밟히기 전에
밟아야 세상을 밝힐 수 있다

자전거가 인문학을 만나 시를 짓고 에세이를 쓰며 소설을 창작하다

밟히기 전에 밟아야 세상을 밝힐 수 있다

자전거가 인문학을 만나 시를 짓고 에세이를 쓰며 소설을 창작하다


자전거는 이동수단을 넘어선다. 사람이 자전거를 타지만 자전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사람을 가고 싶은 곳으로 데려간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주체적 의지가 자전거를 타게 만드는 게 아니라 자전거가 사람을 끌어당겨 욕망을 부추긴다고 말한다. 사람이 만든 자전거지만 자전거는 이전과 다른 사람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여기저기를 오고 간다. 자전거는 사람이 타기보다 사람이 품은 상상력이 올라타기를 기대하고 고대한다. 상상력을 싣고 마음만 먹으면 어디로든 떠나는 자전거가 인문학을 만나 시를 쓰고 에세이도 편집하고 소설도 구상한다. 누군가 밟고 지나가기 전에 가장 먼저 땅을 짓밟으며 부각되는 상상력의 빛으로 자전거는 어둔 세상이 품은 애절한 사연의 집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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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자전거는 세상을 읽고 숙성시켜 토해내는 애잔한 시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삼라만상은 다 시가 자라는 텃밭이다. 시시한 것들조차 시를 잉태하고 훌쩍 지나가며 내달리는 자전거에게 침묵으로 항변한다. 모든 존재는 시시하지 않다. 사람이 시시하다고 판단을 내린 편견만 존재할 뿐이다. 바람결에 흔들리며 숱하게 구부러졌다 다시 일어난 갈대, 나무와 나무 사이로 쏜살같이 사라지는 바람의 흔적, 오로지 나를 위해 빛을 발사하는 듯 머리 위에서 밝은 대낮은 선물로 보내주는 태양, 고달픈 세상을 하직하며 아래로 흐르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며 연주하는 시냇물, 자전거보다 빨리 달아나는 자동차의 꽁무니에서 내뿜는 엔진의 아우성, 저 멀리서 힘겹게 페달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라이더의 안간힘, 시냇가에 집단으로 어울려 군무라도 추듯 바람보다 더 먼저 고개를 숙이는 키 높은 온갖 풀들, 유유자적하게 흐르는 강물에 다리를 고정시켜 다리를 건너가 만드는 다리들의 굳건함, 창공을 가르며 활공을 즐기는 새들의 향연에서 시심을 느껴본다. “시인은 See-in. 사람과 사물의 안쪽을 깊이 들여다보는 운명을 타고난, 신과 내통하는 종족들이다(175쪽)”라는 최민자의 《사이에 대하여》라는 책의 구절이 시인을 새삼 다르게 보게 만든다.


시간도 흐르고 시냇물로 흐르고 그 사이 내 몸에서 땀도 흐른다. 모든 게 흐르는 데 그 흐름을 잠시라도 붙잡아 상념이라는 생각의 양념을 치지 않으면 순식간에 휘발되어 몸에 신체성이 가미된 기억으로 각인되지 않는다. 신은 죽었다고 말한 니체의 말에 이런 말로 반역하고 싶다. 시인은 죽지 않았다고. 우리는 모두 시인으로 살아간다고. 자전거에 몸을 싣는 순간 우리는 모두 음유 시인이 될 수 있다고. 우리는 모두 삶의 CEO(詩理悟)다. CEO는 시詩를 통해 세상의 이치理를 깨닫는悟 사람이다. 시인은 ‘틀 밖’에서 물음을 던져 ‘뜻밖’의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다. 시를 통해 세상을 다르게 보고見 들으며聞 남다른 조합編으로 놀라운 ‘깨달음覺’과 ‘깨우침’을 배우고 싶은 사람, 그래서 작은 일상에서도 비상하는 감동으로 세상을 움직이고動 싶은 모든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야 되는 이유다. 대작과 걸작도 시인의 마음으로 시작(詩作)해야 시작(始作)될 수 있다는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폴란드의 여류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가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한 말, “시인은 언제나 할 일이 많습니다”라는 구절이 귓전을 때린다. 통념을 깨부수고 늘 다르게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면서 남다른 상상력으로 건져 올린 깨달음을 적확한 언어로 녹여내는 일이 정중동 속에서도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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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자전거는 한 번 빠지면 빠질 수 없어 읽어버리는 장편소설이다.


