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자전거를 타지 않으면
안 되는 10가지 이유

자전거에 몸을 싣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일어나는 경이로운 10가지 변화

당신이 자전거를 타지 않으면 안 되는 10가지 이유:

자전거에 몸을 싣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일어나는 경이로운 10가지 변화


자전거를 타면 건강에 좋은 이유는 수많은 경험자들이 이미 구구절절 옳은 이야기를 다양한 책이나 유튜브를 통해서 만날 수 있다. 자전거 타기는 유산소 운동은 물론 근육운동에도 더없이 좋은 운동일뿐만 아니라 고혈압과 당료 등 각종 성인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내가 직접 자전거를 타면서 몸으로 놀라운 변화를 겪어보지 않고서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실감(實感)은 체감(體感)에서 온다. 내 몸이 살아 움직일 동안만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심신은 물론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자전거 타기는 왜 필수 코스인지를 역시 몸으로 겪어보라는 차원에서 짧은 체험적 깨달음이 희석되기 전에 10가지로 정리해보았다.


자전거 탄천.jpg


①자전거 타기는 전환기(轉換器)다.


살다 보면 틀에 박힌 일이 어제와 다름없이 반복될 때 삶의 의미는 물론 재미를 잃고 식상한 일을 처리하느라고 지루한 삶의 수레바퀴에 맞물리게 된다. 앉아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앞으로 다가올 삶을 미리 당겨서 걱정하지만 그렇다고 삶이 뾰족한 묘안이나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실천방안이 떠오르기보다 고민만 깊어지고 걱정만 앞선다. 고민한다고 지금 직면하고 있는 난제가 해결될 리 만무고 걱정한다고 부담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환경적 여건이나 외생적 변수를 끌어안고 생각하고 검토한다고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지금 우리 모두가 힘들어하면서 견뎌내는 코로나 난국도 내가 어떤 조치를 취한다고 타개되지 않는다. 언젠가 평범한 일상이 회복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시간이 지날수록 삶은 불확실해지고 막막하기만 하다. 밖으로 나가서 활동하는 시간보다 어쩔 수 없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집안에 갇혀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나도 모르게 우울해질 때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심각하게 정체된 삶이 계속 이어질수록 삶은 답답해지고 갑갑해질 뿐이다. 앉아서 생각만 한다고 이 난국이 극복되지 않는다. 나가서 움직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전거 타기다.


자전거 타기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 사용하던 기어를 다른 기어로 바꾸는 변속기(變速器)다. 여기서 말하는 변속기는 엄밀히 말하면 속도 변경을 위한 기어 변속이 아니라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의 속성(屬性)으로 바꾸는 변속기(變屬器)다. 삶의 본질적 속성은 쉽게 바꿀 수 없다. 이전과 다른 삶을 살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는 강력한 전환 무기는 바로 자전거 타기다. 자전거에 몸을 싣고 페달을 밟기 시작하면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몸의 변화가 일어날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말끔하게 정리되는 기분이 든다. “정신의 싸움은 육체를 쑥밭으로 만들지만, 육체의 싸움은 정신을 투명하게 만든다”(92쪽). 이성복의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 한다》에 나오는 말이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 머리로 생각이 거듭될수록 몸도 피곤해지지만 몸을 움직이는 육체노동이나 운동을 하면 할수록 정신은 한가해지고 비로소 생각의 단서를 잡아 골머리를 앓던 문제까지 해결될 실마리가 보인다. 자전거 타기는 내 몸은 자전거 안장에 앉아 있는 것 같지만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다리로 페달을 밟아야 한다. 자전거 타기는 삶의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는 획기적인 무기다. 망설이지 말고 자전거를 끌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새로운 운명이 펼쳐질 것이다. 자전거 타기는 운명조차도 혁명적으로 바꿀 수 있는 전환기(轉換器)다. 이전과 다른 삶을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전거를 타고 세상과 만나라.


자전거 한강 라이딩 기록.jpg


②자전거 타기는 충전기(充電器)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다. 너무 바쁘게 지냈지만 여전히 바쁘다. 바쁜 생활이 나를 여유롭게 만들지 못하고 여전히 뿌듯하지 않고 빠듯하게 느껴지는 삶은 왜 그런 것일까. 목적지까지 도달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가정법 인생은 여전히 목적지는 어딘지 모를 정도로 갈 길이 멀다. 바쁘게 살아왔지만 여전히 할 일은 끝없이 이어지고 일을 하면서 느끼는 보람과 가치는 별로 없다. 하루가 지나도 내일을 기다리는 마음은 전혀 설레지 않는다. 오히려 내일을 맞이하는 마음은 불안감으로 가득 차고 시간이 지날수록 순간을 버텨낼 에너지는 방전되는 느낌이다. 밤새 충전한 휴대폰 배터리가 날이 갈수록 지속되는 시간이 짧아지는 것처럼 뭔가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어도 예전처럼 사기가 충전되지 않고 무기력해지기만 한다. 기대를 갖고 뭔가를 줄기차게 시작하지 못하고 자꾸 다른 사람에게 기대려고 한다. 의지(意志)를 발휘해서 용기와 열정을 갖고 어제와 다르게 살고 싶지만 현실은 자꾸 누군가에게 의지(依支)하고픈 나약한 마음만 들게 만든다. 삶의 돌파구를 찾아 색다른 에너지를 충전하고 싶을 때, 안성맞춤인 운동이 바로 자전거 타기다.


