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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경을 풍경으로 바꾸는 비결

철학자 존 듀이의 예술적 경험론에서 배우다

힘든 세상을 어떻게든 살아내고 싶은가

곤경을 풍경으로 바꾸는 하나의 경험을 만나라!


힘들었지만 의미심장한 하나의 경험을 만나는 비결,

존 듀이(1859.10.20.1952.6.1)의 예술적 경험론에서 배우다


존 듀이(John Dewy)는 아마 가장 많이 한국에 알려진 분이기도 하고요. 우리나라 교육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교육 철학자라고 생각합니다. 존 듀이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경험이라는 개념일 겁니다. 존 듀이를 경험주의 철학자, 실용주의 철학자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철학과 교육과 연결시켜서 가장 많이  설명하는 사람이 바로 존 듀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존 듀이는 《경험과 자연》(1925), 《경험으로서의 예술》(1934), 《경험과 교육》(1938) 등과 같은 책을 통해 경험을 교육과 삶의 가장 중요한 본질로 생각한 철학자입니다. 


듀이는 《민주주의와 교육》에서 성장은 “경험의 계속적 재구성”이라고 할 정도로 성장과 교육, 그리고 삶을 거의 하나의 활동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존 듀이가 말하는 경험 중에 하나의 경험(a experience)이라는 개념이 《경험으로서의 예술》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오늘처럼 여러분이 제 강의를 처음 시작해서 끝까지 들으면서 보고 듣고 느끼며 생각하는 모든 경험이 하나의 완결성을 지닐 때 하나의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강의를 다 듣고 나서 “오늘 유영만 교수의 강의가 정말 재미있었다”라고 말하는 그 느낌 속에 들어 있는 경험이 하나의 경험입니다. 이처럼 어떤 성취감을 느끼는 모든 경험을 하나의 경험입니다. 하나의 경험 안에 듀이가 주장하는 다양한 철학적인 메시지가 들어있는데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해석하면서 그것이 우리가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적 삶에 어떤 의미와 시사점을 던져주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경멸의 대상이었던 경험경탄의 연구대상으로 부각됩니다


존 듀이의 경험 철학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EBS 지식채널 e 중에’ 7년간의 실험’이라는 영상에 관해 잠깐 살펴보려고 합니다. 듀이가 갖고 있는 교육철학을 5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담아낸 굉장히 감동적인 동내용입니다. 이 분이 시카고대학의 철학과 심리학 학부에 학장으로 임명됩니다. 거기에 임명되고 한 2년 후에 소수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위대한 실험을 시작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듀이의 경험주의 교육철학을 실험하는 건데, 당시에도 찬반양론이 많았었습니다. 듀이는 실험학교를 계속 확대해서 7년 뒤에 약 140명의 학생을 데리고 경험 중심의 교육철학을 이어서 실험합니다. 듀이는 그 후에도 약 30년 동안 계속 실험을 거듭하다 진보주의 교육학회를 만듭니다. 진보주의 교육학회는 미국을 비롯 영국, 독일, 싱가포르, 일본, 심지어 한국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존 듀이의 경험주의 교육철학이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세상 사람들의 반대와 학계의 찬반양론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위대한 교육철학으로 정립됐는지 ‘7년간의 실험’이라는 지식채널 e 동영상을 참고해 보시면 듀이의 경험주의 교육철학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듀이가 말하는 경험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봅시다. 제가 오늘 운전을 하고 녹화장소에 오면서 옆에 저의 대학원 조교를 조수로 데리고 제 옆에 앉아서 왔습니다. 운전수인 저와 조수인 조교 중에서 오늘 왔던 목적지까지 다음에도 비슷하게 찾아갈 수 있는 확률은 누가 더 높을까요? 네, 운전수는 직접 운전을 경험한 거고, 조수는 운전수가 데려다줄 것이란 가정을 갖고 옆에 앉아 있었던 거죠. 듀이가 말하는 하나의 운전 경험을 한 사람은 조수가 아니라 운전수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듀이는 왜 경험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갖고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는지 철학사에 비춰서 잠깐만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듀이가 경험을 철학적 연구주제로 전면에 내세우기 전에는 거의 모든 철학들이 경험을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이성을 철학의 이상이라고 생각했고, 이성의 명령과 통제를 받아야 되는 게 경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경험은 상황에 따라서 가변적이고 변덕이 심하니까 경험의 가변성과 변덕스러움을 통제할 수 있는 이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장에 듀이가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경멸의 대상으로 치부되었던 경험을 전면에 내세워서 철학적 논의의 주제로 부각한 사람이 바로 듀이입니다. “이성을 높은 것으로 떠받들수록, 경험은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경험은 특정한 가변적 삶의 상황에서 사람이 하는 일과 당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는 것도 덩달아 철학적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참고: 민주주의와 교육, 423쪽). 이성 중심 철학이 지배적이었던 당시의 시대상황에 듀이는 경험 없는 이성은 근거 없는 관념적 사유에 지나지 않음을 주장합니다. 



듀이는 둘째로 인간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유기체라는 점을 그의 주저 중의 하나인 《경험으로서의 예술》에서 반복적으로 주장합니다. 모든 유기체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존재합니다. 듀이는 인간과 자연이 따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전통적인 이원론을 부정합니다. 하나의 경험을 다시 생각해보세요. 경험한다는 것은 사람이 환경과 만나는 것이고 다른 사람과 만나서 상호작용하는 과정입니다. 한 사람의 존재는 반드시 어떤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그 사람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유기체는 이미 유기체가 존재하는 상황을 전제하고 상황 속의 다양한 구성요소와 부단한 상호작용을 하면서 존재합니다. 주체와 대상이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을 때를 상황이라고 지칭합니다. 예를 들면 식물이 태양과 토양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존재가치가 드러나지만 식물이 태양과 토양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는 존재가치가 사라지는 이치입니다. 


