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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예측불허의 불안한 세계로
이끄는 불편한 자극?

깊은 절망 뒤에 뜻깊은 희망을 맞이하기 위한 철학적 여행으로의 초대

철학은 예측불허의 불안한 세계로 이끄는 불편한 자극입니다

깊은 절망 뒤에 뜻깊은 희망을 맞이하기 위한 철학적 여행으로의 초대



“세상이 나를 어떤 눈으로 볼지 모른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나는 어린아이와 같다. 나는 바닷가 모래밭에서 더 매끈하게 닦인 조약돌이나 더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아 주우며 놀지만 거대한 진리의 바다는 온전한 미지로 내 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다.”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의 말입니다. 진리의 바다에서 오늘도 미지로 남아 있는 세계를 저마다의 독특한 관점으로 탐구하는 과학자와 철학자가 밤잠을 설치며 고뇌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철들지 않는 호기심과 발견적 열정으로 진리의 바다에서 오늘도 조개껍데기 속에 담긴 철학적 통찰을 발굴해내려는 철학자 12명을 소환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저마다의 문제의식으로 해소되지 않은 문제의식과 위기의식을 해소하기 위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다르게 살아가면서 다르게 생각했던 철학자들입니다. 모든 철학자는 이전 철학자의 사유체계가 지니고 있는 태생적 한계와 문제점에 대한 심각한 문제의식을 품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고뇌를 거듭하며 자기 언어로 이전과 다른 사유체계를 구축하는 사람들입니다. 


철학자는 저마다 고유한 문제의식을 풀어낼 독창적인 개념을 창조합니다. 우리에게 철학이 어렵게 다가오는 이유는 철학자의 문제의식을 자기만의 언어로 잉태시킨 고유한 철학적 개념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기존 개념으로 설명이 불가능하거나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에 자신의 철학적 문제의식을 논리적으로 해결하는데 필요한 사유의 흔적을 농축시켜 새로운 개념을 창조합니다. 철학자마다 철학적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는 개념을 창조하는데 그런 개념으로 자신의 사유체계를 구축합니다. 꿀벌은 밀랍으로 집을 짓지만 사람은 개념으로 집을 짓습니다. 니체의 말입니다. 내가 어떤 개념으로 집을 짓는지에 따라 내가 살아가는 집이 바뀝니다. 그 집의 주인은 자신의 사유체계를 건축하는 데 사용한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철학 해설자가 아니라 철학 실천자로 살기 위해 철학 공부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합니다. 내가 사용하는 개념만큼 세상은 보입니다. 내가 사용하는 ‘개념’을 바꾸지 않으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바뀌지 않습니다. 세상을 다르게 보고 봤던 세상을 이전과 다르게 정리하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이전에 몰랐던 개념을 습득해야 합니다. 또는 내가 알고 있는 기존 개념을 다른 의미를 부여해서 재개념화 시키는 노력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우리가 철학을 공부하는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도 개념을 배우고 익히기 위해서입니다.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무수한 상념들이 일정한 논리체계를 띠고 단순하게 정리되기 위해서는 개념이 필요합니다. 개념의 본래 뜻도 복잡한 것을 한 가지 본질로 꿰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이 책에서는 철학자가 자신의 생각과 문제의식을 표현하기 위해서 창조한 개념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철학하는 삶으로 바꿔나갔는지를 살펴봅니다.


 “철학의 과제는 개념 창조에 있다”라고 말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철학자들은 저마다의 개념을 창조해왔습니다. 세상에서 발생하는 무수히 많은 사건과 사고, 매일같이 접하는 일상 속의 현상들, 거기서 경험하면서 드는 무수한 생각들을 하나의 개념으로 파악하려는 철학자들의 노력이 우리들의 사고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준 원동력인 셈입니다. 사고는 개념을 매개로 이루어지고 개념을 근간으로 사고방식을 형성합니다. 새로운 개념을 배워나가면서 자신의 사유체계를 자기만의 개념으로 구축해나가는 과정을 철학에서 배우려는 이유입니다.



