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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를 초대하여 괄목상대하게
발전시키는 5단계 처방전

연결과 관계를 넘어 연대를 지향하며

연결과 관계를 넘어 연대를 지향하며:

상대를 대화에 초대하여 괄목상대하게 발전시키는 5단계 방법


상대와 만나는 인간관계는 언제나 시험대다. 둘 사이의 인격이 드러나고 장점과 단점이 적나라하게 부지불식간에 표출되기도 한다. 오래된 인연이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나온 한 마디의 말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 주범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가슴보다 머리로 계산하는 이해타산이 중심 화두로 부각되기도 한다. 바닷가 둥근 자갈이 모난 돌이 만나 바닷물 덕분에 부딪히며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둥글둥글 해졌듯이 낯선 만남으로 시작된 인간관계 역시 처음부터 원만해지기 어렵다. 서로의 입장과 주장, 살아오면서 축적한 사연과 배경이 공유되고 교감되면서 이해와 오해, 관심과 무관심, 절망과 희망 사이가 좁혀진다. 오해보다는 이해, 무관심보다는 관심, 절망보다는 희망적인 이야기 비중이 늘어나면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조금씩 좁혀진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지면 욕지거리가 나오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져도 귀머거리가 된다. 나무와 나무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건강한 숲으로 발전하는 것처럼 사람과 사이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아름다운 사이로 발전하고 마침내 건강한 공동체의 연대와 유대관계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인간관계는 양면성을 유지한다. 처음 만나 응대하면서 기대하지만 반대로 적대관계로 전락할 수도 있다.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며 서로의 실수를 너그럽게 눈감아주며 관대하게 대접하다가도 갑자기 홀대와 멸대로 바뀌기도 한다. 우대하고 후대하며 상대를 치켜올려 세우지만 어느 순간 마음에 들지 않아 냉대나 하대하면서 인간관계는 급속도로 하강기류를 맞기도 한다. 무조건적 환대와 존대하는 마음으로 기쁨을 주고받던 인간관계는 조건과 목적을 전재로 접대하거나 아예 천대받는 사이로 급변할 수도 있다. 우여곡절 끝에 인간관계는 수평적으로 확산되면서 유대와 연대를 구축해나간다. 유대와 연대 속에서 공감대가 무한대로 확대되는 순간을 반복하면서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와 의미를 더불어 느끼며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행복의 터전으로 발전한다. 비무장지대처럼 어떤 상대로 함부로 쉽게 들어갈 수 없었던 인간관계는 비로소 서로가 믿고 의지하는 안전지대로 발전한다.



①인간관계 발아기: 응대(應對)나 기대(期待)와 반대(反對)나 적대(敵對)

②인간관계 성장기: 고대(苦待)나 관대(寬待)와 홀대(忽待)나 멸대(蔑待)

③인간관계 도약기: 우대(優待)나 후대(厚待)와 냉대(冷待)나 하대(下待)

④인간관계 성숙기: 환대(歡待)나 존대(尊待)와 접대(接待)와 천대(賤待)

⑤인간관계 안정기: 연대(連帶)나 유대(紐帶)가 발전하여 공감대가 무한대로 확대


인간관계 발아기응대(應對)나 기대(期待)와 반대(反對)나 적대(敵對)


계획적이든 아니면 우발적이든 우리는 하루에도 다양한 상대를 만나 대면 접촉하거나 화상으로 접속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상대가 어떤 말을 하는지 귀담아 들어보고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언어로 응대를 하다 보면 다음 반응이 기대되기도 하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반응을 목격하면서 인간관계가 순식간에 적대관계로 발전할 수도 있다. 물론 우리는 상대의 의견이나 주장에 반대할 수 있다. 여기서 반대는 주장이나 가치관에 반기를 들고 논리적 한계나 문제점을 지적하며 저항하는 방식을 일컫기도 하지만 어떤 상대의 경우 무조건 반대의견을 표시하며 감정적 반응을 보여준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대화 상대가 어떤 세대에 속하는지에 따라 대화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 대화를 통해서 의견을 주고받는 방식 상에 결정적인 차이가 날 수 있다. 같은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연관된 경험의 깊이와 넓이가 다르기 때문에 기대했던 만큼의 응대가 일어나지 않고 적대적인 감정을 보여주거나 주체 없이 반대의견을 표명할 수도 있다. 대화가 오고 가는 사이에는 언제나 무대가 마련된다. 상대와 의견을 공유하면서 공감하기 위한 장치가 바로 무대다. 


