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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도 누군가에게는 노동이다

을은 갑의 심리를 끊임없이 읽어내는 불편한 해석 노동에 시달린다

해석도 누군가에게는 노동이다:

을은 갑의 심리를 끊임없이 읽어내는 불편한 해석 노동에 시달린다


“사실은 없다. 해석이 있을 뿐이다.” 니체의 말이다. 객관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객관적 사실을 누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실은 별 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는 중립적 현실이 될 수도 있고 진심이 담긴 진실이 될 수도 있다. 세계는 해석자의 관점적 차이에 따라 사실을 넘어 사기가 담길 수도 있고 진실이 담긴 진리가 될 수도 있다. 모든 진리는 그래서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뜨거운 열정과 철학, 신념과 가치로 이미 오염된 편견의 산물이다. 그래서 니체는 모든 진리는 곡선으로 휘어져 있다고 했다. 진리는 직선으로 목표에 도달하는 객관적 지식의 과학적 표현이 아니라 주관적 신념의 산물이다. 동일한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누가 어떤 관점으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니체는 사실은 없고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런데 니체의 이런 주장에 정면으로 반론을 제기한 학자가 있다, 바로 수전 손택이다. 그녀는 《해석에 반대한다》는 책에서 해석에 대한 그녀의 독특한 주장을 엿볼 수 있다.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다. 아니, 그 이상이다. 해석은 지식인이 세계에 가하는 복수다. 해석한다는 것은 ‘의미’라는 그림자 세계를 세우기 위해 세계를 무력화시키고 고갈시키는 짓이다”(25쪽).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평가하지만 그런 해석은 예술작품을 창작한 예술가의 창작 의도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편집하려는 불온한 음모에 불과하다. 작품을 창작한 예술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예술작품을 자신의 이론적 신념으로 해석하는 행위는 창작자의 의도를 왜곡하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해석은 예술작품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잔인한 호전 행위”(26쪽)이거나 “해석자는 예술작품을 그 내용으로 환원시키고, 그다음에 그것을 해석함으로써 길들인다. 해석은 예술을 다루기 쉽고 안락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26쪽). 예술작품을 창작한 예술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해석자는 작품성을 자신의 입장으로 재단하고 평가하는 해석 행위를 거듭할수록 예술적 의미와 가치와는 무관하게 창작자의 의도를 왜곡하거나 희석시켜 오히려 예술작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호전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해석은 그래서 “작품에 대한 불만사항, 그래서 그것을 무언가 다른 것으로 바꿔놓고픈 희망 사항”(28쪽)이다. 


예술작품을 창작한 사람은 본래 그런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석자가 자기 주관대로 작품성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희망하는 사항을 편파적으로 주장함으로써 해석은 작품에 대해 해석자가 지니고 있는 불만사항을 전달하는 방편으로 작용한다. “우리의 임무는 예술작품에서 내용을 최대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더 이상 짜내지 않는 것이다”(34쪽). 해석을 거듭할수록 작품을 창작한 오리지널 예술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해석자의 다양한 의지가 반영됨으로써 순수한 예술작품은 본래의 색깔과 의도를 잃어버리고 해석자의 해석적 판단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정치적 입김에 수전 손택은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이다.



상상력은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꿔내는 돌파력이다


수전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는 논지와는 다르게 해석은 노동이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인류학자 데이빗 그레이버(David Graeber)다. 그는 《역순의 혁명(Revolution in Reverse)》라는 책에서 약자는 강자의 심기를 끊임없이 해석하는 노고를 치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면서 해석 노동(interpretive labor)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창안했다. 그레이버는 탄생 배경과 성장과정이 평번한 대학교수와는 색다르다. 그는 1961년 뉴욕의 유대인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뉴욕 주립대와 시카고 대학에서 공부하고 1989년부터 약 2년간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서 연구했던 경험이 그의 학문적 반경으로 깊이 관여되면서 독창적인 컬러와 스타일을 만드는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용했다. 1998년부터 예일대에서 학생을 가르친 그는 결국 2005년 1999년 세계 무역기구(WTO) 반대 시위 참석 이후 각종 시위에 참여했던 이력 때문에 해고당했다. 그를 아끼는 인류학자는 물론 예일대 학생들은 그의 해고를 부당한 처사라고 비난하면서 항명 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예일대의 해고 결정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 뒤 수많은 미국 대학에 지원했지만 모두 거부당하고 우여곡절 끝에 영국의 런던 대학교 골드스미스 칼리지와 런던 정경대학원에서 가르칠 수 있는 행운을 안았다. 그는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평범한 학자로 살았다. 하지만 학계의 엘리트주의와 비합리적 학맥 주의를 혐오하면서 학자들의 천박한 파벌 지향적 속물근성을 철저히 거부했던 비범한 인류학자이기도 했다.