내가 철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철학자의 철학적 사유체계를 해설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철학을 공부하는 진짜 이유는 그 사람의 철학적 사유에 비추어 나의 사유체계를 재건축하기 위해서입니다. 철학자의 삶을 그대로 흉내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삶의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니체를 읽는 사람은 많지만 니체처럼 살아가면서 니체 철학을 자신의 삶에 온전히 적용해보면서 그것을 다시 자신의 언어로 재해석하면서 정리하는 가운데 공부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니체 해설자는 많지만 니체처럼 철학적 문제의식의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드뭅니다. 니체는 책상에서 개념을 조합하며 머리로 사유했던 관념적 철학자가 아니라 온몸으로 자기 삶을 철학적 주제로 삼아 사투를 벌였던 생의 철학자였습니다. 본래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닌 입장에서 굳이 철학자를 소환해서 그들의 삶과 철학을 지금 여기서 살펴보는 이유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한 가지 화두를 고민해보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사유는 다른 사유에 접속해보지 않고서는 잉태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원래 그렇다고 생각하고, 물론 그렇다고 치부하며,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가정에 물음표를 던져 시비를 걸 때 철학적 사유는 시작됩니다. 어제와 다른 차이를 반복하기 위해서는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자신의 일상을 심각하게 반성합니다. 나도 모르게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습관이 있는지, 그래서 ‘습관’의 ‘적’에 지배당해서 생긴 관습이나 관성에 끌려가는 삶을 살고는 있지 않는지 성찰하는 데 철학적 사유가 필요합니다. 타성에 젖어 관성대로 살아가면서 생긴 고정관념은 이제 관념이 ‘고장’ 나서 고장 관념으로 바뀝니다. 고정관념이 치유불가능 상태인 고장 관념으로 바뀌기 전에 철학적 신념으로 망치질을 해서 깨부숴야 합니다.



철학적 깨달음은 뒷수습이 불가능한 사건입니다


“철학이 없는 삶은 맹목이고, 삶이 없는 철학은 공허하다.” 칸트의 말입니다. 철학과 삶의 긴밀한 연결과 관계를 농축한 말입니다.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에는 뚜렷한 주관을 지지해주는 자기만의 철학이 없는 사람이고 공허하고 관념적인 사람의 바탕에는 자기 삶이 없이 남의 철학을 모방하는 사람입니다. 삶과 무관하게 철학적 지식을 습득해서 난해한 개념을 복잡하게 설명하는 철학자가 되기 위한 철학 공부는 지양합니다. 오히려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지향하는 철학 공부는 견디기 힘든 삶의 화두를 철학적 사유를 통해 육탄전을 벌이면서 그것이 지금 여기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내적 체험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적 체험이란 남의 철학이 내 몸을 관통할 때 진저리 쳐지는 깨달음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식이라고 해도 내 몸을 통과하면서 남긴 몸서리가 없다면 나의 체험적 지식으로 전환되지 않습니다. 


멀쩡하다고 생각하는 삶을 철학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이전과 다르게 바라보고 관찰하면서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질문을 던지는 삶으로 전환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과정이 철학을 공부하는 과정입니다. 철학자의 고뇌의 산물이 내 안으로 파고들게 함으로써 믿었던 신념체계를 무너뜨리고 타성에 젖어 사는 낡은 내 사유에 심한 생채기를 만드는 과정이 철학을 공부하는 과정입니다.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우리가 지향하는 바는 이전과 다르게 살면서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낯선 삶을 살아보겠다는 결단과 행동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무런 불편이 없는 사람에게,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뭔가 다르게 살아보겠다는 다짐이 없는 사람에게 철학은 아무런 짐이 되지 않습니다. 철학은 오로지 깨어있는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에게 불편한 자극을 제공해줄 뿐입니다. 철학은 누군가의 이야기에 종속되지 않고 나의 생각과 나의 두발로 내 삶을 개척해나가려는 사람에게 예측불허의 위험한 세계로 인도합니다.



