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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주장’이 아니라
‘긴장’을 배우는 고단함이다

철학은 주장을 설명하기보다 긴장을 몸으로 배우는 고단한 사유입니다


철학자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그들이 말하는 ‘주장’이 아니라 주장을 하기 이전에 그들이 품었던 문제의식으로 느끼는 ‘긴장’입니다. 기존의 철학적 사유체계로 풀리지 않는 삶의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철학자가 고심하면서 밤잠을 설쳤던 극도의 긴장감에 내 심장이 닿기를 기대합니다. 그 순간 비로소 철학자의 삶을 통해 나 역시 삶의 철학자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고뇌에 찬 결단을 품고 험난한 세상을 이전과 다른 문제의식으로 살아갈지를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점에서 철학을 배우는 이유는 철학자의 독창적인 논리나 주장을 아는 데 있지 않고 그들이 자신만의 문제의식으로 깨달은 통찰과 각성 체험입니다. 왜 니체는 서구 철학의 전통이었던 이성 중심 철학을 뒤집어엎고 신체 중심의 사유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는지, 니체가 살았던 당대의 문제 상황으로 돌아가 그 속으로 몸을 던져 니체가 온몸으로 고뇌했던 사유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는 게 중요합니다.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학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철학만이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일까요.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학문이 과연 존재할까를 물어본다면 지혜를 사랑한다는 철학은 존재 이유가 모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라기보다 이전과 다른 지혜를 얻기 위한 몸부림이자 안간힘입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전율하는 감동을 온몸으로 느낀 다음 지금까지의 삶을 청산하고 이전과 다른 삶을 살기로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고 가정해봅니다. 니체가 몸으로 고뇌하면서 느꼈던 긴장감을 따라가면서 독자 역시 피가 거꾸로 솟고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 초긴장 상태로 돌입한다면 철학은 단순히 주장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 이전과 다른 사고 혁명이나 지진을 일으키면서 용감한 결단을 내리고 한 번도 걸어간 적이 없는 길을 향해 몸을 던지는 행동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근저에는 시대를 앞질러 살아간 철학자의 긴장감이 여전히 숨을 거두지 않고 심장박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철학은 이전과 다른 개념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하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오히려 철학은 물어보지 말아야 할 질문을 던져 놓고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용감한 행동을 촉구하는 지상명령입니다.



아무리 박식한 철학적 사유체계를 갖고 있어도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데 아무런 깨우침을 주지 못한다면 그 철학은 관념의 파편에 불과하며 각종 개념으로 위장한 채 현실을 외면하는 화려한 담론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철학을 통해서 배워야 할 점은 철학적 선각자들의 독특한 주장이 아니라 그 주장의 이면에 숨어 있는 철학자의 심각한 패배감입니다. 정직한 절망만이 정도를 넘어서는 희망을 낚아내듯이 처절한 패배의식 속에서 그 사람 특유의 문제의식이 잉태됩니다. 왜 무엇 때문에 한 사람의 철학자는 기존 철학적 사유체계에 지적 분개 의식과 도덕적 분노를 느끼면서 기존의 생각만으로는 난국을 돌파할 대안적 사유가 불가능함을 온몸으로 느꼈는지를 파헤쳐야 합니다. 철학자의 처참한 패배는 역설적이게도 내가 서 있는 처지를 되돌아보며 처연한 생각을 품게 만듭니다. 거기서 철학자는 결연한 각오로 무장한 자신만의 철학적 사유체계를 정초 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철학은 바로 철학적 패배로 싹 틔운 철학자의 삶에 대한 패기입니다. 



철학자의 패기가 흐르는 사유체계에 빠져드는 순간 내 삶으로 그대로 파고들어와 요동을 치기 시작합니다. 머리가 계산하기 이전에 심장이 뛰고 몸이 움직입니다. 진정한 철학은 머리로 따져보는 이해와 분석 이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결단과 실천에 방점을 찍습니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에서도 빛나는 등대처럼 철학은 갈치를 잡지 못하고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몸으로 부딪치며 새로운 삶의 활로를 개척하라는 위기일발의 촉발(觸發)이자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강권(强勸)입니다. 철학은 반복되는 삶의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에게 갑자기 다가온 해고 명령처럼 막다른 길목에 직면해서도 좌절하지 않고 다른 길도 있다는 가능성을 믿게 만드는 마지막 버팀목이자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철학적 깨달음은 머리로 이해하고 나서 생각해보는 망설임이 아니라 나태함에 빠져 지루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죽비로 내려치는 섬뜩한 각성입니다. 각성은 단순한 탄성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성장과 성숙을 위한 용감한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철학은 단순히 책상 공부를 통해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을 넘어섭니다. 철학은 무엇이든지 뜨겁게 사랑하면 이전과 다른 지혜를 선물로 가져다주는 축복의 배움입니다. 