자전거는 한 편의 함축적인 시처럼 자제와 절제를 온몸에 새긴다. 자전거는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시적 상상력을 연결시켜 현실과 이상 사이를 오고 가는 장편 소설을 구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복잡하지 않고 극히 단순한 기능과 절제된 모습만으로도 걷는 인간을 속도감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자전거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자전거는 타면 탈수록 빠져드는 치명적인 유혹의 미끼다. 자전거는 한 번 올라타면 내려오기 힘들 정도로 사람을 애태우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미늘이다. 미늘은 낚시 바늘 안 쪽에서 바늘에 걸린 고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역방향으로 만든 장치다. 한 번 올라타면 자전거는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고도 꽤 먼 거리를 오랫동안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다. 장편이긴 하지만 한 번 잡으면 중간에 그만둘 수 없이 책을 송두리째 읽어버리는 경험을 해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책과 눈이 맞으면 심장이 멎을 정도로 책 속으로 뜨겁게 녹아든다. 자전거 역시 한 번 흐름을 타고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면 땅과 바퀴가 쉬지 않고 입맞춤을 하면서 뜨겁게 사랑하는 장편의 연애소설의 주인공이다. 불꽃이 타오를 대로 활짝 피어 이글거리며 벌겋게 달아오른 숯불이나 장작개비의 불덩어리를 ‘불잉걸’ 또는 ‘잉걸불’이라고 한다. 자전거로 최고 시속 40Km를 내본 적이 있다. 순간적으로 힘을 집중시켜 폭발적으로 페달을 밟지 않으면 낼 수 없는 속도다. 그렇게 짧은 속도를 극대화시킨 심장은 심박수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가슴이 터질 정도로 박동을 반복한다. 심장은 뜀박질을 서서히 줄이며 끌어올린 열기는 식어가지만 여전히 호흡은 고르지 못하고 숨 가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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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타기는 격렬한 전투 끝에 찾아오는 몽롱한 오르가슴이다. 자전거 위에서 라이더는 소설가로 변신한다. 자신의 체험을 근간으로 상상력을 발동하되 이상을 향해 스토리를 구상한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스토리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급물살을 타기도 한다. 정점에 올랐다가도 순식간에 곤두박질치며 밑바닥으로 하강하는 절정을 지나 결말을 맺기까지 자전거는 여기서 저기로 끝없이 이동한다. 하지만 언제나 뜨거운 연애 소살만 쓰지 않는다. 일생동안 뜨겁게 타지는 못하고 늘 꺼지지 않고 근근이 불씨를 살려보려는 안간힘이 자전거 타고 가는 몸 구석구석에서 새록새록 피어난다. 자전거에는 타다 남은 열정의 재들이 불완전 연소된 채 얼룩으로 남아 있고, 겁 없이 낯선 길을 가다 길을 잃은 황당함의 족적도 새겨져 있다. 자전거는 내가 살아온 삶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장편의 서사시이자 파란만장한 역사를 담고 있는 일대기를 쓰기도 한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들 뿐”이라고 니체도 말하지 않았던가. 자전거에 실린 몸이 과거를 끌어다 힘겨운 현재와 뒤섞으면서 꿈의 미래를 상상하는 통사(痛史)의 촉매제가 된다.


③자전거는 평범한 일상에서 비상한 상상력으로 날아가는 질펀한 에세이다.