그런데 무대를 마련해주고 서로에게 신뢰를 보여주는 상대가 있는가 하면 대화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주장하며 독무대를 마련하는 사람이 있다. 대화의 무대에서는 상대 의견에 대한 반대 입장이 얼마든지 표명될 수 있다. 문제는 그 반대의견을 듣고 반응을 보여줄 때 적대적 관계로 발전할 지의 여부다. 그럴 때일수록 서로가 기대하는 이상적인 무대를 상상하며 관심과 애정으로 상대의 입장에 응대해주는 것이다. 잘잘못을 떠나 귀담아 들어주고 적절한 시기에 주어진 화제에 대해 나의 입장을 솔직하게 표현하면서 나의 주관을 드러낼 때, 독무대(獨舞臺)에서 독무(獨舞)하던 상대도 서로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무대 위에서 함께 추는 군무(群舞)로 가는 길목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모든 관계는 혼자 잘한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관계는 둘 이상이 모여서 함께 만들어가는 쌍두마차다. 반대하며 적대 관계를 맺느냐, 응대하며 기대하는 인간관계를 맺느냐의 첫 출발점은 사람을 통해서 진정으로 배워보겠다는 간절한 열망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 혼자 살아가는 고독감을 즐기면서도 함께 하면 힘들어도 견딜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야 나라는 사람도 더 사람다워진다. 사람은 저마다의 삶을 나누고 공감할 때 사람이 겪어나가는 희로애락의 양면성을 배울 수 있다. 그런 배움이 잉태되고 발아되는 인간관계가 시작될 때 인간은 비로소 관계 속의 인간으로 거듭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의 절대적인 진리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날마다가 참 좋은 날”(82쪽)이기 때문이다.



인간관계 성장기고대(苦待)나 관대(寬待)와 홀대(忽待)나 멸대(蔑待)


단순히 의견이 맞지 않아 반대하거나 가치관의 충돌이 일어나고 갈등이 표면화될수록 상대는  결사반대의 깃발을 들고 생각보다 심각한 자세와 태도로 대응한다. 상대와 독대하기를 즐기면서 가급적 자신의 주장이나 의견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생각대로 풀리지 않으면 소홀히 대접하는 홀대를 넘어 업신여기고 차갑게 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속일 수 없는 것 중에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는 감정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총은 ‘권총’이 아니라 ‘눈총’이며 세상에서 가장 멋진 길은 ‘꽃길’이 아니라 ‘눈길’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렬한 빛은 ‘햇빛’이 아니라 ‘눈빛’이며 세상에서 가장 짠 물은 ‘바닷물’이 아니라 ‘눈물’이다. ‘눈총’ 쏘지 말고 ‘눈길’을 주고 ‘눈치’ 주지 말고 자신의 가치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따뜻한 ‘눈빛’으로 마주하면 홀대나 멸대 하는 인간관계에서 관대하게 돌봐주며 상대가 고대하는 인간관계로 발전하는 놀라운 면모를 보여준다. 자세히 보면 ‘눈매’가 아름다워 찌푸렸던 ‘눈살’도 ‘익살’로 바뀌어 ‘넉살’도 늘어난다. ‘눈동자’에 걸려 있는 뜨거운 심장, 마주친 눈빛에 감염되어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순간 냉전지대에서 혹독한 추위를 견뎌왔던 상대는 바로 뜨거운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챈다. 