“기운이 떨어질 때, 날이 어두워질 때, 하는 일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 희망을 가져봤자 소용없다고 생각될 때, 자전거에 올라 길을 따라 훌쩍 떠나보라. 자전거 타는 데에만 집중하고 머리를 비우는 것이다.” 영국의 의사이자 소설가인 아서 코넌 도일의 자전거 명언이다. 자전거 타기는 타면 탈수록 유산소 운동은 물론 근육운동이 함께 일어나면서 활기를 되찾게 만드는 충전기(充電器)다. 자전거 타기는 목적지를 향해 내달리는 속도전이 아니다. 오히려 자전거 타기는 타면 탈수록 힘든 삶을 버티게 만들어주는 항우울제다. 자전거는 타기만 그냥 굴러가는 오토바이가 아니다. 자전거 타기는 내가 힘들인 만큼만 여기서 저기로 옮겨주는 아날로그적 노동을 요구하는 원동기(原動機)다. 자전거를 굴러가게 만드는 힘이 자전거라는 기구에서 나오지 않고 자전거에 올라탄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내가 힘을 내지 않으면 자전거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것도 한 번 힘을 내고 나면 그 힘으로 계속 굴러가지 않고 계속해서 힘을 들여야 힘이 들어간다.


놀라운 사실은 힘이 들어가는 페달을 밟을수록 더 큰 힘이 나도 모르게 생기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조금만 타도 힘이 들어서 포기하고 싶었지만 자전거 타기는 타면 탈수록 지방은 가속적으로 타면서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의지를 불태워 살아갈 사기를 충전할 수 있다. 자전거 위에서 안간힘을 쓰는 한 사람의 힘겨운 전쟁은 무모한 싸움으로 끝나지 않고 자전거가 땅과 싸우면서 앞으로 굴러간 만큼 땀 흘리며 에너지를 축적하는 과정이다. 땀은 근육이 감동해서 흘리는 눈물이다. 그 눈물은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살아내게 만들어주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자전거를 끌고 세상 속으로 몸을 던져보라. 놀랍게도 내 몸은 활기가 넘치면서 새로운 에너지로 충전되는 느낌을 몸으로 알게 된다.


자전거 한강.jpg


③자전거 타기는 세탁기(洗濯機)다.


나이가 들면서 색다른 생각 잉태를 방해하는 각종 생각의 때가 생긴다. 생각의 때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습성, 원래 그렇다고 치부하는 고정관념, 물론 그렇다고 이해하는 타성, 세상을 자기 편향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선입견과 편견, 그리고 식상한 상식에 기반해서 생각이 반복되면서 참신한 생각을 방해하는 각종 이물질이다. 생각의 때는 습관적으로 반복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관습에 젖어 이전 생각을 반복하려는 관성이다. 생각의 때는 누구나 다 갖고 있다. 문제는 생각의 때로 굳어진 정도나 강도다. 오랫동안 타성에 젖어 습관적으로 비슷한 생각을 반복해온 사람은 웬만한 충격으로는 생각의 때가 벗겨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게 각질이 뇌세포에 달라붙어 있다. 이런 생각의 때들은 주로 어제 했던 방식을 반복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색다른 생각 세포 증식을 방해하는 장본인으로 생긴 이물질이다. 낯선 생각에 접속하지 않고 내 생각대로 안 풀리면 기존 생각을 버리지 않고 고집을 부리면서 생각의 때가 더 견고하게 생긴다.


앉아서 생각의 꼬리를 물고 생각을 이어갈수록 참신한 생각이 떠오르기보다 부정적이거나 틀에 박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악순환이 반복된다. 타성에 굳어져버린 생각 근육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생각 마사지가 필요하다. 생각 근육도 용불용설(用不用設)이 적용되어 쓰면 쓸수록 발달하지만 쓰지 않고 방치해두면 생각 때가 끼고 각질이 생겨 유연한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생각 근육이 굳는다. 생각 근육이 굳어 유연성을 잃게 되면 틀에 박힌 생각을 일삼으며, 고정관념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고정관념’이 ‘고정 본능’으로 바뀌어서 급기야는 치유불가능에 가까운 ‘고장 관념’(고장 난 관념의 파편)이 내 생각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고장 난 관념의 파편, 즉 ‘고장 관념’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생각 경락 마사지가 필요하다. 생각 경락 마사지는 뇌에 주는 색다른 자극이자 생각 세탁이다. 자전거 타기는 생각 경락 마사지다.


외부로부터 낯선 생각이 불법 침입하지 않고서는 기존 생각은 틀에 박힌 방식대로 효율적으로 돌아간다. 뇌는 지극히 편안함을 유지한 상태로 기존 알고리듬대로 반복하려는 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의 때를 벗겨내는 강력한 방법이 바로 자전거 타기다. 틀에 박힌 일상을 박차고 낯선 세상과 만나는 방법, 자전거 타기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 “사유는 비자발적인 한에서만 사유일 수 있고 사유 안에서 강제적으로 야기되는 한에서만 사유일 수 있다. 사유는 이 세계 속에서 불법침입에 의해 우연히 태어날수록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된다. 사유 속에서 일차적인 것은 불법침입, 폭력, 적이다”(310-311쪽).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나오는 말이다. 현실의 시름을 뒤로하고 일단 자전거에 몸을 싣고 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늘 만났던 자연과 일상이 새롭게 다가온다. 늘 거기에 있었지만 달리는 자전거 위에서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며 만나는 주변의 익숙한 일상도 낯설게 다가오는 상상력의 보고일 수도 있다. 자전거 타기는 기존 생각의 때를 제거하는 세탁기일 뿐만 아니라 낡은 생각이 생각의 때로 굳어지기 전에 말끔히 없애주는 청소기이기도 하다.