시적 단상이 이어지면서 연상작용이 일어나면 짧은 글감이 영감으로 떠오른다. 영감님은 어떤 예보관도 알아맞힐 수 없을 정도로 아무 때나 갑자기 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왔다가 잠시 앉아 있지도 않고 금방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서 왔다간 흔적도 찾을 수 없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저물어가는 가을날의 노을과 함께 춤을 추며 다가온다. 가을은 그렇게 칼 베듯이 왔다가 여름날의 열기가 식기도 전에 겨울로 향하는 길목에서 몸을 떨고 있다. 뜨거워진 몸도 식힐 겸 자전거를 길목에 세워두고 하염없이 앉아서 하늘 끝과 맞닿은 노을에 담긴 하루 동안의 치열함을 아로새겨본다. 고즈넉함이 적막함으로 바뀌는 사이에서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마냥 길게만 느껴졌던 해도 눈에 띄게 짧아지면서 서쪽 능선 너머로 자취를 감출 즈음, 어제가 담긴 오늘을 내일로 향하는 어둠의 열차에 맡겨본다. 그 사이 한강물은 쉬지 않고 흐르면서 흔적도 남겨놓지 않는다. 어둠이 짙게 깔리면서 강물은 가로등 불이 밝혀주는 빛을 벗 삼아 자신의 출처도 밝히지 않은 채 아래로 유유자적 흘러간다.


자전거는 이렇게 시를 실어 나르는 야간열차이기도 하지만 짧은 단상이 다른 단상과 만나 이연연상으로 이어지는 상상력으로 하늘과 땅을 오가는 일상에서 비상하는 비행기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비행기는 이륙은 하지 않고 활주로 위에서만 비상할 준비를 온 힘을 다해 버둥거리는 비행기다. 자전거는 일상에서 건져 올린 싱싱한 상상력을 원료로 입맛 당기는 각종 요리를 전해주는 지식 요리 배달부다. 자전거에 몸을 싣는 순간 간헐적으로 다가오던 단상들이 긴 행렬로 이어지면서 연상된다. 단상과 단상이 끊어지지 않고 연상되기 위해서는 생각의 갈고리로 연결하려는 끈질김과 집요함이 있어야 한다. 생각의 갈고리는 철저하게 자신이 몸으로 겪은 체험적 통찰이나 각성을 담고 있는 단호한 의지나 돌파력이다. 그것 없이는 단상은 단편적 파편으로 전락하고 상상도 날개를 펴고 비상하지 못하고 공상이나 허상, 망상이나 몽상으로 곤두박질친다. 하찮은 것,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는 단상들이 집요함을 만나야 심금을 울리는 창작으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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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자전거는 살아있음의 저력을 보여주는 야멸찬 존재의 궤적이다.


결과보다는 자전거 타는 과정에 몰두하고 도취함으로써 내가 살아있다는 경이로운 기적을 매 순간 자전거 위에서 증명한다. 온몸으로 글을 써야 글 속에 몸이 사투하며 남긴 생각의 흔적이 배인다. 내가 자전거를 타는 이유는 몸으로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아니 험난한 세상이 나를 심난하게 할지라도 나는 두 발로 걸어갈 것이며 그렇게 극복한 난국에서 얻은 깨달음을 연료 삼아 다음 자전거 타기로 이어갈 것이다. 온몸으로 자전거를 타고 나가는 길만큼 나는 그 길 위에서 내가 살아가고 살아내야 하는 이유를 끊임없이 물을 것이다. 가장 뜨거운 태양볕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타는 목마름을 참고 견디다 갯벌에 새하얀 왕소금 밭을 일구듯, 가장 힘겹게 밟아낸 페달의 강도와 상처 난 자국만큼 근육의 강도도 높아지고 앞으로 나가는 동력은 가열차 질 것이다. 거미는 있는 구조물을 이용해 거미줄을 치고 그 안에서 자기 존재 이유를 드러낸다. 거미는 스스로 구조물을 만들지는 않는다. 남이 만든 조건을 자기 존재 증명을 위해 활용할 뿐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인간이란 존재는 자연을 파괴하거나 환경을 오염시키는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매 순간 안간힘을 쓴다. 자전거는 자전거를 타는 인간을 활용하여 자기 존재를 증명한다. 인간은 자전거를 타면서 움직임의 본능을 자극하고 그 위해서 살아가는 의미를 반추하는 전기를 마련하려고 한다. 자전거는 저마다의 위치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는 존재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중개자다. 자전거를 타면서 만나는 모든 존재는 자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낮은 곳에서 좌절했던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 소리 없이 전달한다. 자전거는 자신의 본능을 노골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절제된 관능으로 기능을 넘어 예능을 추구한다. 힘겹게 언덕을 오르는 자전거 타는 모습은 육중한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한반탕 결투를 벌이는 관능적인 몸짓 그 이상으로 보인다. 자전거와 혼연일체가 된 라이더의 힘겨운 싸움을 차마 눈뜨고 혼자 감상하기 아까운 예술적 작품으로 읽히는 이유다.