상호작용하는 모든 주체는 대상과 분리될 수 없고, 대상은 상황의 특수한 상태입니다. 해바라기와 땅이 있고 다음에 햇볕이 있는데 이 세 가지의 관계를 따로 떨어져 놓고 생각하면 해바라기는 존재의 의미가 있을까요? 해바라기가 햇빛을 안 받고 땅이라는 흙도 없는 가운데 존재하는 해바라기는 존재 자체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해바라기는 항상 햇볕을 받아서 땅에서 영양분을 흡수하는 상황에서 서로 의존하고 의지하는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경험하는 존재입니다. 경험은 이처럼 특정한 상황에 존재하는 유기체가 긴밀한 상호작용을 하는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연속적인 사건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과 눈을 마주치면서 강의를 하는 상황입니다. 제가 강의하는 상황에서 여러분과 상호작용하는 관계를 맺어 가면서 저와 여러분은 가르치고 배우는 경험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질적 특성을 온몸으로 느끼는 감각적 깨달음질성적 사고의 산물입니다


듀이는 경험을 전면에 부각함과 동시에 지적-이론적 사고에 가려진 ‘질성적 사고(Qualitative Thinking)’를 강조합니다. 질성적 사고는 기존의 이성적 사고로 포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첫 대면적 접촉에서 온몸으로 다가온 느낌을 언어화시킬 수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사고 작용입니다. 여행을 갔을 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자연의 위대한 풍광을 만나는 경험을 합니다. 예를 들면 폭포가 떨어지는 장관을 보는 순간 구체적인 표현 이전에 온몸이 반응하면서 순간적으로 드는 생각이 질성적 사고입니다. 모든 사고는 이렇게 질성적 사고가 먼저 다가오고 질성적 사고로 포착된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를 조목조목 따져보는 사고가  이성적 사고이자 반성적 사고입니다. 세계와 접촉할 때 생명체는 오감으로 직접 경험을 하면서 갖게 되는 질적 특성, 즉 질성을 순간적으로 지각하는 사고가 바로 질성적 사고입니다. 질성적 사고는 언어를 동원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특정 상황과 직면했을 때 직감적으로 몸으로 느끼는 감각적 깨달음입니다. 예를 들면 질성적 사고는 놀라운 장면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와우!라는 감탄사처럼 경이로운 놀라움을 표시할 때 관여하는 사고입니다. 질성적 사고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축적한 직간접적 경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어도 그걸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해석할 수 있는 경험적 지식과 체험적 각성이 없다면 무용지물입니다. 질성적 사고는 따라서 오랜 기간 쌓아온 이전의 모든 경험과 훈련의 결과로 느껴지는 상황의 질적 특성을 한순간에 파악하는 총체적 사고입니다. 


“우리 섬의 어른들은, 비록 오늬 죽의 맛에 날카롭지는 못했어도, 소금 그 자체의 맛에는 너나없이 귀신들이었다. 소금 한 알갱이를 입에 넣으면, 섬의 동쪽 염전 소금인지 서쪽 염전 소금인지, 초여름 소금인지 늦가을 소금인지, 어김없이 알아맞혔다(251쪽).”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에 나오는 말입니다. 소금이 만들어진 지역적 특성이 소금 맛에 뱁니다. 어른들은 그런 소금 맛을 입으로 감지하는 질성적 사고 덕분에 맛을 느끼는 순간 소금의 탄생 사연과 배경까지도 알아맞춥니다. 듀이의 경험주의 교육철학을 폭넓게 연구하는 영남대학교 박철용 교수에 따르면 질성적 사고는 살면서 획득된 모든 앎이 들어 있는 마음을 배경으로 몸이 상황을 대면하면서 상황 전체의 감을 포착하는 사고 작용입니다. 이에 반해 이성적 사고나 반성적 사고는 마음으로 와 닿은 사고내용을 중심에 두고 그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사고 작용입니다. 질성적 사고 없이 반성적 사고도 없습니다. 모든 반성적 사고는 질성적 사고로 포착된 흐릿한 이미지나 불분명한 의미망에 대한 애매한 느낌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발휘됩니다. 질성적 사고로 발효된 전체성에 대한 이미지의 의미를 밝혀내려는 탐구과정에서 반성적 사고는 발휘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수동적으로 당하는 경험이 능동적 경험에 연결되면서 깊은 사유가 시작됩니다


듀이는 경험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수동적 경험 또는 일차적 경험(primary experience)과 능동적 경험 또는 이차적 경험(secondary experience)이 그것입니다. 수동적 경험은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당하는 경험(undergoing)입니다. 수동적으로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내가 당하는 경험이므로 당하는 순간 경험의 질성(quality)이 직접적으로 소유(경험)되는 사건이자 그 사건이 왜 발생했는지를 생각해보는 성찰이 거의 따르지 않는 경험입니다. 이에 반해 능동적 경험 또는 이차적 경험은 나의 의지와 의도대로 해보는 경험(trying)입니다. 경험의 주체자가 적극적으로 몸으로 부딪치면서 세상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알아내기 위해 실험(experiment)하면서 우리가 바라는 변화를 얻기 위하여 모종의 조치를 취하는 과정에서 얻는 경험입니다. 당사자가 직접 경험한 것의 의미를 반추하면서 일반화시키면서 우리의 사고가 체계적으로 작용하기 시작하는 경험입니다. 경험 주체자가 자신의 의지대로 조치한 결과를 보고 왜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따져보면서 배우는 경험입니다. 


그렇다면 왜 1차적 경험이 수동적일까요? 예를 들어봅시다. 걸어가는 도중에 휴대폰을 보면서 가다가 갑자기 전봇대를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전봇대를 들이받은 사고는 수동적 경험이자 1차적 경험입니다. 내가 의도해서 전봇대를 들이받은 것이 아니라서 수동적이면서 1차적 경험인 이유가 됩니다. 이에 반해 2차적 경험은 나도 모르게 전봇대를 들이받았던 이차적 경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만히 생각해 보는 경험입니다. 수동적으로 당했던 경험이 나의 능동적 사고로 다시 한번 경험을 반추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경험이 바로 2차적 경험입니다. 듀이는 모든 경험을 수동적 경험과 능동적 경험의 절묘한 조합, 몸과 마음의 유기적 결합과정을 설명합니다. 1차적 경험은 주로 오감이 열린 몸으로 경험하는 것이고 2차적 경험은 몸으로 겪은 경험의 의미를 머리로 생각하며 구체적인 상황에서 겪은 독특한 가치를 추상화시켜 보편적인 법칙이나 원리로 만들어가는 경험입니다. 성찰(능동적 경험) 없는 수동적 경험은 배움이 일어나지 않는 사고의 연속이며, 수동적 경험 없는 능동적 경험은 단조로운 일상의 반복에 그칠 수 있습니다. 



