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자전거를 더 늙기 전에 타야 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칩거’에서 ‘쾌거’로 바꾸는 경이로운 인생의 동반자,
당신이 자전거를 더 늙기 전에 타야 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자전거를 사라. 살아 있다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촌철살인의 명언은 많이 남긴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말을 믿고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자전거를 샀다. 자전거로 국토 종주해보고 싶은 막연한 버킷리스트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다. 가슴으로 느낌이 왔을 때 들이대고 저지르지 않으면 안 해도 되는 이유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세상은 안 되는 이유보다 되는 방법을 찾는 사람이 바꿔나간다. 시도해보기도 전에 안 되는 이유를 생각하고 한계선을 긋기 시작하면 정말로 되는 일이 없다. 아직도 자전거 초보지만 연습으로 1시간 정도 타면서 약 10Km 탄천길을 달려봤다. 예전에 타던 자전거 구력이 아직 몸에 각인되어 있는 듯했다. 하지만 안장 통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생각만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원인 중의 하나는 기어 변속을 자유자재로 하지 못했고, 페달을 밟는 힘도 장거리를 자전거로 탈 정도로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원인은 자전거가 원하는 내 몸의 구조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자리는 거기에 걸맞은 자세를 요구한다. 자전거를 안정적으로 타려면 자전거가 원하는 자리에 맞게 나의 신체 구조도 바뀌어야 한다.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수동(手動)으로 움직여야 수동적(受動的)으로 당하지 않는다
올 하반기부터 시작되는 1년 동안의 연구년, 첫 번째 도전 프로젝트로 자전거 국토종주로 정했다. 10월 어느 멋진 날 출발할 예정이다. 내친김에 4대 강 완주와 제주도 한 바퀴 다 돌아서 자전거 그랜드 슬램을 달성해보고 싶다. 그리고 김훈의 《자전거 여행》과는 다른, 육체와 땅이 만나 내 몸을 파고든 얼룩과 무늬를 재료로 책을 쓰고 싶다. 자전거 위에 실린 몸이 전국을 돌며 땀 흘리며 토해낸 자전거와 일심동체가 된 스토리가 될 것이다. “인생은 자전거 타기와 같다. 균형을 유지하려면 계속 움직여야 한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자전거 명언이다. 움직인 만큼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도 바뀐다. 자전거 타고 내가 가본만큼 나의 사유도 더불어서 심화되기를 기대한다. 자전거를 타며 지구 자전도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자동이 아니라 수동(手動)의 위력과 마력을 온몸으로 경험해보고 싶다. 수동(手動)으로 움직여야 수동적(受動的)으로 당하지 않고 능동적(能動的)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수동으로 움직이는 자전거 운동이 주는 능동적인 깨달음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염원을 담아 자전거 삼행시를 지었다.
자발적으로 몸을 움직여 어디론가 떠나면
전환점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서
거취를 혁명적으로 바꿀 수 있다.
지금 여기를 떠난 만큼 저기 가서 다른 세계와 만날 수 있다. 풍뎅이가 평생을 한 우물에 살아가면 지금 여기가 세상의 전부로 착각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어느 날 바람에 날려 어쩔 수 없이 익숙한 안전지대를 벗어나 난생처음으로 낯선 곳으로 날려 왔다. 내가 머물렀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자전거는 내 몸과 한 몸이 되어 가야 할 곳을 지향하면서도 지금 두 바퀴가 굴러가는 여기를 몸에 아로새긴다. 굴곡이 있으면 몸속에 굴곡의 흔적을 새기고 언덕을 오르면 안간힘을 쓰는 노력이 고스란히 몸으로 느껴진다. 내가 자전거가 되고 자전거가 내가 될 때, 가장 행복한 여정을 즐기는 조건이 될 것이다.
자전거는 중학교 3년 동안 시골길을 통학하면서 타보고 나서 다시 타본 적이 거의 없다. 달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20리 통학길을 자전거로 통학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은 이제 거의 몸에 남아있지 않다. 흐릿한 기억으로 몸 구석 어딘가에 남아있는 기억은 달이 비추는 어두운 밤길을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무심한 상념에 잠겼던 순간이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는 야심성유휘(夜深星愈輝)라는 문구를 벗 삼아 고단한 통학 길의 외로움을 혼자 달랬던 그 옛날의 시간이 지금 여기로 소환되었다. 두 바퀴를 타고 들어오는 땅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림자에 비춘 나의 모습을 달밤을 벗 삼아 자문자답했던 그 신작로가 이제는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울퉁불퉁한 삶의 굴곡은 없어지고 고단한 삶의 이면이 말끔히 포장되었다. 포장된 이면의 고달픔은 없어지지 않고 위장한 채 삶의 뒷골목에서 아련하게 나를 부르고 있다. 이문재 시인의 ‘소금창고’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흘러간 과거지만 과거의 그늘에 갇혀있지 않고 아픈 장막을 뚫고 밖으로 나와 지금 여기로 달려온다. 그때 내 몸으로 겪은 육체의 움직임과 함께 몸으로 느낀 감정과 함께 현재로 소환되는 게 과거의 추억이다.
