 세계관대로 풀리기 시작합니다. 니체도 남의 해석체계에서 벗어나야 나의 해석이 비로소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혁명을 일으키고 혁신을 주도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기만의 정의로 세상을 다시 본 사람들입니다. 정의를 바꿔야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4분 33초〉 악보는 악보지만 악보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I. Tacet, II. Tacet, III. Tacet라고만 쓰여 있다. Tacet는 침묵을 의미합니다. 전복과 파괴의 철학자 니체처럼 존 케이지도 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부숩니다. 음악은 연주자는 연주하고 청중은 그 음악을 들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우리 주변에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가 음악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시도합니다. 음악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 것입니다. 니체가 말하는 전복과 파괴, 그리고 가치의 전도는 개념의 재정의에서 시작됩니다. 물론 그것도 음악이냐는 심한 비판과 조롱도 없지 않았습니다. 존 케이지는 이런 음악적 반란을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저지른 기존 음악계에 대한 도전이자 반항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악기가 내는 소리만 음악이 된다는 고정관념에 반기를 들고 소음을 포함해서 인간이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가 다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음악적 개념을 세상에 처음으로 제시한 음악적 이단아, 존 케이지의 반란이자 항거였습니다.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정상적인 발상에 비정상적 문제제기를 한 사람들이 정상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많습니다. 이들은 기존의 가치체계 종속되어 그들이 정의한 세계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발상의 뒤집는 역발상을 습관화하고 당연하다고 믿었던 가정을 없애버림으로써 새로운 사유의 싹을 피우려는 노력들이 니체가 전복과 파괴의 철학을 통해 우리 삶을 변화시키려는 의도와 맞아떨어집니다. 하지만 여전히 니체의 철학은 얼마나 깊게 흐르는지 그 심연을 알기 어렵습니다. “깊은 샘물이 하는 체험은 하나같이 더디다. 무엇이 그 깊은 곳에 떨어졌는지를 알아내려면 오래오래 기다려야 한다”(85쪽). 더디게 다가오는 니체 철학의 심연은 우리들이 살아내기 위해 노력한 깊이만큼 다다를 수 있습니다. 이제 니체가 던진 철학적 화두를 나의 삶에 적용하는 실천 하면서 내 삶의 철학자로 거듭나는 길이 남았습니다. "지금의 삶을 다시 한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나는 과연 그렇게 살고 있는지 깊이 반성하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금 당장 행동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모든 것의 시작은 위험하다. 그러나 무엇을 막론하고,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163쪽).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에 나오는 말입니다. 위험한 사람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행동하는 사람만이 니체 철학을 실천하며 배울 수 있습니다. 그 배움은 숙제가 축제입니다. 아모르파티가 파티하면서 살아가는 축제의 삶임을 다시 한번 증명해줍니다. “이것이 삶이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멋지게 도전하는 위버멘쉬의 삶이야말로 니체가 온몸으로 우리에게 전해준 삶의 철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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