“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의 심장이 올라와 있다/중요한 순간이다.” 박용하 시인의 ‘심장이 올라와 있다’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고대하던 인간관계를 학수고대하게 만드는 결정적 비결에는 상대가 갖고 있는 고유한 차이를 인정해주고 포용해주는 관대한 자세다. 관용이 포용을 능가하는 이유다. 너그럽게 감싸주며 받아들이는 포용을 넘어 그 사람의 잘잘못을 지적하기보다 눈감아주면서 용서해주는 관용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고대하고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인간관계의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인간관계는 잘잘못을 가리는 심판대가 아니다. 인간관계는 다양한 생각과 느낌이 공유되며 공감되면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간으로 발전시켜 주는 안전지대다. 하지만 안전지대로서의 인간관계는 아무런 변화나 충돌이 없는 안락지대는 아니다. 오히려 인간관계가 안전해지려면 낯선 우발적 마주침을 색다른 깨우침으로 재해석하려는 쌍방 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사랑은 하나의 염증/너라는 이물질이 내 안에 침입해 통증을 유발하는 것“이라는 조연희의 《흐르는 눈물은 닦지 마라》는 책에 나오는 ‘염증’이라는 시의 일부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불법 침입하는 낯선 자극이 나를 성장시키는 염증이다. 염증이 치료되는 과정이 바로 홀대나 멸대에서 고대나 관대의 인간관계로 발전하고 성장하는 과정이다. 사람이 뭔가를 간절히 고대하고 관대하게 품을 때 이전과 다른 성장의 씨앗이 움트기 시작한다.



인간관계 도약기우대(優待)나 후대(厚待)와 냉대(冷待)나 하대(下待)


뜨거운 열기가 넘치는 열대(熱帶)나 따뜻한 정이 오고 가는 온대(溫帶), 차가운 공기만 낮은 곳으로 흐르는 냉대(冷帶)나 혹한의 추위처럼 견디기 어려운 한대(寒帶) 지역에서 오늘도 힘겨운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따뜻한 봄날을 기대하는 사람이 많다. 만나기를 고대하고 서로의 잘잘못을 지적하지 않고 포근하게 감싸주면서 용서해주는 인간관계는 이제 상대의 약점이나 단점보다 강점이나 장점을 의도적으로 발굴해서 평상시 대접했던 관계보다 더 특별하게 우대해주거나 내가 존경하는 사람으로 추대하거나 후대하는 움직임이 시작된다. 살아온 시간만큼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깊은 시름의 계곡에서 한 많은 시간의 강물을 흘려보냈을 것이다. 원대한 꿈을 꿀 여력조차 없이 하루살이에 지친 몸을 이끌고 오늘도 내일도 어제처럼 계속 사이로 깊게 파인 세월의 아픔을 온몸으로 감내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고대하고 많은 기대를 갖고 만났지만 홀대나 멸대를 받으면서 간신히 추슬러 세상 밖으로 나왔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 우연히 코드가 통하는 사람을 만나 과거의 인간관계 전쟁터에서 겪었던 모든 아픔괴 슬픈 추억을 따뜻한 온기로 희석시켜 날려버렸다. 오로지 그 사람만이 나를 우대해주고 후대해주는 착각을 할 정도로 지금껏 받아보지 못한 아낌과 돌봄의 미학으로 만남의 모든 순간이 아름답게 채색되었다. 