상호작용하는 공간적 경험이 시간적으로 계속 이어지면서 사람은 성장합니다

     

듀이는 이런 경험의 원리를 두 가지로 얘기하는데, 여기에 한 가지 원리를 덧붙여 세 가지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원리는 상호작용입니다. 모든 경험은 그 자체가 상호작용 아닌가요, 상호작용? 두 번째 원리는 이 상호작용이 계속 이어져서 하나의 경험이 과거, 현재, 미래로 이렇게 계속 쌓아져 시간적으로 연결되어 나가는 계속성의 원리입니다.  마지막으로 경험은 특정 공간에서 상호작용하면서 시간적으로 계속되는 경험을 통해서 사람은 성장합니다. 상호작용 원리가 공간에서 횡적으로 경험이 일어나는 관계를 지칭한다면 계속성은 시간적으로 발생하는 경험이 종적으로 엮여서 일정한 체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장의 원리는 시공간적으로 발생하는 경험을 재구성해서 인간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경험의 원리입니다.


첫 번째 경험의 원리인 상호작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상호작용이 존재의 일차적인 사실이요 가장 근본적인 존재의 양상이다.” 듀이가 《철학의 개조(Reconstruction in philosophy)》라는 책에서 한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나 혼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상호작용을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우리의 관계론에 의하면 삼라만상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a Becoming)입니다. 칸트의 “물物 자체”(ding an sich)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배타적이고 독립적인 물 자체라는 생각은 순전히 관념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러한 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사물은 그것이 물려받고 있는 그리고 그것이 미치고 있는 영향의 합으로서, 그것이 맺고 있는 전후방 연쇄(lok-age)의 총화라 할 수 있습니다.(475쪽) 따라서 우리의 인식이란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의 극히 일부분에 갇혀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475-476쪽). 신영복의 《강의》에 나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책을 쓸 때, 책 쓰기에 관련된 도구나 환경이 일정한 관계 속에서 어떤 상호작용이 일어날까요? 책을 쓰기 위해서 생각했던 내용을 키보드를 통해 입력하면 컴퓨터 스크린에 내가 의도한 문장이 나타나죠? 스크린에 나타나는 문장이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지에 따라서 내가 쓴 문장이 나로 하여금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고 다음 문장을 어떻게 쓸지 구상하게 만듭니다. 제가 쓴 문장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가 본래 생각했던 문장과는 전혀 다르게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의 글쓰기 능력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일까와 같은 질문과 성찰을 통해서 끊임없이 글 쓰는 과정에서 글쓰기에 동원되는 도구와 환경, 그리고 쓴 글의 결과가 상호작용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다른 말로 얘기하면 이론 다양한 경험들이 특정한 공간에서 횡적으로 연결되는 경험의 원리가 상호작용입니다. 이런 상호작용의 경험은 한순간에 그치는 이벤트가 아니라 끝없이 이어집니다.



모든 경험은 과거에 겪었던 경험과 연결되는 동시에 미래에 직면할 경험과도 연결되어서 종적인 시간축을 따라 하나의 경험으로 통합됩니다. 지금 책을 쓰는 경험도 오늘만 하는 경험이 아니라 어제 썼던 경험이 오늘의 경험에 영향을 주고 오늘 어떤 내용을 무슨 생각을 하면서 썼는지에 따라서 이걸 기반으로 내일 쓰는 책의 방향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오늘 내가 했던 경험이 내일 하는 경험과 또 연결될 때.. 과거의 경험이 지금 내가 하고 경험과 연결 되가지고 이것이 갖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돼요. 그러면 오늘을 경험했던 게 내일 경험한 것과 또 연결돼요. 자, 그러면 경험이 하나로 딱 해서 끝나는 게 아니라 제가 보기에 모든 경험은 이전 경험의 연장선상에서 성찰하고 반추해가지고 그걸 토대로 해서 나름 경험을 하게 되고 오늘 했던 경험을 기반으로 해서 또 내일도 하는 경험이 계속 연결되는 계속성의 원리에 접목됩니다. 


상호작용이 경험을 횡적으로 연결되는 거라고 한다면 시간 속으로 계속 흘러가는 경험은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종적으로 연결되는 경험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문재 시인의 ‘소금창고’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제가 옛날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가 시간이 흐를수록 잊혀야 하는데 과거의 추억이 자꾸 현재로 소환되지 않습니까. 새로운 여자 친구를 사귀려고 하는데 이 여자 친구랑 자꾸 비교가 되고 그 여자 친구와 만났던 아름다운 추억이 과거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데 자꾸 저한테 다가오잖아요. 과거는 흘러간 게 아니라 과거에 했던 경험이 현재의 경험과 연결되는  경험의 계속성의 원리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수평적 상호작용 경험이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종적으로 다시 연결됩니다. 씨줄(경험의 횡적 연결)과 날줄(경험의 종적 연결)이 저마의 얼룩과 무늬를 만들어가면서 한 사람의 경험이 성장과 지속적으로 연결된다는 게 듀이의 경험 철학의 골자입니다. 한 사람의 인간적 면모와 정체성은 결국 그 사람이 어떤 경험을 씨줄과 날줄로 직조해왔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얼굴을 보면 여러분이 어떤 경험을 해왔는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여러분의 ‘얼’ 속에 경험했던 흔적이 ‘굴’로 파여서 생긴 결과가 여러분의 얼굴이 된 겁니다. 한 사람의 성장은 뭐가 만드는 거냐? 경험이 만들어가는 거예요. 경험이 없으면 사람은  성장할 수 없다는 게 듀이가 생각하는 경험의 세 번째 원리인 성장의 원리입니다. 