자전거를 타고 밖으로 나가 달리다 보면 몸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동안 유리창에 낀 성에처럼 뿌옇게 느껴진 희미한 생각이나 생각의 단서나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허공을 헤매던 근거 없는 생각도 확실한 근거지를 마련하면서 맑은 생각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온몸을 전율케 하는 마주침, 전신이 부들부들 떨려오는 느낌과 교감만이 우리 영혼에 진드기처럼 딱 달라붙어 있는 편견과 선입견을 떨쳐낼 수 있습니다”(259쪽). 심강현의 《욕망하는 힘, 스피노자 인문학》에 나오는 말이다. 자전거 타기는 전율하는 행복감이 온몸으로 엄습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게 만드는 묘약이 아닐 수 없다. 그때 내 생각 세포에 달라붙은 과거의 생각 벌레들이 힘없이 바람에 날리듯 어느 순간 사라지는 통렬한 쾌감을 맛보게 된다.


silhouette-683751_960_720.jpg


④자전거 타기는 보자기다.


주변을 보면 가방형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보자기형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가방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은 주로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보자기의 이미지를 추구하는 사람은 타자 중심으로 살아간다. 가방은 자신을 중심에 세우지만 보자기는 타인을 중심에 세운다. 가방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이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생각과 의견은 무조건 나에게 맞춰야 가방인 나에게 수용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의견이라도 가치판단의 기준이 나에게 있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면 좋은 것이고 싫다고 생각하면 싫은 것이다. 그래서 가방은 언제나 나에게 맞추라고 강요한다. 이에 반해 보자기는 철저하게 타자 중심적이다. 나를 앞세우지 않고 타인이 요구하는 대로 감싸 안고 어루만져주며 포용하고 포옹해준다. 언제나 역지사지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상대에게 변하라고 요구하기 이전에 나를 먼저 바꿔 상대방의 요구에 상응한다.


가방과 보자기는 소통을 하는 방식에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소통은 집어넣는 ‘가방’이 아니라 다름을 끌어안는 ‘보자기’와 닮았다. 보자기는 ‘감싸 안는’ 것이며, 가방은 ‘집어넣는’ 것이다. 소통은 다양한 의견을 나의 가치판단 기준과 잣대로 하나의 가방에 집어넣는 게 아니라 보자기로 감싸 안는 것이다. 자기 변화를 전제하지 않는 소통은 소탕이다. 신영복 교수님의 말씀이다. 가방은 언제나 자기가 중심이기에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나에게 맞추라고 요구한다. 이들에게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가방을 중심으로 동화될 뿐이다. 반면 보자기는 내가 먼저 변화를 시도하고 타자의 자유로운 변화도 감싸 안는다. 이들에게 변화는 새로운 시도이자 창조다. 가방에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집어넣으려고 하지 말고 보자기로 다름을 감싸 안아야 더불어 지향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마음을 여는 소통이 시작된다.


자전거 타기는 철저하게 가방이 아니라 보자기의 이미지에 가깝다. 출발은 자전거라는 형체에 사람이 맞추지만 그 후부터는 자전거와 사람이 혼연일체가 되어 자전거가 달리는 길의 요철(凹凸), 굴곡, 오르막과 내리막이 요구하는 변화무쌍함을 감싸 안아야 한다. 바람을 맞이하는 자전거 역시 보자기처럼 바람을 품고 받아줘야 한다. 순풍이든 역풍이든 자전거를 타면서 내 몸으로 끌어안고 바람과 함께 앞으로 사라져야 한다. 작렬하는 태양빛도 거부할 수 없다. 온몸으로 받아들여 페달을 밟고 앞으로 나가려는 안간힘의 에너지 원천으로 바꿔내야 한다. 달리면서 만나는 모든 풍광도 사진기로 찍듯이 찍은 다음 내 몸에서 작동하는 오감이 원하는 정보에 맞게 가공해서 축적해놓는다. 그중에 어떤 이미지는 롤랑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틀에 박힌 방식으로 다가오는 스튜디움(studium)의 이미지가 있을 테고, 강렬한 자극을 추면서 뇌리 속을 파고드는 푼크툼(punctum)처럼 깊은 깨달음의 흔적으로 파여 있을 것이다. 자전거 타기는 자전거를 타고 물리적으로 앞으로 나가는 육체적 운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전거 타기는 세상의 다양한 측면을 내 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우주와 대자연이 매 순간 다르게 만나는 우발적 접촉이자 감각적 충돌이다. 거기서 인간의 신체와 정신은 물론 영혼은 어제와 다르게 깨어난다. 자전거 타기는 과거에 만났던 이미지가 미지의 미지와 우연히 접속하면서 낯선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사색의 오솔길과 만나는 길이다. “기억의 반대말은 망각이 아니다. 기억의 반대말은 상상이다. 기억은 과거의 길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은 상상이다. 미래는 기억하는 자가 아닌 상상하는 자의 것이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 이스라엘의 페르세 전 대통령의 말이다. 자전거 타기는 세상과 지금 만나는 일이지만 과거 내 삶을 돌이켜 봄과 동시에 가보지 않은, 아니 자전거를 타고 미지의 세계를 접수하는 과정이다. 자전거 타기는 과거에서 배우고 현재를 살며 미래를 상상하는 3중주 연주다.