상상력은 인류 문명 발전을 일으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서 경험하지 못한 색다른 가능성을 잉태하는 웅장한 출발점으로 작용했다. C.W. 밀스의 《사회학적 상상력》은 매너리즘에 빠져 틀에 박힌 시각으로 세상을 연구하려는 관념적 학자들의 타성과 관성에 일격을 가하는 통렬한 사회학자의 정문일침이 들어 있다. 관념적 논의와 책상 지식으로 물든 추상적 개념의 괴벽을 무너뜨리면서 틀에 박힌 언어적 점성을 따라 관성적으로 사용하는 기존 언어 문법을 파기하고 색다른 언어 사용으로 새로운 사유를 촉진하는 사회학적 상상력은 학자는 물론 자기 직업을 통해 지적 장인이 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심장 떨리는 감동적인 깨달음을 준 선언적 주장이었다. 《교육적 상상력》 아이즈너는 교육을 효율과 성과 중심으로 목표를 달성하는 체계적인 접근 논리로 바라보는 접근 논리의 치명적인 한계와 문제점을 비판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을 하나의 예술로 바라본다. 하나의 정답을 찾아내기 위한 효율적 기법을 개발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기계적 논리를 거부하고 예측할 수 없는 변수와 임기응변하면서 부각되는 부산물에서 예술적 가능성을 바라보는 교육적 상상력을 가슴에 품는다,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은 과학적 탐구로 밝혀내는 논리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예술성(the artistry of teaching)에 비추어 정답보다 주어진 상황에서 현명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현답이 더 호소력을 지닐 수 있다. 정해진 답을 찾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효율 복음에서 벗어나 엉뚱한 짓을 하다 우연히 만나는 마주침에서 색다른 깨우침을 얻는 예술적 교육의 상상력을 믿는다. 이런 점에서 상상력은 뜬 구름 잡는 공상이나 망상이 아니라 현실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디딤돌로 전환시켜 색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돌파력이다.



불평등한 상상력이 해석을 노동으로 탈바꿈시킨다


상상력은 사회 현상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도록 자극하는 촉발점일 뿐만 아니라 진부한 사고 틀에 갇힌 학자들의 관성에 젖은 타성을 새로운 관문으로 이끄는 가능성의 텃밭이다. 상상력은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요구하는 사색의 형벌이 아니라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전혀 다른 발상으로 이미지를 구상하는 능력이다. 문제는 누가 어떤 상황에서 상상력을 발휘하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상상력의 잉태물을 만날 수 있다. 데이빗 그레이버에 따르면 약자가 강자의 입맛에 맞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약자는 항상 강자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부단히 상상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조정(imaginative identification)하는 작업을 반복해야 한다. 


강자의 감정은 수시로 변하는 바람이나 갈대와 같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변하는지를 주도면밀하게 따져 물어가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그 상황에 최적화시키려는 몸부림을 반복해야 되는 슬픈 운명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이런 과정에서 생기는 약자의 정체성을 데이빗 그레이버는 허구적 정체성(imaginative identification)이라고 한다. 나의 주관적 의지와 열정적 입장에 따라 나의 정체성이 결정된 것이 아니라 나보다 높은 위치에 있거나 우위를 점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가변적인 정체성이 허구적 정체성이다. 허구적 정체성은 중심이 없고 근본을 알 수 없는 강자 지향적 정체성이다. 허구적 정체성을 결정하는 중심에는 내가 없고 언제나 타자가 존재한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에 따라 나의 입장을 수시로 바꿔야 하는 불안한 정체성이다. 



허구적 정체성은 자신의 입장이나 관점을 강자와의 관계 맺음 구조나 위치에 따라 자신의 존재 기반을 수시로 바꾸는 허구적 전위(轉位)(imaginative displacement)를 불러온다. 허구적 전위는 자신의 위치가 정해져 있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 변화에 따라 수시로 이동하면서 생기는 위치(位置)다. 전위는 본래 자신이 몸담고 있는 터전을 어쩔 수 없이 떠나는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하는 상황을 말한다. 약자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삶의 터전을 기반으로 창조로 연결되는 상상력을 잉태하지 못하고 늘 타자의 입장을 고려해서 맘에 들지 않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이게 되는데 데이빗 그레이버는 이를 허구적 전위라고 한 것이다. 제도화된 구조 속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약자에게는 폭력이다. 