“너를 읽는다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접힌 흔적이 묵음의 무게에 천천히 소멸될 즈음/비로소 나는 쉽게 읽히는 문장이 되었다.” 김태완 시인의 ‘나는 쉽게 읽히는 문장이었다’의 일부입니다. 나와 다른 세계에서 철학적 고민을 하는 사람의 책을 읽고 내 삶에 비추어 해석하는 일은 힘겨운 일입니다. 읽다 덮어두기를 몇 날 며칠 책장에 갇혀 숨죽이며 기다리던 철학적 사유의 묵음이 무게에 짓눌려 소멸될 즈음 불현듯 찾아오는 깨달음의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철학적 사유의 몸부림이 내 삶으로 들어와 읽히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삶은 철학적으로 거듭나는 사건의 연속입니다. 내가 만약 나와 다른 세계에서 다른 고뇌를 반복하며 다르게 생각하는 철학자의 흔적을 만나지 못했다면 내 삶은 밋밋하게 흘러갑니다 하지만 그렇게 골머리를 앓던 내 삶의 화두가 우연히 만난 철학자의 개념으로 내 신념이 농락당하기 시작할 때가 찾아옵니다. 


우연한 마주침이지만 놀라운 깨우침을 주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우발적 사건이 내 사고(思考)에 혁명적인 전환을 가져오게 만드는 사고(事故)입니다. 그래서 “생은 시간을 역류하여 솟아오른 사건이다.” 하지만 “아들이 나의 해결할 수  없는 벅찬 사건이듯이/모든 생은 스스로를 수습한다.” 김주대 시인의 ‘시간의 사건’이라는 시의 일부입니다. 이제 내 삶은 의도적인 뒷수습이 불가능한 하나의 사건으로 내 앞에 나타납니다. 삶이 삶을 스스로 수습하도록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전의 삶이 사라지고 이후의 또 다른 삶이 다시 전개되는 삶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입니다.



철학적 사유는 깊은 절망 뒤에 찾아오는 뜻깊은 희망입니다


“폐쇄된 간이역의 녹슨 출입문처럼 삐걱거리는 신호 대기음 앞에 서 자꾸 주춤거리는 글자들, 지금은 아무에게도 전이되지 않을 슬픔의 철자법을 따로 익혀야 할 시간이다.” ‘오늘의 당신’이라는 박완호 시인이 쓴 시의 일부입니다. 철학을 공부하는 과정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과거의 경험이 현실 앞에 아른거리며 발목을 잡는 익숙한 관성의 늪에서 사유의 발목을 잡는 공작원들을 퇴치하는 과정입니다. 아직은 누구에게도 전염되지 않은 낯선 철학적 사유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의 문법과 만나 색다른 사유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입니다. 철학을 공부할수록 익숙한 사유의 문법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늘 사용하던 언어적 관습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타성에 젖은 사유가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반복됩니다. 


특히 누군가 사용했던 비유도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관성에 빠지면 지금과 다른 바깥의 사유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오월의 산빛은 비유의 바깥에 있다/바라던 대로/파도와 비애는 언어의 바깥에 있다.” 장철문 시인의 ‘오월 낙엽’의 일부입니다. 비유의 바깥 사유가 바로 철학적 사유입니다. 언어적 점성에서 떨어져 나와 낯선 언어를 조합하고 색다른 비유를 통해 사유를 이전과 다르게 하기 위해서는 기존 비유 바깥에서 사유해야 합니다. ‘비유의 안쪽’에 어른들이 있다면 ‘비유의 바깥’에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장철문 시인의 《비유의 바깥에서》에 대한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일부에 나오는 말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의미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언어적 관습을 따라가면서 누군가 사용했던 익숙한 비유를 습관적으로 사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에 반해 아이들은 뜬금없는 비유를 통해 어른들의 타성에 젖은 습관적 사유체계에 망치질을 합니다. 철학적 사유는 바로 타성에 젖어 고루하게 생각하는 어른들의 사유체계를 무너뜨리고 낯선 생각의 씨앗을 발아시키는 과정입니다. 