자전거 한강1.jpg


⑤자전거 타기는 소나기다


갑자기 소나기를 만날 수 있다. 내가 찾는 자기도 갑자기 온다. 하지만 자전거를 타다 보면 원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발생하는 돌발변수가 많다. 기상 이변으로 기상예측이 정확하지 않다. 불확실한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듯, 기후변화로 내일의 기상을 사전이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다. 언제 어떤 날씨가 나타날지 점차 알 수 없어진다. 삶도 마찬가지다.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과정을 사전에 어느 정도 결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계획대로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계획대로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원하는 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삶은 생각대로 풀리지 않을 때 이전과 다른 생각이 생긴다. 정상적인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면 사람은 정상적으로 생각한다. 이전과 다른 상황에 직면할 때 사람은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색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래야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난국도 돌파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한다. 이전과 다른 상황은 그럼 어떤 상황인가? 이전과 다른 상황은 이전과 다르게 직면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이자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상황이다. 이전과 다른 상황을 몸으로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아무리 다르게 설명해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예측 불허의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이 궁금한가? 자전거를 타고 복잡한 세상으로 나가보라. 현장에서 생각지도 못한 생각의 지도(地圖)를 얻을 수도 있다.


자전거를 타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다고 생각해보자. 소나기가 그치기를 안전한 곳에서 기다렸다가 피해 가는 방법도 있다. 사전에 준비한 우비를 입고 라이딩을 계속하는 방법도 있다. 아예 라이딩을 포기하는 방법도 있지만 바람직하지 않다. 소나기를 만나면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소나기를 맞으면서 빗속 라이딩을 즐기는 것이다. “폭우 속 깨달음이란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일이 생긴다 해도 사실 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불안감에서 해방되는 것이다”(77쪽). 벤 어빈의 《아인슈타인과 자전거 타기의 행복》에 나오는 말이다. 예전에 장대비를 뚫고 마라톤을 즐긴 적이 있다. 뜨거운 몸속 열기가 밖으로 나오면서 빗줄기와 만날 때 몸으로 느끼는 희열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처럼 법대로 안 되면 내가 방법을 개발하면 된다. 법은 마음대로 만들 수 없지만 방법은 내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


법은 과거 지향적 해석의 문제지만 방법은 미래 지향적 실천의 문제다. 법은 책상에서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할 수 있지만 방법은 책상에서 다각적으로 구상하기 어렵다. 방법은 실행하는 가운데 새롭게 부각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길로 가다 안 되면 다른 길로 가보고, 이렇게 해서 안 되면 이전과 다르게 시도하는 가운데 색다른 방법이 떠오른다. 자전거 타기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만나게 될 돌발 변수를 미리 예측해서 다 결정할 수 없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동안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 임기응변적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삶은 각본대로 진행되는 연극이 아니라 각본대로 되지 않는 임기응변이다. 자전거 타기는 생각지도 못한 위기에 대응하는 생각지도 못한 묘기를 개발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bicycles-1867046_960_720.jpg


⑥자전거 타기는 탐지기(探知機)다.


대중교통이나 자동차를 몰고 출퇴근하면서 다니는 도로는 정체되면 대책이 없다. 그냥 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지루하다고 갑자기 차를 돌려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유턴해서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자동차에 몸을 싣고 가면 세상은 나와 무관하게 저편에서 수동적으로 나에게 끌려오는 듯하다.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만나는 삼라만상은 오고 싶지 않지만 달리는 자동차 속으로 빨려 들면서 자기 존재를 숨기며 순식간에 사라진다. 늘 가던 길을 반복해서 다니면서 만나는 차창 밖의 풍경도 어제 그대로처럼 보인다. 삶을 어제와 다르게 바라보려는 호기심 어린 눈이 있어야 늘 살아가는 일상에서도 비상하는 상상력의 텃밭을 가꿀 수 있다.


틀에 박힌 일상에서도 호기심이 생기면 늘 만나던 일상을 탐지(探知)하기 시작한다. 탐지는 익숙함에서도 낯선 구석을 찾아내 어제와 다른 눈을 바라볼 때 시작된다. 탐지가 시작되려면 내가 먼저 사물이나 현상에 다가가 말을 걸어야 한다. 가만히 앉아서 차창 밖으로 다가오는 숱한 현상을 아무리 바라봐도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익숙한 세상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만나는 숱한 현상에 대해 나는 아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세상을 향해 오감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전거는 내가 사물이나 현상에게로 직접 다가가 말을 걸면서 탐지를 시작한다. 그것도 늘 가던 길만 가지 않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향해 거침없이 달리면서 탐지한다.