⑤자전거는 너라는 이물질이 침입해 통증을 유발하는 궤양이다


“내 심장을 막아주소서, 그러면 나의 뇌가 고통칠 것입니다. 내 뇌에 불을 지르면, 나는 당신을 피를 실어 나르겠습니다“로 끝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내 눈의 빛을 꺼주소서〉는 릴케가 스물 두 살 때 열 네 살 연상의 여인, 루 살로메를 열렬히 살랑하면서 바친 연시다. 격정적인 사랑으로 나눈 것도 잠시 결국 각자 다른 사랑의 길로 접어든 사연을 읽노라면 차라리 사랑은 운명의 장난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인은 자신이 원하는 사랑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수록 시심은 더 깊어지고 삶에 대한 관조는 깊은 성찰로 이어지고 삶은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파격적인 절정으로 가다가 어느 순간 돌연 세상과 이별하면서 깊은 여운과 애잔한 비의(悲意)를 남긴다. 자전거 역시 그랬다. 어느 날 자전거가 매혹적인 자태를 품고 나에게 몸을 던졌다. 그때의 자극이 바로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푼크툼’처럼 강렬한 상처 하나 남겼다. 푼크툼은 나의 의지와 관계 없이 갑자기 내 뇌리속을 파고 들어 깊은 상처를 남기는 자극을 말한다.


“사랑은 하나의 염증/너라는 이물질이/내 안에 침입해/통증을 유발하는 것/미열처럼 너는/궤양처럼/너는.” 조원희 시인의 ‘염증’이라는 시다. 이 시의 ‘사랑’이라는 말 대신에 ‘자전거’를 대입해도 그대로 와닿는다. “자전거는 하나의 염증/자전거라는 이물질이/내 안에 침입해/통증을 유발하는 것/미열처럼 자전거는/궤양처럼/자전거는.” 멀리서 바라보던 자전거는 내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운동 수단은 아니었다. 그저 한때 어쩔 수 없이 타고 다녔던 이동 수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전거는 ‘궁금증’의 막연한 대상이 아니라 자전거만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는 ‘불면증’의 장본인으로 돌변한다. 나에게 자전거는 ‘애증’의 관계를 넘어서서 어떤 상황에서도 ‘싫증’이나 ‘짜증’을 낼 수 없다. 나에게 자전거는 내가 살아가는 삶을 입증해주고 갈망하는 삶을 내 곁으로 데리고 와서 그간의 삶을 몸으로 ‘증명’해주는 ‘간증’이다.


⑥자전거는 그리움을 달래주며 어루만져주는 그윽한 배웅이다.


