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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堪當)할 수 있어야
담당자(擔當者)가 될 수 있다

모든 담당자(擔當者)는 버티고 견디며 감당(堪當)하는 책임자다

모든 담당자(擔當者)는 버티고 견디며 감당(堪當)하는 책임자다

감당(堪當)할 수 있어야 담당자(擔當者)가 될 수 있다


노동은 성공한 사람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성공의 발판이 되었다고 말하는 추억이 아니다. 노동은 저마의 위치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일생동안 사투하며 하루를 만들어가는 일상이다. 성공한 사람의 과거의 노동 경험을 미화시켜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노동 현장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들, 특히 기약 없이 힘든 노동을 반복해야 되는 사람들에게 노동은 먹고살기 위한 생존경쟁이다. 밑바닥에서 노동을 한다고 모두가 불행하지 않으며, 어제와 다르게 밑마닥을 인생을 산다고 정상에 갈 수 없다는 말도 아니다. 누군가는 소외되고 천대받은 곳에서 힘겨운 육체노동을 하면서도 삶의 보람과 가치를 느낀다. 마땅히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주어진 일을 통해 나를 발견하고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찾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도 많다. 육체노동을 하다가 절치부심하고 우여곡절의 경험을 하다가 운 좋게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한 사람에게 노동은 이제 그만해도 되는, 아니 나 아닌 다른 사람이 해야 되는 힘겨운 싸움이라고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위험한 관념적 파편이다. 성공의 의미가 다를 수 있지만 성공했다고 육체노동을 그만해도 된다고 생각하거나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밑바닥 인생을 살면서 처절한 노동을 온몸으로 겪어내야 한다는 어설픈 주장은 지금도 힘든 노동으로 밥 먹고 사는 사람에게는 무언의 강력한 폭력으로 비칠 수 있다. 이런 어설픈 주장을 더 이상 펼치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는 모든 일이 저마다의 위치에서 바라볼 때 힘겨운 노동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해석 노동자다


내가 경험한 힘든 노동도 극히 일부분의 경험일 뿐, 더 넓고 깊은 세계에서 차원이 다른 노동으로 하루를 버티고 견뎌내며 살아가는 사람이 내가 모르는 세계에서 살아간다. David Graeber(2011)의 《Revolution in Reverse》이라는 책에 보면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과 누군가 생각하는 일을 상상하는 일은 다른 의미라고 구분해서 설명하는 주장이 나온다. 예를 들면 산업 영역에서는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이 상상력을 더 많이 발휘하는 일(가령 제품을 디자인하고 생산을 조직하는 일)을 하는데, 사회적 관계의 생산에서 불평등이 출현할 때는 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주로 상상적인 일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상상적인 일은 밑에 사람이 윗사람의 생각을 짐작하거나 눈치를 보면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면 윗사람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일이다. David Graeber는 이것을 ‘해석 노동(interpretive labor)’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하였다. 예를 들면 여성은 자신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남성 입장에서 바라볼 때 어떻게 보일 지를 항상 염두에 두지만 남성은 여성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할지를 거의 상상하지 않는다. 위에서 일하는 사람일수록 밑바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가슴으로 생각하는 측은지심이 없다. 특히 밑바닥을 기면서 고통 체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힘든 고통이 주는 아픔을 가슴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왜 그런지를 생각하는 넓이와 깊이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경험으로 겪어보지 못한 일을 피부로 느끼는 데에는 많은 한계가 따르기 마련이다. 