자전거는 이제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길도 얼마든지 갈 수 있다. 마치 정찰기를 타고 세상 물정을 살피듯 자전거를 타고 만나는 길은 이전에 갔었지만 다른 눈으로 만나는 길이며, 이전에 가본 적 없는 길을 난생처음 만나면서 경이로움을 느끼는 과정이다. 처음으로 탄천 자전거 기를 타고 성수대교 북단까지 야간에 라이딩했던 첫 경험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내가 가는 자전거 길을 속삭이듯 안내해주고 가로등이 다른 길로 새지 않도록 빛을 밝혀 주었다. 처음으로 만나는 한강 야경은 강 건너 불야성을 이루는 불빛보다 강변을 사이에 두고 묵묵히 바다로 향하는 강물이 소리 없는 속삭임으로 내게 말을 거는 모습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었으며, 한밤의 적막을 깊게 만드는 야상곡이었다. 분당 탄천 도로에서 멀게만 느껴졌던 성수대교 북단까지 왕복하면서 비록 밤이라 주변 환경을 잘 볼 수 없었지만 몸으로 다가오는 바람결의 차이와 주변의 나무와 풀들이 빚어내는 저마다의 위치 정보가 곳곳마다 다르게 느껴졌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서 열리는 오감이 일종의 탐지기처럼 주변 풍경을 빠르게 입력하면서 해석하는 감각적 지각 작용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반복되고 있었다.


두 발은 열심히 페달을 밟는 순간에도 두 눈과 귀를 비롯한 모든 감각은 멀리서 다가오는 사물이나 현상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다. 호기심을 품고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풍경에는 처음 만나는 낯선 사물이나 현상이 나에게 해석을 요구하는 여운을 품고 있다. 자전거는 세상 속으로 달려 들어가면서 자연 삼라만상은 물론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삶의 모든 측면들을 불러내 하나둘씩 탐색하며 대화를 나누는 움직이는 탐지기인 셈이다. 자연은 당연하지 않다. 당연하지 않은 자연 속으로 들어가 마음껏 탐구하는 자전거 여행이야말로 가장 멋진 여행이 아닐 수 없다.

cyclist-3202481_960_720.jpg


⑦자전거 타기는 격동기(激動期)다.

“(연탄보일러에서 끓고 있는) 물은 불에 저항한 만큼 따뜻하다”(103쪽). 함민복 산문집, 《눈물은 왜 짠가》에 나오는 말이다. 물이 불에 저항하지 않고 요리조리 잔머리 굴리면서 피해 갔다면 물은 불과 충돌하지 않고 뜨겁게 달아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먼동이 터오는 새벽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우선 건강한 몸으로 견뎌내야 한다. 그리고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오면서 밝은 세상을 희망차게 맞이하기 위해서는 뭔가를 끊임없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마음을 다잡고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실력을 쌓아놔야 실기(失期) 하지 않는다. 언제 내가 어떤 장소에서 기회를 맞이할지 모른다. 지금은 비록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지만 나에게도 바닥을 치고 정상으로 솟구칠 때가 온다. 삶은 음양이 연주하는 다양한 이중주다. 절망과 희망, 밑바닥과 정상, 배경과 전경, 음지와 양지, 걸림돌과 디딤돌, 내리막과 오르막, 실패와 성공, 슬픔과 기쁨, 낯선 길과 익숙한 길,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라고 노벨문학상 수상자 쉼보르스카는 ‘두 번은 없다’에서 외쳤다.


하지만 평범한 직장인에게 하루는 어제와 다르지 않다. 다가오는 내일 걸어갈 길도 지금 가지 걸어온 길과 별반 다르지 않은 아는 길이다. 문제는 그 아는 길을 가도 가도 알 수 없는 길이라는 점이다. 전쟁과도 같은 삶을 살지만 격투기를 벌였던 어제와 비슷한 격투기가 기다리는 마음을 지치게 만든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매일매일 높아지는 목표는 달성 이전에 이미 좌표도 모른 채 또 다른 고속 열차를 타고 질주하지 않으면 달성되기 어렵다는 불안감이 가중된다. 하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목숨을 이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현실은 냉혹하다. 문제는 그 목표를 달성하다 내 목숨조차 위태로운 난국과 지경이 내 앞에서 무거운 중압감으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자전거 타기는 온 힘을 모아 내 두 발에 연결된 페달에 전달해서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는 전투기나 다름없다. 사투 끝에 오르막을 오르고 나면 힘 안 들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내리막을 만난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동안의 꿀잠 같은 휴식이다. 다시 평지나 오르막을 달리려면 힘차게 페달을 밟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자전거 타기는 모든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다. 오르막을 기어오를 때는 기어 변속을 해서 최대한 힘을 비축하면서 천천히 올라간다. 정말 매 순간에 안간힘을 써야 겨우 올라간다. 내려갈 때는 마냥 힘을 빼고 넋 놓고 내려가서는 안 된다. 다가올 앞길에 대비하면서 라이딩 전략을 구상하고 모색하는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난 평생 결정적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하길 바랐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 Bresson)의 말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매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다. 오르막은 오르막대로, 내리막은 내리막대로 결정적인 순간이다. 내려가면서 잠시 쉬는 순간도 결정적인 순간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들끓는 격정을 적확한 단어를 포착해서 문장을 건축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사라진다. 아무리 자전거 타기가 아무리 격동기라고 할지라도 격동의 순간을 드러내는 적확한 단어가 선택되지 않으면 감동을 전할 수 없다. 내리막을 타고 흐름을 타던 자전거 타기는 다시 오르막을 만나자마자 안간힘이 허벅지에 명령을 내린다.