살다 보면 언젠가 겪었을 과거의 경험이 기억의 오지에서 돌아오지 않고 맴도는 경우가 있다. 그리움이 기억의 오지에 머물다 느닷없이 날아와 잠자던 그리움의 체세포를 건드려 놓는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언젠가 만난 적이 있지만 다시는 보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내 몸 어딘가에 보이지 않게 숨어서 함께 만난 그날의 추억을 떠올려보지만 다시는 반복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앞을 가릴 때 그리움은 서글픔을 친구로 데려온다. 그리움은 기다림 속에서 숙성되어 이루지 못한 꿈을 향해 발버둥을 치기도 한다. 가슴팍에 품었던 꿈을 꾸기도 전에 산산조각 깨지며 안타까움의 파편이 몸 구석구석에 박혀버리면 그리움은 뼛속을 타고 여기저기로 흐른다. 그리움은 외로움을 먹고 나면 더욱 간절하게 울부짖지만 소리 없이 나뒹굴 뿐이다. 그리움의 공략 대상은 가슴이다. 그리움의 잔향이 바람을 타고 흐르다 움푹 파인 가슴에 닿는 순간, 그리움은 폭군으로 변신해서 가슴을 후벼 파고 철렁이는 파도처럼 가슴 한편에 서걱거리는 아쉬움으로 깊은 상혼을 남긴다.


자전거는 나를 자꾸 그리움이 기다리는 역으로 데려다준다. 가보지 않았을 때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 기억의 아오지에 버려져 있다가도 자전거가 내 몸을 특정한 장소로 옮겨가는 순간,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은 그리움의 종이에 감싼 채 달리는 자전거 위로 달려든다. 가빠지는 날숨과 들숨 사이를 비집고 다니면서 그리움은 마스크로 입을 막는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그리움은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다가와 자전거가 달리는 속도보다 더 빨리 내 몸속을 파고들며 다시 스며든다. 자전거는 그리움을 잉태하고 출산해서 키우다가 어느 순간 떠나보내며 배웅해주는 그윽한 임신실이다. 자전거에 몸을 싣는 순간 기억창고에 숨죽이고 기다리던 그리움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지면서 저마다의 사연을 그림으로 보여준다. 내가 그리워하는 만큼 그리워할 수 있으며, 그림으로 그려낸 그리움만큼 내 곁으로 다가와 목마른 그리움이 갈증을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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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자전거는 스며드는 고통을 바람에 날려 보내는 돌연한 반전이다.


인생은 반전의 연속이다. 무너질 거 같다가도 어디서 힘이 솟았는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사기 덕분에 다시 살아내는 재미를 만끽하기도 한다. 강의 하구에서 바다가 시작되듯,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또 다른 출발점일 뿐, 영원한 끝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내가 다시 시작하는 그 순간과 지점이 언제나 새로운 출발점이다. 오늘의 끝에서 밤을 맞이하고 그 밤의 끝에 찾아오는 새벽과 함께 또다시 의도하는 방향과 목적지로 움직인다. 자전거 타는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이딩 도중에 어쩌다 만나는 사람과 잠깐이라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거기서 거기는 거시기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사연을 머금고 살아간다.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13쪽). 김훈의 《내가 읽은 책과 세상》에 나오는 첫 문장이다. 나는 자전거를 타면서 이 문장을 반전시켜 바꿔 써 봤다. “내일이 새로울 수 있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설레는 긴장감이다.”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신은 ‘새로울 수 있으리라’는 확신으로 반전되었고, ‘난감’이라는 예감은 ‘설레는 긴장감’으로 돌연 변신해버렸다.