상처가 있어야 그것이 아물면서 상상력이 비상한다. 상처가 머금은 시름은 상상력을 꽃피우는 거름으로 작용한다. 사람을 만나면서 생긴 상처는 정성을 들이지 않고 아무렇게나 하는 대접하는 냉대를 만나거나 상대를 깔보면서 수준 이하로 평가하는 하대와 만나는 순간 상처를 아물지 않고 살갗을 파고든다.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 다른 상처가 설상가상으로 생길 때 사람은 관계 피로증후군을 넘어 인간관계 기피증까지 생길 수 있다. 이런 아픔을 치유하는 비결은 나를 한 인간으로 대접해주면서 내가 갖고 있는 고유함,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특이함을 나만의 강점으로 우대해주거나 작은 일에도 높은 성취감을 부여하면서 후대해주는 사함을 만나는 것이다. 이런 상대를 만나는 순간이 바로 인생의 등대를 만나는 길이다. 상대가 인간관계의 등불처럼 빛나면서 혼란스럽고 복잡한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등대처럼 작용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돛대 없이 갈길을 찾지 못하고 바람에 휘어지며 방황을 거듭하던 돛단배가 마침내 등대를 만나 목적지에 안착하는 것처럼 나를 특별히 우대해주거나 후대해주는 상대를 만나면 갑자기 살아갈 확실한 이유를 찾은 기분이 든다. 상대를 우대해주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한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대우해주면 우대받는 느낌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인간관계 성숙기환대(歡待)나 존대(尊待)와 접대(接待)와 천대(賤待)


체중을 실어 상대방의 말 못 할 사연에 깊이 몸으로 관여해서 함께 한다는 묵직한 신뢰감을 보여줄 때 환대와 존대는 존재의 이면을 밝혀주는 따뜻한 등불이나 다름없다. 환대는 접대를 뒤집어 순수한 마음으로 상대를 즐거운 마음으로 대접하는 갸륵한 마음이다. 대접(待接)과 접대(接待) 사이, 그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접대를 뒤집으면 대접이 되는 놀라운 현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주변에는 특정한 의도를 갖고 접대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런 조건 없이 대접하려는 사람이 있다. 접대하려는 사람은 특정한 의도나 조건을 마음속에 품고 머리로 이해타산을 따지며 상대방의 마음을 사려는 사람이 있다. 또 다른 사람은 상대방을 순수하게 막걸리 대접에 대접하듯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람을 대하는 사람이 있다. 접대받은 사람은 접대해준 사람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암묵적 합의로 맺어진 조건이 충족되면 둘 사이는 또 다른 접대로 이어진다. 접대는 자신도 모르게 빠져드는 일종의 마약이다. 한 번 먹으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치명적인 유혹의 덫이 도사리고 있다. 겉보기에는 별 다른 위험성이 없어 보이지만 접대를 받는 순간 이도 저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유혹의 늪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접대를 제공하는 사람은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성의를 표시하며 뇌물을 제공하지만 일단 접대를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태도가 돌변할 수도 있다. 접대를 받으면 우대나 후대보다 천대받기 십상이다. 일단 접대를 받으면서 받아먹은 뇌물은 사람을 맥을 못 추게 만들기 때문이다.


대접받은 사람은 대접해준 사람의 갸륵한 마음을 마음으로 느끼고 감동한다. 대접해주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는 가슴 설레는 기쁨이자 살맛을 느끼게 만드는 상대다. 감동을 주고받는 인간적 신뢰 속에서 상대를 존대하는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꽃이 핀다. 대접은 진심(眞心)이지만 접대는 사심(邪心)이다. 대접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선물(膳物)을 주지만 접대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뇌물(賂物)을 준다. 대접을 했는데도 상대가 아무런 반응을 보여주지 않거나 기대했던 수준이나 정도의 반응이 없으면 업신여기거나 함부로 대하여 천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접은 근본적으로 상대를 환대하거나 존대할 때 자신도 모르게 묻어 나오는 인간적 배려이자 감동적인 손길이다. 환대나 존대는 거대한 꿈을 꾸거나 성대한 목표를 지향하지 않는다. 사람을 사람답게 대우해주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동시에 근본적인 자세이자 태도다. 환대해주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 만나도 반가운 기분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말로만 인사하지 않고 몸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직스러운 표정에서 상대방의 환대하는 자세를 읽어낼 수 있다. 환대와 천대, 존대와 접대 사이에는 작은 차이가 살아간다. 사람을 조건 없이 기쁜 마음으로 대접하는 환대가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진정성을 결여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사람을 천대하게 된다.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접하는 존대가 사심을 품고 필요로 사람을 만날 경우 나도 모르게 목적 달성을 위한 접대로 돌변한다. 인간관계의 성숙은 성숙한 인간이 환대하고 존대하는 만남을 유지할 때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결실이다.    