철학적 사유가 깊은 사람은 아무리 복잡한 문제를 만나도 곧바로 반응하지 않고 깊이 사유하면서 난공불락의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꿔놓고 꾸준히 다른 생각을 잉태하는 사람이다. 쉽게 좌절하지 않고 조급하게 결론 내리지 않고 생각해낼 수 있는 대안을 따져보며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조치를 조용히 찾아봅니다. 그렇다고 오랫동안 사안을 놓고 검토만 거듭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대안으로 부각되는 해결책이 생기면 과감한 실천을 통해 검증과정을 거치면서 차선책을 생각해봅니다. 깊은 사색을 통해 방법을 생각하기보다 과감한 실천을 통해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구상하고 적용해봅니다. “영혼은 행위란다/몸이 없는 성자들을 믿지 마라.” 김선우 시인의 《녹턴》이라는 시집에 나오는 ‘햇봄, 간빙기의 순진 보살’에 나오는 시 구절입니다. 철학은 앉아서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 아니라 온몸으로 주어진 문제를 끌어안고 뒹굴면서 낯선 생각을 잉태하고 현실에 적용하면서 현명한 대안을 생산하는 실천적 지혜의 보고입니다. 김선우 시인의 시 구절은 “철학은 행위란다/몸이 없는 철학자들을 믿지 마라”는 말로 바꿔서 써봐도 일맥상통합니다. 물론 무리(無理)가 따르는 주장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리(一理)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평생 나는 모든 사색을 분주히 돌아다니면서 해 왔습니다. 번쩍이는 모든 생각들은 일을 하던 중에 떠오른 것들입니다. 나는 따분하고 반복적인 일을 즐기곤 했지요. 파트너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머리 뒤쪽에서 문장을 짜 맞추었던 거지요. 그러다가 은퇴를 하고 나서 나는 세상의 모든 시간을 내가 다 차지했어도 뭘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마도 머리를 아래로, 엉덩이를 위로하는 것이 사유의 가장 좋은 자세일 겁니다. 동시에 두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영혼의 스트레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아주 생산적이지요"(191-192쪽). 에릭 호퍼의 《길 위의 철학자》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는 철학자의 사유체계를 통해 철학자의 삶을 배우는 게 아니라 삶의 철학자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몸으로 깨달은 각성 체험을 일정한 논리체계로 정리해내지 않으면 몸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모래알처럼 흩어져버립니다. 뜨거운 삶의 현장에서 경험을 관통하지 않은 지식은 허공에서 하소연하는 허무맹랑한 주장에 불과합니다. 내 몸을 관통하지 않은 어떤 철학적 사유도 내 삶을 뒤흔드는 자극제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에릭 호퍼가 길 위에서 철학하듯 늘 하늘로만 향하던 관념의 생산지, 머리를 아래로 하고, 늘 무겁게 내리누르던 엉덩이를 위로 향하게 해야 몸으로 현장에서 사색하는 흔적을 관념이 아니라 신념으로 축적하면서 이전과 다른 삶을 역동적으로 펼쳐나갈 지지기반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머리로 철학자의 생각을 관념적으로 배우고 그들의 주장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주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바라고 싶은 희망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이 책은 여기 등장하는 12명의 철학자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책은 철학자의 삶을 공부하는 목적을 이 책을 읽는 독자 여러분이 삶의 철학자로 거듭나게 자극을 주고 한 가지 실천할 수 있는 사유의 처방전을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말하는 처방전이 먹기만 하면 모든 병이 다 낫는 만병통치약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책은 저마다 고유한 12명의 철학자의 주장을 독자 여러분의 삶으로 끌어들여 치열하게 사유하고 실천하는 가운데 삶의 철학자로 거듭나는 길을 모색하는 게 이 책이 추구하는 지향점입니다. 삶의 철학자로 거듭나는 여러분만의 고유한 철학적 삶의 여행에 깨우침의 재미와 의미가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p.s.:  이 글은 4월 중순 ebs 클래스 e에서 철학자 10명을 중심으로 방송될 강연과 함께 출간될 '다르게 살고 싶을 때 만나야 할 철학자 12명(가제)'이라는 책의 에필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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