괴로운 현실을 머리에 이고 자전거를 타고 가지만 그 현실은 어느새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아 나의 과거를 아롱지게 만드는 반전을 이뤘다. 왼발이 앞으로 밟은 페달만큼 오른발이 무임승차하지만 반대로 이번에는 오른발이 힘들인 만큼 왼발은 무임승차의 혜택을 받는다. 왼발과 오른발의 무한궤도 속에서 자전거 타고 가는 라이더는 인생역전을 꿈꾼다. 상체는 자전거와 한 몸이 되기 위해 유선형으로 날렵한 자세를 취하고 다리는 쉴 새 없이 돌아간다. 한가하게 앉아있는 상체는 바쁘게 움직이는 두 다리 덕분에 주변의 경관을 만끽하고 있다. 또 다른 반전을 준비하기 위해 호시탐탐 역전의 찬스를 노리며, 자전거 인생은 오늘도 굴러간다. 자전거에 길들여진 내 몸이 아니라 내 몸으로 다가와 길들여진 자전거도 반전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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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자전거는 이곳저곳에서 소리 없이 주고받는 은근한 속삭임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보면 연득없이 떠오르는 상념들이 머릿속을 관통하며 춤을 추는 경우를 만난다. 자전거는 삼라만상이 들려주는 속삭임을 이동하며 듣게 만들어주는 소리 연락소 같다. 속삭임은 속 썩은 사람들의 귓속말이다. 저마다의 아픔과 슬픔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면서 삶의 얼룩이 무늬로 교직 된다. 씨줄과 날줄 사이,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 쉼표와 마침표 사이,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오늘도 저마다의 다른 하루를 보낸 노곤함이 속삭인다. 속삭임은 모든 존재가 자신이 살아있음을 세상에 알리며 속마음을 드러내는 조용한 외침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만나는 생명체든 비 생명체든 저마다 이야기하고 싶은 화두를 붙잡고 자기 목소리를 크게 하여 아우성을 치지만 서로가 서로가 듣지 못할 뿐이다. 귀를 기울여 그 속삭임을 듣는 순간 세상은 존재들이 저마다의 위치에서 벌이는 생존경쟁을 넘어 살아내려는 아름다운 축제다. 바람과 햇살이 속삭이고, 나무와 풀이 속삭이며, 바퀴와 땅이 만나면서 속삭인다. 속삭임을 통해 우리는 내면의 울분을 토해내고 갈급함이 저급함으로 전락하지 못하게 발악을 하지만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하게 외쳐댄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그 자체로 기적을 속삭이고 생명체와 더불어 지구를 지키는 사물이나 도구들 역시 자기 존재 증명을 위해 저마다의 목소리로 속삭인다. 모든 존재는 서성거리며 갈 길을 찾느냐고 묵언 기도를 올리는 중이다. 달리던 자전거를 멈춰 세우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묵언 기도를 듣는다. 나를 여기까지 옮겨준 자전거는 지금 어떤 묵언 기도를 올리고 있을까. 제발 그만 자신을 괴롭혀달라고 나에게 간절히 애원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보다 더 멋진 곳으로 자신을 데리고 가달라고 갈급하게 요구하는 것일까. 속삭임의 향연 속에는 세상의 비밀이 넘나들고 있다. 무엇보다도 모든 존재들의 속삭임에는 누구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는 애절한 사연이 녹아들어 있다. 오늘따라 애절한 속삭임은 기쁨보다 슬픔을 머금고 미세 먼지를 타고 나에게 굉음처럼 다가온다. 귀를 활짝 열고 받아들인 속삭임에 그동안 애쓰며 속 썩은 아픔이 단팥처럼 옹골차게 뭉개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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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자전거는 포기와 끈기 사이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은밀한 결탁이다.


자전거는 땀으로 세상과 맞짱 뜨는 잔혹한 투쟁이지만 잔잔한 감동을 보답하는 내 삶의 반려자다. 오만가지 생각이 떠오르다가도 다시 원점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를 정도로 느닷없이 머릿속을 헤매던 상념의 무리들은 한 두 가지 고민으로 요약해놓고 상상 속으로 사라진다. 상념이 상심해서 몰래 낳고 간 자식이 일념(一念)이다. 자전거를 앞으로 나가게 하는 힘을 쓰지 않으면 힘 없이 무너진다. 이 생각은 어느새 통념으로 굳어져 깊게 뿌리를 내리고 언제나 출발선상에서 힘껏 페달을 밟는다. 좌절과 절망보다 묵묵하게 밀고 나가지 않으면 자전거는 중심을 잃고 쓰러진다. 움직이는 순간만 자전거는 지구의 자전을 따라 움직일 수 있다. 어젯밤 뒤척이며 선잠을 자면서 고민했던 골머리 아픈 화두들, 그 속에 담긴 눈물과 회한, 한숨과 통탄의 절규가 힘들어도 힘을 들어가게 만드는 에너지원이다. 새벽도 어두운 밤이 사투 끝에 맞이하는 희소식이듯, 지구 상의 모든 일은 저마다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다 마침내 맞이하는 끝의 환희다. 나와 자전거 사이에서 교감하는 무수한 감정의 희비쌍곡선이 엎치락뒤치락 힘겨움을 뒤섞으며 근근이 버텨나간다.