경험 없는 사고(思考)는 사고(事故)이며사고(思考없는 경험은 위험합니다


“영어로 ‘경험’을 뜻하는 experience는 라틴어로 ‘실험을 뜻하는 experimentia에서 유래했으며 라틴어로 ‘위험’을 뜻하는 periculum과도 연관이 있다(p.350).” 로먼 크르즈나릭의 《인생을 짧다 카르페 디엠》 중에 나오는 말입니다. 모든 경험이 다 위험하지는 않지만 사실은 위험한 경험이 굉장히 많잖아요. 일본의 한 철도회사가 이런 광고 카피를 만들었어요. “모험이 부족하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없다.” 가장 위대하면서 안전한 보험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감행하면서 경험했던 모든 체험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이 다 의미 있는 배움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경험이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반드시 거기에는 비록 불완전한 것이나마 사고가 반드시 개입되어야 한다”(227쪽). 듀이도 《민주주의와 교육》에서 경험과 사고의 연결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경험 없는 사고(思考)는 사고(事故)이며, 사고(思考) 없는 경험은 위험합니다. 듀이가 말하는 경험에는 이미 사고 작용과 긴밀한 연관성을 띠고 있습니다. 


“경험과 실천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현장성(現場性)입니다. 그리고 모든 현장은 구체적이고 조건적이며 우연적입니다. 한 마디로 특수한 것입니다. 따라서 경험지(經驗知)는 보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학(學)이 보편적인 것(generalism) 임에 비하여 사(思)는 특수한 것(specialism)입니다. 따라서 논어 위정 편에 나오는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의 의미는 현실적 조건이 사상(捨象)된 보편주의적 이론은 현실에 어둡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는 특수한 경험적 지식을 보편화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뜻이 됩니다”(181쪽). 신영복의 《강의》에 나오는 말입니다.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은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말이며,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는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이 또한 위태롭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배움과 생각을 듀이 방식으로 해석하면 배움은 경험을 통한 배움이며 생각은 경험의 의미를 깊이 성찰하는 반성적 사고를 지칭합니다.


책상에서 배우기만 하고 직접 현장에 나가서 실행을 하면서 경험해보고 생각하지 않으면 위험한 난국에 빠질 수 있고 경험은 굉장히 많이 하는데 그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지금까지 공부해온 깨달음과 연결시켜 성찰하고 관조해보지 않으면 그것도 또 위험하다는 겁니다. 경험적 지식은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일리 있는 지식입니다. 일리 있는 지식은 또 다른 상황에 폭넓게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그 상황에서 당사자가 경험하며 배운 깨달음은 일리 있는 교훈입니다. 이런 독특한 깨달음을 깊이 성찰하면서 보편적 진리로 통용될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리면 일리는 이제 진리로 승격하는 셈입니다. 물론 한시적으로 의미 있는 가치를 발휘할 수도 있지만 경험적 일리가 보편적 진리로 등극하는 순간, 지식은 지금 여기를 떠나 시공을 초월하는 깨달음의 지혜로 공명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하나의 경험에는 한 사람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듀이의 경험 철학을 초반에 잠깐 언급했던 하나의 경험에 비추어 통합적으로 재정리를 해보면 경험은 역시 부분적으로 일어나는 단편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삶 속에서 매 순간 일어나는 통합적인 배움의 터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처럼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교수는 매 학기마다 다른 강좌가 열리고 학생들과 만나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한 학기 수업을 진행합니다. 수업을 진행하는 저에게도 하나의 경험이지만 수업을 들으면서 다양한 깨달음을 얻는 학생들에게도 하나의 경험입니다. 한 학기 동안 돌이켜 봤는데, 강의를 진행했던 교수는 물론이고 학생들도 정말 힘든 한 학기였는데 돌이켜 보니까 생각나는 추억도 많고 기존 통념을 통렬하게 깨부수는 재미있는 수업이었다고 느끼는 이런 경험이 바로 하나의 경험입니다. 그런데 수업 듣다가 수업이 너무 어려울 것 같고 숙제도 많을 것 같아서 중도 포기한 학생들에게는 하나의 경험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 셈입니다. 이런 경험은 하나의 경험이 아니고 불완전한 경험입니다.


하나의 경험 속에는 사람마다 갖고 있는 느낌과 그때 깨달았던 각성 사건, 다양한 사람과 만나서 상호작용했던 경험이 통합적으로 연결되는 깨달음의 보고가 있습니다. 하나의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그 경험 속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성찰했던 추억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창의성의 데이터 베이스에 축적되면서 또 다른 하나의 경험과 유기적으로 연결됨으로써 이전과 다른 연상 능력을 갖게 됩니다. 일정한 기간 동안 이루어진 삶의 경험이 하나의 단위로 묶일 수 있을 정도로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있고, 형식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계속성을 유지할 때 우리의 경험은 ‘oo 경험’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하나의 경험이 된다.  하나의 경험은 어떤 경험 내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부분들이 연속성을 가지고 연결되어 “경험의 최종 결과 속으로 통합되어 하나의 통일된 전체를 이루는 경험이다”(88쪽). 듀이의 《경험으로서의 예술 1》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어서 같은 책에 하나의 경험이 갖고 있는 통합성과 통일성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하나의 경험이 성립하려면 경험의 흐름 전체를 하나로 보게 해주는 통합성이 있어야 하며, 이러한 통합성이 존재하려면 하나의 경험을 구성하는 다양한 구성요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성질 즉 통일된 질성이 있어야 한다”(89쪽).  “그것은 힘들었지만 매우 유익한 하나의 경험이었어!