“바닥에 있는 자들은 꼭대기에 있는 자들의 관점을 상상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소비하며 실제로 그들에게 마음을 쓰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51쪽)” 역시 David Graeber의 《Revolution in Reverse》에 나오는 말이다. 꼭대기에 있는 사람 역시 과거에는 바닥에서 힘든 노동을 경험해볼 수도 있지만 그것도 그 당시의 노동 경험이다. 지금 하는 노동의 경험과 비슷한 맥락일 수도 있지만 전혀 다른 상황에서 이전의 노동 경험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격전의 현장일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나의 경험이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다른 사람에게 주는 보편적 처방전으로 작용하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다. 정말 중요한 것들은 내가 경험한 세상 밖에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 그 누구의 손도 닿지 않는 곳에 내가 모르는 새로운 지혜가 숨어 있다는 가정이 나를 현실에 안주하며 과거의 경험으로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지 못하게 막는 자극제다.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보다 모르고 있는 것, 알 수 없는 것을 알아내려는 도전하는 삶을 멈추지 말고 꾸준히 반복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다. 내가 의도적으로 오감을 열고 노력하지 않으면 내가 모르는 곳이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다. 내 생각은 내가 경험하고 얻은 지식이나 지혜가 숙성되어 생긴 산물이다. 나와 다른 입장과 처지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의 세계는 내가 경험하지 않고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심지어 같은 분야에서 오랫동안 파고드는 전문성의 깊이를 추구하며 남보다  앞서서 자기주장을 펼치는 사람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그런 주장을 들으며 힘든 삶을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 있다. 그들 역시 세상의 방관자나 관조자가 아니라 자기 입장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소리 없이 고뇌하며 사투를 벌이는 사람이다.



감당하는 사람은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특히 나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는 순간, 나는 그때부터 나의 편견과 선입견으로 그들의 입장을 나도 모르게 재단하기 시작한다. 적어도 내가 겪어보지 못한 모르는 세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들은 도대체 어떤 아픔을 온몸으로 겪어내며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지에 대한 깊은 관심을 넘어 애정을 갖고 그들 세계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모르는 세계가 더 많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나와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타인의 삶을 단순한 호기심으로 바라보기에는 알 수 없는 세상이 너무나 많다. 내가 모든 걸 몸소 겪어볼 수 없는 상황에서 다른 세계에서 힘겨운 사투를 벌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조용한 목소리를 귀담아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기꺼이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 나와 그들의 세계는 영원히 경계와 벽으로 둘러싸일 뿐이다. 저마다의 위치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자신이 맡은 소임을 묵묵히 감당하는 사람이 담당자다. 담당자(擔當者)는 감당(堪當)하는 사람이다. 감당은 능동적으로 움직이며 자신의 본분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수행하며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일이다. 감당은 기대 이상으로 힘든 일이 주어져도 불평불만과 안 되는 이유를 늘어놓기보다 우선 할 수 있는 데 까지 버티고 견디며 해내는 방향과 방법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안간힘이자 애쓰기다. 감당하는 사람은 자기주장을 적극적으로 펼치며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키우기보다 침묵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묵묵히 걸어간다.


능동적인 행위자로 살아가며 적극적인 역할을 펼치는 기관을 에이젼트, 즉 행위자(agent)라고 하고 수동적으로 누군가의 행위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페이션트, 즉 감수자 또는 환자(patient)라고 한다. 감수자인 환자는 자기 병을 고쳐주는 의사의 적극적인 행위(action)에 일방적으로 감당하며 견디는 수밖에 없다. 환자의 존재가치는 적극성이 아니라 수동성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삶의 대부분을 능동적인 행위자(agent)로 살아가기보다 수동적인 감수자, 즉 환자(patient)로 겪어내며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받은 교육도 수동적인 사람보다 적극적인 사람이 세상을 이끌어간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앉아서 가만히 수동적으로 생각하기보다 과감하게 결단하고 도전하면서 세상을 주도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한 시대의 흐름을 이끄는 리더가 탄생된다고 배웠다. 