사투를 벌이며 자전거를 타며 남기는 얼룩과 무늬에 어울리는 단어를 만나기 위해 또 한 번의 사투를 벌인다. 주어가 앞장서고 동사가 그 뒤를 따르더니 목적어를 데리고 나타난다. 그것만으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목적어 앞에 형용사를, 동사 앞에 부사를 배치해서 고조된 감정을 격앙되게 표현해보고, 무심코 움직였던 동사에 열정을 불어넣는다. 써 놓고 보니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해서 다시 형용사의 거품을 걷어내고 부사의 부지런함을 동사에게 맡기기로 했다. “단어들이 모여 앉아 저마다 품은 세월의 무게를 재고 있다. 내리막길에서 겪은 절망, 밑바닥을 기어 다니며 겪은 좌절, 혼돈 속에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방황이 어느 순간 삶의 방향을 잡아준 원동력이 된다”(참고: 유영만의 《책 쓰기는 애쓰기다》, 150쪽). 오늘도 우여곡절의 자전거 도로를 타고 오면서 몸으로 느낀 감정과 깨달음에 어울리는 단어를 선정, 문장에 담아내는 고된 글짓기 노동을 시작한다. 작가가 글을 토해내며 겪는 노동의 강도가 독자의 기쁨의 강도로 직결되기를 희망해본다.


한강 자전거 1.jpg


⑧자전거 타기는 생채기다.


빠르게 성장할 수 있지만 빠르게 성숙할 수는 없다. 성장은 효율과 속도를 친구로 사귈 수 있지만 성숙은 효율과 속도와 어울리지 않는다. 성숙은 오로지 대가를 치른 만큼만 느리게 이루어진다. 빠르게 성장하는 비법이나 매뉴얼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고속으로 성장하는 몇 가지 비법이나 비결을 소개하는 책도 많다. 속전속결 형태로 성장의 효율과 속도를 올리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사람도 많다. 성숙은 오로지 자신이 몸으로 겪으면서 넘어지고 자빠지는 과정에서 느리게 삶의 지혜가 축적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성숙에 이르는 길은 표준화시켜 일정한 논리체계로 엮어낼 수 없는 저마다의 고유하고 특수한 사례로 밖에 정리되지 않는다. 저마다 다른 상황에서 다른 문제의식을 갖고 다른 경로를 밟아가면서 몸이 직접 겪은 역동적인 삶의 얼룩과 무늬의 합작품이기 때문이다.


자전거 타기는 성장이 아니라 성숙을 통해서 내 몸에 아로새기는 생채기 만드는 과정이다. 근육에 생긴 생채기만큼 새살이 근육으로 변신한다. 생채기는 일부러 몸에 흉터를 만들어 아프게 한 흔적이 아니라 자전거를 타면서 넘어지거나 장애물에 부딪히면서 나도 모르게 내 몸에 새겨진 영광의 상처다. “나의 고통은 나의 생명성 속에서만 유효한 실존적 고통인 것이다. 인간의 존엄은 그 개별성에 있다. 나의 병은 다른 모든 유사한 병과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개별적 존재의 개별적 병을 치료한다는 말이 되어야 할 것이다"(147쪽).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에 나오는 말이다. 자전거에 몸을 실은 한 개별자는 자신의 통증을 몸으로 감지하며 오늘도 페달을 밟으며 바람을 가른다.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산화한다.


“때로는 진지한 숙고보다 횡격막의 발작이 우리에게 더 많은 지혜를 주는 법이다.” 발터 벤야민이 남긴 명언이다. 몸이 정상이 아닌데 자전거를 타면 더 망가지지나 않을까, 오랜 고민과 검토를 머리로 해봐야 두통밖에 남지 않는다. 두통을 치료하는 진통제를 먹기보다 자전거에 몸을 싣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과감한 결단이 횡격막을 발작하게 만든다. 인생은 생각보다 고달프다. 아니 울면서 태어나서 울면서 죽는다. “웃음은 울음 뒤에 배우는 것.” 김선우의 시집, 《녹턴》 중에서 ‘고쳐 쓰는 묘비’의 일부다. 자전거 타면서 웃으려면 울선 울면서 통증을 극복하며 자전거에 몸을 실어야 한다. 삶의 모든 순간은 힘든 순간이다. 힘든 순간이 지나가면 편해지겠지만 또 다른 고통이 이전과 다른 아픔을 품고 다가온다. 고통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타는 게 자전거 타기다. 안 아픈 곳이 없는 몸을 자전거에 싣고 앞으로 꾸역꾸역 나가다 보면 아픈 몸이 아프지 않다고 고백하는 시점이 온다. 그때 자전거는 통증을 치료하는 의료기기가 된다.