철학적 사유는 모험입니다. 안온한 현재 여기에서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불편하고 위험한 바깥의 삶을 동경하되 철저하게 지금 여기서의 삶에 뿌리를 둡니다. 지금 여기서 안간힘을 쓰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견뎌내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그런 힘든 경험으로 지금보다 나아지려는 노력을 가슴으로 공감합니다. 철학적 사유는 현실과 동떨어진 들뜬 사유도 아니고 생각하다 자기 편의주의적으로 현실에 안착하려는 덜떨어진 사유도 아닙니다. 철학적 사유는 당대를 지배하는 주류적 사유에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위험한 탐험입니다. 그 위험한 탐험을 멈추는 순간 철학도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잘 알려진 주제와 문법, 벌써 질서 잡힌 형식의 상징과 은유, 낯익은 이미지의 순열조합에 갇히게 되는 것”(164쪽)입니다. 황현산의 《잘 표현된 불행》에 나오는 말입니다. 철학적 사유는 익숙한 문법과 논리 전개 방식을 일반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설명하고 해석하는 데에서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철학적 사유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언어 사용 방식을 도입, 색다른 개념으로 사유체계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축하는 과정에서 낯익은 개념의 적당한 순열조합을 위반(違反)하는 사유입니다. 


기존 언어 사용 방식이나 개념에 담긴 의미에 위배되는 모험을 감행할 때 철학적 사유는 기존 사유에 위배(違背)되는 행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철학적 사유는 깊은 절망 뒤에 찾아오는 뜻깊은 희망에서 끝도 없는 가능성을 바라봅니다. 철학적 사유가 언제나 낯선 사유로 다가오는 이유는 일반화된 언어 사용 방식을 거부하고 익숙한 개념적 의미에 반기를 들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세계로 끝없이 탈주하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쉽게 잡을 수도 없고 왜 그렇게 생각하고 위험한 모험을 감행하느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런 위반과 위배를 통해 기존 사유방식을 이전과 다르게 배치하려는 안간힘에서 우리는 철학적 사유의 강력한 힘을 얻습니다.



철학적 사유는 나의 두발로 능선을 타고 정상에 이르는 험난한 모험입니다


“그가 술을 마셨건, 그의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건, 그가 푸는 방정식의 답은 같다. 해결해야 할 문제 앞에서 술 취한 수학자, 슬픈 수학자는 사라지고 오직 엄밀하게 전개되는 수학적 논리의 필연성이 그를 대신한다”(255쪽). 황현산의 《잘 표현된 행복》에 나오는 말입니다. 하지만 철학적 사유는 수학적 논리와는 다르게 복잡한 감정까지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공식에 대입하는 것에 위배되는 사유입니다. 수학적 논리로 해명한 공식의 뒷면에는 수학자의 치열한 고뇌와 갈등하는 사유의 흔적이 숨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단순한 명제와 공식으로 정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복합한 현상(現狀)과 형상(形狀)의 이면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을 밝혀보려고 사투를 벌인 흔적이 상혼으로 남아 있습니다. 철학적 사유는 누군가 알고 있는데 알려주지 않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그것을 밝혀내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한 사람이 떠나는 모험의 산물입니다. 아니면 철학적 사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잘 못된 믿음에 근거한 헛된 망상이거나 누군가 만들어낸 가치판단 기준에 매몰되어 주체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에게 낯선 깨우침을 던져주는 불편한 사유입니다. 