자, 하나의 경험이 무엇인지 그 장자의 천도 편(天道篇)에 나오는 이야기를 토대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춘추시대 제나라의 환공(桓公)이 책을 읽고 있었다. 윤편(輪扁)이 마루아래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물었다. “감히 묻자 온데, 왕이 읽고 계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환공은 윤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성현의 말씀이네.” 윤편은 다시 물었다. “그 성현이 살아계십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이미 돌아가셨네.” 그러자 윤편이 환공을 바라다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왕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이군요.” 이 말을 들은 환공이 버럭 화를 내면서 말했다. “과인이 책을 읽고 있는데 수레바퀴나 만드는 놈이 감히 시비를 건단 말이냐. 합당한 설명을 한다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윤편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제가 하는 일의 경험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많이 깎으면 굴대가 헐렁해지고 덜 깎으면 너무 조입니다. 그래서 더도 덜도 아니게 정확하게 깎는 것은 손짐작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뿐 입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요령은 자식에게도 가르치지 못하고 자식도 저에게 배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칠십이 되도록 이렇게 손수 수레바퀴를 만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옛 성인들도 자기의 생각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 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읽으시는 것이 옛 성인의 찌꺼기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수레바퀴를 절묘한 기술은 절대로 언어화시켜 직접 전달하거나 책으로 쓸 수 없습니다. 책을 써서 언어화시키는 순간 죽은 지식으로 전락합니다. 그러니까 환공이 읽는 책은 죽은 지식의 보고를 읽고 있는 것입니다. 윤편이 온몸으로 배우면서 겪은 수레바퀴 깎는 기술적 경험은 다양한 요소들이 시공간적으로 엮이고 섞이면서 하나의 총체적인 경험인 것입니다. 하나의 경험 속에는 윤편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고 형언할 수 없는 예술적 경지가 담겨 있습니다.


도전은 시작할 때의 나와 돌아올 때의 내가 손잡고 돌아오는 동행입니다 


제가 경험했던 하나의 경험 사례를 말씀드려보겠습니다. 2015년도에 탄자니아에 있는 아프리카의 지붕, 킬리만자로 정상에 등정한 경험이 있습니다. 실제로 가보니까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왔습니다. 8박 9일 동안 인천 공항을 출발해서 탄자니아 공항에 내리는 순간 다가오는 아프리카의 작렬하는 폭염의 열기가 강렬하게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느낌이었습니다. 공항에 마중 나온 현지 가이드 SUV 차에 탑승해서 오늘 묵을 호텔로 가는 여정에서 들어오는 탄자니아의 풍경은 야생의 아프리카의 단면을 보는 듯했습니다. 3000m를 넘어서면서 서서히 고산증세가 오면서 4000 정도에 으르기까지는 쉽지 않은 고산증세를 견디며 사투를 벌였습니다. 


또 한 가지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비가 오면서 오후 늦은 시간으로 갈수록 기온이 떨어지는데 아프리카 날씨가 춥다는 걸 상상도 못 하는 체험이었습니다. 건기에도 비가 올 수 있다는 것, 7월의 아프리카도 추울 수 있다는 것은 경험하기 전까지 몰랐던 사실입니다. 삶은 각본대로 풀리지 않고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4000 고도에서 고산 적응 훈련을 위해 하루 정도 묵으면서 산지 적응 훈련이 그나만 몸을 산이 요구하는 모드로 전환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정상 등반을 위한 마지막 베이스캠프인 4700 고지에 일찍 도착한 다음 수면을 취하고 밤 11시에 정상을 향한 등반이 시작됩니다. 그래야 8시간 정도 사투 끝에 올라가 정상에서 감동적인 일출을 볼 수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고단한 산행길은 끝없이 올라가도 끝은 보이지 않고 기력은 바닥을 떨어지는 위험한 난국에 처합니다. 세르파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정상에 올라가 말로만 듣던 킬리만자로 정상에서 일출을 감동적으로 바라봅니다.



몸의 한계를 거부하는 다짐과 각오는 용기가 아니라 만용입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와일드(Wild)’를 보면 “몸이 그대를 거부하면 몸을 초월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으면 마음도 결국 두 손을 들게 됩니다. 몸의 한계가 마음의 한계입니다. 절체절명의 상황은 대부분 몸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찾아옵니다. 마음으로 몸을 통제하려고 해도 몸이 말을 들지 않으면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몸은 마음이 거주하는 우주라는 사실을 절절히 깨달은 값진 산행체험입니다. 우주가 망가지면 그 속에 살아가는 마음도 같이 망가진다는 사실입니다. 킬리만자로 등반은 함께여서 가능했습니다. 등반(登攀)은 언제나 동반(同伴)이라는 사실은 킬리만자로 정상에 오르기까지 내내 제가 몸으로 새긴 교훈입니다. 혼자 정상에 오르는 외로운 여정이 아닙니다. 무거운 짐을 옮겨주는 포터, 음식을 마련해주는 요리사, 함께 길을 가며 안내하는 가이드와 셰르파 덕분에 힘든 산행도 즐겁게 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무엇보다 함께 킬리만자로로 떠난 동료들 덕분에 어려운 정상 등반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목적지로 향하는 희망의 연대가 작은 성취의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도전은 자기 변신의 과정입니다. 시작과 끝이 다른 나를 만나게 됩니다. 도전을 시작할 때의 나와 도전을 마칠 때의 나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도전은 시작할 때의 나와 돌아올 때의 내가 손잡고 돌아오는 동행입니다. 그래서 떠남은 언제나 만남입니다. 자신의 한계는 직접 한계에 부딪혀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우여곡절과 절치부심 끝에 체험한 킬리만자로 등반은 평생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완벽한 경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산악인이 말했듯 ‘등반의 완성은 올라가는 데 있지 않고 살아서 내려오는 데’ 있습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기에 감사합니다. 현재를 떠난 사람만이 낯선 마주침을 즐길 수 있으며, 지금의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먼동이 터오자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올라가는 길이 꽤나 험난하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만약 처음부터 정상이 보였다면 이런 도전을 감행했을까요. 우리는 저마다 희망을 움켜쥐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길을 떠났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예측불허의 세계, 앞이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절망이 희망의 싹을 틔우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출발 후 약 9시간의 사투 끝에 해발 5865m의 킬리만자로 길맨 포인트에 올랐습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를 얼싸안고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힘든 순간 뒤에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 찾아옵니다. 제대로 먹은 게 없어서 조금만 걸으면 힘이 부족해서 넘어지기 일쑤였습니다. 가파른 경사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넘어지기도 했지만 함께한 동료들과 가이드 덕분에 한계를 극복하고 여기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킬리만자로에 오르는 길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도전보다 힘들었지만 돌이켜 보면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하나의 경험이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멋진 도전이자 감동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정상 등반 인증 일련번호를 받고 보니 10만 4446번이었습니다. 정상 등반 후에 킬리만자로 5 행시를 써봤습니다. 