“사유는 몸으로 드러나고 몸은 사유의 집이다”(231쪽).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갈 형편이 되지 않아서 땡볕에 어머니와 같이 농사짓던 힘든 추억도 자전거 바퀴에 태워서 흘려보냈다. 논농사든 밭농사든 정확히 농부가 흘린 땀방울만큼 농작물은 위대한 자연의 작품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잔꾀를 허용하지 않는 농사야말로 인간의 육체적 노동이 흘리는 땀방울이 자연의 기운을 받아서 함께 만들어내는 합작(合作)이다. 육체적 노동이 고스란히 반영되는 농사처럼 자전거 타기도 내가 구르는 두 발의 동작만큼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운동이다. (연탄보일러에서 끓고 있는) 물은 불에 저항한 만큼 따뜻하다(103쪽). 함민복 시인의 산문집, 《눈물은 왜 짠가》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은 자전거 타기에 대입해도 마찬가지다. 두 발의 구르는 힘으로 움직이는 자전거 두 바퀴는 땅에 저항한 만큼 속도를 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상체는 정면을 응시하되 허리를 굽혀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시킨다. 엉덩이는 안장에 앉아있되 긴장을 늦추지 않고 허벅지로 전달되는 힘으로 페달을 밟아 앞 체인에 전달하면 뒷바퀴를 돌려주는 동력을 작용하며 힘겹게 안간힘을 쓰며 바퀴가 바람을 타고 구르기 시작한다. 사람의 힘이 자전거에 동력을 전달되고, 그 힘으로 땅 위를 구르는 바퀴는 쉬지 않고 구르며 앞으로 나갈 때 사람과 자전거와 땅은 순간 접점을 달리하며 바람을 타고 전진을 거듭한다.
자전거는 철저하게 아날로그적이다. 아날로그는 디지털과 다르게 출발에서 목적지까지 가는 여정을 함께 하는 노고와 정성이 깃들어 있다. 아날로그가 느림과 여유와 상상을 추구한다면 디지털은 속도와 효율과 촉급함을 상징으로 한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몸은 세상의 길 위로 흘러나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과 길은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결되는데, 몸과 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자전거는 몸이 확인할 수 없는 길을 가지 못하고, 몸이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없지만, 엔진이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간다"(17쪽). 김훈의 《자전거 여행 1》에 나오는 말이다. 자전거와 몸과 길 사이를 매개하는 기계지만 엔진의 힘으로 돌아가면 효율을 추구하는 일단 운송 수단과 다르다. 자전거는 철저하게 인간의 육체가 개입되는 땀 흘리는 안간힘을 매개로 움직이는 이동 수단이다. 자전거는 이동 수단이면서 동시에 운동을 촉진하는 기구가 되는 이유다. 자전거는 내 몸이 힘을 들인 만큼 힘을 얻어서 앞으로 나가는 이동 수단이다. 자전거를 타는 주체는 사람이지만 가만히 앉아서 몇 가지 장비나 장치를 조작하면 움직이는 자동차나 오토바이와는 다르게 사람이 기계에 물리적 힘을 가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쏟아부은 ‘노동’의 강도만큼 ‘이동’이 되면서 동시에 ‘운동’도 되는 인간의 경이로운 발명품이 바로 자전거다. 생각만 하고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자전거도 움직이지 않는다. 사유가 몸을 통해 자전고로 전달되어야 비로소 나의 사유가 세상 속으로 굴러들어가는 매개체가 자전거다. 자전거 타겠다고 마음을 먹는다고 자전거는 저절로 움직이지 않는다. 자전거는 마음을 먹은 사람이 자전거를 끌고 나와서 드넓은 땅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할 때 중심을 잡고 사람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실어다 준다.