몸을 완치하고 자전거를 타겠다는 결심은 죽기 전에 저전거를 타지 않겠다는 각오의 다른 말이다. 아픈 몸을 아픔으로 다스리는 방법, 신체적 고통을 완화시키는 한 가지 방법이다. 운동해서 생긴 근육통은 운동으로 다시 풀어야 한다.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려 있다”(9쪽).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나오는 말이다. 파란만장한 삶인 남긴 아픔은 내가 어쩔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그것으로 야기되는 고통은 나의 심리적 선택의 문제다. “다른 미래는 현실에서나 시에서나 힘을 다한 겨룸 끝에 아침처럼, 정강이의 상처와 함께 올 것이다”(109쪽). 이영광의 《왜냐하면 시가 우리를 죽여주니까》에 나온다. 아픔이 아침의 희망과 버무려져 시작한 이른 아침의 라이딩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불러올 것이다. 해질 무렵 온몸으로 파고드는 고통은 서쪽 하늘의 노을을 만나면서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cyclist-5507225_960_720.jpg


⑨자전거 타기는 제각기다.


어떤 분야든지 해당 분야를 먼저 개척한 사람이 나름의 노하우나 꿀팁을 정리한 글이나 책이 많다. 자전거만 해도 그 종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저마다의 경험담에 비추어 나 같은 자전거 초보자에게 건네주는 조언과 충고다. 참고는 하지만 책상에 앉아서 그런 수많은 비법이나 비결을 머리로 배운다고 그대로 내 몸으로 이식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만고불변의 몇 가지 원칙만 염두에 두고 나머지는 내가 직접 몸으로 겪으면서 내 몸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전거 타는 방법이나 주의할 사항을 하나둘씩 익혀나간다. 자전거 수리요령부터 기어 변속 방법, 안장 통 없이 오랫동안 타는 방법, 언덕을 오르는 비법, 자전거 복장과 기타 액세서리 구입 방법, 대중교통을 이용해 자전거 이동시키는 방법, 짧은 기간에 자전거 국토 종주하는 방법, 종주길에 만나는 베스트 음식점과 숙박지 선별방법, 그리고 소나기나 펑크처럼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대처하는 방법처럼 자전거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모든 사항을 빠짐없이 공부하려면 자전거 학과라도 졸업해야 될 정도다. 자전거학 개론 책을 수백 권 읽어본들 자전거를 직접 몸으로 겪으면서 타보지 않으면 자전거 타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관념의 파편일 뿐이다.


나의 신체구조, 내 몸이 자전거를 만나 움직이는 방식, 자전거에 실린 몸이 세상과 만나는 방식, 그리고 자연과 만나면서 내 몸이 반응하는 원리는 저마다 제각기 다르다. 자전거를 타야 하는 이유는 하늘과 땅, 그 사이를 뚫고 달리는 자전 거이 실린 인간의 몸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그 쾌감과 희열과 감동을 언어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잘 몰라서 무지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세상사를 잘 알고 있어도 지금 자신이 채용한 정보처리 시스템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몸소 나서서 무지해집니다. 자신의 지적 틀을 바꾸도록 요구해오는 정보의 입력을 거부하는 아집이 바로 무지라 불리는 것이지요(85쪽).” 우치다 타츠루의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에 나오는 말이다. 내 몸 밖에서 내가 갖고 있는 과거의 지식과 경험, 고정관념이나 통념에 충격을 주는 또 다른 체험적 자극이 들어오면 과감하게 바꿔버려야 되는지를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 이런 과정 역시 자전거에 몸을 싣고 직접 타보지 않고서는 자전거에 대해 내가 얼마나 무지한 지를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어린 시절에 자전거를 타보았지만 자전거에 관한 한 완전 초보, 자린이다. 국토종주를 넘어 그랜드 슬램을 목표로 자전거에 본격 입문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자전거와 한 몸이 되기 위해 자주 라이딩을 나서려고 한다. 우선 중간에 약간의 휴식을 했지만 약 2시간 동안 25Km를 분당과 성수대교나 동호대교를 왕복하면서 약 1000Kcal의 열량을 소모하는 라이딩을 해보니까 말로만 듣고 눈으로만 봤던 자전거 타기 각종 노하우나 팁은 머리로 배우는 게 아니라 몸으로 익히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아를 규정하는 것은 고통과 감각이다. 당신이 느낄 수 없는 것은 당신이 아니다. 느껴지지 않는 것은 선뜻 돌봐 줄 수가 없다. 당신의 손발이 당신에게서 잊힌다. 반면에 고통은 지켜준다. 눈에 뭔가가 들어가면 즉시 그에 대해 대처하기 마련이다(p.153).”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에서 만난 명문장이다.


고통과 감각으로 자전거 타기를 배우면 내 몸에 맞는 방법이나 방식이 무엇인지를 몸이 알아서 새긴다. 앉아서 뭔가를 배우는 과정은 다분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다. 밤공기와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앞으로 달리는 과정에서 반겨주는 가로등 불빛이 그림자 친구를 가로등이 바뀔 때마다 만들어준다. 내가 달리면서 그림자 친구는 자꾸만 뒤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과정을 반복한다. 수많은 내가 그림자로 변신하면서 뒤로 밀려나고 대신 또 다른 나는 자전거에 몸을 싣고 앞으로 나간다. “나를 알 수 없는, 내가 뜻대로 안 되는, 내가 무서운 하루가 또 내게 왔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생각해내야 한다(44쪽).” 이영광의 《나는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에 나오는 말이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전거를 나를 이끌고 앞으로 나가지만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돌발변수를 만나기도 하지만 그걸 이겨내는 방식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제각기 방식으로 극복하는 수밖에 없다.