킬리(Kill理) - 기존 이치(理致)를 다시 의문시하고 반추하며

만(萬) - 만 가지 지혜로 이르는 방법을 찾아보며

자(自) - 자기(自己)의 존재 이유(理由)와 자유(自由)로운 삶을 추구하다 발견한 

로(路) - 노선(路線), 그 길이 바로 나답게 살아가는 삶

     


한계는 한 게 없는 사람들의 핑계에 불과합니다 

     

하산하는 여정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올라갔다가 정말 죽을 뻔하고 내려오면서 고은 시인의 ‘그 꽃’이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못 본/그 꽃.” 이 시가 잘못됐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킬리만자로 정상에서 내려올 때 너무 졸렸습니다. 잠을 거의 못 자고 밤 11시에 등반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내려갈 때 너무 졸린 나머지 주변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예요.  “내려갈 때도 못 보았네/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아 내려갈 때도 못 볼 수 있다는 걸 정상에서 내려오면서 몸으로 깨달았습니다.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문제의식과 상상력을 발휘해서 쓰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시상이 떠오를 수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 후에도 제주도 100km 울트라 마라톤에서 완벽한 하나의 체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마라톤의 목적은 우승하는 것도 있지만 달리면서 자신과 대화하면서 몸이 힘든 상황에서 생각과 대화하면서 깨닫는 각성 체험이 목적일 수도 있습니다. 앞만 보고 달리는 속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세상을 넓게 볼 수 있는 각도가 더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속도가 빨라지면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듭니다. 


2012년 사하라 울트라 마라톤 도전은 결국 실패했지만 역시 하나의 완벽한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120Km 지점까지는 3일 동안은 하루에 40Km씩 잘 달렸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전날 저녁을 잘 먹지 못한 상태에서 힘든 레이슬 펼치다 만난 모래 언덕은 나에게 커다란 장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힘겹게 오르다 굴러 떨어지면서 죽을 고비 앞에 사투를 벌이다 결국 레이스를 포기하고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체험적 지혜를 깨닫게 해 준 사하라 사막 마라톤은 나에게 진짜 공부는 몸으로 하는 것임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한계는 한계에 도전해봐야 몸으로 알 수 있다는 깨달음,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절대로 쓰지 말라는 소중한 명언을 새롭게 창조한 위대한 체험적 깨달음이었습니다. 한계는 한계에 몸으로 도전할 때 알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한계는 한 게 없는 사람의 핑계에 불과합니다. 그런 한계 상황에서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는 명언을 믿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다 실제로 죽을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공부는 책상에 앉아서 머리로 이해하는 정신노동이 아닙니다. 오히려 공부는 좌충우돌하며 몸으로 느끼는 체험적 깨달음의 과정입니다. 공부는 견디기 어려운 역경을 색다른 경력으로 만드는 고난 극복과정입니다. 몸으로 깨달은 지혜는 직접 가르칠 수 없습니다. 오로지 당사자의 몸이 따르는 고통 체험을 통해서만이 체득될 수 있습니다. 듀이가 “경험적 계속적 재구성”이 성장이라고 생각한 이유와 일맥상통합니다.



책 쓰기는 안간힘을 쓰면서 삶을 담아내는 애쓰기 경험입니다 


듀이가 얘기하는 하나의 경험은 제가 책을 쓰는 과정에 대입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90여 권 책을 쓰거나 번역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꾸 물어보는 질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책을 빨리 쓸 수 있는지 그 비결이 궁금하다는 겁니다. 교수님은 혹시 책을 쓰는 공장을 차리시지 않았냐고. 또는 조교들한테 책을 쓰는 걸 시키지 않는지 등 책 쓰는 속도에 대해 다양한 질문을 합니다. SBS 생활의 달인에 출연해서 책 쓰기 비결이라도 소개하고 싶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다른 달인과 다르게 책 쓰기 달인은 현장에서 시범을 보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생활의 달인에 출연해서 책 쓰기 비법을 언어화시켜 직접 전달할 수 없는 하나의 체험입니다. 


책을 쓰기 전에 여러 가지 고민을 하면서 책의 전반적인 이미지를 구상합니다. 아직 구체적으로 어떤 책을 낼지 이미지가 잡히지 않은 오리무중(五里霧中) 상태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책 쓰기는 애쓰기다》라는 책을 쓰기 시작했을 때 우선 책 쓰기에 관한 다양한 책을 보면서 기존 책과 어떤 점에서 내 책은 달라야 하는지를 생각합니다. 기존 책이 갖고 있는 한계나 문제점도 생각하면서 책 쓰기에 관한 나의 문제의식과 목적의식을 정립해나갑니다. 아 이런 책을 쓰면 좋겠다고 어려풋하게나마 이미지를 그리지만 여전히 분명한 생각으로 정립되지 않는 상태에서 책의 전반적인 방향이나 성격을 지속적으로 그려나간다. 기존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책 쓰기 관련 책들은 책을 쓰는 방법과 기술을 가르치는데 과연 그런 방법으로 책 쓰고 싶은 독자들에게 올바른 책 쓰기 과정을 안내해줄 수 있을까가 저의 심각한 문제의식이었습니다. 진 짜 책은 삶으로 써야 된다는 생각, 왜냐하면 글은 그 사람의 삶이고 삶이 곧 그 사람의 글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올바른 글을 쓰려면, 어제와 다른 책을 쓰려면 어제와 다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된다는 게 저의 문제의식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삶을 바꾸지 않으면 글도 책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름 속에 가져져 있던 흐릿한 이미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면서 제목도 어느 정도 콘셉트가 잡히고 목차도 대강의 얼개가 짜이기 시작합니다. 더불어 목차별 세부 내용도 줄기와 가지를 뻗어가면서 망망대해 위해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맸던 초기 상태와는 현격하게 다른 경험의 질적 성숙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완벽한 방법을 구체화 한 다음 시작해서 생긴 일이 아니고 시작해서 하다 보면 더 좋은 방법이 부각된 결과입니다.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맴돌던 복잡하게 엀힌 실타래도 어느 정도 풀리기 시작하고 한 문장을 쓰면 다음 문장을 물고 오면서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글짓기가 이어지는 연상작용도 발생합니다. 생각해서 문장을 쓰는 게 아니라 쓰다 보면 생각이 생기는 놀라운 경험입니다. 이 상태는 여러 가지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저마다의 장기를 자랑하면서 서로 경쟁하고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취사선택되고 수면 아래 잠자던 아이디어가 다시 급부상하면서 판도 변화가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상태입니다. 



