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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의 언어는 절반으로,
몸의 언어는 두 배로 늘린다

시어머니가 아프면 머리가 아프고 친정 엄마가 아프면 가슴이 아프다

머리의 언어는 절반으로 줄이고 몸의 언어는 두 배로 늘린다

     


의미를 설명하는 말은 이해는 되지만 와닿지는 않는다


머리의 언어는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에 관계없이 사전에 저장된 자기 생각을 쏟아낸다. 쏟아낸 말은 당연히 소통되지 않고 막히거나 맴돈다. 예를 들면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친구야 나 어쩌지? 벌써 퇴근해서 집에 와버렸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에 관계없이 자신은 이미 집에 왔으니까 네가 무슨 문제로 전화를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너에게 지금 갈 수 없다는 변명이나 핑계다. 머리의 언어는 상대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으며 무슨 문제를 안고 있는지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일방적으로 발설하는 언어다.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왜 그렇게 하는지, 그 발언의 상황적 맥락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을 주장하는 언어는 무맥락 언어다. 당연히 소통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실망이나 원망을 사는 언어다.


머리의 언어는 겪어본 경험을 번역한 언어가 아니라 책상 지식으로 축적한 논리적 설명의 언어다. 설명이 길어지는 이유는 자신이 겪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남의 이야기에 빗대어 자기주장을 펼치기 때문이다. 머리의 언어는 상대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고려하지 않고 사전에 준비된 말을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명사적 언어다. 머리의 언어가 명사적 언어인 이유는 상황적 맥락에 맞게 상대방의 감정 상태나 주장에 맞게 대응하면서 동태적으로 변화되는 언어가 아니라 머릿속에 저장된 생각을 패키지화된 일방적 언어로 전달하기 때문이다. 주로 머리의 언어는 심장을 공략하기보다 머리를 공략하면서 이해를 촉구하는 언어다. 머리의 언어가 이해는 되지만 가슴에 와닿지 않는 이유는 내 몸을 관통하면서 체험으로 재해석된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접는 방법을 배우는 종이비행기를 공중에 날리면 원하는 방향대로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공중을 휘돌다가 고꾸라진다. 조금만 바람이 불거나 부딪히는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지 못하고 넘어지고 자빠진다. 몸을 관통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주로 머리의 언어를 갖고 있는 비행기다. 이런 비행기는 고생해 본 적이 없어서 살아가면서 직면하는 힘든 일을 견뎌낼 내공이나 내성이 없다. 산전수전 겪어본 경험이 없으면 상대를 감동시킬 체험적 공감의 언어를 만들어낼 수 없다. 가난한 사람은 자기만의 언어가 부실한 사람이다. 자기만의 언어가 부실한 사람은 어제와 다른 경험의 깊이와 넓이가 미천할 뿐만 아니라 언어 사용방식을 다르게 가져가려는 노력 또한 부족하다. 


머리의 언어는 지행일치(知行一致)를 주장한다. 지행일치는 앎과 삶, 구체적으로 말하면 알고 있는 지식과 실천하는 행동은 일치되어야 한다는데 있다. ‘행(行)’ 이전에 ‘지(知)’가 먼저라고 생각하는 선지후행(先知後行)의 입장이다. 앎은 삶과 분리 독립된 상태에서 삶 이전에 앎이 선행한다. 먼저 알지 못하면 행동하기 어렵다는 입장이 바로 ‘지행일치’를 주장하는 주자학이다. 이런 면에서 지(知)는 수단이고 행(行)은 목적이다. 즉 지는 행하기 위한 수단적 지식이다. 지행일치의 철학은 아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비난한다. 



삶의 얼룩과 무늬가 몸의 언어로 번역된다    


사람의 삶은 구겨진 종이와 같다. 구겨진 종이의 주름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생기는 주름과 다를 바 없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삶이 많이 구겨진다.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을 때 바깥의 뜻하지 않는 힘에 굴복당할 때도 있고, 멀쩡하게 걸어가던 사람이 느닷없이 나타나 장애물에 의해 넘어질 수도 있다. 우여곡절의 삶을 살다가 겹겹이 쌓이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구겨진 종이처럼 내 몸에 얼룩으로 남는다. 종이가 많이 구겨질수록 주름이 많이 생기듯, 사람도 고생을 많이 겪을수록 삶의 주름이 생긴다. 우여곡절이 많은 구겨진 종이비행기일수록 원하는 방향으로 멀리 날아간다. 똑바로 접은 비행기는 내 마음대로 날릴 수 없지만 종이를 구겨서 만든 종이비행기는 내 의지와 방향대로 멀리 날아간다. 시련과 역경을 경험하면서 나도 모르게 내 몸에 각인된 다양한 주름은 세상을 살아가는 밑거름이 된다. 


논리적 글은 두뇌로 쓸 수 있지만 진심이 담긴 글은 삶으로만 쓸 수 있다고 한다. 사회학자 노명우 교수의 말이다. 아픔이나 슬픔을 온몸으로 겪은 사람의 언어는 다가오는 톤이나 찌르는 충격이 다르다. 그냥 소름 끼치는 전율만이 감돌뿐이다. 



몸의 언어는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언어다. 주어진  맥락에서 청자가 겪고 있는 아픔이나 슬픔 상호작용하면서 당시의 감정에 조응하는 협력의 언어를 함께 만들어낸다. 몸의 언어는 상황적 맥락에 흐르는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수시로 변화되는 동태적 동사의 언어다. 몸의 언어는 화자 진심과 체중이 실린 언어라서 폐부를 찌르는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간다. 중년 이후부터는 남의 말과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살아오면서 보고 느끼고 깨달은 삶의 지혜를 나만의 언어로 번역하는 스토리텔러로 변신할 필요가 있다. 가을은 모든 나뭇잎이 꽃이 피는 제2의 봄이다. 알베르 까뮈가 남긴 말이다. 이 말을 중년의 맥락에 맞게 바꿔 쓰면 이런 문장이 탄생한다. “중년은 모든 역경이 경력이 되는 제2의 봄이다.”


머리의 언어가 지행일치를 추구하는 데 반해 몸의 언어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지향한다. 우리가 뭔가를 공부하는 목적은 앎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앎인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정도와 수준을 높이는 데 있다. 이런 지행합일의 철학은 왕양명의 《전습록 I》과 《전습록 II》에서 배운 것이다. 양명에게 앎과 삶은 별개의 독립적인 두 가지 활동이 아니라는 뜻이다. 지행일치는 말한 다음 행동하는 것이지만 지행합일은 말은 곧 행동이고 행동이 곧 말이다. 지행합일은 삶 속에서 앎이 형성되고 앎이 곧 삶이 되는 경우다. 몸의 언어는 일상적 삶 속에서 그때 그때 상황에 필요한 앎을 추구하는 지행합일의 철학으로 녹여진다.



“대중적인 요소는 느낌인 반면 항상 앎이나 이해는 아니다. 이에 반해 지식인적 요소는 앎이지만, 항상 이해는 아니며, 특히 느낌은 더더욱 아니다.......지식인의 오류는 이해나 심지어 느낌 및 열정 없이도 알 수 있다고 믿는 데 있다.”(283).

- 안토니오 그람시의 《그람시의 옥중수고 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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