인문사회과학 이론 역시 적극적으로 행위하는 능력이나 그런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행위자, 특히 인간 행위자의 능동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행위자 중심성에 지나치게 매몰됨으로써 인간의 수동성을 폄하하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해왔다. 인간이라는 개념을 떠올리면 적극적으로 자기 목적을 추구하는 합리적 존재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사회는 언제나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말없이 침묵을 지키면서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자기 본분을 다하며 안간힘을 쓰는 사람도 있다.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 힘든 일을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해 내는 사람, 도전하고 추진하며 성취를 이루는 사람도 있지만 겪어내는 사람, 감당하는 사람, 감지하고 반응하는 사람,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며 함께 아파하는 사람도 있다. 적극적으로 추진해서 성취하면 능력 있는 사람으로 취급받고, 주어진 자리에서 세파를 겪어내며 힘겹게 살아내는 사람은 무능력한 사람인가? 


능동적인 사람의 존재 가치는 수동적인 사람이 능동적인 사람의 적극적인 행위를 수용할 때 빛난다. 즉 능동성과 적극성은 수동성과 소극성이 전제될 때 비로소 그 의미와 가치가 드러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능동성은 주체고 수동성은 객체라는 이분법으로 재단해서 수동성에 비해 능동성이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능동적으로 행위하는 세계에 그들의 행동을 받아주며 자기 본분을 다하는 수동적인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주어진 위치에서 겪어내는 사람도 자기 나름의 주체성을 갖고 수동적이지만 능동적으로 살아가려고 바둥거리는 사람이다. 



세상은 치료하는 의사보다 누워서 감당하는 환자가 움직이다


의사의 적극적인 진단과 처방, 그리고 치료 행위에 환자는 수동적으로 대응하거나 반응할 수밖에 없다. 환자의 아픔을 돌보는 의사의 적극적 행위에 환자는 속수무책으로 감당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환자의 의사의 적극적 진료와 치료 행위에 반발하는 적극적 반항 행위를 통해 자신의 수동적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환자가 의사의 적극적 행위에 반응하거나 감당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반항할 경우 의사와 환자 관계는 무너지고 치료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다. 능동적인 행위자로 살아가며 보여주는 능력을 에이젼시 즉 행위능력(agency)라고 하는 반면에서 행위자에 영향을 받으며 주어진 자리에서 자기 본분을 다하는 능력을 페이션시(patiency)라고 한다. 페이션시는 에이전시의 적극적 행위가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수동적으로 버티고 견디며 겪어내는 능력이다. “페이션시와 같은 용어들의 어원은 ‘겪다’라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 ‘pati’이다. 중략. 페이션시는 따라서 겪는 상태, 지위, 조건, 그리고 겪음의 능력(감수능력)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김홍중, 2020, p.270). 이런 어원적 분석에 비추어 보면 열정을 의미하는 passion의 어원 역시 ‘고통스럽다’, ‘괴롭다’를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 ‘파세인(pathein)’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열정은 고통스럽고 괴로운 상황에서도 나에게 다가오는 온갖 시련과 역경을 견디며 겪어내는 가운데 발휘되는 모험이자 결연한 결단이다. 즉 열정은 내가 목표를 향해서 주도적으로 발휘하는 적극적인 자세와 태도를 지칭하기보다 나에게 다가오는 갖가지 위협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난국을 온몸으로 겪어내려는 안간힘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런 맥락에서 “열정은 어렵고 익숙하지 않고 괴로운 것을 자신의 본질로 수용하려는 마음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사람은 뭔가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행위를 통해 인정을 받기고 하지만 시련과 역경을 얼마나 겪어냈는지의 여부에 따라 평가받기도 한다. 삶은 적극성과 능동성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주어진 자리에 위협을 가하며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위험에 빠뜨리는 난국을 겪어내며 감당하는 능력으로도 평가받는다. 겪으며 살아가는 삶은 능동적 행위자의 지배와 통제 아래 살아가는 과정이다. 예를 들면 비행기에 몸을 싣고 해외여행을 떠난다고 가정해보자. 비행기와 비행기를 운전하는 조종사에게 우리는 철저하게 몸을 믿고 맡긴다. 비행기 안에서 주체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음식을 주면 앉은자리에서 먹어야 하고, 난기류를 만나 기체가 흔들리면 자리에 앉아 긴장 상태로 기다려야 한다. 우리 몸은 조종사의 비행에 완전히 맡긴 채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오로지 비행 여정을 감당해내야 한다. 무엇보다도 조종사와 비행기라는 행위자를 믿고 내 몸을 내맡기지 않으면 나는 국경을 넘어 해외로 갈 수 없다. 해외로 가는 동안 나는 철저하게 수동적인 환자 상태로 감당하는 수밖에 없다. 내 몸을 내맡기고 감당하는 동안은 나를 싣고 가는 비행기와 조종사를 믿어야 한다. 고도를 날아가는 비행기에 내 몸을 믿고 맡기지 않으면 나는 국경을 넘는 비행을 절대로 할 수 없다. 나의 적극적인 행위능력으로 비행기를 타고 국격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믿고 맡긴 상태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긴장감을 유지한 채 위험을 감당하는 일은 나 대신 누군가 대신해줄 수 없다. 오로지 내가 그 자리에서 적극적인 행위자가 움직이는 대로 나는 수동적으로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 철저한 수동성이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감당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생각과 행동이 바로 그 사람의 정체성을 가늠해볼 수 있다.