안갯속에서 뿌연 모습으로 갇혀 있던 책의 이미지는 어느 사이 제목과 목차, 그리고 책의 전반적인 내용이 짜임새 있게 정리되어갑니다. 책을 쓰기 시작한 초반에는 막막했던 책의 아웃풋 이미지들이 서서히 구현되기 시작됩니다. 놀랍게도 책이 어느 정도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꿈에 그리던 책의 완성된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우여곡절과 파란만장한 방황 끝에 잡은 방향으로 달려온 책 쓰기의 과정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면서 생각에 머물렀던 책이 한 권의 책으로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동안의 사투를 상쇄하고도 남는 성취감이 밀려옵니다. 이제 최종 원고를 편집자에게 넘기는 순간 저자의 저술 권력은 편집자의 편집 권력으로 넘어가면서 다양한 갈등과 협상이 이루어집니다. 이때부터 저자와 편집자 간에 생각하는 책의 콘셉트와 방향이 암운(暗雲)을 달리하면서 치열한 권력다툼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자마다 철학이 다르겠지만 저술이 끝나면 그때부터 편집자의 편집 방향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긴장과 갈등이 오고 가지만 저의 입장은 전적으로 편집자에게 책의 콘셉트와 방향을 조정하고 편집할  전권을 주는 편입니다. 저자는 가급적 많은 내용을 전달하려는 욕심이 앞서지만 편집자는 독자 입장에서 냉철하게 판단하고 고객 입장에서 독자가 선호하는 방향으로 책의 콘셉트와 방향을 시의적절하게 조정하고 조율하는 전문가임을 인정할 때 저술과 편집의 갈등은 생각보다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제 오월동주의 긴장과 갈등이 밤잠을 설치면서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다 오색찬란(五色燦爛)한 대단원의 결말을 짓기 일보 직전에 도달합니다. 한 권의 책을 완성하는 하나의 경험이 완결되는 순간은 출간된 책이 저자 앞으로 배달되어 도착했을 때 따끈따끈한 책의 물성(物性)을 손으로 만져보는 순간입니다, 한 권의 책을 완성해서 세상에 출간되는 순간은 별 볼일 없는 아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참으로 긴장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어설픈 세상과의 첫 만남이지만 그 만남이 새로운 도약으로 이어지는 비상한 출발점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사유는 질성적 사고와 이성적 사고가 만들어낸 합작품입니다 


책을 출간하는 하나의 경험을 저는 무려 지금 90번을 넘게 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다산 정약용이 아니라 ‘출산드라’라고 사람들이 새로운 별명을 지어 줬습니다. 듀이가 이 하나의 경험을 통해서 강조하고자 하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질성적 사고입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질성적 사고는 어떤 상황이나 환경 또는 사람이나 사물과 첫 대면을 했을 때 이성적 사고가 발동되기 전에 온몸으로 느끼는 첫 반응입니다. 제가 사하라 사막에서 펼쳐졌던 울트라 마라톤 도전에서 정말 감동적인 경험을 한 것 중에 한 장면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가장 강렬하게 기억나는 게 일출과 일몰 장면입니다. 아침 7시에 출발하려면 해가 뜨기 전 일어나 아침을 준비해서 먹고 하루 40km 달리기 여정을 준비해야 합니다. 레이스를 준비하는 와중에 맞이하는 일출은 모래사막을 붉게 태우는 감동적인 용광로를 방불케 합니다.  일출보다 더욱 감동적인 장면은 고단한 몸을 추스르며 40Km를 달리는 와중에 맞이하는 저녁노을의 일몰 장면입니다. 서산에 반쯤 얼굴을 내밀고 고단한 하루와 작별을 고하는 태양은 순간적으로 그 모습을 감춥니다. 하늘과 모래사장 사이를 끝없이 잇는 지평선은 어둠과 함께 사라집니다. 아름다운 일몰 장관을 보면서 언어적 번역을 거부하는 전율이 온몸을 파고들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일몰로 불태우다 순식간에 사라진 사하라 사막의 풍광은 한 마디로 얘기하면 ‘와우’라는 감탄사와 함께 내 몸에 각인된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와우’라는 감탄사  안에 구체적인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다양한 생각들이 숨어 있습니다. 언어를 통하지 않고 직접 내 몸으로 다가오며 사물이나 현상의 질적 속성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작동하는 첫 번째 사고가 질성적 사고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갑자기 터지는 기쁨이나 슬픔, 경이로운 놀람이나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직면하는 당혹감은 깊은 생각 이전에 몸이 감각적으로 대응해서 터져 나오는 반응입니다.  질성적 사고는 특정한 이론적 관점에 비추어 논리적으로 사유할 틈도 없이 한눈에 반해버린 느낌이다. 물론 질성적 사고의 근저에는 그동안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내 몸에 축적된 교양의 두께(references)가 총체적으로 작용하면서 보여주는 감각적 반응입니다. 뭔가를 깊이 사유하기도 전에 그동안 직간접적 경험으로 갈고닦은 다양한 사유의 덩어리들이 일시에 반응하면서 순식간에 내 몸으로 받아들인 감각적 경험의 총합으로 일어나는 사고입니다. 질성적 사고로 포착된 느낌이나 직관적 깨달음이 사라지기 전에 그 장면에서 내가 무엇을 구체적으로 느끼고 깨달았는지를 기록합니다. 당시의 상황에서 느꼈던 기억과 느낌과 이미지를 되살려가면서 하나씩 하나씩 끄집어내서 기록할 때 관여하는 사고가 바로 이성적 사고입니다. 질성적 사고만으로는 우리가 겪는 다양한 감각적 경험을 나의 것으로 체화시킬 수 없습니다. 질성적 사고로 포착된 감각적 느낌과 직관적 깨달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따져보면서 그것의 의미와 시사점을 생각해보는 사고가 바로 이성적 사고입니다. 