폭력은 일상적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구조화된다. 강자와 약자의 구조화된 인간관계는 상상력도 불평등하게 만들어낸다. 구조적으로 불평등한 관계가 일방향적으로 폭력을 가하면서 상상력도 한 방향으로 기울어진다는 게 데이빗 그레이버의 주장이다. 약자는 계속해서 강자의 심기를 해석하는 노동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여자를 이해하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하다는 말의 의미도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자. 주로 남성들이 말하는 이 말은 여성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는 수수께끼라는 의미다. 반대로 여성이 남성을 이해하는 일도 참으로 곤란한 문제라는 인식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여성에게 남성은 무조건 이해해야 되는 창조물이라는 인식 이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석 노동에 시달리는 약자의 삶을 강자는 알 리가 없다


데이빗 그레이버의 다른 책, 《관료제 유토피아》에 따르면 가부장제가 지배적이었던 시기일수록 남성은 여성의 삶을 상상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 반대는 아니라고 한다. 여성은 언제나 남성의 관점에서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떻게 보일 지를 늘 상상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가부장제가 여성의 남성이 대한 상상력을 강요한 셈이다. 그것이 바로 데이빗 그레이버가 말하는 폭력(violence)이다. 가부장제 사회는 남성이 여성의 상상력을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폭력적인 관료제다. 소득이나 자원이 일방적으로 남성에게 집중되었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성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그들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해석해내는 데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쓸 수밖에 없었다. 


남녀가 적절히 섞여 있는 수업 시간에 남녀 간의 성역할을 바꿔서 생각해보는 작문 숙제를 내주었다고 가정하자. 여학생들은 남학생 입장에서 비교적 자세히 묘사하면서 구체적으로 기술하지만 남학생은 여학생 입장이 되어 생각해본 적이 없기에 별로 쓸 수 있는 이슈가 없다. 심지어 왜 자신이 여학생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되는지 그 이유를 심각하게 물어보는 경우도 발생할 수도 있다. 남녀 간에도 오랫동안 상상력이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 작용해왔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상상력은 시작부터 자유롭게 비상해야 하지만, 출발부터 한쪽이 일방적으로 상대의 위치를 상상한다면 불평등한 것이다. 남녀 간의 불평등한 관계가 상상력도 불평등하게 일어나게 만든 구조적 원인 제공자인 셈이다. 남녀 간의 인간관계처럼 불평등한 위계 구조 속에서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은 상상력을 발휘하는 상황이 습관화된 것이다. 남자들이 여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습관적으로 말하는 까닭은 그들이 여자를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의 눈치를 늘 살펴야 하는 위치(imaginative displacement)에서 원하지 않는 상상력을 발휘해야만 하는 상황을 일상처럼 살아온 것이다. 데이빗 그레이버가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상상력을 ‘해석 노동’(interpretive labor)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인간관계는 서로의 이미지를 생각하는 상상력을 교환하면서 유지되는 평등한 관계다. 약자가 강자를 일방적으로 상상하는 불평등 구조나 여자가 남자 입장에서 생각하며 자신의 말과 행동을 결정하는 해석 노동이 주를 이루는 관계는 불평등한 관계다. 불평등한 관계에는 불평등한 상상력의 구조가 관여한다. 구조적 불평등(Structural inequality) 또는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은 항상 똑같은 상상력의 일방향적 구조를 만든다. 구조적으로 낮은 곳에 위치한 사람은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오감각을 동원해 상상력을 발휘한다. 구조적 불평등은 상상력이 발휘되는 불평등 구조를 고착화시킨다. 언제나 바닥에 있는 사람이 정상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는 일방향적 상상력이 작동한다. 이런 상황에서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인 바닥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정상에 있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면서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비위 거슬리는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간과 쓸개까지 빼놓고 그들에게 잘 보이지 않으면 앞날이 불투명하고 불안감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약자는 자신의 주관과 주장을 과감하게 펼치지 못하고 항상 강자의 눈치를 먼저 본다. 자기주장을 이야기하기보다 상대가 내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먼저 상상한다. 상상력은 언제나 약자에서 강자로 향한다. 강자가 약자의 아픔을 상상하기에 강자는 너무나 바쁘고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공감에 기반한 상상력이라야 해석 노동이 해석 운동으로 뒤바뀐다