인간관계 안정기연대(連帶)나 유대(紐帶)가 발전하여 공감대가 무한대로 확대


학대하고 천대하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환대하고 존대하는 인간관계가 형성되면 일생일대의 최고의 연대나 유대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공동체를 유지하는 큰 뼈대에 해당하는 원칙과 규범을 몸에 밸 수 있도록 준수하는 습관이 형성되어 있고, 특유의 고유한 문화가 개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규제하고 조율하기 시작한다. 믿음과 신뢰가 공동체의 뿌리처럼 굳건하게 자리 잡아가고 있어서 사소한 실수나 실패도 너그럽게 용서해주고 인정해주며 격려하고 위로해주는 분위기가 자리 잡는다.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질책하기보다 단점이나 잘못은 눈감아 주고 장점이나 가능성을 발굴해서 의도적으로 칭찬해주고 고무시켜 준다. 한 가지 의미가 공유되기 시작하면 공감대가 순식간에 형성되면서 의미는 확대 재생산되는 순기능을 발휘한다. 공동체 내면에 흐르는 공기가 워낙 따뜻하고 배려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어서 공감대는 무한대로 확대되는 선순환을 반복한다. 인간관계는 수직적 위계나 명령과 통제 관계에서 서로의 입장을 공유하고 다름과 차이를 인정해주는 수평적이고 호혜적인 인간관계로 성숙해나간다. 여전히 갈등과 충돌의 여지가 있지만 오히려 이런 감정적 변수가 창조적 융합으로 가는 과정을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건강한 인간관계는 문제를 일으키는 변수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이면서도 자발적인 교감이 공개적으로 일어나면서 갈등과 충돌 요인을 건설적으로 재해석하는 놀라운 시너지를 보여주는 관계다. 


요컨대 인간관계로 만나는 상대와 내가 구축할 최종 병기는 연대와 유대로 형성되는 공동체다. 연결되었지만 관계없는 사람도 많다. SNS로 인해 과다 연결된 사람이 속내를 터놓고 이야기하는 깊은 인간관 계보다 서로 눈치 보지 않고 가볍게 연결되는 느슨한 인간관계를 원하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절친한 사이가 오히려 서로의 속내를 마음껏 할 수 없도록 만드는 부담감으로 가중된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관계는 두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넘어 믿음과 신뢰로 튼실한 관계 맺음이 이루어지는 공동체가 구축될 때 비로소 연결을 넘어 관계로 발전하며 궁극적으로 유대와 연대로 발전한다. 인간관계 발아기의 응대(應對)나 기대(期待), 인간관계 성장기의 고대(苦待)나 관대(寬待), 인간관계 도약기의 우대(優待)나 후대(厚待), 인간관계 성숙기의 환대(歡待)나 존대(尊待)가 주로 1:1의 인간관계 구축에 초점을 두었다면 인간관계 안정기의 연대나 유대는 인간관계의 수직적 깊이는 물론 수평적 확산을 추구한다. 더 넓은 관계 맺음을 통해 개인과 개인의 연결과 관계를 넘어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연대나 유대관계를 추구한다. 연대나 유대는 한 사람의 외로운 노력으로 결코 이룰 수 없는 인간관계의 지향점이다. 연대나 유대가 공동체 속에서 유지되려면 함께 지켜야 할 약속과 원칙, 행동규범과 가치관을 흔들리지 않고 함께 지켜나감으로써 모두가 행복한 문화를 구축해야 한다. 문화가 구축되면 공동체 구성원의 생각과 행동을 암묵적으로 규제하고 촉진하는 사고방식과 행동규범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이 정도가 되면 연대와 유대 속에서 공감대는 무한대로 확산되면서 인식과 관심을 같이 하는 공동체는 더욱더 확산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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