철학적 사유를 배운다는 것은 철학자가 알려준 길을 따라 능선을 타고 골짜기를 지나 정상에 오르는 방법을 배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철학적 사유는 나의 두발로 험난한 산등성이를 넘고 다시 골짜기를 지나 능선을 타고 정상에 올라 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고단한 탐험입니다. 철학자는 저마다의 문제의식을 가슴에 품고 사투 끝에 정상에 올라 자기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지닌 사람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철학자의 사유체계를 이해한다고 그게 곧 나의 사유방식으로 이식되지 않습니다. 나는 먼저 걸어간 철학자의 사유방식을 실천하면서 나의 사유방식을 실천하면서 나의 언어와 목소리로 내 삶을 이야기하는 내 삶의 철학자가 되는 길을 모색하는 이유입니다. 



이 책은 다양한 철학자의 삶으로 농축해낸 사유체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그들이 능선을 따라 올라가 마침내 정상에서 내려단 본 관점과 시각을 내 삶에 투영해봄으로써 내가 주체가 된 삶의 철학을 만들어보려는 작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철학자의 삶을 모방하기보다 삶의 철학자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생각의 무기를 갖춰보는데 이 책의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철학자 중에서 왜 12명일까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12는 완전한 수이자 우주의 완성을 의미하는 숫자입니다. 1년도 12달로 이뤄졌으며, 하루도 12시간이 두 번에 이어진 시간의 합작품입니다. 동양의 지지(地支)도  자(子) · 축(丑) · 인(寅) · 묘(卯) · 진(辰) · 사(巳) · 오(午) · 미(未) · 신(申) · 유(酉) · 술(戌) · 해(亥)처럼 십이지(十二支)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서양 문화권에서도 숫자 12는 신의 묘미가 담긴 성수(聖數)로 알려졌습니다. 올림포스를 대표하는 신도 제우스, 헤라, 포세이돈, 데메테르, 아테나, 아폴론, 아르테미스, 아레스, 아프로디테, 헤르메스, 헤파이스토스, 디오니소스와 같이 12 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도 12명이고 피아노 건반도 한 옥타브가 12개의 반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처럼 우주와 자연 삼라만상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원리에 숫자 12가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여기 선정된 12명의 철학자가 철학적 체계를 완성하는 지혜의 성전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다만 한 달에 한 명씩만이라도 그들이 치열하게 고뇌했던 사투의 흔적을 따라가 보고 왜 당시에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평생 동안 철학적 모험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본다면 우리들이 삶도 보다 철학적 사유에 물드는 사색이 오솔길이 되지 않을까요? 



철학을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 철학이 아니라 사랑하면 지혜를 알게 되는 게 철학이 아닐까요. 뭔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궁금한 게 많아지고 호기심도 늘어나면서 질문이 많아집니다. 앎의 강도가 높아지고 알고 싶은 욕망을 더 강렬해집니다. 누가 말려도 앎으로 향하는 열정 열차는 멈출 수 없습니다. 소위 멈추려고 해도 도저히 멈출 수 없는 욕파불능(欲罷不能)의 상태입니다. 철학자의 삶을 따라가며 설명하고 해설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철학자가 되어 어제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에게 철학은 삶의 무기가 될 수 있고 사색의 방편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제시한 가치판단 기준이나 누군가 정의한 개념적 의미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살아온 삶을 반성하고 그들의 삶이 만든 안락한 지금 여기서의 삶에서 벗어나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살고 싶은 사람에게 철학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정표를 제시해주는 등대와도 같습니다. 삶의 좌표를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철학자로 거듭나는 길을 이 책을 통해 깨달았으면 좋겠다는 작은 희망을 걸어봅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만났던 12명의 철학자가 준 우연한 마주침이 여러분에게도 색다른 깨우침의 선물로 다가가기를 소망해봅니다.



P.S.: 이 글은 이미 방송되고 있는 ebs 클래스 e의 10명의 철학자톨스토이에서 푸코까지: 너는 다르게 살 수 있다 https://classe.ebs.co.kr/classe/detail/133783 와 4월경에 방송될 다르게 살고 싶을 때 만나야 할 10명의 철학자 중에서 12명의 철학자를 선정, '아이러니스트라'는 제목으로 책이 나올 예정인 작품의 프롤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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