메타버스도 타야 되지만 자전거를 타야 삶을 불태울 수 있다
자전거는 안일한 자세로 현실에 안주하려는 나에게 일침을 날려준 강력한 자양강장제나 다름없다. 나태함과 지루함 속에서 빠지려는 나에게 당장 밖으로 나가라고 강권하는 주체가 자전거다. 사람이 자전거를 선택하는 결단을 내리기도 하지만 자전거가 사람에게 나를 타지 않으면 삶이 정체된 늪에 갇혀 재미없을 것이라고 경고 메시지를 날린다. 때로 눈 사물이나 기계가 인간에게 이전과 다른 생각과 행동을 요구하면서 결단과 결행을 촉구하기도 한다. 자전거도 마찬가지다. 이른 아침 새벽 출근길에 우연히 만나는 도로상의 자전거가 안부를 묻기도 한다. 지금 당신은 다리를 떨면서 출근하고 있는지, 아니면 심장 떨리는 삶을 만들어가기 위해 지금 설레는 마음으로 출근하고 있는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출근하던 관성에서 벗어나 자전거를 타고 출근해보자. 타성에 젖은 몸이 기지재를 켜면서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자아낼 것이다. 거대한 변화 추세와 시대적 흐름에 따라 메타버스를 타야 하지만 그렇다고 내 삶의 경이로운 전율감을 맛볼 수 없다. 메타버스의 환상보다 자전거로 즐기는 일상의 상상력이 나에게는 건전한 에너지로 다가온다. 자전거는 반복되는 틀에 박힌 일상에서도 이전과 다른 상력을 품고 새로운 가능성을 잉태하게 만들어주는 위대한 혁명의 출발점이다. 땡볕에서 누군가는 농사짓는 고통 체험을 해야 디지털이나 온라인상에서 밥의 원료인 쌀을 유통시킬 수 있다.
자전거는 책상머리에 앉아서 요리조리 잔머리로 계산하며 타성에 젖어 살아가려는 나에게 죽비와도 같은 정문일침의 교훈을 준다. 자전거를 타면서 흘리는 땀의 소중함은 직접 타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땀 흘리며 느끼는 성취감을 맛볼 수 없다. 몸으로 겪은 전율감은 언어를 매개로 표현할 수 없다. 자전거 탈 때 겉으로 보기에 움직이는 것은 두 다리밖에 안 보이지만 사실 온몸이 관여되는 전신운동이 자전거 타기다. “나는 몸이 입증하는 것들을 논리의 이름으로 부정할 수 있을 만큼 명석하지 못하다”(141쪽). 김훈의 《자전거 여행 2》에 나오는 말이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허벅지에 힘을 실어 페달에 힘을 전달하며 회전운동을 계속하며 심장박동은 펌프질을 이전보다 더 강력한 울임으로 반복한다. 시야는 앞을 내다보고 두 팔은 핸들을 굳건하게 붙잡고 있는 사이, 엉덩이는 양다리로 힘을 균형 있게 배분하기 위해 좁은 안장 위에서 불안하게 중심을 잡는다. 그 사이에 허리는 45 각도로 굽은 채로 복근을 당기로 기립근을 세워 바람과 맞이하는 저항을 최소화시키려 안간힘을 쓴다. 내 몸의 모든 기관과 감각이 자전거 위해서 앞을 향해 달리면서도 보고 듣고 접촉하며 생각하고 느끼는 동시에 두 발은 여전히 바삐 움직인다. 자전거는 머리로 타는 게 아니라 몸으로 타는 운동기구다. 중심을 잡고 균형을 유지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수많은 관념적 명령어가 불필요하다. 오로지 몸으로 수용하는 감각적 깨달음의 숱한 정보가 몸을 관통하면서 남기는 깨우침의 언어만이 자전거를 넘어지지 않고 계속 탈 수 있게 만든다.