“질성적 사고는 살면서 획득된 모든 앎이 들어 있는 마음을 배경으로 몸이 상황을 대면하면서 상황 전체의 감을 포착하는 사고 작용이라면, 지적 사고는 마음속에 있는 지적 사고의 내용이 중심이 되어 상황 전체의 감에 대한 설명과 이해를 추구하는 사고 작용이다”(박철용, 2011). 질성적 사고 없이 지적 사고나 이성적 사고도 없습니다. 모든 이성적 사고는 질성적 사고로 포착된 흐릿한 이미지나 불분명한 의미망에 대한 애매한 느낌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발휘됩니다. 질성적 사고로 발효된 사물이나 현상을 매개로 이루어진 경험의 전체 이미지나 느낌의 의미를 밝혀내려는 탐구과정에서 이성적 사고가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질성적 사고와 이성적 사고는 1차적 경험과 2차적 경험에 각각 상응합니다. 즉 1차적 경험은 질성적 사고로 포착되며 이차적 경험은 이성적 사고를 통해 그 의미가 파악됩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갑자기 직면하는 수동적인 경험(1차적 경험)이 어떤 의미인지를 반추해보고 생각해보는 능동적 경험(2차적 경험)이 이성적 사고를 통해 성장의 동력인 깨달음과 교훈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게 아니라 경험을 반성하고 성찰할 때 배운다고 듀이도 말합니다. 경험을 돌이켜 생각해보며 그것이 나에게 던져주는 의미와 시사점이 무엇인지를 따져 묻는 이성적 사고 또는 반성적 사고야말로 경험에서 배움의 포인트를 끄집어내는 원동력입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거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 그때 우리는 조금 변한다.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176쪽).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나오는 말입니다. 경험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며 그 삶과 이루어지는 다양한 경험 속에서 우리는 배우고 익히며 깨달음을 얻고 그런 깨달음이 어제의 나와 다른 제3의 나로 변신시켜 주는 성장의 발판이 됩니다. 


경험은 글을 잘 쓰는 모든 이들의 안주인입니다 


EBS 지식채널 e 영상 중에 ‘경험은 안주인이다’라는 동영상이 있습니다. 여기에 도입부에 보면 로마시대 때 키케로가 이런 말을 해요. “세상이 타락했다. 잡것들이 너 나할 것 없이 책을 내려고 한다.” 이 영상에는 몇 번의 반전이 나옵니다. 세상을 타락으로 이끄는 잡것들의 사례를 하나씩 보여줍니다. 1819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13세에 학교를 중단, 상점의 잔심부름, 농장일 등을 하다가 22세에 포경선의 선원이 되어 남태평양으로 떠난다. 그가 바로 포경선의 체험으로 소설 《백경》을 쓴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입니다. 1883년 7월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나 죽기 2년 전까지 14년 동안 보험국의 관리로 근무했던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는 거대한 조직 속에서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변신》과 《성》 등의 작품을 통해 그렸습니다. 1804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태어나 35세 우체국장이 되려다 실패하고 대신 세관에서 지루한 일상을 보내던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은 세관의 해묵은 서류철에서 소설《주홍글씨》를 창작합니다. 1812년 영국 포츠머스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감옥에 갔던 12세 무렵부터 공장에 다니면서 불우한 아동 노동 시절을 보냈던 찰스 디킨스(Charles John Huffam Dickens)는 어린 시절의 경험 덕분에 《올리버 트위스트》라는 역작을 탄생시킵니다. 그래서 “경험은 글을 잘 쓰는 모든 이들의 안주인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언입니다. 지식채널 동영상 e는 마지막 반전을 보여주면서 짧은 영상이지만 깊은 교훈을 던져줍니다. 잡것들=작가들이라는 공식을 보여줍니다. 잡것들이 아니면 누가 작가가 되랴! 잡다한 경험을 반추하며 거기서 작가적 상상력을 건져 올린 감동적인 사례들입니다.



잡다한 경험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그것이 어떤 배움의 기반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사람들에게 교훈을 던져줍니다. 경험 기반 사유가 농축되어 작가적 상상력을 자극할 때 독자를 감동시키는 작품이 탄생합니다. 듀이식으로 말하면 1차적 경험과 2차적 경험에 대해  질성적 사고와 이성적 사고가 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독자를 빠져들게 만드는 감동적인 스토리 구조가 탄생합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매 순간 경험하는 잡다한 경험을 그냥 흘려보내지 말고 경험으로 배울 수 있는 교훈을 기록하면서 흔적을 축적하면 어느 순간 하나의 위대한 작품으로 탄생하는 기적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통찰이 행동으로 이어지기보다 행동이 통찰로 이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137쪽). 칩 히스와 댄 히스의 《순간의 힘》에 나오는 말입니다. 직접 몸으로 부딪치다 보면 앉아서 고민하던 문제도 의외로 쉽게 풀립니다. 시작해보기도 전에 어떻게 할 것인지를 장기간 고민하면서 계획을 세우고 완벽하게 준비하려다 완벽하게 시작도 못하는 경험을 많이 합니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되면 우선 시작하면 색다른 경험의 스승이 나탑니다. 그때 놀라운 통찰력도 부각되고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듀이가 말하는 경험의 교육적 가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엘렌 코트가 쓴 초보자에게 주는 조언이라는 시의 일부로 이 장을 마칩니다. “완벽주의자가 되려 하지 말고 경험주의자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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