자전거와 내 몸의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결합이 바퀴를 땅 위에서 굴리며 땀을 쏟아낸다. 그때 흐르는 땀방울은 지방과 탄수화물을 태우며 일으킨 화학반응의 부산물일까. 저기까지만 가면 된다는 안도의 한숨은 어느새 거기까지 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길 뿐이다. 그 끝에서 나는 또 다른 끝을 향해 줄달음쳐야 가까스로 오늘의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으리라.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다 힘에 붙이는 언덕을 오를 때면 페달 밟기를 그만두고 차라리 지나가는 자전거 바퀴에 밟히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 오죽하면 그런 생각을 할까마는 포기하라는 뇌의 끊임없는 명령에 몸은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라는 끈기를 데리고 나타난다. 포기와 끈기 사이에서 자전거는 목적지를 향해 꾸역꾸역 나아간다. 오늘도 포기는 끈기와 은밀하게 결탁하고 결연한 마음으로 결행을 거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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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자전거는 숨이 차도 숨넘어가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혹독한 스승이다.


자전거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가혹하고 무자비한 담금질이다. 자전거는 한두 번에 기적을 일으킬 수 없고, 한 순간에 경지에 이를 수 없음을 오랫동안 혹독한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게 만들며 깨닫게 해 준다. 자전거는 높은 곳에 오르기 전에 자세를 낮추고 그곳에서 절망을 희망을 바꾸라고 가르친다. 자전거는 마른 목에 마시는 한 모금의 물이 소중함을 깨닫게 해 주고, 흘리는 땀방울이 바람에 식을 때 느끼는 노동의 대가를 몸으로 가르쳐준다. 자전거는 자동차로는 갈 수 없지만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알게 해 주었으며, 낯선 속으로 데려가는 정도만큼 깨우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자전거는 힘든 오르막의 고통을 내리막의 즐거움으로 희석시켜 주었으며, 앉아서는 느낄 수 없는 맑아지는 머리가 노동한 몸의 대가임을 깨닫게 해 주었다. 자전거는 내가 움직인 만큼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프레임도 바꿀 수 있음을 알려준 소중한 스승이다. 자전거는 결핍과 결여에서 창작의 불씨로 불길을 만드는 열정을 달궈줬으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한계에 도전하도록 부추기는 불쏘시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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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는 가장 치열하게 움직여서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심박수를 최대로 끌어올리는 스릴을 맛보게 해 주며 신체성으로 정체성은 물론 미래 가능성까지 알려주는 코치이기도 하다. 자전거는 언제나 속도보다 방향이 소중함으로 깨우쳐주었으며, 가속보다 멈춤이 행복한 인생을 사는 소중한 밑거름이 될 수 있음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자전거는 우연한 기회에 만났던 사물들의 사연이야말로 그들의 존재감을 제대로 이해하는 본질임을 각성하게 만들어주었다. 자전거는 떠남이 만남이라는 여행의 진면목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었으며, 진정한 여행은 떠남에 있지 않고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옴에 있음을 새삼 느끼게 해 주었다. 이 정도면 됐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자전거는 매몰차게 몰아붙이며 다음 격전을 준비하라고 전두엽에 불이 켜지도록 세차게 내리치는 죽비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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