감당하는 사람이 주어진 일을 겪어내는 담당자다


자기주장을 적극적으로 펼칠 수 있는 행위자는 그만큼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하지만 주어진 자리에서 감당하는 비행기 승객이나 병원의 환자와 같은 감수자는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극히 제한적이며 누군가에게 의존해서 간신히 자기 몸을 가누며 일정한 시간을 버티고 견뎌내야 한다. 능동성보다 수동성이 삶의 본질인 감수자 입장에서는 자기 존재를 대체할 다른 방법이 없다. 적극적인 행위자 입장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으므로 특정 상황에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고 다른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다. 그럴 경우 내가 하려는 행동을 나 대신 누군가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다. 행위자 입장에 있을 때 보다 감수자 입장에 있을 때 극도로 자유가 제한되는 상황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선택권이 많지 않다. 오로지 내 몸으로 주어진 상황에 대응하거나 반응하면서 나의 살아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자유롭게 선택하는 행위자로 역할을 수행할 때보다 오히려 우리는 자유가 제한된 시공간에 처해서 수동적으로 감수할 때 더 격렬하게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몸부림을 친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내가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 더 격렬하게 반응해서 자기 존재를 드러내야 한다. “겪어내야 하는 것을 겪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자기가 된다”(김홍중, 2020, p.273). 겪어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견딤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대신 수행할 수 없다. 오로지 내 몸으로 주어진 난국과 형상을 버티고 견뎌내야 나의 생명성은 지속된다. 사람은 때로는 자신이 보유한 능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적극적인 행위자의 움직임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무능력이 그 사람의 존재 이유나 가치를 더욱 선명하게 설명해주는 경우가 있다.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서 내가 보여줄 수 있는 행동은 그냥 무기력하게 겪어내며 일정한 시간을 감내하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자기주장을 펼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자에 비해 감당하는 사람은 침묵하는 경우가 많다. 감당하는 사람은 한순간도 한 눈을 팔 수 없다. 언제 어디서 생각지도 못한 위협적인 사태가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갑자기 찾아오는 예측불허의 난반사가 비일비재하다. 정신을 집중하고 예의 주시하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미증유의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감당하는 사람은 불확실한 미래를 오로지 몸으로 버티고 견디면서 이겨내는 수밖에 없다. 감당하는 사람에게 침묵은 생존을 위한 필수 요건이다. 침묵하지만 무언의 우렁찬 목소리로 자기 존재 이유를 드러내는 데 몰두한다. 자기 자리에서 본분을 다하며 감당하는 사람만이 담당자가 될 수 있다. 담당자는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겪어내는 숱한 사건과 사고를 감당하며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사람이다. 