한강 자전거4.jpg


⑩자전거 타기는 이야기다.


나는 내가 하는 이야기다. 나의 생각과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 이야기 속에 내가 담겨 있다. 나를 바꾸려면 이야기를 바꾸면 되고, 이야기를 바꾸려면 삶을 바꾸면 된다. 나와 이야기와 내 삶은 삼박자로 맞물려 돌아가는 트라이앵글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루 종일 힘든 삶을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부터 남의 이야기에 빠져 살아간다. 삶의 위기가 오고 있다는 조짐은 내 이야기보다 남의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 시간이 많아질 때다. 어쩔 수 없는 제도적이고 시스템적인 조건과 환경 때문에 남의 이야기에 치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물론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기도 하다. 환경과 조건은 내 힘으로 바꿀 수 없지만 그 속에서도 내가 어떻게 마음먹고 행동할지는 내가 결정할 수 있다. 힘들고 피곤한 삶 속에서도 지친 몸을 달래줄 아름다운 사연은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고, 나에게 힘을 주는 소소한 이야기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경이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만이 남을 놀라게 만드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라야 감동도 배가된다. 꼭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만들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평범한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비범한 상상력을 일깨울 수 있다. 의미심장한 이야기는 의미를 심장에 꽂아 사람들이 살아가는 의미를 재음미하게 만들 수 있다. 자전거에 몸을 싣는 순간 나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것이 내 삶을 일정한 사건과 사고로 연결시켜 한 편의 연대기나 일대기가 될 수도 있고,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한 인간의 느낌과 각성이 버무려진 여행기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자전거 타기는 힘겹게 하늘로 올라가 높은 곳에서 우리 삶을 바라보는 여객기가 아니라 두발로 움직인 만큼 세상과 가까이 지내며 우리 삶을 더 행복한 감동으로 몰고 갈 이야기의 원동력이라는 점이다.


누군가는 자전거를 경시하지만 누군가에게 자전거는 경탄의 대상이자 경이로운 삶의 즐거움을 주는 마법의 기구다.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자전거는 그저 관망과 관조의 대상이지만 그걸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자전거와 혼연일체가 되어 매일 자전거 타기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사람에게는 자전거는 생필품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은 경시하고 경멸하는 사람보다 경이로움을 받아들이며 한탄보다 감탄하는 사람이 이끌어간다. 모든 사람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게 있다. 매일 마시는 머그컵에 불과하지만 그 컵에는 누군가의 애틋한 사연과 눈물 나는 스토리가 있는지도 모른다. 싸구려 머그컵이라고 경시하거나 경멸할 것이 아니라 이런 머그컵에서도 경이로운 삶의 기적을 일으킬만한 사연이 숨어 있고, 그 사연 속에서 놀라운 사유의 싹이 자라고 있음을 누가 감지할 수 있을까. 자전거를 타면서 만나는 무수히 많은 사물과 생물,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 같기도 하고 새벽의 서막을 알려주는 서곡 같기도 하다.


온종일 사투를 벌이며 먼 길을 달려완 라이더에게 서쪽 하늘로 넘어가는 노을은 농익은 가을의 세레나데 같기도 하다. 자전거에 몸을 싣고 여기서 저기로 움직이는 동안 라이더는 자연에서 들리는 소음을 소리로 변환시켜 들려주는 음악가가 되기도 하고 평범한 삼라만상에서 저마의 독특한 이미지로 조합하는 화가가 되기도 한다. 아니면 달리면서 내 품으로 다가오는 현상을 품고 촌철살인의 지혜의 그물로 시심을 걷어 올리는 시인이 되기도 하고, 지금껏 살아온 수수께끼 같은 인생을 한 편의 드라마나 장편의 소설로 엮어내는 드라마 작가나 소설가로 변신하기도 한다. 이처럼 자전거를 타면서 세상과 만나는 라이더는 스스로 창조적인 존재로 거듭나면서 달려가는 길 위에서 어제와 다른 행복한 이야기를 직조하는 스토리텔러다.


한강 자전거 2.jpg


"젊음은 알지 못한 것을 탄식하고, 나이는 하지 못한 것을 탄식한다(If youth only knew: if age only could).“ 프랑스 인문주의자, 앙리 에스티엔(Henri Estienne)의 말이다. 자전거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고 한탄할 일도 아니고, 자전거를 타지 못했다고 탄식할 일도 아니다. 더 늦기 전에, 더 늙기 전에, 아주 죽기 전에 당신이 자전거를 타야 할 단 한 가지 이유는 타보면 안다. 그 이유를 알려준들 타보지 않고서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몸으로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 당장 자전거 샵에 가서 내 몸에 맞는 자전거를 사자. 그리고 당장 밖으로 끌고 나가 내 몸으로 자전거를 타고 세상을 품어보자. 생각보다 이 세상은 경이로움의 연속이다. 앉아서 경시하고 경멸하는 한심한 삶보다 나가서 경이로움을 몸으로 만나면서 경탄에 마지않는 감동적인 순간을 맞이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 자전거 타기임을 몸으로 느껴보자. 지금까지 말한 자전거 타기에 관한 10가지 이유를 몸으로 느끼지 않는 사람은 직무유기다.


couple-5046190_960_720.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칩거’에서 ‘쾌거’로 바꾸는 경이로운 인생의 동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