자전거는 모든 순간을 관통하는 자각이다
자전거 타기는 단순히 자전거에 몸을 싣고 앞으로 이동하는 여정이 아니다. 자전거 타기는 자전거가 내 몸을 싣고 나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존재와 순간순간 만나는 찰나의 교향곡이다. 자전거로 달리는 와중에 마주치는 바람, 내리쬐는 태양 볕과 앞에서 맞이하는 능선의 아름다움, 그리움으로 나를 품어주는 강과 바다, 늘 옆에서 손 흔들며 힘든 여정을 환호로 맞이해주는 풀과 나무, 묵묵히 자전거를 위해 기꺼이 가는 방향으로 안내해주는 숱한 길 위를 달리며 오감으로 느끼는 자연과 우주와 인간과 기계의 위대한 합주곡이다. 평지를 달릴 때 만나는 자연의 경이로운 장관은 언덕을 오를 때 겪는 즐거운 고통과는 또 다른 한 폭의 그림이다. 자전거 타기는 자전거가 나를 싣고 가지만 사실은 내가 자전거를 매개로 세상과 만나는 마주침의 연속이다. “온몸을 전율케 하는 마주침, 전신이 부들부들 떨려오는 느낌과 교감만이 우리 영혼에 진드기처럼 딱 달라붙어 있는 편견과 선입견을 떨쳐낼 수 있습니다”(259쪽). 심강현의 《욕망하는 힘, 스피노자의 인문학》에 나오는 말이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과정에서 온몸으로 다가오는 세상과의 마주침은 오랫동안 책상머리에서 키워온 관념적 교훈을 일거에 사장시킨다. 자전거를 타고 길거리를 달리다 보면 늘 보던 익숙한 사물이나 생물도 측은한 눈길로 나를 바라본다. 그동안 무엇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힘에 이끌려 앞만 보고 달리다 나의 두발로 힘차게 움직이는 동력으로 달리며 만나는 익숙했던 일상이 나에게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다가온다. 내 몸으로 접촉하지 않은 일상은 환상과 공상, 망상과 몽상의 온상이지만 내 몸으로 부딪쳐본 일상은 상상력의 텃밭으로 다가온다.
자전거를 타기 전에 가졌던 편견과 선입견 또는 오해는 자전거를 직접 타면서 몸으로 부딪치며 우여곡절의 경험을 통과해야 비로소 이해로 바뀔 수 있다. 편견과 선입견이나 오해는 현상의 일면만 봤거나 문제나 사건을 일으킨 파편화된 피상적 정보만 봤을 때 생긴다. 하지만 파편화되어 나의 오해를 불러왔던 개별적 증상이나 사건들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원인이 밝혀지면서 내가 가졌던 편견이나 선입견 또는 오해는 불식되고 혼란스럽게 다가왔던 파편화된 정보가 직접 경험을 통해 이해되면서 일관되게 하나의 구슬로 꿰이면서 의미를 갖게 된다. 자전거도 직접 몸으로 겪어보지 않고 들리는 각종 정보가 타기도 전에 두려움을 조성하고 걱정을 유발해서 자전거 타는 새로운 경험세계로 진입하는 관문 자체를 막아버릴 수도 있다. “나의 경험이나 실천과 일치하지 않는 사안을 관조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389쪽).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정치학 논고》에 나오는 말이다. 어떤 사안이 옳고 그른지는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서는 알 수 없고 직접 경험하고 실천해봐야 해당 사안의 현실 적합성 여부를 판정할 수 있다.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공감 능력이 생기지 않고 오해가 가중될 수 있다.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가슴으로 느낄 수 없다.
올라감의 곤경은 내려감의 풍경을 낳는다
마음은 저만큼 앞에 가 있지만 자전거는 이 만큼 뒤에 머물러 있다. 몸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몸과 마음이 따로 존재할 때 사람은 몰입하지 못하고 조금 해하거나 지루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자전거에 실린 몸은 온 힘을 자전거에 전달하지만 전달받은 힘만큼 그대로 자전 저가 받아서 바퀴를 굴리지 않는다. 힘이 전달되는 도중에 의도한 방향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힘이 벗어날 수 있다. 특히 자전거 페달로 전달된 힘은 체인을 거쳐 앞 뒤 기어로 연결되는 와중에도 힘은 그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저마다 지니고 있는 저항력이 힘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바퀴가 노면에 닿는 면적에 따라 땅을 구르고 전진하려는 힘을 먹어버리기 때문에 내가 자전 거애 준 힘만큼 동력으로 살아나지 않는다. “이끄는 몸과 이끌리는 몸이 현재의 몸속에 합쳐지면서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가고, 가려는 몸과 가지 못하는 몸이 화해하는 저녁 무렵의 산속 오르막길 위에서 자전거는 멈춘다. 