담당자가 자기 일을 감당하며 겪어낼 때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저마의 위치에서 담당자가 안간힘을 쓰면서 사투를 벌이는 것이다. 마치 학이 수면 아래서 발을 열심히 저으면서 유유자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학의 다리가 바쁘게 노를 젓듯이 발을 움직이는 일을 조용히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누군가 자기 일을 감당하지 못하면 자기 일에만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감당하는 사람의 일은 다른 위치에서 다른 걸 감당하는 사람의 일과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다. 때문에 한쪽에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면 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연쇄적으로 발생한다. 



감당하는 사람은 세월의 흔적을 축적해서 기적을 일으킨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면 비로소 감당한 사람들이 평소 자신이 감당하는 역할을 얼마나 치열하게 겪어냈는지 실감할 수 있다. 저마다의 행위자가 연결되어 다양한 상호작용을 주고받으면서 아무런 문제 없이 돌아가는 네트워크는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는 행위자가 영향력을 주고받기 때문이다. 감당하는 사람만이 감당하면서 말할 수 없는 침묵의 소중함을 안다. 왜 침묵할 수밖에 없는지 감당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감당해본 사람만이 감당하는 사람의 고통을 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기 위치에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다.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하지만 주목하지 않는 사이에 어떤 경우에는 주목할만한 문제가 터진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보이는 것이 움직이는 세계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상적이지 않은 문제 상황에 발생하면 수면 속에서 잠자고 있는 문제가 겉으로 드러난다. 이때 평소 존재감이 없던 담당자가 감당했던 몫이 비로소 겉으로 드러난다. 감당하는 담당자는 언제나 전경보다 배경에서 묵묵히 자기 소임을 다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담당자의 책임은 감당할 수 있는 한계까지 겪어내며 문제없이 주어진 상황이 안고 있는 난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자기 맡은 분야에서 감당하며 세월의 흔적을 축적하는 사람이 마침내 때가 되면 기적을 일으킨다. 감당하는 사람은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환경변화를 감지하기도 하지만 감응 체계를 작동시켜 반응하고 대응한다. 



감당하는 사람은 지루한 일상을 진지하게 반복하는 사람이다. 내가 있어야 할 곳에서 누군가에 기대지 않고 자기 힘으로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내며 자기 자리를 지켜내는 사람이 가장 책임 있는 담당자다. 이들에게는 달성해야 될 목표보다 오늘 내가 감당해야 될 역할과 책임이 중요하다. 감당하는 사람에게는 원대한 꿈이나 비전보다 지금 여기서 현실을 살아내는 인내와 끈기가 더 소중하다. 오늘 감당할 수 있는 사람만이 내일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당하는 사람은 숱한 시련과 역경을 견뎌내면서 자신을 위협하는 급박한 사태를 수습하거나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발생하는 사고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해나간다. 감당한 작은 결과들이 축적되면 아름다운 성과나 성취물로 나타난다. 역경을 뒤집어 경력으로 만든 사람들, 우여곡절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면서 자기만의 작품을 개발한 사람들, 신체적 고통을 겪어내며 땀 흘리는 노고를 아끼지 않으며 자신의 몸과 힘겨운 싸움을 해온 운동선수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고된 노동을 반복하며 반전을 꿈꾸는 노동자들 모두가 만만치 않은 어려움을 겪어내며 감당해온 담당자들이다. 주어진 자리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과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이 갖고 있는 전문성을 흔히 역량(competency)이라고 한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의 위치에서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자신이 보유한 역량만큼 감당할 수 있다. 더 어려운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이에 상응하는 역량의 개발과 축적이 필요하다. 결국 우리가 산다는 것은 감당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어제와 다르게 감당하면서 어제와 다른 역량을 축적해나가는 고된 싸움이다. 세상은 자신의 위치에서 소임을 다하며 감당하는 생명체들의 네트워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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