강자는 언제나 결과 중심적으로 생각한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약자는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사건과 사고의 자초지종을 강자에게 자세히 보고해도 강자는 핵심과 요점, 결론과 대안이 무엇인지에만 관심이 있다. 약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시간은 없다. 오로지 자기 시각과 관점에서 약자의 설명을 듣는다. 약자는 매 순간을 강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상상한다. 순간적인 상상력은 다음 발언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약자는 언제나 강자의 입장에 부응하는 생각과 말을 하고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상상력 노동에 시달린다. 데이빗 그레이버가 말하는 상상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imaginary)’라는 말과 다른 의미임을 알아야 한다. 흔히 상상이라는 개념은 현실에 기초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초월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구조적 불평등이 낳는 ‘상상력의 불평등’에서 말하는 ‘상상력’은 현실에서 발생하는 엄연한 사실을 기반으로 발휘되는 사고능력이다. 문제는 불평등한 상상력이라서 한쪽에서만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편향된 상상력이라는 점이다. 데이빗 그레이버의 해석 노동에 관여되는 상상력은 현실에 없는 무엇인가를 상상하는 동력이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말하는 상상력은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모습을 구상하면서 일정한 논리체계로 정리해내려는 안간힘이다. 이런 점에서 해석 노동은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는 생존 차원의 몸부림이다. 해석 노동에 관여되는 상상력은 현실성이 없는 공상이나 허상, 망상이나 몽상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숨긴 채 현실에서 살아내기 위한 위장된 생각의 변주다. 



불평등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일어나는 해석 노동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꿀 수는 없을까? 긍정적인 측면에서 해석 노동을 생각하면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내가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해석 과정으로 재인식될 수 있다. 그레이버가 지적한 해석 노동은 약자가 강자를 상상하면서 하기 싫은 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눈치 보면서 하는 노동이다. 하지만 상상력의 발동 원인을 타자가 겪고 있는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생각할 때 일어나는 공감에 둔다면 전혀 다른 상상력의 혁명이 일어난다. 상상력의 혁명은 바로 데이빗 그레이버가 자신의 책 제목 《역순의 혁명(Revolution in Reverse)》에서 시사한 것처럼 약자가 강자의 말과 행동을 눈치 보면서 생각하는 불평등한 상상력이 아니라 강자가 약자의 아픔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는 애틋한 상상력이다. 여기서 조심해야 될 것은 상상력의 촉발 원인이 연민(sympathy)이나 동정심이 아니라 공감(empathy)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공감은 동정이나 연민과 다르다. 연민이 타자의 아픔을 머리로 계산하면서 이해타산을 따지는 능력이라면 공감은 타자의 아픔을 마치 나의 아픔처럼 가슴으로 생각하면서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려는 갸륵한 측은지심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모르는 국민의 아픔을 감지한 후 밤잠을 설치면서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다양한 아이디어를 구상하며 공감했던 상상력이 한글 창제의 원동력으로 작용한 사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해석도 노동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운동으로 바뀔 수 있다

     

연민은 강자 위치에서 약자에게 보여주는 관심이지만 공감은 약자 위치에서 역지사지로 헤아려보는 연대감이다. 강자가 약자에게 보여주는 연민은 자신이 연민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불쾌함을 느낄 수 있다. 연민의 감정을 품은 상대가 티 내는 것처럼 보일 때 연민의 대상은 더욱 기분이 나빠질 수 있다. 왜냐하면 연민은 상대에 대한 마음 깊은 이해를 전제하지 않고 자기가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동정심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불평등한 상상력을 전복시키는  공감은 상대의 안타까운 입장과 처지와 나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상대에 대한 더 나은 이해에 도달하려는 애쓰기다. 데이빗 그레이버가 말하는 《역순의 혁명(Revolution in reverse)》은 결국 상상력의 불평등 구조를 뒤집어엎는 혁명이다. 약자나 여성만 강자나 남성의 눈치를 보며 그들의 생각과 말이나 행동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지속적으로 해석하는 노동에 동원되는 상상력을 뒤집어엎을 때 이전과 다른 상상력이 발동되기 시작한다. 거꾸로 강자가 약자의 입장이 되어 아픈 곳을 어루만지며 그들의 입장이 되어 헤아리는 인문학적 감수성이 발휘될 때 비로소 강자는 약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혁명이 일어난다. 상상력이 편향된 시각에서 발휘되던 구조적 불평등 관계를 청산하고 구체적인 현실을 변화시키는 상상력으로 작용할 때 해석은 노동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따뜻한 운동으로 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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