그 나아감과 멈춤이 오직 한 몸의 일이어서, 자전거는 땅 위의 일엽편주처럼 외롭고 새롭다”(16-17쪽). 역시 김훈의 《자전거 여행 1》에 등장하는 자전거에 대한 작가의 경이로운 통찰이다. 이끄는 몸이 이끌리는 몸을 끌고 가는 것도 힘겨운 사투지만 앞으로 가려는 몸과 그만큼 가지 못하는 마음 사이에도 쉬지 않고 암투가 벌어진다. 힘겨운 상황임에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가려는 사투와 가려는 마음을 붙잡아 여기서 안주하려는 욕망 사이의 암투는 자전거 여행길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삶을 수업이 올라가려는 상승 운동을 거듭한다. 목표를 달성해서 성과를 창출하고, 성장하고 성숙하면서 경지에 오르려고 안간힘을 쓴다. 높은 산에 오르기 위해 수없이 작은 발걸음을 무수히 내딛으면서 정상에서 느끼는 짧은 환희나 희열감을 맛보려고 발버둥을 친다. 하지만 한 번 오른 길 위에서 영원히 머무를 수 없다. 올라갔으면 힘들어갔던 몸에서 힘을 빼고 내려와야 한다. 의지대로 올라가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잘 내려가려는 의지는 불태우지 않는다. 잘 내려간 사람만이 이전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올라설 수 있다. 본인의 의지로 내려오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순식간에 추락할 수 있다. 올라가는 고통에 거의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부은 신체가 정상에 오르면서 기다렸던 바람이 큰 품으로 나를 맞이한다. 땀으로 젖은 온몸을 휘감는 바람이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며 곤경에서 풍경으로 경치를 바꿔준다. 가파른 오르막에서 사투를 벌이며 작은 전진을 거듭하며 힘을 받은 앞 체인은 자신이 받은 힘보다 몇 배 더 큰 힘을 뒷 체인에 전달한다. 순간 뼈 사이의 관절이 힘을 받으면서 버티는 순간 귀에 거슬리는 파열음이 일어난다. 위에서 내리누르는 중력을 거부하면서 들어 올리려는 와중에 관절에서 흘러나오는 절규처럼 체인이 뒤바뀌는 접점에서 외마디 비명 소리가 들린다. 그 순간도 길지 않다. 잠깐 사이에 체인이 자신의 자리를 잡고 주어진 위치에서 발에서 전달된 에너지를 흡수하고 언덕의 정상을 향해 오늘도 꾸역꾸역 기어오른다. 배경이었던 언덕이 어느 사이 전경으로 다가온 정상의 기쁨을 선물로 가져다주었다.
자전거 타는 사람 - 김훈의 자전거를 위하여
당신의 다리는 둥글게 굴러간다.
허리에서 엉덩이로 무릎으로 발로 페달로 바퀴로
길게 이어진 다리가 굴러간다
당신이 힘껏 페달을 밟을 때마다
넓적다리와 장딴지에 바퀴 무늬 같은 근육이 돋는다
장딴지의 굵은 핏줄이 바퀴 속으로 들어간다
근육은 바퀴 표면에도 울퉁불퉁 돋아 있다
자전거가 지나간 길 위에 근육 무늬가 찍힌다
둥근 바퀴의 발바닥이 흙과 돌을 밟을 때마다
당신은 온몸이 심하게 흔들린다
비포장도로처럼 울퉁불퉁한 바람이
당신의 머리칼을 마구 흔들어 헝클어뜨린다.
당신의 자전거는 피의 에너지로 굴러간다
무수한 땀구멍들이 벌어졌다 오므라들며 숨 쉬는 연료
뜨거워지는 연료 땀 솟구치는 연료
그래서 진한 땀 냄새가 확 풍기는 연료
당신의 2기 통 콧구멍으로 내뿜는 무공해 배기가스는
금방 맑은 바람이 되어 흩어진다
달달달달 굴러가는 둥근 다리 둥근 발
둥근 속도 위에서 피스톤처럼 힘차게 들썩거리는
둥근 두 엉덩이와 둥근 대가리
그 사이에서 더 가파르게 휘어지는 등뼈
(김기택·시인, 1957-)
자전거 위에 불안하게 실린 내 몸이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은 도착하고 싶은 목적지를 상상하면서도 힘겹게 돌아가는 두 바퀴가 앞으로 향해 굴러갈 수 있도록 매 순간마다 목적지로 향하는 꿈을 심는 일이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만날지 모르는 장애물을 예견할 수 없다. 가는 와중에 우발적으로 만나는 마주침 속에서 깨우침을 얻으려는 배움의 자세만이 필요할 뿐이다. 국토 종주를 넘어 자전거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기까지 오로지 내 두발로 힘겨운 사투와 암투를 벌이며 나는 몸으로 승리할 수 있음을 내 마음에게 전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